┌──────────────────────────┐ * 출 처 : 슈퍼 주니어 팬픽 『SUFIC』 http://cafe.daum.net/SuperJuniorapan * 제 목 : [강특/심신] 최강동아리 SJ * 작 가 : 마요네즈 * E-mail : mayo_hee@naver.com * 등록일 : 2009 년 12 월 12일 └──────────────────────────┘ * 이 소설은 소장용으로 간직하시길 권장하며, 그 외의 가공이나 변형은 원하지 않습니다. * 원본 파일에 이상이 있을 시, 작가에게 메일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 blog.naver.com/mayo_hee Mayonnaise's BED (마요네즈의 팬픽 블로그 입니다) -------------------------------------------------------- < 최강동아리 SJ > The Strongest Club SJ by.마요네즈 00.프롤로그 전세계 어디에서나 권력이 모두를 지배한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대한민국은 더더욱.권력이 곧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게 바로 이 사회인 것이다. '권력'이라고 하면 흔히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세력들을 떠올려 어렵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결코 그것만이 권력은 아니다. 쉬운 예로, 학교 내 아니 유치원 내에서만 봐도, 힘 있는 아이가 다른 아이들의 간식을 강탈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며, 힘 있는 아이의 뒤로 따르는 아이들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현상으로 인정하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현상들에 대해 아무런 의구심조차 갖지 않는다. 힘 있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힘은 물리적인 힘(力) 만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그랬던가-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현대사회에서 힘만 센 것은 권력자가 되는 지름길이 아니라, 패배자, 낙오자가 되는 지름길인 것이다. 머리가 좋으면 몸이 편하다. 고로 머리 좋은자가 곧 권력의 핵이다. 권력을 가지고 싶은자, SJ의 문을 두드려라. 꽃피는 춘삼월- 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춥기만한 꽃샘의 나날들. 그러나 신입생들에게는 이미 완연한 봄이었다. 12년간의 전투를 마치고 그들은 드디어 대학이라는 곳에 입성할 수 있었으니- 그 감격과 기쁨을 말 해 무엇하랴. 게다가 지금 이곳은 대한민국 상위 1% 브레인들의 결집소라 불리우는 한국대학교 앞. '로보트'라 칭해지는 한국대 학생들이지만, 그들도 엄연히 평범한 대학생들이었다. 한국대 앞 술집, 고깃집은 각 과별로 신입생 환영회를 실시하느라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희철 선배-" "어 려욱아..너희과도 여기서 하나봐?" 그리고 바로 이 남자. 한국대학교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한국대 문이사예체(인문대,이과대,사회대,예대,체대)를 통틀어 꼭대기에 군림해 있는, 그 이름도 유명한 일본어과 김희철. "네에- 시간 있으시면 좀 앉았다 가세요~" "하하..여긴 네가 있으니까 됐다. 난 쭈-욱 돌아봐야지." "아...벌써...찾아보시게요?" "벌써라니? 내가 그거 아니면 여기 왜 나왔겠냐. 큭큭. 잘 놀고 너희과....니가 신경써서 잘 봐봐. 알았지?" "네~ 걱정 마세요." 실음과(실용음악과) 김려욱과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던 희철은 이내 술집 안을 비잉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디보자...일단 요 안에 있는 것들이....실음과...전자과...경영...경제...일어...불어...식영... . 희철은 매와 같은 눈빛으로 각 테이블에 앉아 있는 새로운 얼굴들을 찬찬히 훑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은 다소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일종의 '오디션'과 같은 것이다. 권력의 핵 김희철, 그가 한국대의 실세로 떠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SJ'의 리더이기 때문이다. SJ. 그것은 한국대학교 동아리계의 최강자라 불리는 드림팀이다. 모든 학생들이 입부하기를 원하는 꿈의 동아리이자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명목상 밴드부로 분류되어지는 SJ가 권력의 핵으로 중심하는 이유는, 바로 모든 족보와 레포트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문이사예체 그 모든 레포트와 족보를 보유하고 있는, 없으면 만들어 내는, 게다가 그 만들어낸 결과물이 A++++를 보장해주는 SJ의 방대한 자료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 모든 자료는 온리 캐쉬, 현찰로 그 자리에서 즉시 거래된다. 그렇다, 권력과 재력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니던가. 괜히 정경유착 이라는 말이 나온게 아니다. 그러기에 학생들은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학점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지갑을 포기할 것인가. "심바야." "어, 형...결국 나왔네? 귀찮다면서요." "엉..존내 귀찮아. 그러니까 너네과는 니가 알아서 잘 봐둬." "걱정 말아요. 우리과는 이미 두명 찍어뒀는데 뭐." "두 놈이나? 호오..이번에 전자과 괜찮은 놈들 좀 들어왔나 보다?" "큭큭. 몰라요? 이번에 전체수석이 우리과 들어왔잖아~ 조규현이라고 있어요." 희철이 '심바'라고 지칭한 남자는 SJ의 수장 김희철의 오른팔이자 그의 공식 머슴, 전자과 최시원이다. 이미 한국대 내 유명한 C.C로, 남남(男男)커플임에도 불구하고 캠퍼스 이곳저곳에서 애정행각을 벌여 교수님들도 인정한다는 한국대 제 1의 공식 게이커플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원은 전자과 2학년으로, 일명 '이과대 킹카' 혹은 '젠틀맨' 으로 불리워진다. 그러나 시원의 측근들 혹은 SJ 회원들은 그를 '두 얼굴의 사나이' 라고 부른다. 괜히 희철이 시원에게 '심바'라는 애칭을 붙인 것이 아니었다. 사자새끼, 말 그대로 짐승이다. 표면적으로는 김희철의 농노로써 생활하고 있지만, 은근히 실속 챙기면서 사는 지능적 머슴(물론 남들이 보기엔 처절하기 이를 데가 없지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막장 김희철을 움직일 수 있는 지구 유일의 사나이. "아참, 이번에 동해 우리 학교 왔다 하지 않았어요?" "어, 식영과. 이모 따라서 가려나보지 뭐. 그 녀석 혓바닥 하나는 남다르니까." "하긴. 그러고보니 이혁재놈도 우리 학교 들어왔다던데.." "엑?! 그 새끼는 신라대 가는거 아니었냐? 대학야구 명문은 신라대. 신라대 하면 야구...아냐?" 동해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혁재 이야기까지 넘어왔다. 동해는 희철의 사촌동생으로, 고급 요정(料亭)의 여주인인 어머니를 따라 요리 쪽으로 맘을 잡은건지 올해 한국대 식품영양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의 단짝이자 떠오르는 야구계의 샛별, 고교 야구계의 이승엽으로 불리우는 혁재 역시, 무슨 영문인지 야구 명문 신라대의 러브콜을 거부하고 한국대에 입학을 했다. 레벨로만 따지면 신라대 보다는 단연 한국대가 높았지만, 한국대 야구팀은 최강팀은 아니었다. 이혁재 그새끼 그거 웃기는 자식일세. 지가 공부를 할 리도 없는데, 어차피 야구로 먹고 살 거면 신라대 가야 하는거 아냐? 희철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글쎄 뭐 나도 이유는 모르겠고...한 달 전인가? 슈퍼 가다가 만났는데, 나 형네 학교 가요~ 이러잖아." "헤에...알 수 없는 놈. 아 뭐 그건 그렇고, 무튼 잘 봐두라고. 난 일단 우리과 가봐야지." "알았어요. 이따가 환영회 끝나고 잠깐 볼까?" "흐음- 그럴 정신이나 있을까 모르겠는데. 이따 봐서. 전화해~" "응.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님이나 잘하셈!" 뭔가 아쉽다는 듯 저를 놓아주지 않는 시원의 손을 뿌리치고, 희철은 저쪽 구석에서 테이블 세팅을 하고 있는 정수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박노인~ 노동중이신가~" "노인이라니!! 김희철 내가 너 다섯시까지 오라고 했어 안했어!!" "어허 이거 왜 이래? 나 2학년이다? 조교님 무서워열~" "....희철아 나 토할거 같애..." "씨발...알았다고! 아니 근데 이놈 자식들은 다 어딜 간거야!! 왜 조교가 이런걸 하고 있어?" 일본어과 조교 박정수와, 일본어과 2학년 김희철은 무려 입학 동기다. 참고로 이 둘은 현재 나이 27세. 희철은 무려 6년간의 공백을 깨고 올해 2학년으로 복학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6년 동안 한국대를 쥐락 펴락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휴학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휴학만 했지 동방에는 꼬박꼬박 출석체크를 했으니, 희철이 휴학생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반면, 비정상적인 대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희철과는 달리, 정수는 매우 정석적으로 학교를 다녀 졸업은 물론이고 조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입학당시부터 일찌감치 청년실업 50만을 돌파할 방법을 모색하던 정수는 타고난 박쥐근성과 입담으로 교수님들에게 싸바싸바스킬로 어택, 결국 무수한 경쟁을 뚫고 조교 자리를 GET할 수 있었다. "그러게 말이야...하아...일본어과 애들은 다 김희철 같다고 그러는게 진짠가..." "...씨발 어떤 개새끼가 그딴 개소리를 흘리고 다녀!! 내가 어디가 어때서!!" "아니이~ 난 그냥 저번에 성민이가..." "이성민? 내 이노무 애새끼를!!!"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친절한 말투, 깍듯한 성격으로 교수들에게 그리고 학생들에게 인기 만점인 정수였지만, 괜히 김희철 친구가 아니었다. 정수의 측근들 그리고 SJ 회원들은 그를 '이간질의 대명사' 라고 부른다. 정수의 세 치 혀에 놀아난줄도 모르고 희철은 이성민 이노무 색휘를 단호박과 함께 삶아버리겠다며 유아교육과 테이블을 향해 돌진했다. 가만히 수저 놓고 있던 성민은 갑자기 들이대 오는 희철 때문에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숟가락 젓가락을 바닥에 뿌려버리고 말았다. "희...희철 선배..왜 그래염?" "왜 그래염? 이런 난닝구삶아찢어먹는 새끼를 봤나....몰라서 물어?" "몰라요!! 그리고 난닝구가 아니라 런닝셔츠!! 글구 그건 못먹는거!!" "아쭈 대들어? 난 일본어과니까 난닝구라고 해도 돼 이놈 새끼야!! 너 이리와, 형 한테 엉덩이좀 맞자!!" "으악!! 히잉...저리가아!! 저리 가아란 마아리야아!!! 므잉!!!" 바닥에 흩어진 수저를 주울새도 없이, 성민은 눈을 불을 켜고 달려드는 희철을 피하느라 테이블 주변을 뱅글뱅글 돌았다. 옆 테이블로, 옆 옆 테이블로 도망을 치다가 그냥 밖으로 나가는게 상책일 것 같다는 생각에 입구를 향해 냅다 달렸다. "으헛!!!" "아악!!! 히에.......아..포오.....힝..." 마하의 속도로 달려나가던 성민- 달리는 데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들어오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충돌해 버렸다. 아이씽!! 누구야!!! 너무 아파서 눈물이 핑 도는걸 꾸욱 눌러 참고, 성민은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요?" "안갠차나여!! 빨랑 일으켜요!!" "네? 아아 네..." 신입생인가? 성민은 처음 보는 얼굴에 고개를 갸웃했다. 신입생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게 아무래도 타과생인가 보다 싶었다. 아니면 진입생(편입생) 이거나. 쳇 아무렴 어때. 도련님 근성이 뼛속까지 스며있는 성민은 상대가 누구던(김희철만 아니면) 상관없는건지 빨리 일으켜 달라고 소리를 빽 질렀다. "죄송합니다." "흥, 알면 대써영." "...아.....근데 실음과 여기서 신입생 환영회 하는거 맞나요?" "실음과....음...그럴걸요? 저는 타과생이라 뭐 잘 모르겠지만 맞는거 같애요."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넘어진 성민을 일으켜주고 대충 옷을 털어주더니, 성민과 부딪혔던 남자는 미안하다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남기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실용음악과'라고 쓰여 있는 테이블을 찾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드디어 내가!!! 한국대 실음과에!!! "신입생이에요?" 그렇게 그가 '실용음악과' 라고 쓰여져 있는 푯말과 감격의 뽀뽀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변성기도 채 지나지 않은 듯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뒤를 돌아보자 왠 꼬맹이 하나가 씨익 웃으며 서 있다. 뭐시여 이 쪼매난 아가는. "그런..데요." "일찍 오셨네요? 신입생들은 일곱시부터 오시면 되는데.." "....그쪽은 신입생 아니에요?" "아하하- 전 2학년 이에요. 김려욱 입니다." 이 쪼매난 아가가 선배라니. 다소 어이는 없었지만, 그래도 선배라기에 남자는 꾸벅- 인사를 한다. "기..김종운 입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누가 봐도 웃기는 광경이었다. 한참 나이 많아 보이는 종운이 한참 어려보이는 려욱에게 배꼽인사라니. 종운은 삼수를 한 끝에 드디어 한국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삼수...그러니까 현역 신입생보다 두살이 더 많은 스물 두살 이었다. 그리고 려욱은 고등학교를 6개월만에 때려 치우고, 검정고시와 수능을 패스해, 열아홉 나이로 대학생이 되어, 현재나이 스무살. 그러나 종운도 려욱도 그런 사실은 알 턱이 없으니 여기서는 그냥 서로 어색하게 인사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차차 알게될 서로의 본성은- 조금 나중에 풀어놓도록 하자. "김..종운이요? 혹시..실기 퍼펙트로 통과했다는..그?" "...네?" "아, 아니에요. 아하하하하~" 실기 및 면접 점수는 비공개로 하게 되어 있었지만, 조교누나를 도와 채점표를 정리했던 려욱은 알고 있었다. 수능성적은 그저 그런데 실기가 기깔나게 완벽해서 한국대 실음과에 떠억하니 붙은 인물이 있다는 것을. 게다가 입 싼 조교누나가 이미 퍼트릴 대로 퍼트려 놔서 그 인물의 이름은 실음과 학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었다. 실음과 창설 이래 최고의 보컬이라며 그 깐깐한 박교수가 혀를 내둘렀다는 그 인물. 그는 다름아닌, 지금 려욱의 앞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이 남자, 김종운이었다. "어-이 김려욱아, 동희 못봤냐?" 때아닌 라이벌 의식으로 불타오르는 려욱 때문에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있는데, 희철이 다시 이쪽 테이블로 다가오며 려욱을 불렀다. "신조교님이요? 못봤는데...성민이 형한테 물어보세요." "아이씨 이성민 고거 토꼈어. 아놔 신동희가 삼만원 꿔갔는데..." 모르겠다는 려욱의 말에 희철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까 이성민 고 이쁜새끼한테 물어봐야 했던건데. 박정수 이 게놈프로젝트말살정책같은 박쥐새끼 때문에 씨발. 정수의 이간질을 눈치채고 이미 응징까지 깔끔하게 끝낸 희철은, 혹시나 밖에 있나 싶어 밖으로 나갔다. "야 신동희 못봤.....아, 미안합니다." "...." 일어과 후배놈 뒷통수랑 똑같이 생긴게 보이길래 그 놈인가 싶어 뒤통수를 퍽 때렸는데- 희철에게 고개를 돌린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사과하는 희철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저 고개 한번 까딱 해주고, 남자는 다시 담배 피우는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아놔 신동희 어디 간거냐고..." 너무 태연한 남자의 반응에 되려 뻘쭘해진 희철은 한껏 동희를 애타게 부르며 남자의 곁을 지나쳐 갔다. 말보로 라이트를 너무나 맛있게도 피우고 있는 이 남자, 전자과 새내기 김기범이다. 덧붙이자면, 조규현과 더불어 시원이 찍어뒀다던 SJ 회원 후보이기도 하다. 기범이 그렇게 한 개피를 다 태우고 두 개피째 입에다 무는데, 왠 등빨 좋은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여기.." "아, 감사합니다. 하아...죽을뻔 했네." 꽤나 골초인지 담배 한대 못 피웠다고 죽네 사네 소리를 한다. 기범은 픽- 웃으며 라이터를 건넸다. "아, 이거 가지고 가셔야죠." "...그냥 써요." 물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서 빼내더니, 기범은 자리를 떠났다. 라이터 가져가라는 남자의 말에 손을 휙휙 흔들며 그냥 가지라고 말하고는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남자는 '저거 뭐야?' 하는 표정으로 기범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이내 남은 담배를 빨아들이는데 열중했다. "김영운!! 뭐여 체대도 여기서 해?" "어라?" "켈록켈록- 자식아 담배는 좀 꺼라!! 형님의 예술적 성대가 아파하잖냐!!" "지랄 똥싸고 있네. 꼬우면 알아서 피하셔." "뭐시여!!" 어차피 아직 신입생들도 별로 없고, 있는 애들도 다 스무살 현역들 뿐이라 좀 돌아다니다 올까 하는 생각에 밖으로 나온 종운은, 계단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영운을 발견했다. 종운과 영운은 친형제 사이로, 어찌하다보니 형과 아우가 같은 1학년(그것도 같은 학교)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어릴적 부모님의 이혼으로 영운은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남았지만, 종운은 어머니를 따라 천안으로 내려간 바람에 본의 아니게 흥분하면 충청도 사투리가 튀어나오곤 했다. 종운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부모님이 재결합을 하게 되어 다시 함께 살게 되었지만, 영운과 종운의 사이는 그리 서먹하지는 않았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긴 했지만, 형제라는게 원래 그런건지 다시 친해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 먼저 올라갈게. 여명이라도 마셔둬. 형 술 약하잖아." 틱틱거리는 듯 보여도 은근히 종운을 생각하는 영운이다. 괜히 천원 때문에 컨디션 마시지 말고, 그냥 천원 더 내고 여명 마시라며 종운의 손에 친히 오천원짜리를 손에 쥐여 주고는 손을 흔들며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며, 그리고 술집의 입구를 통과하며 영운은 몇번이고 심호흡을 한다. 오늘은 운명의 날, 결전의 날 이었다. "...일본어과 테이블이 어느 쪽이죠?" 영운은 대충 선배로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일어과가 어디냐고 물었다. 사체과인 영운이 일어과를 찾는 이유는- "여기 일어과 맞아요?" "신입생? 이름이 뭐에요?" "아..네. 근데 저기...저는 체댄데요...찾는 사람이 좀 있어서.." "아, 누구 찾으시는데요?" 박정수 때문이다. "일본어과에 박정수라고...2학년 이라고 했는데.." "박정수? 제가 알기로는 2학년 중에 그런 학생은...." "뭐? 박정수?" 지나가던 김희철씨, 박정수 이야기에 이쪽으로 컴온요 행차 하셨다. "민구야, 전 학년 통틀어서 우리과에 박정수란 애는 없지 않냐?" "에 뭐...그런거 같은데..." "...그럴리가 없는데..." "..착각한거 아니에요? 일어과에 박정수는...조교님밖에 없어요." "조교..요?" "잠깐...잠깐잠깐. 저기, 혹시 너..김영운?" 조교라는 소리에 멍때리고 있는데, 눈이 이따시만한 남자가 제 이름을 불러오자 영운은 화들짝 놀랐다. "...저를 아세..요?" "...박정수 애인 아니야? 저번에 박노인이 사진 보여줬는데 님하랑 닮은듯?" 넌 누구냐. "...아...저기...." "애인이요?!!! 에이 그럴리가요~ 방금 이 학생 신입생이라 그랬는데요? 박조교님 애인 스물 둘? 스물 셋? 그렇다던데." "...조교...박정수가 조교라고요?" "어. 박 조교. 근데 너..신입생이라고?" 영운은 머릿속에서 무언가 와르르르- 하고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때, 타이밍 기가 막히게 지나가던 정수가 제 얘기 하는건 어떻게 알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영, 영운아....?" "...박정수. 너...조교냐?" "어? 어어 그게...." "이 놈 말버릇좀 보게나?! 야 박정수 애인 교육 좀 잘 시켜라. 아무리 너네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지만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디....!! 신입이면 신입답게 좀-" "신입?!!" 나이를 올려 속이고 정수를 만나던 영운은, 입학을 기점으로 정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겠다고 결심을 했고 오늘이 바로 그 D-DAY였다. 그러나 제 비밀을 폭로하기도 전에, 사랑해 마지않는 애인의 비밀을 알아버렸다. 대학생이 아니라 대학 조교라니. 그럼 너도 나이 속인거냐?!!! "...너...대..대학생이라며!!" "...그러는 박정수 너도 대학생이라며?" "그건..그..." "푸하하하하하!! 박정수 아주 쑈를 해라!! 니가 대학생? 허이구 기어가던 김려욱이 날겠다!! 박노인 정신차려 크크크~ 어이 거기 박정수 애인님하! 김영운이!! 얘 스물 일곱이야~" "...!!!" "아씨 김희철 이 미친..." 스물 둘이라고 네 살(반년 전을 기점으로)이나 나이를 깎고 영운을 만나고 있던 정수는, 애인이 스무살 새내기라는 것도 청천벽력인데 제 나이를 들켜버려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김희철 넌 좀 닥쳐!!! "아아, 사체과 신입생 분들 카운터 앞으로 모여주세요!! 인원점검 합니다!!" 때마침 사체과 학생들을 모으는 소리가 들렸고, 정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쟤나 나나 거짓말 한건 마찬가지인데 왜 나만 이렇게 쫄아야 하는건데!! 살짝 괘씸한 마음도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젊음은 특권인 것을. 한살이라도 어린놈이 이기는거다. "박정수...끝나고 보자...후우..." 이 상황이 웃겨 죽겠다며 뒤집어지게 웃는 희철의 옆에서, 정수는 그저 사색이 된 채 영원히 신입생 환영회가 끝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01. 대부분의 테이블에 하나 둘 신입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인원이 모인 듯 싶자, 슬슬 술이며 안주며 주문하는게 좋겠다며 학생회 멤버들과 몇몇 조교들은 테이블마다 메뉴판을 돌려 메뉴를 정하게 했다. "일단 가볍게 소주로 가자." "소주 못마시는 애들도 있을텐데 맥주도 같이 시켜야 되는거 아냐?" "쓰읍- 그딴게 어딨냐. 선배가 마시라면 마셔야지." "야..너 2학년 주제에 무지 선배인 척 한다?" "학번으로 가자고!!! 씨발 너는 조교 주제에 왜 온건데!!" "공짜술이잖아 꺄하하~" 일본어과 테이블은 유난히 조용했다. 그도 그럴것이, 새내기들이 한명 한명 자리를 메울 때 마다, 비현실적으로 눈이 커다란 남자가 매섭게 위 아래로 훑어보고 있었으니. 희철은 나름대로 SJ멤버를 뽑기 위해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 시선을 받는 신입생들 입장에서는 참 무서운 일이었다. 다들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쫄아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바람에 술을 못 마시는 학생들도 입을 꼬옥 다물고 그저 희철이 주문하는 대로 고개만 격하게 끄덕(강압적인 주제에 의사는 물어보더라)일 수 밖에 없었다. "자자 그럼 우리는...안주는 불닭이랑 돈까스랑 모듬튀김, 오뎅탕...술은 소주...에이 뭐 그래 맥주도!" "몇 병 시키면 되려나?" "오십명이니까 일인당 일병씩, 일단 오십병 시키고...맥주는 한 열댓병?" 맥주도 시킨다는 희철의 말에 술 못먹는 학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일인당 한 병씩 소주를 배당한다는 소리에 내쉬었던 한숨을 다시 흐읍- 하고 들이쉬었다. 아니 조교님은 샐샐 웃으면서 왜 말리지는 않는 건가요!! 이젠 원망의 눈빛이 정수에게로 꽂혀가고 있었으나, 공짜술에 눈이 먼 우리의 박쥐씨 그저 좋댄다. "맥주 마시는 애들도 있을건데 한 병씩 돌리는건 좀 많지 않아?" 김희철씨와는 다르게 정상적인 주량을 소유하신 박정수씨는 소주를 좀 줄이자고 말한다. 조교님!! 사랑해요!!!! 조교님에게서 날개가 보여요!! 당신은 천사!! 정수에게 쏘아대던 새내기들의 원망의 눈빛빔이, 소주가 너무 많다는 정수의 발언에 순식간에 찬양과 존경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쯧쯧- 박노인 진짜 이럴래?" "아씨 노인 아니랬지!! 그리고 뭐가!!" "일본 속담에 있잖냐, 술은 천하를 도는 것이다.....동기사랑 갈건데 당연 섞어야 하는거 아니셈?" 동기사랑. 그것은 신입생 환영회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선배들이 가장 좋아라 한다는 바로 그것. 500짜리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붓고 한 조당 하나씩 배당하여 전부 마시게 하는 게임이다. 왜 이름이 '동기사랑' 인가? 그것은 잔을 비우지 못하면 다시 처음부터 마셔야 하기 때문에 맨 마지막에 마시는 사람은 죽어나게 되어있는데, 그러기에 앞사람들이 자기 다음의 동기를 생각해서 되도록 많이 마셔줘야 해서 '동기사랑'. 동기를 사랑한다면 네 위장과 간과 식도쯤 기꺼이 희생해라- 뭐 그런것쯤 되시겠다. 보통 동기사랑은 소주를 채우지만, 여기는 일본어과. '보통이 아닌' 김희철이 서식하고 있는 일본어과. 술은 섞어야 제맛이고, 원샷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라는 지론을 펼치고 있는 희철에게, 동기사랑의 기본은 소맥(소주+맥주)이었다. "아놔 박노인아!! 그걸 그렇게 섞냐!! 일루 내!!" 그렇게 소주 오십병과 맥주 열 다섯병이 테이블 중앙에 놓여지자, 학생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다못해 아예 시퍼렇게 질려버렸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술 먹다 죽는 학생들이 뉴스에 심심치않게 나오는 이유를 이렇게 몸소 체험하게 될 줄이야- 다들 살아 돌아가긴 글렀다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새내기들이 그렇게 죽음의 문턱을 밟고 있거나 말거나- 희철은 술을 섞는 정수의 모양새가 영 못마땅 했던건지 제가 하겠다며 두 팔을 걷어 부친다. "야야 소주 너무 많아!! 그거 마셨다간 다 토하겠다!!" "이 아까운걸 토하긴 왜?! 토하는 새끼 나오기만 해봐 내가 줏어다가 다시 먹일거다. 클클." 진심인 것 같다. *** "최강한국!! 막강체육!! 천하무적사체과 09학번 김!영!운! 입니다!!" 어느 과 테이블이나 신입생 환영회라 하면 FM(학교, 소속대, 과 그리고 학번과 본인 이름을 말하는 자기소개)이 쩌렁쩌렁 울려퍼지게 되어 있다지만, 예체능계가 다른 과보다 선후배 관계가 엄격하기 때문인지 사체과의 FM은 옆 테이블인 유교과의 그것과 확연하게 달랐다. 다른 테이블에서 쳐다보거나 말거나, 시끄럽다고 하거나 말거나 영운은 제 차례가 되자 안그래도쩌렁쩌렁했던 앞 사람들보다 더 크게 FM을 했다. 기합이 팍 들어가 있는 듯한 영운의 FM에 선배들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오오- 하고 박수를 친다. "새끼 제법 목소리 큰데? 술 잘먹냐?" "어디가서 취해 본 적은 없습니다!" "오오~ 생긴것 부터 잘 마시게 생겼네. 큭큭. 몇 병 마시냐?" "안 취해봐서 모르겠지만 열 병까지 마셔봤습니다!!" "우악!! 이 새끼 이거 물건인데?! 큭큭." 소주 열 병에도 끄떡 없다는 영운의 발언에 선배들은 실실 웃으며 좋다고 난리가 났다. 누가 봐도 잘생겼다고 한마디 할 만한 얼굴에 떡 벌어진 어깨하며 영운의 비쥬얼은 딱 '잘생긴 체대생'에 부합하고 있었으니 여자 선배들은 술 이야기가 나오기 전부터 이미 눈을 반짝이고 있었더랬다. "애인있냐?" 마음에 드는 후배, 혹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후배는 FM때 질문공세를 받게 되어 있다. 영운은 이미 선배들에게 '호감'으로 도장 쾅쾅 찍힌건지 FM을 끝내고도 쉬이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선배 하나가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서는 영운에게 건네며 질문을 했다. 애인..말입니까? "네, 있습니다." "오오- 이쁘냐? 귀여워?" 애인 있다는 영운의 말에 여자 선배들은 실망이라는 듯 반짝반짝 빛내던 눈빛을 거두었고, 남자 선배들은 그저 이쁘냐 귀엽냐 물어보는데 정신이 없었다. 아니 남의 애인이 이쁜지 귀여운지 그건 알아서 뭐하려고. 영운은 잠시 눈썹을 꿈틀 했지만 선배들한테 밉보여서 좋을거 하나 없다는 생각에 순순히 입을 열었다. "...존나게 이쁩니다." "크하하, 새끼 역시 얼굴값 하나보네? 생긴것들은 역시 생긴년이랑 논다니까?" 놈인데요- 라고 대답했다가는 여기서 바로 대가리 박아야 할 것 같아서 영운은 그저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리고 '애인'이라는 단어에, 아까 맞닥뜨렸던 '진짜 박정수'가 생각나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래 씨발 나도 거짓말 하긴 했지만...어떻게 네 살이나 속이냐?! 니가 양심이 있냐?!! 스물 일곱이라니. 게다가 학생도 아니고 무려 조교라니. 사실 영운은 아까 그 자리에서 따지든 뭐하든 담판을 짓고 싶었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한발 물러섰던 것이었다. 그래 좋다, 끝나고 보자 박정수. "몇살이냐?" "스물 일곱입니다!!" "우와 씨발 이 새끼 이거 능력있네? 낄낄." 영운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건너 건너에 있는 일어과 테이블까지 들리게 큰 소리로 대답을 했다. 희철과 함께 소맥 제조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정수는, 안그래도 쩌렁쩌렁한 영운의 목소리에 슬쩍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스물 일곱'이라고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소주병을 놓쳐버렸다. 아까운 술을 버릴거냐며 희철에게 뒷통수를 가격당했지만, 정수는 희철에게 짜증을 낼 정신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신입생 환영회가 끝난 뒤, 영운이 어떤 말을 할지, 그리고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정수가 그렇게 카오스의 나락에서 허우적 대고 있는 사이, 희철은 민첩하게 소맥 제조를 끝내고 다섯 조로 나뉘어 있는 새내기들에게 한 조당 한 잔씩 술을 돌렸다. 말이 술이지, 이건 정말 '알코올' 그 자체였다. "자자- 맛있겠지? 이거 다 못마시면 처음부터 마셔야 합니다 후배님들. 동기를 사랑한다면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큭큭." 신났다 아주. *** 분위기는 무르익어, 어느덧 환영회가 시작된지 두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어색해 하던 새내기들이었지만, 술이 들어가자 선배들한테 애교도 부리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장기자랑까지 선보이며 꽤나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 그렇게 한창 좋은 때에, 전자과 테이블에서 갑자기 훈훈한 기럭지 하나가 쑥 일어났다. 09년 한국대 수석입학, 전자과 새내기 조규현이었다. "선배님들, 죄송하지만 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도 덤덤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가방을 챙겨드는 모습에, 선배들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새벽귀가는 기본이요, 동 틀 때까지 마시는게 정석인 신입생 환영회에서 감히 먼저 일어나겠다니. 그것도 새내기가. 험상궂게 생긴 남자선배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규현의 어깨 위로 두툼한 손을 처억- 올렸다. "조규현...지금 열 한시거든? 가긴 어딜가?" "막차 타야 합니다. 집이 이 근처가 아니라서.." "여기 이 근처 사는 애들보다 멀리 사는 애들이 더 많거든? 너만 가냐? 선배들도 다 이러고 있는데?" "그럼 선배님들도 가시던가요." "뭐야?!!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존내 시크한 새끼. 일 나는거 아닌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규현을 바라보던 동기들의 눈빛이 순간 얼어버렸다. "수석 입학이면 다냐? 씨발 이게 선배고 뭐고 눈에 뵈지도 않나 보구만?!" "...선배가 선배 다워야 선배 대접을 할 것 아닙니까." "뭐야?" "신입생을 환영하는 자리지 술 먹이는 자리 아니지 않습니까." 존내 멋진 새끼. 얼음이 되었던 동기들의 눈빛이 존경의 눈빛으로 바뀌어 간다. 기럭지를 이용하여 선배를 아래로 내려다 보는 스킬도 스킬이지만, 저 당당하고 흔들림 없는 말투라니. 게다가 규현을 막은 선배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욕하고 소리치고 난리가 났는데, 정작 규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할 말 다 하고 있지 않은가. 조규현 니가 짱머그셈. "정환아 그만 해라. 보내 줘 그냥." 가만히 맥주를 마시던 시원이 입을 열었다. 시원에게 정환이라고 불린 우울한 면상의 남자는 뒤를 홱 돌아보았다. "야 최시원, 이걸 어떻게 그냥 보내냐? 선배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아는구만..!!" "니가 더 웃겨 새꺄. 그냥 보내주라고." 결국 시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펄펄 뛰고 있는 정환을 규현에게서 떼어 놓았다. 규현은 잠시 멍한 눈으로 시원을 올려다 보다가 이내 고개를 꾸벅 하고 인사를 했다. "08학번 최시원이다. 내가 그냥 보내주긴 한다만, 아주 그냥은 못 보내주겠고. 일단 나도 선배잖냐." "...." "이유를 대라.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그냥 보내줄게." 시원의 말에 규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한다. "새벽 알바가 있어서 일찍 들어가 봐야 합니다." "...알바?" "제가 알바를 세개 뛰고 있는데요, 하나가 새벽이거든요. 막차 타고 들어가도 열 두시 넘어가서 얼마 못 자긴 하는데, 그래도 조금이라도 자 둬야 일을 하죠." 규현의 말에 흥분하던 정환, 그리고 술을 마시던 선배와 동기들은 일순 멈칫- 했다. 수석입학이라 장학금 받는다더니 집안이 어렵다거나 뭐 그런건가? 다들 왠지 측은한 눈으로 규현을 바라보는 가운데, 시원만이 씨익- 웃고 있다. 그리고는 길다란 팔을 들어 규현의 양 어깨를 터억- 붙잡는다. "SJ 합격이다. 조규현, 동아리 입부기간 되면 SJ로 들어와라." 시원은 규현에 대해 미리 조사가 끝난 상태였다. 1남 1녀 중 막내, 양친 모두 살아계시고 가정환경에 문제는 없음. 그리 부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다는게 조사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빡세게 알바를 뛴다는 것은, 그리고 그 와중에 이런 화려한 성적을 자랑한다는 것은- "SJ...가 뭐죠?" "한국대 권력의 핵심이지. 쿡..." 김희철이 매우 좋아하는 생활력 강한 아이라는 소리인거지. 학교의 동아리 지원금이 나오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급자족 동아리인 SJ로써는 규현과 같은 인재가 꼭 필요했다. SJ의 물주로써 성민을 잡아두긴 했으나, 성민은 너무 도련님으로 자란 탓에 금전감각이 무뎠다. 려욱은 꼼꼼하긴 하지만 돈에 무관심했고, 희철은 어떻게 써야 할지는 잘 알면서 버는데는 영 실력이 없었으며, 시원은 돈 계산에는 빨랐으나 역시 생산능력이 저조했다. 시원이 규현을 SJ멤버로 점찍어 둔 데에는 수석입학이라는 타이틀도 있었지만, 그의 조사 결과 마지막 칸에 써 넣은 네글자가 크게 작용했던 것이었다. 알바의 신(神). "권력의 핵심..이요?" "뭐- 자세한건 입학하면 알게 될거야. 어차피 우리는 워낙 소문이 무성해서." "....무슨..동아리 인데요?" 권력의 핵이라는 말에 규현은 이미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뭣도 모르고 아무 곳에나 저의 몸을 던질 수는 없는 일- 뭐하는 동아리인지는 알아야지. 규현의 말에 시원은 젠틀하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밴드부." 물론 대외적으로만. 규현도 시원의 생각을 간파한건지 흐응- 하는 감탄사를 흘렸다. 그래 머리 좋은 놈이니 알아 들었겠지. 밴드부 주제에 권력의 핵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건 분명 뭔가 더 있다는 뜻 이라는걸. 일단 막차 시간때문에 먼저 가보겠다고 다시 인사를 하고 규현은 술집을 빠져나갔다. 