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 | 블로그 | 뉴스 | 게임 유머나라 cafe.daum.net/humornara 통신(공개) | 회원수 1,469,814 카페정보가입 2 방문 475 새글 23 카페지기마담 개설일2000.04.24 프로필 내 정보 노을뱅이 수정 쪽지 0통 메일 12통 내 글 반응 내가 쓴 글 작성중이던 글이 있습니다. 카페 초대 회원 보기 채팅하기 소모임 바로가기 -------------- [소모임 만들기] 카페 ON (미사용중) 카페 탈퇴 인기좋아-완결소설 완결된 소설은 여기에 다 있다~!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상큼한♥] ♡허니서클(Honeysuckle) [01~10] 글쓴이: 상큼한♥ 조회수 : 8243 08.10.22 13:46 http://cafe.daum.net/humornara/2cMP/1480 ========================================================= 소설제목: 허니서클(Honeysuckle) 글쓴이: 상큼한♥ 메일: nahkm2da@hanmail.net 팬카페: 상꼼한 보물공간s(http://cafe.daum.net/sangshya) 팸카페: 세상의 미녀들, M녀팸(http://cafe.daum.net/MfaM) ========================================================= -출처: 유머나라(http://cafe.daum.net/humornara) ♡허니서클 -허브 꽃말: 귀여움 앙증맞음, 소녀같은 사랑 Chapter. 1 인연이라는 것 야심한 시각. AM. 02:00. 보름달이 유난히 둥글고 밝은 밤. 배고픔에 잠 못 이루고 계속 뒤척이던 나는 결국 이 야심한 시간에 일어나 편의점에 다녀오는 길이다. 요즘 들어 나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나의 식욕. 주변에서는 성인 남성의 2배가량을 먹는 나를 보고 혀를 내두른다. 어차피 살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사는 거 잘 먹으면 좋지 않은가. 또한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좋다는데 굳이 살 빼기 위해 다이어트까지 하고 싶지 않다. 어딘가 있을 나의 남자는 내 똥배마저도 사랑하리라 나 순이는 굳게 믿는다. 숏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분홍색 삼선 슬리퍼를 찍찍 끌고서 검은 봉지를 흔들며 가는데, 뒤에선가 불길한 기척이 들려왔다. 나는 자리에 우뚝 멈춰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거대한 체구의 사나이가 전봇대에 숨어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나는 움찔했다. 쿵쾅쿵쾅 놀란 가슴을 부여안고, 나는 다시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그러자 상대방의 발걸음 또한 더욱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제기랄. 나는 반도 못 먹은 숏다리를 집어 던지며 뛰었다. 그러자 노골적으로 발걸음 소리를 내며 나를 따라오는 사내. 있는 힘을 다해 뛰었으나 운동에 젬병이었던 나는 얼마 못 가 사내에게 붙잡혀 버렸고, 투박한 손이 내 입술 위로 덮쳐 왔다. 안 된다. 나의 순결은 내가 지켜야 한다. 나는 이빨을 내밀어 족발 같은 사내의 손을 힘껏 물었다. 그러자 괴성을 지르며 손이 떨어져 나갔고, 나는 재빨리 다시 도망가기위해 뛰었다. 그러나 곧이어 또 다시 사내에게 붙잡혀 버렸고, 성난 멧돼지 마냥 힘이 엄청 났던 사내에게서 나는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나는 애써 떨림을 감추고, 멧돼지 사내에게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대화를 신청했다. “저기요, 아저씨. 아니, 오빠.” “…….” “자, 진정하시고 우리 놓고 말합시다.” 나의 말에 사내는 흥- 콧방귀를 끼었다.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질질 끌고 가는 사내. “저요. 보시다시피 키도 작고 유아형 체형이잖아요. 제가 아직 덜 잘랐어요. 그러니까 좀 더 자라서 올게요. 네?” 횡설수설 울먹거리며 사내에게 말해보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얼굴이 무기라며 괜찮다고 설치던 내가 참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자, 침착하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하지 않은가. 여러 가지 방책을 생각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보지만, 머릿속은 새까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제발! “뭐하는 겁니까.” 그런데 그 때 낮은 저음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순간 떠오르는 것은 멋지게 등장하는 왕자님에 살았다는 ‘환호’이다. 겁 많은 멧돼지 사내는 대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나를 던지다시피 밀어내며 헐레벌떡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줄행랑치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덩치 값 못하는 사내의 행동에 기가 막힐 뿐이었다. 저 정도로 겁이 많으면서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한 것 일까. 저 풍만한 엉덩이에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려주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있었으니 참기로 하였다. 나는 부끄럽게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구해준 왕자님이 뉘신지 바라보았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 그를 확인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어둠 속에서 서늘한 달빛에 드리워진 남자의 모습은 정말 이질적이었다. 인간이 아닌 밤하늘에서 내려온 검은 천사 같았다. 그의 모습에 매료되어 잠시 혼을 놓고 있던 나는 그의 까만 눈동자와 부딪히자 흠칫하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고, 고맙습니다.” 나의 말에 그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나를 향해 말했다. “기지배가 이 시간에 왜 싸돌아 다녀.” 언제 봤다고 반말을…… 이라는 생각은 집어삼키고 나는 재빠르게 남자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후드 티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던 남자는 훤칠한 키에 시원스러운 이목구비의 미남형 얼굴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는 고작 내 나이 또래로 보였다. 그러나 구지 나이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평소에도 작은 키와 어리게 생긴 얼굴 때문에 오해가 많았었고, 게다가 지금은 미키마우스 잠옷을 입고 있으니 충분히 그리하게 보일 것이다. 또한 이 순간은 어린 연약한 소녀로 보이고 싶었다. 재빨리 나는 그의 옷깃을 붙들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리고 일부러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울먹거렸다. “흐윽- 무, 무서워요.” 나의 말에 그는 작게 한 숨을 내쉬더니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나를 향해 말했다. “집이 어디냐.” “나래 아파트요!” “일어나. 데려다줄 게.” 나는 자리에 천천히 일어서다 다시 주저앉은 척 했다. 풀썩 다시 주저앉는 나를 보는 그의 눈썹에 작은 꿈틀거림이 일어난다. 나는 모기만한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더듬거리며 말했다. 물론 연기라는 사실. “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진짜 가지가지 하네.” 남자는 투덜거리더니 내게 업히라고 넓은 등을 내보였다.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업히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의 몸에 밀착하자 기분 좋은 맑은 향이 감싸왔다. 그는 일어서며 민망하게 짧은 신음을 토했다. 나의 무게에 적지않게 놀란 듯 싶었다.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지만, 얼마 만에 최하운 이외의 남자에게 업혀보는 지 모르겠다. 아니 최하운은 나에게 남자가 아니니 처음이라고 해야겠지? 이게 무슨 횡재더냐. 절로 어깨가 들썩여질 뻔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야. 쪼그만 게 왜 이렇게 무거워.” “생각이 많아서요.” “미친.” 말투는 툭툭 내뱉는 듯 건방지고 쌀쌀맞기 그지없었으나, 그는 필시 좋은 남자임이 틀림없다. 이 남자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샘솟았다. 남자들은 ‘오빠’라는 말을 좋아한다기에 어차피 어리게 본거 나는 그를 오빠라고 서슴없이 불렀다. “저기요, 오빠.” “…….” “오빠, 이름이 뭐예요?” “…….” “그럼 나이는 어떻게 되요?” “…….” “이 근처에서 살아요?” 그는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입을 꾹 다물었다. 걸어가는 내내 이것저것 물어보지만 그는 끝까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풀에 지친 나 역시 입술을 삐죽 내밀며 다물었다. 보름달은 참으로 밝은데 그의 마음은 깜깜한 듯싶었다. “내려.” 그가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얼마 후 내게 내뱉은 말. 보니 어느새 아파트 단지 앞에 와있었다. 이렇게 아쉬울 수가.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그의 등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런데 그는 나를 내려주자 마자 내게 인사 하나 건네지 않고 바로 뒤돌아섰다. 나는 재빨리 그의 옷깃을 붙들며 말했다. “그럼 핸드폰 번호라도 알려주세요!” 나의 말에 그가 천천히 다시 뒤돌아섰다. 그리고선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내 몸은 딱딱하게 굳더니 돌덩어리가 되었다. 그는 내게 갑자기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살짝 떨리는 음성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왜, 왜 그래요.” 허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의 등은 곧이어 벽에 부딪혔다. 그의 잘빠진 얼굴이 계속해서 가까이 다가왔고,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그 때 귓가에 그의 낮은 음성이 속삭이듯 들려왔다. “엉큼한 꼬맹이는 싫다.” 그리고서 그는 내 이마를 손가락을 따끔하게 툭 치며 뒤돌아 걸었다.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두 볼은 따끈따끈한 호빵이 되어있었다. 심장이 거세게 두방망이질 한다. 점점 시야 속에 작아지는 그를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설레고 떨린 적이 없었다. 드디어 만났다. 내가 그렇게 찾고 다니던 내 남자를. 내 운명의 남자를!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오늘은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교생실습의 첫 단추를 끼는 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분주히 움직여 준비를 끝낸 나는 가방을 챙기고 아래층의 최하운 녀석에게 갔다. 그 녀석은 내게 부적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오늘 같은 중요한 날에 그를 꼭 보고 가야할 것만 같았다. 최하운.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소개팅으로 만난 친구이다. 같은 반 남자애가 내게 큰 빚을 지게 되었고, 나는 그 보답으로 소개팅을 원했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이 이 최하운이다. 그런데 당시 최하운은 우리 학교 근처에 있던 명문고에서도 탑을 달리는 엘리트 학생이었고, 그에 대한 갖가지 소문은 끊이질 않았다. 한마디로 성격은 더러운데다 엄청난 괴짜라는 것이다. 그 소문에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지만, 호기심이 왕성한 소녀는 그런 그가 무척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친구에게 오케이를 외쳤고, 이틀 후 괴짜 엘리트 학생과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 이 녀석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무척 묘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딱히 무어라 설명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처음 보는 이 녀석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그는 소문처럼 과묵하고 얼굴을 자주 찡그려서 성격이 더럽게 보였다. 하지만 점차 대화를 하면 할수록 우리는 통하는 것이 많았고, 좋은 녀석이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마치 그는 오래된 친구처럼 너무나 편안했다. 얼마나 편했으면 남자 앞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될 트림까지 서슴없이 그 앞에서 했었을까. 그리하여 우리는 그 후 계속해서 만남을 가지게 되었고, 그는 얼떨결에 한 나의 고백에 내 세 번째 남자친구가 되었다. 허나 연애라는 특별한 감정들이 그에게선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나는 그에게 친구로 돌아가자고 했다. 최하운 또한 역시 그렇다고 하였고, 서로를 이성으로 느끼지 못한 우리는 결국 이렇게 친구로 남았다. 지금은 다른 친구들에게 미안하지만, 내겐 제일 최고봉인 친구이다. 초인종을 10번 누른 끝에 굳게 잠겨 있던 문이 덜컥 열렸다. 부스스한 까치집의 머리에 팬티차림으로 나를 노려보는 녀석에게 나는 방긋 웃으며 소리쳤다. “굿모닝!” “굿모닝이고 지랄이고.” 아침잠이 많은 녀석은 자신의 달콤한 잠을 깨웠다는 것에 눈썹을 꿈틀거리며 꼬라지를 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한바퀴 빙그르르 돌며 녀석에게 물었다. “짜잔. 나 오늘 어때? 예뻐?” 나의 물음에 그는 살짝 감긴 눈으로 나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미간을 찡그리며 이렇게 말했다. “초딩이 엄마 흉내 내는 것 같다.” 두둥. 그 말에 애써 아침 일찍 준비한 나의 수고가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렸다. 솔직히 정장 차람과 곱게 묶은 머리는 전혀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일단 인정하는 것이기에 그에게 하이킥을 날리지 않았다. 대신 나는 손가락으로 나의 볼을 가리키며 녀석에게 말했다. “야, 여기 볼에다 뽀뽀 한 번만.” 나의 말에 곧바로 최하운은 정색했다. “미쳤냐.” “아따. 쩨쩨하게 굴지 말고 좀 네 행운의 기 좀 나눠 갖자!” 솔직히 이 녀석은 더러운 성격을 빼면 참으로 완벽한 인간이었다. 지금은 S대 법학과 학생으로 얼마전 군대를 제대해 잠시 휴학중인 그는 고등학교 때 전국 순위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데다가, 키도 컸고 얼굴 또한 굉장히 매력적이게 생긴 편 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옆에는 항상 여자들이 끊임없이 들러붙었지만, 여자혐오에 독신주의라는 그는 오는 여자들을 축구공 차듯 뻥뻥 찼다. (여기서 여자혐오에 내가 해당하지 않는 것은 이 녀석 또한 나를 여자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녀석에겐 왠지 모를 행운의 기들이 잔뜩 있다. 그 기를 인간들 사이에서 서로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뽀뽀라는 접촉으로 녀석에게 받아가고 싶었다. 나는 반짝반짝 호소의 눈길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나의 이 모습에 약한 녀석은 안 된다고 고개를 휙 돌리다, 결국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 말에 나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리고서 어서 하라고 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보다 조심스레 ‘쪽-’하고 내 볼에 뽀뽀해주었다. 녀석의 말랑말랑한 입술이 닿자 오늘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행운 충전! 나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녀석의 등을 두들겼다. “아뵤! 행운을 빌어주게나, 친구!” 그런데 그 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아놔. 둘이 사귀라니까, 그냥.” 시건방진 교복 차림새로 식빵을 뜯어 먹으며 우릴 바라보고 있는 나의 하나뿐인 동생 김도혁. 우리 둘은 동시에 정색하며 자칭 꽃도혁이라 자신을 부르는 녀석에게 소리쳤다. “미쳤냐!” “그냥 누나 형네 집에 들어가서 살아. 난 집 팔고 떠날라니까.” “저, 저자식이!” 들고 있던 가방을 던지려는 찰나, 김도혁은 재빨리 다람쥐처럼 도망쳤다. 그리고서 저 망할 녀석은 들고 있던 식빵을 입에 구겨 넣고서 오물오물 씹으며 나에게 외쳤다. “누나! 학교에서 아는 척 절대 하지 마!” “내가 싫어서 안 할 거다, 이 개놈아! “꼬맹이에 돼지 누나 갖고 있다는 건 내 인생의 미스야.” “이 썩을 놈이! 너 오늘 밤에 죽을 줄 알아!” 김도혁은 내게 혀를 쏙 내밀더니 팔랑팔랑 날듯이 뛰어갔다. 저건 동생이 아니라 원수다. 기분 좋은 아침부터 혈압이 오른다. 당기는 뒷골에 손을 얹다가 고개를 돌리는데 어느새 최하운 녀석은 고새 못 참고 문을 굳게 닫고서 사라지고 없었다. 정말 인생의 낙이 없구나. 한 숨을 기다랗게 내뿜으며 옷매무새를 다듬고서 나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직장인들의 출근시간과 학생들의 등교시간 이었기에 버스는 만원이었다. 조그만 나는 사람들에게 휩쓸려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거 원, 한 달 동안 이 고생을 해야 한다니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런데 계속해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내 앞에 앉아있던 바가지 머리의 녀석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교복을 보니 도혁이와 같은 교복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실습하게 될 학교의 학생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그 생각에 헛기침을 내뱉고서, 최대한 다정하게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니?” “흐음.” 갑자기 손으로 턱을 슬며 노골적으로 위아래를 훑어보는 바가지 머리. 그러더니 이내 불쑥 내게 동그란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엄마 옷 입고 땡땡이치려고?” “…….” “그러면 안 돼. 어서 교복으로 갈아입고 학교로 가. 그래야 착한 학생에, 착한 딸이지.” 이게 무슨 귀신 씬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나한테 설교를 하는 바가지 머리는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마냥 의기양양해 있었다. 아무래도 녀석은 최하운의 말마 따라 엄마 옷 훔쳐 입고 일탈을 꿈꾸는 학생으로 보는 듯 싶었다. 나는 어색하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보는 바가지 머리에게 말했다. “저기, 학생. 그게 아니라 난……” 그 때 괴상한 녀석의 벨소리가 버스 안에 가득 울렸고, 녀석은 핸드폰의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슬쩍 따라 바라보니 액정에는 [강태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 우리 태일자기! 어디야?” 자기? 앙증맞은 목소리로 닭살스러운 멘트를 서슴없이 날리는 녀석. 강태일. 아무리 봐도 이 것은 남자 이름이 아니던가. 게다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확실히 남자 목소리였다. 이 녀석 게이인건가. 한때 동인녀였던 나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얼굴에 사슴 같은 커다란 눈망울. 예쁘장하게 생긴 게 이 녀석은 아마도 ‘수’겠지. 혼자 갖가지 망상을 떠올리며 괜스레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 [주한비]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녀석이 통화하고 있는 자신의 자기에게 말했다. “나 지금 무서워. 어떤 엄마 옷 입은 여자애가 음흉한 시선으로 나를 봐.” 녀석의 바가지 머리위로 주먹을 내리치고 싶었지만, 이번정류장은 진한고등학교라고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참아야 했다. 물 밀리듯 많은 학생과 함께 버스에서 내렸고,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내며 오늘 부로 동고동락을 하게 될 학교를 바라보았다. 벅찬 가슴으로 학교건물을 바라보며 나는 학교를 향해, 인생을 향해 외쳤다. 김순이 드디어 내가 왔도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한 달 간 졸졸 따라다녀야 할 2학년 5반의 추강필 선생님은 190cm정도의 큰 키와 거대한 덩치. 그리고 까무잡잡한 얼굴의 정서적인 국어보다는 역동적인 체육이 어울릴 법한 남자 선생님이었다. 35세의 아직 미혼이라는 추선생님은 보기보단 성격이 나긋나긋하였다. 나를 향해 수줍게 웃을 때마다 참으로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르겠다. 당장이라도 레슬링 판에 뛰어가야 할 듯한 거대한 덩치의 추선생님의 뒤를 따라 2학년 5반의 교실로 향하였다. 두근두근.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린다. 과연 어떠한 아이들을 만나게 될까. 설레기도 하고 한 편으론 걱정스럽기도 하다. 곧이어 교실 앞에 도착하였고, 추선생님이 문을 드르륵 열었다. 나는 쑥스러움에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추선생님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자리에 서고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서 몸을 틀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들이 하나같이 나를 보자마자 합창하듯 웃음을 터트린다. 어리벙벙한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는데, 그 중 맨 앞자리에 앉은 낯익은 바가지 머리가 놀라며 나를 향해 말했다. “에엑? 말도 안돼. 교생선생님이셨어요?” “선생님! 작아서 담임쌤에게 가려져 처음에 안 보였어요!” 아이들이 갖가지 소리를 놀리듯 해대며 까르르 웃었다. 추천생님 옆에서 나는 정말 난쟁이 같았다. 이거 첫 순간부터 굴욕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아침에 본 바가지 머리와 또다시 부딪힐게 뭐람. 나는 애써 억지웃음을 지으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애들아, 안녕. 나는 오늘부로 너희들과 함께 한 달간 지내게될 교생선생님이야. 내 이름은……” 뒤돌아 칠판에 내 이름을 쓰려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분명히 난 아이들에게 내 촌스런 이름으로 또 한번의 웃음을 선사하겠지. 행운의 기가 제대로 안 먹힌 것일까. 첫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흰색 분필로 칠판에 이름을 써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바라보는 많은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김수이라고 처음에 적다가, 나는 마지막으로 한숨과 함께 수에 ㄴ을 덧붙였다. 고로 김순이 완성. 칠판에 이름을 쓰고 돌아서니 아이들이 재미있다는 듯 내 이름을 읊는다. “김순이?” “하하하. 귀엽다. 순이. 순이야~” 역시나 아이들은 다시 한번 깔깔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점쟁이의 말 때문에 21세기 이러한 촌스런 이름을 주신 엄마를 한 번 더 원망해본다. 그 때 갑자기 쾅- 하는 굉음의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추선생님께서 책상을 내리치며 위협적인 표정을 아이들에게 짓고 있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추선생님은 고개를 돌려 수줍게 웃어 보이며 나에게 말했다. “자, 계속해서 하시죠.” “아, 감사합니다.” 부담스러운 추선생님의 추파를 받으며 나는 다시 입을 천천히 열었다. “이렇게 함께 하게 된 것도 인연인데 한 달 간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네, 반가워요! 꼬선생님!” 아침에 버스에 보았던 게이의 바가지 머리가 나를 향해 방긋방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김선생님도 아닌 꼬선생님이라.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아이에게 되물었다. “꼬… 꼬선생님?” “네~ 꼬마선생님! 꼬선생!” 그러자 아이들은 단체로 합창하며 나를 향해 ‘꼬선생님’이라고 외쳤다. 한 층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어서 좋긴 하다만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나는 업소용(?) 웃음을 아이들에게 또다시 억지로 지어보였다. 오늘 집에 가면 아무래도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다. 그 때 무심코 고개를 돌리며 창가 끝에 앉은 누군가를 발견한 순간 나는 굳어버렸다. 아이들은 갑작스런 나의 모습에 웅성거리며 내가 뚫어져라 주시하는 곳을 따라보았다. 그 후 몇 날 몇 일째 주변을 배회하며 그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매일 허탕만 쳤고, 나는 인연이 아닌가 하며 아쉽게 마음을 접어야 했다. 나는 아이들의 시선을 망각한 채 창가 녀석에게 꽥 소리 질렀다. “야! 너 고삐리였냐!” 나의 소리에 무엇에도 관심 없는 듯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던 그가 내게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햇살이 투명하게 드리워진 그의 모습은 더욱더 이질적으로 보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역시 내 남자였다. 연하면 어떠하고, 고등학생이면 어떠하리. 졸린 듯 살짝 감겨있던 녀석의 눈이 나를 보자 커다래졌다. 역시 최하운의 행운의 기는 효과 만발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씩 웃어 보이며 말했다. “또 만났네~” 계속되는 인연. 인연이라는 것은 알면 알수록 참으로 묘하다. Chapter. 2 너는 내 운명 놀란 얼굴로 헤벌쭉 웃는 나를 보던 녀석은 이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피식 웃어보였다. 순간 반달로 휘어지는 그의 눈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하얀 치아가 너무나 상큼하고 귀여워서 깨물다 못해 아그작아그작 씹어버리고 싶었다. 바보처럼 넋을 잃고 헤실헤실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나에게 쏟아지는 뜨거운 시선들이 뒤늦게야 느껴졌다. 갖가지 다양한 표정들로 나를 주시하고 있는 아이들. 그러한 아이들에게 나는 헛기침을 몇 차례 내뱉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바가지 머리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불쑥 물었다. “꼬선생님, 우리 태일이 알아요?” “응?” “태일이, 강태일 아냐고요! “아, 그게 쫌…… 잠깐만. 강태일? 쟤가 너의 그 님… 그 강태일?” 내가 기겁하며 되물어보자, 바가지 머리는 그런 내가 이상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나는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린 채 바가지 머리 주한비와 나의 남자 강태일을 번갈아 보았다. 강태일이란 나의 어린 남자는 인상을 쓰며 나를 보고 있었다. 인상 쓴 얼굴 또한 매력이 넘쳐 나도 모르게 볼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그 때 옆에서 거칠거칠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니 추선생님께서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무어라 말할 수 없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난처해하고 있을 때, 추선생님은 힐끗 적의 어린 시선으로 강태일을 보며 두꺼운 입술을 뗐다. “곧 있으면 1교시 수업 시작인데…….” “아, 네. 그렇군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숙이자, 추선생님은 웅성거리는 아이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소리치듯 말했다. “오늘도 떠들지 말고, 졸지 말고 열심히 수업 받고.또한 오늘 오신 교생선생님 괴롭히는 녀석들 있으면 곧바로 죽음이다.” “네!” “특히 강태일 너. 조심해.” 추선생님은 맹수처럼 눈을 번뜩이며 강태일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추선생님의 말에 강태일은 피식 웃더니 몸을 뒤로 빼며 어깨를 으쓱였다. 순간 내 가슴이 다 철렁했다. 추선생님은 그런 그의 시건방진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이 잔뜩 깡통처럼 일그러졌다. 교생실습을 잘 끝내기 위해서는 추선생님께도 잘 보여야 했기에, 나는 그저 입술을 꾹 다물며 불안한 눈길로 추선생님을 살폈다. “자, 어서 가시죠. 애들 곧 수업시작인데.” 살살 타이르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가 말하자 추선생님께서는 위협적인 범죄자 같은 얼굴을 곧바로 지우며 내게 수줍은 웃음을 지었다. 부담스러워 순간 고개를 휙 돌리고 싶었으나, 내 남자의 안전을 위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에 답했다. 그러자 추선생님께서는 부끄러워하며 먼저 걸음을 옮겨 교실을 나가셨다. 나는 나가려는 척하다 슬쩍 뒷걸음쳐 주한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이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점심 먹고 나서 잠깐 좀 보자.” “저 바쁜 몸에, 비싼 몸인데.” 새침한 얼굴로 뻔뻔스럽게 말하며 나를 빤히 보는 녀석. 저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나는 쉽게 그가 무얼 원하는지 읽을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 해서 벌었던 내 피 같은 돈의 예상치 못한 지출에 속으로 울며, 한비에게 힘주어 말했다. “바나나 우유.” “흐음.” “케로로 빵 추가.” “조금 있다가 봬요. 꼬선생님.” 방긋방긋 웃는 주한비.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서 교실을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나는 이를 바드득바드득 갈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한비 저 녀석 만만치 않다. 쉽게 봐서는 안 될 상대였다. 앙칼진 여우같은 놈!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황금 같은 급식 시간. 오랜만에 먹어보는 고등학교 급식에 나는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시끌벅적한 급식소는 너무나 활기가 넘쳐 왠지 모를 에너지가 분출되었다. 종이 울리자마자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려가 줄을 섰던 고등학교 시절 때처럼, 한 달간의 교생실습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 이 점심시간일 듯싶다. 식판을 내려놓고서 재빨리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움직이려는 찰나, 내 앞에 앉은 다른 여 교생이 놀라며 내게 물었다. “어머, 김선생님 그거 다 드시게요?” 이름도 생각나지 않은 그 여 교생의 말에, 주위에 있던 선생님들의 시선이 내 식판으로 쏠려졌다. 내 식판을 본 선생님들은 모두 대단한 거라도 본 듯 양 놀란 얼굴이었다. 하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내 식판의 밥공기와 반찬들은 넘칠 것처럼 가득 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식판은 내 옆에 앉은 추선생님의 식판과 막 먹을 정도의 양을 자랑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데서 통한 것에 대해 기쁜 추선생님은 나를 향해 한 쪽 눈을 찡긋 하였다. “어떻게 저런 작은 체구에서 이 정도 먹을 수 있는 거죠?” 거참, 밥 먹는데 참 말이 많다. 여 교생은 계속해서 내 식판을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감상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정도는 기본이죠.” “그럼 이것보다 더 드신단 말이에요?” 두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뜨며 되묻는 여 교생. 그런데 곧이어 나는 170cm 정도 되는 큰 키에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그 여 교생이 나를 향해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이란 것을 알아챘다. 아무래도 자신의 옆에 앉은 꽤 괜찮게 생기 남 교생을 의식하며 말하는 듯싶다. 나에게는 강태일군 있으니 걱정 말고 잘해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만 아플 것 같아 나는 다시 먹는데 열중했다. 그런데 내 식판을 향한 경이로운 시선들은 계속 끊이질 않았다. 지나가는 많은 학생들이 보고서 놀라며 수군거리는 것이었다. 먹는데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왜 이렇게 내 식판을 보고 호들갑떠는지 모르겠다. 나는 얼굴을 찡그린 채 한 숟가락 가득 퍼 입 속에 집어넣고,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꼬선생님, 식판 봐봐.” 귓구멍 속으로 또렷하게 들려오는‘꼬선생님’이라는 나의 호칭에 고개를 휙 돌렸다. 낯익은 2학년 5반 아이들은 특별한 개그를 선보이지 않았음에도, 나만 보면 웃겨 죽겠다는 듯 웃는다. 이럴 때면 참으로 기분이 아리송하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숟가락을 들려는 찰나 식판을 들고 지나가는 강태일과 두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이 슬쩍 나의 식판으로 향해있음이 느껴졌다. 나는 재빨리 추선생님의 등을 퍽퍽 치며 호호호 웃었다. “추선생님, 너무 많이 퍼주셨어요! 어이쿠, 이거 어찌 다 먹으라고.” 열심히 먹다가 갑자기 내가 등을 두들기자 추선생님은 놀라 입 속에 있던 음식물을 토해버렸다. 이런, 제기랄. 옆에 계시던 모든 선생님들이 나와 추선생님을 외면하며 먹는데 열중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강태일은 어느새 자리를 트고 주한비와 함께 식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훌쩍이며 우울해 하자, 추선생님은 괜찮다고 눈물을 머금으며 씨익 웃었다. 괜스레 끌어들여 망신을 준 추선생님께 송구스러워진 난 보조식품으로 나온 바나나를 건네 드렸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어찌됐건 먹고 살아야 했던 나는 식판을 깨끗이 비우고서(이 때 지나가던 영양사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다.) 주한비와 만나기로 한 운동장의 스탠드에 앉았다. 따사로운 햇살과 싱그러운 초록빛 나무의 그늘은 소박한 행복을 가슴에 안겨다 주었다. 눈을 감고서 잔잔한 바람의 소리를 듣는데, 그 사이로 앙탈쟁이 여우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잔뜩 몸에 힘을 주고서 고개를 휙 돌리니, 통통 뛰며 내게로 달려오는 바가지 머리 한비가 보인다. 순간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그를 보니 따라 웃어버릴 뻔 했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고 그를 향해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내게 온 주한비는 거칠어진 숨을 빠르게 토해내며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조심스레 녀석에게 바나나우유와 케로로 빵을 내밀자 그는 흡족한 듯 웃어 보이더니, 가지고 나온 가방 속에 빠르게 집어넣었다. 나의 피와 살 같은 바나나우유와 케로로 빵이 녀석에게 넘어가자, 마음이 아팠던 나는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삼켰다. 그 때 주한비 녀석이 한 층 들뜬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꼬선생님 저 왜 부르셨어요?” “…….” “혹 저한테 반해서 핸드폰 번호를 따시려는 거면 사양하겠습니다. 저 애인 있습니다.” 그 애인이란 강태일이겠지. 그 생각에 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주한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강아지 같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기다랗게 한 숨을 내뿜으며 앙 다물고 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그러니까. 그 것이……” “네?” “한비야.” “말씀 하세요. 꼬선생님.” 내가 계속 뜸들이자 괜찮다는 듯 싱긋 웃는 주한비. 그런 한비의 모습을 보니 순간 마음이 약해졌지만, 그래도 내 사랑이 우선이었다. 나는 그리 착한 사람이 못되었다. 이기적일지 몰라도 나부터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녀석의 맑은 눈망울을 도저히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채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은 말이야. 동성애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인간도 다른 동물들과 식물들처럼 씨가 마르지 않게 계속 후손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니.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아이를 만들어야 이 사회는 더 많은 인재들이 발굴되고, 더욱 밝아질 거야. 또한 동성애는 건강한 성생활이 되지 못한단다.” “…….” “그러니까……” 혹 아이가 눈물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눈을 딱 감고 아이를 향해 힘겹게 말했다. “강태일은 포기 하는 게 어떻겠니?” 나의 말에 주한비는 아무 말이 없었다. 혹 상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바가지 머리 주한비는 배를 잡고 깔깔 웃는다. 넘어갈 듯 몸을 뒤 흔들며 정신 사납게 웃는 주한비. 혹여나 너무 충격이 커 미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이 사회에서 아직 동성애는 인정받지 못하였고, 질타를 당하니 아이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아이에게 나의 이야기는 또 하나의 커다란 상처겠지. 그 생각에 미안한 눈길로 한비를 바라보는데…… “태일아, 나 미치겠어. 꼬선생 외계에서 날라 왔나봐. 이상해.” 나를 외계인 취급하며 이 자리에 없는 강태일까지 찾는 거 보니 정말로 충격에 미쳤나 보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도저히 한비를 바라볼 수 없어 벌떡 일어서 뒤돌았다. 그런데, “엄마야!” 누군가 뒤에 서있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교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삐딱하게 서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를 보는 강태일 이었다. 지금까지 우리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나 보다. 혹시 이 자리에서 ‘네까짓 게 뭔데 우리 한비한테 그러느냐.’ 고 말할까봐 바짝 긴장하였다. 죄지은 마냥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데, 곧이어 강태일은 내게 한 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아니 선생님이 그 꼬맹이라니.” “꼬, 꼬맹이라니! 나는 22살의 어엿한 성인이란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녀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와 두 눈이 제대로 마주치자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강태일은 그런 나를 알 수 없는 얼굴로 응시하였다. 그의 시선에 차차 부담을 느낀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 때 겨우 웃음을 멈춘 주한비가 내 옆에 서며 말했다. “꼬선생님, 저는 우리 애인이랑 결혼해서 예쁜 아기 낳을 거예요.” “응? 그건 불가능하지 않……” 말꼬리를 흐리고서 내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보자 한비는 방금 내가 한 생각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이성애자랍니다. 엄연히 멋쟁이 아빠가 되는 게 꿈이라고요.” 그 말에 나는 창피해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혼자 착각하고, 혼자 소설을 쓴 것이었다. 진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을 때, 강태일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나저나.” “…….” “한비를 불러낸 게 이 이유 때문이냐……가 아니라 입니까?” 그 말에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며 강태일을 바라보았다. 바람결에 살짝 살짝 흔들리는 그의 머리칼이 참 예뻐 보였다. 나는 갑자기 불쑥 용기가 솟아올랐다. 주한비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면 그와의 사랑에 대한 큰 장애물이 사라진 것이었다.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서 녀석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그리고서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나는 말이다.” “…….” “네가 좋다. 그 때 너를 처음 본 순 간 한 눈에 반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이건 운명이라고 느꼈다.”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똑소리나게 잘 말했다. 잘한다. 김순이! 옆에서 한비가 휘파람을 불며 호응을 해주었다. 한비의 응원에 힘입은 나는 비장한 얼굴로 녀석을 마주했다. 그리고 녀석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그의 얼굴을 내 얼굴 앞으로 다가오게 했다. 그의 깊은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나는 내 진실한 속마음을 드러냈다. “너를 내 남자로 만들겠다.” 용기 내어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강태일의 얼굴엔 아무런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무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녀석은 잠시 후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나를 언제 봤다고 그러는데……요.” 존댓말 하기가 어색했는지 그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허나 그는 곧 개의치 않고 비웃음 섞인 얼굴로 내게 얼굴을 한 층 가까이하며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요? 내가 좋은 놈일지, 나쁜 놈일지 아냐고요.” “…….” “운명 웃기시네.” 나는 천천히 손에 쥐고 있던 강태일의 남색 넥타이에서 손을 뗐다. 옆에 있던 한비는 긴장한 얼굴로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끼며 강태일을 똑바로 응시하였다. 피하지 않겠다는 듯, 굴하지 않겠다는 듯. “그럼 이 운명을 내가 곧 증명해보이지.” “…….” “어찌됐건 넌 내꺼다!” 나는 그를 향해 씨익 웃으며 뒤돌아서 힘차게 걸었다. 아직 녀석이 내 마음을 믿지 못하겠는 것이라면, 믿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것 가지고 상처받고 우울해 할 내가 아니다. 강태일, 너도 만만치 않은 남자이지만 너 또한 만만치 않은 여자에게 걸린 것이다. 예전에 감명깊게 보았던 한 영화의 제목처럼 나에게서 강태일은 ‘너는 내 운명’이었다. 고로 나는 그를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나를 향한 그들의 시선이 느껴져 더욱 발끝에 힘을 주며 걸었다. 그런데 미끌미끌한 무언가가 신발과 마찰을 일으키더니 나는 그대로 꽈당 뒤로 넘어졌다. 쓰라린 고통이 느껴지는 엉덩이를 비비며 바닥을 보는 데, 이것은 오늘 급식 때 나온 바나나껍질이었다. 어느 개념 없는 녀석들이 이런 곳에다 위험하게 함부로 버렸는지. 속으로 욕설을 퍼붓는데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아직까지 그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깨달은 나는 절규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주한비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틀어먹고 있었고, 강태일은 한심스럽다는 듯 혀를 차며 나를 보고 있었다. 멋지게 선전포고 하고 사라지고 싶었는데 망했다. 나는 살짝 눈물을 머금고서 빨개진 얼굴로 외쳤다. “그래도 넌 내꺼야!”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어느새 밤이 깊게 무르익어 있었다. 오늘의 밤하늘엔 쉽게 볼 수 없는 별들이 무수하게 총총 박혀 있었다. 회식으로 오랜만에 삼겹살을 먹었다. 공짜이기에 배터지게 먹고, 소주 몇 잔을 걸치니 기분이 최고조였다. 나는 9층을 누르려다 8층을 눌렀다. 오늘의 멋진 이야기를 하운이에게 해주고 싶었다. 곧이어 8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고, 나는 문이 열리지 마자 냉큼 내려 하운이의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초인종을 마구잡이로 꾹꾹 눌렀다. 그러자 곧이어 덜컥 문이 열리고 잔뜩 찡그린 얼굴의 최하운이 보였다. “야! 내가 한번만 누르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나를 보자마자 또 소리 지르는 최하운. 나는 그의 품안에 폭 안기며 소리쳤다. “나의 럭키!” “뭐야. 너 술 마셨냐.” “응! 조금 마셨지롱!” 방금 씻었던지 그의 품에서 물기 어린 향기가 났다. 와, 녀석만의 좋은 향기다. 최하운만의 이 묘한 향기를 맡을때면 항상 불안했던 마음도 편해진다. 눈을 꼭 감서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안겨 있을 때, 최하운은 나를 살짝 밀어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빨리 가서 잠이나 퍼 자.” “에이, 왜 그러셔. 나는 우리 럭키 보고 가……” 갑자기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서있기 조차 힘들어진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런 나를 정신 차리라고 최하운이 흔들어 깨우지만, 그럴수록 더욱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운이는 한숨을 길게 내뱉더니 내게 등을 보이며 말했다. “업혀.” 나는 그 말에 씨익 웃으며 동그랗게 주먹을 쥐고서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녀석은 나의 행동에 피식 웃음 지었고, 나는 비틀거리며 녀석에게 조심스레 업혔다. 최하운은 천천히 일어서더니 나를 업고서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가기 시작했다. 항상 투덜거리면서도 하운이는 내가 다리가 아프거나 힘들 때면 말없이 없어준다. 그의 등에 업힐 때면 왠지 어렸을 적 아빠의 등에 업힌 것 같아 기분이 슬퍼지기도, 행복해지기도 한다. 나는 녀석의 어깨에 얼굴을 깊히 묻으며 입을 열었다. “았잖아, 운아.” “…….” “나 운명의 남자를 드디어 만난 것 같아.” “그래?” “응! 저번에 말할까 하다가 안 말했어. 다시 또 못 만나는 줄 알고. 그런데 글쎄, 내가 교육 실습하는 학교 학생인 거 있지!” “뭐? 고등학생이냐?” “응! 그런데 애가 엄청 멋져. 나이에 맞지 않게 왠지 모를 성숙미가 잔뜩 풍기고,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한 느낌이 들어. 진짜 최고야!” 나의 말에 하운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혹 비웃는 건가 싶어 볼을 풍선처럼 잔뜩 부풀리는데, 곧이어 웃음을 집어삼키며 하운이가 말했다. “너도 이제 늙었다는 거냐. 영계를 찾는 거 보니.” “에씨,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그런 얘기는 하지 말자!” “야야. 그만하자. 진짜 늙은 것 같아 서글퍼진다.” “히히. 어쨌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너에게 항상 제일 처음 말해주고 싶었어.” “…….” “너는……” 나는 무어라고 종알거리다 하얗게 변해가는 흐릿한 정신에 말꼬리를 흐리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Chapter. 3 그 녀석의 오케이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소리에 몸을 뒤척이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끄집어 올렸다. 허나 멈출 기세 없이 우량아처럼 울어대는 나의 알람시계에 난 결국 백기를 들어야 했다. 눈을 뜬 채 만 채 손을 뻗어 알람시계를 끄고서 길게 한 숨을 뱉었다. 그리고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그 생각에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서 손으로 졸린 눈을 비볐다. 그런데 어제 저녁 회식 때 음주를 하여서 그런지 속이 메슥메슥하였다. 얼굴을 찡그린 채 배를 문지르며, 침대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왔다. 아담한 거실로 나오니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내 동생 도혁이가 보였다. 뻔뻔스럽게 [꽃도혁]이라는 명찰을 달고서 말이다.(얼마 전에 따로 장만했다.) 뺀질뺀질한 녀석이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것은 아침에 자습을 하기 위하는 것도 아니요, 본래부터 아침 형 인간이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자신이 추구하는 패션과 미(美)를 위해서 이다. 잔뜩 힘준 머리를 만족스럽게 보던 도혁이는 힐끗 나를 보며 말했다. “기지배가 술 처먹고 업혀오고, 그게 뭐냐. 진짜 하운이형이 불쌍하다.” “야! 너 참 말 곱게 한다?” “예쁜 구석이 있어야지 곱게 하지.” “뭐!” “그 새 식신 본능 못 참고 그리 먹어댔냐. 학교에서 하루 만에 아주 유명인사가 됐더라. 내 창피해서, 정말.” 서슬 퍼런 김도혁의 말에 나는 휘청거리며 이마 위에 손을 얹었다. 코흘리개 어렸을 적에는 내 말 한마디에 껌벅하며 나한테 굽실거리던 녀석이 자라면 자랄수록 나를 만만히 보았다. 더군다나 엄마를 닮아 일치감치 성장을 멈추어 키가 작은 나에 비해 이 녀석은 보통 남성의 표준 키는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나를 같잖게 여기는 것이다. 한살 터울도 아니고 4살 차이가 나는 데 말이다. 어느 날 한 대 쥐어박으려 할 때 녀석이 내 팔목을 덥석 붙잡고 때리지 못하게 막은 그 이후, 힘이 자신보다 훨씬 없다는 것을 안 이유로 그는 내게 더 이상 말 잘 듣는 어여쁜 동생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 창 질풍노도의 시기였기에 그의 시건방짐은 하늘을 찔렀다. 혹 남동생을 둔 누나들은 내 맘을 충분히 이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쾌한 아침부터 힘 빼고 싶지 않아 그저 나는 참고 또 참을 뿐이다. 혼자서 쓸쓸히 꿀물을 타먹고 있을 때, 거실 텔레비전에서 요새 한 창 잘나가는 여자 아이돌 그룹 롤리팝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도혁이는 눈을 반짝이며 부리나케 텔레비전 앞으로 뛰어갔다. 두 손을 꼭 모으고서 황홀한 눈으로 텔레비전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김도혁. 롤리팝의 리더로 귀여움과 청순함을 함께 겸비한 신유라라는 애를 녀석은 열광적으로 좋아했다. 롤리팝의 노래에 맞춰 몸을 들썩이는 녀석. 저런 모습을 보면 아직도 어린데 말이다. 열중하는 녀석을 보고 피식 웃다가 갑자기 불쑥 떠오른 생각에 손바닥을 쳤다. 어제 첫 실습을 마치고 엄마에게 전화를 하려 했는데, 그만 술에 취해 바로 자버리고 만 것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빠가 돌아가신 이 후, 시골에서 혼자 여자의 몸으로 농사를 짓고 사시는 엄마. 엄마는 세상을 넓게 보아야 한다며 일찍이 고등학교 때 나를 먼저 객지로 내보내셨다. 그런 후, 작년에 도혁이가 올라오며 함께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살고 있는 것이다. 앨범에 있던 젊은 시절의 고운 엄마는 더 이상 계시지 않았다. 자갈처럼 거칠거칠 해진 손. 고된 세월에 깊게 잡은 주름 살. 멋이라곤 어느 날부터 잊어버린 후줄근한 옷. 지금 시골에는 두 아이의 엄마로써, 남편을 잃고 홀로된 아내로써 강인하지만 연약한 나의 엄마가 계시는 것이다. 엄마 생각을 할 때면 항상 가슴이 먹먹하다. 한 없이 나 때문에 고생하시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서 집게손가락으로 집 전화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 곧이어 뚜르르 신호음이 가는데 벌써 일찍이 일 나가신 건지 받지 않으셨다. 조심스레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다시 한 번 약해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 본다. ‘오늘도 힘낼게, 엄마.’ 원래 화장을 잘 안하지만, 내 남자에게 잘 보고 싶어 나름 신경 썼다. 그리고 어제보다는 무게 있지 않은 간편한 원피스를 입었다. 다 차려 입고서 거울 속에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하얀 피부와 오목조목한 눈, 코, 입. 꽤 귀염성스러운 얼굴이었으나 너무나 한 이미지에 치중되고, 어려 보여서 탈이었다. 어찌됐건 이상 없이 잘 태어나 준 것 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기에 거울속의 나를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서 크게 ‘화이팅’을 외쳤다. 1층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리는데, 막 쓰레기를 버리고 왔던지 손을 탈탈 털며 걸어오고 있는 하운이가 보였다. 난 반가움에 냉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조르르 그의 앞으로 달려가 손을 크게 흔들었다. “운아! 좋은 아침!” “학교 가냐?” “응! 아, 너 아르바이트 끝나고 우리 학교로 와라. 나랑 장 보러 가자.” 나의 말에 그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왜 학교 앞까지 가야하는데. 그냥 시장 앞에서 만나.” “너 혼자 오지 말고 네 잘난 오토바이 타고 오란 말이야.” “그러니까 왜 학교 앞으로 가야 되냐고.” 항상 최하운 녀석은 끝엔 다해줄 거면서 툴툴댄다. 그런 모습이 뭐 귀엽기도 하지만 말이다. 매서운 눈매였지만 결코 무섭지 않은 매력적인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자, 생각해봐. 퇴근하고 학교에서 나오는데 남자가 오토바이에 기댄 채 교문 앞에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봐.” “…….” “좀 있어 보이잖아!” 나의 말에 녀석의 얼굴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여우같이 생긴 계집애 한 명이 ‘선생님에겐 첫사랑도 없지요?’ 하는 말에 울컥했었다. 그리하여 나를 얕잡게 보는 여자아이들에게 나에겐 이런 친구도 있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그 생각에 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하운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오늘 밥 사 줄게.” 이 말에 최하운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몇 년 간의 자취생활에 꽤 검소하기도 하고 나와 같이 공짜를 좋아하던 그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짠순이인 내가 쏜다는 것은 사막에 비가 내리는 것만큼이나 희귀한 일이었다. 그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이고선 살짝 웃음 지으며 내게 말했다. “삼겹살이다.” 난 그 말에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오케이 표시를 지었다. 괘씸한 여우같은 여자애들에게 마음속으로 외쳤다. 다 죽었어!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꼬선생님!” 버스에 오르자마자 톡톡 튀는 커다란 목소리로 누군가 나를 부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해맑게 웃고 있는 주한비였다. 오늘은 동글동글한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이 녀석도 김도혁처럼 패션의 선두주자 되고 싶은 가. 버스 안의 시선들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슬금슬금 걸어가 한비의 옆에 섰다. 왠지 한 달 간 앞으로 주한비와 통학 친구가 될 듯싶었다. 어찌하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강태일의 가장 친한 친구라니 많은 정보를 뜯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혼자 웃음 짓고 있을 때 활처럼 눈초리를 휘며 한비가 불쑥 물었다. “꼬선생님, 왜 그리 사악하게 웃으세요?” “응? 아무것도 아니야.”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양 옆으로 흔드는데, 한비 녀석은 다 알고 있다는 듯 오만불손한 얼굴로 나를 향해 말했다. “저 꽤 입 무거운데.” “…….” “혹 저를 통해 태일이 녀석의 정보를 캐내려했다면 쉽지 않을 겁니다.” “…….” “태일인 소중하니까요.” 그리고선 나를 향해 방긋방긋 웃는 주한비. 귀여운 웃음이었으나 내 몸엔 힘이 잔뜩 들어갔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역시 결코 만만치 않은 녀석이었다. 경계대상 1호!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일단 학교에서 강태일이 어떠한 녀석인지 기본적인 신상을 알아내기 위해 한 명을 사수했다. 이 아이는 도혁이를 좋다고 따라다니는 한 주근깨 소녀였다. 시골소녀처럼 풋풋한 모습이 꽤 귀여운 아이였다. 도혁이가 절대 내가 자신의 누나라는 것을 알리지 말라고 하였으나, 나도 먹고 살아야 했기에 김도혁의 미공개 사진을 제공한다 하여 아이를 내 편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졸졸 도혁이를 쫓아다니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왠지 모를 동변상련을 느꼈다. 솔직히 내 동생이지만 도혁이는 좋은 남자가 아니니 포기하라고 일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하면 거래는 끝나는 거기에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을 집어 삼켰다. 주근깨 소녀는 내가 슬쩍 강태일에 대해 물어보자 흥분을 하며 나를 향해 말했다. “강태일이랑 주한비 엄청난 애들이잖아요! BK엔터테이먼트 연습 생인데!”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기획사 이름이었다. 곰곰이 곱씹어 보며 생각하는데 이내 나는 입을 크게 벌리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많은 유명 아이돌 그룹과 실력파 가수들을 배출해 내였으며, 김도혁이 죽어라 좋아하는 롤리팝 또한 이 소속사이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는 최고라고 가히 말할 수 있는 소속사로, 가수의 꿈을 가진 아이들이 한결같이 목표로 삼고 꿈꾸는 곳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곳과 계약한 순간부터는 성공은 확실히 보장된 셈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자, 주근깨 소녀는 나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신난 얼굴로 이어 말했다. “이거는 제가 선생님께만 말씀드리는데요. 사실 저의 삼촌이 그 소속사에서 일하시거든요. 그런데 태일이하고 한비를 포함해 다섯 명으로 된 아이돌 그룹을 내년 1월쯤에 데뷔시킬 예정이래요.” 범상치 않은 외모와 남다른 분위기인 강태일. 역시 녀석은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이런 엄청난 거물일 줄이야. 주근깨 소녀의 이야기를 듣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설령 그를 내 남자로 만들었다 하여도, 내가 과연 이 세상에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떠올랐다. 요즘 소녀 팬들이 엄청나게 무섭다 하였는데,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가 만약 그의 연인이라면 난 아마 제명에 못살지도. 심각하게 빠져들려고 하자 나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탈탈 털어냈다. 어찌됐건 이미 시작되었으니 멈출 수 없었다. 그 일은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지금은 눈앞에 현실만 보기로 하였다. 그가 유명한 가수가 된다 하더라도 어찌됐건 그는 내가 찾고 있던 내 남자임은 변함없으니까. 점심 식사 후, 강태일 녀석을 찾기 위해 2학년 5반을 기웃거렸다. 그런데 방금 전 어떤 여자애가 불러 나갔다는 소리에 나는 부리나케 그들이 갔다는 학교 뒤편으로 뛰어갔다. 조심스레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가 살펴보니 마주보고 서있는 강태일과 여자애가 보였다. 고백하는 여자애는 긴 생머리에 마른 몸을 가진 꽤나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애였다. 나는 벽 뒤에 숨어 그들의 행동을 살펴보았다.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고서 여자애가 그에게 고백하고 있는 듯싶었다. 곧이어 여자애는 입을 다물고 대답을 기다리는 듯 주먹을 꽉 쥐고서 강태일을 마주보았다. 강태일은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여자애의 얼굴을 들여다 보다, 갑자기 얼굴을 여자애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순간 가슴이 쿵했다. 그런데 그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고 작게 속삭였고, 곧이어 여자애는 얼굴을 붉힌 채 몸을 휙 돌려 달려갔다. 무슨 말을 한 것일까? 궁금함에 온 몸이 근질거렸다. 그런데 그때 강태일이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니 나를 향한 것이었다. “그만 훔쳐보시고, 나오시죠.” 그 말에 나는 움찔했다. 눈치를 보다 쭈뼛쭈뼛 숨기고 있던 몸을 빼내며 녀석의 앞에 섰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검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난 재빨리 꼬리를 내리듯 고개를 숙이며 발끝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느껴지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쑥스러워 양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는 계속해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며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혹 자세히 보니 예쁘게 생겼다는 것이나, 내게 조금은 관심이 생긴 것이 아닐까. 갖가지 망상을 떠올리는 수줍어하고 있을 때 그의 작고 도톰한 입술이 열렸다. 헌데 그 예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칠칠맞기는.” “응?”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물어보자, 녀석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내 얼굴을 향해 다가오자 온 몸은 빠르게 굳고, 심장은 크게 박동한다. 곧이어 그의 손이 볼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거세게 뛰는 심장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그런데 달구어진 쇠에 찬물을 끼얹는 듯 맥없이 뜨거워진 심장은 김이 빠졌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에 붙어 나오는 것은 다름 아닌 하얀 밥풀이었다. 점심 식사 후 나를 보고 아이들이 나를 보고 키득키득 웃기에 이상하게 여기기는 했으나, 평소에도 나를 개그맨 보듯 하던 아이들이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내가 절망적인 얼굴로 천천히 그의 손가락에 붙은 밥풀을 떼어가자, 강태일은 건조한 눈빛으로 쓱 나를 한 번 보고는 뒤돌아 갔다. 조금씩 멀어지는 그를 우두커니 서 멍하니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며 밥풀을 휙 떼어내 버렸다. 그리고서 재빨리 그를 종종걸음으로 졸졸 따라갔다. 그는 나와 간격을 더 내려는 듯 긴 다리로 거침없이 휘적휘적 빠르게 걸음을 옮겼고, 나는 따라잡기 위해 숨 가쁘게 움직였다. 거칠해진 숨을 토하며 열심히 그의 뒤를 쫓고 있을 때, 갑자기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하여 열심히 발을 놀리던 나는 그의 등에 쿵 얼굴을 부딪쳤다. 순간 머릿속이 띵 울렸고,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서 녀석에게 계속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뭐라고 말했어?” “…….” “아까 그 여자애한테 뭐라고 대답했어?” 나의 말에 그가 천천히 뒤돌았다. 살짝 날이 선 눈이 따갑게 나를 향했다. 순간 겁이 들었으나 난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녀석을 마주보았다. 녀석은 차가운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그 물음에 제가 꼭 대답해야할 의무가 있습니까?” “그야 당연히……” “…….” “에이. 부끄럽게!” 도저히 낯부끄러워서 ‘좋아하니까’라고 말할 수 없었던 나는 쑥스러워 하며 손으로 그의 팔을 툭 쳤다. 그리고 두 손으로 빨개진 얼굴을 감싸며 휙 돌아 달려갔다. 그 때 녀석의 목소리가 빠르게 나를 붙잡았다. “오케이라고 했다면, 그랬다면 어쩔 건데요?” 걸음을 멈추며 잠시 동안 가만히 서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태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삐딱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였다. 순간 흠칫했으나 나도 곧 마저 몸을 돌려 그를 정면으로 주시했다. 살랑살랑 부드럽게 불어오는 5월의 싱그러운 바람이 이 내 마음처럼 머리칼을 흔들어 놓는다. 난 팔짱을 끼며 한 숨을 짧게 토하고서 싱긋 웃었다. “뭐, 오케이면 오케이인거지.” “…….” “그래도 마지막은 내가 이겨.” 내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그는 순간 놀란 눈빛을 짓다가 이내 갑자기 피식 웃는다. 그런데 그 웃음도 잠시였다. 순간 그는 그 자리였으나 왠지 모르게 한 발자국 더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오케이는 안했어요.” 그 말에 나의 얼굴엔 금 새 화색이 돌았다. 사실 조금은 걱정했긴 하였다. 선량한 제자의 남자는 뺏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보다 더욱더 가슴을 따갑게 하는 말이 곧이어 들려왔다. “내게서 그 오케이는 이미 죽었거든요.” “…….” “여자 따윈 싫어.” 그는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서 걸음을 옮겨 나를 지나쳐 갔다. 순간 그가 스쳐지나갈 때 불어온 바람은 아주 시렸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그 후 무거운 응어리가 눌러 앉은 거처럼 가슴 한구석이 계속 찝찝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들추어낼 수 는 없었다. 가슴 속 깊숙이 묻어두고서 교생일지를 마지막으로 쓰며 마무리 짓고 학교에서 나왔다. 약속으로 교문 앞에 기다리고 있을 하운이를 향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통통 뛰어가는데, 멀리서 많은 여자애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며 보니 최하운은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여자 아이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최하운. 그런 그가 조금 무섭기도 한 건지 지켜보기만 할 뿐 직접 부딪히는 애들은 없었다. 어찌됐건 역시 내 친구였다. 여자를 홀리는 데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서, 정의의 기사가 되어 녀석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그만!” 나의 외침에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보는 아이들을 훑어보다, 나를 노려보는 최하운 녀석을 향해 히죽 웃었다. 그리고서 어깨를 쫙 피고 입에 웃음을 살짝 걸며 당차게 걷는데, 갑자기 무언가에 걸려 꽈당 고꾸라져버렸다. 아픔에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니 어이를 상실한 얼굴로 다들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기분이 좋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반응인 하운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난 그를 향해 울먹거리며 말했다. “운아. 도, 도와줘.” 하운이는 오토바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나에게 터벅터벅 걸어왔다. 곧이어 내 앞에 서고 그는 한심스럽다는 듯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다, 운동으로 단련된 단단한 팔을 나를 향해 뻗었다. 곧이어 내 몸이 공중에 부웅 떠올랐다. 그런데 공주님처럼 멋지게 들어주면 될 것을, 창피하게 무슨 짐작들 듯 나를 들고서 턱 오토바이 뒤에 앉혔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 때 아이들이 고새 못 참고 터트리듯 나를 향해 질문을 해댔다. “선생님, 누구예요!” “선생님 애인이에요?” 많은 아이들의 거센 질문에 부끄러움은 곧 사라지고, 나는 아이들을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애들아.” 나의 나지막한 말에 애들은 입을 다물며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팔짱을 끼고서 도도하게 아이들을 내려다 보던 나는 잠시 다물었던 입을 열어 답했다. “앤 내 꼬봉이야.”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의 반응을 즐기기도 전 최하운은 헬멧을 거칠게 내게 씌어주고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걸자마자 빠르게 오토바이를 움직이는 최하운. 그런데 이 자식이 미쳤는지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것이다. 이 것은 지금 녀석이 분노했다는 것이다. 스피드광인 그는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면 오토바이를 타거나, 자동차경주를 했다. 너무나 무서워 오줌이 나올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놀이기구를 못타는 나인데 이것은 바이킹보다도 더했다. 그의 나무 같은 딱딱한 등짝에 매미처럼 달라붙어서 소리쳤다. “야! 너 죽을 라고 작정했어!” “네 꼬봉으로 살 바에는 그냥 죽어버리지, 뭐.” “아따, 그러지 말고!” 녀석이 무응답하며 더욱더 속도를 내자,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말했다. “진짜 죄송합니다요. 제가 잘 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누가 꼬봉이냐!” “접니다. 저지요. 오늘 정식 인사드립니다. 최하운의 꼬봉 김순이입니다!” 나의 말에 만족스러운 듯 그가 작게 웃으며 속도를 점차 줄였다. 죽었다 살아난 듯 머릿속이 멍했고, 온 몸에는 힘이 쭉 빠졌다. 나의 반응에 뭐가 웃긴 지 계속 그가 키득키득 웃었고, 나는 어린아이가 울음을 터트리듯 으앙- 울며 그의 등짝을 마구 쳤다. Chapter. 4 사랑의 질주 최하운과 함께 시장에가 몇 년 간의 살림으로 갈고 닦은 실력을 또 한 번 어김없이 발휘했다. 아주 절약되게 장을 본 우리는 만족스러워 하며, 마지막으로 만찬을 열어 푸짐히 먹을 삼겹살을 잔뜩 샀다. 식당에가 먹기보다는 삼겹살을 사와 집에서 먹는 것이 가격에도 양에도 더욱 이익이 남았기에, 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함께 해먹기로 하였다. 어찌됐건 일이 원하는 대로 잘 풀리지는 않았으나, 약속은 약속이었으니 그에게 삼겹살을 쏘는 것이다. 집에 도착한 우리는 허기짐에 분주히 저녁식사를 준비하였다. 밥을 고슬고슬하게 잘하는 최하운이 먼저 쌀을 씻어 밥을 안쳤고, 나는 사온 각 종 싱싱한 야채들을 깨끗이 씻었다. 물기에 젖은 싱그러운 연둣빛 상추가 너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저 위에 고기 한 점과 쌈장을 얹고 마늘 등 각종 야채를 얹어 먹으면 최고인데. 절로 침이 입 안에 고였다. 빨리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서둘러 준비했다. “도혁이는 안 먹는데?” “몰라. 굶으면 지만 손해지.”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하자 최하운은 피식 웃었다. 김도혁. 이 녀석은 스키니진을 더욱 멋스럽게 소화기 위해 좀 더 살을 빼야한다며, 어제부터 6시 후로는 먹지 아니지 하며 소식(小食)을 하고 있었다. 자주 있지 않은 귀한 삼겹살 메뉴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스키니진을 향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다지 별로 살도 없는 녀석이 다이어트를 하니 괜스레 짜증이 났다. 야채를 말끔하게 씻고 난 후, 바구니에 담아 물기가 빠지도록 두고서 식탁에 음식을 차리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그 때 불쑥 강태일이 한 말이 떠올랐다. ‘여자 따윈 싫어.’ 그 또한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혹 그이유를 알 수 있을까 나는 슬쩍 하운이에게 물었다. “있잖아, 운아.” “왜.” “너는 여자가 왜 싫어?” 나의 물음에 순간이지만 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는 무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문 채 묵묵히 김치를 썰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녀석을 응시하였다. 말하기 곤란한 것인가? 그에게는 항상 비밀이 많았다. 이 것 또한 그 비밀 중의 하나인 걸까. 그가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아 체념하며 약간은 서운한 마음으로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 때 낮은 그의 음성이 아주 작게 들려왔다. “두려우니까.”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쿵하고 울렸다. 아주 작은 목소리. 하지만 뚜렷이 들리는 목소리. 고개를 돌려 ‘왜’ 라고 물어보려는 찰나 그는 ‘그만’이라는 듯 딱 잘라버리며 다른 화제로 넘겼다. “역시 네 어머니 김치는 최고다.” “그, 그 치? 거의 다 먹었으면 또 가져가.” “감사.” 그를 향해 어색하게 웃다 표정관리가 도저히 잘 안되자, 재빨리 고개를 돌려 얼굴을 냉장고 안으로 숨었다. 가끔은 말이지 그가 가까이 있지만 손을 뻗으면 닿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문뜩 들곤 했다. 과연 내가 그의 진짜 얼굴을 잘 알고 있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 들곤 한다. 최하운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 에 대해서 참 서툴렀다. 그리하였기 때문에 보통 다른 사람들을 그를 꺼려했다. 딱딱한 인상과 무뚝뚝함에 다른 친구들은 하운이보고 무섭다고 한다. 하지만 내게는 그러지 않다. 그는 내게 항상 서슴없이 장난을 걸고 웃는다. 힘든 일 이 있을 때면 의지가 되도록 자신의 어깨를 빌려준다. 그만큼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이다. 그리하여 나는 항상 믿고 있다. 녀석에게 나는 특별한 존재라고. 그래서 죽는 날 까지 함께할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따져보면 나는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무언가 물어보려고 하면 그는 곧바로 선을 그어버렸다. 혹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오만일까. 서로에게서 필요의 양을 따진다면 아마 내가 최하운을 더 필요로 할 것 이다. 그렇다면 그는? 하운이는 과연 나를 필요로 할까. 하지만 나는 그에게 지금껏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그 생각에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그 때 문자가 딩동-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한 숨을 토해내며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꼬선생님~ 저 배고파요!] 허나 2학년 5반 학생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면상 하나가 머릿속에 곧바로 그려지긴 했으나, 나는 새침하게 문자를 찍어 보냈다. [넌 누구냐.] [사랑스러운 한비~!]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답장 온 문자는 역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녀석이 맞았다. 어떻게 내 핸드폰 번호를 알아낸 것인지 모르겠다. 사랑스럽긴 개뿔. 나는 입을 삐죽 내밀며 핸드폰을 닫아버렸다. 그러자 곧바로 또 다른 문자가 성급하게 왔다. 그냥 무시할까 생각하던 나는 ‘혹시’ 라는 생각에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문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강태일 이상형 정보.] 혹 강태일이 어느 날 내게 마음을 연다면,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권하고 싶다. 주한비와의 친분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소중하다 해놓고서 이런 용도로 강태일의 이름을 팔다니. 어린놈이 세상사는 법을 너무 빠르게 터득했단 말이야. 어찌됐건 내게는 필요한 정보였다. 왠지 이 녀석의 손안에 놀아나고 있는 듯싶지만 지금으로썬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짧게 한 숨을 토하며 하운이에게 물었다. “운아, 한 사람 더 불러도 되냐?” 나의 물음에 그가 힐끗 나를 보았다. “누구?” “못된 어린 여우 한 놈.” 내가 분노 어린 시선으로 이를 갈며 말하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알아서하라는 듯 다시 김치찌개 요리에 열중했다. 이 근처에 있던 주한비는 부리나케 달려왔던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집 앞에 도착했다. 부산스럽게 초인종을 연속으로 눌러대는 주한비. 역시나 절로 최하운의 얼굴은 찌푸려졌다. 그리고 새삼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해본다. 앞으로는 한 번만, 아니 두 번 만 딱 두 번 만 눌러야겠다. 그렇게 다짐을 하며 현관문을 열자, 주한비는 자기 집인 양 겉치레 된 말조차 하지 않고 냉큼 신발을 벗어던지며 들어왔다. 문을 닫으며 녀석을 노려보고 있을 때 주한비는 코를 킁킁 거리더니 크게 소리쳤다. “와, 맛있는 냄새다!” 그리고서 냄새를 따라 부엌으로 통통 향하는 주한비. 그런데 부엌을 향하여 가볍게 뛰어 들어가던 주한비는 최하운을 보자 그대로 얼음상태가 되었다. 하운이는 한비를 곁눈질하여 슬쩍 한 번 쳐다보고는 무심하게 다시 자기 일을 하였다. 나는 ‘땡’이라고 외치며 얼음이 된 녀석의 굳은 어깨를 쳤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나를 동그란 눈으로 보았다. 이상한 녀석이다. 최하운이 남다른 카리스마를 풍기고 있다고는 하나 촐싹대던 그가 이렇게 겁먹을 정도라니. 게다가 지금 최하운은 노란색 병아리 앞치마를 하고 국자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녀석을 보며 말했다. “내 친구야. 최하운.” 나의 말에 주한비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하운이에게 더듬거리며 말했다. “안, 안녕… 하세요.” 녀석의 인사에 최하운은 무심하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류가 느껴졌다. 뭐지? 하지만 이내 나는 털어내며 따끈따끈한 밥을 푸기 위해 주걱을 들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지글지글 맛있는 삼겹살 냄새가 부엌 안에 춤을 추듯 맴돌았다. 역시나 그렇지. 주한비는 금 새 오두방정을 떨며 먹는 와중에도 계속 종알종알 거렸다. 허겁지겁 나 못지않은 두 사람의 식성에 나는 위기의식을 느끼며 분주히 젓가락질을 했다. 그런데 그 때 결국 고기냄새를 참지 못하고 튀어나온 김도혁이 공연스레 외쳤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우리 세 사람은 녀석의 말을 무참히 삼겹살과 함께 집어삼키며 묵묵히 계속 먹었다. 그 때 내 옆에 앉아 있는 주한비를 보고 김도혁은 갑자기 경악을 하더니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이 새끼가 왜 여기 있어.” “김도혁. 말 좀 곱게 해. 친구보고 이 새끼라니.” “아, 왜 여기 있냐고! 그리고 이 새끼랑 친구 아니야!” 주한비에게 무슨 원한이 맺힌 건지는 몰라도 도혁이는 펄쩍펄쩍 뛰며 성을 냈다. 허나 그런 그를 신경 쓰는 이는 한명도 없었다. 주한비는 욕지거리를 들으면서도 쌈을 쉴 새 없이 입안에 쏙쏙 넣었다. 도혁이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퉁퉁 치며 주한비에게 꽥 소리 질렀다. “도대체 너 왜 우리 집에 왔냐고!” “선생님이 초대해서 왔는데?” 한비가 무심히 대답했고, 김도혁은 갑자기 가자미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그러다 녀석은 혼자 움찔거리며 한비를 향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설마 강태일도 왔어?” “아니, 태일이는 안 왔어.” 그 말에 얼굴이 시뻘게진 김도혁은 한숨을 작게 뱉으며 조금 안정된 얼굴이 되었다. 그 때 한비가 빙긋 웃으며 나를 향해 톡톡 튀는 목소리로 말했다. “꼬선생님, 태일이 춤 연습에 미쳐 저녁 못 먹었을 텐데 부를까요?” “그……” “안 돼!” ‘그래’라고 흔쾌히 외치려는 순간 도혁이의 목소리가 내 말을 자르고서 집안을 크게 울렸다. 커다란 소리침에 깜짝 놀랐다. 씩씩거리는 김도혁을 보고 주한비는 재미있다는 낄낄거렸다.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도혁이를 바라보았다. 제기랄, 먹는데 정신이 산만해졌다. 그런데 이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최하운은 경지에 이른 듯 혼자서 삼겹살의 세계에 깊이 빠져있었다. 어찌 보면 나보다 더 대단한 녀석이다. 그 때 주한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도혁이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그러면 왜 김도혁은 선생님 집에 있는 거죠?” 그 말에 김도혁과 나는 순간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당황한 얼굴로 아무 말 못하고 입을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던 김도혁은 애써 잘 세운 머리를 헝클며 박차고 나갔다. 항상 녀석은 위기에 처했을 때 뒤꽁무니를 뺐다. 그나저나 저 놈의 성질머리를 어떻게 잡아야 할까.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궁금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한비에게 말했다. “어서 먹어.” “네!” 단순한 건지는 몰라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은 듯 녀석은 나의 말에 다시 먹는데 열을 쏟았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최하운과 함께 깨끗이 뒷정리를 다하고 나서 뻐근한 몸을 주무르며 나오니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깔깔 거리는 한비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의 뻔뻔한 모습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배불리 얻어먹고서도 아직까지 왜 안 간 것인지. 나는 녀석을 향해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야, 너 왜 안가.” “선생님이 원하시는 강태일 이상형 정보를 말씀드리지 않아서요.” “아!” 난 그 말에 눈을 반짝이며 재빨리 메모지와 볼펜을 챙겨두고 한비의 옆에 앉았다. 그 중요한 사실을 깜박 잊을 뻔했다. 필기할 자세를 마치고 녀석을 바라보자, 주한비는 이름 모를 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뗐다. “강태일의 이상형 그게 무엇이냐!” 침을 꿀꺽 삼켰다. “강태일은 말이죠. 키 크고 날씬하며 몸매가 예술인 섹시한 여자를 좋아해요.” 그러면서 ‘우-’라고 뱉으며 야릇한 표정을 짓는 주한비. 그 말에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다. 나하고는 전혀 맞지 않은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설령 만들어낸다 해도 내겐 무리인 모습이었다. 조그만 키에 어린 얼굴과 유아형 체형. 섹시라고는 눈 크게 뜨고도 찾아볼 수 없는 나였다. 절망의 늪에 허우적 거리고있을 때 최하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누구랑 전혀 반대네.” 놀리 듯 말하는 그의 말에 휙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는 피식피식 웃더니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나는 간다. 뭐, 힘들 것 같지만 어쨌든 영계 잘 꼬셔봐라.” “오냐!” 신발을 신고서 손을 흔들며 최하운은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그의 모습을 투덜거리며 지켜보던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한비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싫어하는 여자는 어떻게 돼?” “음. 덤벙거리고 칠칠 맞는 여자를 싫어하죠. 그리고 너무 들이대는 여자도 싫어해요.” ‘들이대는’을 특별히 강조하는 주한비. 지금껏 쉴 새 없이 강태일에게 들이댔던 나였다. 이런, 맙소사. 기분이 착잡해졌다. 하지만 이상형은 이상형뿐이라고 하지 않는가. 대부분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과 사귀는 건 드물었다. 그래, 희망을 갖자. 혼자 마음을 추스르며 다잡고 있을 때 어느새 젠가를 발견한 녀석이 신난 얼굴로 나를 향해 외쳤다. “꼬선생님! 저랑 게임해요!” “귀찮아. 얼른 집에 가.” “내기, 내기 어때요? 선생님이 이기면 강태일과 데이트시켜주죠!” 무심히 넘기려던 녀석의 말속에서 ‘강태일과 데이트’라는 소리가 들려오자 귀가 활짝 열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보자 한비는 나무 블록 하나를 흔들며 히죽 웃었다. 강태일과 데이트. 강태일과 데이트. 이 말이 머릿속에 쉴 새 없이 파도쳤다. 나는 주먹을 쥐고서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녀석의 제안에 응했다. “좋아!” “그럼 제가 이길 시에는 교생실습 기간 동안 바나나 우유 사주기!” 그 말에 순간 흠칫했다. 돈에 대해서는 약했던 나였다. 잠시 난 고민했다. 그러다 난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녀석에게 덧붙여 말했다. “만약에 내가 이겼는데, 원하는 것을 못 이루어줄 시 넌 네 예쁜 애인이랑 헤어지기.” “그럴 리는 절대 없죠! 자, 합시다!” 우리 두 사람의 눈에는 불꽃이 번쩍번쩍 튀었다. 한비가 나무 블록을 꺼내 탑을 쌓기 시작했다. 총 54개의 나무 블록을 3개씩 나누어 1층부터 18층까지 쌓았다. 탑을 쌓고 나서 우리는 가위 바위 보를 했다. 나는 주먹. 녀석은 가위.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다. 먼저 게임을 시작한 나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나무 블록 하나를 빼내 위층에 쌓았다. 그렇게 우리는 번갈아가며 나무 블록 조심스레 빼내고 빼내며 위층에 쌓기 시작했다. 한 참 동안 서로의 차례가 오고 갔고 어느새 탑은 위태로운 상태가 되었다. 탑은 피사의 사탑처럼 살짝 기울어졌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모습에 식은땀이 흘렀다. 거실 안은 숨 막힌 공기가 흐르며 긴장감이 가득 조성되었다. 아슬아슬하게 성공을 하고 또 다시 주한비의 차례. 주한비는 조심스레 손을 갖다 대는데 탑이 흔들렸다. 순간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지는 녀석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이제 이 탑은 수명이 다한 듯싶었다. 역시나 블록을 빼려고 조심스레 손을 뻗자마자 우르르 무너지는 나무 탑.