규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원은 씨익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한명 물었어요. 잘했죠? 끝나고 봐요*^^*] 이젠 거의 반 기계적으로 주인님께 실시간 문자 서비스를 실천하는 우리의 최머슴씨. 이것이 바로 농노의 기본자세. *** "....욱...아...너무 마셨나..." 마시고 먹이느라 정신 없는 희철과는 달리, 정수는 후배들의 쇄도하는 흑기사 요청에 이미 주량을 넘어서 버린지 오래였다. 희철은 마셔도 마셔도 끝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간기능의 소유자였지만, 정수는 지극히 일반인의 장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술이 들어가니 점점 몸이 힘들어지는게 느껴졌다. 뭐, 나이도 있고 젠장. 그리고 후배들이 '조교'라는 타이틀을 내세워 은근히 더 정수에게 매달린 탓도 있었다. "...하아.......죽겠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주는대로 다 마시랬냐?" "아니 내가 마시고 싶어서 마셨...아...영운아..." "그래, 박정수." 달아오른 얼굴도 식히고, 불타오르는 속도 좀 가라앉히려 정수는 찬물로 세수를 하고 입 안을 헹궈냈다. 찬 기운이 들어가니까 조금 살만 한건지 크게 숨을 내쉬고 있는 정수에게 누군가 말을 붙였다.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하다가 거울을 보니- 제 뒤에 서 있는건 다름아닌 김영운. 거울에 비친 제 젖은 얼굴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영운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정수는 다시 세면대에 고개를 박았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 안에 어푸어푸- 하는 소리만 울려퍼진다. "......뭐..야..?" "얘기좀 하자." "...나중에...지금 환영회 중이잖아." 제 시선을 피해 딴청을 부리는 정수의 태도가 거슬린 모양인지, 영운은 거칠게 수도꼭지를 잠궈 버렸다. 세수를 하던 정수는 멈칫 했지만 이내 나중에 얘기하자며 영운을 지나쳐 화장실 입구로 향했다. 흠뻑 젖은 얼굴을 닦을 생각도 않고 화장실을 빠져나가려던 정수였지만, 결국 영운의 힘에 이끌려 다시 뒤돌려져 버렸다. 뭐라고 소리를 낼 틈도 없이, 다음 순간엔 아예 벽 쪽으로 몰아 붙여져 버렸다. 터억- 소리가 나도록, 제법 세게 벽에 등을 부딪힌 정수가 아픈듯이 인상을 썼지만, 화가 난 영운에게는 지금 그런건 신경쓸 바가 아니었다. "스물 일곱? 조교? 하하...박정수...너..거짓말 했냐?" "아니...내가 일부러 그런건 아니고..." "끝까지 그렇게 나 속이려고 그랬냐? 그런거냐?" "말..하려고 했어. 어쩌다 보니 타이밍을 놓쳐서 말 못한것 뿐이야. 언젠가는..말하려고 했..." 콰앙---------------------- "히익-" 공격적인 영운의 태도에 안그래도 쫄아서 버벅대고 있는데, 흥분에 못 이긴 영운이 정수의 머리 바로 옆으로 주먹을 콰앙- 소리가 나게 내질렀다. 타일 깨진거 아냐? 꽤 강한 타격음이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영운은 별로 아프지도 않은건지 짧게 낮은 숨을 뱉더니 다시금 정수에게 들이대기 시작했다. "언젠가?! 언젠가?!!! 야 우리 만난지 반 년이야!! 언젠가가 언젠데? 어? 우리 키스하고 섹스하고 그러는 동안...너 아무렇지도 않았냐?" "김영운.." "반 년동안 나 가지고 놀아서 재밌었냐? 어? 그래?!!" 무서워서 고개도 못 들고 있던 정수는 영운에게 공격을 당하면 당할수록 공포감과 함께 신경질과 짜증이 솟구치는걸 느꼈다. 씨발 따지고 보면 너도 거짓말 했잖아!! 왜 나만 가지고 지랄이야!!! 결국 분에 차오른 영운이 '가지고 놀았다'라는 표현까지 들먹이자, 정수는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저를 가두고 있는 영운의 양 팔을 홱 쳐내더니, 이번엔 영운의 가슴팍을 양 손으로 퍽 소리가 나게 밀어버렸다. 갑자기 돌변한 정수의 태도에 영운은 눈이 커졌다. "씨발 누가 누구를 가지고 놀았다고 그러는거야?! 야, 너도 거짓말 했잖아!!" 씨발 뭐냐. 영운은 눈앞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니가 왜 지랄이냐?! 죽은듯이 가만히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는 정수가 대드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것보다 더 황당한 건 저렇게 큰 소리를 치는 박정수였다. 영운은 정수와 사귄지 반년만에 처음으로 '욕하는 박정수'와 '큰소리 내는 박정수'를 볼 수 있었다. 레어템인데? 아아, 이게 아니지. "..너..너는 네 살이나 속였잖아!!" "그러는 넌 미성년이었거든!! 넌 미성년 주제에 게이바는 왜 들락날락 거렸던 건데?!" "여..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왜 나오긴! 왜 나오긴!! 어쨌든 너도 나이 속였잖아!!" "박정수!!" "형 이라고 안해?! 어린새끼가 어디서!!" 사실 정수가 화가 난 것은 영운이 나이를 속였기 때문이 아니다. 저도 속였는데 뭐 그런것 가지고. 그리고 막말로 정수는 영운이 열 아홉이라고 당시 나이를 솔직히 밝혔어도 분명히 이 녀석과 사귀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영운이 좋았다. 그랬기에 정수는, 영운의 입에서 나왔던 말들- 마치 정수가 작정하고 영운을 가지고 놀려고 했다는 듯 말하는 것들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27년 평생 진심 하나만 믿고 살아온 저인데, 그거 하나만큼은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저인데, 그런 저를 단 한번의 거짓말로 부정하려 하다니. "너야말로 우리가 연애했던 반 년동안 뭐했는데? 너는 왜 안 밝혔는데?" "아니 그건.." "씨발 너는 우리가 키스하고 섹스하고 그러는 동안 뭐한건데?!!!!" "...." 분명히 엄청나게 화난 목소리로, 독기 어린 음성으로 소리치고 있는 정수인데, 얼굴은 눈물이 범벅이었다. 그런 정수의 모습에 영운은 아까의 그 기세등등함은 어디로 갖다 버렸는지, 제대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너..나 갖고 놀았니?" "박정수.." "아냐? 아니면 뭔데? 너는 왜 그런건데?!!" "정수야.." "내이름 부르지 마!! 끝내자 끝내!! 헤어져!! 이제 보지 말자 우리!!" "박정수!!" "나 부르지 말랬지 이 씨발새끼야!!!! 너...너..앞으로 나 봐도 아는척..하지마...흡...미친놈...흐흡..." "야!! 너 거기 안서?!" "따라오면 죽여버릴거야 미친놈아!!" 콰앙------------------------ "하.....씨발...." 이게 아닌데. 영운은 정수를 몰아세웠던 벽에 제 몸을 기대고 그대로 쭉 미끄러져 버렸다. 축축한 화장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었다. 치익- 불을 붙이자 하얗고 길다란 담배 끄트머리가 빠알갛게 타들어 간다. "....울지나 말던가....하아...." 화장실의 습한 기운이 정수의 눈물 때문인것만 같아, 영운은 씁쓸하게 웃었다. 따라가서 잡을 수도 있었다. 죽여버린다고 하면 그냥 죽는 셈 치고 따라가 잡아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잡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가지고 논거 아닌데....그냥....너무 좋아서...놓칠까봐....씨발...그런건데...하하..." 박정수를 사랑하니까. 나 때문에 우는 너를, 내가 어떻게 잡냐고. 제길. 반쯤 타다 남은 담배를 화장실 바닥에 비벼 끄고 영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을 보고 표정을 고쳐보았다. 왠만큼 웃어질 수 있게 되자, 영운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서 선배들이 주는 술을 단 한잔도 거절하지 않고 다 받아 마셨다. 오늘은 취할 수 있을까? 영운은 그 많은 술들을 마시며 오늘은 취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뻔뻔하다고 해도 좋다. 술을 핑계로라도 나는 너를 잡고 싶다. *** "아 시원이 형 미쳤냐거!!! 왜 이래 진짜!!" "....김희철 어딨냐고....씨팔..." "야 최시원, 정신 차려!! 여기 식영과다?! 일어과 아니라고!! 김희철을 왜 여기서 찾냐!!" 보기(보기엔 김희철 저리가라로 잘 마시게 생겼다. 일단 신체가 너무도 건강하다 보니)보다 시원은 술에 약하다. 아니, 약하다기 보다는 그날 그날 컨디션에 따라 주량이 심하게 차이가 난다. 본인 조차도 그날 얼마나 마실 수 있을지 모를만큼, 어느날은 세 병을 마셔도 멀쩡한데 어느날은 한 방울만 마셔도 맛탱이가 안드로메다 행 티켓을 끊어버리곤 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한 방울에 우주여행을 하는 그 날. "동희 형!! 시원이 형 좀 업어봐. 아 무거워 죽겠다거!!!" "업어서 어디다 버리게?" "일어과에 갖다 버려!! 악 씨발 이혁재 겨우 재워놨더니 이건 또 뭐냐거!!" "큭큭, 그래 일어과에 버려 버리자. 김희철 보고 처리하라고 하지 뭐." 대학시절 희철과 함께 SJ멤버였던 동희는 현재 유아교육과 조교이다. 유교과인 주제에 어째서인지 식영과 학생들과 더 친해서 몇몇 식영과 학생들은 동희가 식영과 조교인걸로 착각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오늘도 동희는 유교과와 식영과 테이블을 왔다갔다 하면서 신입생 환영회를 즐기고 있었다. 마침 희철의 사촌동생인 동해가 올해 식영과 새내기로 들어와, 동해와 살짝 친분이 있는 동희는 오랜만이라며 식영과 테이블에 잠시 눌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안부도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길고 검은 그림자가 느껴졌더랬다. 동해도 그 기운을 느낀건지, 둘은 동시에 뒤를 보았고- 검은 그림자의 주인공은 김희철 애인 최시원. 그것도 맛탱이 제대로 간 얼굴로 '김희철 어딨냐'만 무한 반복 재생하고 있는 저 찌질한 상태라니. 이과대 킹카가 이게 뭐니 쯧쯧. 시원의 모양새에 동희가 쯧쯧- 혀를 차자, 이과대 킹카씨, 그래도 아직 정신은 붙어 있는건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반응을 한다. 그러나 술에 취한 킹카는 찌질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고개를 돌리다가 중심을 잃은 시원은 동해 쪽으로 푹- 고꾸라져 버렸다. "읏챠- 아이고 김희철씨, 택배 왔습니다~" "악 신동희!! 이거 뭐야 무거워!!" 황금비율로 섞은 쌩주와 산사춘을 500잔에 꽉꽉 들어차게 부어 원샷하려는 순간, 희철의 등 위로 엄청난 무게가 느껴졌다. 아 씨발 신성한 음주시간에 대체 어떤 새끼야. "...어? 헤헤헷...김희철이다아...." "하아...뭐야 사자새끼 아냐. 아, 맞다 신동희! 돼지새꺄 삼만원 내놔." "택배비로 치자. 응?" "야!!!" "자자, 그럼 오붓한 시간 보내십쇼 고객님~" 이런 미친. 희철은 한숨을 쉬며 제 등 위에서 꼴아있는 시원을 후배들의 도움을 받아 일단 옆자리에 앉혔다. "심바야..정신좀 차려라. 끝나고 보자고 해놓고는 니가 먼저 끝장이 나면 어쩌라는 거냐..." "큭큭, 시원이 이러는거 어디 한 두 번 입니까?" "하아...내가 더 늙는다 더 늙어." "...누구...에요?" 시원과 희철의 이런 풍경이 익숙하다는 듯 후배들이 킥킥대자, 희철은 그래 뭐 하루 이틀이냐- 시큰둥하게 고개를 흔들고는 쌩춘(쌩주+산사춘)500을 깔끔하게 원샷했다. 역시 이 쌩춘의 오묘한 영롱함이란. 남들이 보면 와인이라도 마신 줄 알 것 같은 표정으로 쌩춘의 세계에 폭 빠져 있는 희철이다. 그런 희철의 눈치를 보며 새내기 여자 후배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조심스럽게 시원을 가리키며 누구냐고 묻는다. "아아, 희철 선배 애-" "내가 키우는 사자새끼. 왜 니놈새끼가 대답할라 그르냐? 내 껀 내가 챙긴다." "아 진짜..선배 닭살. 큭큭. 시원이 깨어 있었으면 텔미라도 췄겠습니다?" "진짜? 아놔 그럼 다음엔 깨어 있을때 해야겠다. 최심바 텔미 추는거 동영상으로 찍어놔야지." "푸하하- 아 진짜 선배 큭큭." 내 꺼...요? 여자 후배들은 잠시 멍한 눈으로 희철과 민구(희철과 대화하고 있는 2학년)를 바라보다가, 다시 시원을 쳐다본다. 이게 선배 꺼...선배가 키우는 거...그러면......사귄다고요?!!!! 남자랑 남자랑?!!!! "...서..선배님.....남자...맞으시죠?" "어. 그럼 여자로 보이냐?" "아..처음엔 여잔줄 알았.." "씨발." "아, 죄송합니다...." 이름이랑 목소리 아니었음 여자라고 했어도 믿었을 겁니다. 선배님이 우월하신 건지, 아님 저희들이 비루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 여자로써 회의감 느껴지고 그러네요. 그럼요. 그렇구 말구요. 죄송하다고 금새 고개를 숙이던 여자 후배는, 다시 쭈뼛쭈뼛 눈치를 보더니 희철에게 질문을 한다. "저기 선배님....여기 취해서 주무시는 이 분이랑...사...사귀세..요?" "큭큭, 왜? 징그럽냐?" "아! 아니요!!! 그런게 아니라 그냥...처..처음 봐서요....남남커플..." "너네 앞으로 종종 보게 될거다~ 캠퍼스 곳곳에서 이분들 애정행각에 몸서리 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 "닥쳐, 민구스러운 새꺄." 짐짓 나무라는 투로 민구에게 한 마디 했지만, 말과는 다르게 희철의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때, 꾸벅꾸벅 졸고있던 시원이 정신이 든 건지, 끊임없이 이것저것 알코올들을 배합(이 와중에도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김희철씨)시키고 있던 희철의 손을 덥썩 잡아왔다. 소주와 산사춘을 섞다 말고 희철은 시원을 쳐다보았다. "정신좀 드냐? 이런 미친...뭐 얼마나 마셨길래 벌써 골로 간 거냐?" "...김희철이다아...헤헤..." "아쭈- 이 새끼가 아까부터 형님한테 야자까지?!" 술에 달아올라 시뻘개진 얼굴로 헤실거리며 제 이름만 계속 불러 제끼자, 희철은 피식거리면서 시원의 얼굴을 툭툭 쳤다. 그렇게 시원이 희철에게 붙어 밍기적 거리고 있는데, 화장실에 갔던 정수가 한참만에 자리로 돌아왔다. 그것도 엄청난 얼굴을 하고서. "히익?!! 박노인, 너 면상이 왜 그 모냥이냐? 울었냐?" "..울긴 누가 울어..." "에이- 운거 맞는데요? 조교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냐..아무것도...그냥 취해서 진상 떤거야..." 어쩌다 보니 이별선언까지 하고 왔는데- 정수의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은 가히 '염장' 그 자체였다. 하여튼 김희철 저건 보통때는 엄청 틱틱거리는 주제에 지 애인 맛탱이 갔을때만 좋아 죽지, 죽어. 쯧쯧. 아닌게 아니라, 제 정신 아닌 시원이 실실거리며 이쪽으로 머리를 기대어 오자, 희철은 '어이구 내새끼~ 우쮸쮸쮸쮸~' 이러고 있다. 평소 같았으면 '씨발 어따가 머리를 대? 대가리 안치워?' 라고 까칠하게 말하며 가차없이 어깨에 기대어진 머리따위 퍽- 쳐내어 버렸을 텐데 말이다. "아- 안되겠네. 박노인아, 나 먼저 가야겠다." "엑, 선배 벌써 가시게요? 이제 시작인데~" "그러게. 김희철 니가 왠일이냐? 술자리에서 퇴장을 다 하고.." 갑자기 가야겠다는 희철의 말에 몇몇 학생들은 붙잡는 반면, 신입생들의 얼굴에는 급 화색이 돌았다. 제발 돌아가 주세요 흑흑. 이미 반수 이상의 새내기들은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잠들어 있거나, 취해서 쳐 울고 있거나 혹은 쳐 웃고 있거나- 어쨌든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최심바 꼴았잖냐. 술 깨기 전에 데려 가야지.." "..보통은 술 깬 다음 데려가야 맞는거 아니야?" 희철의 말에 정수가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뭔소리냐 당최. 몸도 못 가누는 저 덩치를 왜 구지 인사불성인 시점에 데려가려고 하는거냐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정수에게, 희철은 시원의 팔을 제 어깨에 두르며 대답한다. "술 깨면 내가 죽거든. 큭큭." "어?" "사자새끼가 술만 마시면 정력이 뻥튀기가 되는건지 존내 박ㅇ-" "아, 알았어!! 야 빨리 데리고 나가!!" "크크큭..아 뭐야, 순진한 척 하기는." "시끄러!! 야야, 민구야! 쟤네 좀 빨리 내보내라!!" "아, 네..네네....하하하..." 희철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정수는 마시던 맥주를 뿜으며 얼른 나가라고 소리를 빽- 지른다. 그 모습에 희철은 재밌다는 듯 시원하게 웃어 제꼈지만- 후배들과 새내기들은 얼굴이 벌개진 채, 얼음. "으앗-!!!" 쿠당탕탕----- "...윽..." 너무 웃던 희철은 결국 중심을 잃고 테이블 위로 자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그 테이블은 아무것도 놓여져 있지 않은 빈 테이블이었지만, 희철이 무너지면서 그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던 시원이 테이블 모서리에 옆구리를 부딪혔다. 갑자기 봉변을 당한 시원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괜찮냐? 새끼 그러니까 왜 취해가지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냐.." "......" ".....아..ㅅ..?!" 아아..진짜 아프겠다. 희철은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뱉는 시원에게로 몸을 낮추었다. 괜찮냐고 물으며 부딪힌 부위를 쓸어 주려는데, 순간, 눈을 뜬 시원과 제대로 눈이 맞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저를 똑바로 보아오는 시선에, 희철도 따라 잠시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뭐야, 왜 그래.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이 3초, 2초, 1초- 그리고 Kiss. 예상치 못한 키스에 희철은 눈도 제대로 감지 못했다. 그러나 곧 피식- 미소를 흘리며 그 술냄새나는 입맞춤에 기꺼이 응해주었다. 스킨십은 본능인건지, 술취한 와중에도 입술이 맞물리자 시원은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던 몸을 민첩하게 움직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심지어 입술은 여전히 밀착시킨 상태에서 테이블 위로 희철의 몸을 돌려눕히는 저 스킬이라니. "꺄아아아아아!!" "으악?! 미, 민구야!! 저것들 좀 떼어 놔!!" "아 하하..그..그렇게 말하셔도 저는...." 보통 이런 상황에서 키스를 당하면 밀어내야 정상인거 아냐?! 차마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다들 한 발 물러나 지켜만 보고 있는 이 시점에- 희철은 시원을 밀어내기는 커녕, 팔 까지 목 뒤로 두르고는 좋다고 계속 키스를 받아주고 있었다. 야한 마찰음과 낯뜨거운 비음은 또 왜 이렇게 잘 들리는 건지. 남남커플의 키스신을, 그것도 이렇게 비쥬얼 착하신 남남커플의 키스신을 눈 앞에서 생중계로 맞닥뜨린 새내기들은 꺅꺅- 난리가 났다. 그리고 그 비명 아닌 비명 소리에 다른 테이블 사람들까지 무슨 일인가 싶어 슬금슬금 일본어과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다음 순간 들리는 건 '아 씨발 또야..' 라는 재학생들의 목소리와 '헉...!!' 하는 신입생들의 숨 넘어가는 소리. "하아....하.....새꺄...정신..좀..드냐?...아..숨 차...하아.." "..아........." 오 분 정도 지나자, 희철은 드디어 시원의 목을 감고 있던 제 팔을 풀고, 양 손으로 시원의 얼굴을 잡아 입술을 떼어냈다. 억지로 떼내어진 입술이 아쉬운 듯 제 입술만 계속 응시하는 시원의 볼을 희철은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웃는다. 그리고는 아직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숨을 헐떡거리며 시원의 눈 앞에다 대고 제 오른손을 흔들어 댔다. 휙휙- 시야를 헤쳐놓는 손놀림에 조금은 정신이 든 건지, 시원은 제법 초점있는 눈으로 희철을 쳐다보았다. 아이고 겨우 돌아왔구만, 내 사자새끼. "뭐야?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건데?" "....." "왜? 말을 하라니까? 큭큭." ".....하아...알면서..." 새내기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꽂혀있거나 말거나, 희철은 꽤나 가까운 거리(높은 콧대 두 개가 끝부분을 딱 붙이고 있다)에서 시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쿡- 웃는다. 대충 정신이 돌아온 시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 불편하다는 듯 낑낑대기 시작했다. "크크큭...왜?" "...아 형...진짜..." "푸하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야 박정수야, 너 오늘 다른 데 가서 자라." "뭐?! 왜!!" 가만히 있던 나는 이게 뭔 꼴이냐며. 컬쳐쇼크를 받았을 새내기들의 등을 토닥이며 한 명씩 자리로 돌려보내던 정수는, 외박을 강요(부탁이 아니라 절대 강요)하는 희철의 말에 순간 이성을 잃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 딴 데(정수와 희철은 함께 살고있다)서 자라는 거냐?! "사자새끼 발정났다." "아 형!!" "시끄러 새꺄. 그럼 여기서 할까? 나 벗어?" "빠, 빨리 가요!! 정수 형, 죄송해요!! 저, 저희 먼저 갈게요!!" "크하하하하하- 아 존내 귀여워!!" "에라이- 징글징글 하다 진짜!! 빨랑 꺼져!!!" 시원은 아직 술기운을 떨쳐 버리지 못해 비틀대는 스텝으로(그러나 엄청난 스피드로) 희철의 허리를 잡아 채고는 입구로 달려나갔다. 시원에게 제 허리를 내어주고 끌려 나가는 동안에도 미친듯이 웃어대는 김희철 씨- 신났구만, 신났어?!! 이제 막 성인이 된 새내기들에게 진한 19금의 향기만을 남겨두고 사라진 커플의 뒤로, 정수의 서릿발 같은 째림이 따라붙었다. 가슴 아픈 이별 후 진지하게 슬퍼할 여력조차 주지 않는구나. 하- 귀신같은 놈들. 02. "발정이 뭐에요, 발정이!? 내가 동물이야?!!!" "클클, 너 사자새끼잖아. 짐승 주제에 말이 많다?" "아씨 진짜..." 술집을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동안, 추운 날씨 때문인지 시원은 술이 완전히 깨버렸다. 물론 그 전에 술집에서의 '사자새끼 발정났다' 발언도 한 몫 톡톡히 한 것 같지만. 술은 다 깼지만 민망함에 벌개진 얼굴로 울먹이는 시원을 보며 재밌다는듯 킥킥대는 희철. 아니, 새삼스럽게 뭘? 하루 이틀이냐 우리 이러는거-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희철이 한 마디 하자, 시원은 아무리 그래도 새내기 앞에서 그러는건 아니라며 소리를 높였다. 미친놈, 지가 먼저 입술 갖다박은 주제에 웃기고 있네. 끼이이익----- "두명이요-" 막차가 왔다. 학교를 중심으로 이 근처를 도는 마을버스는 꽤 늦은 시간까지 운행을 한다. 특히 신입생 환영회 시즌에는, 학교에서 특별히 버스 회사로 부탁을 해, 한 시간 정도 연장 운행을 하는 것 같았다. 치익- 소리를 내며 버스 문이 열리자, 시원은 얼른 먼저 올라가 희철의 몫 까지 카드를 찍고는, 뒤쪽에 있는 2인용 좌석 중 한 곳에 척- 하니 제 가방을 던진다. 천천히 시원을 따라 버스에 오른 희철은 그 모양을 보고 그저 피식- 웃는다. 너 바보냐? "어차피 아무도 없는데 뭐하냐 너." "아니 뭐, 습관돼서. 우리 자리 잖아요 여기." 버스에 사람이라고는 대머리 기사 아저씨랑 니놈 그리고 나 뿐인데 뭐하는 거냐. 창가쪽으로 들어가 앉으며 희철이 비웃듯 픽- 웃자, 그에 시원은 머쓱하게 제 뒷목을 문질문질. 그래도 우리 자린데- 중얼거리면서. 한국대 근처를 뱅글뱅글 도는 3-2 마을버스의 좌측 2인용석 가장 끝자리. 김희철과 최시원의 지정석. "그딴게 어딨냐? 그냥 아무데나 앉으면 되는거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희철 역시 3-2 버스를 타면 으레껏 이 자리로 눈이 가곤 했다. 어쩔때에는 다른 곳에 빈 자리가 있어도 꼭 버스 끝까지 걸어 들어와 이 자리에 앉기도 했고, 사람이 앉아 있으면 그 사람이 일어날 때까지 다른 빈 자리에 가 앉지 않고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 뱉는 말과 속마음이 반대로 달리는게 제 연인이라는 사람이라는걸, 시원은 알고 있다. 그러기에 아무 자리던지 상관 없다는 희철에 말에 상처받거나 하지 않는다.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 알고 있으니까. 상처받는 대신, 서운해하는 대신 그저 제 옆에 놓여진 마른 어깨를 가만히 안아줄 뿐. 그렇게 말 하면서 왜 그런 이쁜 얼굴 하는건데? "그 때, 내가 여기 앉지 않았더라면- 우리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요?" "음...남남이겠지 뭐." "아니, 난 또 다른 기회에 만나서...결국 지금처럼 이렇게 사랑할 거 같은데..." "난 그 사랑 반댈세. 큭큭." "혀엉!!" 역시 마음과 말이 따로 노는 김희철 씨. 그딴 사랑 개나 주라며 킬킬 대면서도, 슬금슬금 시원의 가슴팍으로 파고든다. 희철이 웃을 때마다 울리는 가슴에- 그 간질간질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에, 결국 시원도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1년 전, 최시원과 김희철이 만난 곳. 서로를 발견한 곳. 바로 이 곳이었다. * "이거 한국대 가는거 맞죠?" 새내기. 듣기만 해도 '캬~'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상큼한 그 울림. 한국대 전자과 08학번 새내기 자격을 얻은 시원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참석을 위해 한국대로 가는 길이었다. 지하철로 30분, 그리고 역에 내려서 버스로 10분 쯤의 거리였지만, 이렇게 혼자 오는 것은 처음(원서 낼 때 아버지 차를 타고 와 봤다)인지라 꽤나 두리번 거리면서 간신히 도착했다. 최시원 이 남자, 번듯한 외모와는 달리 조금 방향치 이다. "신입생?" "아..네. 한대생이세요?" "어. 일본어과." "..저는 전자과 들어왔어요, 이번에." 시원은 지하철 역을 나와 주변을 살피다가, 역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는 3-2 마을버스('한국대앞' 이라고 빨간글씨로 대문짝만하게 쓰여져 있다)에 오를 수 있었다. 버스 안에 사람은 많지 않았고, 시원은 긴가민가한 눈으로 주위를 조금 살피다가 대충 빈 자리에 앉았다. 맞겠지 싶으면서도 혹시나 잘못 탔을까 걱정스런 마음에, 옆자리에 앉아있는 비니를 눌러 쓴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한국대 가는 버스 맞냐는 시원의 질문에 남자는 이쪽을 흘끗 보더니, 물음에는 답도 않고 대뜸 반말로 신입생이냐고 되묻는다. "새내기 치고는 좀 삭았네? 공부 열심히 했나봐? 아님 재수? 삼수?" 우와 싸가지. 아무리 선배라도 그렇지, 게다가 같은과도 아니고 타과생 주제에. 남자는 시원에게 누가 들어도 빈정 상할만한 말투로, 누가 들어도 기분 나쁠만한 말을 뱉는다. 정말이지 그야말로, 남자의 입에서 나온 문장은 '뱉어버린' 문장이었다. 시원은 갑자기 당한 독설어택에 당황했지만, 그래도 선배라고 웃는 낯으로 받아쳐 주었다. "하하, 제가 좀. 삭아 보인다는 소리를 듣긴 해요. 재수는 아니구요..하하하..." "알면 관리 좀 하지." 어금니 꽉 깨물자, 히밤. 말똥말똥 큰 눈에 제 얼굴을 담고 있는 이 남자는, 아무래도 성격파탄인가 보다. 시원은 멋쩍게 웃으며 대충 얼버무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런 인간이랑은 상종을 안하는게 상책이다. 시원이 자세를 돌리자 남자도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마침 버스는 출발했고, 시원은 MP3를 꺼내어 이어폰을 귀에 꼽고 볼륨을 높였다. "야, 비켜."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옆자리의 남자가 시원의 어깨를 툭툭 친다. 노래에 빠져 멍때리고 있던 시원은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창 밖을 보니, '한국대학교 입학을 환영합니다' 라는 플랜카드가 보인다. 버스는 어느새 정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내, 내리면 되는거죠?" "싫으면 그냥 타고 다시 역 가던가." 대체 뭐가 불만인거냐. 시원은 한숨을 쉬며 남자를 뒤로 하고 먼저 버스에서 내렸다. 드디어 내가 대학생인건가- 그러나 감개무량한 마음도 잠시, 아무래도 늦은건지 학교 앞은 너무도 한산했다. 재학생으로 보이는 몇몇 학생들만이 전공 서적을 옆구리에 끼우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야- 오티 저쪽이다." 학생들이 많으면 그냥 거기 묻혀서 어찌어찌 오티 장소로 갈텐데, 사람이 없으니 난감하기만 하다. 그렇게 교문 앞에서 어느쪽으로 가야할지 몰라 서성대고 있는데, 아까 그 남자가 담배를 문 채로 시원을 부른다. "....아..." 비니를 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모자를 벗으니 남자는 꽤나 미인이었다. 확실히 잘 생기긴 했지만, 정말 비현실적으로 잘나게 생기긴 했지만, 어쩐지 미남이라고 하기엔 뭔가 핀트가 어긋난 느낌이었고, 그렇다고 미녀라고 표현하기엔 물리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그야말로 '미인' 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 얼굴이었다. 작지 않은 키에 팔다리도 길쭉길쭉 했지만, 호리호리한 체형이라 그런지 선이 고왔다.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생소함, 그리고 이질감이 느껴지는 남자의 비쥬얼에 눈을 빼앗긴 시원은, 아- 하는 짧은 감탄사만을 뱉은 채로 그 자리에서 잠시 STOP. "...뭐냐?" "아, 아뇨. 감사합니다. 그럼..." 하아- 담배연기를 하얗게 흩뿌리며, 남자는 커다란 눈을 굴려 시원을 쳐다본다. 뭘 꼬나봐 새꺄- 커단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에 멈춰있던 시원은 후다닥 정신줄을 챙겨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 아까 그가 가리켰던 방향을 향해 몸을 틀었다. "야-" 눈만 커다랗고 삐쭉 마른 성격파탄자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단정한 이목구비에 날씬한 몸을 한, 그리고 틱틱거리는 말투와는 달리 친히 오티 장소까지 알려주는 희한한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네. 시원이 다섯 걸음 째 저쪽으로 다리를 옮기려는데, 뒤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뒤를 돌아보자, 왼 손가락에 하얀 담배를 우아하게 끼워든 남자가 입김인지 담배 연기인지 모를 것을 토해내며 시원을 향해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다. "...네?" 사람 웃는 얼굴이 원래 저렇게 이쁜 거였나? 아, 남자한테 예쁘다고 하는건 실례려나. 시원은 눈처럼 하얗게 웃는, 부서지는 연기마냥 투명하게 웃는 저 남자가 순간 너무 예뻐 보여,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감았다가 떴다. "이름이 뭐냐?" "...최시원..인데요.." "동아리 들거냐?" 뭐냐, 이 뜬금없는 질문은. "..뭐 글쎄요...아마도?" 그 대답에 남자의 입꼬리가 더 예쁜 호선을 그린다. 그 단정한 입가에 다시 한 번 담배를 가져다 대며, 남자는 시원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김희철이다. 동아리 입부기간 되면 SJ로 와." *** 신입생 환영회는 어느덧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갈 놈들은 가고, 남을 놈들은 남고- 꼴은 놈들은 뭐 여전히 꼴아 있다. 현재시각 새벽 3시. 일본어과 테이블도 어느덧 정수를 제외하고 다섯명 남짓만이 남아 있었다. "조교니임!! 정신 차리라니까요!!!" "음...." 희철과 시원이 화려하게 퇴장한 후, 정수는 새내기들과 뒤섞여 부어라 마셔라 정신없이 들이켰다. '술이 괜히 술이냐? 술술 넘어가니까 술인거다' 라고 했던 희철의 말은 정말이었던 건지, 어쩜 이렇게 꿀떡꿀떡 잘도 넘어간다. 정수는 소주, 맥주, 폭탄주 가리지 않고 쭉쭉 마셔댔다. 이미 주량을 넘어선지는 호랑이가 담배 피우다가 폐암에 걸려 승천할 적의 일이었고- 결국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애들 챙겨야 할 분이 이러면 어떡해요!! 난 어쩌라고오!!!" "..하....미..안......흐끅..." 정수가 와 준다기에 정리할때 고생 좀 덜하겠거니 기대하던 2학년 과대 김민구 학생은, 그런 저의 기대를 배반하고 신입생들 못지 않게 술이 떡이 된 조교님 때문에 깊게 좌절중. 흔들어 깨워도 보고, 애원하듯 애타게 조교님- 을 불러도 봤지만 망할 조교님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떻게든 박 조교의 정신줄을 돌려 놓으려, 그렇게 민구가 가진 애를 쓰고 있는데- 누군가 일본어과 테이블로 다가왔다. "...제가 데려 가겠습니다." 조교님을 목놓아 부르는 민구의 어깨를 두드리는 묵직한 손길. 뒤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그리고 어깨톡톡)에 고개를 돌리자, 아까 정수의 애인이라던 신입생이 서 있다. 꽤나 굳은 얼굴로, 게다가 엄청난 술냄새를 풍기면서. 영운이 날숨을 뱉는 것만으로도 알코올 냄새가 진동을 한다. 여기 이 곳은 다름아닌 술집이고, 이 술집 안에 있는 인간들은 죄다 술에 쩔어있기에 왠만해서는 술냄새 따위 못 느낄텐데- 이 남자, 대체 얼마나 마신걸까. 주유소 갔다오셨쎄여? "그쪽도 많이 마신 것 같은데..." "멀쩡합니다. 그리고 박정수 집 알아요, 나." 박 조교님 집은 나도 알아요, 애인님하. 아니 근데 말이지.. "오늘 조교님 집으로 들어가면 안되는데." "네? 왜요?" 그 이유를 설명하기엔 쪼까 거시기 하네여 애인님하. "아, 아무튼요. 그래서 우리집에서 자기로 했거든요." "...혼자 살아요?" "에? 아..네.." "..설마..방..하나?" "그..그런데요?" 아이 씨발 박정수, 고새 딴 놈한테 붙는다 이거냐? 술의 힘을 빌려 넓은 아량으로 정수를 품어주려던 영운은, 민구의 대답에 여태까지 마셨던 술이 몽땅 열이 되어 머리로 확 몰리는게 느껴졌다. 때 아닌 호구조사에 눈만 땡그랗게 뜨고 있던 민구는, 갑자기 저를 서슬 퍼런 눈으로 노려보는 영운 때문에 심박수 캐급증. 왜..그렇게..쳐다보시..나..요. 헐, 엄마 나 무셔. "하아..됐고. 박정수 내가 데려간다." "저기요!! 이, 이봐요!!!" 새끼가 어따대고 반말이야!! 확 그냥......아니..그냥..그렇다구요. 나..나 그래도 선배인데..흑흑. 어찌어찌 해 버리기엔 포스가 심하게 남다르므로 패스. 민구가 어버버 쫄아있는 사이에, 영운은 테이블에 엎더져 있는 정수를 다짜고짜 들쳐메고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영운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째서인지 척, 척, 척- 효과음이 자체지원 되는듯한 이 느낌. 그러니까 한 마디로, 살벌했다. "하아..박정수. 나 병신 만드는게 취미냐..." "으음..." 술집 밖으로 나온 영운은 택시를 잡았다. 들쳐 메고 있던 정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어 시트 안쪽에 내려놓고, 혹시나 정수가 깰까 살금살금 제 엉덩이를 그 옆에 밀어 넣었다. 휴우-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홍은동이요- 행선지를 말하자 택시가 출발한다. 출발하느라 들썩인 진동에 정수의 고개가 영운의 어깨 위로 내려졌고, 영운은 제 어깨에 기대어진 작은 머리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팔을 뒤로 뻗어 그 동그란 모양을 끌어 안았다. "어리다고 남자로 안 볼까봐...그래, 그래서 구라 좀 깠다 내가." "......" "가지고 논거 아냐. 내가 미쳤냐? 병신 주제에 누굴 갖고 놀아.." "......" "나 병신이잖아. 너한테는 나 그냥 뭣도 아닌 병신이잖아. 니가 뭐 할 때마다 나는 거기에 하나하나 다 반응하는 병신이잖아." "......" "근데...다 좋은데 말이지....우는건 안되겠더라, 오늘 보니까." 제대로 취해 잠든 정수는 말이 없었지만, 영운은 무슨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정수의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나 이렇게 병신 만들어 놓고 끝내자고 한 마디 하면 다 되는거냐? 책임져 씨발. 화장실에서 그렇게 나간 후로 정수는 이를 악물고 밀려드는 눈물을 참았지만, 지금 영운의 눈에는 감긴 정수의 속눈썹이 왠지 젖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붉기는 해도 물기는 커녕 뽀송한 정수의 눈가였지만- 아마도 젖어있는 가슴이 느껴진 것일테다. "차라리 그냥...여태까지처럼 나 병신 할게. 너 그렇게 악쓰고 우니까- 나 그냥 확 죽고 싶더라..." "......" "나 때문에 그렇게 우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진짜...아...씨발 미치겠더라..." "......" 영운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쌕쌕 고른 숨을 내쉬며 제 어깨에 잠들어 있는 정수를 바라보다, 젖은 속눈썹이 예쁘게 뻗어 있는 그의 감긴 눈가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초옥--- 앞에서 기사 아저씨가 미러로 뒷좌석을 흘끗 봤다가, 얼른 시선을 피하며 흠흠- 헛기침을 한다. 영운은 여전히 정수의 눈가에 입술을 댄 채로 멈칫- 하다가, 이내 얼굴을 떼어내고는 저 앞에 붙은 미러를 통해 기사 아저씨와 눈을 맞추었다. "아저씨, 우리가 더러워요?" "아, 아니...택시 안에서 애정생각은 좀 자제해 달라 뭐 이런..." "내가 얘랑 키스라도 했어요? 잠든 애한테 뽀뽀도 못합니까?" "허- 거 듣자하니 좀 그렇네 학생. 막말로 남자들끼리 뭐하는 짓인가 그래. 흠흠.." 거울을 통해 보이는 영운의 눈빛이 너무도 차가워, 택시 기사는 쫄은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가, 따지는 기세로 대드는 영운의 말투에 발끈한건지 뭐라고 한 마디 했다. 남자들끼리 볼썽 사납게 그게 무슨 짓이냐고- 그에 잔뜩 얼어붙어 있던 영운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남자들끼리 사랑하면 안 되나요? 몇 초간 정적이 흐르고, 영운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저씨 사모님 있죠?" "어? 그..그래 있지..." 뜬금없는 질문에 택시 기사는 의아하다는 듯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대꾸를 한다. "연애결혼 했어요? 아님..중매?" "연애결혼..했지. 꽤 오래 연애했지....하하, 새삼스럽구만 이거." "사모님을..많이 사랑하세요?" "글쎄 뭐- 이 나이 되면 사랑보다는 정으로 붙어 사는거지 뭐." "그래도 사랑해서 결혼한 거죠?" "거참 쑥쓰럽게. 거야 뭐 당연히...하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택시 기사를 보며 영운도 마주 웃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연애시절 이야기, 결혼 이야기 등등 아저씨는 떠벌떠벌 자신의 연애담을 영운에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운은 마냥 웃었다. 어느정도 아저씨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영운은 여태까지의 그것보다 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저도 그래요." "......" "근데 얘랑 나는 결혼도 못하니까, 어쩌면 아저씨가 사모님을 아끼는 것보다, 내가 얘를 더 사랑할지도 모르겠네요." 영운의 말에 택시 기사는 난감한 얼굴이 되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아저씨의 모습에 영운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그렇게 사람 좋게 웃던 웃음은 다 뭐였나 싶을 정도로 슬픈 눈을 하고서. "부럽네요 아저씨." *** "...안 받는데요?" "하아...아 모르겠다. 애인이긴 한 거 같으니까 뭐 알아서 하겠지. 몰라, 몰라!! 이젠 진짜 몰라!!" 영운이 그렇게 정수를 납치하듯 데려간 뒤, 민구는 걱정스런 마음에 몇 번이나 정수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술에 쩔어 영운의 어깨 위로 곯아 떨어진 정수가 전화를 받을 수 있을리가 만무했고, 그렇게 계속 걸다 보니 결국 진동에 못 이겨 휴대폰 배터리가 아예 나가버린 모양. 괜찮겠지 싶으면서도 아까 애인이라는 사람과 영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게 마음에 걸리는 민구였다. 이걸 어쩌나-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희철에게라도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희철의 번호는 SJ멤버 이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매일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는 사람이니 구지 번호를 몰라도 불편함이 없었고, 무엇보다 시원이 희철의 번호 유출을 차단하고 있었다. 이미 한국대 내에서는 '김희철에게 용건 있으면 최시원에게 Call' 은 공공연한 진리중의 진리. 아 놔 최시원 번호 모른다고!! 그렇게 머리를 쥐어뜯던 민구는, 희철의 사촌동생이 이번에 식영과 새내기로 들어왔다고 했던걸 기억해 냈다. 그래, 동해라고 했지 이름이. 혹시 남아있을까 싶어, 민구는 급하게 식영과 테이블로 달려갔고, 다행히 동해는 아직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집으로 해 볼까요?" "아냐 됐어. 그냥 두자고. 하아...뭐 어차피 다들 어른들인데 알아서 하겠지. 됐어, 됐어." 집으로 연락했다가는 무슨 사단이 일어날지 모른단다. 민구는 집으로 연락해 보겠다는 동해를 저지했다. 만약 시원과 희철이 아직까지 침대 위에서 엎치락 뒤치락 하고 있다면, 전화를 건 사람의 생명을 보장할 수가 없게 될 테니까. 보험드는 셈 치고 그냥 눈 감기로 했다. 그래 뭐 별일이야 있겠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안절부절 못 하던 민구 씨, 어느새 체념, 그리고 포기상태에 진입한 듯. "그나저나 동해...랬지? 너도 슬슬 집에 가야지. 벌써...세 시인데?" "가야죠. 이혁재 새끼가 깨야지 가는데...저 새끼가 계속 쳐 자고 있잖아요. 하아.." "...이혁재?" 동해의 찡그린 시선을 따라 민구가 눈을 돌리자, 그 곳에는 왠 삐쩍 마른 남자 하나가 테이블에 코를 박고 잠들어 있었다. 저 얼굴 왠지 낯이 익은데- 하고 생각하던 민구는, 다음 순간 짝- 박수소리를 내며 다시 동해를 보았다. "야구신동 이혁재 아니야?! 우와, 우리학교 왔어? 신라대 가는줄 알았는데..." "어? 혁재 아세요? 하하..그러게요, 신라대에서도 오라고 오라고 난리였는데 왜 여길 온건지 참.." "야구 좋아하거든. 너 이혁재 선수랑 친구야?" "네. 중학교 동창이요." 경기장이나 대중 매체를 통해서만 보던 사람을 눈 앞에서 보니 민구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실물이 훨씬 말랐네? 아니 이 몸으로 어떻게 그런 강스윙을 할 수 있는거지?! 초, 중학 시절 야구부였던 민구는 프로야구 뿐만 아니라 고교야구에도 관심이 있었던지라 한눈에 혁재를 알아보았다. 우왕 이혁재 생각보다 유명한데? 오올. "근데 왜 이혁재 선수가 일어나야 집에 갈 수 있는건데?" "비번을 몰라서요. 씨발 이 치사한 새끼가 같이 살기로 한 주제에 도어락 비번도 안 가르쳐 주잖아요!! 멸치 새끼..." 아가, 얼굴은 이쁜데 고 예쁜 입은 좀 험하구나. 누가 보아도 '예쁘다'고 할 만한 얼굴을 찡그러뜨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걸쭉하게 욕을 뱉는 동해의 모습은 꽤나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지방 출신인건지 동해의 말 곳곳에서는 억센 억양도 묻어났다. 희철 선배 사촌이라더니, 그쪽 집안은 다 얼굴이랑 주둥이가 따로 노는가 보네. "같이 살아?" "네. 저 대학 붙어서 이번에 서울 왔거든요. 희철이 형은 정수 형이랑 같이 사니까 거긴 못 들어가고- 뭐 어쩌다 보니 결국 이혁재한테 얹혀 살게 됐어요. 이 녀석 혼자 살거든요." 역시 지방 출신이구나. 민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 출신이냐고 묻자, 동해는 목포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목포 사나이 이동해와 서울 사나이 이혁재가 중학교 동창일 수 있었던 이유는, 혁재가 잠시 목포에서 지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때, 혁재가 동해네 반으로 전학을 왔다. 서울에서 전학생 왔다고 하도 시끄럽게 떠들어 대길래, 동해는 선생님이 혁재를 소개할 때에도 가만히 박고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소란의 한가운데를 힐끗 쳐다보았다. 뭐야, 촌놈같이 생겨가지고. 헐랭하게 웃는 삐쩍마른, 서울에서 왔다고는 하지만 뭐 별 다를거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혁재가 전학 오고 나서 한달 후, 자리를 재 배치 하면서 짝도 바뀌었는데, 어쩌다 보니 출석 번호가 가까운 동해와 짝이 되었다. 처음에는 서먹하던 둘이었지만 점차 친해지게 되었고, 알고 보니 꽤나 통하는 면이 많았다. 결국 2학년이 끝나갈 무렵에는, 둘은 죽고 못 사는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 있었더랬다. 그러나 3학년이 된 혁재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고, 둘은 그렇게 눈물의 바이바이를 해야 했다. 하지만 혁재가 서울로 간 뒤에도 둘은 계속 연락을 했고, 방학이 되면 혁재는 으레껏 목포로 놀러와 주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토달고 대드는 동해와 달리, 싹싹하고 눈치 빠른 혁재는 동해 어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결국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요정(料亭)의 빈 방들 중 하나를 아예 혁재방으로 만들어 주셨다. "흐음 그렇구나. 뭐 그럼 가서 깨워봐. 나도 슬슬 애들 좀 치우고 정리도 해야지...아이구 내 팔자야..." 민구가 일어과 테이블로 돌아가자, 동해는 여전히 꿈 속을 헤메고 있는 혁재 옆으로 가 엉덩이를 걸쳤다. 씨발새끼, 술도 존나 못 먹는 주제에 주는대로 다 받아 마시냐거. 병신아. 동해는 한숨을 쉬며 혁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하아...나도 모르겠다. "...음...동해애...." "...깼냐?" "..동해...." 호로새끼. 제 이름을 부르는 혁재의 음성에 동해는 발딱 고개를 쳐들었다가, 잠꼬대라는걸 알고 다시 고개를 박았다. 신경질적으로 혁재의 어깨에 제 머리를 쾅 박아 봤지만, 돌아오는건 혁재의 잠투정 같은 '으음..' 소리와 제 이마빡에 전해지는 통증 뿐. 씨바알...조올라 아파아... "이혁재 멍충이.." 아무리 혁재가 말랐다지만 일단은 야구 선수였다. 단련된 어깨에 박치기를 한들, 박은 사람만 손해인 것이다. 동해는 눈물이 찔끔나게 아픈 이마를 붙잡고 빙구같은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혁재를 노려봤다. 그래 내가 아파도 너는 항상 모르지. "이혁재 개새끼.." 동해가 '나 기숙사 들어갈까?' 하고 말했을 때, 혁재는 '기숙사를 왜 가? 우리집 오면 되잖아!" 라고 말하며 동해를 붙잡았다. 사실 혁재네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미안하기도 하고- 조금 다른 이유도 있고 해서, '나 너네집 들어갈래' 소리를 꺼내지 못하고 있던 동해였다. 차라리 나를 잡지 말지. 네가 잡는데 내가 어떻게 싫다고 하냐고. 개새끼- 사람 맘도 몰라주는 너는, 개새끼다. "이혁재야..." "..." 아직도 끝내지 못한 첫사랑.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사춘기. 여전히...너에게로만 달리는 심장. 이혁재 때문에 이동해는, 열 다섯 그 자리를 맴돌고 있다. "많이 좋아해." ...너무 많이. 결국 동해는 차오른 눈물이 굴러 떨어질 것만 같아, 혁재를 깨우는 것을 포기하고 그 마른 어깨에 제 얼굴을 묻은 채로 잠을 청했다. 같이 자자 혁재야. 너랑 같은 곳을 볼 수 없다면, 하다못해 같은 꿈이라도 꾸고 싶어. *** "....심바야.." "..어? 깼어요?" "나 물...." 술 먹은 사자에게 새벽 내내 시달리다가 동틀 무렵 겨우 해방되어 기절하듯 그대로 잠이 든 희철은, 목이 타는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씨발 존내 쑤셔. 존내 화끈거려. 구겨진 쿠킹호일처럼 온 몸에서 끼릭끼릭 기분나쁜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늘 느끼는 거지만, 저새끼 저거 너무 격해. 아고 샥신이야. "여기요." 희철의 한 마디에 시원은 벌떡 일어나 물 한 잔을 대령했다. 빨간 머그잔 안에 가득 담겨있던 물은, 꿀꺽꿀꺽 소리와 함께 없어져 버렸다. 이상하게 섹스 후에는 항상 갈증에 시달리는 희철이었다. 평소에는 물 같은거 잘 마시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한차례 정사를 치루고 난 후에는 큰 컵으로 몇 잔이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킨다. "물로 배 채우지 말고 뭣좀 먹어요." "생각없어. 너나 드셈." 몇 시간을 엄청난 고통과 쾌락에 시달렸던지라, 희철은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저 새끼는 어떻게 저렇게 꼭꼭 끼니를 챙겨 먹을 수 있을까. 힘도 안드나? 씨발 다음엔 내가 위에서 해볼까. "그렇게 안 먹으니까 살이 안 붙지." "몰랐냐? 나 다이어트 해." "뺄게 어디 있다고 다이어트를 해요?! 진짜에요?!!" "어. 박정수보다 무겁더라고." "형이 정수 형보다 크잖아!! 무거운게 당연하죠!!" 밥통을 열어보니 쌀이라고는 단 한톨도 보이지 않아 시원은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려 찬장을 뒤지다가, 다이어트 한다는 희철의 말에 손에 쥐었던 라면봉지를 떨어뜨렸다. 아니 지금도 꽉 쥐면 부러질 거 같은 사람이 거기서 뭘 더 빼겠다는 건데!! 시원은 떨어뜨린 라면봉지를 주워다가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희철이 몸을 늘어뜨리고 있는 소파(어젯밤에 급해서 거실 소파에서 해버렸다)로 다가갔다. "뭐, 뭐야?" "..진짠가보네. 더 마른거 같아..." "킥- 새꺄 농담이다. 나 배고프면 성질 지대로인거 알면서 그르냐. 이 새낀 다 좋은데 너무 진지해서 탈이야. 쯧쯧." "아냐, 진짜 더 마른거 같다구요." 소파에 늘어진 제 팔, 다리, 허리를 더듬는 시원의 손길에, 희철은 무슨 짓이냐며 몸을 움츠렸다. 이놈아 니 새끼 때문에 밤 사이 마른거라는 생각은 안 드냐? 하아... 아, 정말 운동이 필요 없다니까. 클클. "그래? 잘됐네. 안 그래도 겨울동안 안 움직여서 살찐거 아닌가 살짝 걱정했는데.." "형은 살좀 쪄야 된다니까요. 남자 허리가 이게 뭐에요 진짜." 이 허리에 자지러지는 놈이 말은 잘하네.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 허리께를 만지작 거리는 시원을 보고 있자니, 희철은 왠지 웃음이 났다. 평소에도 희철이라면 껌뻑 죽는 시원이었지만, 섹스 후에는 보통때보다 몇 배는 더 다정했다. 그게 참 좋단 말이지. 대개의 남자들은 잡은 고기한테는 밥 줄 필요 없다며, 몸을 섞기 전까지는 여왕님 떠받들듯 가진 공을 들이다가도, 따먹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팍 식어버리기 마련- 그러나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섹스 전 보다 섹스 후에 대접받는게 훨씬 감동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을. 시원은 비록 폭풍같이 밀어붙이기는 하지만, 폭풍이 물러간 다음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다. 안마는 기본이요, 행위 후 희철이 행여 불편해 하진 않을까 제 베개를 희철의 허리 밑에 넣어주고, 정작 자신은 베개도 없이 꽤나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했다. 게다가 희철의 자는 숨소리가 고르게 들리기 전까지는 절대 잠들지 않았다. "그래서...싫어?" "아니, 싫다 좋다 뭐 그런 문제가 아니라-" "시끄러. 싫으냐고 그래서?" 그래서 희철은 일부러 더 심술을 부려본다. 평소에도 시원을 놀리는 재미에 산다며 꽤나 제멋대로에 틱틱거리는 희철이었지만, 이렇게 정사 후에는 그 정도가 평소보다 심했다. 거의 흥부와 놀부 같은 분위기랄까. "아뇨, 좋ㅇ..." "흐읏-" ".......형?" "...하아...좋아 죽나보네 정말. 또 하고 싶냐? 왜 남의 성감대를 더듬고 그르냐..." "아, 안마 해주는 거잖아요!!" 존나 귀여워 돌아가시겠네. 어젯밤에 희철에게 몰아치던 맹수는 어디를 간건지, 지금 여기에 남아있는 이 생물은 그저 한없이 귀엽기만 했다. 사자새끼가 몇 시간 사이에 새끼사자가 됐구만. 킥킥. 희철이 많이 힘들어 보여서 시원은 희철의 허리를 주물주물 안마 한답시고 그러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허리께에 위치한 희철의 성감대를 건드렸나 보다. 희철의 가는 신음에 놀라, 시원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황급히 희철의 허리를 주무르던 손을 팟 하고 떼어 버렸다. "..흐응..." "아 형...진짜..." 시원이 희철에게서 손을 떼자, 이번에는 희철이 시원의 어깨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는 이를 세워 시원의 맨 어깨(시원은 아침에 일어나 바지만 챙겨 입고 상의는 그냥 벗고 있었다)를 앙- 하고 물어 버렸다. "윽..." "큭큭.." 시원이 아픈듯 인상을 쓰자, 희철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 잔잔한 웃음소리가 시원의 귓전을 울렸고, 결국 시원은 희철의 입술을 향해 제 입술을 돌진했다. 희철은 기다렸다는 듯 금새 입을 벌려 주었고, 그대로 딥키스로 이어졌다. 둘의 호흡소리와 조금 질척한 마찰음이 몇 번인가 오가고 나서야 붙어있던 두 얼굴이 떼어졌다. "하아...침대 가자...여기서 또 하면 나 허리 나간다..?" "응. 알았어요..." 희철이 시원의 목에 팔을 감고는 침대로 안아다 달라고 속삭였다. 키스 한번에 새끼사자는 다시 사자새끼로 변신을 한 건지, 시원은 희철을 번쩍 안아 들고 안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작은 반동이 울리고, 둘은 다시금 키스하기 시작했다. 아까만큼 짙은 키스는 아니었지만 누가 이 광경을 본다면 손으로 눈을 가려버릴 만큼 야해 보이는 키스였다. 걸~ 프리티걸~ 프리티걸~ 조금도 망설일 건 없죠~ AV의 한 장면을 연출해 내고 있는, 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에 상당히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희철의 휴대폰 벨소리. 그 소리에 시원은 잠시 입술을 떼려 했지만, 희철의 손길에 키스는 계속되었다. 아까는 전화가 오던 말던 존나 열심히도 박아대던 새끼가 왜 갑자기 배려하는 척이야. 벨소리 따위 무시하고 열심히 진도를 빼려는데- 아아, 이놈의 전화벨 멈출 생각을 않는다. 그쳤다 싶으면 또 시작되고, 이제 끝났나 싶으면 다시 시작되는 프리티 걸의 향연. "...씨발 누구..." '형!!!!' "...어? 동해냐?" 희철은 어떤 새끼던지 전화기를 타고 날아가서라도 족쳐버리고 말겠다며, 발신자 확인이고 뭐고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귀에 갖다대었는데, 뜻밖에도 전화를 건 상대는 동해였다. 다급한 듯한 동해의 음성에 희철은 무슨 일이라도 생긴건가 싶어, 제 위에 겹쳐있던 시원을 밀어내고 일어나 앉았다. "왜? 뭔일 있어?" '형, 나 지금 형네 가고 있거든? 아...혹시 자고 있던거야?' "아니 일어나 있었어. 근데...뭐? 우리집 오고 있다고?!" '어...자세한건 가서 얘기할게. 아 씨발 이혁재 이 멸치 새끼가...하아...' "이혁재? 걔 얘기가 왜 나와 갑자기?" '아, 가서 얘기한다거!! 무튼 이혁재도 데려가니까 그런줄 알아~' "뭐?!! 여보세요!! 여보세요???!!!.....아이 썅!!!!!!" 분명히 동해와 통화하는 것 같은데, 희철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자 시원은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김희철의 애정을 한 몸에 받아 가끔 시원의 질투를 받기도 하는 '우리 이쁜 동해' 아닌가. 동해 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 건지, 희철은 빈 수화기에 대고 '여보세요!!'를 열정적으로 외치다가,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르며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왜..그래요?" "...씨발...심바야 너 빨리 옷 챙겨 입어라." "...네?" 방금 전의 열기를 마저 이어가고자 여전히 상반신을 벗어 제낀채로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있던 시원은 희철의 말에 FREEZE. 갑자기 옷을 입으라 함은- 안 하겠다는 건가?! 아니 갑자기 왜!!! 것도 자기가 꼬셔놓고!!! "동해 온대. 이혁재랑 같이." "으응????? 이 시간에? 왜? 아니 그리고 이혁재 그 자식은 왜 또..." "아 몰라!! 아무튼 옷 입어. 아 씨발...나 샤워할 테니까 동해 오거든 문 좀 열어주고." "...네.." 희철은 짜증섞인 몸짓으로 쾅쾅 발소리를 내며 욕실로 들어갔다. 달칵- 소리를 내며 욕실문이 닫기자, 시원은 김 빠졌다는 듯 비척대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아...좋았는데. 한숨을 내쉬면서도 거실로 가 어제 벗어놓은 옷을 주워 입고, 소파에 남아있는 흔적을 치우기 시작하는 우리의 최머슴. 그리고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우리의 김희철씨는 다짐했다. 이동해 이혁재 요 씹어먹을놈의 색휘들, SJ에 쳐박아 넣고 4년 동안 괴롭혀 주겠설...!! 03. 희철이 샤워를 하는 동안 시원은 거실을 대충 정리하고 축 쳐진 모양으로 소파에 앉았다. 아, 난 정말 이동해가 싫다니까. 사촌을 질투해서 뭐하겠냐만은- 동해와 있을때의 희철은 평소의 '까칠도도'가 아니라 '청순발랄' 에다가 가끔 '큐티'까지 첨부된 매우 사랑스러운 버젼으로 변신을 하니, 뭐랄까 애인으로써 씁쓸하달까. 나랑 있을땐 나 놀려먹기 바쁘면서 이동해는 왜 그렇게 이뻐하는 거냐며. 시원은 동해가 싫은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지만도 않았다. 어쨌든 이동해가 나타나면 김희철의 관심의 방향이 저에게서 동해로 옮겨가기 때문에. 시원이 그렇게 동해를 원망하며 소파를 쥐어 뜯고 있는데, 딩동- 초인종이 울린다. 하..왔구나. 시원은 한숨을 내쉬며 현관으로 향했다. "하아..하아.....엥? 시원이 형?" "왔어?" "..형이 왜 여기 있어?" 성의없는 몸짓으로 시원이 현관문을 열자, 있는대로 거친 숨을 몰아 쉬며 혁재를 업고 있는(이건 업는다기 보다는 거의 등에 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동해가 서 있다. 멸치새끼 주제에 왜 이렇게 무거운 거냐며 인상을 박박 긁고 있던 동해는, 혁재가 내려지자 기다렸다는 듯 신발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희철과의 러브러브 스위트 타임을 방해 받은 것은 몹시 불쾌하고 짜증스럽지만, 딱 보기에도 무지 지쳐 보이는 동해가 불쌍해, 시원은 군소리 없이 혁재를 받아서 들어 주었다. "희철이 형은?" "샤워해." "...아침 여섯시에 깨어 있는것도 신기한데 씻는다거??" "어..뭐..." "...아 형들...혹시..어젯밤에....." "하하...." 알면 좀 미안해 하던가 자식아. 시원은 우리 형 그만 좀 괴롭히라고 말하는 동해에게 어색하게 웃어주고는, 혁재를 안방으로 데려가 침대 위에 던져놓듯 눕혀 놓았다. 동해는 여전히 마룻바닥에 엎어진 채로 숨을 고르고 있다. 더위 먹은 강아지 새끼마냥 혓바닥까지 내놓고 헥헥대는 꼴이 불쌍해 보여서, 시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동해에게 물을 떠다 주었다. 아, 나는 왜 이 집안 얼굴에 이렇게 약한 거냐며. "고마워 형....후우...." "쯧쯧, 고생했네 저거 업고 오느라. 근데 너...왜 그렇게만 입고 왔어? 잠바 어쨌어?" 동해가 물을 마시는 모양을 쳐다보던 시원은, 문득 이 녀석이 후드티에 청바지만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이 꽃샘추위에 하다못해 바람막이 노스페이스라도 입어야 하는거 아냐? 시원의 물음에 동해는 마시던 물컵을 탕-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아놔, 내가 그래서 열받아 미치겠다거- 그러더니 아예 발딱 일어나 앉아서는 인상을 확 구긴다. "하아...이혁재 저 씨발 좆같은 새끼가 내 잠바에 토했어..." "뭐?!!" "...토한 잠바 입고 어떻게 택시를 잡냐거...버리고 왔지. 아악!!!! 대학 들어간다고 이모가 사주건데!!! 씹새끼 옷값 청구할 거라거!!!" "쯧쯧..." 러브러브 스위트 타임 방해한거- 형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줄게. 너 좀 불쌍하다. 본인도 술 먹어서 힘들텐데 토사물에 겉옷을 스틸당하고, 게다가 저 시체 같은걸 업고 오느라 동해는 심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시원은 혀를 끌끌 차며 일단 소파에라도 좀 기대어 쉬라며 동해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달칵--- "어? 왔어?" "혀엉~~~ 이혁재 멸치새끼땜에 짜증나 죽겠어~~~~" "내가 진즉에 절교하라 했잖냐. 그 새끼 그거 존나 손 많이 가는 새끼..쯧쯧." 희철은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소파에 축 늘어져 있는 동해를 발견했다. 혁재 때문에 못 살겠다고 칭얼대는 동해와, 그런 동해에게 그러니까 왜 그딴 새끼랑 친구를 먹었냐며 떠드는 희철. 손 많이 가는 걸로 따지면 형을 능가할 인간 따위 존재하지 않을텐데요. 시원은 그런 둘을 바라보다가 희철 몰래 작게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식탁 쪽으로 비척비척 걸어간다. 저거 봐, 역시 이동해 앞에서는 표정 부터가 다르다니까. 쳇. "형 감기 걸려요. 옷이라도 좀 입고 나와요." 허리춤에 수건 하나 두른채로 동해 옆에 앉아서 떠들어대는 희철의 위로, 얇은 담요 하나가 덮어졌다. 시원이 식탁 의자에 걸쳐져 있던 무릎담요를 희철의 어깨 위로 내려뜨린 것이었다. 그걸 본 동해가 눈꼴시렵다며 어우- 하고 야유를 보냈지만, 희철은 쑥쓰러워 하기는 커녕 씨익 웃는다. 지금 동해랑만 얘기한다고 투정 부리는거? 쪽--- "으악!! 아 완전 닭살이라거!! 진짜 작작좀 해라!! 난 뭐 무생물이야?!" "뭐가? 내가 내꺼한테 뽀뽀도 못하냐? 큭큭." 희철은 담요를 덮어주느라 제 어깨 위로 올라온 시원의 손을, 힘을 주어 쑤욱 당겼다. 갑자기 앞쪽으로 팔이 당겨진 시원은 희철의 어깨너머로 몸이 숙여졌고, 시원의 얼굴이 이쪽으로 넘어오자 희철은 기다렸다는 듯 시원의 볼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베시시 웃는 희철과,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입꼬리는 하늘을 찌르는 시원. 그 모양을 본 동해가 완전 쏠린다며 우웩- 토하는 시늉까지 한다. 순수한 새내기 앞에서 이래도 되는 거냐며 소리를 지르는 동해에게, 희철은 '임마, 이혁재랑 둘이 맨날 야동 쳐보는 주제에 웃기고 있다?' 라고 응수. 씨발 어떻게 알았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러나 여전히 토하는 시늉을 하고 있는 동해에게 찡긋 윙크를 날린 희철은, 이내 옷 입고 오겠다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쿠당탕탕------------------ "악!!! 씨이발 뭐야!!!!!!" 그러나 희철이 안방으로 사라진 뒤, 잠시 후, 안방쪽에서 뭔가 엄청난 마찰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곧 희철의 욕 섞인 비명이 내질러져 나왔다. 거실에 있던 동해와 시원은 일단 쿠당탕- 소리에 움찔 했다가, 곧이어 터진 비명에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형, 뭐야?!" "뭐야?! 왜 그래요?!" "씨바...뭐 떨어졌어...야 불좀 켜봐." 희철의 말에, 시원이 냉큼 스위치를 올렸다. 불이 켜지자, 침대 옆 바닥에 쭈그려 엎어져 있는 희철의 뒤쪽으로, 돌돌 말린 이불 뭉치 하나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혁재 녀석은? 휑한 침대 위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저 이불 뭉치는 이혁재로 추정. "악...씹 존내 아파....야 저거 뭐냐?!" 서랍에서 옷을 꺼내려, 수납장을 열기 위해 침대 옆에 숙여 앉은 희철의 위로 무언가 무게감 있는 덩어리가 떨어졌고, 그 바람에 희철은 열린 수납장 문에 팔을 찧은 것 같았다. 다친 팔꿈치를 다른 손으로 비비며, 희철은 잔뜩 짜증이 오른 목소리로 이불뭉치를 향해 턱짓을 해 보였다. "아마도..혁재 일걸?" "..이혁재??" 새빨간 이불을 걷어내자, 시원의 예상대로 그 안에는 혁재가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잠결에 뒤척이다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나 본데, 하필 희철이 옷을 꺼내던 그 때 낙하한 것. 아이 씨발새끼 이걸 어떻게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어?!!! 후우... "씨발아, 일어나봐!! 야!!!" "형, 걔 취해서 정신 못차려. 떨어져도 모르잖아- 깨면 죽여, 깨면." "시끄러!! 멸치대가리 따위에게 수면권 따위 없다!! 일어나 이 씨밤바야!!" 말리는 동해의 손길을 뿌리치고, 희철은 잠든 혁재를 마구 흔들어 댄다. 그러나 희철이 그렇게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죽어라 흔들어 깨우는데도, 혁재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쌕쌕 잘만 잔다. 뭐야 이거 죽었나? 시체야?! 그럼 씨발, 살아나!! 그리고 내 손에 다시 죽어 새꺄!! "...오에에에에에------엑......." 불길한 소리와 함께 혁재의 가슴이 들썩 하더니- "으아아아아악!!!!!!!!" 무려 희철의 얼굴에다가 오늘 먹은 것들을 친히 확인시켜 주는 친절한 혁재씨. 안 그래도 되는데...님 좀 많이, 심하게 친절하신 듯. 그나마 아까 택시타기 전에 동해의 잠바에 1차전을 치뤘던 터라, 희철의 얼굴로 뿜어져 나온 것들은 다행히도 거의 액체였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그것'에 희철은 비명을 지르며 화장실로 뛰어갔고, 지켜보던 동해와 시원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거냐-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것'들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혁재는 여전히 세상 모르게 꿈나라를 여행 중. 징한 새끼- 그런 혁재를 바라보는 동해와 시원의 눈빛은, 뭐랄까, 한물 간 동태눈깔과 같달까. 아무튼, 둘 다 그리 싱싱한 눈빛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 씨바알!!! 이동해 너, 이혁재 멸치새끼랑 SJ 무조건 들어와!! 개새끼들 다죽었어!!!" 들어갈게, 형. 안 들어오면 지금 뿜어져 나오고 있는 '그것'들을 싹싹 긁어다가 다시 혁재 안으로 밀어 넣겠다고 바락바락 악을 써대는 희철의 모습에, 동해는 그저 열심히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한참이나 세면대에 고개를 박고 있던 희철은, 결국 다시 샤워 해야겠다며 욕실 문을 쾅- 부서지도록 닫아 버렸다. 씻고 나오기 전까지 안방에 진동하는 역겨운 알코올 냄새와 쓰레기 두 개('그것'이 묻은 이불, 그리고 이혁재)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남겨놓고. "후우......" "어? 형 나도 담배~" "옛다- 어린놈이 무슨 담배냐...그러니까 니가 키가 안 큰 거다." "우씨 키 얘기가 왜 나오냐거!! 그리고 형이랑 나랑 한 살 차이 밖에 더 나냐거!!" 시원은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혁재를 안아 들어다가 거실 소파에 던져 놓고, 알코올에 푹 젖은 이불을 개어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세탁기 안에다가 이불을 쑤셔넣고 동작 버튼을 누른다. 동해는 혁재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엉망이 된 침대 옆 수납장과 그 주변을 정리했다. 대충 한숨 돌릴만 하다 싶었는지, 베란다 창가에 기대어 있던 시원이 뒷주머니에서 담배곽을 꺼내었다. 그러자, 담배 피우는건 또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챘는지, 쫄래쫄래 베란다로 나온 동해가 저도 담배 하나 달라며 손을 척 내민다. "...씨발 이혁재 개새끼...그냥 이럴 줄 알았음 술집에서 밤 샐걸...하아..." 동해가 담뱃불을 당기며 중얼거리자, 시원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퍼뜩 고개를 들어 동해를 쳐다본다. 그래 이노무 자식들아...애초에 여긴 왜 온건데!! 동해와 혁재가 여기 오는 바람에 시원은 희철과의 좋던 분위기를 다 망쳐버렸고, 게다가 혁재가 제대로 일 치는 바람에, 아까부터 목욕탕에서는 3분 간격으로 희철의 '아이 씨바알!!'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러게 여긴 왜 왔냐고...혁재네 가면 되잖아, 너네 같이 사는거 아니었어?" "....어? 어떻게 알아? 희철이 형 한테도 말 안했는데..." "혀, 혁재한테 들었지이~" "...형 혁재랑 친했어?" "아니- 뭐 한동네 사니까 그냥 오다가다 얼굴 볼 일 많으니까..하하.." "아..그렇구나.." 나 이혁재랑 사는거 아무한테도 말 안했는데. 의아하다는듯 동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시원은 혁재에게 들었다며 대충 얼버무렸다. 시원이 형이 혁재랑 친했던가- 미간을 찌푸리는 동해에게, 한 동네 살다보니 오다가다 주워 들은것 같다고 말하는 시원. 그에 순진한 동해는 그냥 그런가보다- 고개를 끄덕인다. 아 맞다, 이 형 혁재네 옆옆 빌라에 산댔지. "...아니 근데..이혁재 이 새끼가 비번을 안 알려 주잖아!!" "어? 비번?" "도어락 비밀번호! 같이 살기로 했음 가르쳐 줘야 하는거 아냐? 하...이 새끼 취해서 집에 못 들어간 거야...내가 번호를 모르잖아. 씨이바알...후우..." 담배연기를 거칠게 내뿜으며, 성질난다는 듯 허공에 대고 붕붕 주먹질을 해 대는 동해. 아..그러니까 비번을 몰라서 혁재네 못 가니까 여기 왔다- 이건가? 쯧쯧. 시원은 동해와 혁재가 여기까지 오게 된 참으로 어이없는 이유에 대해 듣고는 픽- 웃어버렸다. 이혁재 진짜 병신이네 저거. "..왜 웃어?" "아니~ 아니야. 흠흠, 나 먼저 들어갈 테니까 이거 소리나면 탈수시켜라." "..어어...미안해 오늘." "에이그 됐다 자식아~ 내 집도 아니고 뭐..큭.." 잔뜩 풀이 죽어서 사과를 하는 동해의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괜찮다는 듯 씨익 웃어주는 시원이다. 동해도 모르는 혁재네 도어락 번호를, 시원은 알고 있었다. 10041015- 시원은 동해의 생일이 10월 15일 이라면서 쓸쓸히 웃던 혁재를 떠올렸다. 이동해가 천사다 이거냐? 병신. 혁재 역시, 열다섯 그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 * * "으...희철아아...나 무울...." 몇 시간 전까지 정신줄 놓고 들이 부어댔던 알코올이 이제서야 확 올라오는 건지, 잠에서 깬 정수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아직도 반 쯤은 잠에 취한 채로 희철을 찾는 모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정수는 지금 이 곳이 제 집인 줄 아는 것 같다. 침대 한쪽에 걸터 앉아있던 영운이 그런 정수를 보며 픽- 웃는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던 자리끼를 정수에게로 건네 주었다. 아이고 박정수, 정신 못 차리지? "하아...좀 살 것 같네...." 영운이 건네준 물을 단숨에 들이킨 정수는, 이내 가뭄든 논바닥마냥 쩍쩍 갈라지는 제 목소리를 정리하려 흠흠- 헛기침을 한다. 아...정신 차려야지. 고개를 흔들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잘 잤냐?" "어...아- 머리 아프네 근ㄷ....?!!!" "큭큭, 놀라는거 보니까 정신 제대로 들었나 보네." 익숙한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희미하게 웃고 있는 영운이 보인다. 얘가 여기 왜?! 아니...그보다 여기 어디야?!! 정수는 그제서야 눈을 똑바로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장, 벽지, 가구 그 어느 것 하나 제 방의 것이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내가 데려왔어. 너 취해서 정신줄 놓고 있는 사이에." "...왜 멋대로....아니, 아니다. 아무튼 신세졌네. 그럼 나 일어났으니까 그만 가볼게." 빈 물잔을 거두어 가는 영운의 담담하기만 한 태도에, 정수는 허- 바람 빠진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온다. 기막혀, 정말. 헤어지자는 말은 어디로 들은건지, 왜 네 멋대로 나를 여기로 데려 온건지- 목까지 차오른 것들을 말로 뱉어버릴까 하다가 그냥 관두기로 했다. 이것저것 생각하기 귀찮고, 더 이상 너랑 말하기 싫어. 정수는 영운의 시선을 무시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놔." "잠깐만 앉아봐." "놓으라고."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휘청- 몸이 흔들렸지만, 정수는 그래도 꿋꿋하게 버티고 선다. 그러나 몇 발자국 채 옮기지 못하고 영운에게 손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어째서인지 저를 붙잡는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정수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떨리는 몸 보다 훨씬 더 떨리는 심장. 속으로는 왜 이렇게 손이 찬거냐고 속상해 하는 정수였지만, 겉으로는 저를 잡은 영운의 손 만큼이나 차갑게 이거 놓으라고, 의지를 세워본다. "앉아." 말 좀 들어라 박정수. 뒤돌아 선 채로 놓으라는 말만 반복하는 정수의 태도에, 결국 영운은 한숨을 쉬며 쥐고 있던 가는 손목을 힘주어 당겼다. 윽- 소리와 함께, 정수는 조금 전까지 제가 누워있던 침대 위로 다시 엉덩이가 걸쳐졌다. "왜 이래? 끝난 사이에.." "누구 맘대로? 난 헤어지자고 한 적 없거든?" "김영운.." "시끄러. 일단 닥치고 내 말 들어." 정수가 아픈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영운은 잡은 손목을 더욱 꽉 그러 쥐었다. "하아...그래,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데? 해봐, 해봐-" "빈정대지 마." "허- 근데 너 어따대고 반말이야? 어린 자식이.." "...이럴까봐 거짓말 했어." "뭐?" 나이도 밝혀진 마당에, 그리고 이별선언까지 해 버린 마당에 김영운이 저에게 반말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둘 이유는 없다는 듯, 정수는 영운을 노려보며 말 똑바로 하라고 쏘아 붙인다. 죽일듯이 노려보는 정수의 눈빛과는 달리, 영운은 조금은 아련한 눈을 하고 정수를 보았다. "...어린 자식으로 볼까봐..남자로 안 보고 그냥 어린애로 볼까봐 거짓말 했다고.." "......" "처음 본 순간부터 너 놓치고 싶지 않았어. 잡아야겠다- 그 생각뿐이었어. 그래서..." "......" 애틋하게 저를 보고있는 남자의 너무도 진지한 고백에, 정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지금도 그 생각 변함 없다. 나...너 못 놔. 죽어도 못 놔 박정수. 아니, 안놔." "...나는..." "막말로 니가 날 가지고 논거라고 해도-" "자꾸 가지고 놀았다고 하지 마!! 죽을래 진짜?!" 이제는 빨갛다 못해 하얗게 된 정수의 손목을 더욱 꼬옥 쥐며, 영운은 죽어도 이 손 놓을 생각 없다고, 그렇게 고백 아닌 고백을 계속한다. 그에 정수도 무슨 말을 하려다가, '가지고 놀았다'는 영운의 말에 또 다시 발끈했다. 