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아싸!” 나는 자리에 일어나 데굴데굴 바닥에 구르며 승리의 세레모니를 취했다. 폴짝폴짝 뛰며 환호성을 지르는 나.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2002년 월드컵 못지않게 참으로 기뻤다. 오, 신이시여! 그와 반대로 주한비는 바닥에 널브러지며 죽을상이 되었다. 나는 위로의 차원에서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주었다. 어쨌든 저 김순이 강태일과의 데이트를 따냈습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주말이 시작되는 즐거운 토요일. 어느 날 보다도 김순이가 위풍당당한 날. 2학년 5반의 토요일 마지막 수업은 추선생님의 문학수업이었다. 1,2주에는 참관수업을 하기에 나는 뒤에 서서 수업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오고, 강태일의 뒷모습에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일이면 강태일과 둘이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벅찼다. 혼자서 몸을 흔들며 좋아라 하고 있을 때 추선생님의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선생님. 제 수업이 재밌나 보죠?” 어느새 아이들을 따라 나를 꼬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추선생님. 추선생님은 기쁜 얼굴로 나를 향해 물었다. 추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런데 하나같이 아이들의 모습은 지루함에 지쳐 흐리멍덩한 얼굴이었다. 아이들의 모습에 흠칫하다 나는 억지웃음을 짜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재미있습니다. 추선생님의 수업은 정말 최고네요.” 나의 아부 섞인 말에 아이들이 야유어린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런 아이들의 시선을 간단히 무시하며 추선생님께 다시 한 번 빙긋 웃음 지었다. 추선생님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짧은 머리를 긁적였다. 강자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교생실습 기간 동안 담당선생님께 잘 보어야 했다. 그 때 수업이 마쳤음을 알리는 경쾌한 소리가 교실 안을 가득 메웠다. 그 소리에 아이들은 놓았던 정신을 되돌리며 얼굴에 웃음을 슬그머니 걸었다. 추선생님은 안경을 벗고서 책을 덮으며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자, 이제 청소시간이다.깨끗이 청소해야만 종례 할 테니 열심히 하도록.” “네!” 추선생님께서 먼저 교실 밖을 나가시고, 나는 재빨리 주한비 녀석에게 다가갔다. 몰래 도망치려던 주한비는 내가 재빨리 옷깃을 꽉 잡자 울상이 되었다. “말했어?” “꼬선생님.” “강태일이랑 데이트 시켜줄래, 아니면 네가 사랑하는 애인이랑 헤어질래.” “제발, 한 번만.” “약속은 약속이다. 그리고 이 내기는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내가 눈을 부릅뜨며 말하자 그는 크게 한숨을 뱉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등을 밀어 강태일 앞으로 서게 했다 . 한비는 겁먹은 사슴의 눈망울로 나와 강태일을 번갈아 보다, 조심스레 떨리는 목소리로 강태일에게 말했다. “태일아, 잠깐만 이리 와봐.” “왜.” 한비의 뒤에 서있는 나를 보고는 녀석의 얼굴이 흐릿하게 찌푸려졌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녀석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풀이 죽은 한비에게로 옮겨졌다. 한비는 재빨리 강태일의 손목을 잡아끌며 교실 뒤편으로 데려갔다. 나도 왁자지껄 청소하는 아이들을 향해 웃어주며 슬그머니 두 사람 곁에 다가갔다. 한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친구야.” “…….” “꼬선생님과 내일 데이트 좀 해주라.” 그 말에 강태일의 얼굴이 깡통처럼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콕콕 쑤셔왔다. 나랑 데이트 하는 게 그리 싫은가. 조금은 서글퍼진다. 강태일은 흔들림 없는 어조로 단호히 말했다. “싫어.” “제발. 안 그러면 우리 애기랑 헤어지래.”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사실 너를 걸고 내기를 했어.” 한비의 말에 그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주한비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움찔했다. 그가 무시하며 그냥 가려하자 한비는 주저앉으며 강태일에게 매달렸다. “친구야, 나 좀 살려 주라.” “네가 벌린 일이야. 네가 알아서 해결해.” “나 우리 애기랑 헤어지면 죽어. 제발, 한 번만 도와줘. 다시는 너 가지고 내기 안할게. 그리고 너를 위해선 뭐든지 할게. 제발.” 아이들의 시선이 어느새 우리에게로 향했다. 눈물 콧물 쭉쭉 빼내며 사정하는 주한비. 그러게 내기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란다.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애처로워 봐줄 까도 했지만 침묵하는 강태일의 모습에 잠시 아끼기로 했다. 그 때 강태일이 작은 한 숨과 함께 주한비를 향해 말했다. “또다시 한 번만 그래 봐.” “…….” “친구고 뭐고 없어.” “응! 태일아, 고마워! 진짜 사랑해!” 벌떡 일어나 크게 손으로 하트 표를 그리며 주한비는 강태일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런 녀석을 모습을 짜증난단 얼굴로 보던 강태일은 갑자기 휙 나를 보았다. 나는 순간 겁먹어 움찔 거리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런 나를 향해 녀석은 낮지만 약간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언제요.” “응?” “언제 만나냐고요.” “아!” 그 말에 나는 손바닥을 치며, 아이들의 시선을 피해 작은 목소리로 강태일에 속삭였다. “마침 내일이 일요일이잖아. 낮 12시에 시내에 있는 분수대 앞에서 만나자. 선생님이 계획 다 짜놓을 테니 넌 그 귀한 몸만 나오면 돼.” “알았어요.” 강태일은 나의 말에 짧게 대답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나의 모습에 아이들은 한결같이 의아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나는 싱긋 웃으며 외쳤다. “자, 선생님도 청소 도와줄게! 빨리 종례하자!” 즐거운 일요일 강태일과 첫 데이트. 그를 향한 사랑의 질주는 계속된다! Chapter. 5 파란만장 데이트 上 겨우 늦게 서야 눈을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른 시각 눈이 번쩍 뜨였다. 어린 시절 소풍을 가기 전 설레었던 풋풋한 그 날처럼. 밤 새 도저히 너무나 설레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솜사탕처럼 달콤한 설렘이었다. 메말라 있던 마음에 촉촉한 단비가 내리 듯 감격스럽기도 하고 기뻤다. 오랜만에 이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안겨준 강태일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물론 이 녀석은 이 이야기를 할 직시 뚱한 표정을 지을 테지만. 혼자 히죽 웃다 시계 침의 위치를 확인 해보았다. 앞으로 데이트 까지 6시간 전이었다. 아직 충분한 시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워 후닥닥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서 거울을 슬그머니 들여다보았다. 잠을 설칠 때면 항상 다크서클이 팬더 마냥 눈 아래 가득 내려앉고 눈이 퀭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사랑의 힘은 대단했다. 다크서클은커녕 눈망울이 아주 별빛을 박아다 놓은 것처럼 초롱초롱했다. 생기가 가득한 나의 눈을 바라보며 흐뭇한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역시 강태일이었다. 그는 필시 내가 찾던 운명의 남자이며, 내가 원하던 특별한 사랑이 틀림없다. 그런 녀석을 절대 눈앞에 두고 포기할 수 없다. 교생실습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기필코 그를 내 남자로 만들고 말 것이다. 기. 필. 코. 지금까지 나 김순이는 연애횟수가 4번이었지만, 솔직히 연애라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연애들이었다. 첫 번째 남자친구는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 때 난 아무것도 모르고 어린마음에 호기심으로 같은 반 남자애와 사귀게 되었다. 헌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각 다른 중학교를 입학하면서 우리는 이별의 통보도 따로 없이 자연스레 헤어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순한 호기심으로 사귀었을 뿐, 절대 사랑이 아니었다. 두 번째 남자친구는 중학교 3학년 때로 옆 고등학교의 2살 많은 오빠와 사귀었었다. 당시 주변 친구들이 나를 극구 말렸었다. 왜냐하면 그 오빠는 소위 문제아로 이름난 사고뭉치였기 때문이다. 그 때 한 창 순정만화 속에 살던 난 반항아적인 이미지의 남자에게 빠져있었고. 내겐 콩깍지가 씌어 그저 오빠가 멋있게 보였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와 데이트 하던 중 오빠와 사이가 안 좋은 다른 학교 문제아 학생들 여럿이 몰려 왔었다. 그 중 한 녀석이 나를 붙들고는 오빠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빠는 눈치를 살피더니 안 되겠다 싶어 나를 버리고 줄행랑을 쳐버렸다. 그 순간 그동안 쌓였던 오빠의 이미지가 우르르 무너졌다. 하는 수 없이 난 재빨리 나를 붙들고 있던 사내놈을 미친개가 되어 물고서 도망쳤다. 발바리처럼 짧은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말이다. 그때가 내 생애 최고로 달린 순간이었다. 어쨌든 그날 난 그렇게 쓸쓸히 집으로 돌아왔었다. 세 번째 남자친구는 저번에도 한 번 언급했듯이 어쩌다 소개 팅으로 만난 최하운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 그 날은 노을이 무척 예뻤던 날로 기억한다. 나는 그 때 갑자기 그에게 사귀자고 말했고 최하운은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사귀게 됐으나 최하운과는 불과 열흘 만에 친구로 남기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서로가 이성을 보이지 않았으며, 서로 느꼈던 감정이 사랑보다는 우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남자친구는 대학에 들어와서 만난 테니스부 동아리 선배였다. 먼저 선배가 내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보였고, 얼마 후 멋진 이벤트와 함께 고백을 받았었다. 이벤트와 고백을 받은 건 처음이었기에, 난 순진무구하게 선배의 달콤한 말들에 속아 넘어갔다. 그런데 이 오빠는 바람기가 많았다. 항상 클럽을 학교 다니듯 다녔고, 주위에 여자들이 들끓었다. 바람피우는 걸 목격할 때마다 헤어지자 말했으나 선배는 용서를 빌었고, 나는 또 용서했었다. 계속 그 일은 반복됐다. 용서하기도 지친 어느 날 선배가 제일 친하게 지냈던 대학친구와 양다리를 걸치는 걸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 그 때 난 펑펑 울며 선배와 헤어지고 이 친구하고도 관계를 정산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소하게도 선배의 눈은 밤탱이가 되어 있었다. 이렇듯 정말 우울하게도 나에게 성공적인 연애는 단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우울해질 순 없는 것이다. 나에겐 아직 젊음이 있고 힘이 있다. 또한 내가 이루어야 할 사랑의 대상도 있다. 모든 게 나의 노력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마음 속 가득히 에너지를 충전하며 마음을 굳게 다짐했다. 화장대 위에 올려져있던 강태일 이상형 정보가 적힌 메모지를 들여다보았다. 꼭 자신의 이상형과 이루어지는 것이 사랑은 아니나, 강태일의 이상형과 근접해볼 필요는 있었다. 헌데 눈이 빠져라 보고 또 봐도 한 숨만 흘러나온다. 섹시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꿈도 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키를 늘릴 수 없다면 살이라도 빼야 했다. 당장 시급한 것이 바로 이 다이어트였다. 다이어트를 생각하니 기분이 우울해졌다. 먹는 낙으로 세상을 사는 내게 이제 한 가지의 즐거움을 맘껏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동안만 이라고 생각하며 위로했다. 내 먹는 모습마저도 예뻐 보일 수 있도록 강태일 녀석이 내게 푹 빠지게 만들면 되는 것이기에. 거울속에 비춰지는 나의 몸매를 살펴보았다. 저번보다 부쩍 더 살이 통통 오른 것 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짧은 통나무 몸매였다. 푸- 한 숨을 깊게 내쉬다 최하운의 집 열쇠를 가지고 방에서 나왔다. 최하운도 한 남자이기에 여자의 어떤 모습이 섹시한지에 대해 듣고자 나는 슬리퍼를 끌고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저번 주한비 이후 초인종을 시끄럽게 누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허나 초인종을 여러 번 누르지 않으면 아침잠이 많은 최하운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에, 서로가 가지고 있는 집 열쇠로 조용히 열고 들어가기로 했다. 조심스레 잠긴 문을 열고서 현관으로 들어섰다. 역시 꿈나라에 푹 젖어 있는 것인지 집안은 아주 조용했다. 그런데 슬리퍼를 벗고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화들짝 놀랐다. “엄마야!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바라보니 최하운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이 이른 시각에 벌써 일어나다니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동그래진 눈으로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야, 너 웬일로…” 말꼬리를 흐리며 최하운을 살펴보았다. 이 녀석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소파에 앉아 잠이 들어 있었다. 역시 그럴 리가 없지. 헌데 이상했다. 방 침대를 두고서 소파에 자고 있는 것도 그렇고, 또한 지금 옷차림새는 외출복이었다. 또한 그의 입가에는 주먹에 맞아 터진 것으로 추정되는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잠든 하운이의 얼굴을 가까이 하며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의 눈이 갑자기 번쩍 떠졌다.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 때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엉큼하긴.” “뭐, 뭐가!” 최하운의 말에 난 당혹스러워하며 몸을 뒤로 얼른 빼냈다. 생각해보니 부끄럽게도 묘한 자세였긴 했다. 잘 못 오해하면 금방이라도 녀석을 덮칠 포즈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커다래진 눈을 끔벅이며 당황하는 나를 보곤 최히운은 피식 웃더니 긴 팔을 천장을 향해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그런 녀석에게 난 혹 오해라도 했을까 못 박으며 말했다. “오, 오해하지 마. 지구상에서 모든 남자가 멸종하고 네 놈 하나만 남았다 해도 절대 안 건드릴 거니까!” “아아, 그러셔?” “그래!” “뭐, 나도 당해줄 생각도 없으니까.” 그 말과 함께 녀석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시건방진 웃음을 지어 보인다. 나는 볼을 잔뜩 부풀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선 하운이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최하운은 손으로 복어처럼 부풀어 오른 볼을 꾹 눌렀다. “그나저나 그 상처는 뭐야?” “별거 아냐.” “별거 아니라니! 싸운 거야? 누구랑? 어쩌다?” 거세게 쏟아지는 나의 물음에 하운이는 입을 꾹 다물며 시선을 회피했다. 또 말하기 싫다 이거지? 팔짱을 끼고서 뾰로통한 얼굴로 노려보자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엌으로 향했다. 나도 뒤를 졸졸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최하운은 커피를 타 마시려는 듯 찻잔을 꺼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때, 그가 무심한 말투로 물었다. “모닝커피 마실래?” “아니. 그나저나 운아, 섹시한 여자는 어때?” 말똥말똥한 눈으로 물어보자, 최하운은 막 탄 커피를 한 모금 조심스레 들이키며 힐끗 나를 보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섹시는 포기해라. 넌 절대 안 된다.” “왜!” “너한테서 섹시라고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어.” “아, 아니야! 그럼 너 지금까지 나 섹시하다고 느낀 적 한 번도, 단 한번도 없어? 아주 순간이라도?” 나의 물음에 녀석은 행동을 잠시 멈추고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난 침을 꼴깍 삼키며 최하운을 응시했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타이르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야, 생각해봐. 내가 그렇게 느꼈다면 가만히 있었겠냐?” 그 말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긴 그와 밤새 놀다가 녀석의 집에서 서슴없이 자고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약 그리했다면 이 혈기왕성한 20대의 녀석이 가만히 있을 리는 없었겠지. 그 때 최하운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따갑게 툭 쳤다. “아!” “또 이상한 상상한다.” “안했다, 뭐.” “거짓말. 너 야동 볼 때 표정인데.” “내, 내가 언제 야동 봤다고 그래!” “또 발뺌할 셈이냐? 저번에……” “알았어!”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 막으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씩씩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악의 없이 한 번 본 것 가지고, 녀석은 계속해서 틈만 나면 나를 야동순이로 몰았다. 최하운 녀석은 피식 웃더니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진한 커피 향기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 사실 먹고 싶었지만 다이어트를 위해서 참했다. 정말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곤욕스러웠다. 애써 커피를 외면하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티셔츠를 들어올리며 볼록 풍선처럼 나온 나의 똥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코선 울먹거리며 하운이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운아, 나 똥배 더 나온 것 같지 않아?” 무심한 눈길로 나의 똥배를 힐끗 보던 최하운은 갑자기 얼굴이 심각해졌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조성되고, 마른침을 삼키며 최하운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그는 턱을 쓸며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내 배를 가리켜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바른대로 말해. 누가 애 애비냐?” 저 것이 남은 심각해 죽겠는데 말도 안 되는 말장난을……. 난 뾰로통한 얼굴로 노려보다 녀석을 향해 꽥 소리 질렀다. “됐어! 너랑 얘기 안 할 거야!” “그래, 잘 생각 했다. 빨리 가라. 난 잠 좀 자야겠다.” “너 두고 봐. 나도 섹시해 질 수 있어.” “그래그래. 어디 한 번 잘 해봐라.” 씩씩거리며 녀석을 째려보다 쿵쾅쿵쾅 발소리를 크게 내며 뒤돌아 걸었다. 절대 나는 그리 되지 못한다는 걸 확신한다는 듯 비웃는 최하운의 말에 난 몹시 침통해졌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섹시함을 어필하기에 제일 인 것은 바로 노출이었다. 노출을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오늘만큼은 해야 할 듯싶었다. 잘 안 입는 짧은 초미니스커트에 가슴 라인이 도드라지는 여성스러운 티를 입었고, 이에 빼놓을 수 없는 높은 구두도 신었다. 그리고 한 듯 안 한 듯한 화장을 하는 내가 이번은 스모키 화장법으로 신경 써서 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나는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일찍 집에서 나왔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으나 기다리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생떽쥐베리님의 어린왕자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하지 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되겠지’ 강태일을 기다리며 여우가 말하는 이 행복을 한 번 알고 싶다. 두근두근 기분 좋게 뛰는 심장. 나의 양볼에는 홍조가 분홍빛으로 가득 피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약소장소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자리에 앉아 가만히 있으니 나른 한 것이 가득 쌓였던 잠이 눈가에 몰려 왔다. 자지 않기 위해 눈에 잔뜩 힘을 줘보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점차 스르르 눈이 감기며 나는 깜박 잠이 들었다. 한 참 후 천천히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멍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나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리고 재빨리 지금의 위치를 확인해 보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때 안내방송이 들려왔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 참 전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쳤기 때문이다. “아놔, 어떡해! 아저씨 세워줘요!”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이게 버스도 아니고 세워줄리 만무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곧이어 다음 정류장에서 지하철이 멈춰섰고 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후닥닥 내렸다. 1분 1초도 아까운 시간에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울먹거리며 다시 돌아가기 위해 반대편으로 향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우여곡절 끝에 약속장소에 다다른 나는 잠시 멈춰서 거칠어진 숨을 토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약속시간으로부터 벌써 30분 남짓 지나있었다. 혹 그냥 가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분수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흩뿌려지는 물주기가 햇살에 투명하게 빛이 났고, 그보다 더 빛나는 존재가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의 모습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강태일은 이어폰을 꽂고서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지나가는 사람을 눈길을 한 번쯤 잡을 정도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역시 내 남자다.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서 침을 닦으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신나는 음악소리가 이어폰 사이로 간간히 새어나왔다. 그는 내가 가까이 다가와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깊은 눈동자가 지금 어디로 향해 있는 것일까. 나는 잠시 녀석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소리치듯 말했다. “어이! 오래 기다렸지? 늦어서 진짜 미안!” 그의 까만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향했다. 그리고 나는 순간 보았다. 나를 보자마자 빨개지는 녀석의 얼굴을. 녀석은 짐짓 못 본 척 고개를 새침하게 휙 돌린다. 흐뭇한 웃음을 입에 걸고서 녀석의 어깨에 도도하게 손을 올리며 물었다. “너 방금 나 섹시하다고 느꼈지?” 나의 말에 녀석은 곧바로 정색하며 나에게서 한 걸음 떨어지더니, “아니, 쪽팔려서요.” “에이! 솔직하지 못하네!” 나의 말에 강태일은 돌 씹은 표정을 짓더니 내게서 한 발자국, 이어 두 발자국 떨어진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녀석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그는 퉁명스러운 어투로 내게 말했다. “누가 보면 다방 여자인줄 알겠네.” “뭐?” “떨어져서 걸어요. 가까이 오면 그대로 집으로 갈 테니까.” 다, 다방 여자. 그 말을 듣자마자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애써 나름 신경 쓰며 치장한 것이 마이너스 요인이 될 줄이야. 정말 목 놓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무심한 얼굴로 강태일은 먼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나는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푹푹 뱉다 멀어지는 녀석을 따라잡기 위해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는 녀석을 겨우 따라잡으며, 멀찌감치 떨어진 녀석에게 나는 크게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 “고기 사줄까?” “…….” “아니면 피자 먹을래?”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으며 대화를 하는 우리를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 사람들이 바라보았고, 결국 강태일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아무거나 먹어요.” “아무거나 가 맛있어?” 분위기를 살려보고자 건넨 이 죽일 놈의 농담에 녀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저 웃자고 한 이야기인데 오히려 그의 심신을 크게 건드린 듯싶었다. 그는 역력히 불쾌한 표정을 드러내며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애써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 피자 먹자!” 사실 이틀 전 고기를 실컷 먹었기에 내가 피자가 먹고 싶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참 게걸스럽게도 먹네요.” 무려 20분 동안 대화가 오고가지 않았을 때, 강태일이 처음로 먼저 내게 건넨 말이었다. 먼저 말을 걸어준 것은 고마웠으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다이어트 한답시고 채소 몇 개로 끼니를 때웠더니, 배고픔에 잠시 정신을 잃어버렸다. 벌써 네 조각을 먹는데 반해 녀석은 겨우 한 조각 먹고서 콜라만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피자조각을 슬그머니 내려놓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 때 녀석이 손으로 턱을 괴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 “음식은 남기면 안 되죠.” “그렇지! 그렇고 말고! 내가 지금 진짜 배부른데, 배가 터~질 것 같은데 음식을 남기면 안 되니까. 아휴, 배부르지만 할 수 없이 먹어야겠다. 너도 한 조각만이라도 더 먹으렴.” 나의 넉살스런 말에 갑자기 그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처음 보는 그의 유쾌한 웃음이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멍한 표정으로 강태일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그는 헛기침을 뱉으며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서 내 시선을 회피하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난 멍한 얼굴로 녀석의 빤히 바라보다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웃으니까……” 나의 말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나는 손을 뻗어 강태일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되게 귀엽다, 너” 그 말에 그는 내 손을 툭 쳐내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휙 돌렸다. 녀석의 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나는 쿡쿡 소리죽여 웃었다. 까칠한 녀석이 이렇게 쑥스러워 할 줄도 안다니. 정말 산삼이라도 캐낸 기분이었다. 오늘 일기장에 꼭 써야겠다. [까칠한 내 사랑 고삐리도 쑥스러워 할 줄 안다] 라고.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다음 2단계 코스는 영화관이었다. 뻔한 데이트 코스였지만, 내가 가장 선호하기도 하다. 영화관 안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주말이라서 그런지 데이트 하러 나온 연인들도 꽤 많았다. 뒤에서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껴안고 있는 연인도 있었고, 찰떡처럼 달라붙어 입을 맞추며 애정표현을 과시하는 연인도 있었다. 언제쯤이면 저런 다정한 포즈를 강태일과 짓게 될 수 있을까.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다 계속해서 핸드폰에만 신경 쓰고 있는 녀석에 물었다. “저기 있잖아.” “멜로영화는 싫어요.” 내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딱 잘라 말하는 강태일. 사실 미리 예매해둔 영화가 멜로영화였다. 나는 애써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 그렇지? 그럼 우리액션 볼까?” “그러던 지요.” 녀석 참 까칠까칠하다. 김도혁이나 최하운이 나에게 이렇게 대했으면, 사정없이 꼬집어 버렸을 것이다. 까칠한 것이 이 녀석만의 매력이기도 하기에 웃으며 넘길 뿐. “그럼 나 티켓 끊고 올게. 잠시만 기다려.” 대답조차 해주지 않는 녀석을 보며 한 숨을 작게 내쉬곤 영화 티켓을 예매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고심 끝에 영화 하나를 골라서 티켓 두장을 끊어 돌아오는데, 이게 웬걸. 강태일 옆에 어느 한 여자가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강태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스킨십을 하는 여자. 여자는 큰 키에 아주 날씬했으며, 멀리서 봐도 엄청난 미인이었다. 그런데 강태일은 싫지 않은 건지 여자의 손길에도 가만히 있었다. 나는 볼을 잔뜩 부풀리며 성큼성큼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곧이어 그들의 옆에 도착하고 나는 여자의 어깨를 노크하듯 툭툭 두드렸다. “이봐요.” 나의 말에 여자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가까이서 보니 연예인 뺨칠 정도로 정말 예쁘게 생겼다. 이거 꿀린다. 동그란 눈으로 여자가 나를 보았고, 나는 그녀의 옆에 있던 강태일의 손목을 덥석 잡아 나에게로 살짝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여자를 향해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애는 내가 찜콩한 남자거든요?” “…….” “건들지 말아요!” 나의 서슬 퍼런 말에 갑자기 여자는 크게 웃음을 내뱉는다. 절대 웃기려고 한 말이 아닌데, 그녀는 배를 잡고서 깔깔 거렸다. 난 흠칫하다 경계의 눈초리로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예쁜 얼굴과 달리 웃음이 참 경박스러웠다. 잠시 후 겨우 웃음을 멈춘 여자는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찍어내며 내게 말했다. “나는……” “…….” “태일이 누나인데요.” 그 말을 듣자마자 망치로 머리를 거세게 얹어 맞은 듯 멍해졌다. 강태일의 누나? 친누나?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넋놓고 입을 벌리고 있을 때, 강태일은 남 일 처럼 옆에서 무심하게 문자를 쓰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놓았던 정신을 차리고, 애써 방긋방긋 웃으며 강태일의 누나에게 말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역시나 태일이의 누님이시네요. 엄청난 미모입니다.” 나의 아부섞인 말에 그녀는 간드러진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호호. 고마워요. 그나저나 태일이 여자친구?” 여자친구냐는 물음에 나의 얼굴은 발그레해졌다. 그 때 강태일이 오해 말라는 듯 재빨리 대답했다. “학교 교생선생이야.” “정말? 어머, 그렇다면……” “딱 4살. 4살 많습니다. 4살 차이는 천생연분이 라죠. 허허.” 손가락 다섯 개에서 엄지손가락만 굳힌 채 4살을 가리켰다. 다행스럽게도 한 살 일찍 학교에 들어가 아직 나는 22살이었다. 한 살이라도 줄어든 것이 어디인가. 애써 방긋방긋 웃고 있을 때 갑자기 강태일의 누나가 자신의 품속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선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어머, 귀여워라!” “…….” “포동포동 귀여운 아기 돼지 같아.” 그리고선 강태일의 누나는 내 양 볼을 쭉 잡아당겼다. 난 당황스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태일은 쿡 웃었다. 녀석의 웃음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섹시한 여자로 어필해야 할 이 때에, 그리고 적지 않은 이 나이에 어린아이 취급을 당하다니. 정말 숨고 싶다. 그 때 강태일의 누나가 내 손에 쥐어있던 티켓을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 나도 이 영화 보러왔는데!” “아, 그래요?” “마침 혼자 보러와서 쓸쓸했는데 잘 됐네! 같이 보자!” “예?” “우리 귀염둥이 팝콘 사줄게!” 어느새 말을 놓은 그녀는 내 의사는 간단히 무시 한 채 나의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잡고서 끌고 갔다. 나는 뒤돌아 천천히 우리 뒤를 따라오는 강태일을 울먹이며 바라보았다. 강태일은 나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엄마만난 아기 돼지 같군.” Chapter. 6 파란만장 데이트 下 그녀는 애초에 영화 관람엔 관심이 없었던 듯 스크린을 향해야할 눈을 내게 고정시키며, 영화를 보는 내내 쉴 새 없이 내 귀에 대고 종알거렸다. 따가운 사람들의 눈총에도 그녀는 멈출 기미를 안 보였다. 참으로 두꺼운 낯짝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나는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함께 그녀의 말을 꿋꿋이 다 들어야 했다. 정말 영화를 관람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수다를 관람하는 듯싶었다. 아무튼 이야기 하는 내내 나는 그녀에 대해서 여러모로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사실 강태일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아 입이 근질거렸으나, 일단 강태일과 잘 되면 그녀는 내 시누이가 될 사람이었기에 그녀에게 점수를 따두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꽤 그녀는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차차 내 편으로 만들어 함께 강태일 사수하기에 동참시키리라.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의 이름은 강신희였고, 나이는 26살에 지금은 변호사라 하였다. 젊은 나이에 유능한 변호사가 되었다는 것 자체도 경이로웠지만, 사실 전혀 변호사 같지 않은 점에서 무척이나 놀랐다. 그리고 또한 그녀는 덧붙여 올해에 같은 변호사인 남자와 결혼식을 올릴 거라고 하였다. 아름다운 그녀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당당히 자신의 남자라 말할 수 있는 남자친구가 있는 그녀가 참으로 행복해 보여 부러웠다. 내게도 강태일을 내 남자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그 날이 언젠가는 반드시 오겠지? 부디 그 날이 하루빨리 성큼 다가왔으면 좋겠다. 강태일의 집안은 형제가 넷이며, 그 중 신희 언니는 맏딸이었으며 강태일은 막내였다. 24살의 강태일의 첫째 형은 그 유명한 아이비리그중의 하나인 예일 대학을 다니고 있으며, 21살의 둘째 형은 그토록 여자들이 선망하는 의대생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모 대학병원의 원장이었고, 어머니는 한 번쯤 텔레비전에서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디자이너셨다. 화려한 이 가족들 아래 강태일은 유명기획사에 소속된 연습생이었으며, 곧이어 데뷔하는 인기 예비 연예인인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감히 강태일은 내가 넘봐선 안 될 존재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와 나의 사이에 높다란 벽이 세워지는 느낌이었다. 얼핏 들어도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의 자식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축복받은 유전자에 빵빵한 엘리트 집안. 이럴 때 보면 세상은 조금 불공평한 듯싶기도 하다. 그런데 새로 알게 된 이 사실에 놀란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을 때, 왠지 모르게 강태일의 얼굴이 어두운 기색이었다. 스크린을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은 그 너머의 무언가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언가. 그리고 그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눈은 분노가 담긴 듯 날카로우면서도 한 편 슬픔에 잠겨있었다. 영화상영이 끝나고 신희언니와 함께 화장실에 왔다. 신희언니는 다정하게 내게 팔짱을 끼고서 물었다. “영화 정말 재미있었지?” 정말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본 것이 있어야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난 예의상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자 언니는 꺅- 소리를 지르며 또 내 얼굴을 자신의 얼굴과 비비적거렸다. 우울하게도 아기 돼지 취급은 계속해서 이어질듯 싶었다. “정말 사랑스러워. 내가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아, 아쉽다.” 그 말에 쑥스러워진 난 볼을 붉히며 가볍게 웃었다. 그러자 언니는 나를 껴안으며 방방 뛰었다. 도도하며 섹시한 도시적인 외모와 변호사라는 직업이 전혀 매지 되지 않는 언니의 성격에 나는 순간 괴리가 느껴졌다. 그런데 그 때 신희언니는 가느다란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꽉 힘주어 잡더니 나를 빤히 응시했다. 의아한 눈으로 신희언니를 바라보는데, 언니가 내게 작게 속삭였다. “우리 태일이 좋아하지?” 그 말에 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의 모습에 언니는 빙긋 포근한 웃음을 지었다. 따뜻한 누이의 정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녀석의 마음을 잡기가 쉽지는 않을 거야.”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우리 귀염둥이가 반드시 해낼 수 있으리라 믿어. 그리고……” 언니가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자,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 때 신희언니가 내 귀에 대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태일이는 약간 보수적인 면이 있어서 그런 차림 안 좋아해." “네? 아니 이상형이 섹시한 여자라고 그랬는데…….” 당황스러워하며 되묻자, 언니는 절대 아니라며 검지를 양 옆으로 흔들었다. 그러더니 우울한 낯빛으로 우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애가 나도 안 좋아하지. 흑흑.” 그 순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주한비에게 농락당한 것임을. 바가지 머리에 왕눈이인 주한비의 면상을 떠올리며 나는 복수의 칼을 갈았다. 결코 내 이 녀석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를 갈며 분노순이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을 때, 신희언니가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우리 귀염둥이는 그 자체로도 매력이니까.” 고개를 들어 신희언니를 바라보았다. 언니는 깊은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시원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태일의 닫힌 마음을 뻥 뚫어주렴." 그 말에 나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신희언니와 헤어지고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강태일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멀리서 보이는 그는 무언가를 심상치 않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심스레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그가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곳을 따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롤리팝의 리더 신유라가 주연으로 나오는 한 영화의 광고 포스터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왠지 모르지만 울고 있는 것처럼 슬픈 눈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순간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일부러 헛기침을 몇 차례 내뱉었다. 그러자 강태일은 흠칫하더니 빠르게 표정을 굳히며 나를 힐끗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내 시선을 피하며 눈을 내리깔고서 발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입을 다물고서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다, 한 번 떠보기 위해서 팔짱을 끼며 닫힌 입술을 뗐다. “우와, 역시 같은 여자가 봐도 진짜 신유라가 예쁘긴 예쁘다.” “…….” “아, 그런데 신유라가 너랑 같은 소속사지? 그럼 너 본적 있겠네?아니면 서로 알고 있는 사이? 그렇다면 많이 친해?” “시끄러워요.” 얼음장 같은 음성. 나의 물음에 녀석의 얼굴이 무섭도록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녀석의 반응만으로도 신유라는 그에게서 쉽게 넘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얼핏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 층 더욱 깊어진 눈으로 허공을 주시하는 그에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럼…… 좋아한 거니?” 나의 물음에 순간 녀석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동그랗게 힘주어 말아지는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순간 안 되겠다 싶은 나는 녀석의 어깨를 툭 치며 큰소리로 말했다. “역시 너도 남자긴 남자구나! 우리 도혁이도 죽자 살자 좋아하던데.” “…….” “요새 남자들은 저런 스타일인 가봐? 천하의 우리 까칠한 강태일님께서도 호감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야.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하자, 그는 작게 한 숨을 내쉬더니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만 나가죠.” 영화관을 빠져나온 우리는 목적을 따로 두지 않고 그저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조금 풀어지는가 싶더니 또 다시 순식간에 사이가 어색해져버렸다. 성급하게 그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이 실수 인 걸까. 조금 더 녀석이 내게 마음을 열게 된다면 녀석의 가슴 안을 억누르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어 덜어 주고 싶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거리를 두고서 아무 말 없이 시내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그런데 그 때 갑작스레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꼬선생님?” 나와 강태일은 놀란 얼굴로 걸음을 멈추고서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낯익은 2학년 5반의 아이들이었다. 그 중 유머가 많고 활발한 성격으로 친해지게 된 고봉이의 모습도 보였다. 나는 순간 당황스러움에 입이 얼어붙었다. 아이들은 우리 두 사람을 의아한 눈으로 번갈아 보았다. 울먹이며 태일이를 바라보자, 녀석은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이런, 맙소사. 일이 더 꼬여버렸다. 그 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불쑥 고봉이가 물었다. “선생님이 왜 태일이하고?” “아, 그니까 그게……” 말꼬리를 길게 흐리며 당황하는 나의 모습에 고봉이는 한 층 더욱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나를 보았다.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때 번개처럼 번쩍 하며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난 태일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아이들에게 한 층 높은 톤으로 말했다. “사실 태일이가 사고를 좀 쳤단다. 그런데 추선생님게서 오늘 일이 있으셔서 내가 대신 온 거야. 그러다 지치고 우울해진 녀석 위로차원에서 시내에 나와 밥 좀 사준 것이고.” “태일가 무슨 사고를 쳤는데요?” “태일도 프라이버시가 있으니 존중해줘야 하지 않겠니?” 나의 말에 아이들은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난 안도의 한 숨을 작게 내쉬며 강태일을 힐끔 바라보았다. 강태일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허허 웃으며 진정하라는 듯 손을 위아래로 까딱였다.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눈을 휘며 잔뜩 찌푸려진 얼굴의 녀석에게 말했다. “다음부터 잘하면 되는 거지, 뭐. 힘내.” 나의 말에 녀석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표정이 되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히죽 웃어보였다. 그런데 그 때 고봉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내게 말했다. “아, 꼬선생님 이왕 이렇게 만난 김에 우리 함께 놀아요!” “응?” “다른 애들도 몇몇 불러서 꼬선생님 교생 환영식 겸 즐거운 파티를!” 아이의 말에 난 당황했다. 환영식이고 파티고 지금 나는 강태일과 엄연히 데이트 중이었다. 단 둘이 함께 할 수 있는 오붓한 데이트가 아이들과의 파티로 변질되게 생긴 것이다. 나는 가슴으로 절규를 내지르는데 반해 강태일은 반가운 눈빛이었다. 어느새 슬금슬금 고봉이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 강태일. 우열곡절 끝에 따낸 강태일과의 데이트는 신희언니와의 만남에 이어 반 아이들까지 끼어들게 되었다. 상큼하고 달콤한 데이트를 밤새 꿈꿔왔다. 그런데 이렇게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다음 코스는 사실 노래방이었다. 좁은 공간 안에 단 둘이 달콤하고 감미로운 노래로 서로 교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환상적인 꿈은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정말 주저앉아 통곡하고 싶었다. 그런 내 맘을 전혀 알리없는 아이들은 신난 얼굴로 손을 하늘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자, 렛츠고!”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어쨌든 계획에 있었던 노래방을 단 둘이는 아니나, 아이들과 함께 오게 되었다.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달려온 주한비를 포함한 몇몇의 아이들이 함께 동참했다. 축 쳐진 어깨로 구석에 앉아 우울해 하고 있을 때, 한비가 슬그머니 내게 다가오며 속삭이듯 물었다. “어떻게 된거에요?” “다 망했다. 망했어.” “그러니까 은밀한 장소로 택하셨어야 하죠. 주말이면 애들이 시내에 쫙 깔렸는데.” 혀를 끌끌 차며 주한비는 내 잘 못을 꼬집었다. 안 그래도 후회하고 깊이 후회하고 있는데, 녀석은 옆에서 불난 집에 더욱 부채질을 했다. 그 때 난 불쑥 떠오른 생각에 얼굴을 굳히며 녀석을 휙 노려보았다. 갑작스런 나의 따가운 시선에 그는 움찔거리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왜, 왜요?” “강태일의 이상형이 쭉쭉빵빵 섹시한 여자?” “저기……” “너 죽고싶냐?” 나의 위협적인 말에 겁먹은 주한비는 두 손을 싹싹 빌며 꽃사슴의 눈망울로 나를 보더니, 나의 화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을 예감하곤 냉큼 강태일의 옆으로 도망쳤다. 나는 애써 화를 억누르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주한비 이 녀석은 지구가 멸망할 때 가장 늦게까지 살아남을 자식이었다. 길게 한 숨을 내뿜고 있을 때, 갑자기 어떤 아이가 가지고 온 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것은 다름 아닌 술이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술에 나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아이들은 환호를 지르며 마이크대고 소리를 질렀다. 가만, 이 녀석들은 미성년자잖아? 즐거워하던 아이들도 순간 나의 존재가 생각났는지 슬쩍 나의 눈치를 살폈다. “애들아.” 나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아이들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애써 표정을 감추며 천천히 쓰윽 둘러보다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은 꽉 막힌 사람이 아니야. 그래 까짓것 오늘 마시고 즐겨보자!” 나의 시원스런 말에 아이들은 환호를 지르며 ‘꼬선생’을 외쳤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벌떡 일어나 아이들의 외침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학창시절 이런 것 또한 추억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몰래 음주를 할 때의 설렘 역시 나도 가지고 있었기에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 담임선생님과 함께 방에 모여 몰래 술을 마신 것은 내게 기억이 많이 남았다. 항상 옭매이게만 하지 말고 가끔씩은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도 좋은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어느새 우울함을 떨쳐버리고 기분이 상승된 나는 웃으며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노래방비는 선생님이 다 부담할 테니 죽어라 부르고 춤춰 보자!” “와와! 꼬선생님 먼저 부르세요!” “꼬선생! 꼬선생!” 아이들이 합창하듯 다시 한 번 나를 외쳤고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에이. 주인공은 라스트야, 무조건! 기대해도 좋아.” 나의 말에 아이들은 자지러지며 까르르 웃었다. 나도 덩달아 호탕하게 웃었다. 그 때 주한비가 벌떡 자리에 일어서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 주한비님께서 먼저 화려하게 막을 열어보지.” 한비의 말에 우리는 목이 터져라 열광을 했고, 곧이어 불이 꺼지며 알록달록 조명이 방안을 맴돌았다. 그와 함께 신나는 반주가 흘러나왔다. 한비는 테이블에 올라서더니 허리를 유연하게 돌리며 골반댄스를 췄다. 남자인 주제에 가느다란 허리를 가진 녀석의 춤은 빌어먹게도 참 섹시했다. 어쨌든 좋다. 절로 흥이 났다. 그렇게 아이들과 나의 첫 번째 추억이 될 광란의 시간은 시작이 되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어느새 취기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얼마나 마시고 미친 듯이 춤을 췄는지 모르겠다. 아이들 역시 모두 발그레해진 얼굴에 눈매는 게슴츠레 술기운이 올라와 있었다. 어쨌든 분위기는 더욱 업그레이드되었다. 강태일을 제외한 아이들의 순서가 모두 지나갔고 이제 마지막인 나의 순서가 남았다. 오랜 연습생이기도 한 그는 분명 엄청난 노래 실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기에 녀석의 노래를 무척 듣고 싶었다. 허나 지금 이 순간이 따분하다는 듯 무심한 얼굴의 강태일은 맥주만 홀짝이며 절대 일어서지 않았다. 정말 심심한 녀석이었다. 결국 그의 차례는 아쉽게도 넘겨지고 나의 차례가 되었다. 열기가 더욱 달아오르고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서 나의 애창곡이자, 녀석을 유혹할 수 있을 만한 곡을 선곡했다. 그 곡은 바로 박진영의 Honey! 간드러진 여자의 뽀뽀소리로 시작해 신나는 반주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흔들 춤을 췄다. 나의 모습에 아이들은 열광하며 환호를 질렀다.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보는 아이들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은 나만의 무대였다. 그리고 녀석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유혹의 순간이었다. 곧 노래가 시작되었고, 나는 손가락으로 강태일을 짚었다. 그리고 녀석을 향해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 “그대를 처음 본 그 순간! 난 움직일 수가 없었지~ 그대 그 아름다운 모습 난 넋을 잃고야 말았지~ 그대의 아름다운 그, 그 미소가 나를 사로잡았지. Hey 거기 그래 자기 웬만하면 내게 오지~ 우리 여기에서 둘이 멋진 밤을 함께 하지. Oh Honey Oh Baby~ 어쩜 아름답기도 하지. 내게 오지 나를 믿지. 절대 후회할리 없지~” 정말 녀석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노래에 듬뿍 담겨져 있었다. 그리하여 더욱 노래에 심취해진 나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녀석에게 다가갔다. 순간 그는 움찔하며 피하려 했으니 피할 수 없다. 딱 걸린 것이다. 녀석의 얼굴은 정색되는 반면 나의 얼굴엔 웃음이 걸렸다. 나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며 다시 노래를 이었다. 녀석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있자 순간 웃음이 터질 뻔 했다. 어쨌든 좋다. “그대의 그 섹시한 눈빛! 오 나를 또 바라보았지~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난 숨을 쉴 수가 없었지. 그대야 말로 하늘이 내려주신 진정한 Honey지. 오 Hey 거기 그래 자기. 웬만하면 내게 오지. 우리 여기에서 둘이 멋진 밤을 함께 하지.Oh Honey Oh Baby 어쩜 아름답기도 하지~ 내게 오지 나를 믿지. 절대 후회할리 없지Now Everyboby party!!!” Now Everyboby party를 외친 순간 갑자기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나는 제대로 올라온 취기에 그대로 녀석에게 푹 쓰러져버렸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어지러움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눈을 천천히 떴다. 나는 누군가에게 업혀져 있었다. 누구의 등일까? 하운이? 아니다. 하운이의 향기가 아니었고, 녀석은 등은 이보다 더욱 넓었다. 그렇다면? 그 생각에 나는 번쩍 눈을 마저 다 뜨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소리쳤다. “강태일!” “왜요.” 무심코 나온 나의 커다란 외침에 녀석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혼자서 무어라 투덜거렸다. 정말 강태일이었다. 또 다시 한 번 녀석의 귀한 등에 업히게 된 것이다. 그 때 처음 만난 그 순간 처럼.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녀석의 목에 팔을 힘껏 둘렀다. 그러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녀석이 걸음을 멈추어 세우더니 소리쳤다. “아, 뭐해요! 숨 막히잖아요!” “태일아, 나 무거워?” “그걸 말이라고 해요? 힘들어 죽겠는데. 진짜 돼지 한 마리 업고 있는 것 같다고요.” “쳇. 그럼 내려줘.” 입술을 삐죽 내밀며 뾰로통한 얼굴로 말하자, 깅태일은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 나를 냉큼 내려주었다. 정말로 매너와 낭만이라곤 없는 녀석이었다. 볼을 풍선처럼 부풀리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어느새 내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구겨진 옷을 툴툴 털던 녀석은 갑작스런 나의 눈물에 흠칫했다. 어느새 닭똥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쏟아졌다. 난 녀석을 향해 소리치듯 말했다. “야, 인마! 여자한테 무겁다는 소리 하면 안 되는 거야!” 녀석은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펑펑 눈물을 쏟는 나를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물에 익숙하지 않은 듯 그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미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게 보인다는 건 정말 제대로 콩깍지가 씌었다는 걸까. 울다가 웃으면 큰일날 일이었기에, 난 애써 웃음을 참으며 다시 한 번 꽥 소리질렀다. “그리고!” “또 뭐요.” 미간에 주름이 잡히며 찡그리는 녀석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잡아당기며 발꿈치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의 예쁜 입술에 ‘쪽-’ 하고 뽀뽀했다. 순간 녀석의 동공이 커다래졌고, 난 그런 그를 보고서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내꺼!” 나 김순이는 자랑스럽게 내 것이라고 그에게 입술 도장을 찍었다. 흐뭇한 웃음으로 눈 앞의 녀석을 바라보았다. 멍해진 그의 얼굴을 보니 참 재미있었다. 입술과 함께 정신마저 내게 뺏겨버린 듯 그는 말문을 잃어버린 채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뒤편에서 크게 들려왔다. “누나!” 누가 나를 부르는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내 시야에 두 사람이 맺혔다. 김도혁은 씩씩 거리며 화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고, 최하운은 쭈그리고 앉아 무심한 얼굴로 담배를 피고 있었다. 난 반가운 그들을 향해 소리치며 달려갔다. “오~ 마이 브라더! 마이 럭키!” 비틀거리며 달려가다 결국 그들의 앞에서 벌러덩 넘어져버렸다. 아픔도 잠시 일어서려는데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그리하여 나는 그대로 스르르 눈을 감으며 바닥에서 잠이들어 버렸다. 방금 전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 말이다. Chapter. 7 강태일 VS 꽃도혁 “으악!” 침대위에서 뭉그적거리다 천천히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순간. 나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하는데, 절망스럽게도 시계침은 8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지각이다!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뛰쳐나갔다. 욕실로 들어서자마자 거울로 비치는 나의 몰골에 나는 순간 흠칫 놀랬다. 어제 외출을 나갔던 요상한 차림 그대로였고, 퉁퉁 호빵처럼 부은 얼굴에 눈 화장이 번져 기괴한 얼굴이 되었다. 정말 아무리 내 자신을 사랑하는 나이지만, 오늘 만큼은 내가 아니 창피할 수 없다. 어쨌든 자책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씻기 위해 서둘러 물을 틀었다. 콸콸 쏟아지는 물에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진 나는 재빨리 몸을 틀어 변기에 앉았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도 생리 현상은 눈치 없게 불쑥불쑥 찾아오는 구나. 시원하게 해결을 본 후, 나는 앞머리만 감는 최고단수의 센스를 선보이며(...) 대충 고양이 세수와 양치질을 마치고 빠른 시간 안에 욕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입을 잘 안 헹구었더니 치약 맛이 입안에 가득했다. 맙소사. 잔뜩 찡그린 얼굴로 쩝쩝거리며 베란다로 갔다. 베란다에 널어놓았던 빨래 중 대충 아무거나 집어 잠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입었다. 양말을 마지막으로 신으며 다음으로 나는 냉장고를 향해 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배가고프면 하루 삶이 우울한지라, 아무리 늦는 한이 있다 해도 나는 먹어야 했다. 냉장고 앞에서니 가운데에 떡하니 노란색 메모지가 붙여 있었다. 내가 늦어도 냉장고 문을 열고 갈 것이라는 것을 아는 김도혁이 붙여 논 것이었다. 거기는 간단명료하게 한 마디 적혀 있었다. [나화났음- 꽃도혁]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종이를 휙 떼어냈다. 김도혁 이 녀석 내게 무슨 불만이 생긴 것인지 몰라도, 또 내 알람을 끄고서 혼자 학교로 튀어버렸다. 이것은 A형인 그가 함께 살면서 지금껏 내게 하던 소심한 복수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퍼질러 자는 나에게 향했을 녀석의 능글맞은 웃음을 생각하니 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우라질! 정말 미워죽겠다. 녀석은 동생이 아니라 원수다, 원수. 나는 욕지거리를 몇 마디 내뱉으며 종이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골인시키고, 냉장고에서 우유와 빵을 꺼냈다. 빵의 유통기한을 확인해 보니 이틀이 지나있었지만, 워낙 면역력이 좋은 나라 별 일 없을 것으로 간단한 게 판단하며 빵을 입에 앙- 물었다. 그리고는 빵을 뜯어 먹으며 가방을 들고서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 엉망이 된 집안을 빠르게 훑어보곤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서 바빠도 잊지 말아야 할 문을 단단히 잠근 후, 껑충껑충 두 계단식 뛰어 내리며 아래층의 최하운 녀석의 집으로 향했다. 손에 들려 있던 빵을 구기다 시피 입속에 마구 집어넣고서, 재빨리 열쇠로 문을 열고 최하운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걸음을 빠르게 움직이며 하운이의 방에 들어가니, 최하운은 새하얀 침대 위에 넓은 등짝을 보이며 세상모르게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나는 입속에 있는 빵을 우물거리며 다가가 녀석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자 최하운은 인상을 쓰며 몸을 휙 돌려버린다. 참을성이 없는 난 곧바로 그의 등짝과 엉덩이를 손으로 철썩철썩 때렸다. 매운 손맛에 그는 몸을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나의 세찬 손길이 멈추지 않자, 그는 곧 버럭 소리 지르며 일어섰다. “야!” 커다란 녀석의 소리침에 순간 몹시 겁먹었다. 겁에 질린 나는 잠시 말문을 잃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녀석을 보았다. 그는 입술을 다물고서 휙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최하운이 이 세상에서 가장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잠 깨우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지금껏 내가 이렇게 그의 손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는 나였기 때문이다. 오로지 나 김순이였기 때문에. 뭐, 나 역시 먹을 데 건드리는 사람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허나 짜증은 내도 최하운만큼은 괜찮다. 왜냐하면 최하운이니까. 이렇게 우리는 서로니까 싫어하는 짓을 해도 봐주며 지내고 있다. 어쨌든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울먹거리며 최하운의 단단한 팔을 붙들었다. 운동으로 단련된 녀석의 팔에는 그가 20살 때 했던 문신이 멋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사실 그 때 같이하자고 그가 처음으로 간곡히 부탁했지만, (여기서 ‘간곡히’의 수준을 잠시 집고 넘어가자면, 녀석의 수준에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야, 같이 문신하자. 하고 싶어.’가 간곡한 것이다. 워낙 부탁을 잘 안하는 녀석이라 최하운 녀석에게는 이 정도도 놀랍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침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난 절대 주사를 맞지 않았다. 시름시름 아프다가도 병원가자고 하면 벌떡 일어나 도망치던 나였다. 그런 내가 문신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처음 무엇을 하자고 부탁한 것이라 마음은 온 몸에 용을 그려도 좋았으나, 도저히 침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몸을 나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자신 혼자 했다. 아, 이런. 이 바쁜 상황에 또 기억 속에 잠겨버렸다. 난 재빨리 정신 차리고서, 녀석의 팔을 흔들며 호들갑떨었다. “운아, 나 어떡해! 큰 일 났어!” “왜.” 하품을 하며 그가 무심한 얼굴로 되물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울먹거리며 말했다. “나 지각이야! 나 좀 오토바이 타고 학교까지 데려다 줘!” 나의 말에 졸린 눈을 비비고 있던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누어버리려 하자, 나는 자리에서 통통 뛰며 소리쳤다. “빨리, 빨리! 어떡해! 나 죽는다, 나 죽어! 하운아, 살려줘!” “아, 알았으니까 징징거리지 마.” 시끄러운 내 목소리에 귀를 막으며 그가 말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배시시 웃어보였다. 역시 내 친구가 최고다. 항상 말은 무뚝뚝하게 해도 결국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는 녀석이었다. 솔직히 녀석이 없으면 난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 순이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녀석의 옆에 빈대처럼 붙어 있을 생각이다. 아직 최하운에게는 쉿- 이건 나만의 비밀이다. 알면 녀석은 도망갈지도 모르니깐. 최하운은 자리에 일어서 벗은 상체에 검은색 티셔츠를 입었다. 녀석은 힐끔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는 투덜거렸다. “이 꼬라지로 어떻게 나가라고.” 짧게 한 숨을 뱉으며 걸려 있던 모자 하나를 꺼내 쓰는 녀석에게 나는 달라붙으며 말했다. “넌 머리가 부스스하고 츄리닝만 입었음에도 멋있어.” “…….” “얼굴과 몸매가 받쳐주니 뭐든 멋있는 거야. 역시 넌 진정한 간지남.” 그러면서 나는 동그랗게 말린 주먹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그런 나의 아부섞인 말에 녀석은 탁상 위에 올려 진 오토바이 키를 들어올리며, 살짝 미간을 좁히고선 나를 향해 말했다. “지랄한다.” 저거 또 은근히 좋으면서 튕긴다. 아주 콜라처럼 톡톡. 나는 피식 웃으며 먼저 걸음을 옮기는 녀석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밖으로 나와 내 전용 분홍 헬멧을 쓰고서 최하운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냉큼 올라탔다. 아마 이 자리는 나 이외의 여자는 한 번도 태우지 않았을 자리 일 것 이다. 이 것에 대해 나는 몹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나 아닌 다른 누군가 탄다면 아주 조금은 섭섭할지도 모른다. 까만색 헬맷을 쓰는 녀석에게 나는 온 몸에 힘을 잔뜩 주고서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만큼은.” “…….” “최고속도로 달려도 좋다.” 나의 말에 최하운은 피식 웃었다. 비웃는 웃음이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 올라타며 말했다. “그 말 후회하지 마라.” “알았어! 안 할 테니까 어서 출발이나 해. 시간 없다고!” “오케이.” 곧 그가 시동을 걸었고, 오토바이는 매끄럽게 출발했다. 혹시나 떨어져 나갈까 튼튼한 고리처럼 녀석의 단단한 허리에 팔을 두르며 꽉 껴안았다. 녀석은 작정한 듯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과잉속도를 내서 그런지 정말 믿지 못할 놀라울 시간 안에 학교에 도착했다. 잠시 겁에 질려 벌벌 떨다 눈을 뜨니 학교인 것이다. 나는 천천히 팔을 풀어내며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엄청난 속도에 정말 오줌 싸는 줄 알았다. 다리가 계속 후들후들 거린다. 그런 내 모습이 웃겨 죽겠다는 최하운이 킥킥거렸다. 순간 울컥했지만 이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은 도덕에 어긋난 짓이기에 나는 꾹 참았다. 벽 뒤에 숨어 빠르게 상황을 살펴보았다. 굳게 닫힌 교문 뒤로 학생주임 선생님이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서있는 것이 보였다. 맙소사. 아직도 안 들어가고 계시다니, 나는 울상을 지었다. 학생주임은 175cm의 커다란 키에 체육을 맡고 있는 28세의 여선생이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 까지 유도선수였으며 힘이 남자 못지않게 세다고 한다. 그리하여 여자임에도 그를 만만하게 보는 학생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으로 요새 보는 선마다 뻥뻥 차여서 기분이 아주 저기압이라고 한다. 어쩐지 요새 따라 단속을 심하게 하고, 늦게 까지 지각생을 잡더라. 특히 얼마 전은 노랗게 물든 머리의 불량 학생을 잡아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일명 바리깡(?)으로 싹 밀었던 사건은 가히 충격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독종이었다. 절대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될 선생이었다. 특히나 요새 기분이 안 좋다 하니 교생이라고 안 봐줄지도 몰랐다. 나는 길게 한 숨을 내뿜으며 하운이를 나지막하게 불렀다. “최하운.” “어.” “오랜만에 담치기 하자.” 얼마 만에 하는 담치기 인지 모른다. 이 나이에 또 이 짓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역시 삶이란 살고 보아야 할 일이다. 최하운이 얼굴을 잔뜩 구긴 채 널따란 등을 보이며 몸을 숙였고, 나는 그의 등을 발판 삼아 밟고 담에 올라섰다. 그리고 멋지게 뛰어내리며 담너머로 착지했다. 손을 툴툴 털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 일어서는 데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불길하다. 설마, 설마 하는 심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데 이게 웬 걸. “학생 잡으러 왔다가 교생 하나 잡았군.” 방망이로 손을 툭툭 두드리며 백선생님이 무심하게 말했다. 이럴 수가. 최악인 상황이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몸이 벌벌 떨려 왔다. 나는 애써 웃음 지으며 일단 백선생님께 인사를 건넸다. “조, 좋은 아침이네요.” “네, 좋은 아침이죠. 교생이 담치기 하는 꼴을 보는 이 아침이란 아주 상큼하네요.” 잔뜩 비꼬임이 묻어난 백선생님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검은 오로라가 잔뜩 뿜어져 나오는 것이 어제 또한 세차게 차였나 보다. 잘 못 걸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서 백선생님의 꾸지람을 듣고 있을 때 담 뒤로 최하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넘어갔어?” “…….” “김순이! 잘 넘어갔냐고!” 백선생님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짓으로 물었고, 나는 당황스런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이 상황을 모르는 최하운은 계속해서 나를 불렀고, 대답이 없자 걱정이 된 모양이었던지 곧이어 녀석은 멋지게 담을 넘어왔다. 툭 내 옆에 완벽하게 착지를 하고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녀석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너 왜 대답을……. 최하운은 내게 말을 하다 백선생님과 눈이 마주치자 몸이 석고상처럼 굳어져 버렸다. 그런 우리 두 사람을 한 참 동안 번갈아보던 백선생님은 한 참 후에 입을 떼었다. “자넨 누군가.” “네?” “꼬선생 애인이라도 되는 것인가.” “아, 아니요. 김순이선생님의 친구입니다. 오늘 이 녀석이 늦는 바람에 오토바이로 태우고 온 것입니다.” 하운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보았다. 백선생님의 날카로운 눈에 섬광이 번쩍이는 것을. 갑자기 백선생님은 180도로 변신을 하며 여자처럼(?) 조신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변화에 우리는 몹시나 당황했고, 그런 우리를 향해 백선생님은 발그레진 얼굴로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거기까진 참을만 했으나, 걸쭉한 목소리에서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바뀌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최하운 또한 그런 것인지 그는 딱딱하게 몸이 얼어버렸다. “아, 그렇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백주희입니다.” “아, 네. 저는 최하운입니다.” 어색하게 백선생님이 내민 손을 조심스레 잡는 최하운. 최하운의 손이 닿자마자 백선생님의 얼굴에는 노골적으로 황홀감이 차올랐다. 그 순간 나의 머릿속에는 환호가 가득 울려 퍼졌다. 살았다는 환호성. 아무래도 백선생님이 최하운에게 한 눈에 반한 모양인 것 같기 때문이다. 고로 하운이의 친구인 나를 어찌 할리는 없었다. 역시 녀석은 나의 럭키였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최하운 덕분에 무사히 백선생님의 손에서 빠져나오고, 나는 조심스레 뒷문을 열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추선생님의 수업이 오늘 1교시였기 때문이다. 나의 등장에 아이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 쏟아졌다. 나는 그들의 부담스런 시선을 받으며 허리를 숙이고 추선생님을 향해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마음 좋으신 추선생님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얼굴은 험악하게 생기셨어도, 정말 성격은 온화하고 마음은 따사로운 분이셨다. (자신에게만 이런 아량한 태도를 보인 다는 것을 모르는 순이였다.) 추선생님을 향해 감사하다고 웃으며 말하자, 추선생님은 새새식시처럼 수줍어했다. 아무리 좋으신 분이지만, 죄송스럽게 이 모습만은 도저히 바라보지 못하겠다. 애써 추선생님의 부담스런 시선을 이겨내고 있을 때, 갑자기 주한비 녀석이 소리쳤다. “선생님 어제 너무 무리하셨어요! 그렇게 병나발로 마셔대더니!” 그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저 녀석 눈치 없이 이 자리에서 저런 소리를 하다니.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녀석을 휙 노려보았다. 어제 함께한 아이들 또한 무섭게 눈빛을 번뜩이며 주한비를 노려보았다. 이들 또한 걸려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시선에 한비는 아차- 하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행동이 더 수상스럽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나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나를 추선생님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의아한 얼굴로 보았고, 나는 허허- 어색하게 너털웃음을 내뱉으며 화제를 돌리기 위해 말했다. “수, 수업 하시죠.” 추선생님은 수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곧 털어내며 수업을 계속 이어가셨다. 나는 한 숨을 길게 내뱉으며, 땀으로 가득 찬 이마를 손으로 훑어냈다. 그리고서 가슴이 어느정도 진정되자 나의 낭군님을 찾아 눈동자를 돌렸다. 고귀한 뒷자태를 찾아. 그런데 그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어제의 충격적인 기억이 머릿속에 불쑥 튀어나왔다. “헉!”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막 수업을 다시 이어가던 추선생님은 놀라며 나를 바라보셨다. 추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아이들이 이번에 의아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단 한명. 강태일을 제외하고 말이다. 나는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좌절모드를 취했다. 남녀 간에는 순서가 다 있는 법인데, 녀석의 마음을 얻기도 전 나는 녀석의 도톰한 예쁜 입술에 내 입술을 추하게 문대고 말았다. 분명 눈꼽 만치 있었던 정마저 내게서 확 떨어져 버렸을 것이다. 김순이 도대체 무슨 짓이냐, 너. 그렇게 나는 한 참 동안 울먹거리며 절망의 늪에 허우적거렸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그 후, 나는 계속해서 강태일을 피해다녔다. 도저히 지금은 마주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혹여나 그 일로 더 이상 자신에게 아는 척 하지 말라는 말을 들을까 두려웠다. 한 숨을 깊게 푹푹 내쉬며 복도의 코너를 도는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 키가 상당히 큰 녀석이었던지 내 눈은 그의 가슴에 닿아있었다. “어, 미안…….” 사과의 말을 전하며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는 순간 난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하늘이 무심하게도 강태일과 이렇게 마주치고 말았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하며 벌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강태일 녀석을 바라보았다. 나의 행동에 녀석은 짐짓 불쾌했다는 듯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뭐, 못 볼 거라도 봤나요.” “어? 아니야. 그냥…….” 횡설수설하는 나의 모습에 그의 미간이 더욱 찡그려졌고, 곧 그는 그냥 무시하려는 듯 무심히 지나쳐 가려 했다. 그 모습에 난 재빨리 그의 옷깃을 붙들며 그를 불러 세웠다. “저기!” 강태일의 건조한 시선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그런 녀석의 까만 눈동자를 잠시 들여다 보다, 마른 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제 말이야.” 별 말을 안했음에도 ‘어제’라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갑자기 녀석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지며 붉어졌다. 역시나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나는 한 숨을 깊게 내뱉다, 마음을 굳히며 말했다. “미안하다. 고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큰 죄 일터.” “…….” “그러니 내가 널 책임지겠다.” 나의 말에 갑자기 강태일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나는 나름 진지하게 말한 것인데, 이 녀석은 내가 장난하는 것으로 보이는 걸까. 뭐, 사실은 이 구실로 어떻게 해 볼까 하는 맘은 없잖아 있지만 말이다. 아주 조금. 강태일은 타오르는 나의 뜨거운 맘에 어림도 없다는 듯 차가운 음성을 툭 내뱉었다. “됐어요.” “아니, 그래도 너의 입술을……” 나의 말에 녀석은 경악하며 손으로 재빨리 내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혹 누군가 들었을 까봐 불안한 눈길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 순간. 우리의 뒤편에서 낯익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손 떼지 못할까.”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서 우리를 보고 있는 김도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갖은 똥폼을 잡고서 서있던 녀석은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내 손목을 덥석 잡으며 나를 강태일에게서 끌어냈다. 그런데 잡아당기며 김도혁이 내 손목을 놓아버려 나는 그대로 뒤로 꽈당 넘어져 버렸다. 내동댕이치듯이 말이다. 엉덩이에 싸한 통증이 느껴져 왔다. 눈물을 찔끔 달고 김도혁을 휙 노려보았다. 그런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김도혁은 강태일을 노려본 채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미안.” 저게 미안해하는 태도인가. 욕이 한 바가지 튀어나올 뻔했다. 김도혁과 강태일은 누구 하나 날 일으켜 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김도혁은 잡아먹을 듯이 강태일을 노려보고 있었고, 강태일은 그런 그가 귀찮다는 듯 한없이 무료한 얼굴이었다. 나는 서글프게 나 혼자 스스로 자리에 일어서며 엉덩이를 툭툭 털어냈다. 그리고 볼을 잔뜩 부풀리며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곧 잠시 닫혀있던 김도혁의 입술이 열렸다. “너 우리 누나한테 껄떡거리지 말랬지.” 지금 저 녀석이 뭐라고 지껄이는가. 부끄러움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난 곧 김도혁을 향해 경악하며 아니라고 두 손을 저었다. 허나 녀석은 간단하게 내 행동을 무시하며 계속해서 강태일을 쏘아보았다. 저 녀석이 나를 생각해줘서 그러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김도혁 또한 주한비 못지않게 방해하면 방해했지, 나를 위하는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김도혁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며 그를 재빨리 끌고 갔다 . 18살 건장한 청소년이 김도혁이 빠져나오려고 소리지르며 몸부림을 치지만 나의 괴력 앞에서 결국 무너졌다. 강태일은 그런 우리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곧 몸을 돌렸다. 정말 업친 데 덮친 격이다. 나를 어떻게 생각 할까. 찔끔 눈물이 나왔다. 정말 한 대 쥐어패고 싶은 이 녀석을 복도의 구석 한 편으로 데리고 왔다. 조르고 있던 팔을 풀어내자 김도혁은 캑캑 거렸다. 그런 녀석을 향해 나는 냅다 소리질렀다. “너 뭐하는 짓이야!” “아씨. 저 기생오래비 같은 새끼가 계속 누나한테 껄떡대는 데 동생이 가만히 있겠냐!” “휴.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저 녀석에게 꼬리치고 있단 말이다.” 나의 한 숨 섞인 말에 도혁이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그는 갑자기 정색한 얼굴로 내 어깨를 붙들며 소리쳤다. “뭐라고? 누나 미쳤어? 저 새끼가 뭐가 좋다고!” 김도혁은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듯 열심히 세운 자신의 머리를 마구 흩트렸다. 녀석이 왜 이렇게 강태일을 못 잡아 먹어 안달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펄쩍펄쩍 뛰는 김도혁을 향해 툭 말했다. “야, 너! 강태일이 너보다 잘생겨서 싫은거지!” 내 말에 몸을 이리저리 흔들던 김도혁이 그대로 멈추며 움찔했다.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녀석은 어렸을 때 부터 자신보다 잘생긴 애들을 무조건 경계하며 싫어했다. 이 성격을 아직도 못고치고 있었다니. 한심스러움에 혀를 내두르며 녀석을 노려보고 있을 때, 김도혁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도 그거지만.” “…….” “제가 신유라랑 사귀었다잖아. 그게 말이 돼!” 그 순간 가슴에 무언가가 쿵- 하고 크게 부딪혀 왔다. 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녀석의 말을 되물었다. “신유라라 하면 너의 그님. 롤리팝의 신유라?” 나의 물음에 김도혁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들으니 충격이었다. 멍해진 내게 김도혁은 흥분에 빨개진 얼굴로 종알거렸다. “신유라가 엄청 아깝지! 저런 기생오래비같은 놈에 신유라가 가당찮냐고! 만약에 저 녀석이 찬거라면 나 절대 용서 못 해.” “…….” “그리고 내가 사귄 것 같고 이렇게 화나지는 않아. 여러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깨지는 것이 연애사니까. 내가 화나는 것은 저번에 신유라 소개시켜달라 했다? 그런데 이 새끼가 갑자기 멱살을 잡아 올리는 거야! 헤어졌으면서, 뭐하는 행동이냐고! 다른 자식에게는 못 주겠다 이건가? 기가막혀서.” “…….” “누나, 내 말 듣고 있어? 누나!” 시끄럽게 나를 부르는 김도혁을 뒤로 한 채 뒤돌아 멍하니 걸음을 옮겼다. 신유라 그녀는 누굴까. 모든 소년들의 로망. 새하얀 천사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녀. 그리고 그런 그녀와 사귀었다던 강태일. 강태일과 신유라. 지난 번 신유라의 사진을 보는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괴로워보였고, 슬퍼보였다. 그래서 쉽게 넘겨 볼 존재가 아니란 것은 예상했었다. 강태일에게서 신유라는 무슨 존재인 것일까. 그리고 아직 잊지 못한 것 같은 그가 왜 그녀와 헤어진 것일까. 이 물음을 떠올리자 이상하게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Chapter. 8 피구왕 순이 5월의 화창한 날씨였다. 금빛 눈부신 햇살이 온 난로처럼 따뜻하게 내리 찌고, 잔잔한 바람이 깃털마냥 간지럽게 살갗을 스쳐간다. 딱 시골집 마룻바닥에서 낮잠을 자기 안성맞춤인 날이었다. 근심걱정 하나도 없었던 어린 시절. 아빠와 함께하던 그 시절. 그 날 소박하지만 내게 달콤한 낙원이었던 그 순간. 그 순간이 갑자기 문득 그리워진다. 불쑥 찾아온 낯선 그리움에 피식 웃음 지었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계속 달려온 내게 오랜만에 찾아온 향수였다. 뒤를 보지 못할 만큼 정신없이 살아왔다는 걸 새삼 느껴본다. 잠시 높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내게 갈 길이 먼 인생만큼이나 하늘은 멀리 있었다. 잔잔한 웃음을 입가에 피우며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잔뜩 그리움을 먹으며 되돌아가고 싶은 추억을 뒤로한 채 운동장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옮겼다. 눈물을 참고, 슬픔을 참고, 아픔을 참으며 걸어야 할 그 길을 향해. 오늘 2학년 5반의 6교시 수업은 젊은 여선생인데도 불구하고 학생주임을 당당히 맡고 있는 백선생님의 체육수업이었다. 백선생님은 그 날 뒤로 최하운을 한 시도 잊지 않았다. 사모하는 남정네를 가슴에 품고 있는 여인의 얼굴은 다 같은 것 같다. 최하운의 이야기를 슬쩍 꺼낼 때마다 분홍빛을 볼에 띄우는 백선생님의 모습. 그 순간은 백선생님 또한 영락없는 여자였다. 어쨌든 그리하여 백선생님은 내게 부담스럽도록 잘해주셨다. 무엇을 바라고 그러시는지 뻔히 보였으나 애써 모른 척 해야 했다. 소개팅 자리를 마련한 순간 나는 최하운에게 절교를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른 일에 다 관여해도 최하운은 여자 일에 간섭하면 몹시 역정을 냈다. 오래전 귀여워하던 후배가 최하운을 마음에 들어 하기에 소개시켜줬더니, 녀석은 무려 일주일간 나와 말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백선생님께는 송구스럽지만 보여도 안 보이는 척, 들려도 안 들리는 척 해야 했다. 지금 내가 운동장으로 향하는 것 또한 백선생님의 부름에 의해서이다. 몸으로 부대껴야(?) 