가지고 놀긴 누가 가지고 놀았다는 거야 정말!! "내가...내가 왜 널 가지고 놀아!! 그냥..처음엔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고...나중엔 형 소리 듣기 싫어서 그런거지...흑.." "....우..울지마!!" "크흡...너야말로...뭐야 정말....흑...어떻게 날 그런 놈으로 몰아 갈 수가 있어? 진짜 내가 너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해?!" "아니 나는..." "알면서...좋아하는 거 알면서..어떻게...흡..." 아, 병신 김영운. 또 울려 버렸네. 정수는 터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보였다. 사실은 둘 다 알고 있었다- 나에 대한 너의 감정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 쯤. 하지만 사랑싸움 이라는건 언제나 그렇듯 아주 작은 감정의 균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거짓말'이라는 작은 기스 하나가, 결국 상대에 대한 믿음을 흐리게 만들었고, 깨진 믿음은 서로의 눈을 가려, 서로가 스스로 튕겨져 나가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균열이 작을수록, 사람은 사소한 것에 연연하게 된다.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서럽게 훌쩍거리는 정수 때문에, 영운은 당황해 버렸다. 울리려던 게 아닌데- 난 그냥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데. "...야..울지마.." "..흡..어따대고...흐흡...반말이야..." "형 소리 듣기 싫어서 거짓말 한 주제에 웃긴다?" "너..진짜...흡..." 정수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나오는 눈물에, 결국 영운은 잡은 정수의 손목을 놓고 대신 어깨를 끌어 당겼다. 너 진짜 미워- 자꾸만 저를 밉다 하는 물기어린 음성에도 아랑곳 않고, 영운은 정수의 마른 어깨를 더욱 끌어 안았다. 이렇게 작고 여린 너를 울린 내가 죄인이다. 그래, 어쩌면 한 순간이나마 네 감정을 가지고 논 건 나 일지도 모르겠다. 미안해. "사랑해..." "....흐흡...." "...사랑해 박정수..." "...씨이....뭐야 정말....흡....병 주고 약 주냐고...흐흑..."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수는 슬금슬금 영운의 품 안으로 더 깊게 파고든다. 나쁜놈, 나쁜새끼, 나쁜자식- 술을 마시며 대체 얼마나 마음속으로 영운을 욕했는지 모른다. 그게 미워서 하는 욕이 아니라, 미워할 수 없어서 하는 욕이라는걸- 결국 정수 자신에게 하는 욕이라는걸 알면서도. 나쁜놈. 그래도 내 남자. 벌컥----- "야 김영운 일어났.....아....." "....아이 씹...." 이 분위기를 몰아 찐하게 포옹 한번 하려는데- 타이밍 우습게도 벌컥 문이 열린다. 젠장 문 잠궈 놓을걸. 종운 딴에는 아침상까지 차려놓고 동생을 깨워주는 착한 형의 모습을 실천하려 한 것이었으나, 영운의 눈빛을 보아하니 친절해도 너무 친절했나 보다. "아..아, 아침 먹으라고....하하..." "....누구...." "..후우..인사해 우리 형이야." "아, 안녕하세요!" 저 살기 등등한 눈빛에 쫄지 않으면 그건 사람도 아닌것이여. 예상치 못한 살벌함에, 종운은 괜시리 뒷머리를 긁적인다. 뭐시여, 시방- 어째서 사랑하는 형님을 고로코롬 쳐다보는가. 한편, 갑자기 문이 열리자 반사적으로 영운에게서 몸을 떼어낸 정수는, 쭈뼛쭈뼛 분위기를 살피다가 작은 목소리로 종운에 대해 묻는다. 형 이라는 영운의 소갯말에, 정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 큰 소리로 종운에게 인사를 했다. 너보다 어리니까 고개 숙일 필요 없다기에, 이내 우물쭈물 몸을 바로 했지만. "언제 들어왔어?" "..여섯 시..쯤?" "그때까지 마신거 치곤 상태 멀쩡하네. 술 좀 늘었나 보다?" "에이- 아니야. 안 마셨어 거의. 노래방에서 밤 샜다- 큭큭." "...중딩이냐..." "뭐시여!!" 그렇게 노려봄에도 불구하고 꿋꿋히 문 앞에 서있는 제 형의 태도에, 영운은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저 눈치없는 인간. 영운은 일단, 뻘쭘하니 눈만 굴리고 서 있는 정수를 토닥여 욕실로 보내었다. 그리고는 또 한 번 한숨을 뱉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나 곧 영운의 입에 머물렀던 담배 개피는, 종운에 의해 반으로 톡 꺾어 버려졌다- 실내에서 무슨 담배냐는 핀잔과 함께. 씨발, 분위기 파악 못하지? 그래, 관두자 관둬. 딴청부리듯 저의 시선을 피하는 종운을 잠시 노려보다가 이내 포기해 버리는 영운이다. 좋은 분위기 깬 건 짜증나지만 뭐 어쨌든 우린 화해 했으니까 넘어가 주지. 몇 시에 들어왔는지를 묻고, 곧 제 형의 안색을 살펴본다. 사실 아까 새벽에 정수를 데리고 왔을 때, 제 형이 집에 없어서, 영운은 내심 신경을 쓰고 있었다. "실음과잖냐. 실력 검증 차원에서 간 거다 뭐." "아- 실용음악. 보컬만 간 거냐 그럼?" "....아니 전부 다..." "뭐야 그게. 그냥 놀러 갔구만." "흠흠..시끄럽구만!!" -몇 시간 전 다른과 학생들이 술집에서 동 틀 때까지 술과 씨름을 하는 동안, 실음과는 일치감치 노래방으로 2차를 떠났더랬다. 신입생의 실력을 가늠해 봐야 한다는 명목하에, 그러나 사실은 영운의 지적대로 그냥 놀기 위해. 매년 그런 식이었기에 올해 또한 다를 건 없었지만, 묘하게 분위기가 여느때와는 달랐다. 그도 그럴것이, 한국대 역대 최고 보컬이 강림했다- 는 소문이 이미 퍼질대로 퍼졌기 때문이다. 그 소문을 검증해 보려는 심산으로 실음과 학생들은 저마다 긴장감을 감추고 있었다. 새내기들은 아직 소문을 몰라 그저 놀면 되겠거니 마냥 들떠 있었지만, 재학생들, 특히 보컬 파트의 학생들은 웃음띤 얼굴 뒤로 초조함을 숨겼다. 선 후배 관계가 엄격하기로 유명한 예체능 계열, 게다가 예능쪽에서는 방연과(방송연예학과)와 위계질서에 있어 쌍벽을 이룬다는 실음과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학생들 안에서의 이야기였다. 헤드 헌터들은 학년에 상관없이 그들의 능력을 보고, 교수들 역시 나이에 상관없이 재능을 보고자 한다. 결국 앞에서는 선배님- 해도, 밟고 올라가면 그만인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기 퍼펙트 김종운'은 이미 한국대 실음과 학생들 사이에서는 경계대상 1호로 떠올라 있었다. "자 그럼 후배님들!! 누가 먼저 노래할 건가요오~?" 분위기 살린답시고 재학생들이 먼저 나와 노래를 불렀다. 사실은 후배들이 자연스럽게 마이크를 손에 쥐도록 유도하는 연막 선창이지만. 2학년 세 명이 차례로 노래를 부르고, 이어서 려욱이 노래방 룸 중앙으로 나와, 이번에는 후배님들 차례라며 애교스럽게 웃어 보였다. 아까 술집에서 려욱이 먼저 나서서 '후배님들이랑 똑같이 스무살이니까 편하게 대해주세요오~' 하고 새내기들에게 귀여움을 어필해서인지, 신입생들은 감히 선배에게 '귀여워요~'를 남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뜻 누가 먼저 노래를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칫-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무도 안 나온다 이거냐. 애교작전이 통하지 않자, 려욱은 서로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새내기들 사이로 직접 비집고 들어갔다. 어디보자- 신입생 모두의 앞을 왔다갔다 하다가, 저쪽에 앉아서 포카리를 홀짝대고 있는 누군가의 팔을 당기는 김려욱 선배님. "아..." "아무도 안 나오니까- 나이 순으로 가죠~" "저기.." "자자, 빨리 나와요오~" 나이스 김려욱- 재학생들의 눈빛이 번뜩인다. 왜냐, 려욱이 끌어당긴 팔의 주인은 다름아닌 종운이었으니까. 종운은 갑자기 끌려나온 시츄에이션에 정신이 없는건지, 먹던 포카리를 들고 횡설수설 한다. 그런 종운에게, 려욱은 화아알짝 웃으며 마이크를 건넸다. 시방 뭐여, 나이 많다고 괄세하는거여?! 그러나 이 '쪼매난 아가'가 일단 선배라는 것에, 종운은 포카리를 내려놓고 려욱이 건넨 마이크를 받아들었다. "아..아무거나 물러도 됩니까?" "그럼요~ 아무거나 부르고 싶은거~" "아...노래 책좀.." "그냥 제목 말해요. 윤지누나, 리모콘으로 검색해 주세요." "응!" 아이고 우리 려욱이 이쁘다 잘한다 착하다 멋지다!! 그래 니가 한국대 실음과의 기둥이자 나라의 보배다 얼쑤. 노래책을 달라며 뻗어온 종운의 손을 덥썩 잡고는 그냥 제목만 말하라고 생글생글 웃는 려욱이다. 재학생들은 어화둥둥 김려욱을 맘속으로 외치며 다들 귀를 쫑긋 세웠다. 전설이 될지도 모르는 보컬, 그래 너 무슨노래 부를거니? ".....사랑은 아무나 하나....." "...네?" "..사랑은 아무나 하나..부른다구요. 태진아 님 꺼." 혹시..그 노래가...우리가 생각하는 그...사~랑은 아~무나 하~나....그거? 구수한거 그거??? 그거그거그거???? 그리고 무려 태진아'님' 이라니. 헐랭. 너무나도 경건하게 '사랑은 아무나 하나'를 신청하는 종운의 모습에 려욱을 비롯한 재학생들은 제 귀를, 제 눈을 의심했다. 일단 리모콘을 잡은 윤지(실음과 2학년, 려욱과 동기)는 '태진아 님'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를 찾아 시작 버튼을 눌렀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눈~이~라~도 마주우 쳐야아지~~~이히~" 정겨운 반주가 흘러나오자, 종운은 씨익 웃으며 마이크를 턱에 갖다 대었다. 아- 역시 태진아 님이셔. 새삼 태진아 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짙은 뽕삘에 빠져있는 종운, 그리고 신난다며 박수치고 좋아하는 새내기들과 달리- 재학생 무리들은 뭔가 배신당한 느낌에 표정이 점점 썩어 들어갔다. 장난하냐? 장난해? 그러나 려욱만은 생글생글 스마일 페이스를 유지한 채 종운의 노래에 탬버린을 쳐 주었다. 쉽게 보여주지 않을 줄 알았어.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보자. 려욱은 노래방에서 아침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김종운의 실력을 꼭 보고야 말겠다며 속으로 결의를 다졌다. 려욱이 생각하기에는 지금 종운의 트로트 한마당이 '가진자의 여유' 쯤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김종운은 김려욱 만큼 복잡한 뇌를 소유하지 못했다. 단순명료- 그냥 뽕짝이 좋아서 뽕짝을 부르는 것 뿐. "......하아....또...또 불러요?" 하...귀신같은 선배님. 쪼매난 고추가 맵다더니 요 아가 보통이 아니구만. 다른 선배들이 지쳐 쓰러지고, 새내기들이 모두 잠의 세계로 빠져버린 이 시점에- 종운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려욱을 마주하고 있었다. 현재 시간 아침 다섯 시. 목 아프다고 칭얼대도 려욱은 한결같은 미소로 '한곡만 더~'를 외치고 있었으니. 아놔 정말 더 이상은 못 부르겠어!! "하..나 진짜 못 부르겠어요.." "그래요? 그럼 좀 쉬었다 불러요- 내가 하나 부를게요오." 아악!!!! 미친거 아냐 이 꼬맹이?!!!! 종운이 처절한 눈빛빔을 저에게 쏘던지 말던지, 려욱은 상콤한 몸놀림으로 마이크를 집었다. 뭐 부르지- 잠시 생각하다가 고른 곡은,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 "아직도 넌~ 혼자인 거니~ 물어 보네요~ 난 그저 웃었죠~" 그러고 보니 려욱은 노래방에 와서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지치기도 하고 졸립기도 해서 소파에 축 늘어져 고개를 숙이고 있던 종운은, 려욱의 노랫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좀 예쁘네? 귀에 확 꽂혀 들어오는 미성에 종운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아무리 어려도 스무살이면 목소리가 다듬어 지고도 한참 지났을 텐데, 려욱의 음성은 사춘기 전의 소년의 목소리 같았다. 여자 노래를 원키로 부르는 데에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고, 부르는 려욱 또한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잘도 불러제끼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감상을 했을까- 2절까지 다 불렀는데도 노래가 후딱 끝나버린 것만 같았다. 아쉬움에 종운이 눈을 뜨자, 려욱이 빙긋 웃으며 종운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한곡만 더 불러요. 진짜 한곡만 더." "...진짜죠?" "큭큭. 진짜죠 그럼. 대신 답가 해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불러줘요." "..답가요?" "내 노래. 괜찮지 않았어요?" 한쪽 눈을 찡긋 하며 웃는 려욱의 미소에, 종운은 뭔가 알았다는 듯 아- 하고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날이 새도록 주구장창 노래를 시킨건, 저 아가가 원하는 노래가 안 나와서 였구만. 여전히 웃는 얼굴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마이크를 잡는 종운. 그래 답가...뭘 부를까나. "사랑 한다고~~~~ 말~할걸 그랬~지~이~~~" 또 다시 옛스러운 반주가 흘러 나오자, 려욱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버렸다. 하아..그래 니가 짱머그셈. 이젠 모르겠다, 나도 포기한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는데, 귓가에 들려오는 멜로디가 무언가 이상하다. 슬쩍 앞을 보자, 종운이 리모콘을 들고 템포와 버젼을 바꾸고 있다. 뭐하는 거래. 려욱은 의아한 눈으로, 그러나 가만히 종운이 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빠르기를 2템포 정도 빠르게 하고, 멜로디를 R＆B로 바꾸고, 그리고 잠시 뒤- 크게 숨을 들이 쉰 종운이 드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참고로 곡목은 김추자의 '님은 먼곳에'. "님이~~아니이면~~~~못산다 할 것을~~~~" 남자가 부른 '님은 먼곳에'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런 버젼으로는 더더욱. 무엇보다 노래방에서 '님은 먼곳에'를 선곡한다는 것 자체가 려욱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뽕짝 마니아 인줄 알았는데, 그냥 올드송을 좋아하는 건가. 희한하게도 R＆B버젼 '님은 먼곳에'는 거부감 없이, 마치 원래 그 버젼이었던 것 마냥 참 듣기 좋았다. 그리고- 아...괜히 역대 최고 소리가 나온게 아니구나 싶은 종운의 목소리. 트로트를 부를 때에도 성대가 남다르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종운은 벌써 몇 시간째 거의 혼자서 노래를 계속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목이 쉬기는 커녕 목소리에 약간의 흔들림도 없었다. 성대가 강하다는 것은 려욱도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노래를 들으니 새삼 가슴이 다 뭉클할 지경이었다. 언젠가 실음과에서 악명높은(점수 짜게 주기로 유명한) 박 교수에게서 A를 받았던 려욱은 교수실로 쳐들어가 왜 A+가 아니냐며 따진 적이 있었다. 박 교수는 한참 열을 내는 려욱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었다. '자네 노래는 참 완벽해. 그런데...너무 완벽해서 심장을 울리게 할 여백이 없어. 그래서 A야.' 라고. 려욱은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분명 자신의 노래를 듣고 감격했다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몇 인가 있었고, 완벽한 노래라면 그거야말로 A+를 받아야 하는것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상 따진다고 학점이 올라갈 것도 아니고, 박교수에게 A를 받아낸 것 자체가 임파서블 이라며 다독이는 동기들 때문에 성적 이이 신청은 안 하기로 했었다. 그리고 려욱은 지금, 박교수가 말했던 '심장을 울리게 하는 여백'과 만나고 있었다. -- "근데 방금 그 사람...누구냐?" "일어과 조교." "아....응? 일어과? 근데 왜 여기있어?" 대충 상황설명을 마친 종운은, 방 문 밖으로 보이는 욕실문을 흘끗 쳐다보며 정수에 대해 물었다. 그에 시큰둥하게 정수의 직책을 대는 영운. 아 그렇구나. 아니 근데 일본어과 조교가 왜 너랑 있냐? "내 애인이니까." "아 그래.....뭐?!!!!!" 애인- 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영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이상하다는걸 깨닫고 소리를 버럭 내지르는 종운. 니 시방 뭐라고 했냐!!! "아 시끄러. 귀청 떨어지겠네..." "너, 너....지금..뭐라고 했냐?" "뭐가." "저..남자.." "...내 애인이라고..." 갑작스런 영운의 커밍아웃에 종운은 멍해졌다. 시방 뭐여. 김영운이는 남잔데...저 남자가 애인이고....남자랑 남자랑 사귀는 거고...그럼....?!!! "너...호, 호모냐?" "아- 진짜 호모가 뭐냐. 게이 섹슈얼 이라고 하자." "씨밤 그게 그거지!! 너 미쳤냐?!" 미치겠군. 버럭 소리를 지르는 종운을 보며, 영운은 새벽 택시에서의 씁쓸한 감정이 다시 밀려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기사 아저씨가 저희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을 땐, 따끔하긴 해도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가장 가까운 사람, 가족인 종운이 이런 반응을 보이니 영운은 어쩐지 서글퍼져 버렸다. 여태까지 '나'를 봐온 사람이, 그럼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 사람이- 내가 남자 좋아한다니까 한 순간에 날 미친놈으로 보네. 하하...너무한다 김종운. "그래서...너도 내가 더럽냐?" "씨발 그럼 이게 정상이냐?! 장난하는 거지? 어?" "...장난 아니다.." "미친놈아!! 정신차려 김영운!!" 저에게 미쳤다고 손가락질 하는 종운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종운에게 만큼은 이해받고 싶었다. 아니, 이해는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이런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기를 바랐다. 그런 영운이기에, 지금 종운의 반응은 꽤나 상처가 되어 심장을 후볐다. 이 아픔은 몇 시간 전 정수가 저를 잠시 버렸을때의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아픔이었다. 정수의 이별선언에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면, 이번엔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뭐랄까- 아래로 아래로 계속 내려가버리는. 침식(沈熄)하는 심장. "..형 너무하는거 아냐? 어떻게 형이..." "임마 너야말로 어떻게...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말이 안될건 또 뭔데? 난 사랑도 못하냐?" "김영운!!!!!!" "씨발 그래, 나 더럽다. 됐냐?!" "야!!!" 아래로 침식하는 심장은 늪에 빠진 것처럼, 그렇게 점점 가라앉을 뿐이다. 괜찮아. 내 하늘만 지킬 수 있다면. 나 설 자리쯤 없어져 버려도- 괜찮아. 난 괜찮아. "....니가 더럽긴 뭐가 더러워?" 두 형제가 서로 죽일듯 노려보며 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하나가 둘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영운과 종운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씻고 나온 정수가 방 문 앞에 서 있었다. "....나가자 정수야." "놔 봐." "박정수..." "놔 보라고. 저기요, 영운이 형님. 얘 어디가 더러운데요?" "나가자고!!" "씨발 놔!! 네?! 말해봐요!! 어디가 더러운데!!! 악, 놓으라고!!" 다 들어버린 건가. 세수를 한 건지 머리카락에 송글송글 물방울을 매달고 있는 정수는, 머리카락보다 조금 더 젖은 눈을 하고서 이쪽을 보고 있다. 영운은 종운의 어깨를 턱- 소리가 나게 밀치고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정수의 어깨를 감싸 안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그런 영운의 마음과는 달리 정수는 나가지 않으려 몸에 잔뜩 힘을 주었다. 박정수 이러지 마. 어젯밤 헤어지자던 그 말은 어디로 던져버린건지, 정수는 우리 영운이 더럽지 않다며 바락바락 악을 써댄다. "...영운이....안 더러워요....우리...안 더럽다구요....흡..." 결국 차오른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또르르 흘려내 버리는 정수. 충격받은 얼굴로 가만히 방 한가운데 서 있던 종운은, 영운의 아픈 눈빛에 정수의 슬픈 눈물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가만히 그들을 응시할 뿐. 영운은 씨발- 낮게 욕을 뱉으며 억지로 정수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방을 빠져나갔다. 큰 손으로 제 눈을 덮어 조금은 우악스럽게, 그러나 따뜻하게 눈물을 닦아주는 영운을 올려다 보며, 정수는 아까보다도 더 울컥 하고 무언가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남자의 어디가 더럽다는 건데요? 이렇게 따뜻한 남자가- 대체 이 남자가 왜 더럽다는 건데요? 우리..더럽지 않아요. 한국 대학교 권력의 핵심, 동아리계의 최강자 SJ. SJ- 그들은 누구인가. < SJ에 대한 상세 보고 > - 총괄 및 지휘: 김희철 (27세, SJ리더) SJ의 창설자이기도 한 희철은, 한국대 동아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원도 소년인 희철이 서울에 있는, 그것도 우리나라 최고로 꼽는 한국대에 입학함으로써 그는 난생 처음으로 제 1도시에 발을 들였다. 기숙사 신청 전쟁에서 참패하여 대충 싼 하숙집을 구해 들어간 희철은, 좁고 더럽고 게다가 프라이버시가 전혀 보장되지 않는 대한민국 하숙의 실태에 좌절하여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부르조아 대학생이 되겠다- 라는. 어이없게도 희철이 SJ를 만들게 된 이유는, 학문에 대한 열정도, 한국대의 권력으로 떠오르겠다는 야망도 아닌, 그저 '돈이 필요하다'라는 단순한 목적에서 였다. 희철은 빼어난 미모로 입학과 동시에 본의 아니게 한국대의 남녀노소를 현혹시켰고, 희철에게 현혹된 학생들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희철에게 레포트와 족보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그 어떤 레포트를 받아 보아도 제가 쓴것만큼 그럴싸 해 보이는 게 없다는 것에 착안, 희철은 '교내 창업'을 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결국 SJ는 만든지 반 년 만에 최고 권력 동아리로 우뚝 서게 되었다. 잔머리는 한국대 최고라고 자부하는 희철은, 동아리 지원금과 동아리방을 제공받기 위해 '밴드부'로 SJ를 둔갑시키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구지 밴드부로 정한 이유는, 역시나 현실적이었다. 자금난에 치달았을 때 악기를 팔자- 라는 생각에서 였으니. 어쨌든 여태까지 졸업하지 않고 있는 바람에 창설자가 아직도 리더인 것이다. 총괄 및 지휘라는, 이름만 그럴싸한 가장 하는 일 없는 자리이긴 하지만, 그가 없으면 SJ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희철이 휴학생 신분이던 6년 동안, 그는 단순히 동방을 들락날락 거리며 놀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문이사예체 그 어느 전공에 상관없이 도강(몰래 강의를 듣는 것으로, 엄금 하는 교수가 있는 반면 자리가 남는 강좌에서는 모른척 눈감아 주기도 한다. 출석이나 학점 등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강의를 섭렵했으며, 기존에 있던 동아리는 물론 휴학기간 6년 동안 생긴 신생 동아리 사람들과도 안면을 터 두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어버렸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다른 이 시대- 6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SJ가 변함없이 꼭대기에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희철 덕분이다. 무엇보다 SJ에서 생산하는 각종 레포트의 3분의 2 정도가 희철의 손에서 나오고 있었으니- 취미가 '레포트 작성'인 그를, 한국대 학생들은 '몬스터'라 부른다. * 특이사항: 일상용어의 반 이상이 욕설로 되어 있으며, 스물 일곱인 주제에 아직 눈가에 주름 하나 없다(항간에는 마녀라는 이야기도 있다). 문이사예체 통틀어 다방면에 지식이 풍부하지만 영어 실력은 error. 영어 포비아로 악명이 높다. - 운영 및 회계: 최시원 (21세, SJ 제 2 권력자, 리더의 애완동물) 원래 SJ에서 회계를 담당하던 수학과 정윤호(06학번, 군 복무중)가 군대에 간 뒤로 이과생 멤버들은 돌아가며 회계를 담당했는데, 08학번을 맞으면서 기존 이과생 멤버들의 대부분이 졸업을 하거나 군 입대를 하게 되어, 시원은 SJ에 들어오자마자 희철이 내미는 장부와 금고 열쇠를 떠안아야 했다. 이과생이라고는 저 뿐이었으니 뭐라 반박의 여지도 없었지만, 일단 희철의 말(이라고 쓰고 명령이라 읽는다)은 시원에게는 곧 성경이나 다름 없었으니. 고등학교(한국대 부속 고등학교 출신) 시절에 전교 1등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과 전교권에서 놀았던 그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한국대로 진학을 했다. 또한 고딩시절 '잘 놀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대 입학과 동시에 그 무수한 저 좋다는 여자분들을 다 바이바이 떠나보내고 김희철이라는 남성에 꽂혀버리는 사태가 발생. 어떻게 멀쩡하게 여자랑 잘 짝짜꿍하던 대한남아가 한 순간에 호모가 될 수 있느냐, 이건 말도 안된다- 라고 열변을 토하던 시원의 고교동창들은 기여코 한국대까지 쳐들어 왔으나, 마치 미확인생물체와 같은 희철의 비쥬얼에 그냥 자체 아닥(아가리 닥치고)하고 내뺐더라나 뭐라나. 아무튼 그렇게 떠안은 회계 자리를 지금껏 내려오지 못하고 있고, 놀기 좋아하는 희철을 대신해 SJ의 전체운영도 현재 시원이 맡고 있다. 한대생들은 그런 시원을 '희철짱팬', '김희철진리교' 혹은 '김희철의 농노'라 부르며 안타까워 하지만, SJ멤버들은 알고 있었다- 희철이 운영에서 손을 떼게 됨으로써, 시원 외의 다른 멤버들과는 접촉할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는 것을. 한마디로, 희철을 독점하기 위한 시원의 작전이었다는 것을. 매일같이 캠퍼스를 진분홍으로 물들이는 이 농도 짙은 김희철의 농노를, 한대생들은 '몬스터볼' 이라 부른다. 몬스터를 가둘 수 있는 유일한 장치. * 특이사항: 독실한 주님짱팬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인 김희철에게 심하게 집착한다.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시원은 김희철이 하루에 숨을 몇 번이나 쉬는지, 그의 머릿카락 갯수는 몇 개인지, 심지어 1분에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리는지도 알고 있다고 한다. - 물건 검수 및 검토: 김려욱 (20세, SJ의 실권자, 막내온탑) 려욱은 열 아홉에 한국대 음대 수석으로 입학해 꽤나 화제를 뿌렸었다. 희철이 그런 려욱을 놓칠 리가 없었고, 려욱 역시 SJ라는 맛있는 거대 권력을 뿌리칠 리가 없었다. 결국 려욱은 SJ의 최연소 멤버로 가입을 하게 되었고, 처음 한 학기 동안만 보더라도 음대 레포트계의 전설로 남을 만한 역작을 몇 작품이나 생산해 냈다. 한 학기동안 려욱을 지켜본 희철은, 려욱이 엄청난 완벽주의자 라는 것을 캐치해 내고는 여름방학 즈음 부터 그에게 매우 중요한 임무를 부여해 주었다. 그것이 바로 물건 검수 및 검토- SJ에서 생산되는 모든 산물들(레포트, 족보, 과제물 등등)을 일명 '물건'이라고 부르는데, 완성된 물건들을 한번 더 검토하고 수정하는 것이 바로 려욱이 담당하고 있는 일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려욱의 레포트(작품이라는 찬사가 괜히 나온게 아니다)는 수정을 볼 것이 거의 없었지만, 다른 멤버들(그들도 사람이기에- 아니 그렇다고 려욱이 사람이 아니라는건 아니다)의 물건에서는 약간의 결점들이 발견되곤 했다. 띄어쓰기 실수, 문법 실수, 오타 등 매우 사소한 결점이라 왠만해서는 찾을 수 없는 부분들도 려욱은 귀신같이 발견해 냈다. 또한 려욱은 SJ에서 희철 다음으로 고수입을 올리고 있는데, 이는 SJ의 물건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것이 바로 려욱의 '특수물건'이기 때문이다. 간혹 교수들 중에 반드시 손글씨로 레포트를 작성해 오라고 하는 개나리스러운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내용의 충실도도 중요하지만 일단 '글씨의 깨끗한 정도'도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말로는 학생들의 성의를 보기 위해 그런 것이니 글씨체 따위 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교수들도 눈이 달렸으면 안 볼 수가 없는 부분인 것이다. 만약 A와 B의 레포트가 비슷한 수준이라고 했을때, 어느 한 쪽이 글씨가 조금이라도 더 깔끔할 경우, 아무래도 그쪽으로 0.01점이나마 기울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어렸을때부터 작곡을 배운 려욱은 악보 그리는 것에 익숙해 있었고, 그 덕에 빠른 필기를 자랑했다. 거기에 꼼꼼한 성격이 플러스 되어 마치 타이핑을 한 듯한 군더더기 없는 글씨체를 가지게 되었다. 악보 때문에 손으로 끄적대는걸 좋아하게 된 려욱은, 심심할 때 마다 웹에 떠돌아다니는 갖가지 글씨체들을 따라 쓰는 취미가 생겼고, 그 결과 현재 약 35가지의 필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같은 레포트라도 역시 '핸드 메이드'는 프라이스가 높아서 려욱의 특수물건은 다른 물건들에 비해 조금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비싸도 없어서 못 구한다는 특수물건- 희철은 이를 이용해 한 달에 한 번씩 '특수물건 이용권'이라는 상품권을 경매에 부쳐 SJ 수입에 크게 일조하고 있다. * 특이사항: 평소에는 애교만점 방글방글 귀엽기 그지 없으나, 학문적인 면에서는 카리스마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음대생들은 김려욱을 '두 얼굴의 욱마에'라고 부른다. - 현장 거래 및 해결사: 이성민 (21세, 김희철의 동네북, SJ의 물주) 사실 성민은 SJ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멤버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성적이 좋은것도, 그렇다고 SJ멤버 누군가와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입학과 동시에 권력의 꼭대기층으로 올라 앉았다. 하지만 SJ의 그 누구도 성민의 영입을 반대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성민은 한국대 역사상 손으로 꼽는 '기부입학'의 혜택을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콧대 높은 한국대는 여간해서는 기부입학자를 받지 않는데, 그런 이 곳에 돈을 내고 들어왔다니. 바로 이 점에 희철은 주목한 것이었다. 동희(신동희, 유아교육과 조교, SJ출신)에게서 성민의 입학 소식을 전해들은 희철은 바로 스카웃 하러 유교과로 달려갔고, 앞 뒤 잴 것도 없이(성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성민을 SJ에 집어 넣어 버렸다. 그러나 희철의 포스에 눌려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SJ에 입성한 것 치고, 성민은 꽤나 적응을 잘 했다. 사람들은 모두 성민에게 친절했다- 그도 그럴것이, 금전감각 ZERO인 성민은 언제 어디서나 빙긋 웃으며 플래티넘 카드를 시원하게 긁어주었기 때문에. 하지만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슬슬 저에게도 일거리를 달라며 칭얼대는 성민 때문에 희철은 난감해 졌다. 대체 이 아이에게 어떤 일을 시켜야 한단 말인가. 삼 일 밤낮을 고민한 끝에, 희철은 성민에게 '현장 거래 및 해결사'라는 직무를 부여했다. SJ의 물건들은 현장거래를 지향하여(메일로 거래할 경우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이 높았고, 물건을 받아놓고는 시치미를 떼고 돈을 지불하지 않는 경우도 실제로 있었다) 유학생이 아닌 한 거의 100% 현장거래로 이루어 지고 있었다. 한 달 정도 희철이 성민을 지켜본 결과, 그의 성품은 매우 허술하고 헐랭했으며, 눈치도 없고 심지어 땡깡 부리기의 최강자였다. 그가 소지하고 있는 능력치라고는 귀여움과 애교 정도. 있는 집 막내 도련님 이라더니 이건 뭐 초딩도 아니고 쯧쯧. 그런 성민에게 현장거래를 맡긴다고 하자 SJ멤버들은 펄쩍 뛰었더랬다. 그러나 누가 그랬던가- 단순한게 최고라고. 성민은 '물건과 돈을 제때 맞바꾼다'는 철칙을 절대 깨는 일이 없었다. 다른 SJ멤버들의 경우, 지인(知人)이 부탁하면 물건을 조금 싸게 넘긴다거나, 혹은 현장거래 과정에서 부당이익(교환금액의 일부를 떼어 먹는다거나 '고객'에게 수수료를 요구하는 경우)을 취하는 사례가 가끔 발생하곤 했는데, 성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1차적 명제에만 충실했다. 플래티넘 카드 소지자인 성민이었기에 부당이익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거니와, 무엇보다 사고방식이 초단순했기에. 그 단순함과 특유의 땡깡스킬로 '해결사'일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님은 물건값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으니 그거 줄 때까지 나는 여기 드러누워 땡깡을 부리겠어효- 라고 말하는 듯한 성민의 모습에(그리고 실제로 돈 내놓으라고 협박이 아니라 땡깡을 부린다), 외상 고객들은 질려서라도 물건값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민이 이렇게 자신의 단순함을 열심히 어필해도,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희철의 '쓰담쓰담' 뿐. 그러나 아이들이 칭찬을 받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처럼, 성민도 그저 칭찬 한번 받기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행하는 것이었다. SJ멤버들은 말한다- 이성민이 기부입학 씩이나 한 주제에 '겨우' 유교과를 선택한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라고. * 특이사항: 살짝 푼수끼가 있고 눈치가 좀 많이 없지만, 애교만은 국보급이다. 돈 마를 날이 없는만큼 금전감각도 없다. 기본적으로 앙칼진 성품을 지니고 있으나, 포스최강 리더 희철에게만은 깨갱하는 비굴함도 엿보인다. - 캐스퍼 중심멤버 이외에 약 10여명의 멤버들이 있지만, 그들은 유령회원이나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한대생들 그리고 SJ의 중심 멤버들은 이들을 '캐스퍼'라 부른다. 캐스퍼들은 문이사예체 각 대학에 포진되어 있는데, 이들은 전공자만 들을 수 있는 수업이나 도강이 불가능한 수업 등을 듣고 그 내용을 전달해 주며, 되도록 많은 수업을 신청해 각 교수 혹은 강사의 특성을 파악한다. 강의노트와 교수(강사)분석 보고서를 희철에게 넘기고 그에 합당한 댓가를 받는 캐스퍼들은, SJ를 정식 동아리로 인정받도록 이른바 '머릿수'를 채워주는 역할도 한다. 동아리 명보에는 캐스퍼들의 이름이 올라 있으나 이들의 정체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 만약 캐스퍼가 누군지 학생들이 알게 된다면, 분명 그들을 닥달하여 SJ에 입성하려 하거나 접촉하려 들 터였기 때문에. - 현재 SJ의 구성원은 총 열 다섯명이다. 중심멤버: 희철, 시원, 성민, 려욱 캐스퍼: 11명(추정) 그리고 올해 영입하려는 예상 인원은 약 5~6명 정도이며, 캐스퍼는 올해도 역시 쥐도 새도 모르게 희철이 독단적으로 캐스팅 할 것이다. 캐스퍼들은 어디까지나 '캐스퍼'일 뿐이다. 그들은 소스를 제공할 뿐 물건을 제조하는 일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는다. 놀랍게도 한국대를 쥐락펴락하는 가공할만한 물건들은, 현재 겨우 네 명의 중심멤버(그것도 성민을 제외하면 세명)가 생산해내고 있다. * * * "어서오세요-"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편의점 안은 한산했다. 꽤 넓은 매장이었지만 점원이라고는 카운터에서 인사를 하는 남자 알바생 하나 뿐이었다. 성민은 졸린듯 귀엽게 눈을 부비작대며 매장 뒤쪽의 냉장고로 향했다. 당근주스...당근주스...엥? 당근주스가 없자낭?! "저기요, 당근주스 없어요?" "아..거기 오른쪽 맨 윗칸 보시면 주스들 쫙 있거든요.." ".....당근주스 안보이는뎅...힝.." 까치발까지 서서는 낑낑대며 주스들을 헤집는 성민. 그 모양을 카운터에서 시크하게 켜보던 알바생은 결국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한숨을 쉬며 냉장고로 향했다. 못 먹고 자랐냐? 그게 손이 안 닿게. 하- 진짜 사람 귀찮게 하기는. 꺼멓게 그늘이 지는 느낌에 성민이 뒤를 돌아보자, 제 시선보다 조금 위쪽에 잘생긴 얼굴 하나가 보였다. "...당근주스...." 뭐하는 거얌. 잘생긴 얼굴은 분명 조금 전까지 귀찮은 티를 팍팍 내고 있었는데, 성민과 눈이 마주친 순간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아무 말 없이 그렇게 몇 초 동안 제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는게 민망해서, 성민은 작은 목소리로 '당근주스'를 재차 말했다. 주기 싫음 말로 하라그여!! 섬미니 무서어..므잉. "아, 여기 있잖아요. 딱 있구만. 흠흠." "못 볼수도 있죠! 라벨 돌아가 있잖아영!!" 성민이 쥐어 짜낸 '당근주스' 한 마디에 정신을 차리고는 금새 주황색 액체가 든 병을 꺼내주는 알바생- 가슴팍에 붙어있는 명찰에는 선명하게 그의 잘난 이름 세 글자가 붙여져 있다. 바로 시원에게 SJ 가입을 권유받기도 한, 한국대 수석입학에 빛나는 잘난 남자, 조 규 현. 삑- 하는 기계음이 들리고, 화면에 '돈돈 당근밭 1000원'이라고 뜨자, 성민은 지갑을 꺼내 들었다. 잠시 지갑 속을 뒤적이더니 현금이 없는건지 슬금슬금 카드를 꺼내 들었다. "현금..없어요?" "..네. 1000원부터는 카드결제 되죠?" 귀엽게 오물오물 잘도 말하네. 규현은 평소 같았으면 조금은 짜증스럽게 내밀어진 카드를 낚아 채었겠지만, 왠일로 성민의 작은 손에 들려있는 녹색 카드를 순순히 받아 들었다. 1000원짜리 사고 카드 내미는 놈, 담배 사고 T머니로 결제하는 놈들은 편의점의 '공공의 적' 이었지만- 귀여워서 봐준다. 쳇. "...한국대 다녀요?" "네에- 그런데요." 고등학생인 줄 알았는데 대학생이란다. 그것도 무려 선배. 성민이 내민 것은 카드 겸용 학생증이었고, 규현은 그것을 알아본 것이다. 요즘 학생증은 신용카드 기능 겸해서 일명 '전자학생증'으로 발급되어지고 있는데, 모양 및 기능은 일반 신용카드와 거의 같지만, 학생사진과 학번, 전공 등이 카드 한가운데 떠억 하니 박혀 있다. 기존 학생증을 가지고 있는 고학번들(한국대에서는 06학번까지 일반 학생증을 발급받았다) 중 일부는 편해 보인다며 새로 신청하는 경우도 있는 반면, 귀찮기도 하고 카드에 사진 박혀 있는건 가오 떨어진다며 기존의 것을 그냥 소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디 보자...유아교육과? 전공도 꼭 저 같구만- 풉. "나돈데..." "우와 진짜요? 무슨 과에요?" "전자과요." 전자과 라고? 이상하네- 그럼 내가 모를리가 없는뎅. 우움. 규현의 대답에 성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것이, '물건'의 현장거래를 담당하고 있는 성민이었기에 왠만한 한대생들 얼굴은 거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건수요가 가장 많은게 바로 이공계, 그 중에서도 공대 쪽이었다. 제 아무리 성실히 공부하는 공대생이라 해도, 아니 학문에 대한 열의가 높으면 높을수록 SJ와의 접촉은 피할 수가 없었기에, 공대생들은 싫어도 좋아도 대부분이 성민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성민 역시 주 고객층인 공대쪽은 얼굴을 외워두자고 생각하여 왠만한 공대생들(게다가 시원이 전자과이다 보니 시원을 통해 컨택해 오는 전자과 고객들이 많다)은 거의 알고 있었으니- 공대생, 그것도 전자과 학생을 저가 모를리가 없다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규현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기억에 없는 얼굴이다. 설마 이 얼굴에 신입생일리는 없고. 힝..기억이 안나. "...왜...그렇게 봐요?" "아, 아니에영!! 그럼 수고하세영~" 에이 몰라. 머리 아프게 생각해 봤자 소용 없을 것 같아서, 성민은 규현의 손에 들린 제 학생증을 쏘옥 뽑아들고는 카운터에서 멀어졌다. 뒤에서 규현이 손을 뻗었지만, 성민은 당근주스를 꼬옥 쥐고는 빠른 걸음으로 편의점을 빠져 나갔다. 뭐가 그리 신이 나는건지 폴짝폴짝 스텝까지 맞추면서. 나 참, 어린애도 아니고- 당근주스 하나에 그렇게 행복할 수 있다니 부럽네. 큭큭. "08학번...유아교육과...이성민..." 귀엽네 제법. 규현은 실소를 터뜨리듯 풋- 하고 작게 웃음을 뱉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길게 뻗은 제 손가락을 스쳐간 작고 하얀 손을- 조금 꽉 쥐어보고 싶다고. 이 손 안에. * * * 영운은 악을 써대는 정수를 겨우겨우 끌어다가 바이크 뒤에 태우고 무작정 달렸다. 제 허리를 끌어안은 가느다란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에, 제 등에 맞닿아 있는 마른 가슴이 계속해서 울리는 것에- 이를 악 문 채로. 형이 뭔데 얘를 아프게 하는건데? 나한테 그러는건 참을 수 있어, 아니 얼마든지- 때리든 밟든 죽이든 맘대로 하라고. 근데, 내 하늘을 향해 소리 지르지는마. 내 하늘을 향해 돌 던지지 말란 말이야. 메아리 한번에 비를 내리는게 내 하늘이고, 돌팔매질 한번에 무너져 내리는게 내 하늘이니까. 끼이이이익-------- "내려..." "....흡..." 그렇게 무작정 달리다가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한강. 이른 아침의 한강 풍경은 연인들의 시간인 밤과 달리 한가롭고 활기찬 분위기였다. 강아지를 산책 시키는 노부부, 자전거를 타고 있는 몇몇 사람들, 그리고 조깅하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포진해 있었다. 영운은 가장 인적이 드물어 보이는 곳에 바이크를 세우고, 아직도 헬멧에 김이 서리도록 울고 있는 정수를 내려 주었다. "하아...그만좀 울어라.." "흐흡...흑..." "박정수..." "..너..니가..뭐가 더러운데? 왜..흡...왜 니 입으로 그딴 소리를 해?!" 헬멧을 벗기자, 아니나다를까- 눈물로 범벅이 된 정수의 얼굴이 드러났다. 영운이 제 헬멧을 벗겨내거나 말거나 정수는 입을 꾸욱 다문 채 계속해서 울기만 한다. 벤치에 앉아서도, 영운이 저쪽 매점에서 따뜻한 캔커피를 사올때 까지도, 그 캔커피가 온도를 빼앗겨 더 이상 따뜻하지 않게 될 때 까지도- 정수는 그렇게 계속 울었다. 보다못한 영운이 그만 좀 울라고 탄식하듯 채근하자, 정수는 물기어린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영운을 노려 보았다. 니가 더럽니? 니가 왜? 그럼...나도 더러워? "어?! 말 좀 해봐!! 흡...니가...흐흑...니가 뭐가.....!!" "...미안...잘못했다.." "놔!! 흐흑...너 정말..." 토끼눈을 하고서- 그런 눈을 한 주제에 소리를 높이는 정수를, 영운은 가만히 팔을 뻗어 당겨 안았다. 놓으라고 거칠게 반항을 하는 정수를 단단하게 팔 안에 가두고는 그의 젖은 눈가를 손가락으로 쓰윽 닦아내었다. 닦아도 닦아도 젖어드는 고운 눈이 안쓰러워, 영운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지었다. "잘못했다고. 나 안 더러운거 알아. 나 깨끗해." "...흑..." "그치? 나 깨끗하지?" 고개를 숙인채 일정한 간격으로 또옥또옥 눈물방울을 떨궈내는 정수는, 영운이 옆에서 뭐라고 하던지 숙여진 머리통을 쳐들 생각을 않는다. 나좀 봐 주라 박정수. 그렇게 울지 말고 나좀 봐. 그리고 깨끗하다고 말해줘. 나 홧김에 그런거라고, 사실은 나 더럽지 않다고, 우리...깨끗하다고. 그렇게 말해주라 정수야.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한테 진실은 네 입에서 나오는 것들 뿐이니까. 그러니까 말해줘... ...사랑한다고. 저 좀 봐달라고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눈을 맞추려 아무리 노력해도 정수는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더럽게 말 안듣지 박정수. 영운은 작게 한숨을 쉬며 왼손을 들어 정수의 턱을 가볍게 쥐어 들었다. 쵸옥---------- 정수는 갑자기 쳐들어진 고개를 바로 할 새도 없이, 급하게 그러나 다정하게 맞부닥쳐 오는 영운의 입술을 받아들여야 했다. 까칠한 입술과 까슬한 수염자국이 느껴진다. 이상하지? 난 왜 뽀송뽀송한 여자들보다 나와 다를 것 없는 네가 좋은걸까. 물론 나는 열 몇 살 무렵부터 남자를 좋아했고, 지금도 그건 변함이 없지만- 이렇게 입술이 맞닿은 것 만으로도 애처로운 기분이 들 수 있다는건 너를 만나고 처음 알았다. 뜨겁고 말캉한 영운의 혀가 정수의 얇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온 입 안을 휘저었다.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쓸고, 급기야는 정수의 목젖 부근에까지 살짝 건드리고 지나갔다. 너무 오랫동안 울어서 숨이 모자란 정수는 그저 간간히 영운의 혀를 빨아 당기는 것도 벅차 보였다. 호흡을 따라오지 못하는 정수를 눈치채고, 영운은 그리 오래지 않아 입술을 떼어냈다. 잠깐의 키스 만으로도 둘의 입술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숨을 고르느라 들썩이는 정수의 마른 어깨를 천천히 끌어당겨 제 품 안에 넣고, 영운은 다시금 물었다. "나...깨끗하지? 우리 안더럽지? 그치?" "...응..." 우리 더럽지 않아 영운아. 우린....그냥 너무 달아. 머리가 찡하게 울리도록 무지무지 달아서, 사람들은 그 단맛에 질려하는 건가봐. "사랑해." "..." "...스물 일곱이라도 상관없어. 나한테 박정수는 그냥 사랑이야." 정수의 나지막한 긍정에,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영운의 팔이 더 꼬옥 조여진다. 영운은 입술로 정수의 앞머리를 헤쳐 내고 반질반질한 이마에 키스를 했다. 한동안을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짧은 침묵 끝에, 영운은 여전히 정수의 이마에 입술을 붙인 채로 새삼 사랑한다 고백을 하기 시작한다. 지난 육 개월간 수없이 들었던 그 고백이, 지금은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건지. 정수의 눈가가 다시금 젖어들어가려 하는데, 연이어 터진 두번째 고백- 젖어든 눈가에서 또르르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말았다. 너 무지 달다. 정말 눈물나게 달다, 우리. 나도 사랑해. 네가 몇 살이던지, 나한테 김영운도- 그냥 사랑이야. * * * "형 어디가요?" "...바람쐬러. 씨발 토냄새 계속 올라오는거 같아서 도저히 여기 못 있겠다.." "하하....아..그럼 저도 같이 가요!" "......그래..뭐 그러던지..." 같이 가겠다고 말하는 시원에게 시큰둥한 얼굴로 마음대로 하라고 했지만, 내심 기분이 좋아진 희철이다. 그래 내 기분 맞춰주는건 사자새끼 너밖에 없구나- 하아. 동해는 혁재가 널부러진 거실소파에 나란히 기대어 새근새근 잘도 자고 있건만, 시원은 혁재의 활약에 잠이 홀딱 달아나 버린건지 식탁의자에 앉아 동아리 장부 정리에 힘쓰고 있었다. 혁재에게 기습공격을 당한 희철은 장장 한시간 반에 걸친 샤워를 마치고 나서야 욕실 문을 열고 나왔더랬다. 그리고는 안방에 들어가 자는가 싶더니, 삼십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안방문을 박차고 나온 것이었다. 겉옷까지 다 갖춰입고 썩은 얼굴로 안방문을 벌컥 열어제끼는 희철이라니. 하긴 보통 사람도 짜증나는 일인데 김희철 성격에 이혁재 멍석말이 안 시킨게 어디냐, 쯧쯧. 희철이 현관에 주저앉아 빨간 컨버스화의 매듭을 다시 묶는 동안, 시원은 얼른 잠바를 집어 입고 희철의 뒤로 와 섰다. "어디 가려구요?" "글쎄....아놔 진짜 짜증 이빠이...소리좀 지르고 싶다..후우." "...노래방?" "아침부터 무슨 노래방이냐? 흠흠, 목도 안나와. 어제 니새끼 땜에 하도 소리를 지...ㄹ.." "아하하하--!! 한강가죠 우리!!" 시원도 대충 신발을 구겨 신고는 희철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며 밖으로 나왔다. 새끼 쑥쓰러워 하기는. 새벽에는 이런짓 저런짓 다 해놓고 웃기지도 않는구만. 귀엽다 진짜. 큭큭. 뒤따라 오는 희철이 속으로 우쮸쮸쮸를 연발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시원은 벌써 엘리베이터를 잡아 놓고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 하여튼 누구네 머슴인지 말도 안했는데 알아서 참 잘하네. "씨이바아아아아아아알!!!!!! 이혁재 이 개호로잡노무쉐이야---!!!! 멸치새끼 확 그냥 젓갈로 담가버린다 개새꺄-----!!!!!" "하하..하.." 정수와 희철이 살고 있는 곳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20분정도 가면 한강 고수부지가 나온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도로는 뻥뻥 뚫려 있었고, 십 오분 정도 만에 시원과 희철은 강바람을 맞을 수 있었다. 철썩이는 강물 앞으로 냅다 달려간 희철은 거의 비명과 같은 샤우트로 욕과 함께 짜증을 질러버렸다. 공원에서 운동하는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마치 포효하는 호랑이 마냥 허공을 향해 악을 악을 써댔다. 멸치젓을 담가버리겠다는 둥, 멸치포를 떠버리겠다는 둥, 혹은 식용유에 확 쳐 넣고 멸치튀김으로 튀겨버리겠다는 둥 갖은 멸치 조리법을 소리치는 희철을 보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저 이쁘게 생긴 총각 멸치 엄청 좋아하나 보네. 시원은 그저 희철의 뒤로 한 발짝(그 이상 물러나면 후환이 두려우므로) 물러나 억지 웃음을 지어보이고 있을 뿐. "하아...좀 살 것 같네..." "..이제 됐어요?" "어...아 근데 소리질렀더니 배고프다." "큭큭- 가요, 저쪽에 편의점 있어요." 한참을 그렇게 소리를 지르더니 희철은 배가 고프다며 쓰러지듯 시원에게로 풀썩 몸을 기대었다. 시원은 낮게 웃음지으며 희철의 어깨를 끌어 안고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오 분쯤 걸어가자 선착장이 나왔고, 식당들 사이에 낑겨 있는 좁다란 편의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시원과 한바탕 일을 치루고 나서 물 마신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를 않았지만(씻고 먹으려 했으나 이혁재님의 은혜로운 플레이에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딱히 배고프다고 느끼지는 못하고 있던 희철. 그러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니 슬슬 기본욕구들이 뿜어져 나오는 건지, 갑자기 심한 공복감이 느껴졌다. 편의점으로 향하는 오 분 동안 제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배고프다고 보채는 희철을, 시원은 한결같이 웃는 얼굴로 달래주었다. 그렇게 도착한 편의점은 밖에서 보기에도 좁아 보이긴 했지만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 다행히 식탁은 있었고, 희철은 라면을 고르려 식탁 쪽(라면코너에서 몸만 돌리면 바로 식탁이다)으로 향했는데- 어라, 식탁 한쪽에서 튀김우동을 후루룩 대고 있는 저 낯익은 얼굴은- "박정수..?!" "음?...에엑?!! 뭐야 김희철 너 왜 여기...시원이도 있네?" "...갈 데 없어서 여기서 노숙했냐?" "켁켁..아냐!! 아침에 온 거야!" "아니면 아닌거지 뭘 그렇게...진짜 노숙한거 아냐?" "우씨! 아니라니깐!!" 눈은 퉁퉁 부어가지고, 게다가 어쩐지 한껏 초췌해 보이는 저 몰골이라니. 노숙했냐는 말에 정수는 고개를 격하게 좌 우로 저었지만, 희철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것 같았다. "근데 너...애 섰냐?" "야?!! 내가 여자냐!! 뭔 시덥잖은 소리야 아침부터!!" "아니- 입도 짧은 새끼가 라면을 두 개나 끼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정수의 앞에는 지금 먹고 있는 튀김우동 말고 물을 부어놓은 컵라면이 하나 더 놓여져 있었다. 그것도 왕뚜껑. 희철의 말에 정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일단 들고 있던 나무 젓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내 꺼 아냐. 영운이 꺼야." "영운이?....김영운? 니 애인??" "어.." "아..그래. 풉...그렇구나~ 큭큭.." "...왜..웃어..?" 폭풍같은 아침을 보내고 이제 겨우 안정을 찾았구만- 희철은 영운이라는 말에 그 커다란 눈을 반으로 접으며 큭큭대기 시작했다. 이젠 아예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는 끄윽끄윽 넘어갈듯 웃어 제끼는 희철의 모습에, 갑자기 왜 그러냐며 한껏 의아한 눈으로 제 연인을 보는 시원. 뭐지 이건. 멸치 바이러스에라도 감염된 건가. 왜이래 김희철. "큭큭, 최심바야~ 아니 글쎄 박노인 저게 지 애인한테 스물 둘이라고 사기쳤었단다 푸하하하하하!! 와나 박노인, 그럼 너 이제 스물 셋이겠다? 아이고 배꼽이야 푸큭큭큭큭..!!" "에씨!! 시끄러!!" "으하하하하하- 아놔 더 웃긴건 그 애인이라는 새끼도 구라친거 있지!! 그새끼는 스물인데 스물 둘이라고 올렸댄다!! 것도 박노인 처음 만날땐 무려 열아홉이었대!! 큭큭큭.." "...씨이..그래 웃어라 웃어...!!" 정수는 다시 젓가락을 집어들고는 거칠게 우동 면발을 헤집어놨다. 내가 동네북이지 그래, 만만한게 나지. 국물이 그릇 밖으로 튀기도록 푹푹 쑤셔대는 모양에, 희철은 또 그걸 보고 애새끼 같다며 낄낄거린다. 하..이 우동면발이 김희철이었음 좋겠다. 그럼 내가 아주 쫄깃쫄깃하게 씹어줄 텐데. 히밤. "아 형, 그만 웃어요. 정수형 삐치겠다. 큭큭.." "너도 똑같애! 아니 그렇게 쪼개는게 더 기분나빠!!" "그래요? 아 미안미안. 근데...스물 둘은 솔직히..심했다 형...풉.." 애가 점점 김희철을 닮아가는 것 같다. 배려심 많은 아이였는데 쯧쯧. 김희철이 사람 하나 버려 놨구만. 희철처럼 대놓고(희철은 정수에게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끅끅대고 있다) 웃지는 않았지만, 시원 역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큭큭대고 있다. 김희철에게 조롱당하는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냐며, 정수는 씨씨거리면서도 다시 우동 먹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닥치고 우동 면발을 우걱우걱(이 우동은 김희철이다- 라고 자기최면중) 입 안으로 밀어넣는 정수의 반응에, 희철은 이내 재미없다는 듯 서서히 웃음소리를 줄였다. "...얼굴 터지겠다." "..." "많이 먹지도 못하면서 왜 그렇게 쑤셔 넣었냐?" "...우우...으.." "아 됐어 됐어, 다 먹고 말해." 나쁜시키. 내가 그렇게 핍박당할땐 코빼기도 안 비추더니, 상황 종료되니까 삐쭉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뭐? 얼굴이 터져?! 쑤셔넣어?! 야, 우리 오늘 아침까지 둘이 부둥켜 안고 질질 짜던(엄밀하게 말하자면 질질 짠건 정수 본인뿐) 사이그든?!! 그리 다정하지 못한 영운의 언어선택에 정수는 뭐라 한소리 하고 싶었지만, 조금 전까지 꾸역꾸역 밀어넣은 면발들 때문에 차마 입은 열지 못하고 손만 공중에서 휘적거린다. 그런 정수의 모습에 영운은 다 먹고 말하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우씨!! 너까지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 "자, 물 좀 마셔라. 체하겠다." 정수가 속으로 열을 내며 부지런히 입 안의 음식물을 씹어 삼키는 동안, 영운은 생수 하나를 계산해 가져왔다. 애도 아니고 이게 뭐냐. 뭐...귀엽긴 하다만. 큭큭. 스물 일곱 드신 조교님을 마냥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스물 먹은 새내기. "김영운 안녕~" "..아..어제..." 희철은 라면과 삼각 김밥을 계산대에 내려놓고는 이쪽으로 쪼르르 다가와 경쾌하게 손을 흔들며 영운에게 인사를 했다. 계산을 하려 지갑을 꺼내던 시원은, 다소 오버스러울 정도로 손을 팔랑대는(어디까지나 최시원의 시각) 희철의 시츄에이션에 눈살을 찌푸렸다. 쟤가 정수 형 애인이라던 그 스무살짜리 인가? 아니 근데 박정수 애인한테 왜 니가 그렇게 살갑게 구는건데? 어디서 꼬리(희철은 그저 손을 흔들고 있을뿐)를 그렇게 흔들어 대?! 내가 몇 번을 말하냐. 김희철 너, 꼬리 그거 나한테만 보여주라니까. 눈은 희철의 뒷태에 고정한 채로, 지갑속을 더듬어 알바생이 말한 금액을 대충 던져주고는 빠르게 테이블로 달려오는 우리의 농노. "형, 배고프다면서요. 얼른 먹어요." "샀어? 물 붓자 그럼." 굳어있는 시원의 얼굴을 보지 못한건지- 물론 봤다고 해도 천하의 김희철이 동요할 리는 없겠지만, 희철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원이 건넨 컵라면의 비닐을 뜯었다. 침대 위(여기서 '침대'는 때에 따라 소파, 테이블, 당구대 등등 꽤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멀티단어)가 아니고서야, 김희철이 최시원의 눈치를 볼 하등의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 물 좀 빼고 올테니까, 내꺼 다 익으면 한번 저어놔라. 안 불게." "응, 알았어요." 그저 주인님 꼬리에 하루에도 열 두번씩 휘둘리는 자신을 탓하며 한숨을 지을 뿐인 농노씨. 컵라면 용기 급수선에 맞추어 물을 부어 넣은 희철은, 화장실 다녀오겠다며 시원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고는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아까 멸치 조리법을 힘차게 외치던 바로 그 부근 즈음에 화장실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고서 걸음을 빠르게 했다. 라면 불기 전에 갔다와야 되는데. "허- 왠 기집년이 여기 들어와 있다냐~" "아따 성님, 저거 년이 아니라 놈인디요. 쩌그 보니까 달려 있구마.." "흐미, 참말이네?! 무신 사내새끼가 저로코롬 생겼다냐- 아따 눈깔 봐라 저거." 사람 없는 아침의 한강공원 공중 화장실에서 평범한 20대 남성 김희철 씨(27세, 대학생)는 아주 씨발스러운 대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뭐야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야? 이런 시베리아벌판에서기로틴에육실헐당할색휘들을 봤나. 화장실에 도착하자마자 급히 버클을 풀고 조용히 물을 빼고 있는데, 왠 시끄러운 중년 남성 두 명이 들어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열심히 제 볼일에만 집중하고 있던 희철은, 남자들이 저를 놓고 떠드는 것에 살짝 스팀이 올랐다. 하지만 이런 대접- 그러니까 여자같다는 말을 듣거나, 조금 더 어릴때에는 여자라고 오해를 받는다거나 하는 일은 종종 있는 것이었기에, 관대한 마음으로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했다. 게다가 라면이 불기 전에 돌아가야 했으므로. "....거 물건은 쪼매 작긴 해도 실허게 달려 있구마..." 그렇게 무시하고 자크를 올리려는데 어깨너머에서 느글느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면대에 서서 떠들던 남자들 중 한명이 기어이 희철이 있는 곳까지 행차해 주신 것이었다. 하..이런 금자씨 같은 사람. 더럽게 친절하시네요 개쉑아. 희철은 숨을 크게 한 번 몰아쉬며 다시금 화를 억눌렀다. 내 새우탕..내 새우탕 봐서 참는거다 씨발라마야. "어이 아가, 니 멧 살이고?" "...후으..." "아따 이자슥 이거- 으른이 묻는데 대답 안하냐~?" "큭큭 성님, 이놈아 이거 쫄았다 본디요." 참을만큼 참았다. 그러나 이 두 아저씨들은 계속해서 희철의 신경을 긁어댔다. 대충 손을 씻고 화장실 밖으로 나가려는 희철의 어깨를 아까 그 느글느글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터억 잡아왔다. 희철은 다시금 숨을 크게 내쉬며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는 제 어깨에 올려진 손을 탁 쳐내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시방 쳤냐- 며 꽤 큰 소리로 뭐라뭐라 하면서, 계속해서 남자들은 희철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한다. 이런 미친 새끼들아 화장실 왔으면 오줌이라도 싸갈기든가, 씨발 나 열받게 하려고 들어온 것도 아니고- 이건 뭐?! 희철은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편의점을 향해 다리를 옮겼다. 뒤에서, 야 이년아 좀 서봐- 라던가, 아 저 씨발년 뒷태도 존나게 이쁘네- 라던가 아무튼 성희롱적 발언들을 서슴없이 던지는게 들렸지만, 희철은 그 어느 말에도 반응하지 않고 앞만 보고 전진했다. 왜 따라오는거야?! 왜!! "형 왔어요? 조금 불어서 내가 따뜻한물 좀 더 부어 놨는데.." "어 잘했어. 하아..하아.." "...뛰어 왔어요? 왜 그렇게 숨이.." "아따!! 아가 니 참말로 걸음 빠르구마!! 오빠들 숨 넘어가겄다~" 아무래도 희철이 삼 분 안에 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는지라, 시원은 다 익은 희철의 라면에 뜨거운 물을 더 부어 놓았다. 그리고 오 분쯤 지났을까, 생각보다 빨리 희철이 돌아왔다. 아니 근데 왜 숨을 헐떡거려? 이 인간이 뛸 인간이 아닌데- 시원이 제 애인을 향해 의아한 눈빛을 던지고 있는데, 희철의 뒤를 따라 왠 메주같은 남자 하나와 짓밟힌 개똥같은 남자 하나가 헉헉대며 따라 들어온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오..빠? 그 말을 들은 희철의 입에서 '씨발-' 이라는 말이 튀어나간 순간, 시원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상황 파악 완료. "아가, 이쁜아- 다시 물어보자. 니 멧 살이고?" "먹을 만큼 쳐먹었으니까 좀 꺼져라 씨발아." "뭐시여? 아따- 겁나기 앙칼져불구마~ 크하하하." "니 참말로 사내새끼냐~? 아님 거시기 뭐냐...하리수 같은 그런거시여?" "씨발 안닥치..ㄹ.." "꺼져." 드디어 희철의 인내심의 필라멘트가 톡- 소리를 내며 끊어져 버렸다. 내가 지금 열 일곱도 아니고 스물 일곱인데, 이나이 먹고까지 이러고 살아야 겠어?! 씨이발 그래 어디 허벌나게 이쁜 년한테 맴퍼좀 맞아볼테야?!!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닥치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데- 굵고 낮은 목소리 하나가 희철보다 조금 더 빨리 치고 들어왔다. 희철이 뒤를 돌아보자, 컵라면 셋팅을 마친 시원이 사나운 눈을 하고 제 뒤에 서 있다. 저 혁혁하게 빛나는 맹수의 안광(眼光)이란. ".....너네가 김희철 오빠냐?" "허- 뭐여 이자슥은. 아 그렇지, 우리 이쁜이 이름이 김희철이냐? 허따- 이름 들으니 사내새끼는 맞구만~ 큭큭." "...후우.....나와 씨발아." "윽- 뭐..뭐시여 시방..?!" "성님!! 아따 이자슥 이거-" "너도 따라 나와 씹새야." "흐미-" 아아- 사자새끼 열받았네. 그러게 왜 날 따라오고 지랄이라니. 시원은 제대로 굳은 얼굴로 메주와 개똥의 멱살을 양 손에 말아쥐고는 편의점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영문을 몰라 눈만 꿈벅거리는 영운과, 말려야 하는거 아니냐며 호들갑을 떠는 정수에게 희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시원이 셋팅해 놓은 새우탕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냅둬 냅둬- 사자새끼 빡돌면 나도 뭐 방법 없어. "으악---욱--" "으헉--"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메주와 개똥의 비명소리가 편의점 앞을 기점으로 멀리멀리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운동하던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삼삼오오 몰려들었고, 타작이 시작된지 불과 몇 분 만에 스무명 남짓의 사람들이 싸움구경의 관객이 되어 있었다. "씨발..뭐? 이쁜이?! 오빠?!!! 하...이런 미친!!" 퍼억-----퍽--퍽---- "크헉- 윽..자..잘못했...윽-!" "닥쳐 씹새야!! 아아아아악!!! 존내 열받아!!!" 보기에는 꽤나 험상궂은 인상의 메주와 개똥이었지만, 밟아보니 역시 그냥 허접 쓰레기였다. 이런 새끼들이 감히 나의 김희철한테 찝쩍댄거야? 하...그 조차도 기분 나쁘군. 시원은 괴성까지 질러가며 두 남자가 진짜로 메주와 개똥이 될 때까지 흠씬 두들겨 패 주었다. 처음에는 기세 등등하게 시원에게 맞서 주먹을 휘둘던 남자들은, 2대 1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시원의 발밑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발길질을 막아내는 데에 급급하게 되었다. "하아...씨발 잘들어 새꺄...." "...쿨럭..." "저 이쁜이 오빠는 나 하나다. 씨발 어디 누구꺼를 건드릴라..ㄱ.." "미친 니가 내 오빠냐?" "..형..!!" 일방적인 멍석말이가 지겨운건지 구경꾼들이 하나 둘 물러갈 즈음, 더 이상 때릴 곳이 없다는 듯 시원의 발길질도 멈추었다. 이 씨발놈들 모가지를 따버릴까 어쩔까. 후으.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남자 둘을 지긋이 밟고서,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건지 있는대로 씩씩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시원의 뒤통수를 건드린다. 사나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니, 어익후- '이쁜이' 행차하셨다. 희철임을 확인하자 시원의 얼굴은 금새 뽕 맞은 고양이 새끼마냥 헤실헤실. 빙구같이 웃는 주제에 오빠 좋아하네. 희철은 까불지 말라는 듯 시원에게 주먹을 흔들어 보였지만, 내심 저 망할놈의 메주와 개똥을 저 대신 처리해 준게 고마웠다. "박정수야- 애인 데리고 일루 와라. 다 끝났다." "...시원아 괜..찮아?" 희철이 손짓을 하자, 저쪽에서 영운의 어깨 뒤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정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쪼르르 달려왔다. 죽은건 아니지? 병신 삽질하네. 야, 넌 무슨말을 그렇게 해! 시원아 괜찮아? 네 괜찮아요.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메주와 개똥을 발로 툭툭 건드려 보는 정수의 모습에, 뒤따라 오던 영운이 픽- 웃는다. 시체냐? 박정수 진짜 웃겨. "박정수 바쁘냐? 김영운은?" "아니...우리 뭐 별로...." "영화나 보러 가자. 내가 쏜다!" "오올 김희철~ 뭐 볼건데? 어? 멜로보자 멜로!" "아 진짜...가오 떨어지게 남자가 무슨 멜로냐?!" "왜요~ 멜로 좋은데. 나도 멜로 찬성이요." "무슨 소리!! 액션이죠!! 액션!!" "김영운이!! 니가 뭘 좀 아는데?" 한강 선착장 앞을 피칠갑 시켜놓고, 정작 사건의 주요인물은 영화를 쏘겠다며 앞장서서 사건 현장을 뒤로한다. 방금전까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정수는 영화 쏜다는 희철의 말에 금새 얼굴색을 바꾸고 멜로 보자며 신이 났고, 시원 역시 언제 제가 사람 두명을 병신으로 만들었냐며, 저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온화한 얼굴로 멜로 콜!! 을 외친다. 영운은 절대 액션이라며 궁시렁 거렸고, 그에 또 희철은 액션이야말로 진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날씨 조오타~" "우와 그러고 보니...봄 날씨 같네." "에이 이제 봄이죠~ 꽃피는 춘삼월인데~" "...꽃샘 다 물러갔나 보네 진짜.." 강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지 않을만큼, 입고 있는 패딩 점퍼가 무안해 질 만큼 따뜻한 날씨. 그렇게- 봄은 다시 돌아왔다. 05. "잠시만 주목해 주세요-!!" 첫날부터 75분 꽉꽉 채운 수업으로 신입생들을 질리게 만들었던 교필(교양필수) 영어 교수가 수업시작 무려 10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고 있었다. 편의점 새벽타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곧장 학교로 튀어온 규현은 잘됐다 생각하며 책상에 고개를 박았다. 다른 학생들도 떠들거나 책을 읽거나, 아무튼 저희들 하고 싶은대로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다. 강의실 뒤 벽에 걸려있는 시계가 9시 15분을 가리킬 즈음, 갑자기 앞문이 열리더니 대여섯 명의 무리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한국대 댄스동아리 Dancing Out입니다. 저희 D.O.는 중앙 동아리로써 지원금도 빵빵하게 나오고 있구요-" 똑같은 점퍼(검은색 후드 점퍼에 뒷면에는 필기체로 Dancing Out이라고 쓰여져 있다)를 걸쳐 입은 그 무리들 중, 리더격으로 추정되는 남자 하나가 앞으로 나와 목소리를 높이자, 뒤에 서있는 나머지 사람들도 꾸벅 인사를 한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동아리 홍보구나. 중, 고등학교 때에도 서클활동 혹은 교내 동아리라는 이름하에 동아리 활동을 해봤던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제 갓 입학한 신입생들은 여러 매체(드라마, 시트콤, 영화 등)를 통해 대학 동아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동아리의 로망을 체험해 볼 기회가 온 건가!! D.O.라는 저 댄스동아리 사람들이 동아리 소개를 하는 동안 학생들의 눈빛은 마치 남고에 온 여자 교생이라도 보는 것 마냥 반딱반딱 빛났더랬다. 소개를 겸한 홍보를 마치고 그들이 강의실을 빠져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교수가 들어왔다. 동아리 홍보 기간에는 교수들이 으레껏 늦게 들어오는 센스를 발휘해 주기도 한다. 사전에 교수와 컨텍을 하고 들어오는 경우, 혹은 수업 중간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경우(그러나 이럴 경우 교수들이 거절할 수도 있다)도 있었지만, 시즌이 시즌이니만큼 교수들도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 같다. "넌 어디 들어갈거야?" "SJ." 수석입학이라는 타이틀로 너무나 유명해진 규현은 이미 꽤 여러명의 학생들과 말을 텄다. 무엇보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보여주었던 규현의 시크함, 깡다구, 카리스마(그러나 사실은 그냥 싸가지)에 반한 동기들이, 너도 나도 규현에게 열심히 들이대 주었더랬다. "SJ? 무슨 동아리야?" "밴드부래." "우와~ 너 악기도 연주해?" "아니..뭐.." 환영회 자리에서 SJ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았던 규현은, SJ의 실체에 대해 주말동안 여러가지 가설을 세워 보았다. 밴드부가 학교의 실세라 함은, 분명 뭔가 있다는 소리- 총장 아들이나 손자가 동아리 회장인가? 간단한 가설부터 조금 엉뚱하고 복잡한 가설까지. 이것저것 생각해 본 끝에 규현이 내린 결론은 SJ의 실체와 매우 근접할 수 있었다. 물론 규현이 생각한 내용은, 시험때 족보를 돌리는가보다- 정도였지만. 그래도 아무 정보도 없이 그정도 유추해 낸 걸 보면, 역시 조규현은 머리가 좋은 것 같다. "근데 거긴 홍보도 안 오네?" "음..그러네." 들어오고 싶어서 안달난 인간들만 줄줄이 사탕으로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SJ가, 구지 시간 버리고 발품 팔아가며 동아리 홍보 따위 나설 이유가 없다. 오히려 헌팅한 학생의 이메일로 동아리 입부원서를 전송시키는 것 뿐, 그 외 아무런 설명도 소개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면 원칙. 이제 슬슬 과제가 나오고 중간고사가 다가오면 싫어도 좋아도 SJ가 어떤 곳인지는 귀 달린 놈이라면 다 알게 되어 있는 것을, 미리부터 설쳐댈 필요가 없는 것이다. "....Life couldn`t get better..." 오늘 편의점 교대 근무자가 늦게 오는 바람에 규현은 아침부터 전력질주를 해야 했다. 졸립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그러나 엎드리면 태도 점수가 깎이기 때문에 졸 수는 없다. 영어 수업은 너무 쉬웠고(수능이라는 大전쟁을 마친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들에게 교필 영어는 껌이다. 오히려 학년이 올라갈수록 영어실력의 퇴화가 여실히 나타난다) 강의실은 히터를 너무 올려서 후끈하기 그지 없었다. 결국 규현의 눈꺼풀은 저도 모르게 스륵스륵 아래로 아래로. 아, 정신차리자. 고개를 흔들며 뭔가 집중할 거리가 없나 파일박스를 뒤적이다가, 전공책에 끼워 두었던 SJ 입부원서가 눈에 띄였다. 규현은 이거다 싶어, 영어책 사이에 원서를 끼워 넣고는 이내 그것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름..조규현....학번...20090203..." 베일에 쌓여 있는것 치고는 꽤나 심플한 원서로군. 오히려 다른 동아리 원서를 보면 입부동기라던가 자신을 어필할 만한 항목이 하나쯤은 있는데, SJ의 원서는 베이직(BASIC) 그 자체였다. 잠 깨려고 했는데 이거 뭐 쓸게 있어야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다 써버린 규현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어?!" 원서 가장 아래에, 다른 글씨보다 2포인트 정도 작은 글씨로 타이핑 되어있는 마지막 문장을 본 규현은 눈을 크게 떴다. [접수처: 유아교육과 이성민 010-****-****] 물론 접수처는 성민 하나 뿐이 아니었지만(학생관 310호, 그리고 실용음악과 김려욱 010-****-****), 규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로지 '이성민' 세 글자였다. "아 정말? 우와~" "...." 1교시 교필 영어, 2교시 전필(전공필수) 회로이론 수업을 연타로 듣고, 3교시 드디어 공강. 학생들은 다들 기지개를 켜며 학식(학생식당)으로 향했지만, 규현은 밥 안 먹냐는 동기들의 말을 대충 씹어주고 사회대 건물을 향해 걸음을 빨리 했다. 원서에 쓰여져 있는 번호로 문자를 보냈더니, 짧고 간결하게 '성공관(사회대 건물) 207호'라고 답문이 왔더랬다. 귀엽게 생겨가지고 문자는 꽤나 삭막하네. 역시 사람은 겉보기로는 모르는 건가. 성민을 만날 생각에 피식피식 웃으면서도 계속해서 걸음을 재촉하는 규현이다. 그렇게 거친 숨을 몰아쉬며(성공관은 인문관과 더불어 가장 꼭대기에 존재한다) 성공관 2층에 도착한 규현이거늘- 정작 성민은 웬 남자에게 갖은 애교를 부리며 귀여운척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뭐야 저 새끼는. 그러나 성민의 원래 품성이 애교만점이고 원래 말투가 애기말투라는 것을 모르는 규현은, 저에게 보낸 문자와는 반대되는 성민의 모습에 살짝 빈정이 상했다. 게다가 성민과 마주하고 있는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빙긋이 웃고만 있는데, 성민 혼자 신나서 폴짝폴짝 뛰고 박수치고- 신나셨구만, 아주. 규현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성큼성큼 성민과 남자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아 조규현.." "...너 누군데 나를 아냐?" 