한 층 더 친밀감이 형성되고, 아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며 백선생님이 자신의 체육수업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백선생님의 배려와 생각에 깊이 감동했으나, 솔직히 말해서 조금 귀찮았다. 이런 날에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창가에 기대어 앉아 꾸벅꾸벅 조는 게 제 맛이었다. 그나저나 이거 원. 나와 전혀 맞지 않은 사이즈의 체육복을 주어서 완전 힙합걸이 되었다. 그렇게 쇄골이 다 보이는 후줄근한 티셔츠의 차림으로 바지를 질질 끌며 나는 운동장 안으로 들어섰다. 나의 등장에 기본체조를 하고 있던 아이들이 행동을 멈추며, 나를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들이 띄어주자 금 새 기분이 좋아진 나는 까불며 스텝을 밟듯 걸어갔다. 그러다 결국 질질 끌리는 긴 바지에 스텝이 꼬여 벌러덩 넘어져 버렸다. 무척 아팠으나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애써 지어보이며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섰다. 아이들은 그런 내 모습에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백선생님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으셨다. 나는 그런 그들을 향해 배시시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때 이 반의 부반장으로, 예의바르고 모범적인 아이인 새롬이가 내게 걱정스러운 얼굴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선생님 그러다 몸 상하겠어요.” “응?” “우리 웃기려고 애써 몸개그 안 보여주셔도 되요.” 그 말에 난 무척 당혹스러웠다. ‘일부러’가 아니라 ‘일상’인데 말이다. 이 것을 당연히 알고 있는 주한비 녀석은 웃겨죽겠다는 듯 배를 잡고 모래바닥에 뒹굴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한비를 보다 아이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는 아이의 어깨를 괜찮다고 툭툭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부반장은 짧게 한 숨을 쉬며 작게 웃어보였다. 참 왠지 모르게 눈이 가는 아이다. “자자, 조용히 하고 이번 시간은 피구시합을 하겠다.” 백선생님의 우렁찬 목소리에 아이들은 빠른 속도로 흐트러졌던 줄을 다시 정갈하게 맞췄다. 백선생님에게 교육을 제대로 받았던 것인지 척이면 척이었다. 온 몸에 ‘질서’라는 것이 가득 배어있었다. 난 경이로운 눈으로 백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백선생님은 그런 나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어깨에 힘을 주며 경건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홀수팀, 짝수팀으로 나누고, 주장은 언제나 그렇듯 홀수팀은 강태일, 짝수팀은 주한비가 된다. 그리고 꼬선생은 주장끼리 가위바위보해서 이긴 사람이 데려가기로 한다.” 그 말에 아이들은 우우- 소리를 질렀다. 각 팀의 주장인 강태일과 주한비는 앞으로 나와 서로 마주보며 섰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차올랐다. 나는 주먹을 동그랗게 말아 쥐고서 숨죽이며 이들을 지켜보았다. 제발 강태일과 같은 편이 되었으면 좋겠다. 함께 한 마음으로, 한 몸으로 경기를 즐긴다면 더욱 가까워 질 수 있으니 말이다. 정말 주한비 따위와 한 편이 되느니 차라리 바닥에 누워 피구경기장의 선이 되겠다. 강태일을 향해 나의 모든 에너지를 실어 넣었다. 부디 강태일이여, 이겨라! “자, 시작한다.” “가위, 바위, 보!” ‘제발’이라는 나의 외침과 함께 그들은 각자 무언가를 내밀었다. 역시 이들은 재미를 알았다. 모두 주먹. 난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그 순간 다시 곧바로 제 게임이 시작됐다. “가위, 바위, 보!” 나는 재빨리 그들이 내민 손 모양을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보자마자 끄응-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럴 수가. 강태일 주먹. 주한비 보. 고로 주한비 승. 그와 함께 한 몸이 될 수 있었던 저로의 기회가 물방울처럼 펑 터지며 사라져 버렸다. 적이 되어 서로와 싸워야 하는 가슴 아픈 상황. 나는 혼자 슬픈 비애에 젖어 강태일을 바라보았다. 강태일은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 지 무심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만약 강태일과 내가 경기에서 마지막에 나란히 남는다면, 나는 도저히 강태일의 고귀한 몸에 공을 던질 수 없으니 차라리 과감히 선을 밟아버리겠노라고 다짐했다. 그 때 주한비가 손을 높이 뻗어 올리며 말했다. “버리겠습니다!” 응? 뭐라고? 나는 순간 두 귀를 의심하며 주한비를 바라보았다. 아이들 또한 동그래진 눈으로 주한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런 우리들의 시선이 즐거운지 주한비는 잠시 입을 다물고서 팔짱을 끼며 실실 웃었다. 나의 얼굴이 점차 찌푸려지고 있을 때, 주한비는 나를 향해 조소를 띄우며 말했다. “이겨도 그다지 좋지 않네요. 어쨌든 제가 이긴 것이니 제 맘대로 하겠습니다. 꼬선생님을 태일이네로 버리겠습니다. 미련 없이 버리겠습니다!” 너무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버리겠습니다.’에 강조를 하며 말하는 녀석은 곧 오만한 자세를 취했다. 나를 항상 얕잡아 보던 몇몇의 여우파가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 (저번에 삼겹살을 쏘는 조건으로 하운이가 오토바이를 끌고 교문 앞에 서있게 된 사건의 발단을 제공한 아이들이다.) 이거 혼란스럽다. 나를 강태일과 붙여주기 위해서 그런 것인지, 그저 별로 도움이 안 되며 방해가 될 것 같아 버리는 것인지. 허나 전자는 주한비의 성격상 절대 아닐 것이다. 나를 깊이 생각해 줄 만큼 그는 착하지 못했고,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쓸모없다는 게군. 게다가 정말 우울하게도 강태일 또한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이들이 나의 실력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쥐방울만한 것이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바드득 이를 갈며 온 몸에 힘을 잔뜩 주었다. 자존심이 강한 나는 무시당하는 걸 정말 싫어한다. 나에게 모욕감을 준 저 바가지 왕눈이를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 자신의 번호에 따라 홀수팀, 짝수팀으로 편을 갈라 모두 몸을 움직였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강태일의 옆에 슬며시 섰다. 어쨌든 강태일과 한 편이 되니 기분은 좋았다. 또한 반갑게도 홀수팀에는 내가 귀여워라 하는 고봉이를 비롯한 몇몇의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한 몸이 될 홀수팀의 아이들을 쓰윽- 훑어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만화 속에 피구왕 통키가 있다면 이 세상에는 피구왕 순이가 있다! 나의 전설 같은 실력을 오랜만에 장대하게 펼치리라. 그리고 나를 매몰차게 버리며 모욕을 준 주한비 녀석에게 반드시 본 때를 보여주리라.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을 단단히 했다. 그리고 이글이글 거리는 눈으로 아이들을 향해 힘주어 말했다. “애들아, 우리 팀이 반드시 이길 것이다. 선생님만 믿어라.” 보여주지 않고서는 모르겠다는 듯 아이들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보았고, 나는 그런 아이들에게 씨익- 여유로운 웃음을 선사했다. 주한비네 팀은 작전을 짜고 있는 것인지 서로 한데모여 소곤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봤자 너희는 곧 아웃이다. 곧이어 백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시합이 시작됐다. 먼저 선공을 한 주한비 팀은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자마자 내게 공을 있는 힘껏 던졌다. 시작하자마자 서로 맞받으며 나를 향해 공격을 퍼붓는 어리석은 주한비네 팀. 그들의 작전은 떨거지인 나를 먼저 아웃시키자는 것인가 보다. 망할 놈들. 녀석들의 공격적인 행동에 나는 사기가 더욱 북돋았다. 요리조리 모든 공격을 화려하게 피하며 마지막에 주한비가 던진 공을 ‘퍽’ 가슴에 안기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잡았다. 내가 공을 잡아내자 주한비의 커다란 눈은 한 층 더욱 커지며, 입은 쩍 하마처럼 벌어졌다. 아이들은 모두 감탄어린 얼굴로 나를 보았다. 다시 보았다는 모습들. 슬슬 아이들이 나의 실력을 믿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씩 웃으며 재빨리 있는 힘껏 상대팀을 향해 공을 던졌다. 무조건 던지는 것이 아니다. 계략을 써서 던져야 한다. 상체를 향해 던지면 남자애들은 웬만해선 다 잡아낸다. 그러니 팔이 쉽게 닿을 수 없는 다리 쪽을 향해 공격하는 것이 좋다. 역시나 나의 교묘한 기술로 투아웃이 나왔다. 한 아이가 먼저 다리를 맞고 그 공이 튕겨나가면서 다른 아이까지 맞춘 것이다. 우리 팀의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나에게 경이로움을 표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었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속담은 아마도 나를 위해 만들어 진 것일지도. 입가에 웃음이 쓰윽 걸린다. 그렇게 계속해서 시합은 이어졌다. 주한비네 팀은 급하게 작전을 다시 변경했다. 나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을 먼저 맞추는 것으로 말이다. 그렇게 박빙의 승부가 계속 됐다. 서로 한 명씩 한 명씩 떨어져 나갔고, 이제는 서너 명의 적은 수의 사람만이 각각 남았다. 백선생님은 재미있다는 듯 흥미로운 눈길로 시합을 바라보며, 매끄럽게 계속 진행시켰다. 우리 팀의 한 아이가 넘어지며 머리를 맞아 아웃이 되었다. 아이는 아픈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남은 우리에게 ‘화이팅’을 외쳤다. 너의 고통을 반드시 값진 승리로 이끌어 주겠노라고 나는 걱정 말라는 듯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시합이 시작되려는 찰나 나는 강태일의 앞에 떡하니 섰다. 강태일은 뭐하는 짓이냐는 얼굴로 나를 보았고,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넌 내가 지켜줄게.” 나의 호의에 녀석은 미간이 찡그려졌다. 강태일은 참으로 찡그린 모습이 매력적이다. 내가 히죽히죽 웃자 강태일은 내 얼굴을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나서지 말고, 선생님 몸이나 챙겨요.” “에이- 너도 내 실력 봤잖아! 시합이 끝날 때까지 내 너를 지켜주겠다!” 그 말과 함께 공이 힘껏 날아왔다. 그렇게 나는 강태일을 향해 날아오는 공들을 모조리 잡아내며 상대팀을 몇몇 아이들을 아웃시켰다. 그렇게 해서 각 팀에는 각각 두 사람씩 남아있었다. 홀수팀에는 강태일과 나, 짝수팀에는 주한비와 쭉 찢어진 눈의 여우파 일원 하나. 나는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서 힘이든 모양인지 거친 숨을 내뱉고 있는 주한비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어떠냐! 내 실력이! 나를 버린 것이 후회스럽지 않는가!” “버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더욱 드는데요? 괴물 꼬선생은 영 마음이 가지 않네요.” 주한비 이 녀석 힘들면서도 입만 살았다. 아마 물속에 집어넣으면 입주둥이만 밖으로 튀어오를 것이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녀석을 노려보았고, 녀석은 쏙 혀를 내밀었다. 그와 함께 다시 시합은 시작됐다. 그런데 주한비 때문에 방심한 사이 강태일에게 공이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안 돼! 나는 소리 지르며 날다시피 강태일의 앞을 향해 뛰어올랐다.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순간 ‘퍽’ 얼굴에 공이 정면으로 세게 부딪혔다. 나는 툭 바닥에 쓰러지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얼마나 셌던지 코뼈가 무너지는 줄 알았다. 눈물을 찔끔 달고서 천천히 손을 내리는데, 갑자기 주룩- 콧구멍에서 불쾌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손으로 코를 훔치니 새빨간 피가 잔뜩 묻어 나왔다. 코, 코피였다. 애들이 모두 시합을 중단하고 놀란 얼굴로 내게 모여들었다. 생전 한 번도 흘리지 못한 코피가 이렇게 터지다니.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코를 부여잡고 있을 때, 강태일이 내 앞에 빠르게 다가왔다. “하여간.” “…….” “나서지 말라했잖아요.”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때 강태일이 입고 있던 자신의 체육복 윗옷을 벗어 내게 내밀었다. “일단 이걸로 라도 막아요.” 나는 그 말에 눈을 둥그렇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체육복으로……. 머뭇거리는 나의 행동에 녀석은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내 손을 휙 뛰어내며 자신의 체육복을 얼굴에 묻다시피 눌렀다. 체육복이 땀 냄새가 배길 만도 한데 참으로 좋은 향기가 났다. 나는 감동어린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주변에 열기가 가득해졌다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체육복을 벗어 달라붙는 러닝셔츠 차림인 강태일의 모습에, 좋은 구경을 하게 된 여자애들이 모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남자애들은 모두 타오르는 질투심에 경계의 눈초리로 강태일을 바라보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한 아이들의 그런 시선에도 강태일은 아무렇지 않은 듯 찌푸린 얼굴로 나를 보다 천천히 자리에 일어섰다. 그나저나 녀석 정말 최하운 못지않게 몸의 근육들이 바르게 잡혔구나. 괜스레 얼굴이 빨개진다. 그 때 백선생님이 흐트러진 경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해 소리치듯 말했다. “자자, 어쨌든 꼬선생은 아웃이니 경기는 계속 이어간다. 꼬선생은 침 흘리고 있지만 말고 가서 얼른 씻어라. 보기 흉하다.” 그 말에 나는 볼을 풍선처럼 부풀리며 백선생님을 뾰로통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백선생님은 주먹을 내세우며 눈을 부릅떴고, 약육강식을 잘 아는 나는 재빨리 꼬리를 내리며 일어서 수돗가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코피가 멈추고 깨끗이 씻고 오자 경기는 끝나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각자 바닥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코끝을 문지르며 모래를 모아 산을 만들고 있는 고봉이의 옆에 다가가 넌지시 물었다. “누가 이겼어?” “우리 팀이요!” “와, 진짜!” 아주 제대로 공을 맞아 코피까지 쏟긴 했으나, 일단 이겼으니 기분이 좋았다. 어느정도 피구왕 순이의 자존심이 회복되는 듯하다. 펄쩍펄쩍 뛰며 좋아하다 고봉이가 만든 모래 산 을 밟아 무너뜨려 사과를 하고 있을 때,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구석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울 것 같은 얼굴의 한 아이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 아이는 얼굴정면에 명중시켜 나를 코피 흘리게 한 장본인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다시 모래를 끌어 모으는 고봉이를 향해 물었다. “저 친구 왜 저러고 있는 거니?” “아, 강태일이 던진 공에 맞았거든요. 그것도 엄청 세게. 무슨 폭탄이 날라 가는 줄 알았어요. 진짜 얼마나 셌던지 소리도 굉장했다니까요!” 고봉이의 말에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태일을 바라보았다. 물을 마시던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거렸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자 그는 곧 얼굴을 붉히며 새침하게 고개를 휙 돌렸다. 혹시 일부러 그런 것일까?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기뻤다. 혹 조금은 아주 조금은 기대해도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나는 싱긋 웃으며 강태일 녀석을 향해 소리쳤다. “체육복 깨끗이 빨아다 줄 게!” 오늘 일기장에 꼭 써야겠다. 까칠한 내 사랑 고삐리 무심하지만 은근히 나를 생각해 준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기말고사 시험문제 출제로 골머리를 앓고 계신 추선생님을 돕고자 내일 수업에 쓸 보충자료를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하루를 마무리 짓는 교생일지를 쓰고서 뒤늦게 퇴근을 했다. 가방을 들고 폴짝폴짝 뛰며 걸어가는데, 커다란 박스를 들고서 뒤뚱뒤뚱 걸어가는 부반장의 뒷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부반장을 부르려 입을 열려는 찰나, 꽈당 큰 소리와 함께 넘어지는 부반장. 박스 안에 있던 공들이 사방으로 퉁퉁 튕겨나갔다. 나는 깜짝 놀라며 후닥닥 부반장에게 뛰어갔다. “괜찮니?”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세워주며 묻자, 부반장은 애써 아픔을 집어삼키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아이도 넘어지는 나를 보며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인가 보다. 코가 시큰시큰. 앞으로 아이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주위를 살피며 조심히 걸어야겠다. 나는 재빨리 사방으로 흩어져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공들을 회수해 박스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런 내게 부반장은 살짝 웃음 지으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에이, 뭐 이런 걸 가지고.” 쑥스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나의 모습을 보고 부반장은 갑자기 풋 웃었다. ‘순간 아이도 이렇게 웃을 수 있구나.’하는 놀라움이 찾아왔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자 부반장은 당황하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아니야, 아니야.” “어쨌든 정말 감사합니다!” 부반장은 내게서 박스를 받으며, 다시 한 번 내게 고개 꾸벅이곤 몸을 돌렸다. 그런데 아픈 것인지 고운 얼굴이 찡그려졌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안되겠다 싶어 재빨리 다가가 아이의 손에서 박스를 가져갔다. “안 되겠다. 선생님이 갖다 놓고 올 게.” “아, 죄송해요. 집에 가시는 길 같은데…….” “괜찮아, 괜찮아! 집에 가면 할 것도 없어! 시간 많아!” “아, 그럼 부탁드릴게요. 아 가방 제게 주세요. 제가 맡고 있을게요.” “그럴래?” 손목에 끼어두었던 가방을 아이에게 건넸다. 그리고서 나는 미안한 얼굴로 나를 보는 아이에게 금방 오겠다고 말하며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참 왠지 모르게 보살펴 주고 싶은 아이다. 창고 안으로 들어가 공이 잔뜩 있는 곳에 박스를 내려놓았다. 땀이 흐르지도 않았는데, 손으로 이마를 쓸며 나는 짧게 한 숨을 토했다.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이래야지 무언가 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손을 탈탈 털며 몸을 돌리려는 순간, 갑자기 철커덩 창고 문이 잠겼다. 나는 깜짝 놀라며 재빠르게 문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서 손을 뻗어 문을 열어보는데 이게 웬걸. 문이 잠겨 있었다. 누군가 사람이 있는지 모르고 잠가 버린 듯싶었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굳게 닫힌 문을 흔들고 발로 찼다. 그렇게 한 참을 발로 쾅쾅 차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부스럭 기척이 들렸다. “꺄악!” 나는 재빨리 문에 달라붙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거린다. 뭐일까? 귀신? 쥐? 뒤죽박죽 혼란스러움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지만 부드러운 음성. “뭐하는 거예요.” 나는 그 목소리에 재빨리 몸을 틀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강태일이었다. 강태일은 잠결에 무겁게 내려앉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주면에서 일명 광채가 일어났다. 깜깜한 미로 속에서 나는 커다란 빛을 만나게 된 것이다. 침을 꼴깍 삼키며 재빠르게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지금 창고 문이 닫혀버렸다. 그런데 이 안에 강태일이 있었다. 고로 오늘 밤 강태일과 나는 단둘이 창고에 갇히게 된다. 단둘이 창고에 갇혔다는 건……. 절로 음흉한 웃음이 입가에 새어 나왔다. 녀석은 살짝 감긴 눈으로 몸을 삐딱하게 세우며 그런 나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자주 일어나던 이 상황! 반드시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관계가 형성되던 이 상황! 이런 좋은 기회가 이렇게 찾아올 줄 몰랐다. 역시나 신도 내 사랑을 응원해주는 것인가 보다. 오, 신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Chapter. 9 한 발자국 다가서기 “어떡해, 문이 갑자기 잠겨 버렸어.” 기쁨을 감추고 울상을 지으며 말하자, 잠결에 멍했던 녀석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나는 문을 발로 뻥뻥 차며 녀석에게 잠긴 것을 계속 강조했고, 그는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혼잣말로 말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리고선 그는 일어서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쓰윽 나를 한 번 스쳐보고는 문을 향해 손을 뻗는 강태일. 철컹철컹. 굳게 문이 닫혀 있다는 걸 몸소 확인하게 되자, 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일그러졌다. 갑자기 살벌해진 그의 모습에 나는 깜짝 놀랐다. 혹 나와 단 둘이 갇혀 있는 게 몹시 싫어서 일까 하는 소심한 생각도 들었다. 잔뜩 움츠러들어 힐끔힐끔 녀석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그가 내게 툭 물었다.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응? 아 그게 부반장이 복도에서 넘어져 다쳐서, 내가 대신 저거 갖다 놓고 가려고.” 나는 방금 전 놓아둔 공이 담긴 박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강태일은 내 손끝을 따라 바라보다, 재차 확인 하듯 날이 선 어조로 되물었다. “부반장이요?” “응, 왜 그래?” “이 창고 한비하고 나의 연습공간이기도 해요. 학교에서 허락 받고 잘 관리 하겠다는 조건으로요. 그러니 이 창고는 따로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요. 즉 누군가 일부러 선생님을 갇혀 놓기 위해 문을 잠근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서 그는 얼굴을 굳히며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곧 나는 그가 어렵지 않게 무엇을 생각하는지 떠오를 수 있었다. 그 생각을 엿본 나는 마음에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그 아이가 일부러 그랬을 리가 없다. 서로 알 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나 느낌이 있다. 무시할 수 없는 느낌은 그 아이가 그랬을리 없다고 소리치고 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양 옆으로 세차게 저으며 힘주어 말했다. “아니야. 걔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니야.” “…….” “믿을 수 있어.” “하긴. 그렇게 보이지는 않죠.” 그는 내 말에 쉽게 수긍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선 그는 굳게 잠긴 문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강태일은 몹시 화가 난 듯싶었다. 혹 누군가 정말로 일부러 그랬다면 그 사람은 잡히는 순간 무사하지 못하리라. 어쨌든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슬쩍 녀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이쿠, 그럼 하는 수 없이 우리 누군가 나타날 때까지 함께 있어야겠구나.” 음흉한 속셈을 품으며 말하자, 갑자기 강태일은 무표정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럴 수가. 달콤한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어째 일이 잘 풀린다 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좌절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험한 말이 옆에서 살벌하게 들려왔다. “씨발.” 요…욕?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드니, 강태일은 구겨진 얼굴로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녀석의 핸드폰은 베터리의 수명이 다하여 꺼져 있던 것이다. 희비가 계속 장난하듯 들락날락 거린다. 살짝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나저나 저렇게 욕까지 내뱉다니. 혹 나와 같이 있기 싫어서는 아니겠지? 단순히 갇힌 게 싫어서 인 것이라고 나에게 말하고 또 말했다.(애써 위로하는 중) 강태일은 포기 했던 것인지 신경질 적으로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 넣으며 몇 발자국 걸음을 옮겨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선 벽에 몸을 기대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런 녀석을 한 참 바라보다, 발소리를 죽이며 걸음을 옮겨 조심스레 그에서 손바닥으로 세 뼘 정도 떨어져 앉았다. 그리고서 나는 녀석을 계속 힐끔 거렸다. 그 때 강태일이 눈을 감은 채 내게 툭 물었다. “뭐, 할 말 있어요?” 갑작스런 그의 물음에 흠칫했다. 눈을 감아도 다 보이는 것인가.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계속 그 자세였다. 나는 더듬거리며 녀석의 물음에 답했다. “아니, 그냥. 대놓고 보면 싫어할 것 같아서.” 나의 말에 갑자기 그가 상체를 아래로 굽히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활기찬 웃음에 쑥스러워진 난 발그레해진 얼굴로 손을 만지작거렸다. 곧 그는 힘겹게 웃음을 집어삼키며 숙였던 몸을 올려세웠다. 그런데 녀석은 자신이 크게 웃었다는 것에 뒤늦게 놀라워했다. 그 모습에 나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웠다. 나의 웃음에 녀석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녀석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정말 열심히 하나보다. 이렇게 학교에서까지 연습하려하고.” “살아남기 위해서죠.” 그는 덤덤한 얼굴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짧은 답변이었지만 그 안에 많은 생각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다리를 가슴으로 끌어 모았다. 그 때 녀석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평평한 어조로 나를 향해 말했다. “솔직히 선생님은 선생님이란 직업이 어울리지 않아요.” 갑작스런 녀석의 말에 나는 조금 당황하며 받아쳤다. “뭐야, 나쁜 뜻이지?” “뭐 없잖아 있기도 하지만.” 녀석의 말에 뾰로통해져 입술을 삐죽 내미는데, 갑자기 녀석이 직선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무언가 어긋나 보여서 ” 쿵. 가슴속에 커다란 울림이 가득 찼다. 커다래진 동공으로 녀석을 보았고, 그는 깊은 눈동자로 나를 계속 응시했다. 숨기고 숨기던 것을 들켜버린 것만 같아 온 몸이 떨려왔다. 설마. 설마. 나는 재빨리 다시 감추기 위해 억지로 웃음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떨림을 감추며 항상 그렇듯 거짓된 어투로 말했다. “사실은 말이야.” “…….” “나 꿈이 미스코리아였어.” 나의 말에 강태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당했지만 애써 태연해 하는 녀석의 모습에 웃음이 까르르 흘러나왔다. 그 흘러나오는 웃음사이로 틈이 생겨 진심이 새어나온다. “농담이야, 농담! 그런 허황된 꿈을 꾸었을 정도로 양심 없진 않다.” “…….” “그게 아니라, 사실 난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멋진 화가가 되고 싶었지.” 하운이를 제외하고 아무도 모르는 일. 계속해서 감추어야만 했던 꿈. 버리고 버려도 그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은 계속해서 질기게 따라다닌다. 내 자신에게 소리치고 화를 내보지만, 항상 결국은 무너지며 그리워한다. 가슴이 욱신욱신 쑤신다. 나는 애써 슬픔을 삼키며 쾌활하게 말했다. “그런데 현실로는 힘들더라. 9살 때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 도혁이랑 나를 키웠어. 그렇기 때문에 집안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았지. 허리가 휘게 일하셔도 아무런 내색 안하는 엄마를 보니 도저히 이 길을 갈 수 없겠더라. 또한 엄마가 나 때문에 더 고생하는 모습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어.” “…….” “미술은 돈도 많이 들고, 성공 보장도 없으니까. 이 길은 가면 안되겠다고 체념했지.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안정적이고 선호하는 교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지.” “…….” “그나저나 큰일났네. 그렇게 보였다니, 더욱 분발해야 겠다!” 녀석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말이 없었다. 괜히 이런 꿀꿀한 이야기를 꺼넨 것 같다.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해 하다, 나는 반짝하며 녀석에게 달라붙어 말했다. “있잖아, 나 진짜 잘난 척 해도 좋을 만큼 그림 잘 그리거든? 그러니 내가 나중에 너 꼭 멋지게 그려줄게!” “됐네요.” 그는 무심히 대답하며 주머니속에 MP3를 꺼냈다. 그런 녀석의 반응에 난 굴하지 않으며 계속 이어 말했다. “나 인물화 짱 잘 그리는데! 나 고등학교 때 미술 하도 잘해서 별명이 A+의 신화였어!” 나의 뻔뻔스러운 자랑에 녀석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런 녀석의 팔을 꽉 붙들고서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꼭 그려줄게. 그러니까 하루빨리 기운 내라.” “…….” “지금은 항상 슬픈 얼굴이니까 못 그리겠어.” 나의 말에 귀로 향하던 이어폰이 허공에 우뚝 멈추었고, 웃고 있던 얼굴이 슬프게 굳어졌다. 그런 녀석의 모습을 보니 코끝이 시큰거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녀석 역시 가슴 속에 눈물이 가득하다. 이 녀석도, 최하운도, 나도 앞으로 살아가면서 조금씩 덜어갈 수 있을까. 그리고 더욱 웃을 수 있을까. 그건 아직 모를 일. 그리고 우리가 해야할 일. 반드시 이겨내야 할 일. 녀석의 팔을 붙들고 있던 손에 스르르 힘을 빼며 떼어내는데, “같이 들을래요?” 무표정으로 녀석이 말했다.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내게 이어폰 한 쪽을 내밀었다. 난 그가 내민 이어폰을 조심스레 받으며 귓구멍에 꽂았다. 가슴 설렌다. 그가 좋아하는 노래를, 그가 항상 듣고 있을 노래를 함께 공유한다는 것이. 녀석은 몸을 뒤로 빼 벽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수줍게 웃었다. 한 참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녀석의 들리지 않는 소리를 나는 아주 희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어? 문이 잠겼네. 여기 안계신가.” 노래 감상에 흠뻑 젖어 있을 때, 그 사이로 타인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나는 눈을 번쩍 뜨며 이어폰을 빼고서 벌떡 일어서 소리쳤다. “저 여기있어요! 여기에 꼬선생 있어요!” 그렇게 소리치며 재빨리 문앞에 다가갔다.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선생님이세요?” “응! 부반장이야?” “네. 계속 안 오시기에 무슨 일 있나 해서 왔어요.” “갑자기 문이 잠겨지는 바람에.” “정말요? 조금만 기다려요! 가서 사람 불러올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곧 후닥닥 뛰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거 봐, 내 느낌은 맞다니깐. 저 아이는 그럴리가 없다는 걸. 혼자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뻐하는데, 뒤에서 강태일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살짝 웃음이 어려있었다. “단 둘이 갇혀 있길 바라지 않았던가.” “그랬지.” “…….” “근데 오늘 여기까지만으로도 만족.” 나는 뒤돌아 녀석을 향해 크게 웃음지으며 말했다. “한 발자국 다가선 것 같으니까.”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대학친구들과 실습 이후 처음으로 모이게 되었다. 일주일 만에 만난 우리는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특히나 나의 이야기를 친구들은 아주 흥미롭게 들었고, 정말 나답다며 잘해보라고 격려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카페에서 실컷 수다를 떨었고, 다음으로 노래방에 가 쌓였던 스트레스를 속 시원히 풀었다. 그 렇게 4시간 동안 소리 지르고 뛰며 원 없이 논 후, 마지막으로 술을 마시러 가기 위해 우리 일행은 노래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밤하늘 위에서 거센 빗줄기가 주룩주룩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양 엄청난 기세의 빗줄기였다. 거기다 먹구름이 가득 찬 새카만 하늘 위에 갑자기 번쩍 하고 천둥번개가 쳤다. 가슴이 쿵쿵 뛴다. 예사롭지 않은 날씨에 친구들이 투덜거리며 각각 한마디씩 했다. “이 기분 좋은 날에 웬 비냐.” “그러게. 날씨 한 번 진짜 꿀꿀하네.” “빨리 택시타고 이동하자.” “저기!” 몸을 움직여 행동을 개시하려고 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재빨리 소리쳤다. 친구들은 나의 부름에 행동을 멈추며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런 친구들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 먼저 가볼게.” “왜?” “급히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깜박하고 있었어.” 나의 어색한 몸짓과 어색한 어투에 친구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그렇지만 굳이 잡지 않겠다는 듯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말에 응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친구들 역시 무어라고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을 것이다. 나중에 보자고 인사를 건넨 후, 우산을 피고 세찬 빗줄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택시를 잡아탔다. 입안에 계속 하운이의 이름이 맴돌았고, 머릿속엔 처음 보았던 그의 감춰진 모습이 가득 메워졌다. 그를 알게 된 후 3달 뒤 쯤 그 날은 한 여름이었고, 오늘처럼 무섭게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그 당시 최하운은 우리집의 아랫층이 아니라 다른 곳에 살았었다. 빌렸던 책을 가져다 주기 위해 그가 혼자 생활하는 집에 찾아갔다. 도착하고서 초인종을 여러번 눌렀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어디 나간 것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돌리려다,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에 우뚝 멈췄다. 그리고 나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돌렸었다. 그러자 문은 덜컥 열렸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무척 캄캄했다. 그 감옥같은 캄캄한 집안을 향해 그를 불렀었다. 대답이 없었다. 대답 대신 울음이 있었다. 그 서글픈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찾아갔다. 그러자 방 안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하운이가 보였다. 그 순간 하운이는 너무나 작게 보였다. 키가 아주 큰 하운이였지만, 그 순간은 내 품에 쏙 안길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는 너무나 슬퍼보였다. 그는 그렇게 어둠 속에서 잔뜩 웅크린 채로 ‘죽지마’라고 누군가에게 애타게 말하고 있었다. 죽지 말라고. 죽지 말라고. 어둠 속에서 숨 쉴 틈도 없이 말하고 있었다. 그게 처음 보았던 그 녀석의 숨겨진 모습이었다. 그 뒤에도 이런 어두운 날엔 그는 말이 없었고,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언가를 자꾸 두려워 했다. 내가 있을 때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눈을 감아도 다 보였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그의 약한 모습. 이 모습은 아마 그가 숨기고 있는 많은 비밀을 품고 있을 것이다. 택시에 내리자마자 부리나케 하운이네 집으로 뛰어갔다. 항상 갖고 다니는 그의 집열쇠로 문을 열고서 빠르게 들어갔다. 집안은 싸늘할 정도로 을씨년스러웠고 추웠다. 지금껏 보았던 같은 집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재빨리 발걸음을 움직여 녀석의 방으로 들어갔다. 최하운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새우처럼 잔뜩 웅크린 채 말이다. 숨을 멈추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에 식은땀이 가득 맺혀 있었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인지 겁에 질려 있었다.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일그러진 고통이 자꾸만 새어나온다. 그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났다. 천천히 손을 뻗어 녀석의 차디찬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녀석의 얼굴이 한 층 누그러졌다. 누군가 있다는 것이, 안도가 되는 모양이었다. 꿈속에 들어갈 수 만 있다면 들어가고 싶다. 그래서 최하운의 꿈 속에 들어가 싸우고 싶었다. 그를 괴롭히는 그 무언가를 물리쳐 주고 싶었다. 이런 모습의 그를 보는 건 너무 가슴 아프다. 나는 물기어린 목소리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프지 마라.” “……,” “아프지 마라, 하운아.” 그리고서 나는 침대 옆에 무릎 꿇고 앉아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을 꽉 잡고서 침대 위로 얼굴을 묻었다. 분명 내일 일어나면 그는 나를 향해 빨개진 얼굴로 버럭 소리칠 것이다. 고맙지만 표현 못하는 녀석이니까. 그런 서툰 녀석이니까. 살짝 웃음 지으며 눈물과 함께 스르르 눈을 감았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혹시 깨지기라도 할까 봐 아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듯. 그 부드러운 손길에 웃음이 났다. 그리고 나는 곧 눈을 번쩍 떴다. 최하운은 갑작스럽게 눈을 뜬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곧 내 얼굴 위에 있던 손을 재빨리 떼어내며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야, 너 또 왜 여기서 자! 니네 집 두고 왜 여기 오냐고.” 나는 녀석의 말에 크게 하품을 하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미리 예정된 각본을 읽듯 말이다. “네가 같이 있어 달라고 했잖아. ‘누님 제발 오늘 밤 같이 있어주세요.’ 하고 말이야.” “내가 언제!” “이게 또 오리발이네!” “네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엉큼한 년아!” “저것이, 콱! 그럼 증거를 보여주지. 내가 네가 이럴 줄 알고 미리 녹음을 했는데.” 가방에서 MP3를 꺼내는 척 하는데, 최하운은 정색하며 바로 내 행동을 저지했다. 바보 같은 녀석. 거짓말 이란 것을 모르는 걸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고맙지?” “그래, 아주 고마워 미치겠다.”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서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는 토스트 해줄 테니까 먹고 가라며 방에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가만히 조금씩 멀어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았다. 항상 그의 뒷모습을 보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나는 벌떡 자리에 일어서 그에게 뛰어갔다. 그리고 뒤에서 그를 꽉 안았다. 순간 흠칫하던 녀석은 곧 당황스런 어투로 물었다. “뭐하는 짓이냐.” “하운아.” “왜.” “도망가지 마라.” “…….” “자꾸 숨기지 마라.” 녀석의 등에 얼굴을 깊게 묻었다. 바보같이 눈물이 난다. “그러면 지킬 수 없으니까.” “…….” “지킬 수 없으면 난 굉장히 슬퍼지니까.” “…….” “그냥 그대로 있으면 돼.” 나의 말에 한 참 동안 대답 없던 하운이는 곧 아주 작은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다가오지 않아도 돼. 다만 물러서지는 마. 그냥 그대로, 그 자리에 있어줘. 내가 다가갈 테니까. 가슴이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가 다가갈 테니까. 그럴 테니까. 제발 그 자리에만 있어줘. 내가 지킬 수 있도록. Chapter. 10 운이는 인기남 끄응- 휴지를 꼭 붙들고서 힘껏 온 힘을 주었다. 그러나 약 올리기라도 하 듯 나올 듯 말 듯 한 그 것. 슬슬 열이 오른 나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젠장. 일을 보는 것이 요즘 따라 쉽지가 않다. 장이 부쩍 안 좋아진 것인가. 자못 심각한 얼굴로 변기통에 앉아 오랫동안 씨름하고 있을 때, 갑자기 우르르 무리가 몰려오는 듯 부산스런 발걸음소리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짜증나. 어떻게 나온 거지? 누가 열어줬나? 제기랄!” “어쩌면 힘으로 부시고 나온 것일지도 몰라. 생긴 건 땅꼬마 주제 힘은 존나 세잖아!” “맞아, 맞아. 쳐 먹는 거 봐봐. 그게 사람이냐?” 저 앙칼진 목소리들을 보아하니, 필시 여우파 임이 틀림없다. 게다가 지금 하고 있는 험악한 대화내용은 왠지 나를 말하고 있는 듯싶다. 그렇다면 나를 창고 안에 가둬둔 것들이 이 여우파란 말인가. 갑자기 분노가 화산이 폭발하며 용암이 치솟아 오르듯 뻥 터졌다. 그 순간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자 나올 듯 말 듯 한 그것이 시원스레 쏟아져 나왔다. 일도 해결 했겠다, 재빨리 휴지로 닦고서 바지를 올리며 나는 문을 쾅- 거세게 열었다. “아, 씨발! 깜짝……” 인상을 쓰며 뒤돌아보던 여우파들은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난 그런 아이들에게 방긋방긋 웃으며 목소리를 잔뜩 비꼬아 말했다. “안녕, 애들아. 무슨 얘기들을 그리 심각하게 하고 있니? 선생님도 들어볼까?” 나의 물음에 여우파들은 당황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난 그런 아이들을 날이 선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아무리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는 하나 이것은 엄연히 도덕에 어긋난 행위였다. 학교에 이 사실을 알리면 분명 처벌 받아야 할 마땅한 일이였기에, 여우파들은 변명할 여지도 없이 겁을 먹었다. 그런데 자존심은 있다는 것인지 절대 잘 못했다고 용서를 빌지 않았다. 특히나 제일 찢어진 눈의 여우파 하나는 뭘 잘 했다고 나를 꼬나보는 것인가. 확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싶었으나, 교생이라는 체통을 지키기 위해 그 마음을 꾹 억눌렀다. 또한 이들이 그토록 나를 싫어하는 데에는 나의 행동에도 어떠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 번 만은 가볍게 넘어가기로 했다. 한 숨을 작게 뱉으며 여우파들을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나의 미소에 그들은 움찔거렸다. 그런 그들의 어깨를 약간의 힘을 실어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애들아, 덕분에 아주 좋은 시간 가졌다. 고맙다.” 그리고서 나는 주머니에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찢어진 눈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런 나의 행동에 여우파는 몹시 황당해했다. “선생님이 정말 고마워서 말이지. 이걸로 까까 사먹고. 또 한 번 더 그래 봐라?” 유치한 것들. 나이가 몇인데 그러한 짓을 하는 걸까. 입 꼬리를 올리고서 싱글벙글 웃는 내 모습이 더욱 무서웠던 건지 모두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런 아이들의 어깨를 한번 씩 툭툭 치며 나는 나가기에 뒤돌았다. 발걸음을 옮기려다 멈추어 세우며 휙 고개를 돌렸다. 흠칫 하는 아이들. 난 씩 웃는 얼굴로 아이들에게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아 참, 그리고 강태일 앞에선 입조심 해야 할 것 이야. 알면 너희는 꽥-” 화장실에서 나와 통통 복도를 뛰어가다, 2학년 5반 이라는 팻말이 보이자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살짝 분홍빛 미소를 지으며 저 안에 계시는 내 사랑 고삐리를 떠올렸다. 나는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교실 안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교실 안은 다음 주 중간고사 때문인지 긴장감이 흘러 있었다. 창끝 뒷자리의 강태일 역시 쉬는 시간임에도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 문제가 잘 안 풀어지는 지 녀석의 미간이 찡그려진다. 아이고, 귀여워라. 헤실헤실 웃으며 바라보고 있을 때, 강태일은 기지개를 키며 몸을 틀었다. 그러자 창가에 달라붙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재빨리 방긋 웃으며 손으로 하트모양을 만들었다. 그러자 강태일은 정색하며 창으로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나는 쩝- 입맛을 다시며 손을 내렸다. 언제 내 사랑을 받아줄꼬. 그 때 애인을 무릎에 앉혀 놓고 닭살을 떨고 있던 주한비가 내 모습을 보았던 것인지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나는 그런 한비에게 조심스레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엿을 날렸다. 그러자 주한비는 자신의 애인을 밀치며 벌떡 자리에 일어나 노발대발했다. 바닥에 푹 쓰러진 애인은 뾰로통해진 얼굴로 일어서더니 한비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깜짝 놀라며 애인을 향해 고개를 틀던 주한비는 화가 난 애인의 모습에 재빨리 용서를 빌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고소해 나는 혼자서 킥킥 웃었다. 그 때 바로 귓가에 위엄 있는 음성이 들려왔다. “뭐하시는 겁니까?” 순간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교감선생님이셨다. 그런데 교감선생님의 시선이 내 손으로 향해 있었다. 불길한 마음으로 천천히 내 손을 바라보는데, 맙소사. 미쳐 가운데 손가락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재빨리 아픈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아아, 교감선생님! 가운데 손가락이 아파요. 어제 문에 끼었더니 너무 아프네요. 호해주세요.” 나의 말에 엄숙한 교감선생님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나는 울먹거리며 가운데 손가락을 교감선생님 입 앞에 내밀었고, 교감선생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마지못해 호해주셨다. “호-” “어머! 교감선생님이 호해주시니 다 나은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교감선생님께 행여나 다시 붙잡힐까 재빨리 몸을 틀어 줄행랑을 쳤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하운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폴짝폴짝 검은 봉지를 흔들며 그의 집으로 향했다. 아마 지금까지 학교를 끝마치고, 거의 반을 내 집보다 녀석의 집으로 먼저 찾아갔을 것이다. 우리 집의 아래층인 녀석의 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춰서고, 문이 활짝 열리자마자 냉큼 내려 몸을 틀었다. 그런데 막 바닥에서 떼던 내 발이 허공에서 멈춰 섰다. 녀석의 집 앞에 한 여자가 쭈그리고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발을 내려놓으며 나는 그 여자를 재빠르게 살펴보았다. 그 여자는 호피무늬의 화려한 옷차림에 선글라스를 멋스럽게 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 화려한 차림과 달리 모습은 쭈그리고 앉아있는 것이 참 궁상맞아 보였다. 나는 슬금슬금 다가가 여자에게 불쑥 물었다. “누구신데 저의 럭키 집 앞에 이러고 있는 거요?” 갑작스런 나의 목소리에 여자는 흠칫하다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보았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잘 안보였으나,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하여 나 역시 눈을 부릅뜨며 여자를 마주보았다. 그러자 여자는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상당히 키가 컸고, 몸매는 완벽한 S라인이었다. 자신의 몸에 자신이 있는 건지 당당함이 뿜어져 나왔다. 솔직히 순간 주눅이 들었으나, 난 애써 아무렇지 앉은 척 고개를 빳빳이 세우며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런 내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여자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 뭐야?” 얼씨구. 언제 봤다고 반말인가. 나는 팔짱을 끼고서 경계를 세우며 힘주어 대답했다. “하운이 절친 인데요.” 나의 말에 갑자기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이거 기분이 상당히 나쁘다. “네가? 하- 웃기지 말고 가서 우유나 너 마시고 와.” 이 여자가 정말. 갑자기 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나는 한 발자국 여자에게 다가서며, 눈에 잔뜩 힘을 주고서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키 차이가 상당히 났던 터라 모양 빠졌지만 굴하지 않았다. 여자가 내겐 건넨 공격을 맞받아치기 위해 나는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누구신데 우리 운이 집 앞에서 이러고 있는 겁니까? 스토커입니까?” 나의 말에 여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고, 나는 비장의 무기인 하운이의 집 키를 여자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내 손에 쥐어진 집 키에 여자는 흠칫 놀랬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알 것이다.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 보다 찐한 사이랍니다. 그러니 나는 신성한 우리 운이의 집 앞에 당신같은 여자가 죽치고 앉아 있는 꼴을 볼 수가 없네요. 썩 사라지세요!” 나의 말에 여자는 불쾌해하며 언성을 높였다.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당신이 도대체 누군데!” 내가 소리치자 여자는 재빨리 선글라스를 벗었다. 선글라스로 감춰져 있던 여자의 진짜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그 여자는 다름 아닌 요새 최고의 섹시 미녀 가수인 한채원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체통을 차리지 못하고 눈을 깜박거리고 있을 때, 여자는 나의 반응이 몹시 마음에 들었던지 어깨를 으쓱이며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실제 연예인을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원래 콧대가 없는 나는 신기한 얼굴로 한 채원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저 오징어춤(몸을 베베 꼬는 춤이라서 붙여진 이름) 정말 잘 춰요!” 그리고서 난 그녀의 히트곡을 부르며 오징어 춤을 췄다. 그러자 여자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렇게 추는 게 아니야.” 그러면서 한채원은 몸소 자신의 춤을 춰보였다. 텔레비전 속에서만 보던 춤을 실제로 보니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역시나 같은 춤이라도 달랐다. 한채원은 뼈가 없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 유연했으며 관능적이고 섹시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시도했다. 그러자 한채원은 재빨리 이를 저지 했다. “야야, 하지 마. 창피하다.” 그 말에 나는 추던 춤을 우뚝 멈췄다. 역시 생긴 것도 여우파 못지않게 여우같이 생긴 것이 싸가지가 없었다. 오늘 반드시 저 여자의 안티 카페에 가입하리라. 나는 한채원을 노골적으로 훑어보며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운이는 성형한 여자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나의 말에 한채원은 뜨끔했다. 그 반응에 기가 살아난 나는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아주 과거 사진을 보니 과언이 아니던데요? 눈 했고, 코 했고, 턱 했고, 가슴 했고!” 콕콕 손가락으로 집어내며 말하자, 한채원은 몹시 당황했다. 그러다 한채원은 휙 가자미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렇게 한 참 서로 으르렁 거리며 노려보고 있을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하냐.” 그 목소리에 재빨리 뒤돌아보았다. 정말 반갑게도 헬스장에 갔다 온 것으로 보이는 하운이었다. 난 울먹거리며 빠르게 하운이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여자는 그런 나를 매서운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그런데 한채원을 향한 하운이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느껴진 것인지 한채원은 갑자기 180도로 얼굴을 바꾸며 하운에게 말했다. “하운씨. 잘못했어요. 이제 다시는 허튼 짓 안할게요. 그리니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세요. 이제 진짜 잘할 수 있어요.” “가.” “제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세요. 열심히 할게요. 난 하운씨의……” “입 다물어.” 그녀가 무어라고 말하려는 찰 나 최하운은 정색하며 입을 막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의 한채원에게 하운이는 몹시 냉정한 행동을 취했다. 지금 이들의 상황을 이해할 순 없었으나, 그의 표정으로 보아 하운이는 한채원을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하운이는 갑자기 덥석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나를 끌며 열쇠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다시 찾아오지 말라는 듯 매정하게 문을 쾅 닫는 하운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문 뒤로 들리는 한채원의 흐느낌을 향해 바라보다 하운이를 바라보았다. 하운이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뭐야?” “뭐가.” “너 한 채원이랑 사귀기라도 했어?” “미쳤냐. 아니야, 그런 거.” 말하기도 싫다는 듯 최하운은 얼굴에 짜증을 역력히 드러냈다. 왠지 유추하는 것인데, 한채원이 일방적으로 하운이를 따라다니는 듯싶었다. 잘나가는 섹시 미녀 가수인 한채원이 평범한 일반인인 최하운을 말이다. 이거 완전 특종이었다. 혼자 놀라며 입을 벌리고 있을 때, 최하운은 어느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재빨리 따라 녀석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티셔츠로 갈아입으려는 녀석의 주위를 맴돌며 킁킁 거렸다. 혹 녀석에게 페로몬이라도 뿜어져 나오는 건가 해서 말이다. 어떻게 녀석에겐 고등학교 때부터 줄 곧 여자들이 줄줄 따르는 것일까. 참으로 묘하다. 묘해. 얼굴과 머리가 잘나긴 했으나 이것만으로 이성을 꾀는데 무리가 있었다. 필시 다른 무언가가 있는데 말이다. 최하운은 나의 행동에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을 열었다. “뭐하냐.” “이상해. 성격 더럽고, 무뚝뚝하고 ,애교 없고, 매너 없는데 여자들이 왜 이렇게 졸졸 따라붙지?” 나의 물음에 그는 귀찮은 기색을 보이며 대답했다. “좋아해달란 말 한 적 없어.” “너 방금 재수 없었다는 거 알지.” “어.” 무어라고 호통 치려는 찰나 입을 꾹 다물었다. 안다니 할 말이 없었다. 아쉬었다. 녀석을 골려줄 기회였는데. 어쨌든 왜 여자들은 최하운을 좋아하는 것인가에 대한 연구를 앞으로 계속 해보아야 겠다. 그렇게 다짐하고 있을 때, 다른 티셔츠로 갈아입은 최하운은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그리고 이마 위로 손을 올리며 나에게 말했다. “피곤하다. 가라.” “맨 날 피곤하데. 너 요새 밤새며 야동보지?” “내가 너냐.” 그 말에 나는 볼을 잔뜩 부풀리며 녀석을 흘겨보았다. 그리고는 녀석의 옆에 앉으며 그를 흔들었다. “빨리 일어나! 아이스크림 사왔단 말이야!” “너 다 먹든가. 냉장고에 넣어 놓든가.” 기껏 사왔는데 무심하게 말하는 녀석의 모습에 섭섭한 나는 재빠르게 녀석의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는 녀석을 향해 목소리를 굵게 내어 말했다. “먹을래, 안 먹을래.” “무겁다.” “먹는다면 내려오지.” “까불지 말고.” “아악!” 갑자기 최하운이 뒤집어엎기 기술을 선보였다. 그리하여 이제 반대로 내가 깔리게 된 상황이었다. 씩씩거리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런 내 모습에 피식 웃으며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아픔에 아- 소리 지르며 따끔해 눈을 감았다 떴다. 최하운은 그런 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까불지 말랬지.” “너 안 내려와!” 벗어나기 위해 몸을 뒤척거려보지만 꿈쩍할 수 없었다. 역시 최하운 이 녀석도 남자라서 그런지 힘 하나는 기가 막히게 셌다. 최하운은 어디 한 번 해볼 테면 해보라는 얼굴로 나를 시건방지게 바라보았다. 뚱한 얼굴로 녀석을 노려보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누나! 여기 있어?” 문이 벌컥 열리며 등장한 사람은 김도혁이었다. 도혁이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순간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녀석은 알 수 없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 미안. 계속해~” 피식피식 웃음을 쪼개며 휙 뒤돌아 나가는 김도혁. 우리는 어처구니 없어하며 방금 까지 있었던 도혁이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말리지는 않을 망정 쌈질을 계속하란 말이냐. 철없는 것. 혀를 끌끌 차며 눈을 돌리는 순간 하운이의 눈과 마주쳤다. 서로 마주보던 우리는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며 붉게 달아올랐다. 곧 도혁이가 무슨 오해를 한 것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흐트러진 차림에 부끄럽게도 참으로 묘한 자세였다. 난 발로 재빨리 녀석을 뻥 쳤다. 그러자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최하운. 그는 아픈 지 벌떡 자리에 일서며 소리쳤다. “야!” 난 그런 그를 향해 가슴 위로 팔을 X자로 교차시키며 말했다. “하운이는 늑대래요. 아우~” 나의 말에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계속해서 늑대울음소리를 내다, 그런 녀석의 모습이 재밌어진 나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조심해야지.”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어제 우연히 창고에 찾아갔다가 아주 좋은 걸 보았다. 그것은 주한비와 강태일이 춤 연습을 하는 광경이었다. 진지한 모습으로 춤을 추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현란한 춤 솜씨에 넋을 잃어버렸다. 그들의 춤은 정말로 대단했고, 멋있었다. 역시 괜히 가수가 되려는 것은 아니었다. 주한비 또한 항상 까부는 모습만 보다 그러한 모습을 보니 새삼 다르게 보였다. 얼마 있으면 시작되는 중간고사에도 녀석들은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정말 기특했다. 그들은 열심히 노력한 만큼 반드시 값진 보답을 받을 것이다. 아침조회를 마치고 나가려다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강태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녀석의 책상위로 아침에 편의점에서 사온 초콜릿을 올렸다. 잠시 초콜릿을 향했던 그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나는 한 쪽 눈을 찡긋 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혼자서 다 먹어.” 그리고서 녀석의 듬직한 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괜스레 쑥스러워져 재빨리 몸을 돌리는 데, 옆에서 주한비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꼬선생님, 너무해요!” 나는 흠칫 놀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한비를 바라보았다. 얄미운 주한비는 일부러 크게 소리를 내며 말하고 있었다. “태일이 입만 입인가, 우리 입도 입인데. 나도 초콜릿 엄청 좋아하는데. 잘 먹을 수 있는데.” 어느새 아이들의 시선이 나와 강태일의 책상 위에 있는 초콜릿으로 향해 있었다. 아이들은 몹시 섭섭하다는 얼굴로 원성을 높였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다,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켜 말했다. “아니야, 애들아. 모두들 사주려고 했어.” “에이~” “진짜라니까. 태일이가 1번이잖아.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서 한 명씩 다음번호들 찾아오려고 했어.” 나의 말에 아이들의 귀가 솔깃해졌다. 나를 골탕 먹이려던 주한비는 정말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이 어떻게 강태일만 편애하겠니. 나 꼬선생은 2학년 5반 아이들 모두 사랑하는데.” 억지웃음을 자아내며 말하자 아이들은 아- 그렇구나 하며 그제야 서운하다던 얼굴을 풀었다. 정말 나는 임기응변에 강하다. 그나저나 예상치 못한 지출이 주한비 녀석 때문에 생겼다. 34명의 초콜릿을 사면 얼마인가. 게다가 고귀한 강태일의 입맛을 맞취기 위해 비싼 초콜릿을 샀었다. 갑작스런 지출을 생각하자 가슴이 쓰라렸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방송이 울렸다. 곧이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아, 나는 2학년 5반의 향기로운 남자 꽃도혁이다.” 방송에서 도혁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아이들은 모두 놀랐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서로를 말 없이 쳐다보는 아이들은 곧 도혁이의 방송에 귀기울였다. 지금 저 자식이 미친 것일까. 창피함에 내가 다 얼굴이 붉어졌다. 차마 아이들을 마주할 수 없어 재빨리 걸음을 돌리려는 데, 이어지는 김도혁의 말은 나를 경악케 했다. “이제야 밝히는 건데 꼬선생은 부끄럽게도 내 누님이시다.” 방송으로 울려 퍼지는 도혁이의 말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주한비와 강태일은 풋 웃었다. 반면 아이들은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나저나 구태여 부끄럽다는 말에 힘주어서 말해야 했을까.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김도혁은 계속해서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를 깔며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몇몇의 눈 낮은 놈들이 우리 누님을 좋아하는데 그 마음 지금 당장 접길 바란다. 우리 누님은 엄연히 최하운이라는 애인이 있다. 하운이 형이 몹시 아깝지만, 어쨌든 그 형과는 갈 때 까지 간 사이다. 고로 졸업을 하면 결혼 할 몸이란 것이다.” 방송에 흘러나오는 도혁이의 말에 주한비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강태일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아이들은 웅성웅성 서로 얘기를 주고 받으며 힐끔힐끔 나를 보았다. 저, 저 것이! 내 혼사길 막을 일 있나! 이들에게 뭐라고 말하려다, 일단 김도혁의 주둥이를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교실에서 뛰쳐나와 방송실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 했다. 학교 안에는 도혁이의 얼토당토 하지 않은 말들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특히! 못 생기고 건방진 K군 알아서 떨어져라. 알았냐!” 정말 내가 김도혁 이 녀석 때문에 못 산다. 엄마에게 말해 다시 시골로 보내버려야 하는 것인가. 미친 듯이 뛰어 방송실 앞에 도착한 나는 방송실 문을 열며 소리쳤다. “이 망할 놈아!” 그런데 힘빠지게 방송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잽싼 녀석은 이미 사리진 후였다. 속에서 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 이 놈을 그냥.” 욕지거리를 내뱉다 소매를 걷어 올리며 뒤도는 순간. 내 몸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백선생님께서 달려오신 건지 거친 숨을 토하며 나를 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백선생님은 차오르는 숨을 삼키며 무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꼬선생.” “네?” “시방 나 속인 거여?” 백선생님은 무척 당황하거나 화가 났을 때 사투리를 쓴 다는 것을 얼마 전부터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더욱 공포감이 몰려왔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백, 백선생님, 진정하시고. 아니에요. 이건 오해해요.” 나의 말에는 안중에도 없는 것인지 백선생님은 속았다는 생각에 성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정말 미치고 팔짝뛸 노릇 이었다.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백선생님은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모습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혀 버렸고, 백선생님은 곧이어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휙 뒤돌아 달려갔다. 그 모습에 당황하다 나는 목이 찢어져라 백선생을 부르며 재빨리 그 뒤를 쫓아갔다. 제기랄, 김도혁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산다. 못 살아!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고 이를 바드득 갈며, 뿔난 황소처럼 달려가는 백선생님의 뒤를 죽어라 짧은 다리로 쫓았다. 댓글 9개 이 글을...(0) 한없는 슬픔 너무 재밌네요~~ 08.12.05 19:34 답글 으므헤헤 정말 재밌어요!!!완결까지 꼭 볼게요~ 꼬선생너무귀여워요ㅋㅋ 09.02.07 21:03 답글 †승or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꼬선생같은언니 하운이같은친구있으면 무지하게 좋을거같다 ㅋㅋ 09.02.17 03:31 답글 prisis 진짜 재밋는데여~ ㅋㅋㅋㅋ 09.04.26 23:23 답글 컁컁이가말했다 ㅋㅋㅋㅋㅋㅋ아 순이 기여워요! 09.05.25 17:39 답글 S2HeroS2 재밋어여 09.05.28 16:05 답글 움냐하히 귀여운꼬선생 09.06.27 11:37 답글 짱구깡 재밌었요ㅋㅋ 09.06.27 14:49 답글 이 동해 아 왤케 재밌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09.07.11 01:23 답글 이전 1 다음 텍스티콘 사용 0 / 600bytes 개인정보 유출, 저작권 침해, 허위사실 유포 등의 내용은 임의 삭제되거나 관련법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텍스티콘 사용 0 / 600bytes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윗 글 : [상큼한♥] ♡허니서클(Honeysuckle) [11~20]2008.10.22 아랫글 : [수아(守娥)]※Ever Bye 00-完2008.10.05 서비스 약관/정책권리침해신고카페 신고이용약관카페 고객센터검색비공개 요청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Co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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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꼬선생.] [백선생님, 성공했어요!] [응?] [이번 주 토요일 최하운과 데이트!] [정말?] 나의 말에 백선생님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소리를 지르셨다. 엄청난 목소리였기에 고막이 깜짝 놀랐다. 따가운 귀를 만지며 백선생님의 환희를 한 참 동안 계속해서 들었다. 무진장 기쁘셨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조금은 죄송하기도 했다. 어찌됐건 되든 안 되든 이렇게 기회라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어쨌든 백선생님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뿌듯했다. 나는 기고만장해 하며 백선생님께 말했다. [하운이 걔가 보통 깐깐한 게 아니에요. 저 엄청 고생했어요.] [다 알지. 꼬선생, 정말로 고맙네. 고마워!] [고마우시면 저도 강태일과 잘되게 팍팍 밀어주세요.] [강태일? 걔도 만만치 않게 깐깐한 놈이지만 알았어. 나만 믿으라고!] [네, 믿겠습니다!] [그나저나 그 날 뭐 입고 가지? 옷을 새로 사야 하나.] 백선생님은 행복한 고민에 빠지셨다. 그 기분 나 역시 충분히 이해한다. 나 역시 얼마 전 강태일과 데이트 날에 아침 일찍 일어나 조금이라도 예쁘게 보이고 싶어 분주히 꾸몄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한비의 잘 못된 정보로 녀석에게 마이너스 요인이 되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꼬선생. 꼬선생의 힘을 받아 나 최선을 다할게.] [네! 저도 최선을 다하겠어요!]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사랑에 대해 각오를 단단히 하며, 서로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기로 하였다. 백선생님과 나는 지금 무척이나 비슷한 상황이었기에 더욱 동질감이 들었다. 잘난 연하의 남을 유혹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었다. 어쨌든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다지는 바이다. 백선생님과의 전화를 끊고서 혼자 히죽 웃었다. 일이 좋게 끝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마음이 놓여 진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 숨을 깊게 내쉬며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일을 크게 벌여 놓은 장본인인 김도혁은 한가하게 소파에 누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깔깔거리고 있었다. 나는 오늘 백선생님 뿐만 아니라 학교 측에 사과하고 일일이 아이들에게 해명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했었다. 갑자기 뒷골이 땅기며, 열이 뻗쳐올랐다. 난 현관에 있는 우산을 들며 발소리를 죽여 녀석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그런 나의 존재를 까맣게 모른 채, 개그 프로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비폭력주의자인 나였지만, 오늘 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러게 왜 매를 버느냔 말이다! “야!” 꽥 소리 지르며 녀석을 향해 우산을 내리치는데, 생쥐같이 얍삽한 김도혁은 잽싸게 몸을 굴려 바닥에 쿵 떨어지며 이를 피했다. 분노한 나 김순이는 벌게진 얼굴로 녀석에게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너 지금 아이스크림이 목구멍으로 들어가고, 텔레비전이 눈에 들어 오냐?” 나의 물음에 녀석은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콱! 내가 너 때문에 고생한 거 생각하면……” “맞는 말이잖아! 그 때 분명히!” “그 때는 무슨 그 때야. 어제 우리는 몸싸움 중이었는데!” “어쨌든 하운이 형네에서 자고오고 하잖아!” 정말 울화통이 치밀었다. 나는 소리 지르며 다시 한 번 우산을 녀석에게 내리쳤고, 녀석은 재빨리 한 바퀴 구르며 이를 면했다. 그렇게 나는 마구 공중에 우산을 휘저었고, 녀석은 요리조리 피하며 제 할 말을 다했다. “하운이 형이랑 사귀라니까. 누나 주변에 솔직히 하운이 형만한 사람 없어. 그 얼굴에, 그 머리에 잡으면 누나 팔자 피는 거라고. 나중에 땅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얼른 지금 잡으라니까!” 솔직히 80%는 동감 가는 말이었다. 최하운은 외모와 머리 모두 특출나게 잘났으니 2세의 유전자는 걱정할 것 없이 아주 우수했다. 또한 녀석은 반드시 크게 성공할 위인이었기에, 앞으로의 기나긴 미래 또한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허나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해도 떠오르는 단 하나. 우리는 친구라는 것. 나의 이기적인 욕심에 그를 붙들고 싶진 않 다. 또한 여자를 좋아하지 않으나 돌부처 같은 그의 마음에 바람을 불어 넣어줄 다른 여자가 언젠가 나타나지 않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우정에 손상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죽는 순간 뒤돌아보면 서로에게 큰 의지가 되었던 우리의 아름다운 우정을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족 못 지 않게, 연인 못 지 않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남을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최하운을. 때리는 것도 힘이 든 나는 포기하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김도혁은 그런 나를 눈치 보며 슬금슬금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방문 앞에 선 김도혁은 눈을 부릅뜨며 크게 소리쳤다. “어쨌든 난 강태일에게 절대 형님이라고 할 수 없어!” 그렇게 말하고선 녀석은 재빨리 쏙 방안에 들어가며 문을 쾅- 닫았다. 달칵- 문 잠그는 소리가 이어 들린다. 난 한 숨을 크게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 밤 엄마에게 친히 전화를 걸어 상의를 해봐야겠다. 김도혁 이 녀석 시골로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혹 아름다운 자연과 깨끗한 공기 속에 살다 보면 녀석의 비뚤비뚤한 마음이 정화될지도 모르니까.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아침부터 계속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하늘은 짙은 회색빛 먹구름으로 가득 찼다. 계속해서 비가 내렸던 탓인지 세상이 조금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창에 성에가 낀 것만 같아 손으로 쓱쓱 닦아주고 싶었다. 뿌옇게 흐려져 있는 건 왠지 모르게 보기 힘들었다. 무엇이든 흐릿한 것은 싫다. 관계에서도 말이다. 지쳐 쓰러질 때 까지 열심히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은 난 과감히 포기했다. 어중간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은 싫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강태일 또한 그렇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다. 물론 하는 데 까지 다 해보고서 난 후 생각할 일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오늘은 딱 따끈따끈한 부침개를 해먹기 좋은 날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얼른 집에 가서 김치전이나 해먹어야겠다. 머릿속에 두둥실 김치전을 떠올리니 절로 침이 새어나왔다. 쓱 입주위를 훑으며 아끼는 알록달록 무지개 색 우산을 활짝 폈다. 그리고서 후두둑 쏟아지는 비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첨벙첨벙 물 튀기는 느낌이 재미있었다. 장화를 신었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그렇게 살짝 미소 지은 채 빗물위로 걸음을 옮기며 교문을 향하는데, 네이비색 우산을 들고 있는 낯익은 뒷모습이 시야에 크게 포착됐다. 저 많은 아이들 속에서도 쉽게 찾아낼 만큼 가슴을 반응시키는 사람. “강태일!” 목청껏 커다란 목소리로 강태일을 불렀다. 녀석은 듣지 못한 것인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빗소리에 내 목소리가 씻겨 내려간 탓과 음악과 공존하며 사는 강태일의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는 탓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물을 잔뜩 튀기며 녀석에게로 달려갔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녀석을 겨우 잡아 따르며 덥석 그의 팔을 붙들었다. 강태일은 흠칫 놀라며 내게로 고개를 틀었고, 두 눈이 마주치자 나는 방긋 웃었다. “집에 가는 길이야?” “아니요, 잠깐 연습실에.” “아하, 그렇구나. 힘들지 않아?” “별로.” “버스 타러 가는 길이지?” 나의 물음에 녀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곧 자연스레 멈췄던 걸음을 이었다. 그런데 녀석은 내 짧은 보폭에 맞춰주려는 듯 아까보다 속도를 느리게 했다. 은근히 생각해주는 이런 배려가 더욱 깊이 다가온다. 찡한 얼굴로 빗속에서의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둘이서 나란히 걷고 있는 게 수줍게 다가왔다. 이러한 작은 일 하나 조차도 그라면 내게 큰 행복이었다. 두 우산이 아니라 한 우산 속에서 같은 방향으로, 같은 걸음을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지만 말이다. 잠시 혼자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강태일이 웬일로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 사람 있잖아요.” “응?” “그 최하운이라는 분.” “아아, 하운이?” “그 사람이랑 친해요?” “하운이 제일 소중하고 친한 친구지. 아마 내가 남자로 태어났고, 더욱 빨리 만났다면 우리는 둘도 없는 불알친구였을 거야.” 나도 모르게 모양새 없는 말이 입 속에 툭 나오자, 나는 당황하며 입을 재빨리 틀어막았다. 슬쩍 녀석을 엿보는데 그는 개의치 않은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왜 최하운에 대해 묻는 것일까? 혹 김도혁의 말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일까?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흥분하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왜? “아니, 그냥요.” 그는 무표정으로 짧게 대꾸했다. 나는 살짝 목소리 톤을 높이며 강태일에게 말했다. “하운이 진짜 그냥 친구야. 뭐, 고등학교 때 소개팅으로 만나서 아주 잠깐 사귄 적은 있었지. 하지만 서로가 이성으로 안 느껴져서 친구로 지내기로 했고, 지금 우리는 최강 콤비를 이루는 절친이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강태일은 갑자기 나를 휙 보더니 뒤틀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설명하는데요?” “응? 아, 네가 오해할까봐.” “내가 무슨 오해를 하는데요.” 녀석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그 모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꾹 다물었다. 갑자기 녀석의 신경이 굉장히 날카로워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아무 말을 안 하자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내가 뭐라도 실수한 걸까? 이에 대해 고심하고 있을 때 어느새 우리는 건너편 버스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슬쩍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무엇을 본 건지 그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우산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고, 그는 갑자기 신호를 무시하고 도로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 모습에 당황하다 일단 따라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녀석의 뒤를 쫓았다. 차 경적소리가 시끄럽게 도로 한 복판을 울렸고, 이따금 아저씨들의 욕지거리 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강태일은 이런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은 듯 싶었다. 그의 눈은 계속 어느 하나만을 쫓고 있었다. 나는 죄송하다고 소리치며 멀어지려는 녀석의 뒤를 빠르게 뒤따랐다. 숨이 가빠왔다. 도로를 건너서고 그가 무엇을 쫓고 있는 것인지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것은 다름아닌 가녀린 몸의 한 여자였다. 누구일까? 물음이 툭 튀어나왔고 이내 나는 이에 대한 답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아 곧 털어냈다. 얼마 안가 여자는 강태일의 손에 붙잡혀버렸다. 나는 빠르게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거친 호흡소리가 빗줄기 사이로 내뱉어져 왔다. 강태일은 여자를 한 동안 응시하더니 이내 거친 손동작으로 모자를 벗기고, 선글라스를 벗겼다. 역시나 예상했던 답이 맞았다. 강태일의 그녀 신유라였다. 보고싶지 않았던 사람. 작은 얼굴에 새하얀 얼굴. 커다란 눈과 오똑한 코 앵두같이 붉은 입술. 인형 같은 사람. 예쁜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흔한 말이지만, 신유라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빌어먹게도 너무나 예쁘고 예뻐서 이 와중에도 감탄이 흘러나왔다. 강태일의 까만 눈동자가 계속 가녀린 그녀에게 머물렀고, 곧 그는 입술을 떼며 차갑게 물었다. “뭐야, 너.” 신유라는 강태일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빗물에 흠뻑 젖어가는 강태일을 바라보다 미세하게 떨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강태일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거세게 쏟아지던 빗줄기도 한 순간에 무음이 되었다. 내가 볼 수 없는 아련한 무언가가 투명하게 그들의 주위를 감싸왔다. 그리하여 두 사람만의 공간이 형성이 되었고, 끼어들 수 없는 나는 그 막에 튕겨져 나왔다. 그렇게 나는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는 그들을 뒤에서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Chapter. 12 그녀의 속사정 “잠시 볼 일이 있어서 온 것뿐이야.” 한 참 후에 그녀의 파리해진 입술이 열렸다. 그녀의 말에 시종 무표정으로 신유라를 응시하고 있던 강태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너무 뒤늦게 서야 꺼낸 말 이었고, 잠시 동안의 침묵 속에 들을 수 없지만 읽을 수 있는 그녀의 마음이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는 강태일의 시선을 자꾸 회피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그런 그녀를 알 수 없는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문 채 응시하던 강태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보고 있었잖아.” “…….” “계속 나 보고 있었잖아.” 강태일의 말에 신유라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꽉 참았다. 그녀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몸이 빗물에 씻겨 내리며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러워 보였다. 그 때 핸드폰 벨소리가 빗물 사이로 흘러 나왔다. 지금의 이 숨 막히는 분위기를 깨고 싶은 듯 무척 시끄럽게 울렸다.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강태일은 그런 신유라의 가는 손목을 천천히 놓으며 고개를 돌렸다. “네, 곧 갈게요.” 매니저의 전화인 듯싶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닫고서 아래로 내리깔았던 눈을 천천히 돌려 강태일을 바라보았다. 강태일은 고개를 살짝 비틀어 돌린 채 텅 빈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는 신유라의 눈에 빗물이 아닌 눈물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손을 꽉 말아 쥐며 몸에 힘을 주었다.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가면 안 된다는 듯. 나 좀 보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듯. 그 때 무심코 뒤편에 서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나를 보다, 이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고개를 꾸벅였다. 나 역시 따라 그녀에게 답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그녀는 3초 동안 강태일을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 때 강태일이 뒤돌아선 그녀를 향해 말했다. “너.” 그의 음성에 신유라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고, 이어 강태일의 차가운 음성이 빗물을 집어 삼키며 크게 울렸다. “내 눈에 띄지 마. 네가 있는 곳에 내가 있거든 네가 먼저 알아서 피해.” “…….” “너 보는 거 짜증나니까.” 그 말을 뒤로 강태일은 뒤돌아섰다. 순간 본 그의 얼굴엔 괴로움이 스쳐지나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얼굴을 굳히는 강태일. 그런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신유라도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점점씩 거리가 벌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가슴에 차올랐다. 강태일. 솔직하지 못하다. 이 각박한 도시 속에서 거리마다 널려있는 신유라의 광고사진을 보게 되면,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그녀가 속해있는 롤리팝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항상 걸음을 멈추었으면서. 멈추고서 그녀를 생각헸으면서. 너는 모르겠지만 네 눈은 항상 신유라를 향해 있었다. 깊이 갈망하며, 그리워하며 향해 있었다. 그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난 그에게 말했다. “솔직하지 못하네.” 나의 말에 강태일은 내 옆에 멈춰 섰다. 