성민과 이야기를 하던 남자는 왠지 모를 아우라가 저쪽에서부터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살벌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그것의 정체는- 어라 조규현이네. 사실 이 남자, 규현과 같은 전자과 신입생인 김기범 이다. 규현이야 워낙 유명하니까 전자과 아닌 학생들도 규현을 알아보곤 했지만, 기범은 워낙 조용해서 동기들 조차도 그의 존재를 잘 몰랐다. 그러니 규현이 기범에게 너 누구냐고 묻는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어? 당근ㅈ.." "아 됐고. 너 뭔데 내꺼랑 얘기하고 있냐?" "....?" "이거 말이야- 이성민. 내 껀데." "저기 무슨 마ㄹ.." 규현의 물음에 기범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빙긋 웃는다. 뭐야 이건. 자폐냐. 규현이 그렇게 기범을 썩은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는동안, 성민은 아침의 일이 생각난 건지 손가락으로 규현을 가리키며 뭐라 아는척을 해댔다. 아니,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규현에게 말 허리를 잘려 먹었다. 규현은 길다란 팔을 들어 성민의 어깨에 척 걸치더니, 이내 힘을 주어 제 옆으로 성민의 몸을 끌어 당겼다. 영문을 모르는 성민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어버버 상태. 아니, 내 꺼라니? 내가? 너꺼? ...너 누군데여!! 규현의 뜬금없는 '내꺼' 발언에 놀란것은 성민 뿐만이 아닌듯- 가만히 웃던 기범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형이 조규현 소유라고? 기범이 의아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자, 성민은 왠지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고, 마음이 다급해졌다. 변명이라도 하려 연신 입을 벙긋거려 보지만, 당황해서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애기야, 밥 먹으러 가자." "에?? 아니 저.." "그럼 우린 이만." "저, 저기!! 아 기범아!!" 너 누구에여?! 내가..애기?! 뭐야, 뭐냔 말이야아!! 므잉?! 이젠 당황하다 못해 울 듯한 얼굴로 규현에 의해 질질 끌려나가는 성민을, 기범은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저 최시원이라는 남자에게 SJ 가입을 권유 받아서 원서를 내러 왔는데, 알고 보니 접수처 란에 쓰여져 있던 이성민이 어릴때 한 동네 살던 바로 그 성민이 형이었고,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대화의 장을 펼치고(성민의 수다로 이루어지는 일방적인 대화였긴 하지만) 있던 것 뿐이었거늘- 약 48초만에 벌어진 이 시츄에이션. 기범은 이게 대체 어떤 상황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기범이 멍때리고 있는 동안, 규현과 성민의 모습은 점점 멀어져 갔고, 정신을 차린 뒤에는 이미 그들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아..." 경이 형 잘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기범은 여전히 느린 제 센스와, 여전히 무거운 제 입을 탓하며 쓰게 웃었다. 형, 여전히 귀엽네요. 한경이 형도...여전하죠? 그 한마디가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담배 말리네. 텁텁한 입 안을 담배연기로 채워 보겠다는 듯, 기범은 손으로 머리를 가볍게 털며 성공관을 빠져 나갔다. * "...안 먹어?" "..하아...뭐에영, 정말. 다짜고짜.." "흠. 빨리 먹어라. 국 식는다." 후배님 주제에 왜 반말 하시는 건가요- 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정말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성민은 그저 젓가락으로 애꿎은 밥알만 푹푹 찔러대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넌 누군지, 그리고 나한테 왜 그러는건지 아까부터 물었지만 그저 '전자과 1학년 조규현' 딱 한 마디 하고는 오로지 '밥 먹어라'로 일축하고만 있으니- 성민은 그저 한숨만 “아, 맞다. 이거." "...아....혹시...문자 보냈던...?" "어. 나야." "....그리고 혹시..아침에...당근주스.." "어. 나야." ".....그 외에...우리 만나거나 뭐 그런적 없져?" "어." 어..라니. 어 라니?!!! 어???? 어 라고???? 하...귀신같은 당근소년 같으니라구. "...근데 왜...내가 그쪽...애..기...에여?" "풉!!" "괘, 괜찮아요? 물 여기.." "켁켁- 푸하하하하하하....아...너 진짜 귀엽다." "....나 그래도 일단 선배인뎅....아니 것보다, 내가 왜 그쪽 꺼..냐구영..." "그쪽 말고, 조규현이라니까. 닭이냐? 것도 못 외워?" 선배를 닭으로 만드는 이런 상콤한 후배님을 보았나. 성민은 뭐라 화를 내고는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냥 입만 삐죽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소리를 지르든 앙탈을 부리든 아무튼 성질을 좀 피워줄텐데, 희철 외의 대상에게 이렇게 주눅들 수 있다니- 소심하게 젓가락만 만지작 거리는 성민이다. 그래도 꿋꿋하게 내가 왜 니 꺼냐며 작은 소리로 꿍얼거렸다. 쪼꼬맣고 오동통한 입술이 꼼질꼼질 거리는 데에- 이제 보니 닭이 아니라 병아리 새끼구나. 존나 귀엽네.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어있는 성민의 모습을, 규현은 참으로 흐뭇하게도 바라본다. "음...내 꺼니까." "..그....게 뭐에여.." "애인 있냐?" "아니 없는ㄷ..." "아니, 있어도 상관없지만 뭐. 어차피 넌 내 꺼야. 내가 그렇게 정했고, 지금 이 시점부터 이성민 이꼴 조규현 꺼. 오케이?" "그, 그런게 어디써영?!"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면 대체 왜 물어본거냐. 성민은 규현의 포스에 눌려 차마 고개는 똑바로 못 들고 그저 여전히 꿍얼꿍얼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해댔다. 저 얼굴에 신입생이라니 말도 안된다는 둥, 뭐 이런 희철 선배 같은 놈이 다 있냐는 둥. 하지만 '이성민=조규현꺼' 라는 데에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놀란 토끼같은 성민의 모습에, 규현은 예의 그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웃음을 지어 보인다. "어디 있긴. 여기 있지. 쿡." "..으읍?!!!!!" 규현의 한 마디를 끝으로, 참 여러가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밥 받아오던 학생들의 식판 떨어 뜨리는 소리, 밥 먹던 학생들의 숨 삼키는 소리, 그리고 꺄아- 하는 환호(인지 비명인지 아무튼). 또 한 가지, 엄청나게 빠르게 뛰는 성민의 심장소리. 나....뽀뽀하는 고야?? 그런고양??? 으....어떡해..나 그럼...얘랑 결혼해야대?!!! 히잉...얘 남잔데...섬미니도 남잔데...?!!!! 마망 미안해여...섬미니...순결을 빼앗겼어영. 이로써 성민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국대 공식 게이 커플 2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규현&성민 커플. 이후 한국대 학생들은 이 커플을 '톰&제리' 커플이라 부르게 되는데- 그것은 비쥬얼이 닮아서 이기도 했지만,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났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성민의 귀여움에 눈이 홰까닥 해 버려 아직 그의 진면목을 파악하지 못한 천재소년 규현에게 미리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다. 건투를 빕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모든것은 조금 뒤의 이야기. * "누구 들어오면 어쩌려고...." "오긴 누가 와요? 아 빨리!" "씨발 아파!! 방석이라도 좀 깔아 주든가.." "아, 미안해요...급해서.." "큭큭-" 6교시까지 모두 끝나고 어느덧 시간은 여섯 시. 남아서 공부할 학생들은 도서관으로, 스터디 그룹을 짠 학생들은 빈 강의실로 향한다. 동아리 홍보기간이라 동방에 남아있는 학생들도 꽤 많았지만, 김희철과 그의 농노는 거칠 것이 없었다. 농노씨는 특히나 더. 한국대의 거의 모든 동아리 방은 학생관에 위치하고 있는데, 2층에 있는 다른 동방들과는 달리 SJ만은 3층에 동방을 가지고 있다. 학생관은 신축 건물이라 2층까지는 완벽하게 공사가 끝이 났지만, 3층부터는 아직 미완성된 부분도 있었다. 원래는 겨울방학 중에 다 끝날 공사였는데, 총학(총학생회)에서 총장 사퇴 시위를 하는 바람에 공사가 지연이 되어 아직 끝내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도 일단 1, 2층은 완성이 되었으니 학교에서는 이곳저곳에 표류하고 있던 임시 동방들을 학생관으로 밀어넣고자 추진을 했는데, 배정하다 보니 동아리 하나는 3층으로 가거나 아니면 계속 표류해야만 했다. 으스스한데다가 난방설비도 채 갖춰지지 않은 곳이었기에 그 어느 동아리도 선뜻 나서지 않을때, 희철이 번쩍 손을 올렸더랬다. 미완성된 곳이라 경비가 소홀해서 밤 새기 좋고, 시멘트 냄새는 좀 나더라도 일단 1인 1실로 들어가 레포트 작성을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흐읏...흐.." "..거봐. 좋으면서 튕기기는." "시끄러...그만 만지작 거리고 빨리.." 시원을 시켜 난방과 전기설비를 마무리 짓고, 성민을 볶아 전기장판과 냉장고, 컴퓨터를 들여 놓은 학생관 310호. 아무도 3층에 올라올 일이 없기에 이런 초호화 동방의 실태를 아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오는 이가 없기에- 희철과 시원은 동방에서 자주 일을 치루곤 했다. 씨발 역시 이성민한테 소파를 뜯어내는게 좋겠어. 딱히 기댈만한 곳이 탁자밖에 없는 터라, 희철은 일단 시원에게서 '그 조짐'이 보이면 허리 아래 방석을 깔고 있어야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고, 시원이 제 몸을 훑어내리는 동안 희철은 소파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래도 어쨌든 일은 시작되었고, 몸이 달아오른 희철이 슬슬 시원을 재촉하려는데- 콰당--- "혀엉~ 입부신청하러 왔다거....어?" 오 주님, 왜 저를 시험에 들게 하시나이까. "...후으....최시원 내려가라." "...그치만.." "내려가." "...네." 벌컥 열린 문짝 뒤로 보이는 것은, 팔랑팔랑 원서를 들고 있는 동해의 얼굴. 노크라도 좀 하던가!!! 희철을 부르며 뛰어 들어오는 동해의 모습은 정말 귀엽기 그지 없었지만, 시원에게는 그저 악마의 삼지창 정도로 보일 뿐이다. 왜냐, 방금전까지 다급한 얼굴로 재촉하던 제 연인이 안면을 싹 바꾸고는 저를 밀어내 버렸으니까. 잔뜩 풀이 죽은 시원이 저만치로 떨어져 나가자, 희철은 주섬주섬 풀어진 셔츠 단추를 빠르게 채웠다. 그리고는 생긋 웃으며 동해가 들고 있는 A4 용지를 받아 들었다. "자자, 앉아 동해야." "이거 빈칸만 다 채우면 되는거 맞지??" "응응. 잘했어 잘했어~" 토탁토탁, 쓰담쓰담 거기에 플러스 알파로 그 보기 힘들다는 김희철표 베시시(시원에게조차 정말 레어하게, 감질날 정도로 가끔 보여주는 그 '베시시'가, 동해 앞에서는 실시간으로 무한 반복된다). 결정적인 순간에 파토를 낸 것도 모자라 감히 주인님의 눈길을 독차지 하다니. 그러나 여기서 드러누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한들 희철이 누구편에 설 것인가는 '김희철의 위장은 8할이 알콜이다'라는 정수의 말 만큼이나 뻔하디 뻔한 일이었다. 결국 시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아- 날씨 한번 더럽게 좋구나. 새파란 하늘에 아주그냥 눈물이 다 나는구만. 썅!! "심바야, 코코아 좀 타와라. 나는 커피." "아, 나 머쉬멜로우 넣어줘~" "...그딴거 없다." 마음속으로는 내 이미 저 물고기 새끼를 잡아다가 백만 스물한 번 정도는 가볍게 사시미를 뜨고도 남았거늘- 이 냉혹하고 잔인한 현실이란. 내겐 보이지 않는 내 가슴의 그림자가 또 다시 날 패배자의 어둠안에 가두는구나...하. 희철의 온 관심을 가져간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이제는 저를 SJ다방 미스 최 정도로 만드는 데에, 시원은 소심한 반항을 해본다. 머쉬멜로우? 이혁재 같은 소리하고 있네. "최시원." 그러나 그 반항, 오래가지 못할 것 같군요. "네?" "사와." "...네?" "동해가 먹고 싶다잖아. 가서 머쉬멜로우 사오라고." 무감동하게, 어쩜 이게 가능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무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가 동방 안에 울려 퍼진다. 그 삭막한 울림은 정확히 최모 시원씨의 귓구녕을 찌르고 들어갔고, 최모 시원씨의 마지막 발악 '되묻기' 스킬에도 굴하지 않고 연타를 날려 주셨다. 좌절한 시원에게 희철의 머쉬멜로우 심부름은 마치 '김희님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 분이 머쉬멜로우가 잡숫고 싶으시다는데, 감히 농노 주제에 개겨?' 정도로 자체 해석되어 들린다. 희철은 여전히 시선은 동해에게 고정한 채, 손은 동해의 머리통을 쓰다듬고 있는 채- 그러나 뒷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거늘 어째서인지 시원은 희철의 눈빛빔을 맞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돈 줘요." 약 20초만에 시원의 반항은(예상대로) 막을 내렸다. 말똥말똥 이쁜 눈을 하고 희철과 시원의 모양을 지켜보던 동해는 이렇게 생각했다- 삼장법사와 손오공 같다고. 사실 그 이상 일지도 모른다. 손오공은 머리에 링이 둘러져 있어서 삼장법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던 거지만, 시원은 그따위 굴레도 없는 주제에 어쩜 이렇게 말을 잘 듣는건지. 희철에게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받아들고, 시잔뜩 억울한 얼굴로 터덜터덜 동방을 빠져 나온 시원. 캠퍼스 안에 매점이 세 군데나 있긴 하지만, 머쉬멜로우 같은게 학교 매점에서 팔 리가 없으니- 시원은 교문 밖에 있는 할인마트까지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그러나 마트 이곳저곳을 살펴 보아도 머쉬멜로우는 찾을 수가 없었다. 아 씨발 역 앞까지 가야 하나. 짜증난 시원이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는데, 자켓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발신자 [카미사마]. 희철과 시원이 사귀기로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날인가 희철은 시원의 폰 안에 저장 되어 있는 [김희님]을 [카미사마]로 바꾸어 두었더랬다. 이게 무슨 뜻이냐며 시원이 묻자, 희철은 씨익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신(神). 넌 너네 그 잘난 주님과 함께 나를 섬길거잖아. 큭큭. 분명히 이건 신성모독이자 저를 놀리는 말이거늘, 시원은 어째서인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희철과 연애를 시작하고 1년이 조금 못 된 지금, 확실히 저는 김희철을 '섬기고' '모시고' '따르고'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으니. "여보세요? 형 마침 잘 걸었어요. 머쉬멜로우가 없어ㅇ..." '야 동해 코코아 마시고 갔다. 그냥 와~' "네? 아니 ㅁ..." 뚜우- 뚜우- 뚜우- 뚜우--------- "......" 난 정말 이동해가 싫어요. 공산당 따위보다 이동해가 싫어요. 난 이제 생선요리는 안먹을 테야요. 어차피 희철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주제에, 싫다싫다 하면서도 결국 동해의 이런저런 투정들을 다 받아주는 주제에- 최모 시원씨는 오늘 하늘색이 너무 파랗다며 두 번째 눈물을 삼키더랬습니다. ...씨이바알....오늘 일기 쓸거야!!!! * "...하아..." "...아, 아닌가요? 하핫~" 뭐냐 넌...맷돌이세요..?! 한국대 실음과에서는 전통적으로 선배가 후배의 공부를 서포트 해주는 1대 1 스터디를 실시하고 있다. 이번 해에도 예외는 없었고, 신입생들은 들어오자마자 멘토링을 시작하게 되었다. 려욱은 같은 김 씨이기도 하고, 또 파트도 역시 같은 보컬이어서 인지 종운을 담당하게 되었다. 노래방에서 종운의 라이브에 감동 받았던(물론 종운의 취향에 동의하기엔 너무 구성지므로 그건 패스) 려욱은, 멘토 상대가 김종운이라는 사실에 진심으로 좋아라 했더랬다. 종운 역시 그나마 안면이 있는 려욱이 저와 짝이 된 것을 다행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저보다 어린 녀석한테 존대해야 하는 건 좀 그렇지만, 어차피 대부분의 2학년들은 종운보다 어렸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닌가요? 지금 아닌가요 라고 그랬어요?!" "아..하하.." "웃음이 나와요?! 세상에...음대생 맞아요 형님?!" 본격적인 스터디에 앞서 머리도 식힐 겸 간단한 지식 점검이나 해볼까 싶어, 려욱은 퀴즈를 몇 개 만들어 왔다. 기본 테스트 라기엔 너무 간단한 문제들이었고, 전공자 아니라 그냥 중학생만 되어도 쉽게 알 수 있을만한- 정말 말 그대로 '퀴즈'. 근데 이게 뭐야?!! 이사람 이거...아니, 니가 정말 사람이에요?! 별 생각 없이 만들어온 퀴즈가 려욱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1] '사계(four seasons)의 작곡가는? 답: 거북이 [2] 강렬한 음악으로 유명하며 '인상파'의 대표격으로 꼽히는 이 뮤지션은? (힌트: 파마머리) 답: 현철 [3]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몸을 비틀면서 추는 춤으로, 원래는 노래의 제목이었던 이것은? 답: 장윤정 트위스트 아..뭐지 이건. 뭘까 이건. 뭐죠 이건?!!!! 총 9개 문제 중 겨우 4번까지 체크한 시점에서, 이미 려욱은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장난하는 건가? 그래 설마 장난이겠지. 그래, 그럴 거야. 그러나 그런 려욱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뭐가 틀린 건지 모르겠다며 어색하게 웃기만 하는 김모 종운씨. "아니 이건 음대생이 아니라 중학생도 알 문제들을...하...말이 안 나오네.." "거- 너무 그러지 마요.....선배님." "지금 내가 안 그러게 생겼어요?!" 안 그래도 하이톤인 려욱의 목소리가 강의실 천장을 뚫을 듯 찌르고 올라감과 동시에- 그의 눈빛도 change. "잘 들어요 김종운 형님. 우선 1번, 사계의 작곡가가 거북이 라구요? 아니 이 사계는 그 사계가 아닙니다, 형님.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곡으로써 포시즌의 작곡가는 비발디 입니다. 비발디 몰라요? 못 들어봤어요?" "....비발디 파크는 아는데.....좋은데 거기....아하하.." "...하아...비발디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바이올린 연주자로써 40여 곡의 오페라를 비롯해 많은 종교적 성악곡, 가곡 등을 남겼는데 기악곡은 음악사에서 특히 중요한 구실을 했어요. 협주곡 분야에서도 코렐리 등이 만든 형식을 발전시켜 알레그로-아다지오-알레그로의 세 악장형식의 독주협주곡과 합주협주곡을 작곡,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습니다." "아..." "그리고 2번." 려욱과 짝이 되었을 때, 2학년 선배들이 괜히 종운에게 측은한 눈빛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1학년 들은 귀여운 려욱 선배랑 짝 되어서 좋겠다며 부러워 했지만, 어째서인지 려욱과 동기인 2학년들, 그리고 간간히 섞여있는 3학년들(전공학점이 부족한 탓에 1,2학년 전필 수업을 듣고 있다)은 뭔가 애처로운 눈으로 종운을 바라 보더라. 개중에는 혀를 쯧쯧 차거나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선배도 있었다. "현철이 인상파에요? 파마머리면 다 현철입니까? 잘 들으세요 2번의 답은 베토벤 입니다. 설마 베토벤은 알고 있겠죠?" "...김명민이 키우는 강아지...?" "...하아아아....베토벤은 하이든, 모차르트와 함께 빈고전파를 대표하는 독일의 작곡가로 고전파의 형식이나 양식을 개성적으로 다듬었고 낭만파로의 이행단계에 있던 인물 입니다. 작풍은 동적인 힘이 특징이고 강고한 형식감으로 일관되어 곡마다 독자적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고 평가되고 있구요. 후기에는 다이나믹한 힘은 부족하지만, 보다 깊은 마음의 세계가 표현되어 있다고도 합니다. '운명' 몰라요? 따다다단~ 이거?!" "아..." 날 때부터 음악영재였다는, 날 때부터 암기신동이었다는 려욱은 '무식함'에 관대하지 못했다. 모를 수도 있지- 라는 것은 김려욱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망언이나 다름 없었다. 무조건 알아야 하며 이 세상에 알아내지 못할 것은 없고 외우지 못할 것은 없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음악으로 표현 가능하다- 는 것이 려욱의 지론. "다음 3번. 아니 트위스트면 트위스트지 장윤정 트위스트는 뭡니까?" "...그럼 울릉도 트위스트인가?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 안고~ 이히~" "...." ".......미..미안해요.........선배님." "...하아아아아............3번의 답은 그냥 트위스트 입니다. 대단히 빠른 기세로 세계적인 유행 무용이 된 춤으로, 이 명칭은 1920년대에 몸을 비틀면서 추는 니그로 무용에 붙여진 것이었지만, 1960년 R&B 가수 채비 체커가 '트위스트'란 노래를 이런 몸짓으로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널리 퍼졌습니다. 남녀가 손도 잡지 않고 서로 떨어진 채 손발을 흔들고 몸(어깨,허리,다리)을 리듬에 맞추어 뒤트는 단순한 춤이구요. 트위스트용의 곡도 많이 만들어지고 록 밴드나 R&B 밴드가 연주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1962년 이후 이 춤의 변형인 림보, 고고 등의 스텝이 잇달아 고안되었죠. 아시겠습니까?" "아...네..에....." 대학생 씩이나 되는 인물에게, 그것도 실기계의 레전드라 불리는 종운에게 이따위 것이나 설명해 주고 있어야 하다니. 셔츠 앞 주머니에 꽂혀있던 은테 안경이, 어느샌가 려욱의 콧등위로 옮겨져 있다. 양 손은 허리에, 그리고 그의 입은 쉴 새 없이 무언가를 뱉어낸다. 이런 식으로 9번까지 퀴즈의 답과 그 답에 대한 부연 설명을 마친 려욱. 고개를 삐딱하게 왼쪽으로 꺾어 들고는, 한껏 종운을 내려다(종운은 앉아있고 려욱은 서있다. 원래 려욱도 앉아 있었지만 흥분에 못 이겨 5번 문제를 설명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보며 말한다. "김종운 형님..." "...네 선배님..." 꿀꺽. 날카로운 은빛 안경테 뒤로 보이는 더욱 날카로운 려욱의 눈빛에 종운은 마른침을 삼켰다. 거 쪼매난 아가 귀여운 줄만 알았는데- 흐미, 무서운 아가 였구만. "형님 같은 사람을...뭐라고 하는지 아세요오?" "....예..예술성대? 아하하하~" 북극에서 귤 까던 펭귄이 호빵 먹고 털이 빠져버린 듯한- 그러니까 한마디로 북극 생물이 얼어 죽을 것 같은 이 살벌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깨 보고자, 종운은 마지막 안간힘을 써 본다. 그러나 그런 종운의 농담에 안 그래도 쨍하던 려욱의 눈이 이젠 무슨 레이저라도 발사할 듯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아가....형아가 잘못했다아...씨불 무식한 건 죄가 아니란 말여!! "돌. 덩. 어. 리." 김종운 FREEZE and NOCKDOWN, 김려욱 WIN. SJ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던가. 학구열에 불타는 려욱은 더 이상 실음과의 귀염둥이 '료우깁니다아'가 아니라- 까칠함의 최고봉 욱마에 라고. 시방 저 아가가 감히 이 형님에게 돌...이라고 한겨? 돌덩어리?! 그냥 돌도 아니고..덩어리?!! 뭐시여 시방!! 이미 머릿속에서는 흥분하고 방방 뛰고 깽판 치고 아무튼 광견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는 종운이었지만, 실상은 려욱의 포스에 눌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벙 쪄 있을 뿐이다. 려욱이 선배이기는 하지만 나이로 따지면 3살이나 어린데- 물론 3살 어린 김영운이는 저를 동네 똥개 보듯 하지만...이 아가는 다르잖여!! 딱 보기에도 김영운이 반에 반만한 것이 그냥 아가잖여!! 핏덩이한테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하니 화도 나지만 것보다 일단 심하게 어이가 상실됨을 느끼는 종운이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이젠 기본 신상 정보 조차도 어버버 거리는 종운의 앞에, 작고 가는 려욱의 손가락과 함께 종이 한 장이 내밀어 졌다. "멘토링 가지고는 택도 없겠네요 형님. SJ에 들어오세요." ".....어..아니...그러니까...." "선택권 따위 없습니다. 무조건 들어오세요. 그 돌을 내가 뇌로 바꾸어 드리겠어요." 뭐가 뭔지 몰라 횡설수설 하는 종운을 대신해, 려욱이 직접 원서의 빈칸을 메우기 시작했다. 학번 대세요- 하는 려욱의 말에 종운은 무의식적으로 '2...20090824...' 착하게도 학번을 대 준다. 돌을...뇌로...바꾸어 준다고? 그럼 결국 정말 난 돌이라는 건가? 하...차라리 김영운이가 붙여준 광견이 낫구나. 아니 똥개도 괜찮을 것 같구만. 종운이 패닉 상태에 빠져있거나 말거나, 려욱은 열심히 원서를 작성해 나간다. 기본정보만 쓰면 되는지라 딱히 종운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었다. 이로써 SJ는 유교과 이성민 이외에 물건생산에 도움이 되지 않을 인물을 하나 더 거두어 들이게 되었다. * "너희 형이랑은...말 좀 해?" "...몰라.." "하아...벌써 일주일 째잖아. 그냥 니가 먼저 사과해라, 영운아. 응?" "..밥이나 먹으러 가자." 진짜 김영운, 애도 아니고. 정수는 당시에는 저도 흥분해서 소란을 부리긴 했지만, 일주일 씩이나, 그것도 형제 지간에 이렇게 서먹해 지는 것은,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이 싸움의 원흉이 저 인 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기도 했고. 따지고 보면 영운의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이 일의 발단이긴 했지만, 어쨌든 울며불며 발악을 해 둘의 사이를 더욱 삭막하게 만든 건 틀림이 없었으니. 전날 영운과 헤어지네 마네 난리를 치고, 게다가 술까지 엄청 들이 부어서 그랬는지, 일주일 전 그날의 정수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 감정적이었다. "...안 나와?" "나가. 나간다고.." 저희들을 백안시 했던 종운의 태도에 상처를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 이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일반적이고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으니까. 좋지 않은 표정으로 먼저 나서는 영운을 따라, 정수도 한숨을 쉬며 조교실을 빠져 나간다. 저를 앞서 걷는 영운을 따라 가만가만 복도를 걷다가, 문득 영운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하는 정수. 엘리베이터를 타는 곳까지 묵묵히 걷기만 하는 영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어째서인지 제 얼굴에 미소가 걸려온다. "..뭐, 뭐야.." 정수는 걸음을 빠르게 해서 영운의 옆에 다가섰다. 그리고는 그의 단단한 팔뚝을 제 두 팔로 감았다. 우뚝. 갑자기 제 팔에 매달리듯 붙어오는 정수 때문에, 빠르게 움직이던 영운의 다리가 멈추어진다. 제 옆에 붙은(마치 고목나무에 새끼오리가 달라붙어 있는 듯한 이 모양이란) 정수를 보며 영운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정수는 그저 다시 걷자는 듯 말없이 팔을 당겼다. 뭐 하자는 거냐. 여전히 영문을 몰라 떨떠름한 얼굴인 영운을, 정수는 미소 띤 얼굴로 계속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저를 보는 정수의 눈동자가 가라앉아 있어, 영운은 제 연인이 지금 웃고 싶은 건지 울고 싶은 건지 가늠할 수가 없다. 칭-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8층에 도착을 했고, 영운은 정수에게 붙들린 제 팔을 빼내었다. 아쉬운 듯 머뭇거리는 정수를, 빨리 안타냐며 휙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두근 두근 두근. 일정하게 뛰는 박자를 들으니 울고 싶은 건 아닌가 보다. 다행이네. "카레라이스...밖에 없네." "식권 사서 받아올 테니까 앉아서 짐 지키고 있어." "으응." 학식에 도착한 영운과 정수는 뭘 먹을지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수업이 다 끝난 시간이라 학식 메뉴도 종료된 게 많았고, 특히나 오늘은 메뉴가 적은 월요일(요일 별로 메뉴가 다른데, 참고로 가장 메뉴가 다양한 날은 수요일이다)이라서 그런지 남아있는 식단은 카레라이스 뿐이었다. 어제까지 학교에서 신입생 합숙훈련을 했던 영운은, 어제 다 못 챙겨간 것들을 사물함에서 꺼내온 바람에 짐이 꽤 많았다. 커다란 배낭이 하나, 까만색 나이키 스포츠 가방이 하나, 그리고 1.5키로짜리 아령(이건 어째서인지 컨버스 신발상자 안에 들어있다)이 두 개. 영운은 대충 안쪽 자리에 짐을 쟁여놓고 식권을 사러 갔다. 정수는 짐과 함께 자리에 앉아, 멀뚱멀뚱 영운의 동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인다. "큭..." 위 아래 검은색 나이키 트레이닝 복을 입은 듬직한 뒷모습이 식권자판기 앞에 갔다가 카페테리아 앞에 갔다가- 아무튼 그 시꺼멓고 널따란 뒤태를 보고 있자니 정수는 그냥 웃음이 났다. 이런 나라서 미안하고, 그런 너라서 고마워. 아까 조교실 복도에서 정수가 웃었던 이유는, 그리고 지금 이렇게 잠긴 눈으로 미소 짓고 있는 이유는- 미안해서. "아- 진짜 박정수 센스 없긴. 물도 안 떠다 놓냐?" "니가 짐 지키고 있으라며." "됐다 됐어. 자 이거 네 꺼." "히익-! 왜 이렇게 많아?!" "내가 이모님한테 부탁해서 특별히 많이 받아온 거니까- 다 먹어야 된다." "뭐어?! 야 이거 너 꺼 보다도 많은 것 같은데.." "시끄러! 무조건 다 먹어. 맨날 안 먹으니까 그렇게 비리비리 하지. 넌 살 좀 쪄야 돼. 남기기만 해봐?!" "이씽..." 먹어도 살이 안 붙는걸 어쩌라고. 정수는 워낙 입이 짧기도 했지만 체질적으로도 살이 잘 붙지 않는 체질이었다. 뻔히 알면서도 영운은 무조건 다 먹으라며 으름장을 놓는 것이다. 저렇게 낮게 가라앉은 정수의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심술을 부려 보는 것이었다. 분명 심장은 이쁘게 뛰는데 어째 네 눈은 그렇게 잠겨 있는 거냐. 차라리 투정을 부리는 정수의 모습에서 영운은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웃을거면 웃지마 바보야. 아니 그것도 이쁜데- 근데 좀 심장이 쑤신다. 이유 없이. "야..진짜 많아..." "...." "칫..." 불만스러운 얼굴로 식사를 하고는 있지만, 사실 정수는 알고 있다. 배불러서 힘든 얼굴을 보이면 아무 말 없이 식판을 치워주든 숟가락을 뺏든 아무튼 그만 먹게 할 영운이라는 것을. 아니나다를까, 3분의 1도 채 비우지 못하고(정말 머슴밥을 퍼 왔다. 이걸 다 먹을 수 있는 건 유교과 신조교와 김영운 뿐일 듯) 정수가 인상을 찌푸리자, 예상대로 영운은 정수의 앞에 놓여진 식판을 옆으로 밀어내었다. 먹으면서 나만 봐? 어떻게 그렇게 후딱 치워주냐. 정수는 왠지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부터 꺼낼 조금은 무거운 이야기를 위해 그 웃음은 잠시 넣어 두기로 한다. 아직 식사를 계속하고 있는 영운을 보며, 정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말이야...왜 자취하는지 말 했었나?" "집이 지방이라면서." "사실은 우리 집 서울이야. 학교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고..." "..근데 왜 나와서 사는데?" 묵묵히 식판을 비워나가던 영운은, 수저질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는 아래로 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담담하기만 한 정수의 얼굴 표정과는 달리, 그의 눈동자는 조금 습하고 어두워 보인다. 또 이런 눈. 영운은 짧게 혀를 찼다. "...쫓겨났거든...하하.." "쫓겨나..?" "응...나 남자 좋아하는 놈이라고 확 불어버렸거든. 것도 대학 붙었다고- 한국대 붙었다고 친척들 다 불러놓고 축하하는 자리에서." "......" 물기 어린 눈동자는 그 이상 축축해 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잠잠하게 가라앉아, 담담한 그의 표정만큼이나 차분했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영운 쪽이었다. 마냥 밝고, 겁 많고, 소심하고, 여리고- 그런 사람인줄로만 알았던 제 연인이, 사실은 저렇게나 용기 있고 무모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영운은 조금 분한 마음이 들었다. 박정수에 대해서라면 뭐든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하는 건데?" 내가 아는 박정수가, 박정수 라는 사람의 전부가 아니었구나- 하는 그 생각에. 어쩐지 착잡한 마음에, 영운은 다시 고개를 서서히 아래로 내렸다. 밥맛 뚝 떨어지는 구만. 그리고는 쥐고 있던 숟가락을 식판 위에 달칵- 소리가 나게 올려놓았다. 니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그런 것들은 알았어도- 니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남자인지는......몰랐네. "...형이랑 화해하라고..." "그건 내가 알아서.." "아니. 아니야 영운아. 지금 화해 안 하면 나중에 언제 풀 수 있을지 장담 못해."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텅 빈 영운의 손 위로, 어느샌가 정수의 마른 손가락들이 올려져 있었다. 두툼한 영운의 손을 쓰다듬으며 정수는 말을 계속한다. "솔직히 우리 부모님, 나 그렇게 쫓아냈다고 해서 진심으로 날 미워하실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나도 그때는- 뭐 그때는 어려서 부모님 원망도 좀 했지. 내 취향이 남다른 거 빼고 그때까지 살면서 부모님 기대를 져버린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아버지 엄마는 내 꺼 딱 하나 이해 못해주나..하고." "......"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겠더라. 내가 원망한 건 우리 아버지랑 엄마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는 걸. 조금 더 시간을 갖고, 조금 더 현명한 방법으로 말할 수 있었던 거였잖아. 아니 오히려 다른 어떤 것들 보다도 가장 조심스럽게, 천천히, 하나하나 풀어냈어야 했던 거였는데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지." 약간은 서글프게 웃는 정수였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조곤조곤 이야기를 쏟아내는 얇은 입술의 떨림에서, 영운은 정수가 많이 힘들었다는 걸,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박정수는 정말 강한 놈이라고. "물론 커밍아웃 한걸 후회하는 건 아니야.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었을 테니까.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이거지. 내가 후회하고 있는 건, 그렇게 집을 나와서 벌써 햇수로 8년째인데 부모님 얼굴은커녕 전화 한 번 못 드렸다는 거야. 웃기는 게, 분명 지금이라면 부모님한테 사과도 하고 이런저런 대화도 해볼 수 있겠다 머릿속으로 생각은 하거든? 근데 그게 실천이 안 된다니까. 진짜 안돼. 왜 안 되는줄 알아?" "...글쎄. 오랫동안 연락 안 드렸으니까...어색해서?" "뭐, 그런 것도 있긴 하지. 근데 역시 타이밍의 문제인 것 같아. 아버지도 엄마도 지금의 관계보다는 좀더 부드러운 관계를 원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 내가 그런 것처럼. 아마도 나도 부모님도, 타이밍을 놓쳐 버려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싶어." 작고 마른 손이 이번에는 영운의 얼굴선을 따라 곡선을 그린다. 나 봐 영운아- 다정한 음성에 영운이 고개를 들자, 정수는 예쁘게 웃어 보였다. 분명 햇살같이 밝은 미소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까처럼 서글픈 미소도 아니다. "그러니까 형이랑 빨리 풀어. 나중에 후회해도...그땐 늦는다니까?" "......" "응? 영운아.." "...알았어..." 박정수 나이 헛 먹은건 아니었구나. 툭 던지듯 대답을 뱉는 제 모습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는 정수를 보며, 영운은 새삼 제 애인이 '어른'이라는 것을 느꼈다. 스물 일곱이라는 나이- 저보다 일곱 해를 더 살아온 이 작은 남자는, 어른이다. 한동안 가만히 영운의 까만 머리통을 쓰다듬던 정수가, 그만 일어나자며 식판 두 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영운도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식판을 내다 놓는 작은 뒷모습이, 오늘은 조금 커 보이는 것 같았다. * "...이번엔 문 잠궜지..?" "당연하죠." "비번 걸고 열쇠까지 다?" "아 진짜 그렇다니까요! 