그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며 내게 툭 물었다. “내가 좋아요?” “응.” 한 치의 고민 없이 내가 대답하자 잠시 그는 말문을 닫았다. 빗줄기가 갑자기 거세진다. 때리 듯 거칠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눈이 따끔거리고, 온 몸이 아파왔다. 그 때 강태일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내게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좋아하지 말아요. 난 그리 좋은 놈이 아니니까. 분명 괴롭히고, 힘들게만 할 거에요. 내 이기심과 내 욕심에 당신을 갉아먹어버리고 말거라고요. 그러니……“ “바보 같아.” “…….” “진짜 바보는 자신을 좋아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놈이야.” 나의 말에 녀석은 눈을 감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몸을 돌려 그런 그의 젖은 등에 얼굴을 천천히 묻었다. 녀석이 많이 떨고 있었다. 온 몸에 그의 전율이 시리게 전해져 온다. 지금 이 순간 빗물에 녀석의 가여운 그리움이 다 쓸려 내려갔으면 좋겠다. 나는 푹 젖은 목소리로 떨리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바보 같은 너 마저도 좋은 거 보니깐.” “…….” “쉽게 포긴 못하겠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철컥-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물을 똑똑 떨어트리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왔던 것인지 교복차림 그대로인 김도혁이 음료수를 입에 대고 마시며 부엌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를 본 녀석은 흠칫 놀라며 재빨리 눈을 꼭 감고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 녀석을 힐끔 한 번 쳐다보고는, 무심한 시선으로 다시 앞을 보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런 나를 김도혁은 눈을 끔벅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때 같았으면 입대고 마시지 말라고 잔소리를 시끄럽게 퍼부어 댔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혼이 나간 듯 그러한 기력조차 없었다. 그런 내게 슬금슬금 다가온 김도혁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누나, 오늘 우산 가져가지 않았었어?”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녀석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다, 내 얼굴 앞에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자극을 주려는 녀석이 조심스레 갖가지 말을 해대기 시작한다. “야!” “…….” “돼지야! “…….” “멍청이! 똥개! 해삼! 말미잘!” 그렇게 한 참 김도혁이 신나게 놀리는 말들을 퍼부어대고 있을 때, 나는 다짐하며 녀석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녀석은 경기를 일으키며 놀랬다. 그리고는 이내 바로 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잘못했어.” “신유라 숙소 알아?” 생뚱맞은 갑작스런 나의 질문에 도혁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천히 눈동자를 돌려 김도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 알긴 알지.” “그래?” “응, 근데 한 번도 안 갔어. 아무리 팬이라지만 남자가 모양 빠지게 숙소까진 찾아가고 싶지 않아. 어차피 우린 운명이니까 반드시 필연적이게 만날 거고.” 김도혁이 혼자 자신에 취해 얼토당토 없는 말을 늘여놓았다. 나는 그런 그를 보고 픽 웃다, 자리에 벌떡 일어서며 힘주어 말했다. “가자.” “뭐?” “신유라 숙소로.”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나의 말에 내 동생 김도혁의 눈은 커다래졌다. 과거 속에 갇혀서는 미래를 나아갈 수 없다. 신유라를 직접 찾아가 그들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안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니 이도저도 못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한 발자국 나아가기 위해선 그들의 과거를 알아야 했다. 분명 강태일과 신유라는 쉽게 넘보지 못할 만큼 단단한 인연으로 이어져 있다. 사실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자신감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면할 수는 없다. 지금 강태일은 신유라와의 기억 속에 갇혀 살고 있다. 그런 그를 그 안에서 꺼내야만 내 마음을 확실히 전할 수 있었다. 설령 그리되지 않고 차인다 해도 말이다. 지금의 순간을 걸으며 미래를 향하는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선 나아가야 한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버스 안에서 내내 김도혁은 거울을 보고 또 봤다. 녀석의 거울 사랑은 지칠 줄 몰랐다. 모양 빠지게 숙소 따위는 가지 않는다는 녀석이 내 제안에 못 이기는 척 하더니 냉큼 호들갑을 떨며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녀석은 무려 한 시간 반 동안 꽃단장을 했다. 나는 비에 젖어 씻고 옷을 갈아입는데, 삼십분 정도만 걸렸는데 말이다. 그래도 겨우 녀석을 잡아끌어 내어 그 정도 안에 끝낼 수 있었다.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고선 그만 좀 보라며 녀석의 머리를 퍽 쳤다. 그러자 녀석은 스타일 구겨지게 뭐하는 짓이냐며 노발대발했다. 그런 그를 시큰둥히 바라보다 물었다. “오늘 스케줄이 언제 끝나?” “음, 오늘 라디오 방송 하나 있는데, 한 11시 쯤 끝날 것 같아.” 그 말에 나는 주먹을 들어 올리며 엄지를 치켜세웠고, 머리를 매만지던 녀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기고만장해 했다. 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김도혁 그래도 열성팬이라서 그런지 스케줄까지 꾀고 있었다. 그나저나 11시까지 어떻게 기다린담. 한 숨을 작게 토하며 아직 물기가 묻은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밖은 어둑어둑해졌고, 불붙은 성냥개비와 닮은 가로등 불빛이 유리창 위를 빠르게 스쳐간다. 물빛과 불빛이 묘하게 섞인다. 드디어 신유라의 숙소가 있는 어느 한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그 곳에는 소년 팬뿐만 아니라, 소녀 팬들도 상당히 많았다. 지금은 멈췄지만 비가 왔었던 지라 색색의 비옷을 입고 말이다. 그러한 아이들을 보고 김도혁은 혀를 찼다. 나도 한 때 저러한 시절이 있었기에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역시나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모님께서 얼마나 걱정하실까. 또한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는 것은 무척 아까웠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보면 역시 나도 이제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이러한 경험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며 순수한 마음이니 꼭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아야 겠다. 도혁이와 나는 한 쪽 구석으로 갔고, 다리가 아픈 나는 쭈그리고 앉았다. 아직 땅이 마르지 않아 주저 앉을 순 없었다. 그 때 초등학생 5,6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 둘이 갑자기 우리에게 다가왔다. 무섭게 인상을 쓰며 우리를 훑어보던 아이 중 하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여기는 우리 자리에요. 나와 주세요.” 그 말에 나는 황당해했고, 김도혁은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 치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야, 꼬맹이들. 그게 말이 되냐? 네가 여기 땅 샀어?” 그 말에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렇지? 그러면 여기는 너희 자리가 아니야.” “그래도 우리가 계속해서 있었던 곳이란 말이에요!” “어쨌든 지금은 우리가 먼저 왔으니 우리 자리지. 퍼뜩 다른데로 가. 훠이~” 새쫓는 듯 김도혁이 허공위에 손을 휘저었다. 그 때 눈이 큰 아이가 복어처럼 볼을 부풀리며 양 옆구리 위에 손을 얹더니 불쑥 김도혁에게 물었다. “우리 언니들 팬이에요?” 그 물음에 김도혁은 살짝 웃음 짓더니, 거만한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얼씨구. “장차 신유라 애인이 될 몸이다.” “안 돼요!” “왜!” “오빠처럼 뺀질뺀질한 사람한테 어떻게 우리 언니 줘요!” “내가 뭐 어때서?” 상당히 민감한 문제를 건드렸다. 김도혁은 자신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도혁은 눈썹을 꿈틀대며 아이들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더니 얼굴을 들이댔다. 불쑥 가까이 다가온 김도혁의 얼굴에 아이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솔직히 말해봐. 오빠 잘 생겼지?” “자, 잘생기긴 개뿔! 적어도 우리 언니들한테는 강동원이나 원빈 정도는 되야죠!” 최고 꽃미남 스타들을 거들먹거리자 김도혁은 뾰로통해졌다. 아이는 빨게진 얼굴로 새침하게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 아이들은 김도혁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호감을 표하고 있는 것이란 걸. 흔히 어린 아이들이 맘에 드는 이성을 일부러 괴롭히는 것처럼 말이다. 역시 여자아이들이라 그런지 롤리팝 팬인데도 불구하고 남자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아 했다. 또한 지금 폼에 살고 폼에 죽는 김도혁은 연예인 뺨치게 옷을 잘 차려 입었기 때문이다. 서로 티격태격하며 싸우는 이들을 보니 풋 웃음이 나왔다. 나의 웃음에 아이들과 김도혁은 동시에 휙 째려보았다. 어느새 밤은 더욱 깊어졌다. 비가 온 다음의 하늘이라서 그런지 무수한 별들이 까만 하늘에 총총 박혀 있었다.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별들을 세고 있던 나는 눈이 아파 결국 고개를 내렸다. 그런데 옆을 보니 김도혁과 아이들은 신나게 게임을 하고 있었다. 미운 정이라도 든 것인지 김도혁과 꼬마 둘은 상당히 친해졌다. 그리하여 기다리는 내내 나는 외톨이 신세였다. 나도 같이 놀자고 하면 이들은 서로 합세하여 나를 괴롭혔다. 망할 것들. 그 때 아이가 도혁이에게 슬그머니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참 세상 좋아졌다. 저 나이에 핸드폰을 가질 수 있다니. “오빠, 핸드폰 번호 알려주세요.” “야. 오빠 핸드폰 번호는 비 번호보다 따기 힘들어.” “에이~” “진짜라니까. 너희들이 더 크고 쭉쭉빵빵해져서 오면 가르쳐 줄 게.” 참 애들한테 못할 말이 없다.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어느새 시각은 1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 순간 불빛이 가득 비추며 큰 벤 하나가 들어섰다. 그러자 주변에 흩어졌던 팬들은 차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흥분할만 한데,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롤리팝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팬들은 소리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곧이어 아파트 앞에 벤이 멈춰서고, 롤립팝의 멤버들과 매니저, 코디 등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오자 마자 재빨리 숙소로 들어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챙겨 왔던 확성기를 들었다. 그리고 확성기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신유라씨! 여기 봐주세요! 들어가지 말아요!” 커다란 소리에 모두들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김도혁은 창피하다는 듯 얼굴을 가리고 벽에 붙어섰다. 나를 알아보았던 것인지 신유라가 멈춰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 때 옆에 있던 매니저가 버럭 소리 지르며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쳤다. 나는 죄송하다고 능청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말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순 있을까요? 꼭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아파트 근처의 한적한 놀이터로 우리 세사람은 왔다. 고맙게도 신유라는 무시하지 않고, 매니저에게 아는 사람이라고 하며 나를 따라와 주었다. 신유라를 바라보고 있는 김도혁의 눈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러한 불타는 시선이 느껴진 것인지 신유라는 도혁이의 시선을 피했다. 저 녀석이 뭐하는 것인지. 녀석의 목덜미를 붙잡으려는 찰나, 김도혁은 냉큼 신유라 앞에섰다. 그리고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향기로운 남자 꽃도혁입니다.” 그리고서는 한 쪽 눈을 찡긋하며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미는 김도혁. 신유라는 몹시 부담스럽다는 얼굴로 김도혁을 바라보다 마지못해 어색하게 웃으며 녀석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김도혁은 뒤돌아 나이스를 외치며 혼자 감동에 취했다. 그런 녀석의 엉덩이를 발로 툭차며 나는 무심히 말했다. “잠깐 다른 데 가 있어봐.” “아, 왜!” “중요히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누나가 신유라를 언제 알았다고! 싫어! 나도 있을 거야! 내가 왜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김도혁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떼를 썼다. 그러자 안되겠던지 신유라가 직접 나서며 김도혁을 불렀다. “저기.” “네?” 신유라의 부름에 토라져 있던 얼굴을 지우고, 곧바로 샤방한 미소를 짓는 김도혁. 나는 못 말리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한데요. 잠시 자리를 비켜주셨으면.” 그녀의 말에 기대로 가득찼던 김도혁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무척 서운하다는 얼굴로 신유라를 바라보던 김도혁은, 신유라의 말을 무시할 수 는 없기에 투덜거리며 계속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다 모습을 감췄다. “하하. 우리 동생이 신유라씨 팬이거든요.” “아아.” 나의 말에 그녀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웃었다. 참 예쁘다라는 생각이 계속 떠오른다. 연예인이라면 참으로 화려하고 호화스러울 것 같은데, 신유라는 참으로 수수하고 맑았다. 장미가 아니라 들에 피는 작은 들꽃 같았다. 우리 두 사람은 그네에 앉았다. 막상 부딪혀 보니 말을 꺼내야 겠으나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참 머뭇거리고 있을 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신유라였다. “혹시……” “네?” “태일이하고 지금 사귀시는 사이에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깜짝 놀라다, 이내 웃으며 두 손을 저었다. “아,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제가 쫓아다니는 거에요. 짝사랑이에요.” “아.”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색한 듯 불편해하며 시선을 돌렸다. 나는 깊게 한 숨을 내뱉다 용기를 내어 찾아온 목적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런 걸 주제넘게 물어본다고 화 내실지도 모르지만.” “……,” “사실 이렇게 찾아온 건 신유라씨와 강태일의 과거에 대해 알고 싶어서요.” 나의 말에 그녀는 조금 흔들리는 가 싶더니 살짝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어요.” 그녀의 온화한 반응에 일단 안심이 되었다. 혹 몹시 불쾌해 하거나 화내면 어쩌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 때 신유라가 슬픔이 어려있는 눈물빛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태일이를 많이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그런데 그 쪽을 처음 본 순간 그 생각이 들었어요.” 그 말에 쑥스러워진 나는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이어 들려오는 그녀의 말에 얼굴이 굳어졌다. “저는 배신자에요.”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몹시 괴로워 졌다. 잠시 입을 다물고 과거를 떠올리는 그녀의 호흡이 몹시 불안정 해졌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내가 혹 꺼내게 하여 힘들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미안해졌다. 그녀는 마른 침을 삼키더니 힘겹게 과거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현 소속사에 태일이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연습생이 되었고, 저는 15살부터 시작했었어요. 처음 태일이 봤을 때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었죠. 무엇인지 모르지만 항상 불안해 보였거든요. 어쨌든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을 보이다가 16살 때부터 사귀기 시작했어요. 저는 누구보다도 그를 사랑해주고, 아껴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태일이도 나에게 마음을 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 “그런데 태일이는 항상 불안해했어요. 곧장 내가 떠나기로도 할 것처럼. 안절부절 못했지요. 또한 다른 남자하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몹시 화를 냈고, 조금이라도 오해할 만한 상황이 연출되면 무작정 의심을 했어요. 강태일은 아직 어린나이에도 남다르게 집착이 심했어요. 그래서 조금은 힘들고 짜증날 때도 있었죠.” “그럼 그 것 때문에?” 조심스럽게 묻자 신유라는 절대 아니라는 듯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아니에요. 차라리 그랬다면 쉽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요. 처음에 그러한 태일의 행동이 힘들었는데, 점차 그를 알아가며 이해했어요. 강태일이 그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더욱 사랑을 주고 믿음을 줘야 겠다고 생각했지요. 또한 역시 나를 무척 사랑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니까요. 그랬기 때문에 그러한 태일이의 불안한 행동도 점차 안정이 되어갔지요. 진짜로 저를 믿은 거에요. 그건 자신을 다 준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죠.” “…….” “더욱 나쁜 것이죠. 차라리 틈을 주었더라면 조금 더 괜찮아졌을 텐데. 철썩 같이 나를 믿게 해버려 놓고 버린 것이니까요. 오직 내 입장만을 생각해서, 내 앞일만 바라보면서, 나만 생각해서.” 그 말을 하는 신유라의 예쁜 눈망울에 어느새 투명한 물기가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그 눈물의 무게는 견디지 못하고 후두둑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힙겹게 계속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연습생이 되기 전 가족이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엄마는 식물인간이 되었고, 아빠와 동생은 바로 즉사했죠. 저는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할머니 몸은 몹시 불편 하셨어요. 그래도 항상 웃으시며 저를 보살펴 주셨죠. 그런데 할머니와 친척 분들 모두 형편이 좋지 않아서 엄마 병원비를 내는데 무리가 있었어요. 그러다 친척들이 엄마를 안락사 시키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 오갔어요. 그 순간 무척 화가 난 저는 내가 병원비 다 해결 할 테니, 절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소리쳤어요. 모두 한 순간에 잃고 유일하게 남은 내 가족인데 그렇게 보낼 수 는 없었어요. 또한 반드시 일어설 거라는 희망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그렇게 큰 소리 쳤기 때문에 저는 하루빨리 성공해야 했어요. 그 때 소속사 사장님이 제게 제안을 하나 했었어요. 안 그래도 강태일과 저의 연애를 탐탁치 못해하셨죠. 단순히 호기심에 사귄 것이라고 금방 헤어질 것이라고 생각 했는데, 우리는 더욱 끈끈하게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런 나를 젖은 눈으로 한 번 쳐다보고는 신유라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사장님 제안은 먼저 데뷔를 시켜주며, 당분간 병원비도 계속 지급해주신다 하셨어요. 저에게 모두 간절한 일이었지요. 소속사에서 그리하라 했다는 말은 하지 말고 강태일과 깨끗이 헤어진다면 모든 걸 이루게 해주겠다는 그 제안은 저는 쉽게 떨쳐 버릴 수 없었어요.” “…….” “또한 태일이의 집안에서도 저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안그래도 태일이가 가수가 되기 위해 연습생으로 있는 것도 싫어하셨는데, 저 까지 붙어있으니 몹시 저를 미워하셨죠. 그래서 어쩔때마다 찾아와 저를 협박을 하곤 했어요. 그 모든게 순간 힘들게 느껴졌어요. 또한 더욱 빨리 찾아올 수 있는 제 꿈을 놓치고 싶지 않았죠. 강태일은 더욱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위선으로 저를 위로하며 강태일에게 헤어짐을 선포했어요. 모진 말을 해버렸어요. 그런데 강태일은 붙잡지도, 화내지도, 울지도 않았어요, 아무 말 없이 뒤돌아섰어요. 그러다 연습생 중에 악독한 선배 한 분이 계시는 데 , 어느 날 제게 강제로 키스를 했었어요. 그걸 하필 태일이가 보았어요. 그 순간 아무말 없이 돌아섰었던 강태일은 분노했어요. 그럴 수 밖에 없죠. 똑같은 짓을 내가 저지른 것이었으니.” 강태일의 상처가 정확히 무엇인지 아직 모르니 이해가 덜 된 부분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그 날의 상황을 느낄 수 있었다. 스르르 눈을 감았다. 강태일이 모르고 있을 그녀의 속사정을 들으니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 사이로 시린 신유라의 울음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 “모든 걸 믿고 자신을 준 강태일이 분명 부서질 거라는 거 알면서도.” “…….” “태일이에게 상처를 주고 내 이익을 챙겼어요. 그러면……” 신유라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말을 잇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부모의 품에 기대어 어리광을 부리며 살 나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서 모든 걸 해결 해야했다. 만약 내가 신유라의 상황이었더라면, 나 역시 그러한 결정을 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자신이니까. 그러니 그런 그녀를 나쁘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항상 텔레비전 속에서 아름답고 당당하게 비춰지던 신유라는 지금 잔뜩 움츠려서 울고 있다. 나는 일어서 천천히 다가가 그런 그녀를 꽉 안았다. 차라리 드라마나 소설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처럼 그녀가 악녀였으면 좋았을 것을. 빌어먹게도 그녀는 너무 여리고 착했다. “말 하지 않을 거 에요.” “…….” “왜냐하면 나도 강태일이 좋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나서서 둘을 풀어주지 않을 거에요.” 나의 말에 신유라는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의 품에서 빠져나와 애써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 하지 마세요. 계속 저를 미워할 수 있도록. 지금 돌아간다 해도 염치 없어서 태일이를 바라볼 수 없어요. 또한 또 다시 상처를 줄 것 만 같아 무섭거든요. 태일이가 나와 헤어진 게 잘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 “꼭 행복하게 해줘요.”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코끝이 시큰거려 애써 미소짓고 있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무조건 서로의 사랑 하나만으로 사랑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건 다 거짓말. 세상은 생각보다 호락호락 하지 않다. 항상 많은 장애물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고,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지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두 가지 모두 끌어 안고서 가기에는 나약한 우리는 어느 하나를 가슴을 짓밟으며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후회를 한다. 그 과정을 그녀는 벌써 거쳐버렸다. 세상에 때 묻지 않은 어린 나이에 그녀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강태일 만큼이나 죽을 만큼 힘들었을 것이다. 한 숨을 쉬며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반짝 빛나는 별들이 눈물에 번져간다. 5월의 밤이었지만 밤공기가 오늘따라 찼다. Chapter. 13 미남과 야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훑어내며, 정갈하게 널어진 빨래를 보았다. 입가에 절로 흐뭇한 웃음이 걸린다. 심산한 마음에 아침 일찍 일어나 구석구석 집안을 청소하고, 밀렸던 빨래와 이불을 깨끗이 빨았다. 이렇게 이따금씩 집안을 대청소 하면 내 먼지 끼었던 마음마저 깨끗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어제 신유라를 만난 이후, 줄 곧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진 듯싶다. 역시 심란할 땐 청소를~ 손을 탈탈 털고 기지개를 쭉 켜며 거실로 들어왔다. 힐끗 시선을 돌려 벽에 걸어진 동그란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은 11시 20분에 머물러 있었다. 그 때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으니……. 나는 그 생각에 재빨리 걸음을 옮겨 현관으로 갔다. 그리고 내가 애지중지하는 분홍색 삼선 슬리퍼를 찍찍 끌고서 최하운의 집으로 빠르게 향했다. D-DAY. 오늘은 토요일이었으며, 백선생님과 최하운의 데이트가 있는 날이었다. “운!” 혹여나 약속을 잊어버리고 퍼질러 자고 있는 것은 아니가 하는 걱정을 품고서, 하운이를 소리쳐 부르며 그의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어 몇 번 불러도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데, 욕실 쪽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씻고 있었나 보다. 난 냉큼 아무 생각 없이 욕실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내 다다르자 손을 뻗어 욕실 문을 확 열어 재꼈다. “하운…아…….” 욕실 문을 열자마자 그를 부르던 내 목소리는 점점 흐릿해지더니,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그가 소리치려는 찰 나 재빨리 쾅- 문을 닫으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화끈거리는 두 볼을 작은 손으로 감쌌다. 부끄러움에 순식간에 온 몸이 따끈따끈 달아올랐다. 맙소사. 쏟아지던 투명한 물줄기에 그는 홀라당 벗은 몸이었다. 샤워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1.5의 좋은 시력을 가진 이 두 눈으로 제대로 보고 말았다. 동그랗게 주먹을 말아 머리를 툭툭 치며 나는 자책했다. “내가 못 살아! 노크! 노크!” 뒤에서 최하운의 욕지거리가 살벌하게 들려왔다. 몸이 움찔. 녀석이 몹시 분노했다는 것이 온 몸으로 느껴져 왔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나는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일단 숨어야 했다. 이리저리 안절부절 못하며 숨을 곳을 찾아 집안을 맴도는데, 덜컥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식탁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곧이어 하운이의 높아진 음성인 집안을 가득 메웠다. “야, 김순이! 어디 숨었어! 빨리 안 나와!” 혹여나 숨소리라도 들릴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식탁 밑에서 잔뜩 웅크린 채 눈을 깜박거리며 긴장감에 빠졌다. 그런데 어느새 최하운이 부엌으로 들어와 있었다. 왔다갔다 주위를 맴도는 그의 다리를 보니 온 몸이 굳어졌다. 그렇게 숨조차 참고 있을 때, 녀석의 갈라진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집안을 울렸다. “셋 샐 때까지 안 나오면 너 진짜 죽는다. 하나.” 그가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나는 고민에 휩싸였다. 매를 빨리 맞을 것인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저항을 하고 맞은 것인가. 곧 이어 공포의 다음 숫자가 들려왔다. “둘.” “…….” “둘의 반.” 안되겠다 싶은 나는 나가기로 결심하고 움츠렸던 몸을 피는데 갑자기 식탁이 번쩍 들리는 가 싶더니 쿵 내려앉았다. 벌러덩 뒤로 자빠지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는데 쭈그리고 앉아 나를 노려보는 한 맹수가 보인다. 샤워하는 모습을 보여 버린 충격이 너무나도 컸던지 하운이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그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잠시 아무 말 없이 노려보았고, 나는 굳은 얼굴로 그를 마주하다 몸을 움직여 재빨리 식탁 다리를 붙잡으려 했다. 그런데 한 발 빨랐던 최하운이 내 옷깃을 잡아 질질 끌어냈다. 도망치기 위해 허우적거리지만 결국 녀석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야 했다.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는 하운이에게 두 손을 모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죄를 고했다. “자, 잘 못 했어.” “너 다 봤지?” 그의 물음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최하운은 손을 뻗어 양 볼을 꾹 누르며 내 동그란 얼굴을 잡았다. 어느새 붕어가 된 김순이. 그는 내 눈을 자신의 눈과 똑바로 마주보게 했다. 그러자 슬금슬금 옆으로 기울여지는 내 눈동자. 정말 빌어먹게도 내 눈은 거짓을 절대 숨기지 못했다. 나의 눈에 확신을 가진 그는 버럭 소리 질렀다. “봐봐. 다 봤지!” “아, 아주 조금. 진짜 조금.” “너 정확히 5초 동안은 피하지 않았었다.” 최하운이 가자미눈으로 나를 보며 낮게 말했고, 그의 양심을 쿡쿡 찌르는 따끔한 눈빛에 결국 되려 나는 소리 지르며 솔직히 고백했다. “그래, 다 봤다!” 나의 말에 순간 스쳐지나가는 그의 모습은 흡사 순결을 잃은 처자 같았다. 그는 한 숨을 깊게 뱉으며 머리를 감쌌다. 그의 상심한 모습에 무척 미안해졌지만, 사과는 못하고 괜히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왜 아침부터 샤워를…….” “하도 짜증나서 운동하고 왔다.” “그럼 문을 잠그고 하지는…….” “혼자 사는 내 집인데 굳이 그래야 되나? 누가 함부로 문 따고 매일 불쑥불쑥 찾아오는데.” 그 말에 뜨끔해지는 나. 어쩌면 이 것을 가지고 최하운은 계속 우려먹을지도 모르겠다. 그 것은 막아야 했다. 야동 때문에 당한 것 생각하면 아주 치가 떨린다. 잠시 동안 빠르게 머리를 회전하던 난 곧이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보기보단 녀석이 순진했기 때문에 써먹을 수 있는 수법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 김순이는 참으로 악독하다. 뭐, 세상을 살기 위해선 어찌할 수 없다. 착한 사람은 손해만 보기 마련이다. 나는 가짜로 풀이 죽은 척 하다가, 하운이를 향해 중얼거리 듯 말했다. “미안하다. 그럼 나도 똑같이 보여주면 되지? 그럼 쌤쌤이지?” 그리고서 나는 티셔츠를 훌러덩 벗으려는 척 했다. 그러자 기겁하며 내 옷깃을 재빨리 잡아다 내리는 최하운. 그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내게 말했다. “뭐하는 짓이야.” “그렇게 억울하면 내 몸 보면 되잖아.” “네 몸 봐봤자 눈만 버리지. 됐다, 됐어. 그만 하자.” 같잖다는 듯 내 몸을 훑어보던 그는 나를 흘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 어째 오히려 내가 더 당한 것 같은 느낌은 뭘까. 고개를 갸웃거리다 폴딱 일어나 거실로 나간 그에게로 조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녀석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던 것인지 하운이의 몸이 촉촉했다. 그러하면서도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았던 것인지 미열이 남아있었다. 녀석이 쓰는 바디 클렌징의 맑은 향이 난다. 내가 쓰면 모르겠는데, 녀석에게 풍기는 이 향은 왠지 모르게 좋다. “미안해. 잘 못 했어. 응?” “휴우.” “앞으로 이제 진짜 조심할 게.” “알았으니까 떨어져.” 그의 목소리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녀석이 마음을 푼 것 같아 히죽 웃으며 그에게 밀착시키고 있던 몸을 떼어냈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가더니 대충 가방을 챙기고서 나왔다. 그런데 최하운은 흰 티셔츠의 회색 트레이닝복 바지였다. 그는 그 차림 그대로 나가려는 듯 나를 끌고 현관으로 향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서 휘둥그레 눈을 뜨며 물었다. “너 설마 그렇게 가겠다는 건 아니지?” “뭐가 어때서.”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명색이 데이…….” 데이트란 말이 나오려 하자, 녀석의 미간이 잔뜩 찡그려졌다. 그 모습에 나는 재빨리 꼬리를 내리며 살살 웃었다. “최고다. 멋지다. 킹왕짱.” 그런데 녀석은 잠시 고민하는 가 싶더니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추리닝은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느낀 것인가 보다. 최하운은 김도혁과 정반대로 꾸미는 걸 무척 귀찮아하고, 싫어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모든 걸 추리닝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에 반면 김도혁은 앞 편의점을 가더라도 옷을 갈아입고 갔다. 이 둘이 반반씩 섞이면 정상이 되는 건데. 한 명은 너무나 지나치고 한명은 너무나 모자라고. 최하운과 김도혁을 열심히 비교분석하고 있을 때, 하운이가 곧이어 다시 나왔다. 추리닝은 좀 심했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냥 티 하나에 청바지였지만 그만이 풍기는 분위기가 있어서 그런지 A급이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며 주먹 쥔 손에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그러자 녀석은 손으로 내 얼굴을 푹 밀어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부디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데이트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오라고 아파트 출입구까지 녀석을 배웅해주기 위해 쫓아 나왔다. 졸졸졸 시끄럽게 조잘대며 하운이 뒤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녀석이 우뚝 자리에서 멈췄다. “왜 그래?”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운이의 너머로 시선을 던지는데 깜짝 놀랐다. 출입구에는 경찰차와 구급차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의아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다, 하운이의 손목을 잡아끌고 어수선한 그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는 아주머니 틈에 끼어들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이고! 순이야! 글쎄, 11층에 사는 처자 알지?” “아, 그 호텔리어라는 분이요?” “응, 글쎄. 이번에 결혼할 남자가 바람 피고 파혼 당한 충격 때문인지 몰라도 간밤에 목매달고 자살했데.” 충격적인 그 말에 놀란 나는 벌어진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깊이 잠들어 있을 밤에 위층에서는 누군가의 생명의 줄이 잔혹하게 끊어지고 있었다. 아까의 일 때문에 달아올랐던 몸이 한기에 휩싸였다. 기분 좋아야 할 주말의 시작이 착잡해진다. 그렇게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잔인하게 끊어 낼 만큼 괴로움이 컸던 것일까. 짧게 한숨을 토하며 뒤돌아 하운이를 보는데 순간 심장이 철렁였다. 최하운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금방 전까지 만해도 생기 있게 불그스름했던 입술이 바싹 말라 있었다. 나는 놀란 얼굴로 그의 팔뚝을 붙들며 물었다. 하운이는 떨고 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아니야.” 그는 떨리는 음성을 감추지 못하고 답했다. 그 순간 11층 여자의 시신이 하얀 천으로 뒤덮인 채 구급차에 실려졌다. 그 모습에 갑자기 하운이는 피하려는 듯 빠르게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재빨리 그를 따라가는데, 하운이는 엎드려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속이 뒤집어지는 것처럼 그의 얼굴이 몹시 일그러졌다. “속이 안 좋은 거야? 안색이 안 좋아. 백선생님께 못 가겠다고 말할까?” “됐어. 괜찮아.” 하지만 전혀 말과는 다르게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머리가 아픈 듯 이마에 손을 댔다. 그러다 내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자, 그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큰 손으로 내 머리를 흩트렸다. 멀쩡했던 애가 갑자기 왜 그러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11층의 여자가 목매달고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그랬다는 걸 알아챘다. 눈을 커다랗게 뜨며 하운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순간적으로 재빨리 굳었던 얼굴을 폈다. “늦겠다. 빨리 가 봐야겠어.” “아, 응.” “갔다 올게.” “잘 갔다 와.” 멍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런데 걸음을 옮기는 순간 하운이는 피식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혼잣말로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두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웃겨. 사랑 따위가 뭐라고.” 그가 꼭꼭 감춰두었던 그 비밀을 훔쳐본 기분이 들었다. 멀어지는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다 재빨리 몸을 돌려 집으로 뛰어갔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백선생님과 최하운이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로 찾아갔다. 다행이 택시를 타고 왔기에 그들을 놓치지 않았다. 아직 백선생님이 안 오셨던 것인지 최하운은 혼자 서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뚱한 얼굴로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나는 계속 멀찌감치 서서 살펴보았다. 그 때 멀리서 하운이를 소리쳐 부르며 빠르게 걸어오는 백선생님이 눈에 들어왔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백선생님을 보자마자 하운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백선생님의 의상은 튀다 못해 아주 파격적이었다. 웬만한 사람도 소화하기 힘든 호피무늬의 나시티에 짧은 검은색 미니스커트. 그리고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망사스타킹. 운동으로 잘 다져진 우람한 허벅지가 아주 돋보였다. 최하운은 오만상을 지었다. 가까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백선생님을 외면하며 고개를 휙 돌리는 하운이. 당장 뛰쳐나가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안 된다, 하운아. 조금만 참아다오. 다행히 나의 운이는 마음을 금새 추스르며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 때 백선생님이 과감하게 나도 시도도 못한 팔짱을 끼었다. 하운이 정색하며 떼어내려 하자 백선생님은 힘으로 제압했다. 남자 못지않은 백선생님의 힘에 하운이는 내색은 안했지만 무척 놀란 듯싶었다. 왠지 모르게 최하운이 오늘 따라 가련하게 느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 둘은 첫 번째 데이트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을 보아하니 이 말이 생각 난다. 미남과 야수. 그들의 데이트를 계속해서 관찰하며 나는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왠지 강태일과 나의 데이트와 닮았다는 것이다. '잘난 연하 남을 유혹하라'가 목적인 데이트란 것도 비슷한데, 데이트 하는 모습 또한 비슷하니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그 당시에 난 주한비의 말마 따라 파격적인 의상을 입었었다. 그리고 강태일은 몹시 창피해 했다. 백선생님 또한 나 보다 더한 의상을 입었으며, 최하운은 백선생님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리고 백선생님이 점심을 먹는 내내 계속해서 쉴 틈 없이 입을 놀렸고, 최하운은 듣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한 얼굴로 먹기만 했다. 나 또한 강태일과 당시 허수아비와 말을 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리고 어쩜 데이트 코스도 이리 똑같은 것인지. 점심을 먹고서 난 후, 그들의 다음 코스는 바로 영화관이었다. 그들이 표를 끊고서 재빨리 다가가 무엇을 끊었는지 보니 그들은 다름 아닌 공포영화를 택했다. 본격적인 공포영화의 계절인 여름에 앞서 먼저 나온 한 공포영화였다. 예고편을 보고 최하운과 비웃었던 영화였다. 어쩐지 최하운의 얼굴이 뚱해있더라. 나와 최하운은 돈 주고 공포영화를 보는 것을 무척 아까워한다.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웬만한 공포영화는 모두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피 튀기는 광경은 허접하게만 느껴졌고, 비명소리는 귀가 따갑게만 느껴졌으며 귀신의 모습은 웃기게 느껴졌다. 그런 우리인데 백선생님이 최하운에게 공포영화를 보이다니.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다 어쩔 수 없이 영화표를 구입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야 왜 백선생님이 공포영화를 구입했는지 알 수 있었다. 백선생님 또한 공포영화에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다.(아마 백선생님은 귀신이 나오면 때려잡을지도.) 백선생님이 공포영화를 구입한 이유는 바로 스킨십을 위해서였다. 무서운 척 하면서 하운이에게 엉겨 붙는 백선생님을 보며 나는 박수를 쳤다. 하운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미소를 짓는 백선생님의 모습은 정말 최고였다. 브라보! 흔한 작업이었지만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본격적인 공포영화의 계절인 여름이 나오면 강태일을 끌고 공포영화나 보러 와야 겠다. 그리고 그 때 원 없이 녀석의 커다란 품 안에 안겨야지. 생각만 해도 수줍어진다. 그렇게 열심히 소리 지르며 연기하는 백선생님과 짜증은 나지만 떼어내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하운이를 보며 나는 크게 하품을 했다. 역시 공포영화는 재미없다. 무척.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공포영화를 보고서 하운이는 곧바로 헤어지려 했지만 백선생님이 놔주질 않았다. 백선생님의 성화에 결국 못 이겨 하운이는 어느 한 커피숍에 왔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중 갑자기 오줌이 마려 화장실에 들렸다. 시원하게 일을 해결하고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매캐한 담배냄새와 함께 낯익은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뭐하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니 기다란 담배를 입에 물고서 건조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는 하운이가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알아챈 것일까. 눈을 깜박거리며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나의 의문을 알아차린 것인지 피식 웃으며 담배 연기와 함께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티 나게 따라다니는 사람도 없을 거다.” 티가 많이 난 것일까. 어쨌든 녀석이 알아채버리다니 왠지 쑥스러워진다. 다르 곳으로 슬쩍 시선을 던지며 머리를 긁적이던 난 다른 의문이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내 앞에선 좀처럼 담배를 피우지 않는 녀석이 웬일로 당당히 피고 있는 것일까. “웬……담배를?” “미치겠어서 그런다.” 그리고서 그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얼마 안 된 사이에 녀석의 얼굴엔 피곤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몸이며 맘이며 고생이 심했구나. 녀석이 조금은 안쓰러워졌다. 그 때 화장실에서 막 나오던 누군가가 나를 툭 치며 갔고, 나는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다행히도 민첩한 최하운이 재빨리 한 손을 뻗어 내 허리를 감쌌다. 그리하여 넘어지는 걸 면했다. “뭐야, 저 년.” 하운이는 인상을 확 구기며 또박또박 구두소리를 내며 멀어져가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그 때 작아지는 구두소리의 다른 편에서 걸걸한 음성이 들려왔다. “꼬선생?”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백선생님이었다. 백선생님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그런데 보니 나와 최하운은 안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자세였다. 우리 둘은 재빨리 팍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백선생님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혹시 또 오해한 것 일까.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순간 고민에 빠졌다. 그때 내게 백선생님이 성큼성큼 다가오셨고, 나는 두려움에 눈을 감으며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런데 자신의 품속에 나를 폭 안는 백선생님. 어리둥정해 있을 때 백선생님은 울먹이며 내게 말했다. “반가워, 꼬선생!” “……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고, 백선생님은 품에서 다시 나를 꺼내어 말했다. 백선생님의 굵직한 손가락이 하운이를 가리켰다. “최하운이 너무 심심해. 재미없어. 혼자 모노드라마 찍는 줄 알았다.” 그렇게 말하고서 백선생님은 붉게 칠한 입술을 삐죽 내밀며 뾰롱한 표정을 지었다. 최하운은 백선생님이 무어라 하든 말든 무심한 얼굴로 담배만 뻐끔뻐끔 피고 있었다. 최하운 못지않게 백선생님 또한 따로 맘고생이 심한 듯싶었다. 아무래도 오늘 둘의 데이트는 그리 즐겁지 못한 것 같다. 그 때 백선생님은 갑자기 내게 어깨에 팔을 두르다니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만나 게 된 거 우리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예?” “자, 건방진 최하운도 어서 따라오고. 간다는 소리하면 엉덩이 한 대 맞을 줄 알아.” 백선생님의 말에 최하운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백선생님은 정령 이대로 최하운을 포기할 셈인가? 여자답게 보여야 할 때 거침없는 언변을 토해내는 백선생님. 어쨌든 그리하여 우리 둘은 찍 소리도 못 내고 야수를 따라 걸음을 옮겨야 했다. “진짜 둘이 아무 사이도 아니야?” 우리는 취조당하는 듯 등을 꼿꼿이 세우고 백선생님을 마주하고 있는 중이다. 의심스러운 눈길로 우리 둘을 계속해서 훑어보는 백선생님. 백선생님은 아까부터 우리 둘 사이에는 누구도 끼지 못할 특별한 공간이 형성되어있으며, 서로가 강한 교감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둥 얼토당토 없는 소설을 썼다. 그렇게 계속해서 의심하는 백선생님에게 여러모로 설명을 하는 것도 지쳐가기 시작 했다. (아까 서로 안고 있는 듯 것처럼 보였던 포즈와 내가 따라다닌 이유 등.)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백선생님은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서 또 다시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 질문에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럼 진짜 한 번도 이성으로 느낀 적 없어?” “없으니까 이렇게 친구로 지내고 있죠.” “애는 순철이에요. 순철이.” 마른안주를 씹으며 최하운이 나를 향해 툭 말했다. 나를 남자로 보는 것은 알고 있으나 발끈한 나 역시 따라 말했다. “애는 하순이에요. 하순이.” 나의 말에 미간을 찡그리며 최하운이 나를 보았고, 나는 눈을 부릅뜨며 최하운 마주했다. 그렇게 서로 남자네 여자네 실랑이를 벌이며 말다툼하고 있을 때, 갑자기 호탕한 웃음이 술 집안을 가득 메웠다. 우리는 커다란 웃음 소리에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백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백선생님은 겨우 웃음을 참고서 말했다. “최하운이나 김순이나. 김순철이나 최하순이나. 똑같이 서로 남녀이잖아?” “아.” “그렇구나.” 백선생님의 한 순간에 정리된 말에 우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을 때렸다. 그 모습에 백선생님은 또 다시 걸걸하게 웃음을 내뱉으셨다. 그렇게 한 참 동안 또 웃으시다, 묘한 웃음을 지으며 백선생님은 최하운을 가리켜 말했다. “우리 도도하신 왕자님. 순이가 있으니까 말이 참 많네?” 백선생님의 말에 술잔을 들어 올리던 하운이는 흠칫 거렸다. 그 모습에 재미있어진 난 신나서 줄줄 말했다. “애가 남 앞에선 만 날 무게 잡는데. 알고 보면 진짜 말많고 시끄러운 놈이에요.” “너 죽는다.” 하운이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고, 나는 어디 한 번 해보라고 머리를 들이댔다. 그러자 백선생님은 갑자기 굵직한 손을 뻗어 우리의 볼 한 쪽씩을 꼬집었다. “이그, 귀여운 것들.” “아, 뭐에요!”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최하운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백선생님은 최하운의 말을 무시하며 시선을 돌려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최하운은 투덜거리며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고, 나는 백선생님이 내미신 무언가를 들여다 보았다. 그것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 속엔 우람한 체격의 한 남자가 있었다. “내 첫사랑이야.” 백선생님은 볼을 분홍빛으로 붉히며 말하셨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백선생님을 바라보는데, 이어지는 말은 경악스러웠다. “내가 최하운에게 한 눈에 반한 것도 사실 첫사랑과 닮았기 때문이지.” 순간 나는 말문을 잃었다. 이 사진 속 사람이 하운이랑 닮았다고? 사진 속 남자는 백선생님 못지 않게 우람한 체격과 짧은 머리에 가무잡잡한 얼굴의 험악한 인상을 가지고 계셨다. 솔직히 지나가는 개도 어이없어 할 만한 일이었다. 최하운은 남자다우면서도 자세히 보면 요목조목 예쁘장하게 생겼다. 특히나 관심 없는 척하다 첫사랑과 닮았다는 얘기에 슬쩍 사진을 보던 당사자인 최하운은 얼굴이 가관이 아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토해내며 조심스레 말했다. “도대체 어디가 닮았다는 건지. 허허.” 나의 말에 백선생님은 발끈하더니, 직접 사진과 최하운을 비교해 가리키며 설명하셨다. “봐봐. 매서우면서도 부드러운 묘한 눈. 오뚝한 콧날. 붉은 기 감도는 섹시한 입술. 무엇보다도 이 예술적인 턱선.” 말문을 잃었다. 솔직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맥주로 답답한 목을 축였다. 그러한 우리의 반응이 못마땅한 듯 백선생님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가 싶더니 갑자기 크게 웃으신다. 시원스런 백선생님의 웃음에 우리도 따라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서로 마음이 통한 우리는 동시에 술이 담기 잔을 들어 올리며 짠- 부딪혔다. Chapter. 14 힘내요, 내 사랑 백선생님과 헤어지고 나서 집에 가는 길. 밤이 깊이 무르익으며, 흥에 취한 내 기분도 무르익었다.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비틀비틀 걷다, 갑자기 메스꺼워지는 속에 울렁거려 길옆에 우뚝 솟아있는 전봇대를 붙잡았다. 그렇게 전봇대를 감싸 안은 채 눈을 감고 고른 숨을 내쉬고 있을 때, 누군가 손을 뻗어 나를 잡아 당겼다. “전봇대랑 블루스 추냐?” 풀린 눈을 천천히 돌려 누구인지 보니 이게 누군가! 사랑스러운 내 친구 운이였다. (정신이 없어 줄곧 같이 있었다는 걸 모르는 순이였다.) “운!” 히죽 웃으며 녀석의 커다란 품에 쏙 안겼다. 나는 하운이의 큰 품이 참 좋다. 내 온 몸이 그의 품 안에 쏙 들어가는 느낌은 어린 시절 푹신푹신한 곰 인형에게 안기는 것처럼 포근하고 달콤하다. 녀석의 품은 내 삶에서 최고의 안식처와 같았다. 항상 힘들고 울고 싶은 일이 있을 때면 녀석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런 나를 그는 특별히 꽉 안아주지도, 정다운 위로의 말도 해주지 않았지만 그는 그대로 나를 아무 말 없이 침묵으로 항상 위로해 준다. 익숙한 향기에 잠이 쏟아진다. 스르르 눈을 감으며 중얼거리듯 하운이에게 말했다. “운아,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 “그러니까 작작 처마시랬지.” “웅, 그럴라 했는데. 백선생님이 쏘시는 거라서 그런지 막 입이 당기데? 청소기처럼 쭉쭉. 쭉쭉 마셔요.” 혀 꼬인 나의 말에 하운이는 피식 웃음 지으며 자신의 품속에서 나를 꺼냈다. 그러더니 이내 자신의 등을 보이며 말했다. “업혀라.” “우와~” “지금 네 상태론 날 새서 집에 도착하겠다.” 그의 말에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폴딱 뛰어 녀석의 등에 업혔다. 그리고서 목에 팔을 두르고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웅얼 말했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우리 하운이 등짝이 최고여.” “그 최고의 등짝에 침 묻히지 마라.” “이그! 걱정 마셔!”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퍽 내리쳤고, 매운 손맛에 하운이의 입술 사이로 짧은 신음이 토해졌다. 나는 깔깔깔 웃으며 다시 녀석에게 얼굴을 묻었다. 그 때 자꾸만 흐릿해지는 의식 사이로 아까 전 나지막이 백선생님이 내게 했던 말이 재생된다. 하운이의 마음에 파고 들어갈 빈틈이 없다 했다. 그리하여 과감히 포기선언을 하셨다. 어차피 안 될 거 그 시간에 어딘가 있을 자신의 진짜 연인을 찾겠다며 말이다. 강태일의 틈…… 보이는 것도 같으면서도, 아닌 듯싶기도 하다. 솔직히 자신이 없어진다. 신유라와 강태일이 헤어지고서도 서로를 잊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내가 방해꾼처럼 느껴졌다. 정말 나는 방해꾼인 것 일까.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격일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서 몸을 부대끼자, 하운이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토할 것 같아?” “아니, 아니. 있잖아, 운아.” “왜.” “그 놈에게 잊지 못하는 여자가 있어.” “…….” “나랑 비교도 안 되게 얼굴도, 마음도 예쁜 애야.” “…….” “어쩌면 승산 없는 싸움일지도 몰라. 역시나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은 것 일까.” 나의 물음에 하운이는 생각에 빠진 듯 잠시 대답이 없었다. 서로의 작은 숨소리만이 새까만 밤바람을 타고 주변을 맴돌다 흩어진다. 잠시 후 하운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이 깊은 밤과 닮은 차분한 음성이었다. “글쎄.” “…….”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쉽게 포기하는 건 김순이 너 답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 “그래.” “그래, 맞아!” 그 말을 듣고 싶었다는 듯 몸을 바로세우며 소리치자 하운이는 피식 웃었다. 솔직히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내게 말했다면, 난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녀석의 많이 자란 머리를 손으로 마구 흩트리며 말했다. “그래, 그런 거야. 어디 해볼 때까지 한 번 해보자!” “울며불며 찾아오지나 마라라.” “모르겠다! 결국 차이면 또 네 옷에 코풀어야 할지도! 어쨌든 역시 우리 럭키가 최고다. 파워 충전!” 나의 힘찬 말에 녀석은 소리 내어 크게 웃었고, 더욱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가 좋아하는 노래를 크게 불러주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숙취가 잘 해소되는 타고난 몸을 가진 나는 어렵지 않게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서 부지런히 마트에가 장을 잔뜩 봐왔다. 한비에게 강태일과 모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수한 후, 시험 준비로 고단하고 힘들 태일이를 위해서 사랑의 도시락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전혀 여성스럽지 않으며 칠칠맞은 성격 치곤, 나는 아주 요리를 야무지게 잘했다. 까다로운 입맛의 최하운도 인정한 실력이었다. 완성된 김밥, 샌드위치, 유부초밥을 가지런히 도시락 통에 담고서, 과일까지 정성스럽게 깎아 보기 좋게 도시락 통에 담으며 마무리 지었다. 사랑의 도시락 완성! 정말 완벽한 도시락이었다. 팔짱을 끼고서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 이를 보면 강태일이 조금이라도 감동 받고, 나를 여자로 봐주지 않을까? 그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따로 도혁이의 몫으로 담아 둔 쟁반을 들고서 녀석의 방으로 향했다. 슬그머니 문을 열어보니 그는 책상에 앉아 정신집중이라 써져있는 흰색의 머리띠를 두르고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 김도혁은 평소엔 빈둥빈둥 놀다, 시험보기 며칠 전 일명 벼락치기를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녀석은 한 번 집중하면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보였다. 거의 시험이 끝날 때 까지 밤을 새다시피 했다. 그렇게 눈이 붉게 충혈 되도록 공부하고 시험을 치르다, 시험이 끝나면 녀석은 침대에 쓰러져 하루 종일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올바른 공부 방법은 아닌 것 같으나, 어느 정도 좋은 성적을 맞기에 나나 엄마나 문제 삼진 않았다. “이거 먹고 해.” 쟁반을 책상 위에 올려 두며 도혁이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나는 순간 흠칫 놀랐다. 두꺼운 안경에(평소엔 렌즈를 꼈다.) 이리저리 뻗친 부스스한 머리와 퀭한 눈. 누가 이 모습을 보고 폼생폼사 꽃도혁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내 동생이지만 언제나 봐도 이런 모습은 믿기지 않았다. 시험기간 동안의 김도혁은 향기로운 남자 꽃도혁이 아닌 관리되지 않은 무성한 풀밭의 풀도혁이었다. “누나.” 녀석은 내가 손수 만든 음식을 보고서 감동에 찬 눈으로 나를 보았다. 녀석의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보니 심히 부담스러워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김도혁은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손수 만들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론은 아니나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녀석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기며 파이팅을 외쳤다. 김도혁은 열심히 하겠다는 듯 굳게 다짐하며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먹었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직접 우유를 먹여주었다. 꽃꼬남매는 그렇게 오랜만에 우애를 돈독하게 다졌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점심시간에 맞춰 도시락을 들고 그들이 공부하고 있다는 한 도서관에 찾아갔다. 시험기간이라 그런지 도서관 안은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한비가 대충 알려준 위치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내 어렵지 않게 그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흑백이고 녀석만 칼라인 것처럼 그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내게 한 눈에 띠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강태일을 보니 절로 흐뭇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과거를 준비하고 있는 서방님을 보살피고 있는 옛 여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의 앞에 앉은 주한비와 그의 애인은 공부는 안하고 서로 속닥거리며 웃고 있었다. 저래서 연애하면 성적이 떨어진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히 저들 때문에 우리 태일이만 방해 받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주한비의 뒤통수를 노려보는데, 갑자기 자신의 애인의 볼에 쪽- 뽀뽀하는 주한비. 얼씨구. 이것들이 이 신성한 도서관에서 무슨 짓이란 말인가. 공부 안하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추방당해야 마땅했다. 재수 없는 한비커플에게 갖가지 흉을 씨부렁거리다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내심 그러한 닭살 행각이 부러웠던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태일이의 뒤에 섰다. 한비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보며 부르려 하자, 나는 재빨리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알겠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한비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녀석의 예쁜 두 눈에 손을 감싸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누구게~” 순간 강태일의 온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곧이어 그는 내 두 손을 매정하게 휙- 떼어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뭐하시는 겁니까. 징그럽게.” 지, 징그럽게? 태일이의 말에 한비와 그의 애인은 킬킬 웃었다. 그들을 휙 째려보다 어쩌면 최하운보다 애교가 없을지도 모르는 그를 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강태일은 나와 마주하는 게 조금은 불편한 듯 내 시선을 자꾸 피했다. 아마도 신유라와 만나게 된 그 일 때문이겠지. 어쨌건 한 발자국 멀어졌으니 내가 두 발자국 다가가야 했다. 그의 옆에 앉으며 정성스레 싸온 도시락을 녀석의 책 위로 쿵 올렸다. “짜잔. 너를 위해 준비했어!” 도시락을 본 그의 얼굴을 살피니 살짝 놀란 눈치였다. 한비는 호들갑을 떨다 입맛을 다시며 내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강태일 또한 배가 고프긴 했던 것인지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애써 내색안하며 새침한 얼굴로 책을 덮는 녀석을 보니 뽀뽀 세례를 퍼부어 주고 싶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우리는 도서관 밖으로 나와 벤치앉아 내가 싸온 도시락을 먹었다. 도서관 주위는 무성한 나무들이 많아서 그런지 도심 속이지만 공기가 참 좋았다. 싱그럽게 초록빛을 띄는 나무와 티끌하나 없는 푸른 하늘 아래서 밥을 먹으니 더욱 꿀맛인 듯싶었다. 꼭 소풍을 나온 것처럼 기분이 붕붕 떴고, 마음이 상쾌해진다. 그래, 여기까진 좋았다. 저 주한비와 이름 모를 주한비의 애인만 없다면! 아직 어린 나이에 나올 땐 나오고 들어갈 땐 들어간 좋은 몸매를 가지고 있는 한비의 애인은 내가 싸온 도시락을 자기가 싸온 양 무지막지하게 음식을 한비의 입에 쏙쏙 넣어주고 있었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고생한 건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특히나 먹으려는 듯싶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강태일을 보니 속이 쓰렸다. 아무튼 누가 주한비 애인 아니랄까봐 아주 얼굴에 철판을 깔았구나. 정말 쌍으로 맘에 안 든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노려보고 있을 때, 어느새 샌드위치는 마지막 한 개가 남아있었다. 마지막 샌드위치에 향하는 주한비 애인의 손을 보니 저것만은 뺏길 수 없다는 생각이 치솟아 올랐다. 그리하여 나는 재빨리 그녀보다 손을 먼저 뻗어 샌드위치를 낚아챘다.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그들을 휙 노려보다 손에 쥐어진 마지막 샌드위치를 강태일의 입 앞에 갖다 댔다. “먹어.” “아니, 전……” 그가 거부하려 하자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나의 눈물에 그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빨리 먹으란 말이야.” 내가 울먹이며 말하자, 그는 알겠다고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꺼림칙한 얼굴로 내가 내민 샌드위치를 베어 먹었다. 샌드위치를 천천히 씹어 먹는 그는 꼭 돌덩이를 씹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갑자기 심히 궁금해진다. 신유라와 사귀었을 땐 어땠을까? 신유라에게서 살짝 녀석의 과거에 대하여 들은 것을 토대로 보면 지금과 변함없을 듯싶었다. 그러고 보면 신유라도 참 이 얼음왕자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겠다. 어찌됐건 마지막 샌드위치를 저들에게 안 뺏기고 강태일에게 먹일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지금까지 충분히 놀았으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겠다고 주한비와 그의 애인은 산책을 하기 위해 사라졌다. 그리하여 어색하게 우리 둘이 남아 있게 되었다. 우리는 먹었던 테이블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치웠다. 그는 아직도 나를 보는 것을 불편해 했다. 자신의 일부를 보여준 것에 대해서 신경이 쓰인가 보다. 이러한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자 녀석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공부하느라 힘들지?” “아, 뭐 그냥.” 그는 정말 할 말 없게 대충 얼버무렸다. 이거 원, 인간관계에서 기본인 의사소통조차 되지 않아 일을 어찌 이룰 수 있겠는가. 한 숨을 쉬며 빈 도시락을 차곡차곡 쌓는데, 갑자기 강태일이 불쑥 입을 열었다. “솔직히 놀랬어요.” “응? 뭐가?” 갑작스런 녀석의 말에 순간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머뭇거리는 강태일을 보았고, 그는 잠시 후 다시 말을 어렵게 이었다. “안 다가올 줄 알았어요. 그냥 뒤돌아 설 줄 알았어요.” “아. 그래서…… 싫어?” 나의 물음에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가만히 응시했다. 따뜻하게 불어오는 5월의 바람이 나의 검은 머리칼을 흔들며 지나간다. 그리고 녀석의 마음도 흔들었을까. 그 바람사이로 녀석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전해 들어온다. “조금은 기쁘달 까요. 만약 그대로 돌아섰으면 서운했을 것 같은……” 강태일은 자신이 한 말에 흠칫 자신이 놀랬다. 강태일은 어느새 귀까지 붉어져 있었다. 그는 당황하여 말을 잊지 못하다, 그러한 자신이 웃겼던 것인지 피식 웃는다. “진짜 웃기죠.” “아니야! 웃기지 않아! 절대로!” 그의 말에 나는 손을 크게 저으며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그에게서 아주 작은 틈이 보인다. 흥분에 가득 차 아니라고 과장하며 소리치는 나를 보고 강태일은 갑자기 환하게 웃었다. 찡그리는 모습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웃을 때 반달로 휘어지는 눈이 참 예쁘다. 그의 웃음에 수줍어진 나는 샐쭉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 때 녀석이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어쨌든 고……” 그는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하려다 집어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너 고맙다 말할라 했지?” 나의 말에 그는 움찔거렸다. 그런 그의 어깨를 호탕하게 웃으며 툭 쳤다. 그는 아니라고 고개를 휙 돌렸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누나는 다 알고 있다. 다 안다고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나를 보며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알면서 묻지 마요.” “알았어! 있잖아, 고마우면 나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나의 말에 그는 의심쩍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집게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제발 한 번 만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뭐, 뭔데요?” “한 번만 안아줘!” 나의 말에 그는 곧바로 뒤돌아섰다. 그런 그의 옷깃을 나는 재빨리 붙들었다. “한 번만! 뽀뽀도 아니고 한 번 안아주는 거다!” “그런 부탁이라면 싫어요.” “아따. 쩨쩨하게 굴지 말고! 나 한 번 안는 다고 너 손해 보는 건 없잖아!” 내가 계속 시끄럽게 어린아이처럼 보채자 그는 하는 수 없이 알았다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차마 내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팔을 벌렸다. 그런 그에게 나는 냉큼 폭 안겼다. 안기자 최하운과는 다른 좋은 냄새가 났다. 완전 기분이 째졌다. 오늘 두 발자국이 아니라 세 발자국이다! 하운아, 역시 포기 안하길 잘한 걸까! 그 때 조심스레 내 몸 뒤로 팔을 둘러보던 녀석은 살짝 놀라움이 묻어난 음성으로 말했다. “와.” “…….” “진짜 작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강태일을 바라보았다. 나의 둥그런 눈과 마주치자 그는 흠칫 놀라더니 갑자기 팍 나를 밀어냈다. 그리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녀석은 귀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이제 됐죠? 그럼 먼저 갑니다. 잘 가세요.” 그렇게 서둘러 말하고는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는 강태일.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서툰 녀석이기에 아주 작은 행동하나도 크게 다가온다. 나는 싱글벙글 웃다가 높디 높은 하늘을 향해 팔을 쭉 피며 기지개를 켰다. 오늘 힘들게 아침부터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오늘도 일기장에 어김없이 녀석의 이름을 적어야 겠다. ‘오늘 김순이 고귀하신 강태일 품에 안겼답니다!’ 라고.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월요일 아침. 드디어 진한고의 중간고사가 시작되는 첫 날 이었다. 백선생님은 시험기간도 예외는 없다는 듯 오늘도 어김없이 교문 앞을 지키고 계셨다. 선도부도 없이 혼자 어깨를 쫙 피고 근엄 있는 얼굴로 서있는 백선생님의 모습은 정말 한 마리의 호랑이 같았다. 그렇게 방심했던 아이들은 무더기로 백선생님께 속출되었다. 가련한 아이들. 슬리퍼를 찍찍 끌고 오는 아이, 복장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아이, 명찰을 차지 않은 아이 등이 하나 둘씩 불어나기 시작한다. 제대로 된 덫이었다. 덫에 걸린 아이들은 몸부림을 치며 불평을 해댔다. 하지만 그러한 아이들의 성화에도 백선생님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어쨌든 백선생님이 꿋꿋이 선도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옆에서 징을 쳤다. 그리고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시험 대박나라고 웃으며 크게 소리쳤다. 피곤에 절은 아이들은 그런 나를 황당하다는 얼굴로 보았다. 그렇게 백선생님과 나는 이른 아침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때 교문으로 다가오는 내 사랑 고삐리가 보였다. 반가워하며 손을 흔들려는 찰 나 나는 깜짝 놀랐다. 녀석의 가슴에 명찰이 없었기 때문이다. 힐끔 백선생님을 보니 아직 강태일을 발견하지 못한 듯싶었다. 나는 재빨리 달려 강태일의 품 안에 징을 안겨 주었다.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강태일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쨌든 동그란 징으로 강태일의 미 착용된 명찰이 감추어지게 되었다. 녀석이 얼굴을 구기며 징을 건네주려 하자, 나는 재빨리 힘으로 녀석의 품안에 밀어내며 그를 끌고 갔다. 살랑살랑 눈웃음을 치며 백선생님께 손을 흔들었고, 내 마음을 알고 있는 백선생님은 피식 웃으며 계속해서 불량한 아이들을 잡아내는데 열중하셨다. 백선생님에게서 멀어지자, 나는 한 숨을 토하며 식은 땀이 나는 이마를 훑었다. 그런 내게 강태일은 툭 쏘아붙였다. “뭐하는 짓이에요.” “인마, 너 도와준 거였어! 너 오늘 명찰 안 찼지?” 나의 물음에 그는 무슨 소리냐는 듯 그럴리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다가 자신의 가슴 부위를 보았다. 허나 명찰이 진짜 없다는 걸 알게 되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보았다. 나는 그런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수줍게 물었다. “고맙지? 사랑스럽지? 깨물어주고 싶지?” 나의 물음에 그는 마지못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에게 나는 눈웃음치며, 재빨리 가방에서 달콤한 초콜렛과 엿, 찹쌀떡, 포크, 화장지 등을 꺼냈다. 그리고 그의 품에 가득 안겨주었다. 그를 위해서 내가 준비한 선물이었다. 얼떨결에 받은 그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품에 안긴 갖가지 것들을 보았다. “제가 무슨 수능이라도 봅니까.” 유난을 떠는 나에게 까칠한 내 사랑 고삐리는 무뚝뚝한 얼굴로 물었고, 나는 그에 대해 개의치 않아하며 녀석에게 머리 위로 커다란 하트를 그리고선 크게 외쳤다. “힘내요, 내 사랑! 아자!” Chapter. 15 막무가내 울 엄마 숨 막히던 진한고의 중간고사가 드디어 끝이 났다. 긴장감으로 삭막했던 학교는 다시 평화(?)를 되찾았고, 까불며 복도를 뛰어다니는 남학생들, 옹기종기 모여 밀린 이야기꽃을 피우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생기 있게 가득했다. 무엇보다도 김도혁이 풀도혁에서 벗어나 본래의 향기로운 남자 꽃도혁으로 돌아온 것에 대하여 기뻐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샤방한 미소를 짓고 있는 꽃도혁을 보고 만세를 부르며 눈물을 흘린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한다. 뭐, 믿거나 말거나. 추선생님의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오니, 핸드폰에 한 통의 짤막한 문자가 남겨져 있었다. [네 어미 지금 올라왔다.] 엄마가 지금? 나는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핸드폰을 귀에 바짝 가져다 댔다. 지금껏 오시라고 해도 농사일 때문에 바쁘다며 상경이후 한번도 오시지 않았던 엄마였다. 쌀이나 반찬은 매일 택배로 부치셨는데, 느닷없이 웬일로 올라오신 걸까. 뚜르르- 긴 신호음이 가고 곧이어 엄마의 유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냐, 나다.] [엄마 지금 올라왔다고? 갑자기 무슨 일로? 혹 무슨 일 생긴 거야? 그리고 지금 집에 아무도 없는데?] [이 년아, 한 가지씩 물어라. 정신 사납다.] 엄마의 거친 어조의 말에 난 잠시 머릿속에 툭툭 쏟아져 오는 질문들을 빠르게 정리했다. 갑자기 무슨 일로 온 것인지는 집에 가서 따로 들어도 되었다. 무엇보다도 집 앞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스러웠다. 손목을 들어 동그란 타원의 시계를 바라보며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엄마, 나 끝나려면 4시간 정도 남았어.] [괜찮다. 시방 나는 운서방네 집이다.] 운, 운서방? 뜬금없는 말에 의문이 들기 전 곧이어 나는 엄마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아챘다. 하운이었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운서방이 뭐야. 픽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전 난 경악하며 소리쳤다. [우,운서방은 무슨! 걔는 친구라니까! 내가 몇 번 말해!] 나의 말에 엄마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네 배필로 딱 이다. 여자가 꼬이게 생겨서 쪼까 걱정스럽다만, 이 정도면 굿이여, 굿.]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엄마의 소리에 점차 미간이 좁혀지는데…… “꼬선생! 이 것 좀 복사해줘!” [아, 네! 무튼 운이한테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 엄마는 걱정말라고 껄껄 웃었으나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항상 안 하겠다고 다짐해놓고서, 뒤에서 몰래 냉큼 일을 저지르는 엄마였다. 김선생님의 부름에 석연하지 않은 얼굴로 핸드폰을 닫으며 자리에 일어섰다. 아, 불안하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학교를 끝마치자마자, 평소에는 절대 타지 않는 택시를 거금을 들여 타고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다. 불안함에 손톱을 깨물었다. 나 없는 사이 엄마는 하운이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게다가 하운이가 몹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마 성질 급한 엄마는 제멋대로 하운에게 결혼 날짜를 잡자고 할지도. 잠시 후 아파트 단지 앞에 도착을 하였고, 나는 재빨리 택시를 지불하고 튕기듯 내려 하운이의 집으로 달려갔다. 딩동- 차오르는 숨을 뱉으며 초인종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이 열리자 눈에 들어오는 하운이의 모습은 나를 흠칫 놀라게 했다. 얼마나 급박했으면 최하운이 나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을까. 아, 안타깝다. 사진을 찍었어야 했다. 길이 남을 최하운의 희귀한 모습인데. 평소에는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오며, 나를 보자마자 눈썹을 꿈틀 내던 녀석이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요즘은 먼저 문을 따고 들어간 것이었다. 하운이는 꽤나 고생을 한 듯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엄마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갔다. 게다가 건방진 하운이지만 어린아이와 어른들에게는 관대했던 그였다. 무척 당황스러웠겠지만 예의를 차리며 엄마를 대접했을 것이다.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엄마는?” “안에 계셔.” “엄마 네 얼굴은 모르는데 어떻게 안 거야?” “몰라. 운동 갔다 오는 길에 아파트 입구 앞에서 네 어머니가 서계셨는데, 나를 보자마자 자네가 최하운이냐고 물어봤어. 그렇다고 하니까 다짜고짜 집으로 가자고.” 어려서부터 찍기 기술이 능했다고 항상 엄마가 자랑했었다. 그러나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어쩔 때 보면 엄마의 직감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최고라고 생각했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만약 최하운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쩌려고. 정말 못 말리는 엄마의 모습에 픽 웃음이 나왔다. 엄마 비위 맞추려 고생했을 그가 조금은 미안해져 발꿈치와 함께 손을 들어 녀석의 땀을 닦아주었다. 그 때 거실 쪽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운서방~ 순이 왔는가?” “예? 아, 예!” 엄마의 부름에 우리는 짧게 한 숨을 쉬며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시야에 포착되는 엄마의 모습에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엄마는 마치 여왕이라도 된 것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엄마는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고서 테이블에 발을 올리며 냉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으나, 한 편으론 마음이 아팠다. 오랜만에 본 엄마의 얼굴은 더욱 가무잡잡해져 있었고, 주름살은 더욱 늘어나 있었다. 20대만 해도 나보다 더욱 뽀얀 살결과 가녀린 몸을 가지고 있던 엄마였다. “서서 뭐하나. 퍼뜩 둘 다 앉아라.” 엄마의 말에 하운이는 겸연쩍어하며 앉았다. 나도 그 옆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였다. 나란히 앉은 우리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엄마의 얼굴에 갑자기 흡족한 웃음이 스쳐갔다. 그리고는 브라보를 크게 외치며 박수를 큼직하게 쳤다. “아따, 참말 잘 어울리네!” 그 말에 목이 타 앞에 있던 물을 마시던 하운이는 푸- 물을 뿜어냈다. 하운이의 모습에 엄마는 깔깔깔 웃었고, 하운이는 붉어진 얼굴로 당황하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걸레를 가지러 가기 위해 하운이가 일어섰고, 그가 자리를 비우자 나는 엄마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물었다. “엄마, 하운이한테 쓸데없는 말 안했지?” “쓸데없는 말이라니. 이 집은 전세인가. 앞으로 꿈은 무엇인가. 결혼은 언제쯤 할 것인가. 이 정도?” 엄마는 천연덕스럽게 말하더니 냉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며 웃었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못한다, 못살아. 이마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크게 뱉으며 말했다. “하운이는 친구고. 내가 좋아하는 놈 따로 있다 말했잖아.” “뭐, 그 어린놈의 새끼?” “아따, 그게 뭐여! 새끼라니! 그 고귀하신 몸에!” 나의 말을 한 귀로 흘러들으며 시큰둥한 얼굴로 귀를 파는 엄마. 굵은 손가락에 묻어나온 귀지를 후- 불으며 엄마는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안 넘어온다며. 어린놈이 뭐가 아쉽다고 너 같은 년에게 순정을 바치겠냐.” “아, 아니야! 다 넘어왔다! 한 발자국만 있으면 게임 끝!” 순간 울컥한 나는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내뱉었고, 엄마는 그런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본다. 난 애써 몸을 꼿꼿이 세우며 엄마의 시선을 마주했다. 엄마는 갑자기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을 짓더니 내게 말했다. “불러.” “뭐?” “그 놈 부르라고.” “무, 무슨 소리야. 지금 태일이는 바빠. 아주아주 바빠.” “바쁘고 뭐고. 미래의 장모님이 될 사람이 오셨다면 다 뿌리치고 와야지. 퍼뜩 안 불러!” 엄마는 눈을 부릅뜨며 내게 천둥소리처럼 크게 소리쳤다. 흠칫 놀라던 나는 울상을 지으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이미 마음을 굳게 다진 듯 남은 냉커피를 벌컥벌컥 마시며 나에게 압박을 가하는 눈빛을 지었다. 그 눈빛에 나는 또 압도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었다. 나는 알았다고 힘없이 대답하며 핸드폰을 쥐고 부엌으로 왔다. 부엌에서 우리 모녀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하운이는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진짜 부르게?” “가짜를 불러야지.” 강태일이 웬만한 부탁은 들어주는 녀석이었다면 시도라도 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 봐도 뻔한 사실이었다. 이 말을 꺼낸 순간 녀석은 냉정하게 전화를 툭 끊어버리겠지. 지금 이 상황을 대신 해 줄 사람은 그 녀석 밖에 없었다. 나는 한 숨을 길게 내쉬며 한비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란스러운 한비의 컬러링 소리가 정신을 더욱 사납게 했다. 어쨌든 나는 치킨으로 녀석과 비밀리에 엄마를 속일 계약을 맺었다. 아마 지금 이 상황을 강태일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장모님, 아- 해보세요!” 정말 눈꼴 시려 못 봐주겠다. 강태일에서 아주 살짝 애교만 첨가하여 행동해 주라고 부탁했더니, 녀석은 나를 물먹이려는 것인지 특유의 눈웃음으로 엄마를 녹이고 있었다. 주한비가 내민 사과를 아삭 베어 물던 엄마는 한비의 바가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웃었다. 그렇게 주한비는 엄마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재롱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나와 하운이는 말문을 잃어버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야, 순이야. 이게 과묵한 거면 저 놈은 뭐노?” 어느새 찬밥신세가 된 하운이를 발가락으로 가리키며 엄마가 물었다. 갑자기 자신을 가리키자 하운이는 흠칫 놀랐고, 나는 엄마의 말에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 그리고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는 주한비를 휙 째려보았다. 내가 저 녀석을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강태일은 올 수 없다고 우격다짐했어야했다. 지금까지 전화로 엄마에게 강태일에 대해 말했었다. 굉장히 말도 없고, 까칠하며 무뚝뚝하지만 가끔씩 쑥스러워하거나 웃을 때 굉장히 귀엽다고. 그런데 지금 주한비는 강태일인 척 해주라고 불렀더니 물 만난 물고기마냥 신나하며 자신의 모습을 마구 과시하고 있었다. 나는 한 숨을 기다랗게 뱉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머릿속이 교통체증처럼 더욱 혼잡해졌다. 그 때 컬러링과 같은 요란스러운 한비의 벨소리가 집 안을 가득 메웠다. 엄마의 어깨에 기대있던 한비는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발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한비입니다! 어, 태일아! 나 지금 꼬선생네에 왔어!] 한비의 말에 나와 하운이는 기겁하며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엄마는 방금 들려온 황당한 한비의 말에 자신의 두 귀를 의심하며 한비를 보았다.