그만 말하고 쫌 이렇게 해 보라구요!!" "새끼 급하기는-" 시원은 동해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거사를 다시 한번 도모해 보고자, 만화책을 읽고 있는 희철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볼에 쪽, 목에 쪽, 귀에 쪽- 아무튼 희철이 만화책에 집중할 수 없도록 쪽쪽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저리 가라고 귀찮아 하던 희철도 끈질기게 들러붙어 오는 데에, 결국 피식- 웃으며 만화책을 덮어버렸다. 테이블 위에 꽃분홍 방석을 깔고는 그 위에 희철이 몸을 뉘이자, 시원은 기다렸다는 듯 아까 한번 손을 대었던 희철의 셔츠 단추를 다시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셔츠 아래로 드러난 희철의 쇄골, 갈비뼈, 배꼽께까지 차례로 주욱 내려가며 입을 맞추니 '흐응-' 하는 주인님의 기분좋은 신음은 옵션. 이번에야말로 성공하고 말겠다며 잔뜩 결의에 차 있는데- 똑똑똑--- "....씹..." "....." "흣- 야..누구 왔잖아..!" "무시해요. 없는 척 하면 가겠지 뭐." "야 그래도-" "아 형! 나 죽어요 진짜..." 새꺄, 그거 못한다고 죽지는 않아. 니가 뭐 한 달을 참았냐 일년을 참았냐. 고작 일주일 안 한 거 가지고 앓는 소리 하기는. 환영회를 했던 다음날 아침, 바람 쏘일 겸 나갔던 한강공원에서 날씨 좋다며 외투를 훌훌 벗어 던지는 바람에, 감기에 걸려버린 희철이다. 희철은 며칠 동안 열과 기침에 시달리다가 어제 겨우 상태가 호전되어, 오늘 학교에 온 것이 개강하고 처음 온 것이었다. 나 참, 아플 때는 제발 살아만 달라고(감기에 걸려 뒈질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 줘도 최시원은 정말 동물인 건지 알아먹지를 못하더라) 질질 짜더니, 자리 털고 일어나자마자 못 잡아먹어 안달이네 아주. 희철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시원은 끊임없이 움직였고, 말하는 중간중간에도 희철의 몸에 쪽쪽대기 일수였다. 다시 옷 입기도 귀찮은데 에라 모르겠다- 희철도 그냥 놔두기로 했다. 똑똑똑--- '뭐야 없나봐.' '아씨...안 되는데.' '급한 거야? 열쇠 없어?' '열쇠 집에 놓고 왔지. 김희철 이 인간은 맨날 동방에 박혀 있으면서 꼭 필요할 때만 없어...'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정수와 영운의 것이었다. 아 진짜 박노인 알츠하이머 같은 새끼. 또 뭐 놔두고 간 거냐?! 니가 아직도 SJ인줄 아냐?! 졸업한지가 언젠데 동방을 지 사물함으로 쓰고 지랄이야. 괜히 치미는 짜증에 희철은 잘됐다 싶어 더 모른 척을 했다. 자꾸만 건드려 대는 시원 때문에 신음을 참기가 좀 힘들긴 하지만- 뭐 학교에서 이러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그닥 자랑은 아니거늘, 이 정도는 문제 없다며 '흐응' '아앗' '핫' 등의 다채로운 화음들을 보란듯이 목구멍 저편으로 밀어 넣어 보이는 희철. 그리고 주인님을 어떻게 잡아먹을지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사자새끼는, 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따위 이미 안드로메다 쪽으로 돌려 버린 지 오래. 그러나 그 때- '잠깐만 뒤로 물러나봐.' '...응? 왜? 뭐ㅎ...' 우당탕탕탕탕------콰당----- "으힉!!" "?!!" 엄청난 소음과 함께 동아리 방의 문이 활짝 열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문짝이 뜯어져 날라갔다. 일단 소음에 놀라 몸을 뗀 시원과 희철은, 다음 순간 이쪽으로 날아오는 문짝에 식겁. 다행히도 타이밍 나이쓰하게 시원이 희철을 끌어당겨 안는 바람에 부상자가 나오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지만, 희철은 너무 놀라 딸꾹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히끅-" "....아...............그래서 안 열었구나....." "하아....없는 척 한 건 미안한데요...정수형...이건 아니잖아요..." "히끅- 씨발 박정수....히끅- 너 죽을래?!!! 히끅-" "아 형, 말하지 마요. 힘들잖아." "아니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영운이가..." 바지 버클이 풀린 채, 셔츠를 한껏 열어 제낀 채로 시원의 품에 안겨 있는 희철과, 흥분에 얼굴이 붉어져 있는 시원을 보고 정수는 한눈에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짐승 같은 것들. 너네는 365일이 발정기냐?! 학교는 학문을 닦는 곳이거든요?!… 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놀라서 까칠 지수가 평소보다도 약 13% 상승해 있는 성질 김희철 선생과, 사자새끼로 변신하려다 실패한 새끼사자의 포스에 눌려 정수는 일단 저자세를 취했다. "나 참, 형님들 학교에서 뭣들 하는 짓입니까...쯧쯧." "시끄..히끅- 시끄러!! 너 그 문짝 얼마짜리..히끅- 얼마 짜린 줄 알아?!" "형, 말하지 말라니까요. 그리고 지금 문짝이 중요해요? 사람이 다칠 뻔 했는데." 가볍게 문짝을 날려버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툭툭 털던 영운이 한심스럽다는 듯 저와 시원을 쳐다보자 희철은 뒷목을 잡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니가 인간이냐?! 어깨로 철문을 날리는 게 이게 인간이야?!! SJ의 모든 물건들은 동방 '물건금고' 안에 보관되고 있는지라 보안이 생명이었다. 그래서 희철은 역시나 물주인 성민을 어르고 달래서(사실 협박해서) 무려 도어락과 열쇠구멍이 함께 있는 문을 설치했다. 대체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학교에서 총알이 날아다닐 일이 뭐가 있냐는 성민의 의견을 곱게 씹어주고, 희철은 초합금으로 만들어진 총알도 막을 수 있는 철문을 달았다. 그런데 그 문을, 총탄도 튕겨져 나가 깨져버린다는 그 문을- 사회체육과 09학번 김영운씨께서 친히 날려주신 것. 이게 얼마 짜린데에!!! "...근데 정수형, 뭐 가지러 온 건데요?" "아- 내 안경." "뭐야, 박정수. 안경 가지러 온 거였어? 안경 조교실에 있었잖아." "...그..래...?" "어~ 아까 나올 때 책상 위에 두고 나오는 거 봤는데.." 아… 어쩐지 조교실 나오면서부터 세상이 흐리더라니. 뒤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살기에 정수가 끼릭끼릭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성질 김희철 선생의 애완동물인 사자새끼 최심바의 모습이. 시, 시원아...형이야~ 왜 그래애~ "...박정수 짜증나...나갔다 올 테니까 문짝 고쳐..히끅- 고쳐놔!!" "어? 어어..." "심바야 따..히끅- 따라와. 꽃잎(대학원 건물 1층에 있는 카페)가자." "아 형, 단추 좀 제대로 잠그고!! 잠바도 가지고 나가야죠!! 같이 가요-!" 고맙다 친구야. 넌 역시 내 친구. 서슬 퍼런 시원의 기운을 감지하고 희철이 먼저 선수를 쳤다. 사자새끼 성질 피우는 거 재미있긴 한데 하극상은 못 봐주거든. 희철은 정수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동방을 빠져 나갔다. 제대로 옷도 추스르지 않고 쌩하니 나가버리자, 시원은 허둥지둥 겉옷과 가방들을 챙겨 들고 희철의 뒤를 따랐다. "...근데 영운아....이거 어떻게 고치지...." "글쎄..." 다른 동방처럼 나무로 된 문이라면 경첩 새로 달고 못 새로 박아 넣으면 될 일이지만, 이건 전문 기사가 약 한 시간에 걸쳐 설치한 특수 문이었다. 정수는 이걸 어쩌나 끙끙대다가, 문득 기사 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거 고장 나거나 부서지면 방법 없습니다. 그냥 새로 다셔야 할 겁니다- 였던가. 하아...이걸...어쩌지? * "오케이~ 알았어. 이따 집에서 보자거~" '아씨 내 말투 따라하지 말라거!!' "알았다거~ 끊는다!" '야 이 씨ㅂ..' 탁- "...귀엽기는. 큭큭." 저녁 훈련을 마친 혁재는 학생관 310호로 향했다. 치사하다 이동해, 그냥 지 꺼 제출할 때 같이 내주지. 감히 희철에게 '한 번 걸러진 알코올'을 뿜은 죄(물론 그 전에 맹수와의 러브타임을 방해한 죄목으로 동해와 혁재는 이미 SJ가입이 점 찍어져 있었다)목으로, 혁재는 엄청난 고문 플러스 SJ 가입을 권유(라고는 하지만 그건 절대 강제였다)받았다. 동아리 중복 가입이 가능하긴 하지만, 워낙 야구부 훈련이 고되기에 거절하고 싶었는데- 아아..지금 생각해도 몸이 떨려. 술에 취해 대형사고를 치고 세상 모르게 잠들었던 혁재. 다음날, 눈을 뜬 혁재는 어리둥절해졌다. 어째서 내가 하늘을 날고 있는 걸까. 몽롱한 정신으로 안 떠지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거늘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 뿐. 어라, 잠이 덜 깼나? '...음......으음?!!! 으..으아아아아아아아악!!!" '정신 드냐.' '희..희철 형님...' '살아났으면 됐다. 자, 이제 죽자 이 멸치새끼야!!!' 시원을 데리고 한강에 갔다가 정수 커플을 만난 희철은, 영화보고 놀면서 간밤의 악몽을 서서히 지워내고 있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자- 어쩐지 간밤의 그 냄새가 올라오는 것만 같은 이런 뭣 같은 기분이라니. 희철이 한강에 다녀올 때 까지도, 소파에서 자고 있던 두 생명체는 여전히 꿈속을 헤매이고 있었다. 동해야 아침 다 되어서 잠들었고 혁재 업고 오느라 고생 했으니까 그렇다 치지만, 멸치새끼 이건 뭐냐. 기껏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왔건만,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쩝쩝거리는 혁재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다시금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용솟음 치기 시작한 희철. 결국 터지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우유 사오겠다며 시원이 잠시 나간 틈을 타 멸치 대가리를 똑 따버리기로 결심한다. 희철은 자고 있는 혁재를 질질 끌어다가 베란다로 데려가서는 베란다 난간에 기대게 했다. 이로써 희철이 손만 놓으면 혁재는 13층 아래로 머리부터 다이빙 하게 생긴 모양이 되었다. 분노에 눈이 먼 희철이 손을 확 놔버리려는 찰나 시원이 돌아왔고, 놀라서 뛰어온 시원이 혁재를 이쪽으로 끌어당겨 다행히 사건은 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혁재가 멀쩡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죽일 수 없다면 숨만 쉴 수 있을 만큼 밟아 주겠다며, 세 시간 뒤 동해가 일어날 때 까지도 희철은 혁재를 가차없이 때리고 까고 할퀴고- 아무튼 혁재는 정말 딱 죽지 않을 만큼 맞았더랬다. 동해가 말리지 않았더라면(시원은 이미 포기하고 옆에서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나 뭐라나) 정말로 맞아 죽었을지도. "아..있다." 아무튼 혁재는 무사히 동방을 찾아갔고, 310호 앞에 서서 똑똑- 노크를 했다. 아무도 없나?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고, 혁재는 이게 문이 두꺼워서 잘 안 들리는 걸지도 모른다며, 조금 힘을 주어 노크를 다시 했다. 쾅쾅쾅- 하고. 여전히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다. 뭐야, 없나 보네. 기껏 왔구만. 다음에 다시 와야겠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혁재가 몸을 돌리는 순간- 끼기--끼기기-----끼기------------쿠당탕탕탕탕탕탕탕------ "..허...헐퀴?!!!" ...문이...넘어갔다?!!! 그랬다. 노크 몇 번에 마치 바스티유 감옥의 그것과 같은 저 웅장한 철문이 통째로 떨어져 나간 것이다. 진상은 이러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정수는 강력 본드로 경첩에 해당하는 부분 즈음을 붙여 놓았다. 그리고는 희철에게 전화를 해, 학생인 영운에게 수리비를 청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내일 기사 부르고 조교실로 청구서 올리라고, 일단 고정만 시켜 놨다고 말했다. 수리비도 할부로 낼 수 있으려나 하는 고민을 해 보면서 일단 정수는 영운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리고 약 십분 뒤, 혁재가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고- 결과, 지금과 같은 상황이 연출된 것. "...당신 누굽니까?" "...헉...아니...그게 저는..." "누군데 문을 부숴요?! 여기 어딘 줄이나 알고 부순 거에요 지그음?!" "아뇨, 저는 노크만 했ㄴ..." "시끄러워요!! 당장 고쳐 놓으세요!!" 그리고 하필이면, 종운 때문에 한껏 신경이 곤두서 있는 '욱마에'에게 이 장면을 들켜버리고 말았다. 종운이 풀었던 그 어이없는 문제지를 되새김질 하며 동방으로 돌아오던 려욱에게 말이다. 얼이 빠져서 어버버 거리는 혁재에게, 려욱은 대뜸 삿대질을 하며 당장 고쳐놓지 않으면 신고를 하겠다느니, 너 누군데 여기서 이러고 있냐느니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다. 아니 나는...정말 나는 그냥 노크만 했을 뿐인데...억울해서 눈물이 다 나오려고 하지만, 어찌 되었든 제가 건드린 다음에 문이 저렇게 되어 버렸으니. 혁재는 려욱의 공격에 제대로 방어도 못하고, 그저 유체이탈크리. 결국, 다음날 희철이 와서 사건의 진상을 설명해 주고 설비 기사를 부를 때까지, 혁재는 동방 앞에 쭈그리고 앉아 훌쩍대고 있어야 했다. 06. "그럼 영운이까지 넣으면...다섯 명이네. 뭐 그래도 작년보다는 많이 뽑았네. 너네때 너랑 성민이, 려욱이 딱 셋 이었잖아." "그거야 우리 기수 들어갈때 이미 중심만 열명도 넘었으니까 그렇죠." "하긴 그랬지 참. 아니 근데 그 많은 인간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없어져 버릴 줄이야...그치?" "그러게 말이에요." 거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안 그래도 배가 고파 슬쩍 정신이 들어있던 희철은 더 자는것을 포기하고 눈을 떴다. 퉁퉁 부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침대 옆에 놓여져 있는 시계를 보니- 오후 한 시 반. 에이씨, 두 시까지는 버텼어야 하는건데. 황금같은 일요일을 맞아, 희철은 여느 주말과 마찬가지로 점심때가 훨씬 지날 무렵까지 잠에 빠져 있었다. 아- 개배고파. 일단 뭐라도 좀 먹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자, 희철은 귀찮다고 찐상을 하면서도 슬금슬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침대 주변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옷가지들을 대충 주워입고 무심결에 저쪽 구석에 놓인 전신 거울로 눈을 주었는데- 으악. 너 또 왔냐. 초췌하고 지저분하고, 아무튼 몰골이 말이 아닌 저 생물체는 어째서 일요일마다 나타나 주시는 건지. 차마 저 모습이 아름다움의 대명사, 비너스의 화신 김희님이라고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며 희철은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어?" 제길. 13만 갈래로 갈라지는 목소리도 짜증나 죽겠구만, 거실에 있는 저건...사자새끼...아냐?! 소파에 앉아 정수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시원을 발견한 희철은 재빨리 몸을 돌려 욕실로 향했다. 으악, 저새낀 아침부터(엄연히 따지면 대낮) 쳐오고 지랄이야!! "김희철 일어났어?" 희철이 욕실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 뒷태마저도 엉망진창인 외계 생물체를 발견한 정수가 반갑게 아침인사(혹은 점심인사)를 건넸다. 씨발놈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평소에는 희철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거늘, 오늘따라 정수는 참 다정한 것 같다. 존나 눈물나게 고맙다 씹새야. 반쯤 열어 제낀 욕실문의 문고리를 붙잡은 채로 희철은 굳어버렸고, 그런 희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수의 시선을 따라 시원도 욕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 잘 잤어요? 나 왔는데.." "어..그, 그래. 어, 언제 왔어?" "한 시간쯤 전에요. 아, 근데 이쪽 좀 보고 말해요~" 희철을 발견한 시원은 거의 자동으로 소파에서 일어선다. 그리고는 쭈뼛거리고 있는 희철의 뒷태를 향해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가기 시작했다. 오지마!! 오지 말라고 새꺄!!!! 김희철의 동공의 확장 정도 만으로도 그의 기분을 파악할 수 있다는 최농노 였지만, 아직 텔레파시는 무리였나 보다. 희철의 간절한 마음속 외침을 듣지 못한 시원은, 계속해서 그의 주인님을 향해 전진할 뿐. "이, 일단 좀 씻고..." "김희철 병신." "씨발 뭐?! 너 죽으ㄹ...헉..!!!" 당했다. 등 뒤에서 여기 좀 봐달라 조르는 시원을 애써 외면하고 있던 희철에게, 저 너머에서 악마의 도발이 들려왔으니- 병신이라니?!! 소리를 버럭 지르며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다 본 희철은, 바로 뒤에 대기하고 있던 시꺼먼 인영에 몸을 흠칫 떨었다. 이런 겨자케찹치킨밥주걱에다가 마요네즈 쳐먹는 시츄에이션 따위. 희철의 숨 삼키는 소리와 함께 시원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간다. "....형...." "...어...어? 아...미안 내가 어제 늦게 자서...좀 추하..지?" "아니..그게 아니라..." 미간까지 찌푸리며 뭔가 불만스럽다는 얼굴을 하는 시원에게 살짝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쨌든 제가 봐도 지금의 모습은 대략 살인충동이 일어나는 몰골이었기에, 희철은 고개를 숙이며 시원의 시선을 열심히도 피한다. 그래 나 추한거 알거든!! 그렇다고 뭐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 할건 없잖아!! 저쪽에서 입을 막고 끅끅대는 정수를 죽일듯이 노려보며, 희철은 빨리 씻고 나오겠다며 고개를 숙인 채로 얼른 몸을 돌렸다. "으앗!! 야, 뭐야!!" "아 미안해요...근데 역시..." 빨리 씻자, 씻어. 욕실 슬리퍼에 발을 끼우려는데, 갑자기 허리를 잡아 채는 시원의 손길에 휘청- 희철의 몸이 뒤로 쏠렸다. 뭐야!! 왜 갑자기 붙잡고 지랄이야!! 희철이 뭐하는 짓이냐고 짜증을 내자, 시원은 일단 사과를 하더니, 아까보다 더 미간을 찌그러뜨리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희철의 몸을 위 아래로 훑어내렸다. "미안하면 좀 놓던가!! 씻고 온다니까?! 그리고 역시는 뭐가 역시야?! 그래 역시 추하다고? 씨발 나도 알ㅇ.." "형 역시 살빠진 것 같은데요. 허리가 이게 뭐에요..." 저거 뭐하는 자식이야 진짜. 시원의 발언에 큭큭대던 정수의 표정이 일순 썩었다. 눈 달렸으면 일단 저 몰골에 혐오감 부터 느끼거나 혹은 놀라는 시늉이라도 좀 해야 하는거 아니냐며. 아무리 희철의 미모가 남다르다고는 하나, 지금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폐인' 소리가 절로 나올법 하거늘. 시원의 눈에는 그런것보다 제 애인의 얇아진 몸뚱아리만이 비추어졌나 보다. 희철 역시 정수와 마찬가지로 어이없다는 얼굴로 시원을 쳐다본다. 뭐냐 넌. "이것 봐요. 살 빠진게 분명하다니까.." "...너...나 이틀전에 봤거든? 겨우 이틀동안 무슨 살이 빠져 빠지긴..." "아냐, 분명히 빠졌다니까요?! 이 느낌이 이틀전의 그게 아니라니깐.." 답이 없다, 진짜 답 안 나온다 최시원. 정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이내 질렸다는듯 고개를 홱 돌려버린다. 내가 너희의 야리꾸리한 시츄에이션들을 하루 이틀 목격하는건 아니다만- 시원아 넌 어쩜 날이 갈수록 업그레이드 하는구나. 아주그냥 피카츄 라이츄, 파이리 리자몽 하는구나!! 살다살다 너같이 징한놈은 또 처음 본다 내가. 어쩐지 갑갑한 느낌에 정수는 탁자에 놓여져 있던 오렌지 주스를 원샷. "아- 시끄럽고!! 일단 씻게 이것 좀 놔!! 귀찮아 죽겠네 씨발.." "..형 너무해요..." "시끄!" 울상을 짓는 시원을 뿌리치고, 희철은 쾅 소리가 나도록 욕실 문을 닫아버렸다. 미친 너무한건 니새끼겠지. 물론 시원이 저의 거지꼴에 욕을 하거나 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열받는 일이었겠지만- 욕실 거울에 비친 희철의 얼굴은 아까 오렌지 주스를 들이키던 정수의 얼굴 만큼이나 잔뜩 질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징한 새끼. 그래도 신경은 쓰이는 건지, 큰 소리로 '빨리 나갈테니까 소파에 앉아있어!'라고 외쳐주는 희철이다. 하긴 희철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인님한테 버림받은 사자새끼는 그저 주인님이 다시 행차하실 때까지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테니. "살이....좀 빠졌나?" 옷을 다 벗고 거울에 제 몸을 비추어 보던 희철은, 역시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거 같기도 하고, 그대로인거 같기도 하고. 아니 막말로 빠졌다고 해도, 이틀 사이에 빠져봐야 뭐 얼마나 빠졌겠냐고. 희철 본인도 느끼지 못할 정도의 미세한 변화를 한눈에 감지하는 최심바란- 역시 한국대 최고의, 아니 이 시대 최고의 농노인 듯. 대충 씻고 나와 물을 마시고 있는 희철에게 시원이 다가와 물기 좀 잘 닦으라며 잔소리를 해댄다. 새끼 니가 청소할 것도 아니면서(그렇다고 본인이 하는것도 아님. 정수가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희철) 물 떨어진다고 지랄 하기는. 그게 아니라 형 감기 걸릴까봐 그러죠! 감기 달고 사는 주제에 왜 맨날 샤워하고 머리도 제때 안 말리냐구요! 별 것도 아닌걸로 목소리 높이는 게 취미인 주인님과 거기에 응수하는 농노. 날 생각해서 그런 거라니 할 말은 없다만- 거참 쨍알쨍알 시끄러 죽겠네. 이놈의 사자새끼는 어린노무 새끼가 잔소리는 박정수 뺨친다니까 진짜. "...어라? 근데 박노인은 어디 갔냐?" "글쎄 전화 받더니 나가던데.." "그래? 아이씨...배고픈데...나 밥 해주기 싫어서 나간거 아냐?" 정수형이 무슨 식모냐며. 친구가 어디 갔는지 궁금하거나 걱정되어서 물어보는게 아니라, 결국 형 밥이 중요했던 거죠. "...하아...정수 형이 형이랑 같아요?" "뭐?!" "아, 아뇨. 밥은 내가 할게요. 자자~ 빨리 들어가서 옷이나 갈아입어요 형~" "...씨발...어쩐지 기분 나쁜데 이거..." 떠밀리듯 안방으로 들어온 희철은 서랍을 열어 새 옷을 꺼냈다. 아 맞다 빨래도 돌려야 되는구나. 박정수 이 새끼 진짜 일하기 싫어서 도망간거 아냐?! 사실 이 집에서 요리며 청소며 빨래며, 아무튼 가사는 거의 정수가 담당하고 있다. 보통 룸메이트라면 둘이 번갈아서 하거나 아니면 누구는 요리, 누구는 청소 이런 식으로 정해서 할 테지만 이곳은 다르다. 일명 '마이너스의 손' 희철은 요리를 하면 냄비를 태워먹고, 청소를 하면 꼭 뭐 하나 깨먹고, 심지어 세탁기도 못 돌려서 한번은 베란다가 거품 천지가 된 적이 있다는. 처음에는 분담해서 하자던 정수도, 희철의 이런 모습에 그냥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거니까 어지르지나 말라며 제가 다 떠안았고- 그렇게 벌써 햇수로 8년 째. 그나마 작년부터 희철이 시원과 사귀는 바람에, 정수는 조금이나마 허리를 펴고 살게 되었다. 희철은 시원이네서 자고 오겠다며 일주일에 절반 정도는 외박(그 전에도 술마시느라 외박을 했었지만, 새벽귀가 후 정수를 흔들어 깨워 밥을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더 힘들었다)을 해 밥을 할 필요가 없었고, 시원이 이곳으로 놀러오면 알아서 치우고 밥하고 희철의 뒤치닥거리를 해줬으며, 결정적으로 시원이 여기서 자고 가는 날에는 그 다음날 아침에 침대 시트 빠는 김에 빨아버렸다며 빨래까지 다 해주었으니. 그래서 정수는 일부러 일요일(수도세 절약을 위해 빨래는 몰아서 일주일에 한번만 한다)마다 시원을 불렀고, 놀러오면 으레껏 자리를 피해주곤 했다. 부디 일 거하게 치루고 다음날 아침에 밀린 빨래를 해주길- 하는 바람에서. 할 줄 아는건 없어도 눈치 하나는 귀신같은 희철은 그런 정수의 마음을 이미 간파했지만, 희철의 입장에서는 누가 가사를 하던 상관이 없으니 그냥 모른척 해주고 있다. 나만 안하면 되지 뭐. 오늘도 그렇다- 만약 오늘 정수가 일하기 싫어서 나간 거라고 해도, 시원이 와 있으니 제가 할 일은 없을테다. 희철은 옷을 다 입고 머리까지 깔끔하게 묶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으으....어깨 결려....야 밥 멀었냐?"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요. 반찬은 둘째 치고 밥도 없더라구. 밥 되는동안 마트 갔다올 테니까- 아 뭐 먹고 싶은거 있어요?" "음? 음..글쎄....아 그러지 말고 같이 가. 가서 보면 뭐 생각날지도 모르잖아." "지치게 뭘 따라와요, 배고프다면서." "얌마 마트 코앞에 있는데, 내가 무슨 할아범도 아니고..." "큭큭, 맘대로 해요 그럼." 밥 멀었냐며 한껏 기지개를 켜 대는 희철에게, 시원은 아예 처음부터 다 시작해야 한다고 미안한듯 어색하게 웃는다. 새꺄 왜 니가 미안해 하냐. 마트 갔다 오겠다며 전기밥솥 스위치를 올리고 자켓을 입는 시원에게, 희철은 저도 따라가겠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손님은 너인데- 아무리 김희철이라지만 매번 이렇게 제 애인을 부려먹고 시켜먹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하나보다. 주말에는 무슨일이 있어도(정수의 말에 따르면 옆집에 도둑이 들어서 경찰차 오고 난리가 났는데도 창문 한번 안 열어봤다고 하더라) 햇빛을 보지 않으려 하는 희철이 자진해서 따라나서자, 시원은 고개를 갸웃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웃음이 났다. 그래 내가 이 맛에 머슴산다. 큭큭. 정수와 희철이 함께 살고 있는 이곳은 적은 세대수의 아파트 단지이다. 원래는 학교 근처의 빌라 같은 곳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정수가 조교가 되면서 수입이 늘고 더불어 SJ의 세력이 점점 커져 희철의 수입도 늘어나, 1년 전 이 곳으로 이사를 왔다. 비교적 낮은 집값에 비해 주변 시설은 꽤 편리했다. 바로 옆이 지하철 역이라서 조금 신경쓰이긴 했지만, 앞동 건물이 왠만한 소음은 다 잡아주어서 많이 시끄럽지는 않았다. 얼마 전에는 단지 앞에 대형 마트가 생겨서(지하철역 옆에도 할인마트가 있긴 하지만 역시 대형 마트에 비해 물건이 많지 않다) 정수는 보는 재미가 있다며 심심하면 마트 놀러간다고 구경가곤 한다. "우와..되게 크네?" "밖에서 보기에도 크잖아요. 뭐야, 형 여기 처음와요?" "엉. 내가 뭐 올 일이 있어야지..." 카트를 밀고 가는 시원의 옆에서, 희철은 두리번 거리며 신기하다는 듯 연신 주위를 살폈다. 커 보이긴 했지만 들어와 보니 정말 없는게 없네. 동그란 눈을 굴리며 마트 곳곳을 누비는 희철의 모양을 보고 시원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귀여워 죽겠네. 근데 형, 여기 있는 사람들은 형을 더 신기하게 보는 것 같은데 말이죠. 분홍색 판쵸를 입고 주황색 머리(새로운 동아리 맘보들에게 러블리한 이미지를 심어주겠다며 엊그제 염색을 했다)를 높이 묶어올린 희철의 모습(게다가 어째서인지 판쵸 아래 입은 옷은 위아래 빨간색 트레이닝복, 그리고 신발은 삼선 쓰레빠)은, 역시나 여기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듯. "형, 어디에요?" "어어~~~ 시워언아아~~나 여어기이~~" 혼자서 잘도 뛰어 다니더니, 희철은 시원의 시야에서 금새 없어져 버렸다. 아 진짜 어디 간거야. 철컹철컹 빈 카트를 밀며 이 코너 저 코너에 고개를 빼 보아도 희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희철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어디냐고 묻자, 저어기 뒤쪽에서 제 이름을 크게 불러대는 희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 참, 전화로 말하면 되지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요...사람들 쳐다보잖아. 팔까지 휘휘 크게 돌리며 시원아~를 복창하는 희철에게로, 시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최대한의 속도(저대로 두었다가는 심바, 사자새끼 뭐 이런거 저런거 다 튀어나올것 같아서)로 달려갔다. "시원아 시원아, 나 생선 먹을래." "..생선이요? 형 생선 그닥 안 좋아하지 않아요?" "어..근데 그냥 먹고 싶어졌어. 이거 먹을래 이거." "에...이건..." 갈치잖아요. 형...갈치가 얼마나 비싼데. 희철의 하얗고 길다란 손가락이 우아하게 가리키고 있는 그것은- 다름아닌 갈치. 그것도 제주 은갈치. 반짝이는 갈치 비늘만큼이나 빛나는 희철의 눈빛에, 시원은 단칼에 안돼요- 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 머뭇거렸다. "꼭...이거 먹고 싶어요?" "어!! 멋지지 않냐?! 일본도 같은게 막 번쩍번쩍!!" 아니..이건 식품이거든요. 제발 그런 기준으로 반찬거리를 선택하지 말란 말입니다. 애초에 혼자서 장을 보러 왔어야 하는 거였다며, 입 밖으로 나오는 한숨을 주체하지 못하는 시원. 그래 김희철 살 빠진거 같은데 몸보신이나 시키자. 결국 또 시원은 두 손 들고 다 정리되어 랩으로 씌워져 있는 갈치 한 팩을 집어 들었다. 삑- 삑- 삑- "..그렇게 좋아요?" "엉!! 완전 간지작렬!! 클클." 약 한 시간에 걸쳐 장을 본 결과- 희철의 주식인 우유와 시리얼, 그리고 계란과 두부, 라면 등이 카트에 담겨졌다. 별로 산것도 없건만, 구경에 신난 희철 때문에 한 시간이나 걸려 버린 것. 배고프다면서 잘도 돌아다니네. 카운터에 올려진 물건들은 금새 삑삑 소리를 내며 비닐봉지로 옮겨 담아졌다. 산건 열 가지도 안 되는데 삼만 원이나 나왔다. 제주 은갈치 15000원의 타격이 큰 듯하다. 손을 떨며 지갑을 여는 시원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희철은 빨리 가서 밥 먹자며 신이 났다. 아니 왜 형 반찬값을 내가 내야 하는 겁니까. 어차피 장부 정리 하다가 삼만 원 남았는데 그거 써버려야 겠다 생각을 하면서, 시원은 일단 제 카드로 계산을 마쳤다. "근데 형...한 마리 너무 많지 않아요 역시?" "야- 많긴 뭐가 많아~ 뼈 발라내면 먹을게 뭐 있다고. 그리고 남으면 얼려두면 되지." "뭐...그래도 되긴 하지만..." "아 그렇지! 동해 부를까? 동해 부르자!!" "네? 에?! 아니 형!!" 집에 돌아와 저녁 준비를 하던 시원이, 이거 한 팩(한 마리를 네 도막으로 나누어 팩으로 포장) 다 굽는건 역시 너무 많다고 투덜대자, 희철은 많긴 뭐가 많냐고, 많으면 얼리라고 퉁하게 말해 버렸다. 말만이라도 좀 많은가? 에헤- 요래주면 좀 좋냐고요. 툭툭한 희철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건지 시원은 살짝 부은 얼굴로 입술을 삐죽삐죽. 시원이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마이 페이스인 희철- 그러다가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에 동해를 부르며 휴대폰을 집어든다. 뭐요?! 동해?!! 아니 내가 왜 그 녀석한테까지 밥을 해 바쳐야 하는건데!! 이 비싼걸 왜!! 그러나 시원이 말릴 새도 없이, 희철은 이미 [이쁜동해]를 검색해 통화 버튼을 눌러 버렸다. '...여보세요...' "..동해야 형이야. 너 목소리가 왜 그러냐? 어디 아파?" '아니..좀 잤어....흐암..' "그래? 그럼 밥 안 먹었겠네?" '엉...왜?' "와서 밥 먹으라구~ 갈치 구울거야~" 신났구만 신났어. 내가 굽지 니가 굽냐?! 지글지글 프라이팬 위에서 구워지고 있는 갈치보다도 더 뜨겁게 자글거리는 시원의 눈빛이 느껴지지 않는건지, 희철은 전화기에 대고(동해에게 대고) 화알짝 웃으며 빨리 오라고 말하고는 통화를 마쳤다. "너 그거만 굽고 일단 좀 나가봐라." "...네?" "동해 택시타고 오라고 했어. 택시비 줄테니까 들고 나가 있어." 아무리 최시원 인내심이 쇠심줄 저리가라로 단단하다고는 하나, 역시나 이정도 어택에는 데미지를 입지 않을 수가 없다. 진짜 너무한다 형. 이틀만에 보는 제 애인이 어쩐지 말라 보여서, 딴에는 비싼거 먹인다고(물론 동아리 공금 잔액으로 충당하긴 했지만) 이러고 있거늘- 뭐? 동해를 불러? 게다가 나보고 걔 마중까지 나가라고?!! 시원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일단 짜증이 났다. 심하게. "...형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뭘." "...진짜 몰라서 물어요?" 정색을 하는 시원의 얼굴에, 희철은 뒤늦게 아차(아까도 언급했지만 김희철이 눈치는 좀 빠르다) 싶었다. 조금..심했나? 그렇다고 여기서 숙이고 들어가기에는 김희철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하니, 이걸 어쩐다. 잠시 동안 타닥타닥 갈치가 구워지는(기름 튀는) 소리만이 둘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아, 그렇지. 뭔가 생각났다는 듯, 희철의 얼굴에 옅게 미소를 걸린다. 희철은 시원에게로 다가서서,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 꼬옥. 표현 그대로 꼬옥 껴안고는, 앞치마를 걸친 시원의 단단한 가슴팍에 제 머리통을 부빗거린다. 간만에 나오는 희철의 '귀여운 짓'에 시원의 마음이 흔들흔들. 흥! 어림도 없다!! 난 흔들리지 않아!! 나 어려운 남자라고!!! "...애교 부린다고 넘어갈 문ㅈ..." "오늘...자고 갈거지? 킥..." 아놔...뭐야...형 정말...뭐 이런....이게 뭐하자는.......내가 그렇게 쉬운 남자인 줄 알아요?!!! "....택시비 주세요." …쉬운 남자입니다. 감사. * 영운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정수는 학교 앞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아니 주말에 무슨 학교야, 집도 먼 녀석이. 혹시나 저 때문에 여기까지 온건가 싶어, 정수는 서둘러 약속장소로 갔다. "박정수, 여기." "어어...많이 기다렸어?" "아니 별로. 일단 뭣 좀 시켜라. 난 좀 전에 주문했어."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다 주었지만, 정수는 메뉴판을 열어볼 것도 없이 코코아를 달라고 했다.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저쪽으로 물러가자, 겉옷을 벗고 앞에 놓여진 물을 원샷하는 정수. 천천히 오라니까 뭘 그렇게 급하게 온 거냐며 쯧쯧 거리는 영운의 말에, 정수는 그저 헤헤- 웃어버렸다. "뭐하러 여기까지 왔어, 근데. 그냥 중간지점에서 만나면 되지.." "....형이 학교에 있거든..." "...어?" 형? 너희 형 말하는 거야? 정수의 눈을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나 정수의 그런 표정(무언가 대답을 요구하는 표정)에도 영운은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작게 한숨만. 그러고 보니- 영운의 표정이 굳어있다는 것을 정수는 그제서야 볼 수 있었다. 영운이 주문했던 아이스티와, 정수가 조금 전에 주문한 코코아가 테이블 위에 놓여질 때까지, 영운은 아무 말이 없었다. "...형이랑...좀 풀어볼까 해서.." "..아.....그래, 잘 생각했어." 아이스티를 반 잔 정도 한번에 마셔버린 영운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 벌써 일주일 하고도 삼 일이나 지났다. 그러니까 벌써 열흘동안, 영운과 종운은 서로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착하다 김영운. 착해 착해. 종운과 화해하겠다는 영운의 말에, 정수는 잘 생각했다며 생긋 웃어 주었다. 쓰담쓰담이라도 해줄까- 정수의 장난에 영운은 자기가 무슨 어린애냐며, 동생 취급 하지 말라고 성질을 낸다. 찰싹- 제 손을 쳐내는 그 모습에, 정수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 정수의 웃는 모습에 영운도 속으로나마 살짝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근데 나는 왜...부른거야?" ".....사과하라고 했잖아 니가. 그러니까 니가 책임지라고." "뭐어?! 야 그런 게 어디 있냐?!!" 이번에는 영운이 소리내어 웃는다. 속은 깊은 것 같은데 저럴때 보면 저게 정말 스물 일곱이나 먹었을까 싶다 진짜. 영운은 흥분하는 정수의 손을 잡아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는, 그 위에 제 양손을 포갰다. "너 없으면 말도 못 꺼낼거 같아서.." "...뭐..뭐야아 갑자기.." "너 없으면...아무것도 못하잖아 나." "......" "...니가 이렇게 옆에서 내 손 잡아주고 있으면, 나 형한테 욕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을거 같아서...그래서 불렀어." 김영운 닭살이야. 안 어울리게. 꽤나 사랑스러운 눈을 하고서 저를 마주하고 있는 영운에게, 정수는 그저 피- 하는 바람빠진 소리를 낼 뿐. 슬몃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도 같았다. 행복해서. "그, 그러다 내가 욕먹으면? 너 나 욕먹으라고 부른거지...? 그치!" "야 박정수-!" "큭큭, 농담이야. 뭐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어쩐지 요즘따라 자꾸만 심각해지는 것 같아서, 정수는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본다. 예전에는 유치하다고 할 정도로 별것 아닌거 가지고 웃고 싸우고 그랬는데, 요새는 우리 둘 다 좀 힘든 것 같아. 볼멘 소리로 박정수- 하고 소리를 높이는 영운에게, 정수는 금방 농담이라며 샐쭉하니 웃어 보였다. "걱정마라 박정수야." "어?" "욕 먹으면 오래 산다잖냐." "뭐? 큭큭.." "우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지." 장난끼 섞인 말투와는 달리, 영운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진심이니까. 박정수 너랑 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 하니까 욕 그까짓거 약이라 생각하고 먹자고. 