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한비는 웃으며 태일이와 계속 통화를 했다. 저 녀석 기어이 사고칠 줄 알았다. [응, 태일아! 곧 갈게!] 그렇게 마지막까지 진짜 태일이를 부르며 핸드폰을 닦는 주한비.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절망의 늪에 빠졌다. 모든 게 끝이었다. 끝- 엄마는 굳은 얼굴로 생글생글 웃는 한비에게 슬쩍 물었다. “방금 누구랑 통화한겨?” “아, 태일이라고 제 친구인데 꼬선……”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한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틀어막았다. 무섭게 일그러지는 엄마의 모습에 한비는 겁을 잔뜩 먹었다. 그러더니 이내 재빨리 자신의 가방을 챙기고서 폴딱 일어섰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저는 바빠서 이만." 그리고서는 녀석은 부리나케 현관으로 달려갔다. 혼자 도망치는 얍삽한 한비를 소리쳐 부르려고 하는 찰나, 엄마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네가 시방 이 어미를 속인거여?” “아, 아니. 엄마 그게……” “너 일로 와. 시집이고 뭐고 머리 깎아서 절로 보내버릴 라니까.” 그러면서 엄마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거실 구석에 세워져 있던 야구방망이를 들어올렸다. 나는 소리지르며 재빨리 하운이의 등 뒤로 숨었다. 엄마는 하운이의 등 뒤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나에게 호랑이처럼 포효했다. “너 일로 안 와!” “아, 저기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하운이가 당황한 얼굴로 엄마를 말리려 하자, 엄마는 갑자기 휘두르던 방망이를 멈춰세우더니 눈을 반짝이며 하운이를 보았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하운이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역시 우리 운서방이 제일 낫다.” “예?” “저 놈은 앞에서 살랑살랑 꼬리흔들며 뒤에서 뒤통수 칠 놈이다. 미안하네. 잠시 내가 여우같은 놈에게 홀렸나 보네. 우리 운서방을 두고.” “아니, 저기……” 엄마의 말에 하운이는 차마 말을 못 잇고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다. 내 손으로 폭탄을 쥔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쳤다고 주한비를 부른 것일까. 한 숨이 절로 푹푹 새어 나왔다. 불같은 성격의 엄마는 한 번 한다면 정말 하는 분이었다. 진짜로 나를 절로 보내버릴 지도 몰랐다. 일단 하운이의 등이 제일 안전했기에, 그의 등에 붙어서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급박한 상황에서 하운이 만이 날 살려줄 유일한 길이었다. “운아, 한 번만 살려줘.” “뭐?” “나 진짜 머리 깎이고 절로 갈지도 몰라. 그냥 예라고만 해. 부탁해~ 응?” 나의 부탁에 하운이는 한 숨을 뱉으며 욕을 작게 내뱉었다. 역시 넌 나의 럭키다. 엄마는 방망이를 지팡이 삼아 의지하고선 하운이를 향해 막무가내로 물었다. “우리 순이가 보잘것 없지만, 그래도 책임져 줄텐가?” “아…… 예.” “어이구, 역시 우리 운서방이야!” 하운이가 힘겹게 대답하자, 엄마는 신나는 얼굴로 하운이의 팔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어느새 엄마는 하운이 덕에 누그러져 있었다.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하운이의 등 뒤에서 조심스레 빠져나왔다. 그 때 엄마가 우리 둘을 향해 갑자기 명령조 말했다. “그런 기념에서 둘이 찐하게 뽀뽀나 한 번 해 봐라.” “뭐?” “네?” 갑작스런 엄마의 말에 우리는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엄마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간다. 우리는 불길한 예감에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엄마가 방긋방긋 웃으며 우리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아따, 젊은 것들이 그렇게 숙기가 많아서 쓰나.” 갑자기 음흉한 웃음을 짓던 엄마는 투박한 손으로 나와 하운이의 뒤통수를 잡아 밀어내더니 우리의 주둥이를 부딪치게 했다 “읍…읍.” 억지스럽게 두 입술이 맞부딪혔다. 우리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떨어지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지만, 시골에서 쌀 가마니를 거뜬히 드는 엄마의 힘에 못이겨 계속 입술을 부딪히고 있었다. 살다 살다 이러한 뽀뽀경험을 갖는 사람은 아마 우리 밖에 없을 것이다. 엄마는 몸부림치는 우리들을 보더니 가늘게 눈을 반달로 휘며 말했다. “아따, 눈꼴시려워라. 닭살이다.” 역시 엄마를 당해낼 자는 없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엄마는 천하무적 막무가내였다. 그 때 문이 벌컥 열리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도혁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엄마는 우리를 잡고 있던 손을 그제야 놓았다. 우리는 재빨리 떨어지며 입술을 손으로 문댔다. “엄마!” “아들~” 두 팔을 벌리며 도혁이를 맞이하려던 엄마의 얼굴이 갑자기 빠르게 굳어졌다. 엄마를 향해 뛰어가던 도혁이는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런 도혁이를 향해 엄마는 손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너 일로와.” “왜… 왜?” 험악해진 엄마의 얼굴에 불안감이 엄습한 도혁이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며 의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엄마는 들고 있던 야구 방망이를 두 차례 공중에 크게 휘저었다. 그 모습에 김도혁은 화들짝 놀랬다. 엄마는 버럭 소리지르며 뛰어가 김도혁을 잡았다. 그리고 녀석의 손이 많이 간 머리를 휘어잡으며 말했다. “너 머리 꼬락서니가 왜 이래? 자고로 사내새끼는 머리가 짧아야지. 기르긴 왜 길러!” “안 돼! 머리는 내 생명이야!” 티격태격 하는 부자를 멍한 얼굴로 바라보던 나는 슬쩍 하운이를 향해 눈을 돌렸다. 순간 눈이 마주친 우리는 흠칫했다. 장난으로 녀석에게 볼에다가는 자주 했지만 입술은 처음이었다.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는 하운이에게 나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널 볼 면목이 없다. 미안하다.” “뒷일은 네가 알아서 정리해라. 난 모른다.” “응, 알았어. 무튼 살려줘서 고맙다. 뽀뽀는……” “그건 됐고. 막무가내로는 네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하운이는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다가 엄마를 향해 피식 웃음지으며 말했다. “너보다 한 수 위인 분이 있다는 걸 오늘 알았다.” 그 말에 나는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엄마를 따라올 자는 없어.”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그렇게 한 바탕의 큰 소란이 지나가고 고요한 밤이 되었다. 아까의 소란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밤은 아주 조용했다. 투명한 창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쏟아져 온다. 그 달빛에 드리워진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다, 엄마의 자갈같이 거칠어진 손을 만졌다. 세월의 고단한 흐름에 엄마의 손은 부딪히고 부딪혀 상처로 가득해지며 거칠어졌다. 엄마와 단 둘이 침대에 누었다. 오랜만에 엄마와 자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의 가슴에 얼굴을 파고들었다. 푸근한 엄마들만의 젖내가 났다. 엄마는 손으로 나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달콤한 손길에 잠이 스르르 몰려 왔다. 그 때 차분하고도 부드러운 엄마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안 우냐?” “안 울어.” “이제 괜찮아?” “괜찮아.” “정말로 괜……” “괜찮다니까 그러네요. 나이가 몇인데. 나도 이제 엄연히 어른이야.”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 엄마의 말을 잘라내며 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나의 말에 엄마는 피식 웃음 지었다. 그리고는 더욱 나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아무리 내가 나이를 먹고 자라도 엄마에게 나는 불안하고 항상 키져줘야 할 것 같은 어린 딸일 것이다. 이젠 내가 지켜줘야 하는데……. 그 길은 아직 먼 것만 같아 송구스러워 눈물이 났다. 그 때 엄마가 내게 툭 말을 꺼냈다. “그 아이.” “응?” “의외였어.” “뭐가?” “좀 더 밝고 유쾌한 아이일줄 알았거든.” 엄마의 말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살짝 웃음지으며 물기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도 엄마……” “…….” “항상 나한테 웃어준다. 바보 같이.” Chapter. 16 강태일과 최하운 엄마는 바로 다음 날 일찍 새벽차를 타고 집으로 내려가셨다. 끝까지 왜 온 것인지에 대해 대답을 해주시지 않고서 말이다. 그저 ‘그냥’이라고만 대답했다. 하지만 엄마의 성격으로 보아 ‘그냥’일리는 없었다. 엄마는 항상 계획을 세우고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성실한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 일 없이 올리는 없었다. 그렇게 엄마는 내게 궁금증만 남겨두고 부쩍 바빠진 농사일을 하기 위해 되돌아가셨다. 그리고 나 역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오늘 2학년 5반의 오전 2교시수업은 백선생님의 체육시간이다. 백선생님의 초대로 피구에 이어 두 번째로 참여하는 수업이었다. 시험이 끝난 후라서 그런지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백선생님의 옆에 서서 아이들을 훑어보다 강태일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한 쪽 눈을 찡긋하며 윙크를 날렸다. 그러자 녀석은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렸다. 에이, 부끄러워 하기는! 수줍게 웃으며 강태일을 바라보고 있을 때, 백선생님은 우렁찬 목소리로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은 남녀 짝 지어서 할 수 있는 재미있는 게임을 할 것이다.” 남녀 짝 지어서 게임을 한다는 것에 아이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흥분해했다. 그러면서 짝이 되고 싶은 이들을 향해 아이들은 힐끗힐끗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여학생들의 많은 시선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는 강태일에게 향했다. 강태일은 그러한 시선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여자아이들은 빠르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시치미를 뗐다. 그는 대수롭게 생각지 아니하며 다시 무료한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다시 여자애들은 수줍어하며 강태일을 바라보았다. 사심이 가득한 여자아이들의 시선을 다 흩트리고 싶었지만 애써 주먹을 꽉 쥐며 참았다. 그나저나 S라인 몸매의 애인을 두고 있는 주한비가 왜 저렇게 방방 뛰며 좋아하는 것 일까. 나중에 한비의 애인에게 은근슬쩍 이 사실을 알려줘야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주한비를 슬쩍 흘겨보았다. 그리고서 무심코 시선을 돌리는데, 순간 백선생님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음흉한 웃음이 눈에 포착됐다. 저 웃음이 의미하는 것은? 머릿속에 둥둥 의문을 떠올리고 있을 때, 백선생님은 아이들을 향해 지시했다. “자, 남녀 각각 번호대로 줄을 서도록!” 백선생님의 명령에 아이들은 빠르게 몸을 움직여 번호대로 남자 줄, 여자 줄을 정렬했다. 우왕좌왕하지 않고 빠르게 만들어진 줄을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짓던 백선생님은 이어 말했다. “자, 그러면 이제 짝을 지어주겠다. 맨 끝 뒤에부터 짝을 맞추기 시작한다. 즉 여자 끝 번호와 남자 끝 번호가 서로 짝이 되는 것이다.” 백선생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들은 끝에서부터 한 커플씩 손을 잡았다. 그렇게 남녀의 손이 이어지고, 손이 이어지고서 맨 마지막으로 남은 강태일. 그의 손에는 무엇도 잡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강태일과 짝일 될 여자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2학년 5반은 여학생보다 남학생이 한 명 더 많았다. 곳곳에서 여자아이들의 아쉬움이 섞인 탄성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순간 나는 백선생님의 의도를 알아챘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백선생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강태일을 향해 말했다. “남은 강태일은 꼬선생과 파트너가 되면 되겠군요.” 백선생님의 힘찬 말에 나는 교생임을 망각하며 손을 번쩍 들고 ‘브라보!’를 외쳤다. 여자아이들은 시샘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너희들이 그렇게 노려봐도 강태일은 내 것이다! 나는 감동에 찬 눈으로 백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백선생님은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앞으로 나 김순이 백선생님께 충성을 바치겠나이다. 충성! 강태일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폴짝폴짝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발걸음으로 뛰어가 녀석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마주잡은 두 손을 싱글벙글 웃으며 크게 흔들었다. 이번 시간에 남녀 짝지어하는 게임은 백선생님이 직접 창작해낸 커플 얼음땡이었다. 이름 하여 백선생의 커플 얼음땡! 게임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어느 때처럼 팀은 홀수 팀과 짝수 팀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각 팀에는 남녀로 둘로 이루어진 12커플씩이 있다. 각 커플은 서로의 한 발과 한 발을 한데 끈으로 묶는다. 파트너끼리 서로 일심동체가 되어 움직여야 했다. 게임은 총 여섯 판으로 하며, 세 판씩 서로 번갈아 술래가 된다. 여기서 제한이 있는데 술래에게 잡히려 할 때 얼음을 하는 경우 그 팀에서 반 이상이 얼음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할 경우 상의 하에 한 커플이 빠져야 한다. 또한 백선생님의 의도가 깊게 담겨진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얼음을 할 때 파트너끼리 서로 껴안으며 얼음을 외쳐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땡을 해주지 않을 때 까지 서로 껴안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제한 시간 안에서 제일 많이 살아남아 있던 팀이 이기게 되는 것이다.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백선생님의 호루라기가 우렁차게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제 1라운드! 첫 번째 경기는 우리 홀수 팀이 술래가 되었다. 서로 발을 묶고 있었기에 다들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처음은 잡기는커녕 서로 호흡을 맞추는 연습을 해야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서로와 호흡을 맞춘 우리 팀은 짝수 팀을 잡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데 우리 일명 태이커플은 다른 커플처럼 힘들게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쫓고 도망가느라 정신이 없을 때 똑똑하고 총명한(?) 우리 태이커플은 빈틈이 보이는 커플을 잡기 위한 책략을 세운 것이다. 역시나 발이 묶여 움직이는 게 힘이 들었던 주한비와 부반장 커플은 잠시 멈춰 쉬고 있었다. 우리는 조용히 발을 맞춰 걸음을 옮겨 주한비와 부반장의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오자 동시에 강태일은 주한비의 어깨를 나는 부반장의 어깨를 잡았다. 갑작스런 손길에 그들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눈이 커다래진 주한비를 향해 혀를 쏙 내밀며 말했다. “아웃!” 주한비는 복수를 다짐하며 불타는 눈으로 잡혀 탈락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렇게 잠시 후, 마침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홀수 팀은 총 12커플에서 4커플이 살아남았다. 이제 반대로 우리가 도망자가 되었다. 주한비는 죽어라 우리들만 쫓겠다는 듯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우리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한비에게 나는 어디 한 번 해볼 테면 해보라는 오만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나의 웃음은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격으로 한비를 더욱 열 오르게 했다. 그렇게 제 2라운드를 알리는 백선생님의 힘찬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무섭게 쫓아오는 주한비와 부반장 커플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발을 맞춰 재빨리 도망쳤다. 역시 우리는 천상의 인연이었다. 어쩜 이리 호흡도 잘 맞을까. 혼자 히죽 웃고 있을 때 강태일이 나지막이 내게 말했다. “집중해요. 스텝 엉키니까.” “응!” 그런데 그 때 반대쪽에서 다른 짝수 팀의 한 커플이 갑자기 다가왔다. 뒤에 쫓는 주한비와 부반장 커플만 신경 쓰다 순간 잡힐 뻔 한 우리는 화들짝 놀라며 서로를 안고서 얼음을 외쳤다. 그 커플은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렸다. 하마터면 잡힐 뻔했다. 천만다행이었다. 주한비와 부반장 커플은 우리가 풀리자마자 바로 잡겠다는 듯 우리 앞에 떡하니 멈춰 섰다. 그나저나 이거 꽤 긴장된다. 녀석의 품에 묻은 얼굴이 붉은빛으로 피어올랐다. 두근두근 가슴이 떨렸다. 저번에 떼를 써서 녀석의 품에 안긴 적은 있었다. 허나 그 순간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랫동안 안고 있을 줄이야. 백선생님 덕분에 오늘 크게 한 건 했다. 앞에 주한비네 커플이 버티고 있었기에 다른 우리 팀은 쉽사리 우리를 풀어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계속해서 껴안고 있었다. 좋아, 이런 상황 좋아. 나는 히죽 웃으며 녀석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그러자 녀석은 흠칫 놀랬다. 그 때 이 달콤한 상황을 깨부수려는 무법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저 좋다고. 쯧쯧. 나중에는 뽀뽀하는 걸로 업그레이드시켜야겠네.” 그 말에 나는 두 귀를 쫑긋 세웠다. 학교에서 수업으로 하기에는 좀 거시기한 게임이었지만 생각만 해도 좋았다. 반짝하는 나를 보고 주한비는 갑자기 소리 내어 웃더니 방심하고 있는 홀수 팀의 다른 커플이 보이자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 때 고봉이네가 다가와 ‘땡’을 외쳤다. 그 순간 일부러 움직이는 척 하였던 주한비네 커플이 바로 몸을 돌려 다가왔다. 놀란 나는 제멋대로 움직이려 하다가 앞으로 몸이 쏠렸다. 악, 넘어지려 한다. 눈을 질끈 감는데 그 순간 재빠르게 강태일이 나를 끌어 당겼다. 허나 뒤로 무게중심이 쏠려버려 우리는 뒤로 쾅- 넘어져 버렸다. 꾹 감았던 눈을 뜨는데 나는 강태일이 한 손으로 안고 있었기에 땅에 부딪히지 않았다. 아이들이 놀라며 재빠르게 다가왔다. 그런데 보니 녀석의 팔뚝에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보니 위험하게 운동장 모래알에 섞여 있던 있던 유리조각 하나가 그의 팔뚝에 박혀버린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소리 지르며 녀석의 팔뚝을 붙잡았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괜찮다는 강태일을 억지로 끌고 양호실에 왔다. 피가 방울지며 계속 붉게 맺히는데 안 아프긴 뭐가 안 아프다는 것일까. 역시 남자들이란 강한 척 잘하는 족속들인가 보다. 흥, 웃기지도 않아. 양호선생님께서 상처가 난 곳에 연고를 발라주고 밴드를 붙이고서 약통을 들고 일어서자, 나는 그에게 대뜸 다가가 울먹거리며 물었다. “많이 아파?” “별로.” 강태일은 무표정으로 짧게 말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엄살이 심한 나로서는 무지 아프게 보였다. 피가 굵은 소낙비의 빗방울처럼 뚝뚝 흘러 내렸었다. 괜찮다고 하지만 분명 굉장히 따갑고 아플 것이다. 괜히 내가 다 아프다. 어느새 나의 눈망울에는 투명한 눈물이 그렁그렁 가득 고였다. 훌쩍이는 나를 보고 그는 흠칫하더니 당황하며 내 어깨를 붙들었다. “진짜 안 아프다니까요.” “피났는데.” “살짝 박힌 거뿐이에요.” “그래도…….” 울음에 가빠지는 숨 때문에 말을 잇지 못하고 나는 계속해서 훌쩍였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나를 보고 한 숨 쉬며 살짝 얼굴을 찌푸리던 녀석은 가만히 날 보더니 갑자기 피식 웃었다. 갑작스런 웃음에 샐쭉한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자, 그는 길고 큰 손을 들어 뻗어 내 머리를 마구 흩트리며 말했다. “진짜 웃겨.” “조,좋은 말이야?” “글쎄요.” 녀석의 아리송한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볼을 복어처럼 크게 부풀렸다. 그러자 갑자기 내 코를 쭉 잡아당기는 강태일. 나는 아픔의 소리를 내지르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살짝 고개를 틀어 옆에 있던 거울을 바라보는데, 루돌프처럼 코가 새빨개져 있었다. 그리고 양 볼 또한 분홍빛으로 곱게 물들어 있었다. 사실 그의 짓궂은 장난에 조금 당황하기도 했으나 무척 기뻤다. 어느 정도는 이제 나를 편히 생각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좀 더 부드럽게 만져주면 좋겠지만 어쨌든 그의 손길이 닿으니 황홀했다. 슬쩍 웃으며 강태일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데, 갑작스레 뒤편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작 그만.” 깜짝 놀라며 뒤를 보니 추선생님이셨다. 추선생님은 허리에 손을 얹고서 강태일을 노려보고 있었다. 강태일은 그런 추선생님의 시선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오만하고 방자한 태도가 마음에 안 드신 건지 씩씩 거리던 추선생님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추선생님의 콧구멍이 크게 벌렁거렸다. 무슨 원한이 있는 건지 모르지만 평소에도 강태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추선생님은 포효하는 목소리로 강태일에게 소리쳤다. “이 시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 놈! 교생도 염연히 선생님이거늘. 감히 함부로 머리를 만지고 코를 당겨! 그게 학생이 선생에게 할 짓이야!” 난 그 말에 눈을 커다랗게 뜨며 손을 크게 휘저었다. 사실 나는 자연스러운 스킨십에 기분이 좋았다. 강태일은 추선생님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더니, 곧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죄송하네요.” “이, 이자식이!” “선생님. 부러워서 그러시는 거죠?”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강태일이 대뜸 물어보자 추선생님은 입만 금붕어처럼 뻐끔거릴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아, 그러셨던 거야? 그런데 왠지 모르게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때 강태일이 추선생님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가까이 했다. 그리고 낮은 음성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데 손대지 말아요.” 그리고는 추선생님의 귀에 무어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추선생님의 빨개진 얼굴로 괴성을 내질렀다. 강태일은 피식 웃더니 비뚤어진 넥타이를 다시 똑바로 정돈해주며 추선생님의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학생인 강태일은 여유로웠고, 정작 그의 담임선생님은 추선생님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누가 한 수 위인지 뻔히 보였다. 성난 황소처럼 콧김을 내뿜으며 노발대발 하던 추선생님이 강태일의 멱살을 쥐려하자 나는 재빨리 이를 제지하며, 통나무 마냥 굵은 추선생님의 손목을 잡았다. “아이고, 추선생님! 참으세요!” “내 이 개자식을!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원래 강태일이 좀 싸가지 없잖아요. 참으시고 나가서 저랑 화를 가라 앉혀요.” 나는 온 힘을 다하여 추선생님의 거대한 덩치를 끌고 양호실에서 나왔다. 양호실 문을 닫는 순간 보인 강태일은 이참에 땡땡이나 치자는 듯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참 녀석도 한 성깔한단 말이야. 무슨 배짱인지 모르지만 내가 다 간 졸였다. 차가운 음료수 한 캔을 단숨에 비워낸 추선생님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들고 있던 캔을 잔뜩 찌그러뜨렸다. 그 모습에 나는 흠칫 놀라며 추선생님의 눈치를 봤다. 정말 이러다가 우리 태일이 언제 한번 추선생님께 날 잡혀서 먼지 나게 맞는 거 아닌가. 절대 그리되게 할 수는 없었다. 나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있는 추선생님이니 상큼 발랄한 애교로 마음을 풀어드려야겠다. 나는 추선생님의 마음을 달래드리기 위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태일이가 뭐라고 했기에 이렇게 화나셨어요?” “아, 그 자식이!” 무슨 말을 하려다 추선생님은 울분이 터지는 지 내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마저 휙 뺏어가 비워냈다. 입가에 흘러내린 음료수를 손으로 훔치며 추선생님이 입술을 뗐다. “내거니까.” “네?” “내거니까 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나는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아까 강태일이 추선생님께 했던 말을 정리해보면…… ‘그런데 손대지 말아요.’ . . ‘내거니까.’ 기분이 아리 송송하다. 강태일 저런 낯간지러운 말을 절대 할리가 없다. 그것도 상대가 나였다. 그렇다고 해서 추선생님께서 헛소리를 들은 것도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녀석은 단순히 추선생님을 골려주기 위하여 저런 간지러운 말을 뱉어낸 것이다. 그렇다하더라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어찌할 수 없다. 단순한 농담일지라도 어느 여자가 ‘내거니까’ 라는 말을 듣고서 아니 설렐 수 있겠는가. 그게 언젠간 부디 진심이 되길 간절히 바래본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추선생님의 종례가 마치자, 아이들은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섰다. 바삐 교실 밖을 나가려는 아이들의 쏙쏙 피하며 나는 재빨리 강태일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막 가방을 메고서 자리에 일어서는 강태일의 손목을 붙잡으며 잠시 숨을 토했다. 강태일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까만 눈동자는 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강태일에게 대뜸 소리쳤다. “밥 묵자!” 다짜고짜 사투리를 섞어 외친 밥 묵자는 나의 말에 녀석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이내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매정하게 말했다. “안 먹어요.” “아따. 오늘 나 때문에 다친 거 미안해서 그래.” “그건 됐다니까요. 신경 쓰지 마요.” “내가 안 되겠어서 그런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만해! 다 해줄게!” 나의 말에 그는 솔깃해진 듯 눈이 갑자기 동그래졌다. 무언가 먹고 싶은 게 생각이 났나 보다. 부디 내가 할 수 있는 요리이기를 바라며 초롱초롱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데, 녀석은 나를 힐끔 보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닭.” “닭?” “닭볶음탕.” “닭볶음탕?” 되물어보자 그는 살짝 볼을 붉히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무심한 얼굴이나 인상만 쓰고 있는 얼굴만 보다가 가끔씩 지어주는 이런 희귀한 얼굴을 보게 되면 정말 감격스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사랑스러운 나의님에게 오동통한 토종닭으로 맛있는 닭볶음을 선사하리라. 나는 두 손을 모으며 힘주어 말했다. “역시 우리는 통해! 마침 어제 엄마가 왔다갔는데 시골에서 기른 닭을 잡아오셨거든! 그건 순수 토종닭이야. 일반 마트에 파는 닭과 비교할 수 없이 영양만점이고 육질도 최고지!” 그 말에 솔깃해진 그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나의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 “가요.”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막상 데려오긴 했지만 내가 사는 곳을 보이니 조금 부끄러웠다. 과연 그는 내 집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앞치마를 입고서 냉동에 넣어두었던 닭을 꺼내고 슬쩍 거실을 바라보았다. 강태일은 소파에 가만히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도 조금은 불편한 듯 자세가 어정쩡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몸을 돌리는데, 벌컥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하운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김순이! 게……” 무어라고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흐릿해지며 잘려졌다. 아마도 강태일을 보고서 말문이 막힌 듯싶다. 나는 재빨리 거실로 달려 나갔다. 그런데 태일이는 자리에 일어서 정중하게 하운이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고, 그의 인사를 받는 하운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번에 주한비가 우리 집에 왔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왠지모르게 서로를 알고 있는 듯한? 초면은 아닌 듯 싶다. “혹시 너희들 서로 알아?” 나의 물음에 그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둘 다 입이 무거운 녀석들이었다. 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하운이는 시선을 돌리며 무심히 대꾸했다. “그냥, 조금. 너 내 게임기 어디있어?” “어? 아 그거 도혁이 방에 있어.” 나의 말이 끝나자 마자 최하운은 도혁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런 그를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바라보다 강태일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 역시 최하운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려는 찰나 갑자기의 그의 핸드폰 진동이 징- 울렸다. 강태일은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곧바로 핸드폰을 열어 귀에 가져다댔다. 왠지모르게 불길하다. 슬쩍 녀석의 얼굴을 살피며 바라보고 있을 때, 무어라고 통화하던 강태일은 전화를 끊으며 내게 말했다. “미안해요. 일이 생겨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일? 그럼 안 먹고 갈 거야?” “아, 네. 그렇게 됐어요. 죄송해요.” 그의 말에 무척 서운한 표정을 짓자, 녀석은 가볍게 웃으며 내 머리를 흩트렸다. 그리고는 평소와는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타이르듯 말했다. “대신 다음에 제가 밥 사드릴 게요.” “진짜?” “네.” “정말로?” “그렇다니까요. 속고만 살았어요?” 그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고, 진심임을 확인한 나는 자리에서 촐랑거리며 방방 뛰었다. 그리고 곧 그의 제안에 나는 손으로 오케이를 만들었다. 그러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들고서 걸음을 옮겼다. 강태일을 현관까지 배웅하고서 몸을 돌리니 최하운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반짝하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태일이 어떤 것 같아?” 나의 물음에 그가 느리게 눈동자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가끔씩 아주 짙어지는 것 같이 묘한 눈이 된다. 그는 잠시 동안 가만히 날 응시 하다가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뗐다. “네가 하도 좋다 해서 굳이 말리지는 않지만.” “…….” “난 쟤 맘에 안 들어.” “…….” “나랑 같은 부류의 놈이라서 기분 나빠.” 같은 부류?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하운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흔들림 없는 차분한 시선으로 계속해서 나를 응시했다. 같은 부류라면…… 잘났다는 것? 둘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의 측근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게 그들은 몹시 잘났다는 것이었다. 좀 씁쓸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같은 부류라고 칭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할 말이 딱히 없으며 왠지 이 분위기가 싫었던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태일이가 너 못지 않게 잘난 것 같으니 좀 짜증나냐?” 하지만 그는 장난스런 나의 말에도 웃지 않았다. 앞치마를 쥐며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때 녀석이 불투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평범한 놈 만났으면 좋겠어.” 그가 말하는 평범함이 무엇인지 순간 알 것 같았으나 떠올리지 않았다. 떠올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때 녀석의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옆에 서며 말했다. “눈물을 가슴에 품은 놈 옆에 있으면……” “…….” “그 눈물을 대신 마시고 흘리게 돼.” 그의 강한 시선이 느껴진다. 자신을 보라고. 자신을 보라고 하는 듯 무척 뜨거운 시선.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운이를 바라보았다. 두 눈이 마주쳤고,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가만히 날 응시하더니 손을 뻗어 내 눈가를 만졌다. 그리고 낮으면서도 단호한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넌 울면 안 돼.” Chapter. 17 사랑이 오는 소리 교생실습이 5월에 많이 이루어지는 이유 중에 한 가지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5월은 행사의 달이라는 점 일 것이다. 각 종 즐겁게 할 수 있는 행사는 아이들에게 더욱 친근히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며, 더욱 친목을 돈독히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축제, 체육대회, 수학여행, 소풍 등 다양한 여러 가지 행사 중에서 조금은 아쉽게도 진한고는 5월에 소풍 하나만이 있다. 가장 큰 행사라고 할 수 있는 축제와 체육대회는 선선한 가을 10월경에 이어 한다고 한다.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소풍이 어디인가! 그 즐거운 소풍날이 바로 오늘이다. 소풍 장소는 아이들이 소풍장소로 최고를 꼽는 놀이공원이었다. 오전 중 가는 길에 작은 박물관 하나를 들르고 나서 곧바로 놀이공원을 간다고 한다. 놀이기구를 잘 못타는 나였지만 놀이공원 같은 분위기를 나는 굉장히 좋아했다.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은가! 그리하여 나는 이번 소풍 장소가 꽤 만족스러웠다.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는 박물관이나 달랑 유적지 하나 있는 곳에 갔으면 나는 무척 우울했을 것이다. 간단하게 청바지와 티로 편안한 차림의 옷을 입은 후, 가방을 들고 통통 뛰며 방에서 나왔다. 10여 년 전 소풍날에 설레어 하던 그 날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발걸음이 민들레 씨앗처럼 하늘을 부드럽게 날아오를 듯 무척이나 가벼웠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새하얀 운동화를 신고서 현관문을 여는 순간 나는 화들짝 놀랬다. 바로 문 옆에 기대서서 담배 한 개비를 태우고 있는 최하운이 있었기 때문이다.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그를 훑어보는데, 그의 손에는 큰 가방이 하나 들려 있었다.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 녀석 또 며칠 동안 종적을 감추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몰라도 가끔씩 최하운은 갑자기 일이 있다며 며칠 동안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 때는 핸드폰도 꺼버려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입에 물린 담배를 휙 뺏으며 크게 소리 질렀다. “너 또 어디가!” “한 삼일 정도.” 그 말에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는 그런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옛날에 갑자기 연락이 안 돼 울고 불며 경찰에 신고 했던 그 때 이후로 이제는 말을 하고서 그는 어딘가로 떠났다. 어차피 또 캐물어봤자 대답해주지 않을 것임이 뻔히 보였기에 나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신! “1분 1초라도 더 빨리 와.” “알았어, 인마.” 옷깃을 꼭 붙잡으며 말하자는 그는 큰 손으로 내 머리를 흩트렸다.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다는 안중근선생님의 말이 있듯 나 순이에겐 이 말이 있다. 하루라도 최하운을 보지 않으면 눈 안에 가시가 박힌다. 나는 시큰거리는 코를 문지르며 핸드폰을 가방에서 꺼냈다. 그리고 녀석을 향해 말했다. “사진 한 장 찍자.” 그러자 그는 곧 바로 뒤돌아섰다. 재빨리 도망치려는 최하운의 옷깃을 나는 재빨리 붙잡고 늘어졌다. 극도로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하운이었다. 옛날에 어떤 친구가 몰래 사진 찍다가 들켰는데 그 핸드폰을 부셔버린 적도 있었다. 사진 찍는 것을 거부하는 알레르기도 이 세상에 있던가. 그는 얼굴을 확 구기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싫다고!” “아따. 나 너 없으면 외로워서 그래. 밤마다 보고 자게.” “뭐? 야. 기분 나쁘게 누가 들으면 내가 네 애인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생각만 해도 싫다는 녀석이 잔뜩 인상을 구겼다. 난 그런 그의 등짝을 세게 퍽 치며 소리쳤다. “멍청아! 넌 나의 럭키잖아! 럭키! 하루라도 충전이 안 되서 무슨 일 나면 책임질래!” 나는 그의 사진을 찍어내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고, 역시나 그렇듯 항상 마지막엔 결국 항복하고 마는 그는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마지못해 스르르 느리게 내렸다. 나는 그를 숙이게 해 어깨에 팔을 두르고 핸드폰 카메라를 향해 외쳤다. “자~ 김치!” 활짝 웃는 순이와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는 운이의 사진. 찰칵!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백선생님의 노력으로 이번 소풍은 특별히 사복을 입도록 허락이 되었다. 그 때문에 한껏 멋을 내고 온 아이들이 많았다. 매일 단정한 교복만 입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다 형형색색 다양하게 입은 아이들을 보니 시야가 알록달록 해졌다. 하지만 어디나 그러한 아이들이 있기 마련 이 듯 도를 지나치게 입고 온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한 아이들을 잡기 위해 백선생님은 소풍 날 아침에도 참 바빴다. 특히나 여우파들은 굽 높은 힐에 짧은 바지를 입고와 백선생님께 끌려 체육복으로 갈아입게 되었다. 그러니까 체육복을 입고서 놀이공원을 돌아다녀야 하는 셈이다. 특히나 다른 학교에서도 소풍을 많이 올 텐데 말이다. 여우파들은 체육복 차림으로 고개를 못 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이게 바로 자업자득이란 것이다. 쯧쯧. 그러니까 의상 역시 때와 상황에 맞게 맞춰 입어야 한다는 것! 추선생님이 버스 안에 각자 자리를 잡고 탄 아이들을 훑어보고서 마이크를 대고 말했다. “자, 곧 버스가 출발할 것이다. 조금 이따가 놀이공원에서 자유시간이 있을 것이니, 그 때 까진 함부로 개인행동 하지 말고 지시에 따라 맞춰주길 바란다. 알겠나?” 추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큰 소리로 ‘네’라고 외쳤다. 그 어느 때보다 힘찬 대답에 추선생님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나도 따라 웃다가 나의 낭군님을 찾아 눈동자를 움직였다. 강태일은 뒷자리 창가에서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창으로 비춰지는 햇살에 드리워진 그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같았다. 넋을 입고 그를 보다가 히죽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 때 추선생님이 내 옆에 앉으며 우물쭈물 거리다 내게 조심스레 말했다 “조금 이따가 같이 다니실래요?” 그 말에 나는 못 들은 척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크게 하고서 졸리다는 핑계로 눈을 감았다. 절대 그리 할 순 없었다. 아침부터 어떻게든 사랑스런 나의 님 강태일과 붙어 다니라고 굳게 마음먹은 나 순이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작은 박물관 하나를 대충 구경하고서 드디어 고대하던 놀이공원에 도착했다. 추선생님의 자유시간 명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추선생님과 맞먹는 크기의 철구의 등에 숨어서 추선생님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추선생님을 따돌리고서 나는 한비와 태일이의 곁으로 왔다. 둘이 다니자 하면 분명 녀석은 피할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한비를 끌어들였다. 그런데 한비는 얼마 전 커플 얼음땡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부반장을 내 핑계 대며 데려왔다. 의아해하며 한비와 부반장을 보다가 나는 녀석에게 가까이 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야, 네 애인은 어디다 두고 부반장을……” “저 헤어졌는데~” “뭐?” “어제 헤어졌어요!” 난 그 말에 몹시 기가 찼다. 헤어졌다고 말하는 녀석의 표정은 무척이나 상큼했기 때문이다. 혹시 이 녀석 그 이후로 부반장에게 관심이 생긴 건가. 머릿속에 늑대를 감지하는 경보음이 울렸다. 우리 순수한 부반장을 바람둥이에 철없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주한비에게 뺏길 수 없었다. 난 재빨리 부반장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부반장은 갑작스럽게 손목이 잡히자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저 음흉한 속셈을 품고 있는 주한비로부터 부반장은 나 순이가 지킨다! “부반장~ 우리 회전목마 타러 가자!” 회전목마를 타러가기 위해 부반장의 손을 이끌고 가려는 찰 나 한비는 내 목덜미를 붙잡았다. “아, 정말. 누가 땅꼬마 아니랄까봐. 회전목마가 뭡니까! 모양 빠지게.” “아, 왜! 부반장이 회전목마 좋댔어! 그치, 부반장?” 나의 말에 부반장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이 나이에 회전목마는 좀…….” “거봐요! 자, 스릴 있고 화끈한 거 타러가게요!” 그리고는 한비는 나를 질질 끌고 갔다. 스릴 있고 화끈한 거라면 바로 공포의 놀이기구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자 더욱 나를 세게 잡으며 끌고 가는 주한비. 저 주한비로부터 도와주기위해 마음먹었거늘 부반장은 내가 재미있다는 듯 살포시 웃었다. 나는 돼지 사육장에 끌려가듯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뒤에서 느리게 따라오는 강태일을 보았다. 강태일에게 도와달라고 애처로운 눈빛을 지었으나 그는 이 상황을 꽤 즐기는 듯 피식 웃으며 나의 SOS를 외면했다. 망할 것들! 다들 한 통속이었다! 나는 훌쩍이며 시골에서 모판을 나르고 있을 엄마를 불렀다. 줄이 너무 길어서 한 시간 동안 기다려 타게 된 놀이기구는 바로 77도의 스릴이라고 소문난 T-express였다. 목재로 만들어진 우든코스터로 시속도 국내에서 가장 빠르며 트랙이 긴 놀이기구였다.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줄을 설 때 정말 사형장에서 죽기를 기다리는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몇 번이고 탈출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수갑마냥 나의 손목을 꽉 붙들고 있는 한비의 손은 나를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드디어 우리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극도의 긴장과 불안감으로 온 몸이 굳어있었다. 부반장과 나란히 앉으려 하자 주한비는 정색하며 바로 이를 저지했다. 그리고 나의 귀에 속삭였다. “강태일과 같이 타야죠. 이건 남자하고 같이 타야하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 내가 팍팍 밀어줄 테니까 한 번 잘 해봐요.” 잘해보긴 개뿔. 나는 저래서 주한비 녀석이 싫었다. 참으로 능구렁이 같은 녀석이다 나를 위하는 척 하지만 내가 모를 줄 아는 가. 착한 부반장을 꾀기 위한 자신의 음흉한 속셈이 있을 줄. 하지만 뭐라고 할 기력도 없었기에 강태일과 나는 맨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안전 바를 매고 곧이어 우리를 태운 T-express는 질주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차마 가파르게 올라가는 광경을 지켜볼 수 없던 나는 눈을 꾹 감았다. 그 때 그 틈 새 사이로 강태일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무서워요?” “응? 아, 아니야. 이 까짓것 하나도 무섭다고.” “아아, 그럼 왜 목소리는 그리 떨릴까나.” “내가 요새 판소리를 배우는데 떨기 연습을 하고 있거든.” “그럼 얼굴은 왜 이렇게 하얗게 질려있나.” “오늘 화장이 잘 먹었나 보구나. 얼굴이 하얗다니. 허허.” 나의 얼토당토 없는 말에 강태일은 피식 웃었다. 나도 따라 어색하게 웃었지만 순간 철컹 거리는 놀이기구에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점점 오르면서 경사가 가팔라지자 온 몸이 뒤로 쏠렸다.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다.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부디 살아남기를 기도하고 있을 때, 강태일이 또 말을 걸어왔다. 이 녀석은 평소에는 안 그러다 이런 상황에 말이 참 많다. “의외네요. 이런 거 잘 탈 줄 알았는데.” “나도 나 태어났을 때 내가 잘 탈 줄 알았다.” “뭐야, 그게.” “그게 이거지.” “음…… 그냥 하늘을 좀 과격하게 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려……… 엄마! 엄마! 악!” 어느새 거의 다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울먹거렸다. 곧 77도라는 아찔한 각도를 낙하한다. 눈앞에 다가온 현실에 어질어질 하다. 그 때 그 흐릿한 시야 사이로 여자 못지않게 기다랗고 고운 예쁜 손이 내 앞에 놓였다. 고개를 돌리니 강태일은 정면을 바라본 채 네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바라보다 곧 낙하하려 하자 재빨리 깍지를 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T-express는 아찔한 속도로 내리꽂듯 떨어졌다. 나는 저 먼 시골에 계시는 엄마와 농촌 이웃들이 내 목소리를 들을 만큼 엄마를 크게 외쳤다. 가파르게 떨어질 때 마다 상체가 마구 휘적거렸다. 금방이라도 이대로 아래로 추락할 것 같은 기분에 정신이 혼미했다. 그 때 마다 강태일의 손에 힘주었기 때문에 그나마 조금은 안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3년 같은 3분이 흐르고 지옥을 떠돌아다니던 T-express는 멈췄다. 나는 잠시 멈춰서 멍한 얼굴로 거칠어진 호흡을 뱉었다. 나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돼있었다. 어쨌든 살았다는 안도감에 다시 눈물이 쭉쭉 뽑아져 나왔다. 그렇게 훌쩍이고 있을 때 강태일이 난감해 하며 내게 말했다. “일단 내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들후들 거리는 다리를 끌고 일단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없는 주한비와 부반장.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그 들의 모습은 수많은 인파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맙소사. 우리 순한 양을 뺏기고야 말았다. 허나 솔직히 한 편으론 좋았다. 강태일과 단 둘이 다니는 건 데이트와 다름없지 않은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다. 나는 쑥스러움에 손을 만지작거리다 슬쩍 강태일을 보았다. 둘만 남게 된 이 상황에 강태일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머리를 긁적이던 그의 손가락아래에는 손톱자국이 다섯 개 점찍듯 깊게 남아있었다. “손!” “예?” “손 줘봐!” 강태일은 얼떨결에 손을 내려 내게 내밀었다. 아주 살점을 파려내려 했던 것인지 상처가 깊었다. 이 것은 필시 아까 깍지 끼며 손을 잡았을 때 내가 손톱으로 남긴 상처였다. 무서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손에 힘주다가 그런 듯싶었다. 당황한 얼굴로 그의 손을 보다, 두 손을 모으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아, 별거 아니에요.” 그는 재빨리 손을 뒤로 감추며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항상 이 녀석은 다치면 별거 아니란다. 신경 쓰여 뒤로 감춰둔 그의 손에 계속 힐끗힐끗 시선을 가할 때, 강태일이 내게 불쑥 물었다. “그나저나 또 뭐 탈래요?” 그 말에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런 나의 반응에 태일이는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에 부끄러워 몸을 배배꼬다 살짝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 그런데……” “네?” “먹고 싶은 건 있어.” 그가 눈짓으로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나는 손가락으로 50미터 경에 떨어진 솜사탕 파는 아저씨를 가리켰다. “이러한 상황에도 식욕은 왕성하군요.” “내 또 다른 별명이 식신 아이돌이야.” “무섭다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아무튼 하도 소리 질러서 배고파졌어. 나 금방 사올게! 기다려!”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는 그를 뒤로 한 채, 나는 재빨리 뒤돌아 분홍빛 하늘빛 고운 색상의 솜사탕이 가득한 그곳으로 뛰어갔다. 분홍색, 하늘색 솜사탕을 사들고 강태일에게 돌아가는데 수군거리며 강태일을 보고 있는 한 여학생 무리가 보인다. 다른 학교에서 소풍 온 아이들인 것 같다. 무어라고 수군거리던 그녀들은 헌팅이라도 하려는 참인지 태일이에게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때 울컥한 나는 목에 확성기를 달아 놓은 마냥 아주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기야!” 그리고 태일이를 향해 다리를 놀리며 뛰어가는 데, 불과 1미터 앞에서 철퍼덕 넘어져 버렸다. 두 개의 솜사탕은 가볍게 퉁퉁 튕기며 바닥에 떨어졌다. 여자아이들은 나의 넘어진 모습에 대놓고 마구 비웃었다.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고 있을 때 갑자기 몸이 붕 허공위로 날아올랐다.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니 강태일이 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 그리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호통을 쳤다. “꼬맹이 오빠가 뛰어다니지 말랬지.” ……응? 갑작스럽게 다른 사람이 되어 어린아이 대하듯 강태일이 내게 말했다. 어리둥절하며 그를 보는데, 그는 계속해서 그 여자아이들이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선생님한테 부탁해서 널 데려왔는데. 이렇게 자꾸 까불면 너 오빠한테 혼난다. 잘 못 했어, 안 했어?” “자, 잘 못 했어.” 얼떨결에 나는 그렇게 대답했고, 녀석은 작게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솜사탕 바닥에 떨어져 못 먹겠다. 오빠가 다시 사줄게.” 그 말에 나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웃으며 내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그리고는 그렇게 안아 들어 올린 채로 솜사탕 가게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여자애들이 무어라고 서로 얘기하다가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아이들이 멀어지자 강태일이 내 귀에 대고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연습실 앞에 기다리고 따라다니는 애들이에요. 쟤들하고 맞붙어서 좋을 것 없어요.” “응?” “그리고 저 애들 중 한 명이 실장 조카인데, 소속사 측에 왜곡되어 이 일이 들어가면 좋을 게 없으니까.” 그 말에 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혹시 조금은 나를 걱정해준 건가? 괜스레 부끄러워진 나는 그의 목에 두르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을 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솜사탕 가게 앞에 도착하자, 녀석은 나를 조심스레 내려주고서고 솜사탕 하나를 사서 내게 주었다. 나는 그 솜사탕을 받아들며 환하게 웃었다. 왠지 더욱 달콤할 것만 같았다. 세상에서 최고로. 나는 커다란 솜사탕으로 얼굴을 가리며 태일이에게 말했다. “와. 내 대갈통 만하지?” 순간 나도 모르게 생각 없이 뱉어낸 말에 당황했다. 곱지 못한 언행에 혹시라도 마이너스 요인이 될까 걱정됐다. 슬쩍 솜사탕을 옆으로 치우자, 역시나 강태일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향해 말했다. “선생 될 사람이 참 말 곱게 하네요.” “흠흠. 이거 먹어!” 딱히 할 말이 없어진 나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솜사탕을 뜯어 녀석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녀석은 손을 흔들며 거절했다. “저 단거 싫어해요.” “너는 참 18살 밖에 안 먹은 녀석이 한 30년은 산 것 같아.” “선생님은 20년 넘게 살았는데 초등학생만도 못한 것 같아요. 데리고 다니니 이렇게 피곤할 수가.” 그 말에 나는 풍선처럼 볼을 부풀리며 동그랗게 말은 주먹을 내밀었다. “너 나랑 한 판 해보자는 거냐.” 나의 말에 녀석은 갑자기 소리내어 웃었다. 살짝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 웃던 그는 갑자기 힐끗 나를 보더니 묘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어차피 나 못 이길 거면서.” “그건 붙어봐야 알지!” “절대 못 이길걸요.” “어떻게 알아?” 갑자기 입을 다물고서 나를 빤히 쳐다보던 녀석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턱으로 나를 가리켰다. 응? 나 때문에? 처음에 이해 되지 않아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나는 순간 그 말이 이해되자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강태일의 말은 내가 너를 좋아하니 나는 너를 못 이길 것이다. 이말 인건가?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저 녀석 내 마음을 갖고 저리 말하다니. 얼굴이 불붙은 마냥 화끈화끈 거렸다. 나는 솜사탕을 입 안 가득 베어 물며 말했다. “다, 다른 곳으로 가자.” 그리고 발걸음을 옮기는 데 순간 무언가 걸려 휘청거렸다. 그러자 강태일은 뒤에서 재빨리 나를 잡았다. 순간 살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 숨을 내쉬자 강태일이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참 피곤하게 해.” “거참 미안하다.” “봐. 이러니까 넘어지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끈이 풀린 내 운동화를 보더니, 그는 이내 몸을 숙이며 내 발 앞에 멈췄다. 그리고 풀린 끈을 직접 매어주었다. 입안에 있던 솜사탕이 가득 달콤함을 선사하며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참 달다. 그 때 남편과 어린아이와 함께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가 지나치다 우리를 보며 하는 얘기가 귓가에 똑똑히 들려왔다. “어머. 귀여워라. 잘 어울리는 커플이네.” 아주머니의 말에 옆에 있던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참 좋을 때다.” “당신은 이제 절대 저리 못하지?” “발이나 잘 씻어. 이, 여편네야.” “어머. 내가 언제 안 씻었다고!” 그렇게 티격태격 하던 한 부부와 아이가 멀어지고, 녀석이 신발 끈을 다 매주고서 일어서자 나는 그에게 와락 안겼다. 순간 흠칫하던 녀석은 나를 떼어내려 하며 당혹감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 뭐……” “잘 어울리데!” “예?” “아까 지나가던 사람이 우리 잘 어울린데!” 그 말에 녀석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나를 재빨리 떼어내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혼자 투덜거렸다. “잘 어울리긴 개뿔.” 강태일은 얼굴이 하얀 편이라서 그런가. 쉽사리 얼굴이 붉어지는 게 잘 들어난다. 이 앙큼한 녀석도 조금은 쑥스러운 걸까. 부쩍 날이 갈 수록 마음을 여는 것인지 녀석이 내게 대하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가 항상 경계하며 치고 있던 벽이 내가 들락날락 거릴 만큼 많이 낮아진 듯. 그리고 멀게만 느껴졌던 그와의 거리가 많이 좁혀졌음이 느껴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없지만, 그가 손을 내게 내밀면 닳을 수 있는 거리. 그런 그를 보며 혼자 실실 웃다가 입을 열었다. “들리지 않아?” 나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던 그는 무엇이 들리는 것이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그의 몸을 살짝 낮추게 하고 발꿈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얼굴에 연분홍빛 꽃을 피우며 그의 귓가에 대고 또박또박 속삭였다. “사랑이 오는 소리.” Chapter. 18 가슴에 품은 눈물 “아, 어떡해! 진짜 귀여워요!” 한 아이가 호들갑을 떨며 내게 말했다. 금방이라도 뽀뽀세례를 퍼부을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초롱초롱 빛나는 아이의 눈이 상당히 부담스러워진 나는 몸을 뒤로 슬그머니 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많은 아이들이 내 주위를 감싸며 웅성거리고 있다. 나는 지금 마치 한 마리의 동물원 원숭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즐거워하며 나를 구경하는 아이들을 보니 일어서 재롱이라도 부려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나보다 어린 것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니 기분이 아리송한 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하자면, 반 아이 중 아동복 옷가게를 크게 운영하시는 부모님을 둔 최서영이라는 아이가 있다. 외동딸인 그 아이는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선지 아동복 디자인에 무척 관심이 많았으며 열심히 공부도 하였다. 그런 아이가 오늘 나를 위해 준비하였다며 손수 만든 옷을 학교에 가져 왔다. 그런데 그 옷은 아동복에서 크기만 살짝 커졌을 뿐 영락없는 공주풍의 아동복이었다. 일단 나를 위해 만들었다니 감동한 나는 아낌없는 칭찬을 퍼부으며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주위에서 이를 본 아이들이 한 번 입어보라고 내게 제안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성화에 나는 어찌할 수 없이 그 옷을 입게 되었고, 머리까지 이 나이에 방울 머리끈으로 양 갈래를 묶게 되었다. 그래, 여기까진 좋았다. 아이들이 관심을 받으니 좋았고, 귀엽다 해주니 흐뭇했다. 그런데 선녀와 나무꾼 흉내라도 내는 것인지 누군가 내 옷을 숨겨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교무실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몇 시간 째 이 시간까지 공주풍의 옷을 입고 2학년 5반 교실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다른 선생님께 하소연하며 찾아달라고 부탁드렸지만, 선생님들은 모두 나의 구조요청을 무시했다. 특히나 추선생님은 발 벗고 나서서 오늘 일 따위는 안 해도 된다며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게 했다. 선생님들마저 아이들과 합세하여 이를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절로 한 숨이 푹푹 새어나온다. 소문을 듣고 다른 학년들과 반 아이들까지 틈틈이 구경하러 왔다. 그렇게 뜨거운 아이들의 관심 속에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그 때 어떤 한 남자애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내 앞에 다가왔다. “우와. 진짜 귀엽다.” 그리고는 이름 모를 그 남자애는 건방지게 내 볼을 꼬집었다. 내가 휙 째려보자 아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진짜 내 이상형이에요! 진짜 교생선생님 맞아요? 아, 귀여워라.” “흥.” 내심 기분은 좋았지만 팔짱을 끼며 새침한 얼굴로 휙 고개를 돌렸다. 지조 없이 강태일 외에 다른 놈들에게 웃어주고 싶진 않았다 그 때 아이가 먹는 것과 공짜를 아주 좋아하는 내게 홀릴만한 말을 했다. “사탕사줄까요?” “저, 정말?” 솔깃해진 나는 고개를 휙 돌리며 되물었다. 아이는 그런 나를 보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아싸, 공짜다! 나는 환희를 내지르며 자리에서 폴딱 일어섰다. 먼저 그 남자애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고, 나도 따라 걸음을 옮기는데 순간 누군가 덥석 내 손목을 잡았다.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니 강태일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녀석은 곧 신경질이 난 목소리로 내게 소리쳤다. “어렸을 때 교육 안 받았어요? 아무나 뭐 사준다고 따라가지 말라했잖아요. 그런데 모르는 애가 사탕사준다고 좋다며 졸졸 따라가기나 하고.” 주위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강태일에게 쏠렸다. 순식간에 시끌벅적했던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솔직히 강태일의 말은 설득력이 부족한 말이었다. 내가 진짜로 어린아이도 아니었으며, 또한 이 남자애도 유괴범이 아닌데 말이다. 강태일 답지 않게 소리치는 것도 이상하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순간 묘해진 분위기를 깨달았는지 강태일의 얼굴이 화악 붉게 달아올랐다. 녀석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선 내 손목을 잡더니 잡아끌며 말했다. “사탕 10개 사줄 테니까 따라와요.” 얼떨결에 녀석에게 이끌려 걸음을 옮기는 데 뒤에서 아까 그 남자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저 자식 강태일 아니야? 쟤 왜 저래?” “글쎄. 이상하네. 왜 화를 내지?” “혹시 저 두 사람 사귀나?” “맞아. 저 번에 둘이 놀이공원도 같이 다니던데.” 수많은 추측들이 계속 꼬리를 물고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수군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간다. 그리고 나의 손목을 잡고 있던 녀석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나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녀석이 곧바로 내게 말했다. “보지 마요.” “응? “나 보지 말라고요.” 그러면서 강태일은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귀까지 붉어져 있었다. 기분이 묘해진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며 바닥을 보았다. 내 손목을 두르고 있는 그의 손목이 무척 뜨거웠다. 혹 녀석의 심장도 뜨거워졌을까. 그랬을까. 나는 고개를 숙여 빨간색 구두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모르겠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끝나자마자 후닥닥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하운이가 돌아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해줄 이야기가 많이 입이 간질간질 거린다. 버스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아파트를 향해 걸어가는데, 누군가 아주 빠른 걸음으로 휘적휘적 나를 앞질러 갔다. 그런데 그 뒷모습이 내 눈에 익숙하게 느껴졌다. 곧이어 나는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운!” 나의 커다란 목소리에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건지는 몰라도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하운이는 우뚝 멈춰 섰다. 그가 천천히 뒤돌아설 때 나는 재빨리 뛰어가 그의 앞에 섰다. 그를 향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나를 본 하운이의 미간이 찡그려진다. 나를 노골적으로 위아래 훑어보던 그는 내게 한마디 했다. “너 돌았냐?” 그 말에 웃고 있던 나의 얼굴은 빠르게 굳어졌다. 이 자식이 오랜만에 보자마자 하는 말이 돌았냐고? 토라진 나는 볼을 잔뜩 부풀렸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왜 이 녀석이 그런 말을 한지 이해가 됐다. 나는 아직도 공주풍의 옷차림 그대로였다. 어떤 녀석인지 몰라도 나를 아주 물 먹일 작정인 것인지 끝까지 옷을 안돌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 그래도 귀엽지 않아?” 하지만 내심 서운했던 나는 빙그르르 한 바퀴 돌며 물었다. 그런데 녀석의 표정은 돌 씹은 표정이었다. “방금 너 재수 없던 거 알지?” 저게 내가 평소에 하던 말을 그대로 똑같이 하며 내게 물었다. 난 뾰로통해진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치. 그래도 다른 애들은 귀엽다 했다.” “어떤 미친 것들이 그런 소리를.” 사실 오늘 내 모습이 귀엽다는 것에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처참히 부셔버리는 것이다. 씩씩 거리며 그를 노려보다 빨간색 구두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가 아파하며 소리 지르자 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휙 몸을 돌려 팔을 크게 휘저으며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야!” “흥.” “김순이!” 그가 뒤에서 나를 부르며 빠르게 쫓아온다. 녀석이 나를 따라 잡으려 하자 나는 빠르게 달렸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문을 닫으려고 재빨리 닫힘 버튼을 누르려는데, 한발 더 빨랐던 그는 엘리베이터 문을 멈추게 하며 올라탔다. 나는 열림 버튼은 누른 채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내려.” “싫어. 이게 네 거냐?” 내거는 아니기에 달리 반박할 말이 없어서 문을 닫았다. 녀석과 떨어지기 위해 엘리베이터 모퉁이에 서있는데, 갑자기 최하운이 내 앞으로 무언가를 내밀며 말했다. “먹을래?” 힐끗 그가 내민 것을 보았다. 그것은 케이크 상자였다. 내가 빤히 바라보자 녀석은 이어 말했다. “고구마케이크인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구마케이크였다. 저절로 발그레해지는 얼굴. 그런 내 얼굴을 본 하운이는 피식 웃었다. 나는 헛기침을 뱉으며 케이크 상자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별로 먹고 싶지 않지만.” “…….” “사온 성의를 봐서.” 그에게 케이크를 받아들고서 품안에 상자를 안았다. 마침 배고팠는데 잘됐다. 먹는다는 생각에 혼자서 즐거워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내 한쪽 머리가 쭉 잡아당겨졌다. 내가 소리 지르며 고개를 휙 돌리자 하운이는 모른 척 딴청을 피웠다. 씩씩 거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는 7층에 멈춰 섰다. 곧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는 나를 보고 피식 웃더니 걸음을 옮겨 나갔다. 저 녀석 나 놀린 거지? 문이 닫히기 전 재빨리 따라 내리며 열쇠로 문을 열고 있는 그의 옆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녀석의 옆구리를 힘껏 꼬집었다. 그가 아픔에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엄한 훈장의 얼굴로 말했다. “떽! 너 또 한 번 그러면 혼난다.” 그리고는 나는 빙긋 웃으며 먼저 집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하운이는 그런 나를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나 피곤하다. 그냥 가라.” 방으로 들어와 가방을 책상에 올려두며 하운이가 내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최하운은 며칠 사이에 잠을 못 잔 듯 무척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할 말이 많아 하운이를 몹시 기다렸던 나는 이대로 발걸음을 돌릴 수 없었다. 나는 녀석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눈을 꼭 감고 있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운아 있잖아. 태일이가 아무래도 이상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조금은 좋아졌나 봐! 소풍갔을 때는 말이야.” 그가 듣거나 말거나 나는 혼자 신나서 종알종알 거렸다. 그 때 참지 못한 하운이가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시끄러워.” 그리고는 녀석은 반대편으로 몸을 휙 돌렸다.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며 녀석의 등을 노려보던 나는 괜한 오기가 생겨 침대 위로 올라와 녀석의 반대편에 무릎 꿇고 앉았다. 그를 향해 또 다시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무슨 일을 했던 건지는 몰라도 확실히 녀석은 피곤해보였다. 팔짱을 끼고서 하운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끔씩 녀석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볼 때면 매일 보는 얼굴임에도 새롭게 느껴진다. 째깍째깍 시계소리만이 일정하게 방안에 울려 퍼진다. 나는 살짝 고개를 비틀어 녀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집게손가락으로 그의 눈을 살포시 짚었다. “하운이 눈.” 그리고 다음으로는 오뚝한 콧날의 끝을. “하운이 코.” 그 다음은 작지도 크지도 않은 귀를. “하운이 귀.” 그 다음으로는 잡티 없이 깨끗한 피부의 볼을. “하운이 볼.” 그리고 그 아래 붉은 기가 감도는 도톰한 입술. “하운이 입술.” 내 손끝이 녀석의 입술에 닿을 때 갑자기 녀석이 나를 휙 잡아당기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그는 잠결에 무거워진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좀 가만히 있어라.”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다 멈췄다. 어느새 그는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내 목에 감긴 녀석의 팔이 뜨거웠다. 항상 하운이는 몸에 열이 많았다. 멍하니 그의 품안에서 눈을 깜빡깜빡 거렸다. 그런데 점차 그의 온기에 잠이 스르르 몰려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천천히 눈을 감으며 깊고 따뜻한 잠에 빠져 들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오늘도 한 가득 퍼 배부르게 점심식사를 먹었다. 이제 전교생 모두가 내 식판을 보고 적응했기에 나도 이제 부담 없이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급식을 주는 아주머니가 내게 보조식품으로 나온 요구르트를 3개나 주셨다. 그렇게 배 안을 빵빵하게 채우고서 요새 들어 부쩍 친해진 백선생님과 식후에 커피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백선생님은 십자수와 뜨개질을 좋아하셨다. 그 밖의 여러 가지 수공 또한 관심이 많으셨다. 운동만 좋아할 줄 알았던 백선생님이 여성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거에서 나는 또 한번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 백선생님은 알면 알수록 재미있고 신기한 사람이시다. 그렇게 백선생님과 수다를 떨고 있는데, 갑자기 교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여우의 음색이 묻어나는 요염한 음성이 교무실 안을 가득 메웠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그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그런데 선생님들은 보자마자 하나같이 자리에 일어서며 고개를 꾸벅였다. 이를 알 리 없는 나를 비롯한 몇몇의 교생들만이 어리둥절해 했다. 허나 곧이어 대충짐작이 갔다. 필시 엄청난 재력가의 아들을 둔 학부모일 것이다. 아마 학교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것이겠지.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보고서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때 추선생님이 재빠르게 그 학부모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정중히 예의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태일이 어머님.” “말에 학부모 상담이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그 때 잠시 파리로 출장을 갈 것 같아서요. 먼저 이렇게 찾아뵙니다.” 강태일의 어머니? 나는 놀란 눈으로 재빠르게 강태일의 어머니 모습을 훑어보았다. 강렬한 빨간색 원피스와 루비로 추정되는 보석의 목걸이가 몹시 눈에 띄었다. 마치 가시를 세우고 있는 붉은 장미 같았다. 화려한 외모에서 함부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감이 확실히 느껴져 왔다. 왠지모르게 사람 냄새가 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강태일의 어머니에 대해 따로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잘나가는 병원원장의 부인에 알아주는 디자이너라 하셨으니 배나오고 후줄근한 티를 입은 엄마들의 모습은 아닐 것이라고 추측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고등학생의 아들은 둔 엄마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더욱 화려하고 젊음이 넘치는 분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무척 숨이 막혔다. 그렇게 멍하니 추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자리를 옮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서 백선생님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정말 꼴배기 싫어.” “네?” “저 여자. 매일 잘난 척만 하고. 저번에 어떤 영어선생님이 저 여자 때문에 학교 그만두게 되었잖아. 실력이 너무 없다는 이유로 쫓아내는 게 말이 돼? 지는 얼마나 잘났다고.” “정말요?” “그래. 그리고 태일이하고도 사이가 몹시 안 좋다고 소문났어. 강태일이 BK소속사 연습생 인 거 엄청 마음에 안 들어 한데. 참 배불렀어. 아들이 잘나가는 연예인 되면 좋은 거지. 강태일 내년 초에 데뷔한다던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백선생님은 손으로 턱으로 괴며 한 숨을 길게 내뱉었다. 나는 그녀가 서있던 자리를 한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갑자기 속이 거북해져 잠시 밖에 나왔다. 그리고 부드러운 5월의 바람을 맞으며 학교 정원을 거닐었다. 금빛 햇살이 온 만물을 뒤덮으며 보석처럼 반짝거렸고, 연둣빛 나뭇잎은 싱그럽게 익어갔다. 고개를 들어 양털처럼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있는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졌을 때,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는 것 같은 살벌한 음성이 들려왔다. “기꺼이 데뷔 하겠다는 거냐?” “네.” “네 애빌 닮아 고집 한 번 세구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갔다. 학교 강당 건물의 옆에서 누군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들은 강태일과 그의 어머니였다. 그런데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였다. 강태일이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는 눈빛은 분노였다. 그의 엄마 또한 아들을 바라보는 눈에 애정이 없었고 한없이 냉랭했다. 모자 사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은 서로에 대한 끈끈한 혈육의 끈이 보이지 않았다. 강태일의 어머니는 한 숨을 뱉으며 입술에 담배를 물더니 차가운 음성으로 태일이를 향해 말했다. “어쩜 그리도 닮았는지.” “그게 뭐요. 당연히 아빠의 아들이니까 닮았죠.” “꼭 못난 것만 닮아가지고. 그래서 네 아비가 그리 무능력했고 허망하게 간 거다. 너도 그 꼴 나고 싶은 게냐?” 그녀의 말에 태일이는 주먹을 꽉 말아 쥐며 부르르 떨었다. 담배끝에 불을 붙이자 빨갛게 칠해진 입술 사이로 지독한 연기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건조한 시선으로 강태일을 바라보며 계속 지독한 담배를 힘껏 빨아드리며 뱉어내고 있었다. 그 때 강태일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숨 막혀 죽을 것 같아요.” “…….” “엄마의 거짓 속에 놀아나는 거.” “뭐라고?” 여자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강태일은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때 빨간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이 허공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이내 여자의 손은 매섭게 강태일의 뺨을 향했다. “안 돼!” 쫙- 살과 살이 부딪히 소리가 가득 울려 퍼진다. 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강태일의 어머니의 얼굴이 구겨졌다. 나를 빠르게 훑어보는 그녀의 시선에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뭐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녀의 앞에 섰다. 그리고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드렸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교생 김순이라고 합니다.” “교생? 기가막혀서. 교생이 남의 말을 엿들라고 있던가.” “죄송합니다.” “같잖은 것이 어디서 남의 말을 엿들어!” 그 때 강태일 나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곁에 끌어당기며 말했다. “건드리지 말아요.” 강태일의 말에 그녀는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네 어미보다 이 교생 편을 들겠다는 것이냐?” “…….” “나는 도대체 뭐냐. 네 어미도 아니냐.” “…….” “나도 네가 내 아들이란 게 몹시나 싫구나.” 그렇게 그녀는 엄마로서 해서는 안 될 비수같은 말들을 강태일에게 뱉어내며 몸을 돌렸다. 그녀는 나를 한 번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보더니 이내 걸음을 뗐다. 또각또각 기계적으로 일정하게 들리는 그녀의 구두 소리가 점차 멀어진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떄 강태일은 한 숨을 깊게 토하며 주저앉듯 털썩 앉았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손을 만지작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안절부절 못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아까 그의 어머니에게서 맞은 볼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태일의 앞에 무릎을 바닥에 대고서 앉으며 손을 뻗어 빨갛게 부어오른 녀석의 볼을 조심스레 만졌다. 그리고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프겠다.” 강태일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갑자기 팔을 뻗어 내 허리를 끌어 당겼다. 순간 놀람도 잠시 강태일은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계속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가 소리 없이 울고 있음을. 보이지 않는 눈물과 침묵의 울음.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물이 핑 돌았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손을 들어 녀석의 고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눈물을 가슴에 품은 놈 옆에 있으면……] […….] [눈물을 대신 마시고 흘리게 돼.] 가슴에 품은 눈물. 녀석의 내뱉지 못하고 항상 가슴에 품어두었던 눈물이 내게로 전해져 온다. 그리고 눈물이 난다. 지독한 눈물이 난다. 그의 머리 위에 얼굴을 묻고서 팔로 그를 감싸 안았다. 떨고 있는 그의 몸이 느껴진다. 가여웠다. 스르르 눈을 감자, 눈물 한 방울이 무게에 이기지 못하고 툭 흘러내렸다. 미안해, 하운아. 운만큼 너에겐 웃어줄게. Chapter. 19 종이비행기의 꿈 -강태일 번외 요즘 최신 유행하는 곡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자, 아빠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어요. 오랜만에 아빠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피는 걸 보니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아빠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시들해진 팔로 저를 끌어안으며 말했어요. “우리 태일이는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니 가수가 될 건가 보다.” 아빠의 말에 태일이는 웃음을 까르르 터트렸어요. 하지만 소리 내어 나오는 그 웃음과 달리 제 눈은 슬퍼졌어요. 예전에는 항상 크게 느껴졌던 아빠의 품이 이제는 너무나 작게 느껴졌거든요. 태일이가 많이 자란 걸까요, 아니면 아빠가 많이 야윈 걸까요.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핑 돈 저는 아빠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어요. 울면 안 되니까. 내가 약해지면 아빠 또한 힘을 낼 수 없으니까. 아빠의 부드러운 손길이 제 머리를 어루만지고 저는 힘주어 목소리를 내뱉었어요. “아빠 가수 되면 돈 많이 벌어?” “글쎄. 유명해지면 많이 벌겠지?” “…….” “그런데 태일아, 돈 벌려고 가수되는 건 아빠는 반대다. 진짜 꿈은 말이야. 금전적으로 풍족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풍족해지는 것이야.” 그 말에 저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응, 알아. 태일이는 춤과 노래가 정말 좋아서 가수가 되려는 걸! 그리고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행복하게 해주는 건 두 번째 이유.” 저의 말에 아빠는 가볍게 제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치며 껄껄 웃었어요. 아빠의 웃음에 머쓱해진 저는 머리를 긁적이다 배시시 따라 웃었어요. 그 때 아빠가 품 안에서 저를 꺼내더니 두 손을 제 어깨 위에 올렸어요. 그리고 어깨를 꽉 부여잡으며 저를 응시했지요. 아빠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 안에 태일이가 가득 담깁니다. 아빠는 말이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몸은 부쩍 말라갔지만 눈동자만은 항상 힘이 넘쳐났어요. 아빠의 그 강한 눈동자를 볼 때면 태일이도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답니다. 잠시 후 아빠는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어요. “태일이 꿈을 종이비행기에 적어서 날려 볼까?” “종이비행기?” “응. 종이비행기에 간절히 원하는 꿈을 적어 하늘에 날리는 거야. 그리고 그게 하느님의 손에 들어가시면 분명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실 거야.” “정말?” “그럼.” 아빠가 주름을 만들며 환하게 웃자, 저는 자리에서 방방 뛰며 소리쳤어요. “할래, 할래!” 자리를 빙빙 돌며 뛰어다니는 저를 보고 아빠는 눈을 반달로 휘며 크게 웃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꿈. 정말로 하느님께서 그 꿈을 보게 되시면 부디 아량을 베풀어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저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느님, 제발 도와주세요. 아빠가 슬쩍 쳐다보려 하자 저는 재빨리 종이를 팔로 휙 가렸어요. 그리고 뚱한 얼굴로 아빠를 흘기며 말했지요. “이런 거 보면 안 되는 거야. 부정 타.” “원, 녀석도. 그런 말은 어디서 들어가지고.” 아빠가 주먹으로 가볍게 제 머리를 콩 쥐어박으며 너털웃음을 뱉으셨어요. 저는 그 말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저의 꿈을 마저 또박또박 종이 위해 적었지요. 아빠가 계속 힐끔힐끔 보자 저는 재빨리 종이비행기를 접었어요. 이내 종이비행기가 멋지게 완성되자 저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 아빠를 끌고 옥상으로 향했어요. 아빠와 함께 병원 옥상으로 올라오니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부드럽게 스치며 붑니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은 시리도록 굉장히 맑았지요. 아빠와 저는 잠시 두 손을 꼭 감고 눈을 스르르 감았어요. 그리고 천사의 손길 같은 바람을 느끼며 투명한 자연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빠는 항상 그랬어요. 이 세상에서 제일 거짓 없는 소리가 바로 자연의 소리라고요. 그래서 마음이 더럽혀지거나 거짓 되려 할 때 아빠는 산을 올라가 정상에서 항상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정화시킨다고 하였습니다. 8살 때부터 태일이도 함께했지요. 지금은 아빠가 몹시 아프셔서 함께 산을 오를 수 없지만,태일이는 계속해서 혼자 산을 올라간답니다. 그리고 산에서 자연의 소리를 똑같이 낼 수 있도록 새소리, 바람소리, 계곡물 소리를 연습했어요. 대신 제가 기억해서 자연의 소리를 아빠에게 들려주려고요. 제가 연습한 끝에 들려주자 아빠는 몹시 기뻐하며 똑같다고 칭찬해주셨답니다. “자, 이제 종이비행기를 날려볼까?” 아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제 귀에 흘러들어왔어요. 태일이는 눈을 번쩍 뜨며 힘껏 고개를 끄덕였지요. 그리고 아빠와 저는 옥상의 담에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얀 종이비행기를 잡고 하늘을 향해 힘껏 던졌지요. 그 순간 바람이 세차게 불었어요. 하늘을 향해 던진 종이비행기는 불어오는 바람결을 타고 날아갔어요. 아빠와 저는 아무 말 없이 하느님의 손으로 사라져가는 종이비행기를 우두커니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슬쩍 아빠를 바라보았어요. 아빠의 눈은 투명하게 젖어있었지요. 울지 않기 위해 부르르 떨고 있는 아빠의 모습을 보니 눈시울이 붉어져 고개를 돌렸어요. 아빠는 모르겠지요? 제가 종이비행기에 실어 날린 꿈을. 태일이가 가장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첫 번째 꿈을. [아빠가 아프지 않고 건강해져서 오래오래 살게 해주세요.] 하느님이시여, 종이비행기에 적혀진 제 꿈의 목소리를 읽어주세요. * * * * * # 종이비행기의 꿈 -강태일 번외 “태일아.” 어둠 속에서 아빠와 저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잠을 청하고 있었어요. 그 때 아빠가 푹 가라앉은 무거운 목소리로 저의 이름을 불렀지요. 태일이는 눈을 꼭 감은 채 ‘응’이라고 대답했어요. 아빠는 한 참 동안 침묵을 잇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어요. “아빠가 밉지 않아?” “안 미워.” “돈도 못 벌고 엄마와 태일이 고생만 시키다, 이렇게 아파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아빠가 안 미워?” “안 미워. 나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아빠만 있으면 나는 이 세상의 온 장난감을 다 가진 기분이 드는걸.” 나의 말에 아빠는 소리 내어 웃었어요. 하지만 웃음의 끝은 눈물 빛에 번져갔지요. 아빠는 품속에서 잠시 태일이를 꺼내며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손으로 제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말했어요. “태일아 기억해.” “…….” “아빠가 세상에 없어도, 항상 네 가슴에 살고 있다는 걸.” “…….” “왜냐하면 우리 태일이는 엄마 심장의 반과 아빠 심장의 반이 합쳐져 이렇게 건강한 힘차게 뛰고 있는 태일이의 심장이 생긴 거니까.” 그러면서 아빠는 손을 제 가슴에 댔어요. 쿵쿵쿵 뛰는 제 심장의 소리를 아빠는 아주 오랫동안 들었어요. 기억하려는 듯. 멀리 가서도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려는 듯. 듣고 또 들으며 가슴에 나의 소리를 담았습니다. 아빠는 잠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았어요. 어둠 속에서도 아빠의 눈은 투명했지요. 거짓이 없어 흔들림 없는 아빠의 맑은 목소리가 제 가슴에 슬픔으로 새겨집니다. “그러니까 태일이 가슴 속에 아빠가 있어. 언제나 어디서나 아빠가 우리 태일이 지켜줄게.” “…….” “아빠가 꼭 지켜줄게.” “…….” “그 대신 태일이가 엄마를 지켜줘야 한다. 약속할 거지?” “응, 약속할게. 아함. 나 졸리다 이만 잘래.” 일부러 하품을 입이 찢어져라 크게 하며 몸을 뒤로 돌렸어요. 그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다 올렸지요. 아빠는 꼭 마지막을 말을 하는 것처럼 말했어요. 혹 알고 있는 것일까요, 끝이 왔다는 걸. 그렇게 피하고 피하던 그 길의 끝에 선 아빠는 이미 모든 걸 덜어낸 듯 태일이의 옆에 있지만 멀게만 느껴졌지요. 눈물이 뚝뚝 흘러나왔어요. 새어나오려는 울음을 손으로 틀어막았어요. 아빠가 죽는다는 생각을 외면하고 또 외면했는데 막상 피할 수 없게 다가오니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저의 가슴을 억눌렀어요. 그렇게 울고 있는 제게 아빠는 저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어요. 아빠의 목소리도 눈물에 잔뜩 젖어있었습니다. “태일아, 미안하다. 그리고 정말 사랑한다.” 그렇게 그 날 밤은 서늘한 달빛 속에서 우리 부자의 눈물로 젖어갔지요. 그리고 그것이 아빠와 마지막으로 보낸 밤이었습니다. 너무나 커다란 바람이었던 걸까요.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종이비행기에 꿈을 실어 날렸어요. 아빠가 살 수 있도록. 건강해질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와 함께 살 수 있도록. 그렇게 간절히 바라고 원했는데, 결국 끝내 고통스런 병으로 아빠의 심장은 갉아지고 갉아져 부서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아빠는 영혼을 제 가슴에 담아두고 사라졌습니다.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아빠의 영정사진을 바라보았어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쥐며 참아 보았지만 결국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손으로 마르지 않는 눈물을 훔쳐내고 훔쳐내며 울다가, 바닥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 엄마가 보였습니다. 일어서 몸을 떨며 울고 있는 엄마의 등에 얼굴을 묻었어요. 그리고 아빠와 한 약속을 새기며 말했지요. “엄마, 아빠랑 약속했어.” “흐윽…흑” “엄마는 태일이가 지켜줄게. 그러니까 울지 마.” “…….” “그리고 아빠는 우리 곁에 있으니까.” 내 나이 열 살이 되던 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움을 배웠습니다. * * * * * # 종이비행기의 꿈 -강태일번외 천개의 학을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천개라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는 거겠지요. 100살이 되어도 빛바래지지 않을 꿈을 적은 천개의 비행기를 아빠와 함께 다니던 산의 정상에서 날렸어요. 하늘에서는 부디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이 것만큼 부디 저의 꿈을 거둬주시길 바라며……. 천 개의 종이비행기를 다 날리고서 늦은 밤 집으로 들어왔어요. 집안은 어두컴컴했지요. 신발을 벗고서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는 데 그곳은 엄마의 방이었지요. 천천히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가 벌어진 문 틈 사이로 눈을 갖다 댔어요. 시야 속에 무언가 맺힌 순간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떼었어요. 심장이 멈추어지는 것 같았어요. 두 눈을 의심한 채 다시 마른 침을 삼키며 눈을 가져다 대는데, 곧바로 저는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어요. 침대위에서 엄마는 발가벗은 몸으로 처음 보는 낯선 아저씨와 함께 뒹굴고 있었어요. 도저히 믿을 수 없어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치는데 쿵 넘어져 버렸습니다.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벌벌 떨려 왔어요.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 혼란스럽게 섞여집니다. 곧이어 소리를 들은 엄마가 몸을 이불로 감싼 채 나왔습니다. 더듬거리며 엄마를 불렀어요. “어, 엄마.” 엄마는 차갑게 얼어붙은 시선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다 침대위에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아저씨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이제 아빠 되실 뿐이다. 인사 드려라.” 그 순간 강하게 망치로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멍해졌어요. 두 눈을 두 귀를 의심하며 엄마를 멍하니 바라보았어요. 엄마는 무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았지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환상처럼 느껴졌어요. 털어내기 위해 양 옆으로 고개를 힘껏 저었지요. “마, 말도 안돼. 말도 안돼.” 혼자서 한 참 동안 그렇게 중얼거리던 나는 방안으로 들어가려는 엄마의 다리를 재빨리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거리며 물었어요. “엄마 무, 무슨 소리야. 아빠 있잖아. 우린 아빠가 있잖아! 저 아저씨가 무슨 아빠야!” 나의 말에 엄마는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내 손을 떼어내며 감정이 한 톨도 없는 목소리로 답했어요. “아빠는 죽었어.” “아니야.” “…….” “안 죽었어! 여기에……” 손으로 저의 가슴을 짚었습니다. 그리고 눈물 한 방울을 툭 떨어뜨리며 말했어요. “여기에 살고 있어.” 나의 말에 엄마는 비린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제 얼굴을 감싸 쥐었어요. 순간 저는 흠칫거렸어요. 촉각위로 부딪히는 엄마의 손은 무척이나 따끔거렸거든요. 지금 내 앞에 서있는 이 사람이 진짜 나의 엄마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엄마는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엄마는 텅 빈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너희 아빠는 항상 그랬지. 항상 현실이 아닌 이상 속에 살면서, 달콤한 말들로 나를 녹여냈지. 하지만 그건 독이었어. 결국 봐봐. 우리 꼴이 어떻게 되었는지. 빚에 잔뜩 떠밀려서 도망 다니며 곰팡이 냄새나는 단칸방에 살고. 하루하루 식비 걱정해야하던 우리의 처참한 꼴을!” “…….” “아빠는 죽었다. 그러므로 윤태일은 죽는 것이다.” “…….” “넌 이제 강태일이다.” 눈물이 툭툭 불거져 나왔어요. 모든 게 믿을 수 없었어요. 저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집에서 뛰쳐나왔어요. 그렇게 갑작스럽게 부딪혀온 숨겨진 현실 앞에서 저는 몹시도 혼란스러웠어요. 깊은 어둠 속을 눈물과 함께 달리고 달리다 철퍼덕 넘어져버렸어요. 저는 넘어진 채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어요. 그렇게 바랬는데. 그렇게 간절히 바랬는데. 아빠가 건강해지길. 그래서 살아주길. 뼈밖에 남지 않는 아빠의 팔뚝을 보며 매일 울면서 바랬는데……. 엄마는 아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어요. 제가 날리고 날리던 숱한 종이비행기들이 모두 엄마의 손아귀에 들어가 갈기갈기 찢어져버렸어요. 바닥에 주먹을 쾅쾅 쳤어요. 가슴이 너무나 아파서 아픔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어요. 아빠를 열심히 병간호하던 엄마가, 하루 종일 아빠를 보내며 슬프게 울던 엄마가 모두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소름끼치게 다가왔어요. 엄마는 가면을 쓰고서 가슴속에 칼을 품으며 아빠를 대하고 있던 거예요. 가슴을 움켜쥐었어요. 그리고 툭툭 가슴을 주먹으로 쳤어요. 심장의 반을 잃자 숨이 가빠지네요. 폭풍 같은 울음을 거세게 토해내며 아빠를 불러요. “아빠. 아빠. 아빠…….” 더 이상 아빠는 아프면 안 돼요. 더 이상 슬프면 안 돼요. 숨쉬었던 시간 속에서 너무나 많이 아프고 울었던 아빠란 말이에요. 하늘에서도 울어야 하는 건 너무 가혹해요. 가슴을 손으로 가렸어요. 아빠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기 않기 위해서. 아빠가 부디 이 모습은 보지 않았기를. “아빠, 아니야.” “…….”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니까 푹 쉬어.” “…….” “아무것도……” 쏟아지는 눈물에 가슴을 적시기 싫어서 손으로 막았어요.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이 손가락 틈사이로 새어나옵니다. 이 모든 거짓이 거짓이길. 이 모든 현실이 악몽이길. 바라고 바라지만 어둠이 걷히며 햇살이 세상을 비추어도 모든 것은 거짓으로 모순 된 현실이었습니다. * * * * * # 종이비행기의 꿈 -강태일 번외 8년 전 그 날 후 마음에 병이 생겼다. 너무나 깊어져서 너무나 잔인해져 버렸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아름다운의 연결인 믿음이 내겐 없다. 모든 게 의심스럽고, 모든 게 부정적으로 보였다. 그렇게 난 거짓에 더럽혀져 진실을 보는 눈을 잃어버렸다. 두 번의 배신과 거짓된 얼굴을 보면서 나는 더 이상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했고 어둠에 잠식되어 갔다.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며 혼자 격리되어 살아가는 나는 가슴에 구멍이 송송 났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워 졌다. 인간이란 참 나약하다. 혼자서 살기엔 너무나 약한 존재이다. 혼자서 바라보는 세상은 참으로 무서웠다. 누군가에 의지할 데 없는 난 그렇게 인생의 균형대 위해서 쓰러지고 또 쓰러진다. 그런데 그렇게 쓰러지며 온 몸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을 때, 내게 누군가 자꾸 손을 내밀어준다. 손길을 쳐내고 쳐내도 계속 단 한 번이라도 쓰러짐을 피할 수 있도록 내게 손을 내밀어 준다. “나도 종이비행기 접고 싶어!”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애써 밝게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자 그녀는 조그만 몸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하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참 신기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을 피하고 피했는데, 이 사람은 피하지 못하도록 자꾸 가로막는다. 처음에는 그게 몹시 짜증이 났고 화가 났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나는 그녀가 가로막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더하여 막아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종이와 펜을 가지고서 함께 학교 옥상으로 갔다. 햇살을 실은 바람이 크게 불어왔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얼굴을 덮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손을 뻗어 치워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투덜거리며 손목에 있던 머리끈으로 머리를 질끈 묶었다. 가끔씩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 재미있다. 인간이 이렇게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렇게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그녀에게서 나는 한 가지씩 거부하던 감정이라는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자 종이비행기에 꿈을 적었다. 나는 한 치의 고민 없이 종이에 글씨를 끼적거렸다. 그 때 옆에 있던 그녀가 볼펜으로 입술을 꾹 누르며 말했다. “음, 나는 알 것 같아.” “뭐가요?” 내가 묻자 그녀는 파란 하늘만큼이나 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변함 없는 너의 첫 번째 꿈.”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빠르게 종이비행기를 접고서 일어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변함없는 나의 첫 번째 꿈. 아빠. 우리는 동시에 하늘을 향해 각자 손에 쥐어진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바람을 벗 삼아 간절한 우리의 꿈을 싣고 날아가는 종이비행기를 멍하니 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두 손을 꼭 감고서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를 올렸다. 그녀가 종이비행기에 실어 날린 꿈은 무엇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학교를 끝마치고서 음악을 들으며 걸어가는데 발에 무언가 밝히는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발을 들어올리며 고개를 내리니 그 것은 다름 아닌 종이비행기였다. 우리들이 아까 전에 날린 그 종이비행기. 천천히 손을 뻗어 종이비행기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접어진 종이를 느린 손동작으로 천천히 폈다. 하얀 종이 위에는 큼직하고 둥글둥글한 글씨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강태일의 가슴에서 외톨이의 눈물은 가져가주세요. 대신 함께할 수 있는 눈물을 보내주세요.] 갑자기 픽 웃음이 났다. 그리고 가슴이 간질거렸다. 나는 다시 그녀의 종이비행기를 접고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하느님의 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한 번 더 날려 보냈다. 내 이름이 적혀진 그녀의 종이비행기를 바라보다 옷깃을 들어 코끝에 가져다 댔다. 아까 안겨 있을 때 배었던 그녀의 달콤한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 나왔다. 기분이 묘해진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내 마음마저도 흔들어 놓는 것 같다.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거짓이 없는 자연의 소리를 들었다. 나 당신은…… 믿어도 될까? -강태일 번외 종이비행기의 꿈 THE END Chapter. 20 마지막 돌격 “꼬선생 수업이 정말 재미있나 봐요. 조는 애들도 없고 모두들 아주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던데요?” 무사히 오늘도 수업을 끝내고 교무실로 돌아가는 길. 추선생님께서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하셨다. 어느새 교생실습을 한 지 3주가 훌쩍 지나가고, 이제 4주째에 접어들었다. 1, 2주에는 담당선생님인 추선생님의 수업을 참관하였고, 3주에 들어서면서 내가 직접 수업을 실시하게 되었다. 추선생님께서 친절히 지도안을 검토해주시고, 수업자료에 쓸 PPT나 프린트 물들을 제공해주셔서 보다 어렵지 않게 수업을 준비하고, 진행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무척 긴장되고 떨렸었으나 이제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니 편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장난꾸러기들이 많은 2학년 5반 아이들이 역시나 고분고분하게 수업을 받지 않는 다는 것이다. 난 뚱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며 추선생님의 말씀에 뒤늦게 대답했다. “저를 골려주기 위해서 아주 열심히 들이죠.” 몇몇 아이들이 틈만 보이면 딴 길로 새게 만들기 위해 나를 끌어드렸다. 그리고 가끔가다 툭툭 곤란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예를 들어 어느 한 작품을 공부하다가 인물이 뚱뚱하다고 묘사되어 있으면, 이 주인공이 몸무게가 얼마인지 정확히 알려주라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했다. 특히나 건방진 주한비 이 녀석은 공부도 못하는 것이 매 수업마다 어디서 찾는 건지 몰라도 어려운 질문 10가지씩을 준비해 와 나를 첫 수업 때 난감하게 했다. 그 덕에 나는 바로 다음 날부터 예상문제를 생각하며 아주 열심히 작품을 파서 수업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 역시 만만의 준비를 하여 대체적으로 잘 넘기긴 했으나, 아이들이 한꺼번에 공격해 오면 나도 모르게 가끔씩 말려들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 마다 나의 사랑 강태일이 무표정으로 턱을 괴고서 ‘이만 수업하죠.’ 라고 중저음으로 말했고, 아이들은 무언의 압박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멋지던지. 역시 내 남자고, 내 특별한 운명의 상대이다. 발그레해진 얼굴로 혼자 히죽 웃고 있을 때, 갑자기 추선생님이 내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나를 보더니 목소리에 힘을 가득 실어 말하셨다. “손봐주고 싶은 녀석 있으면 말만 하십시오. 조용히 매장 시켜버릴 라니까.” 어찌 보면 참 든든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다. 다소 험악하게 생긴 인상과 큰 덩치 때문인지 이 말을 하는 추선생님은 마치 악명 높은 조폭 같았기 때문이다. 어색하게 웃으며 투박한 추선생님의 손에 잡힌 내 작은 손을 빼냈다. 그 때 다른 한 선생님이 추선생님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고개를 들리니 한 여선생님께서 추선생님께 손짓하며 말했다. “추선생님! 잠시만 도와주세요!” 추선생님은 먼저 교무실에 가있으라 하며 그 선생님의 뒤를 빠르게 따라갔다. 이 학교에서 돌쇠로 불리는 추선생님은 그렇게 거절 한 번 못하고 오늘도 머슴처럼 일을 도와주시러 가신다. 나는 작게 한 숨을 뱉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있으면 정말로 교생실습이 끝이 난다. 교생실습이 끝이 나는 건 강태일과도 멀어지는 것을 뜻한다. 실습이 끝나면 학교에 더 이상 나오지 않기에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내가 교생실습의 기간인 한 달 내에 그를 내 남자로 만들려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강태일의 진짜 속마음을 모르겠다. 확실히 내게 마음은 연 것 같다. 허나 나를 여자로서 받아드릴 마음이 있는 것인지는 의문의 수수께끼처럼 알쏭달쏭 하기만 하다. 어찌하였든 조금의 희망은 있기에 끝나기 전 없는 매력 쥐어짜서라도 그를 완전히 내게 넘어오게 해야 했다. 하여 나는 마지막 돌격을 실시해야 한다. 마음을 단단히 굳히며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고 있는 그 사람은 바로 내 사랑 강태일었다. 나는 재빨리 김도혁을 따라 얼마 전에 가지고 다니게 된 작은 거울 꺼냈다. 그리고 얼굴을 살피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마지막으로 분홍색 립글로스를 재빠르게 살짝 바르고서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가라, 순이! 녀석의 뒤에 서서 나는 그를 놀래줄 준비를 했다. 뽑아져 나온 음료수를 들어 올리며 그가 뒤돌아서는 순간 나는 그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까꿍-!” 그런데 무안할 정도로 녀석은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의 삼삼한 반응에 민망해진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녀석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내게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잇값 좀 하세요. 까꿍이 뭡니까.” 그 말에 나는 볼을 부풀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좋아하는 이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 참으로 서운했다. 그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갑자기 부풀어 오른 나의 볼에 차가운 음료수 캔을 가져다 댔다. 갑작스런 차가움에 촉각이 깜짝 놀라 몸이 움찔거렸다. 녀석은 피식 웃으며 음료수를 따 내게 내밀었다. “마실래요?” “우와. 나 주는 거야?” “아니면 다른 거드실래요?” “아니아니, 이게 좋아!” 한순간에 음료수 앞에서 기분 좋아진 나는 방긋 웃으며 그가 내민 음료수를 냉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가 음료수를 하나를 더 뽑는 동안 나는 홀짝홀짝 음료수를 들이켰다. 그렇게 나는 강태일의 손에 다른 음료수가 들리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단숨에 음료수를 비워냈다. 그리고 꺼억- 그의 앞에서 트림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가 준 음료수는 다름 아닌 탄산 음료수였다. 갑작스럽게 토해져 나온 트림에 나는 깜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힐끔 녀석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조금이라도 더 잘 보여야 할 이때에 이런 망측한 모습을 보여주다니. 정말 바닥을 치며 통곡하고 싶었다. 그런데 강태일은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아니하고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불쑥 내게 물었다. “하나 더 마실래요?” “진짜? 먹을래!” 강아지처럼 받아 먹을 자세를 취하며 반짝이는 눈으로 강태일을 바라보았고,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태일은 갑자기 집게손가락으로 나의 코끝을 올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꿀꿀.” 그 말에 순간 머리속이 멍해지는 가 싶더니 이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녀석의 손을 툭 치며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녀석은 장난기가 묻어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삐친 꿀꿀이.” “야!” “소리치는 꿀꿀이.” “너 혼난다!” “호통 치는 꿀꿀이.” 그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러다가 꿀꿀이란 꿀꿀이는 다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뾰로통해진 얼굴로 울먹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에 그가 피식 웃었다. 묘한 그의 웃음에 미간을 찡그리고서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았다. 그는 그런 내게서 몸을 돌리더니 지폐를 꺼내 또 음료수를 뽑았다. 다른 친구들에게 나눠주려는 것인지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음료수를 뽑는 강태일. 한 여섯 개의 음료수를 뽑고 나서, 강태일은 음료수를 품에 가득 안고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내게 불쑥 그 음료수를 전부 내밀었다. “나 다 먹으라고?” 내가 놀란 얼굴로 묻자 그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 녀석 진짜 내가 돼지인 줄 아나.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이 먹는 것은 사실이고, 마른 체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뚱뚱이도 아니었다. 왠지 서러워진 나는 버럭 소리 질렀다. “안 먹어!” “진짜요?” “그래!” “아, 그럼 버려야겠다.” 곧장 바로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음료수를 버리려는 강태일. 나는 기겁하며 재빨리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이걸 아깝게 왜 버려!” “먹을 거죠?” “알았어! 먹으면 되잖아!” 그의 품에 있던 음료수를 재빨리 다 받아들며 씩씩 거렸다. 그 때 강태일이 갑자기 큰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그렇게 애써 곱게 빗은 머리를 마구 흩뜨려놓고서 그는 웃으며 나를 지나쳐갔다. 그리고 그 순간. 작은 그의 음성이 바람처럼 들려왔다. “귀여운 꿀꿀이.”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이 시대의 패션선두자라며 스스로 자신을 높이 칭하는 김도혁을 데리고 쇼핑을 나왔다. 물론 그냥 순순히 따라 나올 녀석은 아니기에 옷을 한 벌 사주겠다는 조건 하에서 말이다. 내가 봐도 김도혁은 길을 가다 시선을 한 번 붙잡을 정도로 옷을 무척 잘 입었다. 녀석은 다른 사람이 입었으면 Worst가 됐을 스타일을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하며 Best를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작년 겨울에는 한 패션잡지에 길을 가다 눈에 띄어 실리기도 하였다. 어찌하였든 마지막 돌격을 위하여 잘 안하는 쇼핑을 이렇게 나왔고, 패션에 감각이 있는 김도혁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녀석은 정작 자기 옷을 보는데 바빴다. 그리고 나는 옷 보다 각종 먹을거리에 관심이 많았다. 이리저리 반짝이는 눈동자를 굴리고 있을 때 건너편에 핫도그가게가 보였다. 나는 핫도그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핫도그! 핫도그 먹고 싶어!” 입안에 군침이 가득 돌았다. 곧바로 핫도그 가게를 향해 뛰어가려는 찰나 커다란 손이 내 목덜미를 덥석 잡았다. 그리하여 나는 핫도그로 향하려는 내 힘찬 몸짓을 멈춰야 했다. “그만 처먹고 빨리 옷이나 사라고!” 얼떨결에 끌려나온 최하운은 짜증을 얼굴에 덕지덕지 붙인 채 내게 크게 소리쳤다. 그는 극도로 사람이 북적이는 곳을 돌아다니기 싫어했다. 그런 그를 이 상황에 별다른 쓸모는 없지만 덤으로 끌고 나왔다. 하운이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나를 노려보았고, 옆에 있던 도혁인 혀를 차며 요새 유행하는 아이돌의 노래를 패러디해 불렀다. “누난 너무 돼지~” 그 말에 나는 발끈 하며 주먹을 내밀었다. “이 놈의 자식!” “누난 너무 돼지~ 누, 누나를 보는 나는 미쳐~” 녀석이 나를 놀리자 흥분한 나는 상기된 얼굴로 그의 복부를 향해 발차기를 했다. 바로 엉덩이를 쭉 빼며 이를 피하는 김도혁. 다혈질인 나는 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한 판 하기 위해서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러자 김도혁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어렸을 적 내가 주먹을 쥐기만 하면 나를 무서워 하던 녀석이 키가 자라면서 배짱도 함께 자랐다.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길거리에서 한 판 뜨려는 순간. 그런 우리를 최하운이 단숨에 제압했다. “둘 다 입 닥치고 빨리 사.” 검은 오로라를 뿜어내는 최하운의 모습에 우리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하운이의 얼굴을 보니 금방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운이는 짜증은 내도 평소 화를 잘 안 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한 번 화가 나면 정말 무서웠다. 서로를 노려보던 우리는 고개를 휙 돌리며 앞에 있는 한 여성복 매장에 들어갔다. 매장 안에는 어여쁜 옷들이 가득 즐비해 있었다. 나도 여자이긴 한 건지 많은 옷을 보니 구미가 당겼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많은 옷을 둘러보다 내 눈을 확 사로잡는 한 원피스가 보였다. 나는 조르르 달려가 그 원피스를 들어올렸다. “우와, 이거 예쁘다!” 빨간색의 원피스를 꺼내 보며 탄성을 지르고 있을 때, 누군가 휙 옷을 빼앗아가며 다시 걸어놓았다. 김도혁은 같잖다는 시선으로 나를 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런 건 쭉빵이들 거야.” 그 말에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사면 그만이지. 옷에 무슨 주인 따위가 있는가. 시무룩한 얼굴로 그 원피스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김도혁은 잡아끌며 귀여운 원피스들이 가득한 옷 쪽으로 데리고 왔다. 나는 바로 몸을 돌려 세우며 소리쳤다. “싫어! 나도 섹시한 거 입을래!” 저번에 신희언니가 강태일은 섹시한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사실 섹시한 여자를 안 좋아하는 남자가 있을까. 여자로써 어필하게 위해선 뭐니 뭐니 해도 섹시함을 보이는 게 최고였다. 그리고 방금 내가 본 원피스는 충분히 섹시함을 어필할 수 있는 최상의 옷이었다. 아까 그 원피스로 재빠르게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김도혁이 바로 잡아 세웠다. “이 아줌마야, 패션은 말이야. 분수에 맞게 입어야 하는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 “꽃도혁의 패션철학에 있다! 아무튼 저건 절대 안 돼. 웃음거리만 살 뿐이라고.” 그렇게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 벽에 기대서 이를 무료한 얼굴로 지켜보던 하운이가 무언가를 보이며 물었다. “이건 어때?” 그 말에 우리는 고개를 들려 최하운의 손에 들린 옷을 바라보았다. 최하운이 제안한 옷은 김도혁이 주장하는 귀여움과 내가 주장하는 섹시함이 균형 있게 잘 조화되어 있었다. 분홍색의 이 옷은 아까 그 원피스 못지 않게 내 마음에 쏙 드는 원피스였다. 도혁이는 감탄 어린 얼굴로 하운이를 바라보며 박수를 짝짝 쳤다. 그리고 탄성을 내지르며 하운이를 향해 주먹을 쥐고서 엄지손가락을 우뚝 치켜세웠다. “누나한테 잘 어울리겠다. 하운이 형 좀 짱인듯?” 패션의 선두주자께서 칭찬을 함에도 최하운은 시큰둥했다. 그는 졸린 얼굴로 하품을 하며 말했다. “난 그저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그의 모습에 나는 웃으며 재빨리 하운이가 골라준 옷의 제일 작은 사이즈를 들고 탈의실로 갔다. 그리고는 빠르게 옷을 집어던지고 냉큼 입었다. 대부분 마음에 들면 다 사이즈가 컸는데, 이 옷은 마치 주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꼭 맞았다. 옷을 갈아입고서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두 사람은 내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있자, 빨리나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에헴, 일부러 큰기침을 내며 탈의실에서 몸을 빼냈다. 그리고 녀석들을 향해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물었다. “어때? 예뻐?” 나를 무표정으로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들은 이내 얼굴을 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들의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스쳐가자 신이 난 나는 그 자리에서 골반을 돌리며 섹시 댄스를 췄다. 그러자 두 사람은 못 볼 걸 봤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렸다. 꿋꿋하게 엉덩이를 흔들며 웨이브까지 보이자 하운이는 욕까지 내뱉었다. 저 자식들이 그냥. 이를 지켜보고 있던 점원이 키득키득 웃었다. 나는 헛기침을 내뱉고서 새침한 얼굴로 계산하기 위해 계산대로 갔다. 다음으로 우리는 그 근처에 있더 헤어숍에 갔다. 고등학교 때부터 계속 유지해온 바가지 앞머리에 긴 생머리. 이 헤어스타일에 조금 변화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여성스러워 보일 수 있는 파마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김도혁도 덩달아 내 옆에서 새로운 머리를 했다. 우리가 그렇게 변신을 꿈꾸며 머리를 하고 있을 때, 최하운은 의자에 앉아 벽에 기대어 잠이 들어 있었다. 헤어숍 안에 있던 많은 여성들이 힐끗힐끗 잠든 최하운을 엿보았다. 그리고는 서로들 수군거렸다. 나보고 항상 어디서든 방심하지 말고, 틈 보이지 말라고 충고했으면서 녀석은 대놓고 자신을 내 주고 있었다. 머리를 하는 동안 내내 행여 누가 우리 운이를 훔쳐갈까 나는 계속 그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확인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머리를 끝마치고서 바로 도혁이는 약속이 있다며 먼저 갔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쇼핑과 머리등을 해서 총 5시간 정도 걸렸다. 최하운은 또 끌고 오면 죽여 버린다고 주먹을 내밀며 나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냐하면 녀석은 어차피 또 따라오게 되어있으니까! 옆에서 계속 하운이는 투덜거렸고, 예쁘게 변신한 나는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며 변화를 즐겼다. 졸라서 하운이가 사준 분홍색 구두가 무엇보다도 참 마음에 들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 마지막 돌격을 위한 당찬 소리. 그렇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때 정말 필연처럼 레코드 가게에서 나오는 강태일을 발견했다. 그는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헤드 셋을 낀 채 새로 산 음반을 들여다 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춰 세우며 하운이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강태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소 긴장된 음성으로 그에게 말했다. “가, 강태일이다.” 나는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백을 그에게 넘겼다. 그리고 그의 손을 꽉 잡고 행운을 가득 충전한 후, 잡고 있는 우리의 두손을 하늘 높이 뻗어 올리며 파이팅을 외쳤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 조금은 긴장이 된 내게 하운이는 피식 웃으며 풀라는 듯 가볍게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나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 세워 멀어지는 그를 재빨리 쫓았다. 하늘이 주신 기회이다. 당당함과 솔직함이 김순이의 매력이라고 난 자부하니까. 오늘도 돌격! 다리가 길어선지 그는 짧은 사이에 엄청난 거리를 만들어냈다. 나는 행여나 놓칠세라 거의 뛰다시피 그에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겨우 따라잡은 나는 그의 옷깃을 잡으며 세웠다. 그러자 흠칫 놀라며 강태일이 나를 보았다. 인사를 건네야 하는데 숨이 차올라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거친 숨을 토해내며 나는 겨우 그에게 말을 꺼냈다. “하아. 어머. 하, 여기서 이렇게 마, 만날 줄이야.” 다소 모양 빠지는 만남이었다. 정말 우연적으로 로맨틱하게 만나고 싶었지만, 누가 봐도 내가 미친 듯이 쫓아온 꼴이었다. “달려오셨나 보네요.” “응? 아, 뭐.” 어색하게 웃으며 새로한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 누군가의 손이 갑자기 나의 허리를 둘렀다. 깜짝 놀라기도 전 그 손의 주인이 내 어깨에 턱을 괴며 태일이에게 말했다. “어이, 안녕.” “예, 안녕하세요.” 하운이에게 인사를 하던 그의 눈길이 내 허리를 두르고 있는 그의 손으로 갔다. 녀석의 시선에 재빨리 손을 떼어내려 하자 하운이는 더욱 힘을 주며 내 허리를 감쌌다. 평소에 달라붙기만 하면 덥다고 얼굴을 사정없이 밀어내던 녀석이 아직 한 여름도 되지 않았는데 더위라도 먹은 것일까.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하운이를 보고 있을 때, 자고 싶다며 집에 가자고 끊임없이 투덜거리던 최하운은 강태일을 향해 말했다. “이렇게 만났는데 같이 차라도 마시지.”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우리 세 사람은 어느 아기자기한 한 카페에 왔다. 그런데 지금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우리들 주위로 형성되었고, 서로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나 역시 쉽사리 이 긴 침묵을 깰 수 없었다. 다소 이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진 나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그나저나 최하운은 정년 미친 것일까. 카페에 와 자리에 앉을 때 최하운은 자신의 몸을 내게 찰싹 밀착시키며 앉았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내 허리에 긴 팔을 둘렀다. 게다가 덧붙여 피곤하다며 내 어깨에 얼굴까지 기댔다. 어느 누가 보아도 이 자세는 연인들만이 할 수 있는 자세였다. 혹 오해라도 살까봐 그런 그를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그는 낮은 목소리로 가만히 있으라고 위압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기에 눌려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강태일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먹고 싶어 시켜 논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다. 아이스크림은 녹으면 맛없는데. 빤히 아이스크림을 바라보다 ‘에라, 모르겠다.’ 속으로 내뱉으며 스푼을 들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이 상황에도 맛있다고 느낀 나는 정말 식신인가 보다. “참으시겠다?” 열심히 아이스크림을 퍼서 먹고 있을 때, 내 어깨에 기대어 있던 하운이가 다소 굳은 얼굴로 테이블을 응시하고 있는 강태일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혼잣말로 작게 말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곧이어 하운이의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향했다. “맛있냐?” 고개를 끄덕끄덕. “묻었다.” 입가를 가리키며 그가 말하자 나는 고개를 연이어 끄덕였다. 그리고 휴지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최하운이 갑자기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혀로 살짝 핥았다. 그의 자극적인 행동에 온 신경이 멈춰서며 나는 돌부처처럼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 때 강태일이 테이블을 손으로 쾅 치며 자리에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최하운을 노려보며 날이 선 어조로 말했다. “친구이면 그렇게 만지고 행동해도 되는 겁니까?” 강태일이 화난 얼굴로 묻자, 최하운은 피식 웃으며 내 어깨에 기대어 있던 얼굴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담배갑을 들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의 여유로운 행동에 강태일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최하운은 곧이어 달칵-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건조한 시선으로 강태일을 바라보았다. 강태일 역시 하운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고서 하운이는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 끄며 강태일에게 말했다. “그럼 넌……” “…….” “아무것도 아닌 사이라면서 그렇게 일일이 반응하는 이유는 뭐지? 마치 자기 여자라도 되는 것처럼.” 최하운의 말에 순간 강태일은 망치로 거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멍해졌다. 녀석의 까만 동공이 더욱 커다래졌다. 그는 조심스레 시선을 돌려 나를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르륵 장작에 불길이 올라오는 것처럼 그의 얼굴은 붉어졌다. 곧이어 그는 고개를 휙 돌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리고선 그는 성큼성큼 빠르게 걸음을 옮겨 자리를 피했다. 사라지는 강태일의 모습을 쫓다 하운이의 팔을 퍽퍽 치며 나는 소리쳤다. “너 미쳤어! 지루해서 머리가 훼까닥 돌았어? 갑자기 왜 그래!” 내가 흥분하며 그의 팔을 때리자 하운이는 나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씩씩거리며 내가 노려보자 그는 건조한 시선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멍청아. 모르겠으면 뒤집어 엎는 거야.” “……?” “봤지? 저 자식 질투하는 거.”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최하운을 보았다. 그럼 방금 한 행동들은 일부러 강태일을 떠보기 위해서 그랬다는 거? 내가 멍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는 정신차리라는 듯 내 이마를 손가락을 툭 치며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녀석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로도 놀라울 일이었다. 연애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나는 긴 속눈썹을 보이며 눈을 감고 있는 최하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너 연애 안 해봤다는 거 순 뻥이지? 뭐 우린 사귄 것도 아니었으니 패스하고 또 누구 있던 거 아니야?” “없어.” “진짜? 정말로?” 내가 추궁하듯 되물어 보자 감고 있던 하운이의 눈이 번쩍 떠졌다. 순간 나를 향한 그의 눈은 무척 까맣고 차가워서 줄줄이 나오던 말문이 한 순간에 막혔다. 그는 굳은 얼굴로 내게 딱딱하게 말했다. “없다고.” 댓글 8개 이 글을...(0) ▶Black ... 진짜 최고..ㅋ 계속 웃었어요....ㅋㅋ 09.02.16 22:19 답글 †승or란† 에이~있구만 ㅋㅋ 근데 뭔가 상처된는 사랑이었나보지? 지금까지 내용으로봐서는...ㅋㅋ (진짜로아니면..말구..;;)ㅋㅋ 09.02.17 04:12 답글 고양아멍해봐 ㅈ ㅐ밌어요!!! 쵝오!!!!!!!!!!!!!!! ㅋㅋㅋㅋㅋㅋㅋㅋ 09.03.20 03:46 답글 경훈아쪽 하운이진짜내스타일이다ㅋㅋㅋ 09.04.26 20:23 답글 앗싸리(あっさ... 진짜 어떻게 될런지,,, 근데 하운이랑 됐으면 좋겠다는,,,,,,,,,,,, ㅋ 09.05.02 17:35 답글 악당들다꺼져♡ 아진짜하운이....ㅜ.ㅜ............멋있네여 완전! 09.05.20 11:39 답글 컁컁이가말했다 하운이가 짱머거요 09.05.25 17:48 답글 움냐하히 꼬선생 복터졌내 09.06.27 12:45 답글 이전 1 다음 텍스티콘 사용 0 / 600bytes 개인정보 유출, 저작권 침해, 허위사실 유포 등의 내용은 임의 삭제되거나 관련법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텍스티콘 사용 0 / 600bytes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윗 글 : [상큼한♥] ♡허니서클(Honeysuckle) [21~30]2008.10.22 아랫글 : [상큼한♥] ♡허니서클(Honeysuckle) [01~10]2008.10.22 서비스 약관/정책권리침해신고카페 신고이용약관카페 고객센터검색비공개 요청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Co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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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왜요?” 백선생님은 우리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강태일을 슬쩍 흘겨보며 더욱 음성을 낮추었다. “강태일과의 소문 때문에 그런 것 같아.” “아……” 강태일과 스캔들이 났다. 우리 뒤로 끊임없는 추측과 소문이 학교 안에 크게 퍼져나갔다. 이런 그와의 스캔들이 내겐 나쁘기 보단 개인적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교육실습 기간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건 이번 나의 주목적이어야 할 실습에서 감점의 요인이었다. 어두운 낯빛으로 나를 보는 백선생님께 나는 웃음 지으며 씩씩하게 말했다. “빨리 가봐야겠네요. 먼저 가볼게요.” 고개를 꾸벅이며 재빠르게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강태일이 내 손목을 붙들며 물었다. “무슨 일 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야.” “저 때문인가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강태일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물들어 있었다. 혹시 나 걱정해주는 건가? 처음 보는 그의 이런 표정이 기분 좋게 다가왔다. “별일 아니야. 어차피 헛소문인데. 너랑 나 진짜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걱정 마.” 걱정 말라고 방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녀석은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풀었다. 그리고 그는 재빨리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다 늦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연구부장 선생님께서 은밀히 보자는 학생상담실 앞에 도착했다. 막상 대면하려니 다소 긴장이 됐다. 교생실습에서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분이 바로 연구부장 선생님이기도 하셨기 때문이다. 연구부장 선생님은 40대 중반으로 훤칠한 키에 젊었을 적 여학생들을 많이 울렸을 법한 미남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가끔씩 뵐 때면 점잖으신 건진 몰라도 말도 없고 표정도 없었기에 다소 가까이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두려웠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내뱉으며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드르륵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러자 넓은 등을 보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연구부장 선생님이 눈에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 법도 한데 아무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혹시 못 들으셨나? 고개를 갸웃하며 부르려는 찰나 연구부장 선생님이 다짜고짜 내게 툭 물었다. “강태일과 무슨 사인가?” “예? 아, 그야 당연 스승과 제자라는 아름다운 사이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씨도 안 먹힐 소리를 하며 어색하게 웃음을 내뱉자, 연구부장 선생님께서 뒤돌아 서 있던 몸을 천천히 내게 돌렸다. 마주한다는 생각에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온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곧이어 그 힘이 맥없이 풀렸다. 연구부장 선생님의 얼굴에 장난스런 웃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예? 그러니까 뭐, 제가 일방적으로 쫓아 다……” 나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본심에 화들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예상치 못한 웃음 공격에 당황하여 그만 정신 줄을 놓고 말았다. 허나 이미 엎지르진 물이었고, 주워 담으려 해봤자 더욱 의심만 살 뿐이었다. 연구부장 선생님이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뚫어져라 나를 보자 나는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러자 연구부장 선생님은 눈가에 인자한 주름을 만들며 웃었다. 이 선생님이 이런 이미지였던가.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진다. 그 때 연구부장 선생님의 그 틈을 파고들며 내게 물었다. “진전은 없고?” “뭐, 조금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나는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다가 쾅- 테이블을 쳤다. 갑자기 치솟아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에 못 이긴 나는 연구부장 선생님께 지금의 내 착잡한 심정을 조잘조잘 토해냈다. 그렇게 내 속마음을 다 까발려 보이고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씩씩거렸다. 그러다 나는 그대로 석고상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이럴 상황이 아니었다.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판에 나는 더 얼씨구나~ 하며 일을 더 벌이고 있었다. 혼자 좌절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연구부장 선생님께서 어깨를 들썩이며 쿡쿡 웃었다. 그리고는 이내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하셨다. 폭탄 같은 웃음소리에 나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한 참 동안 웃으신 연구부장 선생님은 겨우 웃음을 멈추고 내게 말씀하셨다. “가만히 지켜봐도 재미있는 사람이구만.” “허허. 감사합니다.” 일단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웃으면 오래 살고 건강해진다는데 남을 재미있게 해주는 건 행복한 일이 아닌가. 저번에 시골에 내려가니 어르신들은 내가 꼬마였을 적 나의 웃기는 재능에 내가 개그맨이 될 줄 아셨다고 했다. 정말 나 소질 있나? 그렇게 한 참 쓸데없이 뒷구멍을 파고 있을 때 연구부장 선생님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자네를 탓하려고 부른 건 아니네. 다만 따로 보고 싶었을 뿐이야.” “헉! 그건 아니 되요! 선생님 가정도 있으시고, 저는 마음을 두고 있는 사내가……” “착각도 중병이군.” “죄송하게 됐습니다요.” 연구부장 선생님이 너무 진지하게 말씀하시자 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소설이나 드라마를 너무 보았던 탓인 듯싶다. 겸연쩍은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창밖에는 화단과 시멘트 사이에 묘하게 피어있는 민들레꽃 한 송이가 보였다. 신기한 얼굴로 민들레꽃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내 시선을 같이 하며 연구부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민들레 씨앗은 역겨운 환경일지라도 어느 정도 살아나갈 수 있는 곳에 터를 잡지.” “…….” “하지만 사람의 마음의 씨앗이란 어느 때고, 어느 곳이고 불분하지 않고 피어나게 되지. 설령 그 곳이 지옥일지라도 말이야.” 그 말에 나는 민들레꽃에서 고개를 돌려 연구부장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연구부장 선생님은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이 아닌 다정한 얼굴을 지으며 내게 말하셨다. “그래서 인간이 저 민들레꽃보다 더 무겁고 강한 존재인 것인지도 모르지.” “…….” “나는 우리 학교에서 꼬선생이 좋은 인연을 만났다는 것에 무척 기쁘게 생각하네. 다만, 그래도 일을 커지게 할 필요까진 없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제 며칠만 참으면 되지 않겠나. 그 후는 찐하게 사랑해도 뭐라 할 사람 없으니.” 그 말에 나는 눈과 입을 어긋 트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할 수 만 있다면…… 할 수 만 있다면요.” 살짝 움츠러든 내 마음과 함께 목소리가 작아졌다. 다소 불안한 시선으로 바닥을 응시하고 있자, 연구부장 선생님이 내 어깨위에 손을 올리셨다. 그리고 눈물 날 정도로 따뜻해서 슬픈 아빠와 같은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기다려 보게” “…….” “강태일의 마음에 높이 올라야 할 계단이 있어. 지금 그 아이는 그 막연한 계단 앞에서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일 게야. 녀석도 찝찝한 것을 싫어하니 어중간하게 끝내진 않을 거야. 조만간 자네를 찾아와 자신의 결정을 말할 거야.” “…….” “그리고 그 결정이 나는 반드시 긍정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네.” 민들레꽃의 강인함이 깃든 연구부장 선생님의 목소리. 힘이 나는 그 말에 나는 걱정을 떨쳐버리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하늘이 내리신 축복일 것이다. 이렇게 좋은 학교에 와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귀여운 2학년 5반 아이들을 만나게 된 것. 그리고 오랜만에 내 마음에 사랑스러운 설렘을 가져다 준 그 아이를 만나게 된 것. 그 축복에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며, 헤어져도 소중히 생각할 것을 다짐했다. 마음에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 찐다. 그리고 숨어있던 많은 씨앗이 싹을 틔운다. 향긋한 초록냄새가 나는 5월. 싱그러운 이 달의 내 마음은 그 어느 날보다 더 풍요로워진 마음을 가지게 된 행복한 날이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비장한 모습으로 학생 상담실의 책상 정중앙에 나는 앉아있다. 교생실습이 끝나기 전 의미 있는 일을 만들고 싶었고, 조금이나마 정든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추선생님께 따로 부탁해 깜짝쇼를 벌였다. 이름 하여 꼬마팍 도사! 내년이면 수험생이 될 아이들에게 근심과 걱정이 많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자 상담을 해주는 것이다. 물론 아직 짧은 내 인생에 많은 도움은 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힘내’라는 따스한 이 말 한마디는 꼭 해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급 꼬마팍 도사를 결성해 실시하게 되었고, 아침 조회시간에 퇴근할 때까지 이 김순이 꼬마팍 도사가 너희들을 열린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아이들에게 공고했다. 첫 번째 손님은 나의 귀여움을 받고 있는 고봉이었다. 고봉이는 한 참을 머뭇거리다 자신의 최근 고민을 털어 놓았다. 그것은 끔찍이도 고통스러운 바로 치질이었다. 아무에게도 창피해서 이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지만, 너무 힘들다고 그간의 고통을 고봉이는 눈물을 씹으며 얘기 했다. 나 역시 그 괴로움을 잘 알고 있다. 사실 나도 고등학교 때 잠시 한 참 동안 치질을 앓았다. 그리하여 그 괴로움이 얼마나 큰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고봉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동병상련이 느껴졌고, 서로 죽이 맞아 안 걸린 사람은 절대 모를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치질을 잘 치료하는 병원과 빨리 나을 수 있는 비법들을 제공했다. 고봉이는 속이 후련해지고, 좋은 정보를 얻었다며 연신 고개를 꾸벅이고서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렇게 첫 번째 나의 고민 상담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한 시간 후, 찾아온 두 번째 손님은 어째 반갑지 않은 주한비였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사심이 깊게 서려있었다. 그 모습에 나 역시 진지해지게 되었다. 한비는 의자에 털썩 앉더니 어두운 기색으로 한 숨을 쉬었다. 매일 생각 없이 행동하고 웃는 주한비였지만 녀석에게도 고민은 있을 터였다. 녀석도 일단 고독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무겁게 한 숨을 쉬고 있는 그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주한비군은 무슨일로 이 꼬마팍 도사를 찾아왔는가.” “선생님.” “응?” “제게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이런 일이 일어 날거라고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그는 말끝을 흐리며 괴로운 얼굴을 지었다. 도대체 어떠한 고민이기에 주한비가 이러한 표정을 짓는 것일까. 귀를 열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곧이어 한비는 나의 손을 꼭 붙들며 말했다. “부반장이 안 넘어 와요.” 순간 정지 상태. 그러면 그렇지. 여자 문제 말고 녀석에겐 고민이 없을 것이다. 만사를 놀이처럼 즐기는 녀석인데. 거기다 알아주는 바람둥이인 주한비께서 부반장이 안 넘어오니 자존심이 상해서 오기가 생길 만도 하겠지. 내가 그게 무슨 고민이냐며 콧방귀 끼자 주한비는 흥분하며 소리쳤다. “이건 제게 너무 힘든 시련이라니까요! 내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의문까지 떠올리게 한다고요.” 얼씨구. 헛웃음을 지으며 부채로 부채질을 했다. 주한비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한 인물하지, 성격도 상큼하지, 미래 잘나가는 가수가 되어있겠다. 뭐가 부족한 거냐고요? 네?” “그건……” 자기 잘 난 맛에 사는 건방진 주한비에 한이 있던 나는 개인적인 감정을 실어 말했다. “네가 재수 없기 때문이야.” 나의 말에 주한비는 고운 얼굴에 인상을 확 썼다. 그리고 큰 눈으로 휙 나를 째려보는 한비. 그래도 고민하러 온 애한테 재수 없다고 한 건 심했던 것 같아 조금 미안해진 나는 진지하게 생각하며 말했다. “어쩌면 부반장이 너에게서 진심을 못 느낀 건지도 모르지.” “…….” “부반장 봐. 순수하고 바르잖아. 그런 애가 매사를 장난처럼 여기는 너의 말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몰라.” 나의 말에 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순간 녀석의 얼굴에 띄어졌다 사라진 슬픈 표정.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던 그 모습에 나는 멍해졌다. 그는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다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자리에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투덜거리며 뒤돌아섰다. “쳇. 무슨 꼬마팍이야. 열이팍이지. 열이 팍팍.” 세상에 불가사의한 의문이 많다. 아직까지 풀리지 못하는 많은 일들.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풀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은 바로 인간의 감정이 아닐까 싶다. 나는 막 문을 향해 손을 뻗는 주한비를 향해 살짝 웃음 지으며 말했다. “다시 봤다, 주한비.” 나의 말에 그의 손이 멈춰졌다. 그는 그대로 뒤돌아 서있었다. 처음으로 녀석의 뒷모습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역시 앞면만을 가지고 판단하면 안 되었다. 그런데 나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숱하게 하고 있는 이 실수를 나 역시 해버리고 말았다. 저렇게나 속 깊은 아이를. 내 편견으로 나는 너무나 가볍게 여겨왔다. “보인다. 이제야 보인다. 너의 그 진심이. 그리고 그 진심이 너무 예쁘다. 분명 부반장에게 너의 그 진실 된 맘이 꼭 언젠가는 닿을 거야. 그러니까 힘내.” 나의 말에 녀석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 참 동안 우두커니 서있던 한비는 내게로 휙 뒤돌아섰다.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은 상담이었지만 확실히……” “…….” “힘은 되었네요.” 그리고서 한비는 커다란 눈을 예쁘게 휘며 웃었다. 한비다운 귀여운 웃음이었다. 강아지를 볼 때 마다 녀석이 생각 날 것 같다. 까맣고 큰 눈동자.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그렇게 계속해서 아이들의 상담을 받았다. 물론 좋은 해결책과 좋은 말들은 못해주었지만 아이들은 들어준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했다. 그간 속에 쌓아두고 쌓아두었던 말을 속 시원히 뱉으니 한결 가벼워졌다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처음에 무관심 했던 녀석들도 뒤늦게 나를 찾아왔다. 들어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지 다시 한 번 몸소 느끼게 되었다.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면 가슴속에 응어리를 혼자 꽁 싸매두고 있는 사람들이 보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귀를 기울이면 어느새 그들은 마음을 열지도 모른다. 조금은 슬퍼진다. 가만히 앉아 들어주는 것이 시간을 소비하는 짓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 각박한 세상이. 퇴근시간이 임박해 왔다. 슬슬 마무리 짓고 일어서려는 찰나 갑자기 문이 드르륵 열렸다. 고개를 돌려 휘둥그레진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문 앞에 서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태일이었다. 그가 찾아 올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기에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그리고 재발로 나를 찾아오니 왠지 불안해졌다. 혹 이제 그만 귀찮게 하지 말고 떨어져라, 아무리 봐도 초딩 몸매를 가진 김순이 당신이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모진 말을 할까 순간 겁이 덜컥 들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강태일이 차분한 음성으로 내게 물었다. “아직 안 끝났죠?” “끄, 끝나려던 참이었다. 어쨌든 마지막 손님이구나. 앉아.” 몸에 잔뜩 힘을 주며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맞은편에 강태일도 이어 앉았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후, 긴 침묵이 흘렀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힐끗 녀석을 보았다. 깊어진 그의 눈을 보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무슨 말을 꺼내려고 저리 심각해 있는지 추측하고 있을 때,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 그의 음성이 들렸다. “요 며칠 사이 이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에 해석기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 말에 나는 천천히 눈동자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알 수 없는 묘한 얼굴로 나를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흔들림 없는 짙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도대체 이 감정이 무엇인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그 사람은 나에게 있어 어떤 사람인지.” “…….” “그 모든 걸 알 수 있었다면 아마 우리들의 삶에 오해가 빚는 일도, 상처를 주는 일도 없었겠죠. 어쩌면 이건 신이 인간을 만드시며 쥐어준 영원불멸한 과제인 것일지도 모르고요.”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한 숨을 내쉬며 강태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 주위에 형성되는 이 분위기가 진실만큼이나 투명했다. 뛰는 심장을 안고 그를 슬그머니 바라보고 있을 때, 강태일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서 말을 계속 이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내 마음은 도대체 무엇인지. 그런데 사실 결단은 못 냈어요. 선생님 앞에 서면 이상해져요. 모든 게 이상해져요. 그래서 너무나 낯설고, 이를 뭐라고 정리해야 할 지 아직 모르겠어요. 그런데……” “…….” “누군가에게 뺏기고 싶지 않다는 고약한 심보가 들더군요. 그래서 일단 잡아야겠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아요. 지금 이 순간도 온통 그 생각 밖에 들지 않아요.” 그가 내리깔았던 눈을 다시 나를 향해 들어올렸다. 순간 나는 움찔거렸다. 그의 눈은 그간 나를 향하던 눈이 아니었다. 들어오지 말라던 경계막이 쳐진 눈이 아니었다. 나라는 존재를 깊이 담을 열린 눈이었다. 그리고 그의 조심스런 마음의 고백은 마치 멜로디처럼 무척 감미로우면서 애달팠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런 고약한 나한테……” “…….” “잡혀 줄 건가요?” 그가 기다랗고 하얀 손을 내게 내밀었다. 여자보다 더 예쁘고 고운 손. 내밀어주길 간절히 기다린 손. 잠시 동안 그 손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감격에 겨워 목이 매어왔다. 나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강태일을 향해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바보. 잡히고 뭐고 할 것도 없어.”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눈물 한 방울과 함께 웃음을 지으며 녀석의 큰 손안에 내 작고 통통한 손을 넣었다. “이미 난 잡혀 있었으니까.” 나의 말에 녀석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쑥스러웠던 듯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다가 내 손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 손등에 입맞춤 했다. 순간 손등에 부딪히는 그의 입술의 감촉이 말랑하고 촉촉해서 온 몸이 묘해졌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녀석에게서 눈이 부시도록 해맑은 웃음을 보았다. Chapter. 22 선 밟기 “꼬선생 수고 했어~” “꼬선생 수업 잘하던데~ 지금 당장 교사해도 되겠어. 허허.” 연구수업이 끝나자 저마다 선생님들께서 내게 한마디씩 웃으며 해주셨다. 쑥스러움에 나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수업을 참관하셨던 선생님들께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먼저 가시자, 줄곧 쌓여있던 긴장이 와르르 무너진다. 나는 한숨을 크게 내 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어쨌든 이렇게 무사히 끝냈구나. 걱정했던 연구수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었다. 매일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수업시간 마다 장난을 걸어오던 아이들이 열심히 나를 도와준 덕분이었다.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해주고, 발표 해주어서 2학년 5반 아이들과 나는 환상의 콤비로 즐거운 수업을 만들었다. 이렇게 마지막 관문인 연구수업을 끝내고 나니 이제 진짜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 달이란 짧은 사이에 너무나 많은 정이 들어버렸다. 이제 곧 헤어질 시간이라는 것을 떠올리니 코끝이 시큰거린다. 분명 당분간 며칠간은 아침에 눈을 뜬 순간 학교가 생각나겠지. 그리고 아이들이 보고 싶겠지. 아이들은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선생님들은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숱한 그리움에 나는 눈물짓겠지. 한 동안은 계속 그렇게……. 이별이란 겪고 겪으며 이겨낼 수 있다고 다짐해도 막상 다가오면 한순간에 나약해져버리게 만든다. 금방 눈물이 불거져 나올 것처럼 눈이 따끔거리자, 나는 울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잔뜩 두고서 깜박거렸다. “꼬선생!” 그 때 뒤에서 힘찬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백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곧장 지으며 백선생님께 환한 웃음 지었다. 내 앞에 빠르게 다가온 백선생님은 투박한 손으로 내 작은 두 손을 붙잡으며 내게 물으셨다. “오늘 잘 했어?” “네, 성공적으로 끝났어요!” “다행이구만! 꼬선생은 밝고 씩씩하니까 뭐든 다 잘 해낼 줄 알았어.” “어이구야, 과찬이십니다!”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쑥스러워 하자, 백선생님은 마치 엄마처럼 나를 품에 안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사람과의 스킨십을 좋아한다. 나를 쓰다듬어주고 안아주는 것은 서로간의 가까운 관계를 잘 나타내는 애정의 형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백선생님의 손길에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 있을 때, 백선생님이 서운한 목소리로 내게 말씀하셨다. “꼬선생 덕에 요새 학교생활이 무지 재미있었는데, 이제 곧 헤어진다니 진짜 아쉽다.” “저도요. 백선생님 같은 좋으신 분을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기뻤어요.” 그렇게 한참 동안 아쉬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때, 백선생님께 딩동- 문자오는 소리가 들렸다. 백선생님은 나를 떼어놓으며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문자를 확인하고서 핸드폰을 닫은 백선생님은 갑자기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엄청난 힘으로 나를 끌고 갔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얼굴로 묻자 백선생님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이름 모를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서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영문을 모른 채 그렇게 백선생님께 이끌려갔다. 곧이어 도착한 곳은 2학년 5반 교실 앞이었다.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백선생님을 바라보자, 곧 백선생님은 내게 들어 가보라고 눈짓했다. 혹시 이거 나를 위한 깜짝 파티인가?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으나, 애써 꾹 눌러 담으며 기쁨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오버액션으로 엄청나게 깜짝 놀란 얼굴을 지어줘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툭- 뭔가 머리위로 세게 떨어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칠판닦이였다. 분필가루에 나의 머리가 새하얗게 되자 아이들은 까르륵 웃었다. 이런, 맙소사. 깜짝 파티의 스타트 치곤 참 과격하구나. 아이들의 장난에 나는 기뻐할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며 손으로 머리를 툭툭 털고서 고개를 들어올리자, 아이들이 폭죽을 터트리며 한 마음으로 내게 큰 소리로 말했다. “꼬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곧이어 내 앞엔 커다란 케이크가 나타났다. 추선생님께서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내 앞에 케이크를 내밀었다. 케이크엔 엄청난 수의 초가 꽂아져 있었다. 빠르게 초를 훑어보며 세니, 초의 수는 반 아이들의 수와 담임선생님인 추선생님 그리고 나를 합한 수였다. 5월 2학년 5반 가족. 우리들의 인연의 수. 그 소중한 인연이 따뜻한 빛을 내며 밝게 비친다. 아이들이 어서 불라고 눈짓하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만큼이나 크게 입술에 바람을 실어 후- 불었다. 3번을 불자 모든 초가 꺼지고, 아이들은 나를 향해 박수를 크게 쳤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어했다. 그 때 부반장이 예쁜 빨간색 리본이 묶인 상자를 가지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부반장은 예쁜 웃음을 지으며 내게 상자를 내밀었다. 나는 그 상자를 조심스레 받았고,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설레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아이들이 손수 쓴 편지들이 가득 담겨 있었고, 맛있게 생긴 초콜릿 하나가 있었다. “선생님께서 저희들에게 힘내라고 초콜릿 나눠주셨잖아요. 선생님도 앞으로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힘내시라고 드리는 거예요. 물론 지금도 좋은 선생님이시지만요!” 울지 않기 위해 참으려고 하였다. 참으려고 하였는데, 더 이상 감동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펑펑 우는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아 손으로 눈물을 훔쳐내고, 훔쳐내지만 이 벅찬 가슴만큼이나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나를 잘 따르던 몇몇 여자아이들은 나의 눈물에 따라 훌쩍거렸다. 분위기가 우울해지려 하자 남자아이들은 합세해서 소리쳤다. “울지 마! 울지 마!” “꼬선생님.” 나를 부르는 한비의 목소리가 들렸고,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을 곧 나는 녀석을 향해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무언가 퍽- 내 얼굴을 덮쳐왔다. 어느새 초를 다 뺀 케이크를 내 얼굴에 갖다 박은 것이다. 그대로 나는 정지상태가 되었다. 어느새 눈물을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달콤한 생크림 냄새가 후각을 덮쳐왔다. 멍한 얼굴로 가만히 서있는 내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깔깔깔 웃었다. 끝까지 나를 괴롭히는 장난꾸러기 주한비는 키들거리며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울지 말라고요. 자, 눈물의 케이크를 먹은 소감은?” “내 인생에 아주 최고구나. 눈으로 코로 케이크 먹기는 처음이다.” 내 말에 선생님과 아이들은 더욱 크게 웃음을 내뱉었다. 나도 따라 얼굴에 묻은 케이크를 손을 훑어내며 웃었다. 그 때 갑자기 한비가 나를 강태일 쪽으로 퍽 밀어냈다. 순간 넘어질 뻔한 나를 강태일이 잽싸게 잡아주었다. 그 덕분에 케이크를 얼굴에 덕지덕지 붙인 채 바닥에 널브러지는 추한 꼴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놀란 가슴으로 한비를 바라보고 있을 때, 강태일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한비에게 말했다. “주한비, 너 뭐하는 짓이야.” 강태일이 무섭게 화를 내자 아이들의 눈이 갑자기 반짝거린다. 그들의 알 수 없는 시선에 강태일의 몸이 움찔거렸다. 각자 장난스러운 얼굴로 또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며 한 마디씩을 던졌다. “와. 강태일 화냈다!” “자기 여자라고 화내네!” “와, 저런 얼굴 처음 봐.” “꼬선생은 좋겠네~” ……응? 도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비와 고봉이는 서로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비는 자신의 손을 고봉이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런 고약한 나한테 잡혀 줄 건가요?” 그러자 고봉이는 콧소리로 여자를 흉내 내며 훌쩍였다. 그러면서 한비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갖다 넣으며 말했다. “바보. 잡히고 말 것도 없어. 난 이미 잡혀 있었으니까.” 그리고서 주한비는 고봉이의 손에 쪽- 입맞춤했고, 고봉이는 몸을 흔들며 부끄러운 시늉을 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냐!” 정말 몹쓸 재연이었다. 내 인생에 길이길이 남을 성스럽고도 고귀한 그 순간을 저리 망쳐놓다니. 혀를 차며 쯧쯧 거리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잠깐, 이 녀석들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니 강태일의 눈도 동그래져 있었다. 그 날 이후, 모든 게 끝날 때 까지 우리는 이 사실을 숨기고 서로 모른 척 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지나가다 그를 볼 때면 녀석에 뛰어가 안기고 싶었어도 눈물을 씹고 참았었다. 놀란 우리들의 모습을 본 한비는 팔짱을 끼고서 거만한 웃음을 지었다. “그 것이 말이죠.” ※ 꼬투리 번외. “특종이다, 특종! 강태일 꼬선생 찾아갔다!” 2학년 5반의 소식통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봉이가 시끌벅적한 2학년 5반 교실에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아이들은 그 소리에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고봉이에게 주목했다. 고봉이 차오르는 숨을 잠시 토해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태일이가 꼬선생님한테 찾아갔어! 꼬마팍 도사도 거의 끝날 시간인데!” “진짜? 우와~ 무슨 일로 찾아 간 거지?” “혹시 고백하려는 거 아니야?” “에이~ 요새 보니 막 피하던데. 뻥 차러 가는 거 아니야?” 저마다 각자 추측을 하며 말했고, 어느새 한 마음이 된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모조리 학생상담실로 뛰어갔다. 대표주자로 날쌘 돌이인 주한비와 고봉이가 먼저 도착했고, 그들은 위로 올라가 창문을 들키지 않도록 살짝 열었다. 그리고 바짝 귀를 가져다대며 그들의 상황을 엿보았다. 어느새 도착한 아이들은 큰 거사(?)가 치러지고 있는 학생상담실 앞을 메웠다. 고봉이와 한비는 안을 엿들어다 보며 생중계로 지금 상황과 무슨 말을 하는지 아이들에게 알려주었다. 한비의 커다란 눈이 가늘어지며 입가에 음흉한 웃음이 스친다. “이 엉큼한 사람들.” 서로에게 신경 쓰느라 잔뜩 긴장해 있던 순이와 강태일은 밖이 소란스러웠음에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꼬투리 번외 끝 “축하드려요!” “잘 어울린다! 천생연분이다!” “태일이는 내 건데, 꼬선생님이니까 봐드리는 거예요.” 저마다 각자 한마디씩 우리에게 내뱉었다. 상황을 깨닫고 점차 정신을 차린 우리는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모두들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두 사람은 이틀 동안 서로를 본체만체 했었다. 그 때 추선생님이 눈물을 보이며 내게 말했다. “꼬선생. 부디 행복하세요.” “고마워요, 추선생님.” 추선생님에게 생긋 웃으며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그 때 추선생님이 내 옆에 있던 강태일을 휙 째려보며 경고 했다. “강태일 너. 우리 꼬선생 울리기만 해봐. 내가 가만 안 둘 거다.”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추선생님은 신경 끄시죠.” 강태일이 건방진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추선생님은 버럭 화를 내려다 안 된다고 고개를 젓는 나를 보고 화를 억누르며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 때 주한비가 갑자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말했다. “뽀뽀해! 뽀뽀해!” 한비의 말에 곧 아이들도 합창을 하듯 소리쳤다. 뽀뽀하라는 물결이 교실 안에 철렁였다. 강태일은 당황하며 능글맞은 그들에게 더듬거리며 말했다. “무, 무슨……,” 하지만 그가 거부할수록 아이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갔다. 아이들의 뜨거운 성화는 도저히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겉으로 부끄러워하며 손을 휘젓고 있었으나 속으론 웃고 있었다. 잘하고 있다, 애들아. 아무래도 녀석을 봐선 첫 뽀뽀도 머나먼 일 같았기 때문이다. 강태일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케이크로 뒤덮인 나의 얼굴에 순간 그는 흠칫 놀랬다. 그 때 여자를 잘 안다는 바람둥이 주한비가 몸을 흔들며 짓궂은 말을 했다. “아니면 꼬선생 얼굴에 묻은 케이크 네가 입으로 다 해결해주던지!” 그 말에 강태일은 얼굴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개졌다. 여자 아이들은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쓰러지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한 쪽 볼을 부반장이 내민 손수건으로 깨끗이 박박 닦았다. 그리고 그에게 내 볼을 가리키며 뽀뽀하라고 말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결심한 듯 몸을 숙이고선 천천히 붉은 입술을 내게 가져왔다. 온다, 온다. 녀석의 입술이 내 볼에 닿으려 할 때 나는 재빨리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녀석의 입술은 내 입술에 쪽- 하고 닿았다. 화들짝 놀라며 숙였던 몸을 핀 녀석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아이들을 향해 손가락으로 V모양을 만들며 외쳤다. “성공!” 그러자 아이들은 깔깔 웃으며 소리쳤다. “뽀뽀했데요~ 뽀뽀했데요~” 강태일은 당황한 듯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서 내게 말했다. “아, 뭐, 뭐예요.” “에이, 쑥스러워하기는.” 나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녀석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나의 행동에 얼굴이 살짝 찡그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는 피식 웃으며 손으로 내 얼굴을 푹 밀어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머리 속에서 계속 폭죽이 펑펑 터진다. 설렘과 행복과 그라는 폭죽이 말이다. 펑펑! 지금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정도로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게 느껴진다. 손으로 턱을 괴고서 히죽히죽 웃고 있을 때, 현관문이 벌컥 열리고 빠른 속도로 누군가 쿵쾅쿵쾅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등장한 사람은 식탁을 쾅-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누나!” 기차화통을 삶아 먹기라도 한 것처럼 엄청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김도혁. 나는 깜짝 놀란 귀를 만지작거리며 녀석을 가늘어진 눈으로 보았다. 그러자 김도혁은 내 어깨를 부여잡고 쉴 새 없이 말을 뻥뻥 토해내기 시작했다. “진짜야? 사실이야? 강태일이랑 진짜로 사귀냐고!” 김도혁은 나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녀석의 거친 손놀림에 온 몸이 정신없이 흔들리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 어깨를 잡고 있는 녀석의 손을 세게 쳐내며 나는 버럭 소리쳤다. “그래!” “싫어, 싫어, 싫다고! 안돼! 강태일은 안돼!” “뭐가 안 돼?” 머리를 부여잡고 온 몸으로 싫다는 표현을 하는 김도혁을 미간을 찡그리며 바라보았다. 녀석의 목에 핏대가 섰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놈한테 난 절대 매형이라고 부를 수 없어! 죽어도 못 불러!” “그럼 부르지 마라. 나만 좋으면 됐지.” “누나야~ 아따. 하운이 형한테 그냥 가라니까.” “애가 또 뭔 소리야.”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며 김도혁은 억지를 썼다. 저번부터 애가 왜 계속 하운이와 나를 그런 사이로 엮으려는지 모르겠다. 하운이나 나나 서로 당사자들은 그런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는데 말이다.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녀석을 보고 한 숨을 내쉬다 녀석의 마음을 달래보려고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야, 하운이는 말이야…….” “내가 뭐.” 갑작스레 뒤편에서 하운이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는 하운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소리쳤다. “형아!” “운아!” 동시에 우리가 크게 부르자 그의 고운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김도혁은 재빨리 하운이에게로 다가가 팔을 붙들고 울먹였다. “형, 큰일 났어! 누나가 강태일하고 사귀게 됐데!” “아, 그러냐?” 최하운은 김도혁의 말에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고 무심히 대꾸했다. 그 심심한 반응에 우리 둘은 각자 다른 의미에서 시무룩해졌다. 동생이라는 놈은 화를 내지 않나, 친구란 놈은 그러든 말든 무관심하질 않나. 정말 나 인생 헛살았다. 그렇게 인생 한탄을 하고 있을 때, 최하운이 매달리는 도혁이를 떼어내며 짜증이 깃든 목소리로 나를 향해 말했다. “일어나. 장 보러가게.” “장? 아, 오늘 장보러 가는 날이지!” 그렇다. 오늘은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장보러가는 날이었다. 냉장고가 텅텅 비어있었는데 어서 사다 채워야겠다. 나는 장보러 간다는 사실에 신이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때 김도혁이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얼굴로 하운이에게 소리쳤다. “아놔, 형! 잘 보러 갈 때가 아니라니까. 미치겠네~” “좀 닥쳐라. 귀 울린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최하운이 날이 선 어조로 말했고, 김도혁은 골이 잔뜩 나서 얼굴을 씰룩이다 쿵쿵 발걸음소리를 크게 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쾅- 문을 세게 닫고 방안에 쏙 들어가는 김도혁을 보다, 고개를 돌리며 한숨과 함께 최하운에게 말했다.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빨리 나와.” 그는 무뚝뚝한 음성으로 내게 내뱉고는 바로 몸을 돌려 현관으로 나갔다. 저 자식은 또 왜 저러는 거야? 