그 말에, 정수는 잠시 멍한 눈이 되었다. 그러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보조개가 쏘옥 패이게 웃는다. 딸랑--- "어서오세요~" 그렇게 영운과 정수가 떠들고 있는데, 가게 문에 달려있는 종이 딸랑- 소리를 내었다. 일요일에, 게다가 이런 어정쩡한 시간에 카페에 오는 사람들이란 대개가 약속이 있는 사람들이다. 종운 역시, 영운과 만날 약속으로 이곳에 왔다. "저 새끼가..." 동방에서 자습을 하다가 약속 시간에 맞추어 카페로 왔거늘- 저 안쪽에 앉아있는 영운의 맞은편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앉아 있다. 입구에서 뒷모습만 보고 고개를 갸웃하던 종운은, 점점 영운이 있는 테이블로 가까워짐에 따라 그 뒷통수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또 한판 하자는 건가 이것들이. 벌레 씹은 얼굴로 테이블 앞에 우뚝 다가서자, 이야기를 하고 있던 영운과 정수는 그제서야 종운이 왔음을 알아챘다. 웃고 있던 두 사람의 얼굴이 종운의 표정 만큼이나 굳어졌다. "...형..." "..싸우자고 부른거냐?" "아, 아니에요 종운씨. 영운이는 화해 하려고.." "저기요, 누구 맘대로 내 이름을 불러요? 우리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잖아요?" "형!!" "왜, 이 자식아!!" 대뜸 으르렁대는 종운의 태도에, 정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그런 정수에게 종운은 친한척 하지 말라며 냉담하게 반응했고, 이번에는 영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씨발 소리지르면 어쩔건데 이 자식아!! 그래도 니가 생각이 있는 놈이면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 점점 소리를 높이는 종운과 영운. 아까부터 카운터에서 이쪽을 주시하는가 싶더니, 결국 종업원 두 명이 다가와 조용히 해달라고 조심스럽게 말하고는 도망치듯 물러갔다. "...나와 새꺄.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말고.." "저기 종운ㅆ.." "내 이름 부르지 말라구요. 한국말 못 알아들어요? 난 그쪽이 내 이름 부르는거 불쾌합니다." "야, 김종운!!" "씨발 이제 형이고 뭐고 없다 이거냐? 일단 나와 미친자식아." "그래, 나간다. 나가면 될 거 아냐!!" "여, 영운아!!" 이게...아닌데.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마음과는 달리 영운은 제 행동을 제어할 수가 없다. 차라리 저에게 그러는 거라면 참겠는데- 제발 내 하늘에게 소리치지 말라고. 정수에게는 욕 많이 먹고 오래오래 살자고 말했지만, 막상 이렇게 제 애인이 천대를 받으니 눈에 보이는게 없는 것 같다. 카페문을 거칠게 열고 나가는 종운을 따라, 영운도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하아....영운아 너 정말...." 종운과 영운이 나간 뒤, 정수는 일단 카운터로 가 계산을 하고는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터덜터덜. 힘 없는 모양새로 정수 역시 카페 밖으로 나갔다. 손 잡아 달라면서 바보야. 손을 줘야 잡아줄 거 아냐. * "혀엉~~~~" "왔어? 배고프지? 좀만 기다...뭐야...저거 뭐냐 동해야...?" "...아아- 혁재." 내가 눈이 없냐 아니면 메멘토냐- 내가 저게 이혁재라는 걸 몰라서 묻는 줄 알아?! 현관문이 열리고, 부들부들 감촉 좋은 하얀색 니트 가디건을 입은 동해가 희철을 부르며 쪼르르 이쪽으로 달려 들었다. 아이구 내새끼- 하며 동해의 엉덩이를 토닥여주던 희철은, 동해 뒤로 들어오는 무언가를 목격했다. 저 새끼는 왜 달고 온 건데!! "....거봐...나 안 온다고 했잖..아..." "에이~ 왜 그래애~ 형도 혁재 너무 미워하지마. 애가 좀 덜 떨어져서 그렇지 착한 놈이라거~" "야!! 내가 뭐가!!" "악 시끄러!! 들어올거면 빨리 들어와서 문 닫아 추워!" "...네에..." 안구에 라이트라도 장착한건지 무시무시하게 빛나는 희철의 눈빛에, 혁재는 역시 괜히 왔다면서 쭈뼛쭈뼛 현관 안으로 쉬이 발을 들이지 못한다. 우리 동해 아니었음 넌 벌써 새우잡이에 팔아버렸어 새꺄. 아니 멸치잡이. 짜증은 났지만 그래도 제 동생이 혁재 녀석에게 얹혀 살고 있는 입장인지라, 희철은 일단 혁재를 안으로 들였다. 제일 먼저 들어온 시원은 이미 키친에서 저녁 준비를 다시금 시작하고 있었다. "크히히히- 이혁재 바보탱이. 베에--" "동해!! 너 죽는다!!" "...죽을래? 조용히 하랬지 내가." "...네...네 형님..." "흠. 손 씻고 부엌 가서 시원이 저녁 준비하는 거 도와줘." "...네에..." 동해 너 집에가서 보자. 혁재는 희철 몰래 입모양으로 동해에게 되도 않는 위협을 가하고는 대충 손을 씻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혁재가 물러가자, 희철은 0.01초만에 얼굴을 화사하게 펴고 동해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머리가 이게 뭐냐는둥, 형이랑 내일 미용실 가자는둥 희철이 동해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고 만지작 거리며 관심을 표현하자, 동해도 형 머리색 바꾼거 너무 이쁘다며 '나도 주황색 할까? 커플머리이~' 요러고 둘이 아주그냥 신이 났다. 그러나 꺄아꺄아 좋아 죽는 거실 풍경과는 달리, 키친은 삭막하기 그지 없으니. "....뭐냐 넌. 왜 왔어?" "몰라아...자고 있는데 이동해가 깨우잖아..." "참 나...비싼 갈치 사서 남 좋은일만 하네. 쳇.." "아 진짜, 형. 그깟 생선이랑 나랑 누가 더 중요하냐? 치사하게 그럴래 진짜?" "만 오천 원 이거든?" "....거...좀...비싸긴 하지만!! 그리고 어차피 나 생선 잘 안 먹는다고!! 나도 그냥 끌려왔다니깐?!" "아 조용히 좀 해. 그리고 계란말이 똑바로 말아라...모양 비뚤어지면 형한테 싸다구 맞을지도 모른다 너." "헙..." 사실 이러나 저러나 맛만 있으면 잘 먹는 희철이었지만. 갈치 한 마리 이거 하루만에 다 아작나겠구만. 싸다구 발언에 숨도 안 쉬고 열심히 계란말이에 집중하고 있는 혁재의 옆얼굴을 쳐다보(갈치 아까워 새꺄- 라고 초음파를 보내본다)던 시원이, 살짝 갈치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너...아직도 쟤 좋아하냐?" "......그렇다면..?" "...말했어?" "......아니라면..?" "쯧쯧. 답답하다 너도 참." "...나도 알아 뭐..." 그치만…그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만한 거였음 이렇게 끌지도 않았다고. 계란말이를 이쁘게 마는 데에 성공한 혁재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접시에 그것을 옮겨 담았다. 통통하고 노오란 계란말이에서 뽀오얀 김이 올라온다. 계란말이 조차도 뜨거우면 뜨겁다고 김을 내보내고, 식으면 식었다고 물기를 내보내는데- 난 뭘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내보일 수 있는걸까. 응? 동해… "도어락 비번이나 알려 줘라. 저번처럼 우리집 왔다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지 말고 자식아." "안 그래도 그날 이후로 알려 줬네요." "......10041015 그 유치한걸?!" "아 조용히 해!!....바꿔서 알려줬지 내가 미쳤냐...." 하긴 니가 암만 초딩이라도 그런 유치찬란한 비번은 쉽게 알려줄 수 없겠지. 발끈하는 혁재의 반응에 큭큭 낮게 웃으며 갈치도막을 뒤집는 시원이다. "....야, 계란말이 하나 더 말으라니까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있냐.." "...어? 어어..." 거실 쪽으로 반쯤 고개를 돌리고 있던 혁재는 시원의 부름에 다시금 자세를 바로 한다. 에그, 병신새끼. 시원은 그런 혁재를 보며 쯧쯧- 조용히 혀를 찼다. 조금 전까지 혁재의 시선 끝에는, 희철을 보며 예쁘게 웃고 있는 동해의 모습이 걸려 있었던 것을 알기에. "형- 밥 먹어요. 이동해 너도 와라." "어, 갈게 갈게. 가자 동해야." "응!"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 준비가 완료되었고, 희철과 동해가 식탁으로 왔다. 당연히 희철 옆에 앉을 줄 알았던 동해가 혁재 옆으로 가 앉자, 시원은 이때다 싶어 얼른 희철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동해 그래도 완전 눈치 없는건 아닌가 보네. 정작 희철은 옆자리에 누가 앉던지 관심도 없는 것 같았지만, 시원은 혼자 뿌듯해서 연신 싱글벙글. "오 맛있는데? 역시 생긴대로 논다니까~" "나 참, 형 그건 이럴때 쓰는 말이 아니죠." "아무렴 어떠냐~ 캬하하하하. 동해야 너도 얼른 먹어." 아뿔싸- 밥 먹을땐 옆보다 마주보는게 더 좋다는걸 깜빡했다. 연신 화사하게 웃고 있는 희철의 시선은 오로지 갈치 그리고 동해에게로 고정. 게다가 희철은 저도 제대로 발라낼 줄 모르는 주제에 열심히 동해 몫의 갈치에서 가시를 발라내느라 낑낑대고 있다. 그런 희철의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보던 시원은, 결국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이냐며, 포기한 듯 조용히 밥 먹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 우웨..퉤!! 퉤퉤!!!....씨발 물!!!" "여, 여기요. 왜 그래요 형? 가시 걸렸어요?" 갑자기 밥 잘 먹던 희철이 오만상을 찌푸리더니 입 안에 있던 것들을 급하게 뱉어낸다. 물을 찾는 희철에게 시원이 빛의 속도로 물을 떠다 바쳤고, 벌컥벌컥 세 컵이나 연달아 마시고서야 희철은 진정할 수 있었다. "가시 걸린거면 이렇게 좀 해 봐요." "아니, 가시가 아니라… 씨발 계란말이 이거 누가 만들었어?!" "네?" "아오...최심바 니가 만들었냐? 먹어봐 새꺄. 쳐먹어 봐, 얼른!!" "....?!!!!! 욱..." 이혁재 멸치대가리 새끼. 존나 짜. "죽겠지? 너 대체 뭘 어떻게 만든거냐? 어? 때깔만 멀쩡하면 그만인 줄 알아?!" "아니 이건 내가 만든게 아니라 혁재가.." ".....이..혁재...." 씹다만 계란말이를 뱉어내며 썩은 표정으로 물을 들이키는 시원에게, 희철은 거 보라며 대체 음식에 무슨짓을 한 거냐고 나무랐다. 아니 그러니까 이건 내가 아니라 이혁가 만든 거에요- 희철은 음산하게 요리를 만든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이미 희철이 이거 누가 만든거냐고 소리친 시점부터 등에서 식은땀을 흘려내고 있던 혁재는, 서슬퍼런 희철의 포스에 눌려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려 버렸다. "혀, 형님...그게 아니라.." "하아...이런 식으로 반항한다 이거냐? 이게 공짜밥 먹여주는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아뇨!! 아닙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씨발, 나와. 나와 새꺄!!!" "형 밥이나 먹고-" "지금 밥이 문제야? 새파란 새끼가 나한테 반항하잖아, 음식가지고 치사하게!!!" 어째 저것들만 오면 꼭 뭐 하나 일이 생기냐며. 시원도 희철을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반찬 뚜껑을 덮기 시작했다. 그래 무슨 몸보신이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판에. 거실을 빙글빙글 돌며 혁재와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희철을 바라보던 시원의 눈이, 또 다시 희철의 마른 허리(마른걸로 따지면 혁재가 더 말랐거늘, 본투김희철 최심바에게 멸치따위는 아웃오브안중)로 향한다. 형이 이러니까 살이 안 찌는 겁니다. "시원이 형, 좀 말려야 하는거 아니야?" "하루 이틀이냐. 냅두자 그냥." "그래도..." 이혁재 어제 늦게까지 훈련하고 와서 밥 처음 먹는건데. 희철이 동해의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면 동생 키워봤자(희철이 키우지 않았다) 다 소용없다고 땅을 치고 울겠지만, 어쩌겠는가- 좋은게 좋은거지. 무덤덤하게 상을 치우는 시원을 대신해, 동해가 추격전 한가운데로 뛰어 들었다. "그만 하고 밥 먹자 우리~ 응? 형아아~~" "비켜. 저새끼 저거 너 믿고 까부는거 같은데- 죽었어 새꺄. 일루 안와?!!"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형님 그게 아니라 제가 정말 실수로.." "시끄러 멸치 새꺄!!" "혀어어어엉~~~" 동해의 애교 한방이면 뭐든 오케이 해주는 희철인데, 지금은 이것도 안 먹히는 것 같다. 별로 넓지도 않은 거실을 뭐 그렇게 계속 돌고 있는건지. 둘 다 지쳐서 헉헉대는 숨소리가 들릴 즈음, 가운데 끼어있던 동해가 다시금 희철을 불렀다. "형!! 나 오늘 자고 가도 돼?" "....어?" 대낮에 이 무슨 헛소리인가 싶지만, 동해의 '자고갈래' 발언에 희철의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기운이 일순 수그러들었다. 먹혔구나. 동해는 한층 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희철을 보았다. 동생이라고는 외가, 친가를 통틀어 동해 딱 하나였기에 희철은 어릴적부터 동해라면 끔찍하게 아꼈다. 뭘 사도 동해꺼부터, 뭘 먹어도 동해꺼부터- 희철은 버릇처럼 '동해꺼'를 챙길 정도였다. 그런 동해였지만 지방에 살아서 자주자주 만날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서울 그것도 제가 다니는 학교에 들어와 매일같이 얼굴을 보니 희철은 요새 너무너무 행복했더랬다. 자고...간다고? 정말? "자고 갈래~ 형이랑 같이 잔지 오래 됐잖아? 응? 응?" "어...나, 나야 좋지~!! 근데 내일 학교 가야 되지 않냐?" "오후 수업이라서 괜찮다거~" "그래?? 그럼 형이랑 놀다가, 그래 아예 이따가 저녁도 여기서 먹고!! 그래그래 자고 가! 자고 가라 동해야~" "응!!" 이혁재 너 나한테 삼보일배라도 하라거. 동해는 희철 몰래 혁재에게 눈으로 찡긋- 신호를 날렸다. 병 주고 약 주냐 이동해. 혁재는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얄미운 동해의 선행에 그저 쳇-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는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씨발 밥이고 나발이고 숨차 죽겠네. 이렇게 혁재는 면죄부를 받고, 동해와 희철은 마주보며 웃고 있는 이 시점에, 단 한사람만이 눈물을 삼키고 있었으니- "......엄마...." ...일기로도 모자라, 이젠 엄마의 품까지 그리워진 새끼사자. 이동해 넌 역시 눈치라고는 이혁재만큼이나 없는 놈이었어. 난 역시 이동해가 싫어요. 생선요리따위 안먹겠다는 그 약속, 깨서 미안해요 주님. 이젠 정말로 안먹을테니까 저자식(들)좀 쫓아내 주세요. 엉엉. *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거냐." "...형이야 말로.." "싸우자고 나온거 아니었어? 쳐봐 새꺄 그럼.." "하아...형이 나오자고 한거잖아. 난 그냥 형이랑 화해 하려고-" "허- 화해한다는 새끼가 저런걸 끌고 나와? 너 진짜 미쳤냐?" "...나 욕 하는건 상관없는데....박정수...함부로 말하지 마." "참 나...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오네...하하..." 카페 밖으로 나온 종운과 영운은 살벌하게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 동안이나 그저 죽일듯이 노려보고만 있다가, 종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싸워봤자 누가 이길지는 뻔한 일이었지만, 종운은 제가 만신창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제 동생이 정신을 차릴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미친놈. 차라리 언 년이 니 애를 뱃다고 하는게 낫겠다. 차라리 그렇게 사고쳤다고 하라고 이 병신아. 남자 애인? 하...미친놈. 에라이 미친놈아. 정말 치고박고 싸울 기세로, 종운은 쳐 보라며 영운을 도발했지만, 그럴 생각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영운. 그 말에 종운은 더 기가차고 어이가 없었다. 싸우자는거 아니면 저 자식은 왜 데리고 나온거냐. "..빈정대지 마. 나 정말 형이랑 싸울 생각 없어." "그래? 뭐야 그럼. 이해라도 해달라고?" "그래주면 좋고." "이런 미친-!!!" 퍼억------------- "...윽....." "...어차피 내가 쳐봤자 니놈이 아프거나 다칠리는 없겠지만, 씨발 안 때리고는 못 배기겠다." 결국 참지 못한 종운이 주먹을 내질렀다. 조금 떨어져서 둘이 하는 모양을 지켜보고 있던 정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가서 대신 맞아주고 싶었지만- 아까 저를 이쪽에 혼자 세워두면서 영운이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내 손 잡아줘. 그거면 돼.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 거기서 내 손만 잡아주고 있어- 굳은 얼굴로 애원하듯 당부하던 그 말이. 영운아, 나 네 손 꼭 잡고 있어. 정말 하얗게 질리도록 꼭 잡고 있으니까… "...그래...또 쳐 봐 그럼." "치라면 못 칠 줄 아냐? 병신-!!" 퍼억------------- "...으....." "하아..하아...야이 병신아...어쩌자고...어쩌자고 남자를!!" "...큭...그러게...정말 어쩌자고..." 아무리 영운이 맷집이 좋다지만, 가만히 서서 주먹질을 당하는 데에 몸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주먹이 세다기 보다는 주먹에 실려오는 종운의 체중 때문에, 영운은 두 번째 주먹을 맞고 뒤로 넘어가 버렸다. 넘어갔다고는 하지만 살짝 엉덩방아를 찧은 정도. 자빠져 앉아 터진 입가를 소매로 닦아내는 영운을 내려다 보며, 종운이 오열하듯 욕을 하기 시작했다. 미친놈. 씨발놈. 개새끼. 병신. 아버지 어머니 얼굴은 어떻게 보려고 그러냐. 그러나 저도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며 자조적으로 웃는 제 동생의 얼굴에서, 단 한 조각의 후회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런 영운의 모습에, 종운은 뭔가 힘이 탁 풀려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부들부들 떨리도록 쥐고 있던 주먹이 서서히 풀어졌다. "....일어나 자식아..." "...읏챠- 일어났다. 자, 또 때려." "됐어. 하아...됐다고. 됐으니까 빨리 꺼져." 뜻밖의 상황에 영운의 눈이 커졌다. 대체 이 형이 뭐라는 건가- 뚫어져라 제 형을 쳐다보는 영운과는 달리, 종운은 아예 고개를 휙 돌려 영운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꺼지라고. 너랑 더 이상 말 섞기도 싫고- 하아..아무튼 다 싫다. 머리 아파." "...차라리 풀릴때까지 날 때리라니까.." "풀려? 내가 뭘 풀면 되는데? 내가 너 때려 죽인다 한들 지금 상황...너 그리고 저 남자...이해할 수 있을거 같냐?" "이해..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그냥...있는 그대로 봐 달라는 것 뿐이야..." 이렇게 순순한 김영운을 본 적이 있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차라리 저를 치라는 영운의 말에, 종운은 돌렸던 고개를 바로 했다. 분명히 목소리는 풀이 잔뜩 죽어 있는데, 시선은 똑바로 이쪽을 향하고 있다. 저렇게 차근차근, 조곤조곤 제 생각을 말하는 김영운은, 정말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쩐지, 예닐곱살 무렵의 영운의 모습이 겹쳐져 떠올랐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게 되면서, 종운이 어머니를 따라 천안으로 내려가던 그날 밤- 난생 처음으로 서럽게 우는 영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 제 동생은 분명히 울고 있는 것이다. 그 밤 이후 두 번째로 영운의 우는 모습을 보고 있는 거라고- 눈물은 커녕 눈가가 젖어 있지도 않은 영운이었지만, 종운은 느낄 수 있었다. 김영운은 지금, 심장으로 울고 있다는 걸. "...뭘 어떻게....뭘 어떻게!!!" "그냥...그냥 나랑 쟤랑 사랑한다고. 거기서 뭘 더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그냥 딱 그거..." "이..씨발....흡...그게 말이 되냐고오!!!" 그래서 종운은 영운 대신 제가 울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사실, 저도 눈물이 났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토록 처절하게 속으로 우는 동생을 보고 있자니 울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왜 말이 안돼, 왜!!! 내가 뭐 사람이라도 죽였냐? 그런것도 아니잖아!! 그냥 내가 쟤 사랑하겠다는데 그게 왜!!" "흡...미친놈아..흐흡..씨이발...." 결국 울부짖으면서도 악을 쓰는 종운에게 맞서, 영운도 소리를 높였다. 형이 왜 우는데, 지금 울고 싶은게 누군데 왜 형이 우는건데. 저 대신 울어주는 거라는 건 모른채로, 종운이 눈물을 흘리자 영운은 어쩐지 화가 나는 것 같은 느낌에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가슴으로 우는 영운을 보고 이유없이 울고 싶어지는 종운처럼, 눈물 범벅으로 울부짖는 종운을 보고 영운 역시 이유없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어떻게..견디려고..흐흡...여기 대한민국이여 씨발놈아..." 결국 그거였다. 종운은 영운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처음에는 놀라고, 얘가 제정신인가 싶고, 한편으로는 거부감도 들고 왠지 더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건 순간적인 것이었고, 그 '순간'이 지나자 종운의 머릿속은 단 한가지 생각만이 존재했다. 내 동생놈이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가면 어쩌나- 하는, 형으로써의 '걱정'. 애정 어린 '염려'. "걱정마. 난 괜찮아..." "지금 괜찮다고 그만이냐? 흡..씨발...너 정말 어쩌려고..." 역시 그거였다. 누구보다 속 깊은 사람이 제 형이라는 사람인 것을 영운은 잘 알고 있었다. 저를 걱정해서 그런 거라는 것 쯤 진작에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먼저 나서지 못한 것은 미안했기 때문이다. 제가 정수를 사랑하는게 잘못된 일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지만, 제 형이 겪을 혼돈을 생각하니 미안함에 얼굴도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아버지 보다도, 어머니 보다도 사랑하는 형이었다. 부모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만약 셋이서 물에 빠진다면 주저없이 제 형을 구하러 뛰어들 것이라 생각하는 영운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형이기에, 영운은 더더욱 종운에게 먼저 손을 내밀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너무 미안해서. "...종운씨...안녕하세요, 박정수라고 합니다." 저쪽에서 지켜보던 정수가 쭈그려 훌쩍이고 있는 종운 앞으로 다가왔다. 새삼스럽게 인사는 무슨. 영운은 뭐하는 거냐고 정수에게 물으려다가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어른 박정수가 뭘 하는지 어디 한번 구경해 보자며. 정수는 몸을 낮추어 종운과 눈높이를 같게 했다. "음...저는 한국대학교 일본어과 조교구요..나이는 스물 일곱이에요. 친구랑 학교 근처 아파트에서 자취를 하고 있구요..." 뭐시여 시방. 눈물을 훔쳐내던 종운은, 갑자기 등장해 자기소개를 시작하는 정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뭐하는 시츄에이션이냐. 그리고 어느새 종운은 우는 것도 잊고, 정수의 자기소개를 멀뚱멀뚱 듣고 있었다. "...에또 취미는...글쎄 요즘엔 일이 바빠서 취미가 없네요...예전에는 퍼즐 맞추는 거였는데 요새는 시간이 없어서..하하.." "...저기 시방 뭐하는 겁니까...?" 가만히 두면 진실게임까지 할 것 같은 정수의 네버엔딩 자기소개에, 결국 종운은 뭐하는 거냐며 입을 열었다. "친한 사이 되려구요. 종운씨...라고 불러도 되죠?" "....아..."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주제에 새파란 스무살짜리 꼬셔다가 뭐하는 짓이냐고...뭐라고 하셔도 할 말은 없는데요-" 정수의 어려보이는 외모에 조교라는 사실도, 스물 일곱이라는 것도 잊고 있던 종운은, 이렇게 자기소개를 듣고서야 자각할 수 있었다. 참 현실감 없는 나이일세. 그래도 역시 분위기에서 제 앞의 작은 남자가 '어른'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소년같은 미소와는 달리, 그의 눈빛은 저 혹은 제 동생이 가질 수 없는 진중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이거 하나만..말씀드릴게요. 우리- 그러니까 영운이랑 저, 항상 두 손 꼭 잡고 있는..그런 사이에요." "...박정수..." 정수의 말에 종운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고, 영운은 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제 연인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래 너 내 손 꼭 잡고 있었구나. 어쩐지 나 말 너무 잘하더라니. "그러니까- 그냥 그런 호모들이 아니라, 서로 손 붙들지 않으면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그런 존재들이라구요." "......" "그러니까… 그러니까, 진심이라구요. 저는 원래 남자를 좋아하긴 하지만요, 영운이가 남자라서 좋아하는게 아니라 그냥 김영운이라 사랑하는 거라구요. 사랑한다구요 종운씨 동생을." 역시 이해 못하겠다. 아니, 이해고 뭐고- 참 거시기 하네. 종운은 정수의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서야 어렴풋하게 나마 이 둘의 사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김영운이었다면 그저 '나랑 쟤랑 사랑하는 사이다' 정도로 끝냈을 간단명료한 명제를, 박정수는 참으로 어렵게도 돌려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직접적으로 한번에 말하지 않는 정수의 모습에서 종운은 저 둘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해' 한 마디로 정의하기엔 너무 벅찬 진심이라는 걸. "....난 역시 너 이해 못한다 김영운." "...응....그럴 줄 알았어..." 종운은 으쌰-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엉덩이를 툭툭 털고는 조금 위로 시선을 주어야 하는 제 동생을 다시 마주보았다. "그래도, 있는 그대로 봐 줄게. 그 이상은..못해." "...형?" "정수 씨, 아까 심하게 말해서 미안해요. 그 사랑 이해는 못해도- 어쨌든 그쪽이 좋은 사람이라는건 알겠네요." "..고마워요 종운 씨." 여태 그 난리를 쳤던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종운은 꽤나 담담하게 영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운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제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덥썩 잡고는 위 아래로 흔들었다. 그렇게 두어번 흔들어진 두 손 중에서 조금 더 작은 손이 빠져나갔고, 빠져나간 작은 손은, 이번엔 마른 손 앞으로 내밀어졌다. 정수는 잠시동안 내밀어진 종운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포근하게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형님!!!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죠?! 숙제는 다 한 건가요오?!!" "히엑!!!" 훈훈한 분위기를 가르고 들어오는 짜릿한 저 음성이란. 진지했던 모든 그림이 려욱의 목소리 한방에 다 지워져 버렸다. 아니 아예 북북 찢겨져 버렸다. 최소한 종운의 얼굴은 그랬다. "아...서..선배님..." "숙제 다 했어요, 안 했어요?!" "...조..좀만 하면 되는데..." "뭐에요?! 아니 그게 얼마나 된다고 아직도 다 못하고....그리고 다 못한 주제에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겁니까아?!" 사실 종운은 동방에서 자습을 하고 있던게 아니라, 려욱이 내준 숙제를 하고 있던 것이다. 숙제는 분명 금요일 날 내주었거늘, 일요일인 오늘까지도 다 못해서 동방에 꼴아박혀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었던 것. 그도 그럴것이- 려욱은 무려 1000문제에 달하는 음악이론 기초상식을 숙제로 대령했기 때문에. 씨불 얼마나 되긴 허벌나게 많다 아가야!! 형님 돌아가시겠다!! 으흑. "중요한 일이 있어ㅅ.." "중요한 일이요?! 4분의 4박자랑 4분의 2박자도 구분 못하는 형님의 앞날보다 중요한게 대체 뭐란 말입니까아-!!" "아, 그게.." "빨리 동방으로 돌아가세요!! 정확히 삼십 분 뒤에 검사하러 갈거에요!!" "사, 삼십분!! 너무 짧은데.." "...이십 분?" "가, 갈게요. 간다구요. 저기 그럼, 정수 씨, 김영운 나중에 보자!!" 스물 하고도 삼 년째, 무식한 건 죄가 아니라는 아름다운 사상을 가지고 있던 종운은 그 사상이 거짓된 아름다움 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려, 무식한 건 죄여. 내가 죽일 놈이다 젠장. 아직 300문제나 남았는데 과연 삼십 분 안에 다 풀 수 있을지 어쩔지. 아니 그것보다, 과연 몇 문제나 동그라미를 얻어낼 수 있을지. 맘 같아서는 선배고 뭐고 한 대 쥐어 박아주고 싶었지만, 대체 려욱의 저 작은 몸 어디에서 저런 포스가 나오는 건지- 이건 뭐 반항을 할래야 할 수가 없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리가 알아서 움직여 주고 있었고, 멋대로 손이 정수와 영운을 향해 흔들어지고 있는 종운이다. "....뭐, 뭐야.." "아하하...너희 형 참..독, 독특하시다~아하하하" "미친거지 저건. 에이그 쯧쯧, 나이 먹어서 새내기 하려니 참 힘든가봐." 하여튼 김종운 너무 똥폼잡는다 했다. 영운은 니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눈으로 멀어져가는 종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낮게 혀 차는 소리를 내었다. 정수는 뭐가 뭔지 몰라 그저 어색한 웃음만 흘리고 있다. 뭐 어쨌든 좋게 끝난 거겠지? 비록 완벽하게 이해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의 성과가 있었던 거라며, 정수는 작게나마 위 아래로 고개를 끄덕여 본다. "아참참 조교니임~ 아우 제가 흥분해서 인사도 못하고오~ 죄송해요!!" "아냐아냐, 나도 정신없어서 뭐. 오늘도 연습하러 나온거야?" "네에~ 근데 이 분은..." "어어- 이번에 우리 동아리 들어올 사체과 김영운. 김종운 씨 동생이야." "오오 그렇구나아~ 반가워요오~ 실음과 2학년 김려우기라고 합니다아~" 종운이 언덕을 넘어 교문으로 입성하는걸 확인하자마자 다시 '려우깁니다아' 버젼으로 돌아온 려욱은, 정수에게 후다닥 달려가 인사를 한다. 정수는 이미 졸업을 해서 표면적으로는 SJ의 일원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도 물건생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고, 희철이 '니새끼는 동방이 캐비닛인줄 아냐!!'라고 매일같이 구박할 만큼 동방을 자주 이용하고 있었다. 근데 저 황소너구리 같은 분은 뉴규? 동아리의 새 멤버라는 말에, 려욱은 좀전에 정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영운을 보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영운은 대충 고개만 까딱 했다가 옆구리를 퍽 찔러오는 정수의 손길에 못 이기는척 꾸벅 마주 인사해 주었다. 아니 이 쪼매난 아가가 선배란 말야? 종운이 환영회 자리에서 려욱을 처음 봤을때 속으로 말했던 그 대사를, 똑같이(피는 못 속인다더니) 속으로 읊어주면서. "아 그렇지, 엠티 얘기 들으셨어요오?" "..엠티? 아니, 못들었는데." "좀전에 희철 선배한테 전화 왔었어요. 담주 금요일 저녁에 떠나서 일요일 오후에 올거랬는데.." "에엥?! 나 아까 시원이랑 이야기 할땐 그런 말 없었는데?" "글쎄, 저는 일단 신입 멤버들한테 연락하라고 지시 받아서..." "...그래? 김희철한테 전화 해볼테니까 일단 너는 가라. 영운이한테는 내가 얘기하면 되니까."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오~" 려욱이 자리를 떠나자, 정수는 휴대폰을 꺼내 들어 희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 김희철 이거 또 즉흥적으로 결정한거 맞지?! 이 자식은 뭐가 이렇게 매사가 속전속결이야!! 지지지지~ 배배배배~ 하는 컬러링이 흘러나오다가 곧 '여보셈-' 하는 희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김희철. 엠티 가냐 우리?" '어. 근데 너도 갈거냐? 넌 왜 맨날 따라오냐?' "에이씨! 자꾸 그러면 이제부턴 자료 안 줄거다!!" '큭큭, 흥분하지마 새꺄. 장난이다. 아무튼 엠티 갈거다- 근데...소식 빠르네?' "려욱이 만났어 좀전에. 괜찮겠어? 아직 신입 애들 서로 얼굴도 모르는데..." '가서 친해지면 되지~' 역시나. 오늘 결정한거다 이 자식. 아까 시원이랑 신입 멤버들 이야기 할 때에도 아무말 없던거 보면, 이거 이삼십 분 전에 결정한게 분명해!! 정수는 희철에게 들리지 않도록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하아- 한숨을 쉬었다. 어쩜 이렇게 한결같냐 너는. '큭큭, 사실은 동해가- 아 맞다 오늘 동해 자고 갈거다?' "에엥?? 뭐..어차피 니 방에서 잘거 아냐. 상관없어. 아 근데 동해가 뭐?" '아아- 동해가 우리는 엠티같은거 안가냐고 그러잖아. 그래서 내친김에 확 정해버렸지~' "...아 그래..." '이성민한테 연락해서 별장 비워두라고 하면 되는거니까 언제든 상관 없잖아.' "뭐- 거야 그렇지. 아무튼 알았다." 아아- 역시나 김희철. 역시나 지동생짱팬김희철. 정수는 동해가 입학하기 전부터 동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와 희철을 만난 순간부터, 듣는 이야기라고는 게임 그리고 이동해가 전부였으니. 작은 이모한테 외동 아들이 있는데 걔 이름이 동해고, 작은 이모는 목포에서 요정(料停)을 하시고, 동해는 음식은 잘 못하는데 미각은 뛰어나고, 동해는 강아지를 키우는데 그 개새끼 이름이 바다고....어쩌구 저쩌구. 그래서 정수는 가끔 시원을 볼 때, 동해동해 노래를 부르던 희철의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혀를 쯧쯧 차곤 했더랬다. 에이그 불쌍한 놈. 백날천날 뒤치닥거리 해줘봐야 니 애인이라는 작자는 브라더 콤플렉스란다. "..엠티?" "어. 아까 려욱이가 말하는거 들었지? 금요일 저녁때 출발한다고." "..어디로 가는데?" "글쎄- 아직 모르겠네. 아무튼 옷가지 몇 개만 준비하면 돼. 나머지는 거기 가면 다~ 있으니까." "어어?? 무슨 엠티가 그래?" "하하하, 우린 스케일이 다르답니다~" 희철과의 통화를 마친 정수에게 영운이 다가왔다. 아니 근데 다음주에 간다면서 어디 가는지도 몰라? 걱정말고 몸만 가면 된다는 정수의 말에 영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영운의 표정이 귀여워, 정수는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 "..으음..여보쩨여..." '이성민. 희님이시다.' "...!!! 희, 희철 선배!!!" '아직도 쳐자냐? 지금이 몇신데 쯧쯧. 하여튼 애새끼같기는..' "서, 섬미니 안잤어영!!" '이게 어디서 큰 소리야!!!' 한편, 일요일을 맞아 늘어지게, 정말 늘어~지게 자고 있던 성민은 때아닌 희철의 전화에 놀라 그대로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야아 진짜!! 이 선배는 왜 일요일까지 섬미니를 괴롭히는 거냐그여...므잉. "....무..무슨 일인데여~?" '씨발 귀여운척 하지마.' "...내..내가 뭘여...." '흠흠, 아무튼. 야 너 별장 빈 데 있냐? 다음주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우리 엠티갈까 하는데.' 또야. 맨날 이래 이 선배는. 어쩜 이렇게 사람이 한결같을까. 그러나 그런 제 생각을 차마 입 밖으로 뱉지는 못하고(뱉었다가는 한줌의 단호박 조각이 되어 찜통으로 고이 넣어질테니) 속으로만 삼키는 성민이다. "으음...경이 형한테 물어봐야 되는데...일단 저번에 갔던 거기는 비었을걸여?" '저번에? 언제?' "...선배 생일이라고 시원이가 빌려달라고 해서 둘이...갔었잖아영...." '아아!! 거기 바닷가 거기!! 하얀데 거기!! 넒은데 거기!!' 에이그 표현 하고는. 그러나 역시 이것도 속으로만. "네 거기영. 하얗고 넓은 바닷가 거기." '좋다! 거기로 가지 뭐. 아참참, 경이 얘기 나와서 하는 말인데 한경이도 데려가자!' "네에? 경이 형은 왜요?" '사람 많은게 재밌잖아. 그리고 나 북경밥도 그립고. 클클.' 네, 결국 그거군요. '아무튼 바닷가 거기로 낙찰! 나머지는 학교 나오면 얘기하자, 나 지금 동해랑 놀고 있거든. 그럼 이만!!' "아 저기 선ㅂ.." 뚜우-뚜우-뚜우-뚜우------------------------ "...하아....진짜 한결같다니깐." 07. 오후 수업까지 모두 끝마친 규현은 서둘러 학생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난주 일요일, 열심히 팝콘을 튀기고 있는데(규현은 현재 아르바이트를 두 개 하고 있다. 편의점 새벽타임-수,목,금,일 그리고 영화관 스낵바-토,일. 원래 세 개였는데 입학하면서 하나 줄였다), 모르는 번호로 문자 하나를 받았더랬다. 워낙 모르는 번호로 오는 문자나 전화는 아예 무시해버리는 규현이었지만, 멀티메일로 뜨길래 호기심에 확인을 해보니- [한국대 최강동아리 SJ!! 신입회원 환영회 겸 친목도모를 위해 MT 갑니다>_ 完. --- 정독해 주신 모든분들 감사드립니다^-^ 연재 하는동안 표지 제공해 주셨던 모든 분들 감사드리구요. 특히 발랄이, 아힌이 정말 고마워 ㅎㅎ 모두들 다음 글에서 다시 만나길 바랄게요// HAVE A SJ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