김도혁의 앵앵거리는 목소리와 뭔가 마음에 안 들거나 화날 때면 보이는 녀석의 무뚝뚝한 태도에 머리가 지끈지끈 거렸다. 준비를 하고서 나오니, 하운이는 나를 보지 않은 채 지갑을 놓고 왔다고 말하며 바로 몸을 돌려 계단으로 아래층을 내려갔다. 녀석의 눈치를 살피며 계단에서 내려와 복도를 향할 때,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 하나가 하운이 집안을 서성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 둘은 걸음을 멈추고 그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하운이는 곧이어 그 여자아이를 향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누구냐?” 하운이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던 그 아이는 천천히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그 아이는 다름 아닌 부반장이었기 때문이다. 혹 우리 집을 찾아오려다 층수를 착각한건가. 부반장을 향해 입을 열려던 나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부반장의 시선은 내가 아닌 최하운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운이를 바라보는 부반장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곧이어 부반장의 입술이 열렸다. 그 열린 입술사이로 흠뻑 젖은 음성이 새어나왔다. “오빠……?” 오빠? 깜짝 놀라며 고개를 하운이에게로 휙 돌렸다. 녀석의 눈동자가 커져 있었다. 그런데 이내 최하운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졌다. 뭔가 심상치 않은 것임을 느끼며 녀석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옆에 서있던 나를 뒤늦게 서야 발견한 부반장이 놀란 얼굴로 나를 불렀다. “꼬선생님?” 부반장의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하운이에게서 시선을 떼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부반장에게 물었다. “부반장 너 여기 어쩐……” 그 때 최하운이 나의 말을 가로 막으며 내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렇게 나를 바라보지 않고서, 나를 밀어낸다. “장은 나중에 보러가자.” “…….” “가봐라.” 그 순간 또 녀석은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진다. 지금까지 우리 사이의 거리가 원래 이러했다는 듯 너무나 당연하게도. 항상 그랬다. 제일 친한 친구라고,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녀석은 정작 내게 마음을 준 적이 없었다. 선. 항상 우리의 사이엔 선이 있었고, 그 선을 밟으려 할때면 녀석은 가차 없이 나를 밀어냈다. 그리고 진짜 자신을 감추었다. 물러서지 않으면 그가 사라질 것 같아서 줄곧 적당한 선을 유지하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지만,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욕심이 났다. 진짜 최하운을 알고 싶었다. 나는 이제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그 선을 힘주어 꽉 밟으며 말했다. “싫어.” chapter. 23 선물 “싫어.” 단호히 내뱉는 나의 말에 그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순간이 몹시 길게 느껴졌다. 마치 시간이 느려지고, 공기의 흐름이 더뎌지는 것 같았다. 주먹을 꽉 쥐고서 내가 볼 수 없는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보고 있는 것. 그 것은 무엇일까? 같은 곳을 바라보고 싶다. 지독한 슬픔도, 시린 외로움도 함께하고 싶다. 그 곳이 설령 눈물로 만들어진 공간이라 해도. 잠시 후, 최하운은 작은 한 숨과 함께 시선을 내리깔고서 건조한 음성으로 답했다.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상관있어. 너니까 상관있어.” 나의 말에 줄곧 다른 곳을 향해있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이내 그의 어둠처럼 까만 눈동자가 나에게 멈추었고, 그 눈을 깊이 들여다보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쿵- 크게 울렸다. 그리고 나의 시야위로 또 다른 눈이 덮쳐온다. 그 날의 그 눈이었다. 가슴이 턱 막히도록 슬펐던 그 눈. 너무나 공허해서 숨을 쉴 수가 없고, 너무나 시려서 온 몸이 움직일 수 없었던 그 눈. 그 슬픈 눈. 심장의 속도가 빨라지며 가슴에 소용돌이가 친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호흡이 가빠왔다. 나는 겁을 잔뜩 먹은 채 뒷걸음치며 그에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 미안해.” 그리고 나는 바로 뒤돌아섰다. 그 때 녀석이 곧장 나를 불러 세웠다. “서.” 그가 부르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너무나 두려워서 뒤돌아 볼 수 없었다. 그 두려움에 나의 존재가 투명해지는 것만 같았다. “서라고.” 덥석- 나의 손목을 잡았다. 빠르게 옮기던 발걸음은 그의 힘에 제압돼 멈춰졌다. 온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온다. 바싹 마른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그가 손을 뻗어 나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어느새 나의 눈에 눈물이 툭툭 쏟아지고 있었다. 굳어있던 최하운의 얼굴이 나의 눈물에 일순간 흔들린다. “미안해.” “…….” “잘 못 했어. 앞으로 안 그럴게. 다신 정말 안 그럴게.” “…….” “김순이.” 그가 힘주어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진정하라는 듯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허나 눈물은 눈물샘이 고장 나기라도 한 것처럼 뜻대로 멈추질 않았다. 그 때 뒤편에 서 나를 놀란 눈으로 보고 있던 부반장이 나지막이 최하운에게 말했다. “오빠, 나중에 다시 올게.” “알았어.” 그는 부반장을 보지 않은 채 대답했고, 부반장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선 스쳐지나갔다. 부반장이 사라지자 나는 그의 옷깃을 꼭 붙들고 눈물 먹은 음성으로 계속해서 연이어 말했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가시 같은 후회를 가득 안고서. “미안해.” “…….” “그러니까 가지마. 가면 안 돼.” “…….” “그렇게… 가면 안 돼. 그렇게 날 떠나면 안 돼. 내가 잘 못 했으니까… 잘 못……”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로 펑펑 쏟아져 나왔다. 가슴 한 구석에 늘 품고 있던 그 날의 기억이 부풀어 올라 감당할 수 없었다. 몸이 휘청거린다. 그 때 최하운이 나를 번쩍 들어 안아 올렸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나의 등을 가볍게 토닥토닥 두드렸다. 울음이 터진 갓난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일정하게 두드리는 그의 안정된 손길에 점차 거칠게 휘몰아치던 가슴 속이 잔잔해져 가기 시작했다.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새근새근 숨을 내쉬고 있을 때, 걸음을 옮겨 계단을 오르며 하운이가 내게 말했다. “안 가.” “…….” “절대 안 갈 테니까. 뚝 해.” “진짜?” “응.” 그의 흔들림 없는 마지막 대답에 안심이 들며,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하운이의 목에 팔을 두르고서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넓은 어깨에 깊이 묻었다.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김도혁이 하운이의 품에 안긴 채 들어오는 나를 보고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걱정과 불안이 함께 혼동되는 얼굴로 최하운을 향해 물었다. “누나 또 왜 그래?” 하운이는 도혁이의 물음을 피하며 내 방문 앞으로 갔다. 김도혁은 안절부절 못하며 재빨리 우리 뒤를 쫓아왔다. “문 열어.” 낮은 목소리로 최하운이 도혁이에게 말했고, 도혁이는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보다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문이 활짝 열리자마자 곧바로 최하운은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겨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 위에 조심스레 나를 눕혀주었다. 그가 나를 눕혀주고서 일어서려 하자 나는 재빨리 작은 손으로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자신의 옷깃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떼어놓았다. 그리고 책상 앞에 놓여 진 의자를 잡아다가 내 앞에 앉았다. “나…….” “…….” “알았으니까 눈 감아. 자는 거 보고 갈 거니까.” 선뜩 감지 못하고 불안한 눈으로 그를 보자, 녀석은 작게 웃음 지으며 자신의 큰 손으로 내 눈을 덮어주었다. “감아.” 언제 건 마주하기 두려운 그 날의 기억이 그의 손에 가리어진다. 그리고 눈물에 시리던 눈이 그의 온기에 따뜻해진다. 그 온기 사이로 하운이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아까 그 앤……” “…….” “동생이야.” “…….” “그 아이를 몇 년 만에 보는 건데. 내가 열두 살 때 어떠한 이유로 엄마랑 아빠가 이혼을 하게 됐어. 이혼 하면서 나는 엄마 쪽에 남게 되고, 서린이는 아빠 쪽에 갔어. 열다섯 살 때인가 그 때 멀리서 한 번 보고, 아주 오랜만에 보는 거야.” 그리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하운이의 시선이 가리어진 손 뒤로 느껴진다. 그는 깊은 한 숨과 함께 다시 말을 토했다. “딱히 숨기려고 하는 건 아닌데, 겁이 났어. 내가 겁이 났어.” 그의 음성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역시 아직은 두렵고 힘든가 보다. 나는 지금껏 계속 오만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구원해준 것처럼 나 역시 그를 구원해줄 수 있으리라고. 그래서 참지 못하고 순간 욕심을 부렸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누군가의 손에 닫혀서 열리지 않은 문을 억지로 열다가는 부서져버린다, 사람의 마음의 문도 그러한 것이다. 그 사람은 아직 열 준비도 안 되었는데, 자기의 욕심에 억지로 열다가는 더욱 손상시킬 뿐이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손 위에 올렸다. “미안.” “…….” “……무리 안 해도 돼.” 나의 손 위에 하운이의 다른 한 쪽 손이 또 올려 진다. 그러자 눈에 더욱 무게가 실리며 어두워졌다. “차근차근 알려줄게. 조금씩 나를 알려줄게.” “…….” “이젠 피하지 않을게.” 따뜻한 음성이다. 자장가처럼 부드럽고 잔잔하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그 순간 올리었던 한 손이 치워진다. 무게가 가벼워진다. 나도 천천히 그의 손 위에 올리었던 손을 치웠다. 그리고 최하운은 내 눈을 가리고 있던 마지막 한 손을 치웠다. 그러자 눈물이 머금고 있던 눈에 빛이 스며들며, 옅게 웃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보인다. 눈을 뜨고서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말라붙는 눈물을 손으로 쓱쓱 닦아주며 내게 말했다. “그만 자.” 그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이내 피로가 몰려오며 나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물고기가 수면(水面) 위로 고개를 들어 올리듯, 의식이 수면(睡眠)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느껴져 오는 여러 가지 감각이 흐릿한 머릿속을 툭툭 두드린다. 아직 방안은 불이 켜져 있었고, 나의 옆에 누군가 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이어 귀가 트면서 그들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또 떠올린 거야? 한 동안 괜찮다가 또 왜?” 도혁이의 음성은 평소보다 더욱 높아졌고, 최하운의 음성은 평소보다 더욱 낮아져 있었다. “김순이. 아직까지 그 때의 기억 속에서 자라지 않았어.” “…….” “죽은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 없는 이상, 아마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씩 저럴지 몰라. 주변에서 아무리 네 책임이 아니다, 괜찮다 해도 당사자에게 직접 듣지 않으면 응어리는 계속 남아있는 법이니까.” “…….” “죽은 너희 아빠를 만나게 할 수 있는 건 아마 신의 영역이겠지.” 씁쓸함이 묻은 하운이의 목소리. 아빠의 이야기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뒤척이는 척 하며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뚝뚝 눈물줄기가 슬픈 선을 그으며 떨어진다. 철없고 어렸던 그 시절. 돌이킬 수 없는 후회. 항상 계속 나를 따라다니는 통곡의 느낌표. 그 모든 것이 아련하게 가슴을 쑤셔온다. 나는 가슴으로 서럽게 그리운 그 사람을 불렀다. ‘아빠…….’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깊은 잠 속에서 깨어나고 느리게 감긴 눈을 떴다. 투명한 창으로 밝은 아침 햇살이 가득 비춰오고 있었다.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햇살을 잔뜩 가슴에 품으며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잠시 동안 눈을 여러 차례 크게 깜박이고서, 조심스레 발을 바닥에 내딛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두 팔을 천장 위로 쭉 뻗어 올리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거울 속에 비치는 내가 보였다. 부은 눈을 쓱쓱 문지르고서 활짝 웃으며 나는 내게 말했다. “오늘도 마지막 같이……” 후회되지 않게 열심히 살자. 항상 우리는 죽음과 공존하면서 살아간다. 어느 날 언제 어디서 꺼질지 모르는 생명이란 것을 우리는 안고 있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내일이 마지막 일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존재 앞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하여 나는 언제 어디서든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마지막 같이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다. 주저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김순이 오늘도 힘차게 달리자! 그렇게 마음을 굳게 먹고 밥을 하기 위해 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나오니 부엌에서 구수한 냄새와 함께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호기심에 살금살금 고양이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내밀어 부엌 안을 엿보았다. 그런데 부엌 안에는 결코 볼 수 없는 광경이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최하운과 김도혁이 앞치마를 매고서 열심히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난 멍한 얼굴로 국을 보고, 수저와 젓가락을 놓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잠 많은 최하운이 이리 일찍 일어나 우리 집에서 밥을 하는 것에 한 번 놀라고, 이른 아침 굶으면 굶었지 밥을 하기 위해 부엌에 발 들여 놓은 적 없는 김도혁이 두 번 놀라게 했다. 나는 조심스레 부엌 안으로 들어가며 그들에 불쑥 물었다. “너희들 뭐냐?” 갑작스런 나의 목소리에 그들은 흠칫 놀라며 나를 보았다. 혹 나에게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나? 아니면 무슨 부탁할 것이 있나?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며 나는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들을 보았다. 그런 나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최하운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밥 하는 거 처음 보냐?” “흐음.” “잡생각 하지 말고 일로 와봐.” 간을 보라는 듯 국자로 국을 떠올리며 녀석이 나를 불렀다. 나는 곧바로 의심 따윈 휙 버리고 냉큼 그의 옆에 갔다. 오늘의 메뉴는 된장찌개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된장찌개. 특히 난 어렸을 적 아빠가 만들어주신 된장찌개를 결코 잊지 못한다. 호호- 뜨거운 국을 식혀 조심스레 내 입가에 가져다 댔다. 나는 방긋 웃으며 후루룩 마셨다. 입안에 구수함과 얼큼함이 시원스럽게 퍼져나갔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하운이를 향해 주먹을 들어 올리고선 엄지손가락을 힘껏 치켜세웠다. 그러자 녀석은 피식 웃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하운이의 된장찌개에선 아빠 맛이 난다. 내가 아무리 똑같이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항상 실패였다. 엄마까지도 말이다. 그런데 최하운의 된장찌개는 어렸을 적 먹었던 아빠의 된장찌개 맛과 아주 유사했다. 그래서 나는 이 이유를 포함한 다른 여러 가지 이유를 종합하여 한 결론을 내렸었다. 바로. 최하운은 아빠가 하늘에서 내려주신 선물일지도 모른다고. 그 덕분에 항상 울었던 울보 김순이는 울음을 멈출 수 있게 되었다. 울지 말라고, 아프지 말라고, 더는 힘겨워 하지 말라고. 그가 내게 해준 목소리는 아빠의 목소리라 나는 믿고 있다. 물론 가슴 한 구석에는 지워지지 않을 후회에 대한 죄가 변함 없이 새겨져 있지만 말이다. “누나, 밥은 내가 했다.” 김도혁이 입가에 밥풀 하나를 붙인 채, 밥을 한 숟가락 가득 퍼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가 내민 새하얀 쌀밥을 입안에 가득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긴장된 얼굴로 도혁이가 나를 보았고, 나는 얼굴을 찡그리는 척 하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꼬들꼬들 맛나다.” 또 슬픔에 못 이겨 울어버리고 말았지만 난 행복하다. 정말로 소중한 사람들이 있어 나 순이는 행복하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너희들 우리 태일이 보고 넘보지 마라.” “참내. 알겠어, 알겠다고! 맹세라도 하리?” 기대에 찬 눈으로 내 뒤를 쫓아오는 대학친구들에게 나는 미리 단단히 경고해두었고, 친구들은 그런 나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바라보았다. 물론 친구들이 그러 할리는 없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가정 아래 예방을 해두는 것이다. 오늘은 3일 만에 강태일을 보는 날이다. 학교 개교기념일이라 쉰다하여 친구들에게 자랑도 할 겸 내가 다니는 학교로 불렀다. 3일 동안 뒹굴 거리다 새삼 원거리 연애를 하는 친구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계속 생각나서 미칠 것 같고,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그리고 성격 상 전화 통화나 문자 질을 좋아하지 않은 강태일이었으니 말이다. 한 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더욱 속력을 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강태일이 있다는 곳에 다다르니 저편에서 내 눈을 확 사로잡는 이가 한 명 있다. 그는 바로 나의 남자 강태일. 평소 편안한 캐주얼 옷차림을 입는 그가 오늘은 말끔한 슈트에 뿔테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평소보다 더욱 어른스러워 보였고 지적이게 보였다. 모든 옷을 다 멋지게 소화해내는 이 남자는 바로 내 남자! 나도 모르게 홍가서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을 때, 친구들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도대체 누구야?” 그녀들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손가락으로 강태일을 가리켰다. 그런데 이내 들려오는 그녀들의 평가는 나의 미간을 주름잡게 했다. “뭐야, 먹기 대회에서라도 만났냐.” “뭐, 먹는 거 좋아하는 애가 먹는 거 좋아하는 남자한테 안 반하란 법은 없지만.” 심통치 않은 대답에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녀들의 시선은 강태일에게서 비켜나가 있었다. 그의 옆에 햄버거를 우걱우걱 씹고 있는 한 뚱뚱한 사내에게 향해 있던 것. “아따. 거기 말고, 여기!” 나는 다시 한 번 제대로 강태일을 가리켰다. 뚱뚱한 사내에게서 옆으로 살짝 시선을 비켜 강태일을 바라본 아이들은 순간 모두 말문을 잃었다. 나는 어깨를 쫙 피며 흐뭇한 시선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강태일을 바라보았다. “A급인데.” 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눈을 갖고 있는 유미가 감탄하며 말했다. 다른 아이들 모두 시샘하며 강태일을 흑심이 가득한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안되겠다 싶은 나는 재빨리 친구들의 팔을 양쪽으로 뻗으며 그녀들의 시야를 가렸다. “아, 뭐야.” “그만 봐. 내꺼야.” 나의 말에 그녀들은 아유를 보냈다. 그리고 이내 피식 웃으며 내게 어서 가보라고 손짓했다. 나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그리고 뒤돌아 강태일에게 달려갔다. 핸드폰을 닫으며 고개를 들어 올리던 그는 멧돼지처럼 무섭게 달려오는 나를 보곤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의 품에 풍덩 하려는 나를 녀석은 손을 뻗어 머리를 잡아 막았다. 나는 아등바등하며 그의 품에 안기기 위해 노력했지만, 고귀하신 강태일은 쉬이 허락치 않았다. “그렇게 무섭게 달려올 필요 있습니까.” “무지무지 보고 싶었으니까!”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가만히 있어요.” 그가 내게서 손을 떼자마자 나는 참지못하고 와락- 그에게 안겼다. 순간 움찔하던 그는 내 머리를 살짝 콩 쥐어 받으며 말했다. “아무튼 말도 더럽게 안 들어.” “그래도 사랑스럽지?” “사랑스럽긴 개뿔.” 휙 나를 떼어놓으며 강태일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부끄러워서 저런다는 게 이젠 다 보인다.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뒤를 졸래졸래 쫓았다. 처음에 본래의 속도로 걸어가던 그는 내가 힘들게 그의 속도를 맞추는 모습을 보고 자연스레 걸음을 느리게 했다. 그리하여 나란히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두 손을 등 뒤로 잡으며 깡충깡충 뛰 듯 걸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하늘은 옥구슬처럼 맑았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을 따뜻하고, 바람은 부드럽다. 아주 화창한 날씨였다. 온기를 품은 따뜻한 바람에 머리칼이 스치는 느낌은 기분이 참 좋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그는 골똘히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하여 정신을 놓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또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어라? 분주히 또 발을 움직였다. 열심히 발을 놀려 쫓아가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한 커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손을 잡으며 절로 발걸음이 맞춰질지도 모르겠다. 그 생각을 끝마친 나는 그에게 소리 높여 말했다. “손잡아도 돼?” 그 말에 녀석은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보았고, 녀석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녀석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강태일은 다소 거칠게 덥석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휙 돌리며 내게 말했다. “잡으려던 참이었어요.” “어? 그럼 너 혹시 방금 잡을까, 말까 고민했었던 거야?” “아, 아니거든요.” 말과는 다르게 몸이 흠칫하는 걸 나는 포착했다. 맞나 보다. 녀석은 정말 거짓말을 잘 못 했다. 신이 난 나는 잡은 두 손을 크게 흔들며 통통 뛰었다. 캠퍼스 안을 이렇게 손잡고 걸으니 기분이 묘했다. “우리 이러니까 막 캠퍼스 커플 같다, 그치?” “뭐…….”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마땅히 받아쳐줄 말을 찾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서툰 모습이 더욱 귀엽게 느껴졌다. 나는 다른 한 손을 들어 녀석의 볼을 꼬집었다. 그러자 녀석은 얼굴을 확 구기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내가 4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같이 이렇게 학교 다닐 수 있었겠지?” 나의 말에 그는 구겨있던 얼굴을 천천히 피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런 그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갈 때,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리고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아니죠.” “…….” “그렇다면 모든 게 뒤바뀌어버렸을지도.” “응, 그렇다! 그렇구나! 그래, 지금이 좋다!” 내가 크게 소리치며 말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힐끗 보았다. 그는 당황하며 재빨리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그러다 내 큰 눈이 반달로 휘어지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손을 흔들고서 싱그러운 나무들이 즐비한 길을 함께 걸었다. Chapter. 24 로맨틱 키스 “자장면 나왔습니다!” 종업원은 내가 시킨 자장면 곱빼기를 강태일 앞에, 강태일이 시킨 일반 자장면을 내 앞에 놓고서 곧바로 사라졌다. 나는 궁시렁거리며 냉큼 자장면의 위치를 바꿨다. 남자가 여자보다 더 많이 먹을 거라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 어쨌든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자장면을 보니 입안에 군침이 가득 돌았다. 나는 재빨리 젓가락을 들어 신나게 자장면을 비볐다. 골고루 면발에 양념이 잘 배도록 비빈 후, 한 젓가락 크게 떠 입안에 넣으려하던 찰 나. 따끔한 시선에 입을 아- 벌린 채 고개를 들었다. 강태일이 턱을 괴고서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분위기 좋은 곳에 가고 싶었는데, 이런 곳으로 끌고 온 탓 때문인 것 같았다. 더군다나 오늘 신경 써서 차려입은 녀석의 옷차림과 이곳은 다소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난 어제부터 자장면이 몹시 먹고 싶었다.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던 나는 자장면 면발을 다시 한 번 젓가락을 가득 들어 올리며 강태일의 입 앞에 갔다댔다. “아!” “됐어요.” “아~아!” “됐다니까요. 나중에 제 꺼 뺏어먹지 말고 선생님 거나 많이 드세요.” 그러면서 강태일은 한 숨과 함께 젓가락을 들어 자장면을 비볐다. 난 부루퉁한 얼굴로 녀석을 노려보다, 자장면이 불기 전에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후루룩 자장면 면발을 입안으로 끌어올렸다. 우적우적. 면발이 가늘게 부서지며 황홀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식신 시동이 걸린 나는 청소기처럼 흡수하듯 쭉쭉- 면발을 들이켰다. 후루룩. 후루룩. 한 5분간은 다른 말없이 이 소리만 냈다. 어렸을 때부터 밥 먹을 때는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엄마의 가르침아래 몸에 밴 행동이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자장면을 다 비워가고 있을 때. “풋.” 갑자기 참지 못하고 터트리는 웃음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라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보니 강태일이 고개를 돌린 채 웃고 있었다. 그의 웃음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그래?” 그 때 그의 뒤편에 있던 거울 속의 내가 눈에 보였다. 보는 순간 할 말이 없었다. 입 주둥이를 자장면 그릇에 박기라도 한 듯 입가에 잔뜩 자장면 양념이 묻어있었기 때문이다. 강태일한테 예쁘게 보여도 모자를 판에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이다니.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우울한 낯빛을 띄며 단무지를 아그작 아그작 씹었다.(어떤 상황이든 먹을 건 먹는 순이었다.) 그때 강태일이 장난기 어린 천진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순이, 몇 살?” 열 손가락으로 스물둘을 가리키기에는 손가락이 모자라, 양손을 V모양으로 두 손가락씩 올렸다. 22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허나 내 의도한 바와 다르게 해석한 강태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아, 네 살이구나.” 녀석이 놀리듯 말했고, 나는 볼에 바람을 가득 실어 부풀렸다. 강태일은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며 휴지를 뽑아 다소 거칠게 내 입술 주위를 벅벅 닦아주었다. 나는 어린 아이처럼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그 때 녀석이 큰 손으로 내 머리를 마구 흩트렸다. 그리고는 손으로 턱을 괴더니 얼굴을 살짝 기울이며 내게 물었다. “이제 더 이상 안 자라죠?” “너 나 우롱하는 거냐. 성장이 멈춘 지가 언젠데.” “그래요? 다행이다.” 녀석의 분홍빛 가는 입술에 곡선이 그려졌다. 갑자기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살짝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번쩍하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있냐. 이제 말 놓지 그래?” “처음에 존댓말 하기 힘들었는데, 또 다시 반말하려니 힘드네요. 천천히 할게요.” “그래? 그럼 우리 애칭이라도 짓자. 이제 교생 끝났는데 언제까지 선생님이라고 할 거야? 응?” 두 손을 모으고서 눈을 반짝거리며 그를 보았다. 그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주변에서 많이 듣던 숱한 애칭들을 떠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자기?” “싫어요.” “여보?” “싫어요.” “달링?” “싫어요.” “애기?” “싫.어.요.” 모 드라마에 나와 화제가 되었던 마지막 애칭에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정말 싫은 듯 금방 구역질이라도 할 것처럼 녀석의 안색이 안 좋아져 있었다. 앞으로 녀석에게서 달콤한 애정행각을 바래선 안 되겠다. 허튼 꿈이다. 아쉬운 마음에 입을 쩝쩝거리고 있을 때, 그가 웃음을 띠며 말했다. “돼지. 꼬마돼지.” 그 말에 나는 휙 강태일을 째려보았다. 그는 개의치 않고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돼지야, 꼬마돼지야, 꼬마야, 꼬야. 꼬? 음, 그냥 간단하게 꼬라고 부르죠. 학교에서 꼬선생이라 불렸으니.” “그럼 난 까칠이라고 부른다.” “맘대로. 다 먹었으면 이만 일어나죠.” 먼저 그가 자리에 일어서며 계산대로 향했고, 나는 뒤늦게 의자에 붙이고 있던 엉덩이를 뗐다. 꼬마돼지의 줄임말이라는 꼬와 까칠이 이게 무슨 애칭인가. 난 투덜거리며 녀석을 뒤따랐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다음으로 우리는 모 아이스크림 가게에 왔다. 물론 내가 이끌고 온 것이지만 말이다. 식사 후, 먹는 아이스크림은 최고이다. 배부르지만 서도 아이스크림은 쑥쑥 잘 들어간다. 이렇게 아이스크림까지 딱 먹고 나면 정말 먹었다는 포만감이 가득 들었다. 내 배는 밥 배와 간식 배 그리고 술 배가 따로 있다. 훗. 열심히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퍼서 먹고 있을 때 강태일이 나를 불렀다. “저기.” “응?” “어째 우리가 항상 만날 때 오는 곳이 다 먹을 곳이네요?” 그 말에 나는 뜨끔했다. 그리고 슬쩍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는 테이블에 엎드린 채 뚱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꼬 위는 아무래도 비정상적 인가 봐요.” “뭐?” “다른 사람에 비해 엄청나게 크나?” 그가 놀리자, 나는 들고 있던 스푼을 스르르 내려놓았다. 그리고 팔짱을 끼며 입맛을 다셨다. 그런 나의 모습에 강태일은 픽 웃었다. 그의 웃음에 나는 고개를 휙 돌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가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아이스크림을 자신의 앞에 가져갔다. 그리고는 스푼으로 한 가득 푸더니 내 앞에 내밀었다. “아.” “싫어. 안 먹어.” “내가 주는 건데 안 먹을 거예요?” “됐어. 배불러.” “꼬, 그러면 나 상처 받는데.” 그 말에 나는 슬쩍 그가 내민 아이스크림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못해 받아먹는 척 했다. 휴지를 들어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한 번 닦아주고서, 강태일은 또 한가득 퍼 내 입안에 넣어주었다. “우리 꼬 참 잘 먹네.” 장난스런 말에 그를 흘겨보았다. 이 자식이 아까부터 자꾸 어린아이 취급을 한다. 그래도 맛있으니 좋았다. 그가 먹여주는 아이스크림을 날름날름 받아먹고 있을 때, “어? 안녕하세요~” 갑자기 누군가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리니 낯설면서도 낯익은 두 여자아이가 웃으며 우리를 보고 있었다. 아, 생각났다. 그 때 놀이공원에서 보았던 무리 중 두 명의 아이였다. 한 명은 BK기획사 실장의 조카라고 했던가? “아, 동생 분이랑 아이스크림 드시러 오셨나 봐요.” 꺼림칙한 웃음을 지으며 실장 조카가가 우리에게 말했다. 그 여자애의 말에 강태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짝 시선을 내리 깐 채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뒤섞는 강태일을 묘한 얼굴로 보던 실장 조카는 갑자기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몇 살이야? 눈이 진짜 크다. 동글동글해.” “아, 귀여워. 내 동생 삼고 싶다.” 나보다 어린 것들에게 이런 소리 들으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곧이어 그 아이들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내 볼을 꼬집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강태일의 일과 관련된 아이들이기에 나는 꾹 참았다. 언짢은 얼굴로 여자애들의 손길을 꿋꿋이 받아내고 있을 때, 강태일이 그녀들의 손을 툭 쳐냈다. “손 대지마.” 그리고는 일어서 내게 와 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 갑작스런 행동에 나는 놀란 얼굴로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강태일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여자애들을 노려보고선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때 뒤에서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실장 조카라는 아이가 말했다. “참 동생을 애지중지하게 생각하네요.” 문을 열려던 강태일의 손길이 멈췄다. 살짝 녀석의 눈썹이 꿈틀거리나 싶더니, 그는 한 손으로 문을 열며 그 아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싱긋 웃어 보이며 여자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내 여자니까 그런다.” 그 말에 여자아이들은 거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멍해졌다. 그런 아이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나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살피다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까칠아.” “왜요.” “너 지금 닭살 돋았다.” 나의 말에 줄곧 굳어있던 그의 표정이 풀리며 찡그려졌다. 그리고 체온이 올라가기라도 한 듯 그의 몸이 뜨끈해졌다. “아씨. 다신 이딴 말 하나봐.” 그가 창피해 하는 모습에 나는 까르륵 웃었다. 나의 웃음에 그의 얼굴이 샐쭉해졌다. “내가 잠깐 빡 돌아서 정신 나갔던 거였어요. 미친 거야, 그런 게 분명해. 그러니까 잊어요.” 횡설수설 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왜 난 좋은데. 다시 한 번 여기 주위사람한테 내 여자라고 소리쳐봐.” “미쳤어요? 싫어요. 안 해요. 안 해. 못 해.” “왜에~ 한 번만 다시 말해봐. 왜 자신 있게 내 여자라 말을 못해~” “무거우니까 몸 흔들지 마요. 안 그러면 던져버릴 거니까.” 그 말에 나는 어디 던져 보라는 듯 녀석의 목에 팔을 꽉 두르며 안겼다. 나의 행동에 강태일은 피식 웃었다. 강태일과 나의 사이에 있던 벽이 어느새 허물어져 버린 듯싶다. 경계어린 눈으로 나를 보던 그가 이젠 자연스레 장난도 치고 예쁘게 웃어준다. 그렇게 남들 시선도 아랑 곳 하지 않고 많은 생각을 하며 안겨 가고 있을 때 나는 가만히 그를 불렀다. “까칠아.” “또 왜요.” “좋다. 네가 좋다.” 설레고 가슴 뛰는 사랑.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처럼 로맨틱하고 운명적인 사랑. 그런 특별한 사랑. 내가 줄곧 꿈꿔 왔던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알게 해 준 아이는 살짝 볼을 붉히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말 안 해도 알아요.”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근처의 한 공원에 왔다. (다음부턴 미리 계획을 하고 만나야겠다고 다짐한 꼬와 까칠이였다.) 어느새 해질 무렵이었다. 푸르렀던 하늘엔 따뜻한 느낌의 오렌지 빛 노을이 가득 메워져 있었다. 곧 있으면 하늘엔 어둠이 잠식하고 내내 감추어져 있던 별들이 하나 둘 뜨기 시작할 것이다. 목이 말랐던 나는 또 먹냐는 그의 구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음료수를 사러 갔다. 시원한 캔 커피 두 개를 양 손에 쥐고서 한 벤치에 앉아있는 강태일에게로 통통 뛰어갔다. 그런데 그는 종이 한 장을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외우고 있었다. 몰두해서 그런지 그는 내가 가까이 다가와도 몰랐다. 나는 슬그머니 그의 앞에서며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그 것은 한 팝송 가사였다. “뭐해?” 갑작스런 나의 목소리에 그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아, 테스트 때 부를 노래요.” “테스트?” “네. 일주일마다 노래랑 춤 선택해서 테스트 보거든요.” “아아, 그렇구나. Clay Aiken 노래네. 나도 이 노래 되게 좋아하는데.” 그가 종이를 접고서 가방에 집어넣으려 하자 나는 재빨리 막았다. 그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엄연히 예비가수인데 지금껏 단 한 번도 그의 노래를 듣지 못했다. 명색이 여자 친구인데 노래 들려달라고 조를 수 있지 않나? 듣고 싶다는 갈망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나는 마침표를 찍고서 호소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불러줘.” “예?” “노래. 한 번만. 딱 한 번만. 응? 내가 어떠한지 봐줄게!” 갑작스런 나의 제안에 그는 당황했다. 쉽사리 응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나는 눈을 감았다. “쑥스러운 거면 내가 눈감고 있을게. 됐지? 2절까지 전부 불러줘야 한다!” 눈을 감으니 청각이 더욱 밝게 열렸다. 쉽게 놓칠 수 있는 작은 소리 하나하나가 귀의 감각을 두드렸다. 잔잔한 바람소리 사이로 잠시 후 그의 노래가 들려왔다. 겨울 날 먹는 따뜻한 코코아처럼 무척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온 몸에 전율이 돋을 정도로 멋진 목소리이다. 가수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의 노래였다. “Through my eyes……” (나의 눈에) I've seen the world start spinning like a ball (세상이 공처럼 회전하기 시작하는 게 보였어요.) Stars light up and then fall for you. (별들은 빛나다가 당신을 위해 떨어지죠.) So then what's a man like me supposed to do? (그럼 저와 같은 남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If I gave you the moon would you notice (달을 따다가 당신에게 드리면) That I'm right beside you? (제가 당신 바로 옆에 있다는 걸 알게 될까요?) *Well now thousand days and thousand nights are not enough (이젠 천 번의 낮과 천 번의 밤도 충분하지 않아요.) Cause I can't hold back the way I feel about my love (더 이상 당신에게 느끼는 감정을 되돌릴 수 없거든요.) Won't let it go. (보내지 않을 거예요.) won't let it go (보내지 않을 거예요.) And if the angels came, I'd fight them back to win your soul (만일 천사들이 온다면 당신의 영혼을 얻기 위해서 그들과 싸울 거예요.) And when everything was set and done, they'd go back home (모든 것이 끝나면 그들은 돌아가겠죠.) They oughta know (그들은 알아야 해요.) they oughta know (알아야만 해요.) That you're mine all mine (당신은 내 것이라는 것을.)* In my world (나의 세상에서) You're the sun that shines and lights the evening skies (당신은 저녁 하늘을 밝혀주는 태양이에요.) Clearing up the horizon (지평선을 맑게 해주고.) Hold on (기다려요.) Come with me tonight I will never let you down, ooh (나와 함께한다면 당신을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게요.) And in this love we'll drown (우리는 이 사랑에 빠져들 거예요.) This I promise you (이것만은 약속 할게요) Cause they can't hold us down (그들은 우리를 막을 수 없을 테니까요) *Repeat I would do anything, just believe it (뭐든지 하겠어요. 그냥 믿어주기만 해요.) Your love means everything, and I need it (당신의 사랑이 내겐 전부에요, 난 그것이 필요해요.) Your heart won't lie (당신의 마음은 거짓을 말하지 않아요.) Reach out for me (나에게 와요.) * Repeat # Clay Aiken - A Thousand Days 그의 노래에 흠뻑 취해 있을 때에 그의 노래가 갑자기 뚝 끊겼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그에게 물었다. “끝났어?”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떴다. 그 순간 나의 목이 당겨지며 촉촉한 입술이 나의 입술 위로 닿았다 떨어졌다. 순간 놀라 눈이 커다래졌다. 바로 코끝이 닿는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때 아직 끝나지 않은 마지막 구절의 노래가 너무나도 달콤하게 들려왔다. “That you're mine all mine.” 심장이 쿵쿵쿵 뛴다. 그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은 정말 예뻤다. 푸르른 산 속의 계곡물처럼 거짓 없이 맑고 투명했다. 그 예쁜 눈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그의 안경을 벗겨냈다. 그러자 갑자기 그가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에 나는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왜 웃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뜨거워진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또다시 겹쳐왔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가벼운 입맞춤이 아니었다. 더욱 깊게 그의 입술이 묻어왔고, 이내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말랑한 혀가 매끄럽게 파고들었다. 서로의 사랑은 단맛을 내며 그렇게 엉켰다. 머릿속은 새하얘지고 심장은 뜨거워졌다. 그리고 숨이 막히려 할 때쯤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리고 두 눈이 마주쳤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모르겠다. 예전 남자친구랑 키스하고 서 어떤 표정을 지었었나? 허나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붉어진 얼굴로 몸을 휙 돌리며 말했다. “이만 가자.” 휙 뒤돌아서 걸음을 떼려는 데 그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곧이어 일어서는 기척이 들렸다. 갑자기 온 몸에 힘이 들어갔다. 바짝 얼은 몸으로 서있을 때, 바로 귓가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그다지 참는 성격이 못 돼서요.” “…….” “그러니까 방심하지 마요.” 그리고서 그는 내 어깨 위에 올렸던 손을 내려놓으며 나를 스쳐갔다. 얼굴이 화끈화끈 뜨거워졌다. 이 자식이 날 보내려 작정했구나. 그의 말에 그냥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어 나는 크게 소리쳤다. “난 언제나 오픈이야 오픈! 항상 열려 있어! 언제든지 받아주지~” 나의 말에 그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그가 몸을 천천히 빙그르 돌리더니 나를 보았다. “이 여자 밝히는 거 봐.” “야, 전부다 좋으면서 내숭 떠는 거야. 좋은 게, 좋은 거지! 그게 어때서!” 샐쭉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그가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내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엇!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도 입술에 감촉이 없었다. 슬그머니 한 쪽씩 눈을 떴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바로 코앞에 있었다. 닿을 듯 말 듯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 숨조차 쉬지 못하고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눈이 반달로 휘어진다. 그리고 간지러운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애태워 드리죠.” 그렇게 짓궂게 말하고는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툭 치며 그는 몸을 돌렸다. 나는 따끔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먼저 걸음을 옮기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못 됐어!” “이제 알았어요? 저 못 된 거.”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기며 말했고, 나는 씩씩거리며 녀석을 가자미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거 안 되겠다. 이러다가 주도권을 저 녀석에게 뺏겨버리고 말겠다. 바짝 정신 차려야겠다, 김순이! 점점 멀어져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때 그가 어서 오라는 듯 손을 뒤로 내밀었다. 그 모습에 나는 픽 웃으며 달려가 강태일의 손을 꽉 잡았다. Chapter. 25 가질 수 없는 이유 오늘은 한가로운 주말이다. 딱히 약속이 없는 나는 소파에 드러누워 과자를 씹으며 드라마를 시청하는 중이다. 즐거운 주말 남자친구와 알콩달콩하게 보내야 마땅하지만, 요새 들어 부쩍 바빠진 강태일과 통 만나기 어렵다. 그래도 녀석은 내게 미안한 것인지 잘 안하는 문자도 서툴게 보내주고,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전화도 해준다. 무척 어색해 하지만 말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나를 위해 노력하는 강태일의 모습이 그저 기특하기만 하다. 아, 생각하니 또 보고 싶어 진다. 정말 많이 보고 싶긴 하지만 우리 까칠이에게 부담은 주고 싶지 않아 참고, 또 참는 나 순이. 그런 내가 대견할 따름이다. 보는 둥 마는 둥 텔레비전을 향해 무심한 시선을 내던지고 있을 때, 갑자기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정열적인 키스신이 나왔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며 흥미로운 눈길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때 그 위로 지난 번 예상치 못한 강태일과의 달콤한 키스가 두둥실 피어올랐다. 머릿 속에 떠올리니 얼굴이 화악- 붉게 달아올랐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녀석과의 갑작스런 입맞춤. 그 때의 솜사탕 같은 부드러운 감촉이 떠오르자 나는 입술을 만지며 헤벌쭉 웃었다. “정신 줄 놓았냐.” 그 달콤한 기억을 산산조각 내는 시건방진 말투의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이맛살을 깊게 찌푸리며 휙 뒤돌았다. 김도혁은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한심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이쿠, 그렇게 고팠어요? 저 딴 거 보고 좋아하게.” “무슨 소리! 나 최근에 했거든요! 그것도 찌~인 하게.” 나의 말에 주스를 들이키던 김도혁은 용이 불을 뿜듯 입 안에 있던 주스를 내뿜었다. 나는 얼굴에 튀긴 방울들을 닦아내며 얼굴을 종이 구기듯 구겼다. “아씨, 더럽게.” “서, 설마 강태일 그 놈이랑 했다는 거 아니지?” “멍청아, 그런 내가 누구랑 하겠냐.” 내 말이 끝나자마자 녀석은 컵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데굴데굴 컵이 바닥을 구르고, 잠시 동안 멍한 얼굴로 서있던 김도혁은 갑자기 머리를 감싸쥐고서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돼!” “아, 깜짝이야.” “내 이 늑대새끼를 그냥.” 김도혁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있던 전화기를 들었다. 나는 잽싸게 전화기를 도혁이의 손에서 빼앗았다. 그러자 녀석은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못마땅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난 뚱한 얼굴로 녀석의 시선을 받아치며 말했다. “웬 늑대? 당연히 사귀면 손잡고, 껴안고, 키스하고 그런 거지.” “그런 건 나중에 하는 거야. 결혼할 때쯤.” 난 그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비웃음을 입가에 지었다. “너는 소개팅한 애랑 만나자 마자 그 날 했다고 나한테 자랑하지 않았었나?” “그거는 그거고!” “웃기셔. 그럼 넌 늑대만도 못한 새끼다. 메롱~” 나는 혀를 쏘옥 내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품을 크게 했다. 광분한 소 마냥 날뛰는 녀석을 뒤로 한 채,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손가락으로 찍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할 일도 없는데 아래층의 하운이 집에 놀러나 가야겠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통통 뛰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단숨에 운이의 집 앞에 도착하였고, 나는 벌컥 문을 열어 제키며 큰 소리로 외쳤다 . “어흥!”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무언가를 끼적거리고 있던 최하운은 화들짝 놀라며 재빠르게 감췄다. 그 모습을 포착한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하운이를 바라보았고, 그는 짐짓 모른 척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방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나는 총알처럼 퓽- 날아가 녀석의 손에 있는 종이를 뺏으려 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닿지 못하게 손을 높이 천장을 향해 올렸다. 폴짝폴짝 뛰며 뺏으려 하였지만 내 작은 키로는 역부족이었다. 씩씩거리며 노려보자 최하운은 가소롭다는 듯 나를 향해 웃었다. 간지럼은 녀석이 안타기에 소용이 없고, 그렇다면……. 나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그의 골반을 향해 슬그머니 뻗었다. 그리고 녀석이 입고 있던 회색 트레이닝복 바지를 내리려 했다. 그러자 최하운은 기겁하면 바지를 잡기 위해 재빨리 손을 내렸고, 그 순간을 틈타 휙 녀석의 손에 있던 종이를 빼앗았다. 그리고 당했다는 생각에 망연자실한 녀석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종이의 정체는 오선 위에 여러 가지 음표들이 가득한 악보 같은 것이었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뭐야?” “보면 모르냐.” 그는 투덜거리며 휙 내 손에서 다시 종이를 빼앗아갔다. 나는 두 손을 등 뒤로 올리며, 종이를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 속에 넣는 최하운을 새삼 다시 봤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헬스, 격투기 이런 것만 취미인 줄 알았는데. 너도 이런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었냐.” 음악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음악을 듣고 있던 모습은 몇 번 봤긴 하였지만 녀석이 악기를 다룬다거나, 노래를 부르는 등 음악에 열정적이었던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그러한 시선이 불쾌하다는 듯 최하운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특별히 하는 것 없이 매일 먹기만 하는 너한테 그런 소리 별로 듣고 싶지 않거든?” 파직, 파직 잠시 우리 둘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그런데 녀석은 씻고서 머리를 닦은 건지 만 건지 투명한 물방울이 젖은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옛날에 키웠던 강아지 꽃돌이가 생각이 났다. 목욕하고 나서 매일 젖은 털을 손수 잘 말려 주었었는데. 그 때의 아련한 기억이 떠오르자, 나는 다시 한 번 추억에 젖고 싶은 생각에 녀석의 손을 잡아 당겨 소파에 앉게 했다. 강아지가 아니라 사람이란 사실이 다르지만 말이다. “내가 머리 말려줄게!” “필요 없어.” 그가 곧바로 일어서려 하자 나는 엄청난 힘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며 다시 앉게 했다. 녀석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고, 나는 가만히 있으라고 눈을 찡긋했다. 그러자 녀석은 피식 웃으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를 향해 씩 웃음 지으며 옆 있던 수건을 들어 탈탈 머리칼을 닦아주었다. 어느 정도 물이 떨어지지 않게 닦고서, 서랍에 있는 드라이기를 꺼내왔다. 위잉- 헤어 드라이기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나오고, 녀석의 축축한 머리칼을 흩트리며 말리기 시작했다. “너 머리 많이 자랐다.” “어. 귀찮아서 자르려고.” “아니야! 자르지 마! 짧은 머리도 남자답고 잘 어울리긴 한데, 머리 기니까 훨씬 더 인상이 온순해 보인다.” “됐거든.” “아따. 이제 우리는 곧 사회생활을 해야 하잖아. 취업할 때 면접을 보거나,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첫인상이 좋아야지 잘 되는 거야.” 그러자 녀석은 시큰둥한 얼굴을 지었다. 그런 녀석의 얼굴을 향해 나는 드라이기를 들이대며 바람 공격을 했다. “그런 표정 말고!” “야, 너 죽는다.” “자, 우린 운이 말 잘 듣지? 가만히 있어. 엄마가 잘 말려줄 게.” “지랄한다.” 어렸을 적 소꿉놀이 할 때 엄마 역할을 하며 흉내 냈던 그 말투로 말하자 하운이는 헛웃음을 지었다. 젖어있던 머리칼이 조금씩 말라가기 시작한다. 나는 구석구석 열심히 드라이 해주었다. 혹 녀석의 마음 구석에 눈물기가 남아있다면 그 마저도 마르길 바라며……. “자, 다됐다.” 뽀송뽀송 잘 말려진 머리를 흡족하게 바라보며 말하는데 녀석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몸을 숙이며 얼굴을 들여다보니 하운이는 고새 잠들어 있었다. 최하운은 머리를 만져주면 항상 졸려해 했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탱탱한 양 볼을 옆으로 쭉 잡아당겼다. 그러자 녀석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야!” 나는 재빨리 냉큼 옆으로 몸을 피했다. 녀석은 볼을 꼬집거나, 엉덩이를 두드려주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등 귀여워 해주는 애정표현들을 질색했다. 그는 나를 노려보다 소파위에 있던 쿠션을 들어 내게 힘껏 던졌다. 처음에는 자주 당했으나 이젠 그 공격에 익숙했던 나는 여유롭게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승리의 V모양으로 취하며 못마땅해 하는 최하운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네 인생도 참 재미없다. 한 창 즐겨야 할 나이에 혼자 집구석에서 보내다니.” “재미있다 생각한 적도 없지만, 재미없다 생각한 적도 없다.” “뭐, 그게 그거지. 운아, 도대체 너는 너 좋다는 여자 많은데 왜 안사귀어? 별로 관심이 없다 해도 사귀고 하는 건 다 경험이지. 경험은 좋은 거야.” 타이르는 듯 하는 어조로 녀석을 향해 말했고, 그는 마른 머리칼을 매만지며 건조한 음성으로 무심하게 말했다. “사랑 같은 거안해.” 그리고 녀석은 젖은 수건을 들고 욕실로 향하려 했다. 외로운 눈물은 마르 돼, 감정은 안 말라도 되는데. 순간 그의 모습이 내리 찌는 투명한 햇살 때문인지 빛바래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그 순간 펑하고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갑자기 겁이 든 나는 그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가 폴짝 뛰어 등에 올라탔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쿵쿵 뛰었다. “뭐냐.” “그냥. 우리 심심한데 밖에 나가자. 오늘은 이 누님이 밥도 사주고, 놀아줄게.” “누가 누님이야. 엄연히 내가 너한테 오빠 소리 들어야 하거든?” “12월과 1월이 얼마나 차이 난다고. 너 21만 늦게 태어났으면 너도 22이야.” “어찌하였든 21일 빨리 태어났으니 23이다, 멍청아.” “아이고, 지도 남자라고. 너 오빠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냐. 뭐, 그게 소원이라면 내가 깜찍하게 불러주지.” “됐어. 입 다물어. 하면 뒈진다.” 퉁명스레 내뱉는 그 말에 나는 입을 삐죽 내밀며, 꼼짝 못하게 다리로 녀석의 복부 부위를 꽉 감쌌다. 그리고 조르기를 하였다. “아무튼 놀라 가자!”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내내 혼자 광분하다 지쳐있던 김도혁은 외출하려는 우리를 보고는 갑자기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것은 야생마 같은 최하운을 더욱 멋지게 꾸며주고 싶은 욕구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트레이닝 복을 입고 가려는 것을 보고 김도혁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최하운의 앞을 가로 막았다. 처음에 귀찮다고 내내 거부하던 최하운은 우리의 성화에 지쳐 마음대로 하라는 듯 심드렁한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하여 패선의 선두주자 김도혁의 손에서 최하운은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이 더욱 멋스럽게 탈바꿈되었다. 최하운을 잔뜩 꾸며주고 난 김도혁은 너무나 완벽하다며 감동의 눈물까지 흘렸다. 안 그래도 죽지 않은 녀석의 인물이 더욱 살아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존재는 무심한 얼굴로 길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쯤 붙잡게 했다. 하운이는 그러한 시선들을 모르는 건지, 신경 쓰지 않은 건지 무시하고 있지만 말이다. 솔직히 나도 보자마자 순간 넋을 놓아버렸다. 그만큼 끝내주게 멋있었기 때문이다. 누구 친구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자랑스럽다, 자랑스러워. 하지만 같이 걸으니 왠지 내가 딸리는 것만 같아 나란히 걷기가 다소 부담스러웠다. “야, 너 왜 피해.” 슬금슬금 멀어지는 나를 보고 그의 반듯한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빨리 안 와. 셋 셀 때 까지 안 오면 죽어. 하나, 둘……” 나는 녀석이 카운터만 세기 시작하면 몸이 절로 움직인다. 꼭 잘 길들여진 강아지처럼 말이다. 자동적으로 녀석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고, 그는 그런 나를 한 번 흘겨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사람들이 너 보면 다 이 생각 할 거야. 신은 불공평 하다고. 머리 좋지, 잘 생겼지, 키도 크지, 뭐 성격이 좀 거시기 하지만 좋아하는 여자들도 많으니.” 힐끔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얼굴에 우쭐거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항상 그는 이런 칭찬을 해줘도 심드렁했다. 높은 콧날이 돋보이는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도톰한 입술이 열렸다. “이딴 게 다 무슨 소용이냐.” “…….” “어차피 죽으면 한 줌의 가루가 되고, 흙이 될 거.” 오만도, 겸손도 아니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그는 자신의 외모를 특별히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우스갯소리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너 그거 배부른 소리다.” 나의 말에 녀석의 얼굴 위로 냉소적인 웃음이 스쳐지나갔다. 순간 심장이 흠칫 했다. “병신, 배고픈 소리겠지.”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배부르게 점심을 먹고서, 볼록 부풀어 오른 배를 땅땅 두드리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배가 부른 느낌은 참 좋다. 그 순간만은 세상을 다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포만감이 달콤하게 들기 때문이다. 최하운은 잠시 화장실을 가였고, 나는 폭신폭신한 의자에 드러눕듯 누워 녀석을 기다렸다.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유행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며 발을 까닥까닥 거리는데 누군가 갑자기 내 앞에 섰다. 비실비실한 몸을 보니 최하운은 아니었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세우고, 고개를 드는데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귀염 있는 얼굴의 남자애가 나를 말똥말똥 보고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남자애를 올려다보았고, 그 아이는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저기 전화번호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응?” “그게 사실은 지금 게임 중인데 제가 졌거든요. 벌칙으로 핸드폰 번호 따오라 해서.” 아이는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는 듯 내게 가까이 하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내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핸드폰을 받았다. 벌칙을 당하는 중이라니, 기꺼이 동참해줘야겠지? 녀석의 핸드폰에 번호를 빠르게 찍고서 방긋 웃으며 돌려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덧니를 보이며 귀엽게 웃어보이고선 핸드폰을 받으며 말했다. “아, 고맙습……으아!” 꽈당- 아이가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넘어진 아이의 뒤에는 무표정의 최하운이 있었다. 나는 커다랗게 눈을 뜨며 무슨 짓이냐고 입모양으로 물었다. 그는 무참히 내 물음을 씹으며, 진심이 담기지 않은 무뚝뚝한 음성으로 허리를 만지며 일어서는 아이에게 말했다. “아, 미안. 다리가 길어서.”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아이는 몹시 불쾌했는지 새하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최하운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아이는 바로 꼬리를 내리며 떨어진 핸드폰을 허겁지겁 줍고서 가버린다. 아마도 미간에 주름을 잡고 인상을 쓰고 있는 최하운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사람이란 걸 깨달은 듯싶다. 머리가 길건 말건 소용없었다. 저렇게 한 번 인상을 쓰며 째려보면 누구다 바로 Knockdown인데. 갑자기 최하운은 사나운 시선을 내게로 휙 돌렸다. 나는 흠칫하며 둥그런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왜, 왜?” “병신.” “뭐?” “아무 남자한테 번호를 덥석 넘겨 주냐?” “아니, 그런 의도가 아니라 게임에서 져 벌칙이래.” 나의 말에 그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툭 쳤다. 난 따끔해진 이마를 부여잡으며 녀석을 휙 노려보았다. “그게 진짜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네가.” “그럼 제가 거짓말 쳤다는 거야?” “나가자, 기분 잡쳤다.” 그는 의자위에 올려 둔 가방을 들고서 카운터로 향했다. 나는 투덜거리며 녀석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가 계산을 끝마치고(원래는 내가 사려고 했지만) 함께 나가는 문을 향하는데, 아까 그 아이가 있는 무리들이 최하운이 쳐다보자 곧바로 고개를 푹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하운이는 험악한 얼굴로 녀석들을 향해 경고했다. “또 만나면 죽는다, 꼬맹이들” 그리고 그는 문을 열고 먼저 나갔다. 난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무리와 하운이를 번갈아보았다. 뭐지? 성질 급한 최하운은 문을 쾅 치며 내게 빨리 나오라고 소리쳤고, 나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걸음을 냉큼 옮겼다. 갑니다, 가. 녀석과 세 발자국의 차이를 두며 걷고 있을 때, 한 액세서리 점의 쇼윈도 너머로 아기자기한 액세서리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나는 걸음을 우뚝 멈춰 세우고 내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은 한 핀을 탄성을 내지르며 들여다보았다. 예쁘다. 정말 예쁘다. 갖고 싶다. 나는 옷이나 구두 욕심은 없었지만, 다양한 액세서리를 모으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나 이렇게 나를 한 눈에 반하게 하는 핀은 드물었다. 쇼윈도에 두 손바닥을 올리며 빤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니 최하운이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만 가자고 입을 열려는 찰나 녀석은 나를 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반갑게 인사하는 점원을 향해 내가 보고 있던 핀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얼마에요?” “만 오천 원입니다.” “주세요.” 점원이 냉큼 핀을 들어올리며 계산을 하려할 때, 나는 재빨리 녀석의 팔을 붙들며 만류했다. 사실은 몹시 갖고 싶었지만, 요새 녀석에게 너무 많이 받은 것 같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분홍색 구두도 받았었는데. “아니야, 됐어!” “뭐가 됐냐. 한 시간은 죽치고 앉아 보고 있을 거잖아.” 그 말에 나는 녀석을 빤히 올려다 보다 픽 웃음을 터트렸다. 나의 웃음에 녀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솔직히 이건 이유가 되지 않았다. 빨리 가자고 소리 지르면 단박에 따를 나였다. 사주고 싶으면 사주고 싶다 할 것이지. 헤실헤실 웃으며 내가 바라보자, 어느새 계산을 끝마친 녀석은 내 머리에 핀을 아무렇게나 대충 꽂으며 말했다. “웃지 마. 없던 정마저 떨어져.” “야, 그런데 이게 뭐냐! 좋게 좀 꽂아줄 것 이지.” 나는 다시 핀을 바로 꽂으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주인을 만난 것 처럼 참으로 잘 어울렸다.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하운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때? 잘 어울려?” “그 핀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몹쓸 주인 만나게 해서.” 녀석은 부풀어 오르는 내 볼을 주먹으로 푹 가볍게 눌렀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먼저 가게를 나갔다. 점원 언니께 수고하라는 인사를 드리고 재빨리 가게에서 나왔다. 그리고 졸래졸래 녀석의 뒤꽁무늬를 쫓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매일 나만 받는 것 같아. 나도 사줄게!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봐!” “없어.” “진짜 하나도??” “어.” “운이는 항상 뭘 원하고, 갖고 싶어 한 적이 없는 것 같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심이 있고, 갖고 싶은 것이 있기 마련인데…….” 입술을 삐죽내밀며 심드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때 빠르게 앞서 가던 녀석의 걸음이 갑자기 멈춰 섰다. 나도 따라 멈춰 섰다. 의아한 얼굴로 최하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낮은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가진 게 없는 놈은 가지는 법을 몰라. 설령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 “사라져 버릴까봐 두렵고.” “…….” “사라져버리면 아파서, 너무 아파서……” 그의 몸이 천천히 돌아선다. 다른 곳을 향해 있던 그의 눈동자가 한 치의 오차 없이 나를 향했다. 그의 탁해진 검은 눈동자는 무척 차가웠다. 목소리에는 감정이 한 톨도 없었다. 순간 그가 낯설게 다가왔다. 주먹을 꽉 쥐고서 녀석의 차가운 시선을 받아내고 있을 때, 잠시 다물고 있던 그의 붉은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죽어버릴지도 모르니까.” 갑자기 숨이 턱 막혀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바라볼 수 도 없고, 피할 수 도 없는 어중간한 선에 시선을 박아두고 있을 때, 커다란 손이 나를 향해 뻗어 왔다. 곧 그의 큰 손이 나의 뺨에 닿았다. 그 것도 잠시 그는 내 뺨에 닿았던 손을 치우며 고개를 휙 돌렸다. “밥풀 묻었다.” “무, 무슨 소리야. 나 아까 점심 스파게티 먹었는데!” “묻었다고.” “말도 안돼는 소리! 아니라니까.” “아까 내꺼 뺏어 먹었잖아.” 그 말에 나는 ‘아!’하고 소리 지르며 두 손바닥을 쳤다. 생각해 보니 아까 녀석이 먹고 있던 오므라이스가 스파게티 못지않게 맛있게 보이기에 몇 입 뺏어 먹었었다. 어쩐지 아까 그 남자아이가 지나치도록 내게 계속 웃어 보이더라. 그러면 진작에 좀 이야기 해 줄 것이지. 얼굴을 붉히며 가늘게 실눈을 뜨고서 하운이를 보았다. 그는 가볍게 피식 웃으며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나는 투덜거리며 졸졸 녀석의 뒤를 따라갔다. Chapter. 26 Because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실시간 검색어에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 빠르게 다른 검색어를 제치고 급상승 하는 그 검색어는 바로 [신유라 과로]였다. 마른침을 삼키고서 마우스를 검색어 위에 올리며 힘주어 클릭했다. 그러자 방금 막 올라온 따끈따끈한 여러 기사들이 화면 위로 좌르르 떴다. 한 기사를 마우스로 선택하고 곧이어 창이 뜨자, 나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 한 뼘 다가서며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여 가사를 읽어 내려갔다. 대충 기사의 내용은 롤리팝의 리더인 신유라가 오늘 오후 3시 경 한 쇼 프로그램을 녹화하던 중 과로로 쓰러져 급히 그 근처의 한 모 병원에 옮겨지고, 입원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마우스에서 손을 천천히 떼며 의자 위로 다리를 올리어 무릎을 가슴팍에 댔다. 그리고 눈동자를 불안하게 움직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가슴에 커다란 응어리가 내려앉은 느낌이다. 나는 이기적이게도 그 후 전혀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아이가 힘들어 하고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내 행복에 눈이 멀어 그녀를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날 신유라를 만나고, 그녀의 속사정을 들은 후 힘들면 기댈 수 있는 좋은 언니가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위선이었다. 나는 강태일을 위할 수 있는 좋은 여자라고 드러내고 싶어 생각했던 불투명한 마음의 위선. 사귀고 나서 그녀에게 찾아가 정식으로 사귀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 예의였다. 하지만 나는 강태일이 내 남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자만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그녀의 존재가 있는 한 나는 불완전 한데 말이다. 내가 너무나 한심하고 못나 보여 나는 한 숨과 함께 무르팍에 얼굴을 묻었다. 이번 일이 내 책임도 있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졌다. 그렇게 의자 위에서 한 참 쭈그리고 앉아 있던 나는 갑자기 깜깜한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자,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렇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생각을 했으면 무뎌지기 전에 곧바로 행동을 옮겨야 했다. 그 결심에 나는 이를 앙 물며 의자에서 폴짝 뛰어 내려왔다. 그리고 빠른 동작으로 바지를 갈아입고 가방을 챙겼다. 가자, 김순이! 나는 나를 향해 파이팅을 외치며 방에서 나와 곧바로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껑충껑충 두 계단씩 뛰어 계단을 빠르게 내려 온 나는, 곧바로 최하운의 집이 있는 곳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러자 내 눈에 막 집에서 나오는 하운이가 보였다. “운!” 큰 소리로 운이를 부르며 조르르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녀석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다짜고짜 엘리베이터를 향해 끌고 갔다.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최하운은 당황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뭐야?” “오토바이! 오토바이! 오토바이 타야 돼!” 말을 제대로 하지 않고 오토바이만을 부르짖는 내 모습에 그는 곧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리고 다리에 힘을 주어 자리에 멈춰 섰고, 발을 동동 구르는 나를 향해 차분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뭔데 그래?” “그러니까 병원 가야돼. 신유라가 지금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신유라한테 가야 돼.” 나의 말에 그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나를 보았다. 그런 그의 손을 잡으며 나는 울먹였다. “왜? 어디 가야돼?” “아니. 잠깐 편의점에 담배 사러 가는 길이었어. 잠깐만 기다려.” 하운이는 다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나오는 그의 손엔 두 개의 헬멧이 들려 있었다. 우리의 헬멧! 하운이는 분홍색 헬멧을 건넸고, 나는 히죽 웃으며 받아들었다. 네가 최고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내 전용 헬멧을 쓰고서 펄쩍 오토바이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서 뒷자리에 엉덩이를 안전히 붙였다. 이어 최하운이 올라타고 시동을 거는 녀석의 단단한 허리에 나는 팔을 둘렀다. 그런데 그 때 누군가 나를 밀어내며 좁은 자리를 비집고 올라탔다. 그 바람에 나의 얼굴은 하운이의 등짝에 척 달라붙게 되었다. 최하운과 나는 인상을 쓰며 동시에 외쳤다. “아, 뭐야!” “누나 신유라한테 가는 거지! 나도 갈래!” 좁은 뒷자리에 힘겹게 엉덩이를 붙인 김도혁은 숨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신유라의 소식을 듣고 곧장 내게로 뛰어온 듯싶다. 녀석이 신유라의 한 팬으로써 걱정하는 것은 이해가 됐지만, 세 명이 오토바이에 타는 것은 꽤 위험천만 했고 또한 지금은 도혁이가 낄 타이밍이 아닌 것 같기에 나는 타일렀다. “나중에 꼭 같이 가자. 지금은 내려.” “싫어.” 녀석은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듯 단호한 음성으로 말하며 내 허리에 긴 팔을 둘렀다. 아무래도 쉽게 떨어져 나갈 것 같지 않았다. 특히나 황소고집인 김도혁이니 말이다. 최하운은 자신이 쓰고 있던 검은 헬멧을 벗어 도혁이를 향해 넘겼다. “써.” “형은?” “됐어. 간다, 꽉 붙잡아.” 곧이어 최하운은 오토바이를 매끄럽게 움직였다. 최하운의 오토바이는 세 사람이 탔음에도 끄떡없이 쌩쌩 도로를 질주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신유라가 입원하였다는 모 병원 앞에는 그녀의 팬들로 보이는 많은 아이들과 취재진들이 가득했다. 어수선한 그 광경을 멀찌감치 바라보며 나는 한 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병원에 찾아오긴 하였으나 어떻게 그녀를 찾아내어 만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도혁이와 나는 각자 그에 대하여 깊이 생각에 빠졌다. 지난번도 그러 하듯 연예인인 그녀를 만나기까지는 참으로 힘들다. 새삼 정해진 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삶이 조금은 안타깝다는 생각과 함께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녀는 공인이 되어 얻은 것도 많겠지만 그 만큼 잃은 것도 많을 것이다. 문득 강태일이 떠올랐다. 만약 그가 가수로 데뷔하고 나면 이처럼 만나는 것이 당연 힘들어질 것이다. 어쩜 강태일에게서 그 잃어버리는 것이 내가 될지도 모르겠다. 신유라에게서 강태일이 그러하듯. 그 생각을 하니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때 김도혁이 자신의 머리를 헝클며 소리쳤다. “아, 몰라! 일단 쳐들어가게! 저 병원 안에 있긴 하니까. 어떻게 서든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도혁이의 말에 동조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손 놓고 가만히 있기 보다는 일단 돌진해 보면 일은 어떻게 서든 될 것이다. 막무가내라면 따라올 자 없는 우리 남매는 각오를 다지는 의미에서 비장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손바닥을 부딪쳤다. 그리고 마음먹었던 일을 실시하자고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그런데 그 때…… “수상한 자 발견.” 갑작스럽게 들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도혁이와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초등학교 5,6 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 4명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중 두 명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도혁이가 그 아이들을 향해 반가운 얼굴을 지으며 말했다. “엇, 너희들!” “안녕하세요.” 아이들은 심드렁한 얼굴로 성의 없이 도혁이에게 인사를 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그 두 아이는 지난 번 신유라의 숙소 앞에서 만난 아이들이었다. 좋아서 번호까지 알려달라고 했었던 아이들의 뜨거운 마음이 어느새 시들해져 있었다. 그에 대해 도혁이는 충격을 받은 것인지 말문을 잃고서 눈만 끔벅였다. 그런 도혁이의 모습을 무심한 얼굴로 흘겨보던 아이가 나를 향해 툭 경계 어린 말을 내뱉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저희들이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지 않을거에요! 온 몸을 다하여 막아서 언니를 지키고 말겠어요!” 그러면서 네 명의 아이들은 동시에 핸드폰을 내게 불쑥 내밀었다. 아이들의 핸드폰 화면바탕에는 그 날 놀이터에서 만났던 신유라와 내가 담겨져 있었다. 마치 내가 울린 것처럼 신유라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울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빳빳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텍스트로 이렇게 적혀져 있었다. [경계대상 1호] 맙소사. 어찌하여 이런 오해를 삼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바쁘단 말이다.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아이들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자세히 보니 아이들은 각자 한 동물씩 닮아 있었다. 한 명은 앞니가 튀어 나오고 눈이 동그란 것이 쥐를 닮았고, 또 한명은 인상이 험악한 것이 호랑이를 닮아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안면을 튼 두 아이 중 한 명은 눈이 쳐지고 온순하게 생긴 것이 양을 닮았고, 나머지 남은 한 명은 장난기가 많아 보이는 것이 원숭이를 닮아 있었다. 이거 뭐. 꾸러기 수비대도 아니고. 나는 팔짱을 끼며 같잖다는 시선으로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그러한 나의 모습에 아이들은 주먹을 쥐며 더욱 경계 태세를 취했다. 아이들이 의젓하고 당당한 기세로 길을 막아섰기에 우리는 작전을 실시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생긴 방해꾼에 나는 한 숨을 깊게 내뱉었다. 그 때 아이들이 누군가를 힐끔힐끔 보고 있는 것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그들이 향한 시선의 길을 따라 가보니 그 곳엔 최하운이 서 있었다. 오토바이에 기댄 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삐딱하게 서 있는 하운이를 힐끔거리며 아이들은 얼굴을 붉혔다. 도혁이 또한 그 모습을 발견한 건지 얼굴이 밝아졌다. 우리는 동시에 씩 웃으며 하운이를 바라보았다. 그러한 우리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무료한 얼굴로 서있던 최하운이 고개를 돌려 우리를 보았다. 그는 심상치 않은 우리들의 눈빛에 몸을 흠칫 했다. 우리는 재빨리 달려가 한 쪽 구석으로 하운이를 끌고 갔다. 반짝반짝 빛나는 우리의 시선에 최하운은 부담스러워 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우리가 급박한 상황에 부딪혔다.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너의 미인계로 저 꼬맹이들을 따돌리는 거야!” “그래! 부탁해, 형! 형만 믿을게!” 그리고 우리는 첫 번째 난관의 희생자 최하운은 아이들을 향해 밀었다. 최하운은 능청스런 웃음을 짓는 우리 두 사람을 노려보며 꼬맹이들 앞에 어기적어기적 다가섰다. 갑자기 최하운이 다가오자 꼬맹이들은 다소 긴장된 얼굴로 하운이를 보았다. 하운이는 짧게 한 숨을 뱉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오, 오빠가 아이스크림 사줄까?” 그 말에 아이들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합창했다. “네!” 최하운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자, 우리는 재빨리 걸음을 옮겨 병원 입구로 향했다. 김도혁이 다리를 절뚝절뚝 저는 척 했고 나는 도혁이를 부축하는 척 하며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뭐,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말이다. 병원 안에 들어선 우린 아마 신유라는 보통 일반 병실이 아닌 특별실에 있을 것이라고 단정 지으며 특별실이 있는 층을 갔다. 역시나 우리의 예상은 적중했다. 저번에 보았던 롤리팝의 수염 난 매니저가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뒤쪽에 있는 병실 입구엔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 두 사람이 서있었다. 우리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슬그머니 그들의 옆을 지나치려 했다. 매니저는 성난 얼굴로 역정을 내고 있었고, 순해 보이는 인상의 다른 한 사람은 그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터트린 거야.” “그 때 기자 한 명이 녹화 장에서 있었나 봅니다.” 나도 모르게 그 얘기에 귀 기울여 버렸고, 그만 매니저의 충혈 된 두 눈과 부딪히고 말았다. “엇, 자네!” 나는 재빨리 두 번째 관문에서의 희생자로 김도혁을 밀어냈다. 김도혁은 나를 째려보다 매니저에게 악수를 건네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향기로운 남자 꽃도혁입니다! 이렇게 매니저님을 만나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좀 비켜봐.” 매니저가 지나가는 나를 붙잡으려 했고, 김도혁은 매니저의 몸을 붙들며 아부란 아부는 다 쏟아내었다. 그리고 어느새 매니저는 그 아부에 귀가 솔깃해져 있었다. 아까 나머지 사람은 매니저의 역정이 듣기 싫었던 것인지 고새 사라져 있었다. 좋다, 그대로 가자! “매니저님의 손에 거친 스타는 모두 최고의 스타가 되는 것을 보고 역시 매니저님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여 왔습니다.” 그렇게 김도혁이 맹활약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커다란 덩치의 경호원이 버티고 있는 병실 앞에 멈춰 섰다. “뭐냐, 이 꼬맹이는.”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는 나를 향해 경호원 한 명이 말했다. 꼬맹이라는 말에 발끈 했지만 애써 억누르며 나는 웅변을 하듯 말했다. “이 몸은 신유라와 각별한 사이로, 지금 반드시 신유라와 만나야겠습니다. 그러니 비켜 주시지오.” 나의 말에 경호원 둘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한 명이 내게 다가와 나를 짐작들 듯 번쩍 들어올렸다. “놔요! 저는 꼭 신유라를 만나야 한다니까요!” “꼬맹이 아저씨한테 궁둥이 팡팡 당하기 전에 얌전히 굴어.” “감히 숙녀의 궁둥이를! 그러면 성희롱 죄로 신고 할거 에요!” 그렇게 경호원의 어깨에 걸쳐져 바동바동 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며 신유라가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인가요?” “신유라!”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를 불렀고, 신유라는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잠시 놀라 말문을 잃었던지 가만히 나를 보던 신유라는 이내 정신을 차리며 바싹 말라 있던 입을 열었다. “언니?” 신유라가 나를 알아보자 경호원은 어리둥절해 했다. 나는 재빨리 경호원의 어깨에서 폴짝 내려왔다. 그리고는 경호원들의 등을 수고하라며 툭툭 두드리고, 신유라와 함께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병실 안에 들어오자 마자 나는 재빨리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의 몸은 더욱 비쩍 말라 있었고, 얼굴은 전보다 더욱 핼쑥하며 창백해 있었다. 그녀는 그런 아픈 얼굴에 어색한 웃음을 띠우며 입을 뗐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깜짝 놀랐어요.” 애써 쾌활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가슴 아파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많이 야위었다.” “그래요? 요새 일이 많아서 그런가.” 신유라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나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 사실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이렇게 찾아 왔어. 아픈 애한테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내 모습도 참 웃기지만. 더 늦기 전에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 강태일하고 정식으로 사귀게 됐어.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이제야 말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도저히 그녀를 바라볼 수 없어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잠시 물기 어린 정적이 흘렀고, 곧이어 그 흐름을 비집고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요.” “응?”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며 동그래진 눈으로 신유라를 바라보았다. 신유라는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창밖의 무언가를 바라보며 나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어요. 얼마 전 연습실에 우연히 갔다가 태일이를 보았어요. 그 때 태일이는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죠. 그런데 태일이가 환하게 웃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웃는 거 나 처음 봤어요. 그 통화하던 사람은 바로 언니 맞죠? 아무튼 그 모습을 보고서 언니랑 잘 되었구나 하고 예상했어요.” “…….”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그리고 두 사람이 잘 되서 저는 정말 기뻐요. 늦었지만 축하해요.” 신유라는 창에서 고개를 돌려 다시 나를 보았다. 예쁘게 웃음 짓는 그녀는 쏟아져 내리는 햇살 때문인지 더욱 눈부셨다. 하지만 그 햇살이 너무나 슬퍼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한텐 그렇게 웃어준 적 한 번도 없었어요.” “…….” “그리고 나 때문에 더욱더 자신의 행복을 가둬버리면 어쩌나 죄책감에 시달렸었는데, 언니 덕분에 이제 한시름 놓은 것 같아요. 정말로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눈물을 억지로 참기 위해 코를 순간 훌쩍이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내 한 방울의 눈물은 참지 못하고 툭 흘러내렸다. 이내 나는 울음을 토하며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갑작스럽게 울음을 터트리는 내 모습을 보고 신유라는 당황했다. “왜, 왜 울어요?” “그냥. 그냥 눈물 나와.” “언니도, 참.” 나는 나뭇가지처럼 많이 야윈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울어야 할애는 내가 아니라 신유라이다. 신유라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참고 있었다. 두 손을 꽉 말아 쥐며 애써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가 눈물이 나왔다. 값싼 동정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한 여자로써 그녀의 마음에 동질 되어 흘린 순수한 눈물이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손에 든 도시락을 흔들며 통통 뛰듯이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지금 나 순이는 오랜만에 강태일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연습생 모두 부산으로 여름 캠프를 갔고, 태일이는 자신 혼자 연습실에 있다며 나를 초대했다. 약간은 쑥스러워 하며 할 일 없으면 오라던 강태일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 그렇게 나의 낭군님이 초대하였는데, 안 갈 리가 없는 나 순이! 나 순이는 고된 연습에 많이 힘들었을 그를 위하여 특별 영양만점 도시락 까지 만들었다. 푸짐한 도시락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콧노래를 흥얼흥얼 거렸다. 발이날개를 달아 놓은 마냥 붕붕 뜬다. 그가 알려준 연습실이 있는 한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연습실이 위치한 2층으로 올라갔다. 곧 계단을 다 오르자 연습실이 내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슬그머니 연습실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부딪쳐왔다. 빠른 템포의 비트가 강한 신나는 노래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그 곳에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이며 화려한 동작으로 춤을 추는 강태일이 보였다. 그는 멋지게 춤을 추다 어떤 한 부분이 마음에 안든 것인지, 잠시 음악을 끄고 반복했다. 그렇게 열심히 춤연습을 하고 있는 태일이는 더운 것인지 상위를 벗고 있었다. 그의 잔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섹시하다. 나는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고 그의 모습을 감상하며, 헤벌쭉 웃는 얼굴로 침을 질질 흘렸다. “거기 못난이 그만 훔쳐보고 들어오지.” 갑자기 나를 향한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이어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는 나를 향해 피식 웃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레 연습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럼, 실례!” 이러한 곳은 처음 보는 것이라 무척 신기하게 다가왔다. 이 것이 바로 가수가 될 인재들의 연습실이란 곳이구나! 별다른 물건들 없이 강당처럼 넓은 연습실은 사방이 거울로 비춰져 있었다. 거울 속에 내가 맺혔다. 그 안의 나는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져 있었다. 따끈따끈 해진 두 볼을 툭툭 두드리며 고개를 돌리는데, 태일이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나는 흠칫거리며 둥그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곧 그의 묘한 시선에 나는 불타는 바비큐가 되었다. “여기가 덥지?” “응?” “에어컨이 지금 고장 나서 더울 거야.” 단순히 내가 더워서 얼굴이 빨개진 줄 알았나 보다. 바보. 나는 혼자 고개를 돌리며 픽 웃었다. 아참, 그리고 태일이는 이제 어느새 내게 편히 말을 놓기 시작했다는 사실! 그 사실이 아직도 너무나 뿌듯한 나는 히죽 웃으며 틀었던 고개를 다시 강태일에게로 옮겼다. 그런데 수건으로 땀이 가득한 몸을 닦은 강태일은 벗어두었던 티셔츠를 다시 입으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러 버렸다. “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눈을 깜박 깜박이고 있을 때 강태일이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변태.” “헐!” “야동 순이.” “뭐? 너 그거 어찌……!” “김도혁이 말해줬어. 꼬 치부(恥部)에 대해서 내게 아주 상세히 알려 주던 걸? 꼬 이미지 깨트려서 내가 먼저 나가떨어지길 바랬나봐. 유치한 자식.”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김도혁 이 녀석 내가 기필코 가만두지 않으리라. 그렇게 바드득바드득 이를 갈다가,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지으며 태일이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나에 대해서 많이 깨졌어?” “글쎄.” 그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철퍼덕 뒤로 드러누웠다. “아, 목마르다.” “목말라? 잠깐만 기다려! 요 앞에 편의점 있던데 내가 슝 다녀올게!” 그가 만류하려 하자, 들고 있던 도시락을 내려놓으며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리고 빠르게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갔다. 이렇게라도 깨졌던 이미지를 복구하고 싶었다. 김도혁 용서치 않을 거야! 물과 음료수 한 병을 사들고 연습실로 돌아오니 그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몹시 피곤하였나 보다. 나는 사온 물과 음료수를 한 쪽에 조심스레 내려놓고서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 천진한 얼굴이 참으로 귀엽다. 그렇게 한 5분간은 그의 자는 모습을 나는 감상했다. 그러다 흘러내린 앞머리가 답답해 보여 쓸어주려고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갑자기 내 손목이 잡히며 몸이 당겨졌다. 곧이어 나는 강태일의 품속에 가둬졌다. 놀래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나를 꽉 안고서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더워.” “음, 그러네.” “아, 덥다.” “그럼 놓지 그러니.” 나야 지금 이 상황이 좋았지만, 서로 안고 있으면 더욱 더운 것 이었기에 조심스레 말했다. 그는 내 말에 살짝 입술을 내밀더니 희미하게 웃음을 띠우며 답했다. “싫은데.” “뭐야, 그게.” “좋으니까.” 그러면서 그는 나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나는 픽 웃음을 터트리며 녀석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까칠이 많이 능글능글해졌어.” “누구 때문인데.” “애교도 조금 있어진 것 같고?” “누구 때문인데.” “그리고, 그리고 말이지. 나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감고 있던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는 나는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 눈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눈.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뻐서 가슴이 미치는 눈. 그는 얄팍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장난기가 묻어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 때문이잖아. 책임져.” 그러면 내가 뭐라고 대답할 것 같아? 나는 눈을 반달로 휘고서 녀석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말했다. “얼마든지.” 그러자 강태일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뭐가 웃긴지 그는 계속해서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나는 녀석의 품에서 살짝 떨어져 샐쭉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자 그는 내 머리를 쿵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꼬는 품 안에 다 들어와서 좋아. 어렸을 때 곰순이를 안고 있는 것만 같이.” “곰순이?” “응.” “…….” “작은데도 의지가 되는 거 있잖아. 내가 안고 있는데도 기대고 있는 것 같은.” 나는 그 말에 다시 얼굴을 떼어내며 강태일의 입술에 쪽- 하고 뽀뽀했다. 갑자기 기습으로 당한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내가 더 좋지? 곰순이는 뽀뽀 안 해주잖아.” “음, 그러네.” 픽 웃으며 그는 눈을 다시 스르르 감았다. 그리고 그는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졸리다. 나 잔다.” “응, 잘 자.” 얼마 안가 그는 깊이 잠에 빠져들었다. 연습이 무척 힘든 것인지 녀석의 얼굴이 조금은 야위어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가만히 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뺨은 더워선지 사람의 정상 체온보다 뜨거웠다. 하지만 싫지 않은 뜨거움이었다. 지금 우리의 관계만큼이나 뜨거워 진 것 같아서. 우리의 뒤편에 있던 창가에서 눈부신 햇살이 투명한 창을 통해 우리를 감싸왔다. 어느새 무더운 여름이 되어가고 있었다. 연습실안은 열기가 가득했고 무척 더웠지만 이상하게 기분은 좋았다. 불쾌지수 0도 아닌 -1. Chapter. 27 절대로 스르르 물에 젖은 솜사탕 마냥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곧이어 흐릿했던 시야가 점점 자리를 잡으며 선명해지고, 잠시 동안 멍하니 눈을 몇 차례 깜박였다. 그러다 이내 화들짝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밖을 보니 어느새 어둑어둑 땅거미가 짙게 내려 앉아 있었다. 조금만 눈을 붙였다 강태일을 깨운다는 게 그만 나도 모르게 깊이 잠들어 버린 듯싶다. 그나저나 태일이는 어디에 있지? 내 옆에 있어야 할 태일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나는 벌떡 자리에 일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 작은 말소리가 밖에서 열린 귀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잠시 동안 문을 바라보다 발소리를 죽이며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문 앞에 바짝 붙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별다른 이상은 없고? 그래, 알았어. 어, 끊어.” 강태일의 목소리는 근심의 무게에 눌린 것인지 평상시 목소리 보다 더욱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보아하니 아무래도 방금 통화는 신유라의 소식에 대한 통화인 것 같다. 매일 연습실에 박혀 있는 통해 뒤늦게 이 일을 접한 것 일 것이다. 괜찮을까? 문 밖의 그는 통화를 끊고서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을 지, 혹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을지 걱정되기도 하고 불안해진다. 문 앞에 바짝 붙어 있던 나는 문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벌컥 문이 열리며 엄청난 충격이 얼굴 위로 덮어왔다. 뒤로 꽈당- 넘어지며 손으로 얼얼한 얼굴을 감쌌다. 머릿속이 띵해지며 별이 보인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지금 이 순간 새삼 절실히 알게 되었다. “괜찮아?” 강태일이 깜짝 놀란 얼굴로 가리고 있던 내 손을 치우며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이내 나의 얼굴을 살피던 녀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것은 바로 콧구멍 속에서 뚝뚝 흐르는 시뻘건 액체 때문이었다. 태일이는 이내 굳어진 표정을 풀고서 당황해 하며 우왕좌왕 하다 벌떡 일어서 휴지를 가져왔다. 그는 일단 마구잡이로 휴지를 뜯어 대충 코를 막아 놓고서, 나를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줄줄 흐르는 물에 피로 얼룩진 얼굴과 손을 깨끗이 씻었다. 맙소사, 옷에 코피 자국이 몇 방울 선명하게 묻어 있었다. 얼마 전 새로 산 노란색 티셔츠였다. 밝은 색 티셔츠에 핏자국이 있으니 영 모양 빠지는 것이 보기가 좋지 않았다. 이내 거울 속의 김순이는 울상이 된다. 그런 내게 강태일은 돌돌 말아 놓은 휴지를 콧구멍에 정성스레(?) 꽂아주었다. 거울 속의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풋- 웃음이 터질 뻔 했다. 개그가 따로 없는 내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강태일이 손으로 이마를 훑어내며 짧게 한 숨을 쉬었다. 그의 한숨 소리에 몸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나는 도저히 그를 볼 낯이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벌써 이것이 두 번째였다. 예쁜 모습을 보여도 모자를 판에 저번 피구 시간에 이어 줄줄 코피 흐르는 추한 모습을 또 한 번 그에게 보이고 만 것이다. 절망의 늪에 허우적허우적 거리고 있을 때, 강태일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왜 문 앞에…….” 그의 말꼬리가 점점 흐려지더니 이내 툭 끊어졌다. 왜냐하면 갑자기 내가 품에 와락 안겨 순간 놀랐기 때문이다. 쿵쿵쿵- 조금씩 속도가 빨라지는 그의 심장의 고동을 들으며 그에게 물었다. “소식 들었어? 신유라 어제 쓰러져서 입원했다는 거.” “응.” 태일이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녀석의 품에 더욱 파고들며 옷깃을 꼭 붙잡았다. 그러자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어루만져주었다. “신유라가 걱정 되서 그래? 걱정 마, 걘 강한 애니까 금방 일어설 거야.” 내가 모르는 그 시절 줄곧 오랫동안 그녀를 보아왔던 강태일의 믿음이 담긴 말이었다. 나 역시 그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다. 신유라 그 아이는 누구보다도 강한 아이였다. 여리고 약하지만 질긴 생명력과 강한 의지를 가진……. 김수영님의 시 속에도 등장했던 ‘풀’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그녀를 보고 있으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고, 내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다. 나는 항상 혼자 일어서기보다는 누군가에 도움받기를 갈구했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줄곧 말하지 못하고 있던 ‘진실’ 말하려는 것은 그녀처럼 피하지 않고 부딪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있잖아.” “…….” “두려워서 지금까지 이 말 못했고.” “…….” “지금 또한 몹시 두렵지만 꼭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심상치 않은 이야기임을 느낀 것인지 내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잠시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다 녀석의 손을 잡으며 다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뗐다. “아직도 신유라가 널 좋아하는 거라며 어떡할래?” “…….” “그 때와 변함없이 줄곧 너를 좋아하는 거라면.” 나의 말에 그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그와 함께 순간 모든 게 정지되는 듯 했다. 호흡조차 잠시 멈춰진 듯 두 사람의 공간이 숨 막힐 만큼 고요해진다. 그의 눈동자는 잠시 과거 속으로 돌아가는 듯 흐릿해졌다. 시간을 멈추어 세우고서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본다. 이내 돌아온 그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단 한 순간도, 1초도 그 아이의 마음은 변함없었어. 항상 너를 향했어.” 나를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나는 신유라에게서 들었던 그녀의 속사정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드는 내내 아무 말도 없었고,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차라리 슬픈 얼굴을 지었더라면 따라 슬픈 웃음을 지으며 꼭 안아주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기분이 어떠한지 전혀 예상을 못하겠으니 불안해졌다. 그의 침묵이 더욱 무서웠다. 이내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에 일어서며 곧바로 뒤돌아섰다. 몸이 떨려온다. “그만 가자.” 바로 걸음을 옮기며 나가려는 순간 손목이 덥석 잡혔다. 내 손목을 쥐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도시락.” “…….” “도시락 싸왔던데 같이 안 먹고 가?” “아.” 어떤 표정을 지어야 될까. 수만 가지 생각들이 복잡하게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이내 나는 애써 밝게 웃으며 뒤로 휙 돌았다. 알 수 없는 얼굴로 그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더욱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당연히 먹고 가야지! 내 꺼 2인분, 네 꺼 1인분 해서 3인분 싸왔는걸!” 나의 말에 강태일은 픽 웃으며 자리에 일어서더니 먼저 도시락 있는 곳으로 가 털썩 앉았다. 그리고 조금은 서툰 동작으로 도시락을 열기 시작했다. 옆에 앉아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을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유야 어쨌건 어떻게 서든 속이려 한 거잖아.” “…….” “그리고 지금 굳이 용서할 필요도, 이해할 필요도 없어. 이미 그 애에 대한 미움은 사라져 버렸으니까. 이젠 아무렇지 않으니까.” 거울 속에 비춰지는 나의 눈동자가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나의 손이 들어올려졌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강태일은 내 손을 쥐고서 마치 북을 치듯 쿵쿵 가슴을 쳤다. 그리고 눈웃음을 띠며 나를 향했다. “끄떡없어.” “…….” “그러니까 풀 죽어 있지 마.” 그리고는 잡고 있던 내 손으로 가볍게 얼굴을 푹 밀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내 분홍빛 웃음을 활짝 지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드디어 환상의 음식 갈비찜이 완성이 되어가는 지 맛있는 냄새가 황홀하게 후각을 툭툭 두드렸다. 도혁이와 나는 식탁에 나란히 앉아 오랜 만에 킁킁 갈비 냄새를 만끽하며 행복해 했다. 정말 이 순간은 천국이 따로 없었다. 어서 1초라도 빨리 갈비 살을 뜯고 싶다는 욕구가 거세게 피어올랐다. 턱을 괴고서 입맛을 다시며 요리를 하는 하운이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도마 위로 칼을 내리 찍는 소리가 쿵- 하고 크게 울렸다. 도혁이와 난 화들짝 놀라며 눈을 끔벅였다. 그 때 최하운이 휙 뒤돌아 우리를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 “이, 식충이들아! 그만 좀 쳐다봐라. 등에 구멍 나겠다.” 거친 숨을 토해내며 가자미눈으로 흘겨보는 하운이에게 우리 남매는 곧바로 눈웃음치며 아부를 떨었다. “너 혼자 밥 먹기 외로울까봐 우리가 왔지.” “그래, 형! 확실히 우리가 오니까 분위기도 살고 좋지? 형 요리만 하기 심심하면 내가 노래라도 불러줄까?” 갈비를 먹기 위한 우리들의 지나친 아부가 가증스럽던지 최하운의 고운이마에 깊게 주름이 잡혔다. “옘병들 한다. 지금 내 손에 식칼이 있다는 걸 잊지 마라.” 최하운은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들어 올리며 위협 아닌 위협을 주었다. 형광등 불빛에 칼날이 반짝이는 것을 보며 우리 남매는 순간 움찔했다. 그러한 우리들의 모습에 하운이는 피식 싱겁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혹시나 내쫓을까봐 걱정했던 우리는 안도의 한 숨을 푸- 내쉬었다. 오늘 오전 누군가 최하운에게 최고급 한우 갈비세트를 보내왔고, 최하운은 발송인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반송시키려 하였다. 그러한 그를 나는 온 몸으로 막으며 제지했다. 물론 갈비를 향한 집념 때문이었다. 급격히 몰락하는 우리 한우 농가를 살려 주어야 한다는 둥, 어찌하였든 선물을 그렇게 바로 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둥 갖가지 이유 열 가지를 붙여서 겨우 반송을 면했다. 그리하여 오늘의 만찬은 맛있는 갈비가 된 것이었다. 절로 웃음이 얼굴위로 그려진다. 식탁 밑에 있는 발을 그네 타듯 앞뒤로 흔들며 즐거워하고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마자 나는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현관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는 그 사이에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머리를 빠르게 정리한 나는 손을 뻗어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방긋 웃음을 날리며 그를 반겼다. “왔어?” “여기서 뭐해?” 오늘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강태일의 얼굴이 다소 굳어 있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았고, 녀석의 내게서 곧 시선을 떼며 내 너머로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사실 이 근처에 있다는 그의 문자를 받고서 나 순이는 얼굴도 보고 몸보신도 시킬 겸 갈비를 먹이기 위해 그를 부른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연습을 무리하게 하는 것인지 날이 갈수록 살이 쪽 빠지고 있어 심히 염려스러웠다. “뭐야!” 어느새 뒤따라온 김도혁이 오만상을 쓰며 강태일을 노려보았다. 김도혁을 마주하고 있는 강태일 역시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도혁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한 참 동안 강태일을 노려보다 휙 나를 보았다. 녀석의 시선에 나는 딴청을 부르며 일단 들어오라고 태일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 때 강태일의 뒤에서 무언가 꿈틀거려 순간 흠칫 놀랐다. 이내 그 정체는 볼에 손가락을 콕- 찌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짜잔~ 한비도 있습니다요.” 오랜만에 보는 주한비였다. 녀석은 안 본 사이에 헤어스타일을 새롭게 바꾸었다. 뽀글뽀글 파마를 한 것이다. 그리하여 눈도 동그란 것이 꼭 푸들 같았다. 나도 모르게 너무나 귀여워 녀석을 와락 끌어안자 강태일이 정색하며 곧바로 우릴 떼어냈다. 그리고는 나를 휙 째려보았고, 나는 그의 살벌한 눈빛에 기죽어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을 보는 주한비는 무엇이 재미있는지 배를 잡고 깔깔 웃었고, 김도혁은 주한비까지 등장하자 몸을 비틀며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 사이 이 소란에 당연 가만히 있을 리 없는 최하운이 식칼을 들고서 잔뜩 찡그린 얼굴을 내밀었다. “저것들은 또 뭐야.” 추가된 강태일과 주한비의 모습에 최하운의 칼날 같은 시선이 곧바로 나를 향했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서 애써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운아, 나눠 먹는 사회가 밝은 사회란다. 얼마나 아름답고 좋니.” “그 딴 거 필요 없어.” 짜증난다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최하운을 달래고 있을 때,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냄새에 한비는 코를 킁킁거렸다. 이내 이 음식의 정체를 눈치 챈 한비는 눈을 반짝이며 하운이를 향해 말했다. “형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누가 네 형님이야.” “에이~ 형님도. 안 본 사이에 더욱 새끈해지셨네요?” 우리의 뒤를 이어 아부를 떠는 주한비의 모습에 최하운의 얼굴은 종이 구기듯 구겨졌다. 주한비는 세상사는 법을 어린 나이에 참 빨리 터득한 듯싶다. 그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얼굴 뒤로 녀석은 수만 가지 생각을 품고 있겠지. 참으로 무서운 놈이다. 경계어린 시선으로 헤실헤실 웃고 있는 주한비를 보고 있을 때, 시끌벅적한 것을 질색하는 최하운은 무거운 한숨과 함께 우리 네 사람을 향해 낮게 읊조렸다. 지금 이 상황이 무척 맘에 안 든 듯 그의 살벌해진 음성에 나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주방에 들어오라 할 때 까지 들어오지 마.” 그리고는 휙 다시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강태일을 제외한 우리 세 사람은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새로 장만한 기로로 앞치마를 입고 있어도,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최하운 뿐일 것이다. “까칠아, 여기 앉아.”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태일이에게 말했고, 집안을 훑어보던 그가 앉으려는 찰나 김도혁이 냉큼 사이로 끼어들어 앉았다. 그리고는 김도혁은 한 방 날렸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흐뭇한 웃음을 입에 걸었다. 그러한 도혁이의 모습에 강태일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짓다, 맞은편으로 가 한비의 옆에 앉았다. 한비는 고기를 먹는다는 생각에 신난 얼굴로 어깨를 들썩이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향해 말했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 데 꼬선생은 토실토실 살이 찌신 것 같아요?” 교생 실습 때 학교에 갈 때마다 매일 날 괴롭히고 놀려대던 녀석이 오랜만에 나를 보니 장난기 발동이 또 일어났나 보다. 소파에 있던 쿠션을 들어 그에게 던지려는 찰나, 강태일이 주한비의 뒷통수를 가격했다. 내가 던지려는 쿠션을 피하려던 주한비는 다른 곳에서 공격을 받자 당황해 했다. 역시 우리 까칠이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우뚝 치켜세웠고, 강태일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트가 뿅뿅 날리는 우리를 보고 두 사람은 얼굴을 찌푸리며 각자 한마디 했다. “얼씨구.” “둘 다 꺼져버려.” 그들의 말에 우리는 웃으며 나는 김도혁을, 강태일은 주한비를 공격했다. 그렇게 서로 얽히고 얽혀 한참동안 싸움 같지 않은 싸움을 하고 있을 때 마치 천상의 목소리가 같은 최하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됐…….” 최하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 우리는 동시에 동작을 멈추며 곧바로 벌떡 일어서 달려갔다. 나 못지않은 식성을 가지 저들과의 싸움은 바로 이게 진짜였다. 이름 하여 오늘은 갈비 전쟁. 그러다 나는 ‘아차’하며 강태일을 챙기기 위해 다시 되돌아갔다. 느리게 일어서는 태일이를 잡아끌고 부리나케 부엌으로 들어가 식탁에 앉았다. 어느새 그들은 갈비를 뜯고 있었다. 나 역시 이에 질 수 없어 빠르게 손을 놀리고, 입을 놀렸다. 주방 안은 어느새 각자 색이 다른 세 가지의 먹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게걸스럽게 먹는 우리를 보며 최하운은 혀를 끌끌 찼다. “애새끼들 키우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최하운의 말 따위는 들리지 않았던 우리들이었다. 뒤에서 열심히 먹는 우리들을 지켜보던 최하운은 컵에 물을 따라 내 앞에 놓으며 말했다. “야, 돼지 김순이. 체하겠다. 천천히 좀……” 그의 말이 갑자기 툭 끊겼다. 그것은 내 어깨위에 올려 지던 최하운이 손이 툭 허공위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먹지 않고 내 옆에 가만히 앉아 있던 강태일이 하운이의 손을 쳐낸 것이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입에 양념을 잔뜩 묻힌 채 눈을 끔벅이며 두 사람을 보았다. 주한비와 김도혁 역시 갈비를 입에 물며 동작을 멈춘 채 두 사람을 보았다. 강태일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그러한 그의 모습에 최하운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뭐야.” “…….” “이러면 조금 흥미가 생기는 데.” 그러면서 그는 강태일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며 말했다. 그의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냉소적인 색채가 깊게 배인 하운이의 목소리가 부엌 안을 가득 울렸다. “더 도발해볼까?”  순간 잠시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하였다. 그 때 얼음장처럼 차가운 이 알 수 없는 정적은 갑자기 울리는 전화 벨소리에 깨졌다. 최하운은 강태일을 응시하던 차가운 시선을 돌리며 숙였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기를 향해 거실로 뚜벅뚜벅 나갔다. 그리하여 우리 세 사람의 시선은 강태일을 향해 쏠렸다. 강태일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자리에 벌떡 일어서 나갔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나는 당황해 하다 일단 뒤따라가야겠다는 생각에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를 쫓았다. 아파트에서 나오고 뚜벅뚜벅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던 강태일은 갑자기 털썩 주저앉듯 쭈그리고 앉았다. 순간 그가 쓰러지는 줄 알았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얼굴을 무릎사이로 깊게 묻은 상태에서 내게 말했다. “나 갈비 안 좋아해.” “응?” “요새 더욱 싫어졌어.” “아, 정말? 몰랐어.” “그러니까 갈비 있다고 부르지 마.” 뭔지 모르지만 강태일은 지금 퉁퉁 불어있었다. 그의 모습에 나는 눈을 휘며 옅게 웃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따라 쪼그리고 앉았다. 녀석의 팔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나는 말했다. “가끔 보면 까칠이는 어린아이 같아.” “알아.” “알아?” “그래. 그래서 쪽팔리고 짜증나.” 그 말에 나는 까르륵 소리 내어 웃었다. 나의 웃음소리에 강태일은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리며 나를 흘겨보았다. 가늘게 눈을 뜨고서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나를 보던 강태일은 갑자기 내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고? 갑작스레 웬 악수? 둥그런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다 그가 내민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러자 그 위로 다른 한 손을 더 겹치게 하며 강태일은 힘주어 꽉 잡았다. 그리고 그는 깊어져 가는 밤만큼이나 까만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이 손……” “…….” “놓으면 안 돼.” “…….” “내가 놓을 때까지는 절대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강태일의 바라보았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강태일은 갑자기 손을 뻗어 나의 목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맞춰 오며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그의 음성은 힘이 실려 있었으나,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절대로 안 돼.” Chapter. 28 간격의 차이 태일이와 헤어지고 나서 느린 걸음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길. 어느새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던 밤은 더욱 깊어져 있었고, 동쪽에 떠오른 달은 스산한 달빛을 내뿜으며 열심히 어둠에 대항하고 있었다. 아파트에 들어서고 바로 1층에 머무르고 있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아무 생각 없이 곧바로 7층을 향해 손가락을 뻗던 나는 버튼에 닿으려는 찰 나 순간 주저했다. 그 망설임에 내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이름 모를 짧은 한 숨을 토해내며 천천히 힘주어 하운이의 집이 있는 7층을 눌렀다. 그 순간 가슴에 무거운 응어리가 내려앉는다. 엘리베이터 뒤편에 몸을 기대며 잠시 눈을 감았다. 혹 불안해하는 것일까. 태일이가 하운이에게 경계를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그러한 이유 때문인 듯싶었다. 여자와 남자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말. 나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썩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 것은 하운이를 만나고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그를 어느 다른 누구보다도 소중한 친구로 자부하고 있다. 가끔씩은 그저 ‘친구’라고 단정 짓기엔 솔직히 애매모한 점도 있다. 그 것은 우리는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중간한 게 싫었던 나는 그 선 사이에서 하운이를 친구로 밀어냈다. 그리고 나는 그 선택이 맞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태일이의 행동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태일이 뿐만 아니라 어느 남자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에 사귀었던 그 선배 역시 항상 우리 사이를 의심했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한 번도 이성으로 느낀 적이 없냐는 질문을 수 없이 받기도 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태일이 역시 하운이에게 경계를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사귀기 전에 있던 일도 있고, 더군다나 태일이는 과거의 얼룩진 상처에 ‘믿음’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추고 있던 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혹 이해할 수 있을까. 어느새 엘리베이터는 7층에 멈춰 섰다. 짧은 시간 사이에 나는 여러 생각을 떠올랐다. 하지만 더욱더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한 숨을 깊게 토하고 애써 얼굴을 밝게 하며 엘리베이터에 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틀어 하운이의 집에 다가갔다. 현관문을 열고서 거실에 들어서니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하운이가 보였다. 신발을 벗고서 거실 입구에 들어선 나는 자리에 멈춰서 잠시 하운이를 바라보았다. 하운이는 힐끔 곁눈질 하고는 시선을 돌려 묵묵히 담배를 폈다. 짙은 담배 연기가 방안에 자욱하다. 굳어있는 하운이의 얼굴을 보니 씁쓸했다. 아까 일이 그에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닐 터였다. 나는 나를 보지 않는 그를 향해 애써 웃음 지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태일이가 불안한 가봐.” “…….” “뭐, 다들 그랬잖아? 언젠가는 이해하겠지.” 그리고서 그를 향해 멈추었던 걸음을 떼려는 순간, 하운이의 낮은 음성 입안에 맴돌고 있던 흐릿한 담배 연기와 토해져 나왔다. “멈춰.” 그 말에 나는 발의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보았다. 그는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비벼 끄고서 느리게 눈동자를 움직이며 나를 보았다. 잿빛을 띠는 그의 어두운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그리고 곧이어 잠시 다물어 있던 녀석의 입술이 열렸다. “거리를 두면 되는 거야.” “…….” “간격의 차이 때문이야. 너와 나의 간격이 자신보다 가까운 것 같으니 불안한 거야. 그러니까 적당한 거리를 두면 되는 거라고. 나보다 그 녀석이 더욱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면 괜찮아 질 거야.” “응, 그렇겠지.” 하운이의 말에 난 고개를 힘없이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리고 지금 하운이와의 간격을 보았다. 씁쓸한 웃음이 얼굴에 번진다. 지금의 거리는 가슴이 욱신거릴 만큼 너무나도 멀어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한 발자국 더 다가서며 멈추었다. 그리고 웃음 지으며 씩씩하게 말했다. “방금은 너무 먼 것 같으니까.” “…….” “이 정도면 적당하지?” 하운이는 우리 사이의 간격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는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떨어트리며 바닥을 응시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왠지 쓸쓸했다. 정말 이상하게도 눈물 날 만큼.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야, 김순이!” 나의 어깨를 흔들며 크게 소리치는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창밖을 향했던 시선을 돌렸다. 대학 친구인 은경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해?” “응? 아, 아니야.” 나는 얼버무렸고, 갑작스레 갈증이 일어나 다 식은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한 나의 모습에 은경이는 손으로 턱을 괴며 수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은경이는 어느 다른 친구보다 예리한 친구였다. 그녀의 가늘어진 눈에 나는 허허 헛웃음을 내뱉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한 나의 행동이 무척 이상하다고 느껴진 그녀였지만, 그녀는 추궁하기 보단 기다리는 스타일이었기에 곧 궁금한 마음을 거두며 화제를 돌렸다. “네 어린 애인이랑은 잘 되고 있냐?” 그녀의 물음에 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내 바탕화면을 보여주었다. 사진 찍기 싫다는 강태일을 억지로 끌어들여 찍은 사진이 바탕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사진을 보고서 은경이는 웃음을 터트리며 귀엽다고 난리쳤다. 하긴 까칠이 특유의 찡그린 얼굴이 귀엽긴 하다. 그 때 막 웃던 은경이가 갑자기 손바닥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깜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은경이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행복에 겨워했다. 그녀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나 못지않게 참으로 돌발 행동을 잘하는 친구였고, 낭만주의자였다. “이 노래 너무 좋지 않냐?” “신곡이야? 처음 들어봐.” “응, 이번에 나온 노래야. 서우 이번 앨범 타이틀곡인데 내가 좋아하는 포유가 만들었다는 말씀이야!” “포유? 영어 이 For you 말하는 건가? 뭐야 이름이 이래?” “아니, 예명이야. 이름도 밝히지 않고 얼굴도 알려지지 않았어. 내가 또 신비주의자를 밝히잖아.” 그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특이하고 신기한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친구이기도 했다. “이번 서우 타이틀 곡 제목이 For you 인데 지금까지 만든 곡 중 제일 마음에 들어. 진짜 이 사람 노래 듣고 있으면 누군가에게 간절히 전하고 있는 듯해서 마음이 묘해진다니까.” 은경이는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이고서 노래에 흠뻑 취했다. 그녀의 눈이 사랑스럽게 촉촉이 빛난다. 나는 항상 노래만 들었지 작사, 작곡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이 사람이 문득 궁금해졌다. 입안에 For you를 되새기며 카페에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감미롭고도 슬픈 그 음악사이로 은경이의 물기 어린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For you.” “…….” “너를 위해.” 순간 기분이 묘해진 나는 은경이를 바라보았다. 나의 시선에 은경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때 갑자기 딩동- 문자메시지가 왔다는 신호가 들려왔다. 나는 테이블 위에 두었던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한비에게 온 문자메시지였다. 이 녀석이 갑자기 무슨 일로? 아무 생각 없이 문자 내용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내…… “아악!” 나의 비명이 카페 안을 가득 메운다. 카페에 있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 지르는 나를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은경이는 벌게진 얼굴로 나를 재빨리 앉혀 세우며 물었다. “야, 왜 그래?” “어떡해.” “응?” 나는 울먹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일이 태일이 생일이래.”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또 실패다. 지금이 벌써 네 번째 실패하는 것이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아니하고, 태일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애석하게도 아직 모르던 나는 일단 케이크를 손수 만들기로 하였다. 그런데 요리라면 자신 있다고 자부하던 내가 계속해서 연속 케이크를 실패하고 있다. 물론 케이크를 만드는 것이 처음이라고는 하나 내 실력이 이 것 밖에 되지 않았던가.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식탁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며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집 안에 들어서는 녀석의 발걸음 소리를 보아하니 최하운인 듯싶다. 이내 그는 얼굴을 들어냈다. 이 광경을 보자마자 녀석의 양미간이 찡그려진다. “밀가루 뒤집어쓰고 뭐하냐.” “케이크 만들고 있었어.” “그 놈 생일이라도 되냐?” 그의 물음에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운이는 망가진 케이크 물끄러미 바라보다 기다란 손가락에 하얀 생크림을 묻히고서 살짝 혀로 핥았다. 녀석은 표정 변화 없이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는 듯싶다가 갑자기 생크림을 더욱 크게 찍어내더니 내 볼에 묻혔다.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장난 걸어오는 그의 행동에 나는 발끈하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찡그려지던 나의 얼굴은 곧바로 힘없이 풀어졌다. 그는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곧이어 그의 입술이 열리며 낮게 가라앉음 음성이 내뱉어졌다. “요새 너 너무 애쓰는 것 같다.” “어?” “상처 받기도, 상처 주기도 싫어서 모든 틈을 막는 거.” “…….” “또 그래.” 그의 말에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무언가 말하려던 나는 목이 메어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 주먹을 쥐고서 마른 침을 삼키며 힘겹게 녀석을 향해 말을 토했다. “왜……” “…….”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의 물음에 최하운은 깊어진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녀석의 옷깃을 붙잡으며 물기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하운이는 아무 말 없이 몸을 숙여 식탁위에 올려 있던 휴지를 뜯어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마치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감정들로 얼룩진 내 마음을 닦아주듯 말이다. 이내 내 얼굴에 묻은 얼룩들을 깨끗이 닦아낸 최하운은 몸을 느리게 피며 말했다. “불안정해보여서.” 순간 가슴이 ‘쿵’하고 울렸다. 녀석의 옷을 쥐고 있던 나의 손이 힘없이 풀리며 툭 떨어졌다. “뭐, 아니면 헛소리로 넘기고.” 그리고는 최하운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떨던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 녀석을 뒤쫓아 가려 했다. 부엌에서 나오니 최하운은 거실의 테이블에 두었던 서우의 이번 앨범 CD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레코드점이 눈에 띄었고, 마치 홀린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 산 CD였다. 그는 CD에서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너 이거 들어 봤냐?” “응? 어, 친구가 추천해줬는데 좋더라고. 그래서 오는 길에 샀어.” “나는 이 노래 만든 사람 맘에 안 들어.” “왜?” 테이블에 위에 CD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순간 아래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꼴사나워서.”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야, 꼭 내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며 묻자, 한비는 당연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나의 머리를 푹 밀어 넣으며 상자뚜껑을 닫아버렸다. 그러자 상자 속은 깜깜해졌다. 나는 짧은 한 숨을 토해내며 밀폐된 이 좁은 공간에 케이크를 들고서 쭈그려 앉았다. 오늘은 강태일의 생일이었고, 어제 우열곡절 끝에 케이크 하나를 완성했다. 하지만 명색이 남자친구인데 케이크 하나로 생일을 축하하기는 너무나 허술했다. 그렇게 또 절망의 늪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주한비가 발 벗고 이를 도와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늦게야 이 사실을 내게 알려준 건 주한비의 못 말리는 심술이었고, 내심 좌절하는 나를 보고 녀석은 미안했나 보다. 그리하여 녀석은 자신만 믿으라며 이벤트 계획을 세웠다. 허나 역시 주한비의 머리에서 나온 이벤트라 그런지 참으로 유치했다. 바로. 코스프레에서나 입는 짧은 치마의 세일러복을 입힌 채 케이크와 함께 나를 커다란 종이 상자 속에 집어넣은 것이다. (주한비는 내가 탐탁지 않아 할 때마다 남자들이란 이런 세일러복에 약하다며 거듭 강조 했다.) 그리고는 상자 뚜껑을 열면 이렇게 말하라는 것이다. ‘내가 오늘 너의 생일 선물이야.’ 우웩. 저런 낯부끄러운 말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계속 다짐을 받아내는 한비에게는 얼렁뚱땅 하겠다고는 말했으나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한다 해도 나는 100% 확신한다. 강태일이 바로 상자 뚜껑을 덮어 버리고 강물에 던져버릴 것임을. 이것이 과연 태일이가 좋아할 만한 일인가 무척 의심스러웠지만, 어찌하였든 그저 케이크 달랑 하나 들고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기보단 이게 나을 듯싶어 따르기로 하였다. 그렇게 상자 속에서 두근두근 반 근심걱정 반 마음으로 웅크리고 있을 때 딸랑- 카페의 종소리가 들렸다. 오늘 강태일의 파티를 위해 주한비가 자신의 삼촌 카페를 부탁하여 빌렸다. 물론 데뷔하면 카페를 홍보해준다는 조건 하에서 말이다. 시끌벅적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사이로 간간히 강태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그의 말은 ‘이 딴 걸 왜 준비했냐.’는 식의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한비의 말론 강태일은 생일 파티 같은 걸 싫어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은 내가 있는 만큼 녀석도 은근히 좋아할 거라 확신했다. 그 때 쿵 상자를 차는 발길질의 신호가 들려왔다. 그것은 사전에 미리 맞추었던 케이크에 불을 붙이라는 신호였다. 나는 웅크린 불편한 자세로 성냥개비에 불을 붙여 초가 타오르도록 불길을 옮겼다. 성냥개비 하나가 금방 꺼지고, 또 다시 밖의 상황을 눈치 보며 성냥개비에 불을 붙이는 데 그만 뚝 상자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이 상자는 불길이 금세 붙을 수 있는 종이상자였다. 그 생각에 나는 소리 지르며 상자를 뚫고 튀어나왔다. 모두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불, 불!” 나는 애타는 목소리로 부르짖었고, 상자가 불길에 타오르는 것을 보자 강태일이 재빨리 뛰어와 나를 상자 안에서 들어올렸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우왕좌왕하다 물을 가져와 불길에 일그러져 가는 상자에 물을 끼얹었다. 허무한 연기를 피어오르며 상자의 불길은 사라졌고, 분위기는 급 썰렁해졌다. 그리고 바닥에 털썩 엎드리며 OTL 자세를 취하는 주한비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 위로 이 세 글자가 두둥실 떠올랐다. ‘망했다’ 고개를 푹 숙이며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니 강태일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에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생일 축하해.” “뭐야.” “응?” “이 이상한 옷 뭐야.” 강태일은 내가 입고 있는 세일러복을 보며 물었고, 나는 한비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이 한비에게 머무른 것을 재빨리 알아 챈 강태일은 한비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너 이 새끼, 이건 네 취향이잖아!” “왜? 간호사복으로 할 걸 그랬나?” “너 죽고 싶냐.”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한비를 향해 굳은 얼굴로 강태일이 나지막이 말했고, 한비는 바로 꼬리를 내리며 딴청을 피웠다. 강태일은 욕지거리를 내뱉다 한 숨과 함께 혼자 뭐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며 녀석에게 되물었다. “응?” “너무 짧다고!”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눈을 깜박이며 녀석을 바라보다 이내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의 웃음에 상자를 치우며 빠르게 다시 카페를 재정리하고 있던 아이들 역시 웃었다. 우리들의 웃음에 그는 얼굴을 붉히며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 한비가가 담요 하나를 강태일의 얼굴에 휙 던졌다. 그리고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놀렸다. “뭐, 꼬선생 다리 그리 예쁘지도 않고만.” “그럼 눈 돌려.” 능글맞게 웃는 한비를 노려보며 태일이는 담요를 내 다소 민망한 하체에 둘러주었다. 마치 꽁꽁 감싸듯 말이다. 역시 주한비 따위는 믿지 말아야 했다. 항상 믿지 않겠다며 속아오는 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갑자기 내 정체성이 사뭇 의심스러워 진다. 그나저나 오늘 이러고 다녀야 되는 건가. 그렇게 담요로 내 다리를 보이지 않도록 가리고서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의 웃음에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흩뜨려주었다. 이렇게 귀여운데,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그런데 뭘까. 뭘까, 태일아. 요새 들어 너를 보면 왜……. “자, 다시 생일파티를 시작하자고! 꼬선생이 만든 케이크는 망가져 버렸지만 이럴 때 쓰라는 초코파이를 대신해서!” 한비가 손바닥을 짝짝 치며 아이들의 분산된 시선을 한데 모았다. 테이블 한 쪽 구석에 어제 애써 만든 내 케이크가 뭉개져 있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하여 탑처럼 여러 겹 쌓인 급 만들어낸 초코파이케이크가 테이블 중앙에 놓여있다. 아이들이 초코파이 케이크에 초를 꽂으며 불을 붙이고 있을 때 강태일이 내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하지 마.” “어?” “그 걸로 하지 말라고.” 아이들이 녀석의 말에 동작을 멈추며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강태일은 테이블 구석에 있는 내 망가진 케이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걸로 해.” Chapter. 29 물음표 찌그러진 케이크 위에 초가 엉성하게 꽂힌 채 불빛을 등지고 있다. 피사의 사탑처럼 서서히 기울어지는 초는 금방이라도 툭 쓰러질 것만 같았다. 박수를 치며 신나게 부르고 있던 아이들의 생일 축하 송은 위험 경보에 더욱 빨라졌다. 이내 급하게 노래를 마무리 짓고선, 아이들은 손을 뻗어 허공을 향해 폭죽을 ‘팡’ 터트렸다. 그 소리에 강태일은 순간 깜짝 놀랐고, 곧이어 아이들의 생일 축하한다는 여러 목소리가 한데 뒤엉켰다. “생일 축하해!” “어? 쓰러진다! 빨리 불어! 빨리!” 아이들의 당황 어린 재촉에 강태일은 재빨리 후- 입안에 바람을 가득 실어 뱉어냈다. 이내 불은 뽀얀 연기를 피어오르며 꺼졌고, 그제야 힘겹게 버티고 있던 초는 옆으로 툭 쓰러졌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다시 한 번 저마다 태일이에게 생일 축하 한다는 말을 전했다. 이러한 파티는 아직 낯설어 멋쩍은 지 태일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녀석의 볼이 분홍빛으로 발그레해진 것을 보니, 겉으로 표현은 안하고 있으나 꽤 즐겁고 기쁜 듯 듯싶었다. 주한비가 일어서 박수를 짝짝- 크게 치며 아이들을 주목시켰다. 그러자 다소 시끌벅적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한 순간에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끼가 많은 주한비는 가수뿐만 아니라 데뷔한다면 MC로써도 재능을 발휘할 듯싶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숟가락을 마이크 삼아 입술 아래에 대고서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우리가 고대하던 생일빵을 하…….” 생일빵을 하자던 주한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집어 삼켜졌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는 강태일 때문이었다. 나 역시 옆에서 거들어 주한비를 가자미눈으로 노려보았다. 생일빵이라는 이유로 강태일을 얻어맞게 할 순 없었다. 더군다나 날로 잔인해진다는 ‘생일빵’ 문화를 나는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분명 이것은 이를 통해 개인적으로 쌓여있던 분을 토하려는 주한비의 농간이리라. 주한비는 아쉬움의 입맛을 다시며 다시 머리를 굴렸다. 이내 또 무언가 생각났는지 밝아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음, 그러면 오늘 주인공인 태일이의 생일 주를 맛있게 타…….” 반듯한 이마에 짙게 주름이 잡히며 더욱 사나워지는 강태일의 눈. 그의 눈빛에 주한비는 순간 움찔했고, 목소리는 더욱 모기만 해졌다. “그러면 노래라도…….” “싫어.” 강태일은 사전에 딱 잘라 버리려는 듯 주한비에게 매정한 두 글자를 내뱉었다. 오늘 파티의 주인공인 강태일이 모든 걸 거부해 버리자 한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쳇, 뭐 그렇다면 이 몸이 나설 수밖에 없는 건가.” 그리고서 주한비는 눈을 번뜩이더니 곧바로 노래방 기계에 통통 뛰어갔다. 녀석은 미리 외워두고 있던 번호를 떠올리며 꾹꾹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서 마지막으로 시작을 힘껏 꾹 눌렀다. 그러자 남녀불문, 나이불문하고 모든 국민을 열광시킨 익숙한 한 음악이 카페 안을 가득 메운다. 요즘 한 창 유행하는 인기곡이 흘러나오자 아이들 역시 덩달아 흥분하며 자리에 벌떡 일어섰다. 한비가 노래에 맞춰 깜찍하게 요새 히트하고 있는 곡의 춤을 완벽히 재연했다. 한두 명 따라 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아이들은 줄을 지어 춤을 추고 있었다. 마치 한 공연을 보는 듯 했다. 손으로 턱을 괴고서 아이들의 모습에 웃음 짓고 있을 때, 갑자기 태일이가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나는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일이는 우물쭈물 무언가를 말하려다 이내 입술을 다물며 고개를 휙 돌렸다. 녀석의 볼이 불그스름해졌다 . 눈을 끔벅이며 의아한 얼굴로 태일이를 바라보다 픽 웃었다. 하여간 성격은 까칠한 주제에 어울리지 않게 쑥스러움은 많다니깐.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강태일에게서 날뛰는 아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갑작스레 깜박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머릿속에 툭 튀어 올랐다. 도혁이! 강태일의 파티 준비로 정신이 없어서 밥을 안 해놓고 말았다. 녀석은 겨우 라면 하나 끓일 줄 알 뿐, 밥을 할 줄 모르는 녀석이었다. 매일 빈둥빈둥 노는 녀석이 괘씸하여 알아서 해먹으라고 밥을 하지 않았던 적이 있는데, 그 날 김도혁은 집을 홀라당 태워 먹을 뻔했다. 그 이후로 나는 녀석에게 일체 밥을 하지 못하게 했다. 어찌하였든 밥도 하지 않고 강태일의 생일파티에서 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녀석은 아마 단단히 토라져 버릴 것이다. 한 번 삐치면 상당히 오래가는 녀석이었다. 더군다나 강태일이 이유라면 그 기간은 더욱 오래갈 것이다. 이것은 여간 피곤한 일이었다. 그 때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것은 바로 나의 럭키 하운이! 하운이에게 대충 이유를 둘러대고 도혁이랑 같이 밥 먹으라고 부탁을 해야겠다. 그 생각을 끝마친 나는 자리에 벌떡 일어섰다. 내가 일어서자 강태일이 곧바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나 잠깐 화장실에 다녀올 게.” 그는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내 목소리가 안 들렸던 듯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는 몸을 숙여 녀석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온다고.” 나의 말에 녀석은 손가락으로 오케이 표시를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싱긋 한 번 웃어보이곤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에 오자마자 나는 최하운을 향해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을 귓가에 대니 뚜르르- 신호음 가는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그런데 신호음이 여러 차례 가도 녀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바쁜가? 아니면 자고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귓가에서 핸드폰을 떼어내려는 찰 나 신호음이 뚝- 끊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재빨리 다시 핸드폰을 귓가에 붙이며 소리치듯 그를 불렀다. [운!] [……어.] 뒤늦게 대답하는 녀석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푹 가라앉아 있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지금 이 목소리는 하운이가 아플 때의 목소리였다. 나는 재빨리 바짝 핸드폰을 입을 가까이에 대며 말을 이었다. [운, 너 아파?] [아, 아니야.] [아니긴! 너 아프지! 어디가 아픈데?] [아…….] 언제나 그렇듯 ‘아니’라고 고집 있게 말하려던 하운이의 말이 일그러지며 숨이 거칠게 토해져 나왔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아픈 듯싶었다. 온 몸이 불안함에 부들부들 떨렸다. 안 되겠다. 하운이에게 가봐야겠다. [기다려, 곧 갈게!] 녀석에게 곧 간다고 소리친 후, 핸드폰을 끊고서 곧장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 벽에 기대고 서 있는 태일이가 보였다. 태일이는 몸을 일으키고서 활짝 웃으며 내 앞에 성큼 다가왔다. “저기 있잖……” “태일아, 미안. 나 먼저 가볼게.” “어? 왜?” 무언가를 말하려던 태일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보았다. 그런데 이내 태일이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서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태일에게 말했다. “그게……” “…….” “하운이가 아픈 가봐.” “…….” “미안, 나 먼저 가봐야겠다.” 곧바로 바닥에 붙어 있던 무거운 발을 떼며 강태일을 지나쳐 가려는 순간, 내 손목이 덥석 붙잡혀졌다. 나의 손목을 조여 오는 강태일의 커다란 손에는 힘이 가득 실려 있었다. 아팠다. 강태일은 굳은 얼굴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녀석의 목소리는 시리도록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지마.” “가야 돼.” “가지 말라고.” 더욱 힘주어 말하자 손목에는 으스러질 정도의 아픔이 몰려왔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 인기 많잖아! 그런데 왜 네가 가야되는데. 너 밖에 없어? 너 말곤 아무도 없냐고!” 서슬 퍼런 강태일의 음성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화가 난 얼굴로 거친 숨을 토하는 강태일의 얼굴이 물빛에 흔들거린다. 나는 도저히 바라볼 수 없어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입을 여는데 순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꿈틀거리는 울음을 삼키며 힘겹게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응, 아무도 없어.” “…….” “하운이는 항상……” “…….” “아무도 없었어.” 강하게 조이고 있던 그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이내 그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강태일은 입술을 꽉 깨물며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주먹을 꽉 쥐는 태일이의 몸은 무너질 것처럼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붉게 물든 손목을 보았다. 녀석의 간절한 마음만큼이나 선명했다. 가슴이 으스러질 것 같은 안타까움을 짓밟으며 태일이를 향해 떨리는 입술을 뗐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말과 이 선택밖에 할 수 없었다. “미안해.” “…….” “미안해, 태일아.”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을 톡 떨어뜨리며 녀석을 스쳐 지나갔다. 눈물에 시야가 흐려져 간다. 느리게 옮기던 발걸음에 조금씩 속력이 붙어가고, 이내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옮기다 달렸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곧바로 택시를 타고 단숨에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나는 내리자마자 시퍼런 만원 한 장을 기사 아저씨께 건네주고 곧바로 내렸다. 거스름돈을 가져가라는 택시 아저씨의 우렁찬 외침이 들렸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아파트 현관에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마자 재빨리 손을 뻗어 내림버튼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15층에 머물러 있었다. 한 층 한 층 내려오는 그 속도가 너무나 느리게만 느껴진 나는 결국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왜 이리 조급한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두 계단씩 껑충껑충 뛰어올라 빠른 속도로 7층에 도착했다. 거친 숨이 턱 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숨 고를 틈조차 갖지 않고 성큼성큼 최하운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재빨리 문을 열고서 현관으로 들어섰다. 대충 신발을 벗어던지며 집안에 들어서고, 눈물을 삼키며 최하운이 있는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땀과 눈물에 범벅된 얼굴을 대충 훑어내고서 손을 뻗어 방문을 벌컥 열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방안에 가득 차있던 열기가 온 몸을 덮어 왔다. 그리고 하얀 침대 위에 엎드려 끙끙- 앓고 있는 하운이가 보였다. 걸음을 옮겨 하운이에게 다가갔다. 녀석의 창백해진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고, 붉은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 마른 입술 사이론 거친 신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을 꾹 삼키며 입을 열었다. “운 괜찮아?” 나의 목소리에 하운이는 꾹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떴다. 한 참 동안 나를 보던 하운이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뭐 하러 왔어.” “뭐 하러 오긴! 멍청이 구해주러 왔지.” “하아. 그 이상한 옷차림은 또 뭐야.” “음, 그냥 간호 서비스라고 생각해 둬.” 나의 말에 최하운은 피식 웃었다. 허나 곧바로 얼굴은 아픔에 일그러졌다. 나는 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넘겨주며 내 이마를 가져가 녀석의 이마에 맞댔다. 곧바로 내 이마위로 뜨거운 감각이 옮겨져 왔다. 불덩이였다. 이마에 느껴지는 열은 엄청났다. 난 놀란 얼굴로 하운이를 바라보았다. 몸살감기 인가? 재빨리 녀석의 손목을 붙들며 말했다. “병원 가자.” “안 가.” “그럼 약이라도 먹자.” “안 먹어.” “그럼 어쩌려고!” 순간 울분이 터진 나는 녀석에게 소리쳤다. 최하운은 항상 그랬다. 아파도 안 아픈 척. 내가 조금이라도 걱정스런 얼굴 지으면 아무렇지 않은 척. 항상 그런 척. 그러면서 내가 작은 감기라도 걸리거나 넘어져 조금이라도 다치면 제일 호들갑 떤다. ……진짜 웃기지도 않아. 내가 씩씩 거리며 노려보자 최하운은 이마에 손을 얹으며 힘겹게 말했다. “소리 지르지 마. 머리 울려.”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 손으로 훔치고, 훔쳐보지만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멈추지 못한 나였다. 터져버렸다. 얼굴을 찡그리고선 가늘게 눈을 뜨며 나를 빤히 보던 최하운은 놀란 얼굴로 내게 물었다. “야, 너 왜 울어.” “아, 안 울어. 아파서 이게 땀인지 눈물인지도 구분도 못하냐.” “…….” “기다려. 물수건 가져 올게.” 몸을 돌려 방에서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을 토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모르겠다, 이 눈물의 의미를. 찌릿찌릿 아파오는 이 마음이 말하는 소리를.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어느새 검 푸른빛의 어스름한 새벽이 되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오랜만에 새벽하늘을 보는 듯하다. 또 다른 내일을 낳기 위해 잉태하고 있는 푸르른 새벽하늘은 따뜻하면서도 차갑게 보여 졌다. 잠시 동안 창밖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하운이를 보았다. 하운이는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의자에 일어서며 이마를 녀석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아까보다 열이 많이 가라 앉아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 숨을 내뱉으며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빤히 하운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꽤 오랜만인 듯싶다. 강태일과 사귀고 난 후 녀석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건. 천천히 손을 하운이의 손 위로 가져갔다. 평소 차가운 하운이의 손은 미열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커다란 손을 꽉 잡았다. 매일 혼자 숨죽여 울던 나에게 아무 말 없이 내밀어 주었던 손. 참고 참아 더욱 차가웠던 내 시린 눈물을 매일 아무렇지 않게 닦아주던 손. 우리의 인연이 시작 되는 순간 하운이는 항상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이 손을 놓고 다른 손을 잡고 있었다. 나는 잠든 하운이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하운아, 너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나?” “…….” “만약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너랑 물에 빠진다면 정말 이상하게도 나는 너를 구할 것 같다는 그 말.” “…….” “그게…… 사실인 가봐.” 그리고 그 때 너는 이렇게 말했었지. ‘필요 없어. 옆에서 매일 징징거리며 우는 모습 볼 바에야 죽는 게 낫다.’ 죽는 게 낫다는 그 말에 내가 울려고 하자 너는 또 이렇게 말했지. ‘걱정 마. 나 수영 잘 하잖아. 나는 내가 지켜.’ ‘…….’ ‘그러니까 너는 네 것을 지켜.’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것은 그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 뿐이었다. 하운이는 자신을 지킬 줄 모르는 녀석이었다. 어느 날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다 문득 알아 낸 게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한 박자 뒤늦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일에서 한 박자 쉬고서 움직였다. 마치 자신의 의지대로, 뜻대로 움직이기 보단 누군가를 따르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 있는 듯. 그 때 갑자기 불러일으킨 회상위로 강태일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리고 모든 게 얽히고 얽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필사적으로 지키고 지키던 선이 모호해지면서 중심을 잃어버리고 내 마음은 엉망이 되었다. 온통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하다. 어렵다. 읽을 수 없는 고대 문자를 읽는 것도 아닌데, 내 마음을 전혀 모르겠다. 자신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새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그 뒤죽박죽인 마음속에서 이 거 한 가지 만은 건질 수 있었다. 나는 죽을 때 까지 최하운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것.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것. 녀석의 손위로 얼굴을 묻었다. 멈추었던 눈물이 또 다시 툭툭 쏟아져 나왔다. 하운이의 손을 꼭 붙들고서 눈물에 푹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떡하면 좋지.” “…….” “태일이한테 상처 주고 말았어.” “…….” “그러면 안 되는데……. 가지 말라던 그 애의 손을 놓고 와버렸어.” 잠시 목에 메어와 말이 막혀졌다. 서글픈 울음을 토해내고 있을 때 먹먹한 가슴 사이로 최하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순이 잘 들어.” 자고 있지 않았나?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려는 찰나 하운이가 먼저 재빨리 말했다. “고개 들지 말고.” 그의 말에 나는 움직임을 멈추며, 그대로 녀석의 손위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있었다. 하운이는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얼마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내가 마치 네 생명의 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나 본데.” “…….” “나는 너에게 위로의 말 몇 마디 건넨 것 뿐 결정적으로 아무것도 한 게 없어. 그저 네 힘으로 이겨낸 거야. 벗어나고픈 네 의지가 강했기에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변화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그러니까 네가 일어설 수 있던 건 나 때문이 아니라고.” “…….” “그러니까 나에게 일일이 휘둘릴 필요 없고, 나 때문에 되돌아 올 필요 없어.” “…….” “넌 그냥 앞으로 가면 돼. 그 길이 행복이라면 나로 인해 주저 하지 마.” 하운이의 다른 한 손이 내 머리 위로 올려졌다. 그의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고도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어루만진다. 그리고 그 부드러운 손길 사이로 슬픈 음성이 들려온다. “넌 누구보다도……” “…….”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Chapter. 30 슬픈 거짓말 그 후 무료하게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태일이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또한 나 역시 그에게 쉽사리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어떤 행동을 취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이미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상처를 주고, 그 상처 받은 슬픈 눈동자를 보는 건 내게서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어느 누구도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그 날로부터 지금껏 나는 항상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 작은 상처를 위해 그에게 더 큰 상처를 남겨줄 순 없었다. 계속 그를 붙잡고 있는 건 강태일에게서나 나에게서나 행복의 길이 아니었다. 후에 불행으로 빠질 시발점일 뿐이었다. 거짓 된 마음은 진실로 가리어 질 수 없다. 한 숨을 깊게 뱉으며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계속 이 상태로 방치했다간 그대로 멀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원치 않았다. 그 것은 강태일과의 인연과 만나온 시간들이 물거품 되는 일이니까. 많은 매력을 가진 그에게 한 눈에 반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사귀는 동안 첫사랑을 하는 소녀처럼 몹시 설레고 두근거렸다. 하지만 ‘사랑’은 아니었다. 며칠 동안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알아낸 내 마음의 진실이었다. ‘좋아하다’와 ‘사랑하다’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랑’은 아니었다.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강태일이 내게 ‘無’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소중한 사람임은 변함없다. 그러므로 그 소중한 인연을 지켜야 한다. 생각을 끝마친 나는 무릎 사이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옆에 두었던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두렵다고 도망칠 순 없다. 그건 그저 나를 보호하고픈 이기적인 행동일 뿐이다. 심호흡을 여러 차례 크게 내쉬고서 힘을 내어 그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갑자기 딩동- 문자가 왔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문자에 흠칫 놀라 그만 핸드폰을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재빨리 손을 뻗어 다시 주워 올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열어 누구에게 온 것인지 확인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문자메시지는 강태일에게서 온 것이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거린다. [뭐해] 문자의 내용을 확인한 나는 재빨리 문자를 찍어 답장을 보냈다. [집에 있어] [만나자. 서울남부터미널로 와.] 빠르게 답장이 온 문자의 내용에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 터미널? 갑자기 웬 터미널? 순간 의구심이 들었지만, 이내 털어버리고 나는 빠르게 준비했다. 그를 오랜만에 만난다는 생각에 조금 흥분이 되었다. 아마 태일이도 짧으면 짧고 길면 길었을 일주일의 시간동안 많은 걸 생각했으리라 생각한다. 서로에게 충분한 시간이었다. 각자 끝마친 생각을 가지고 우리는 만나려 한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만나기로 한 터미널에 도착하고, 강태일이 있다는 근처로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주말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강태일을 찾기 위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렇게 한 참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한 쪽 구석에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비스듬히 서있는 강태일이 보였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 채 녀석을 살펴보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왠지 모르게 무척 어른스러워 보였다.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강태일이 내가 서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심장이 쿵- 울렸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빠른 속도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늦었어!” 그리고는 녀석은 빠른 걸음으로 막무가내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강하게 내 손을 쥐고 있는 녀석의 손에 얼떨결에 이끌려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자리 위치를 확인한 그는 창가 쪽의 좌석에 나를 밀어 넣으며 앉게 했다. 그리고 나의 옆 좌석에 털썩 앉았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버스 안을 두리번거리다 그에게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 어디 가는 거야?” “강원도.” 강태일은 무심한 말투로 툭 말했고, 나는 그의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강태일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강태일은 갑자기 피식 웃음 지었다. 갑작스런 웃음에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녀석은 반달로 휘어진 눈으로 나를 보며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누가 너 잡아먹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걱정 마. 꼬마돼지 따위는 하나도 안 섹시해서 안 잡아먹어.” 그 말에 나는 볼을 복어처럼 크게 부풀리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빵빵해진 내 볼을 주먹으로 콩- 터트리며 말했다. “보여 줄 사람 있어.” “보여 줄 사람?” “응, 아 나 졸리다. 요새 잠 못 잤더니.” 강태일은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크게 하더니, 이내 내 어깨에 얼굴을 툭 기댔다. 그리고는 곧게 뻗은 가지런한 속눈썹을 보이며 눈을 감았다. 그런 녀석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만히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강태일이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는 웅얼거리듯 말했다. “잘 동안 놓지 마.”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강원도의 한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려서 지역 내의 또 다른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어느 한산한 시골이었다. 주변에는 싱그러운 초록빛을 띄는 들판들이 가득 메워 있었다. 도시와는 다른 신선한 맑은 공기에 답답했던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엄마가 지내시고 있는 시골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내게는 낯선 곳이기에 신기하게 다가왔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자연에 둘러싸인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강태일이 말없이 나를 끌고 걺을 옮기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손을 잡았던 그 뒤로 녀석은 내내 단 한 순간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손에 땀이 가득 차올라도 말이다. 강태일은 조금 앞서서 걸음을 옮겼고, 나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살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황금빛 눈부신 햇살은 뜨겁도록 강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걷고, 또 걸어 그와 함께 도착한 곳은 이름 모를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곳이었고, 그 곳엔 묘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맨 가운데 작은 언덕으로 덩그러니 놓여 진 하나의 묘는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천천히 묘에서 시선을 돌리며 강태일을 바라보았다. 강태일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으로 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빠.” “…….” “보여주고 싶었어.” 녀석은 눈을 휘며 웃음 지었다. 그 웃음이 조금은 슬프게 느껴졌다. 강태일은 나를 이끌고 묘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그제야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으며 들고 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국화꽃과 연양갱 세 개를 꺼내더니 묘 앞에 가지런히 두었다. 아마 연양갱은 강태일의 아버지께서 생전에 가장 좋아하시던 것일 것이다. 아까부터 가방을 조심스레 다루었던 이유가 아버지에게 드릴 선물이었기 때문이구나.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며 코끝이 시큰거렸다. 강태일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 속에서 나의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늦게 와서 미안해.” 강태일의 무성히 자란 잡초를 뜯으며 차가운 흙속에서 잠든 아버지를 향해 씩씩한 목소리로 안부를 건넸다.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 또한 그의 옆에 앉아 답답하게 묘 주위를 뒤덮고 있는 잡초를 뽑았다. 그렇게 우리는 한 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잡초를 뽑았다. 햇살의 열기를 실은 바람이 뜨겁다. 어느 정도 잡초가 다 제거 되었을 때, 강태일이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훑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도 따라 녀석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여름이 되어서 그런지 무척 더웠다. 티셔츠가 땀에 절어 몸에 달라붙었다. 그 때 녀석이 생수 한 병을 내게 내밀었고, 나는 싱긋 웃으며 받아들었다. 그리고 갈증이 일어나는 목을 잠재우기 위해 벌컥벌컥 생수를 들이켰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생수를 다시 그에게 건네주고서, 손을 뒤로 뻗으며 바닥에 지탱한 채 하늘을 보았다. 그렇게 한 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녀석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 오늘 아빠한테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고, 할 말 있어서 왔어.” 하늘을 향했던 고개를 내리고, 몸을 반듯이 일으켜 세우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강태일은 긴 손가락으로 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내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 그 것이 무얼 의미하는 지 깨달은 나는 가슴이 욱신거렸다. 눈을 내리깐 채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는 강태일을 도저히 바라볼 수 없던 나는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오늘 어떠한 마음으로 너를 보러 온 것이지 알아?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강태일은 자신의 아버지께 계속해서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의 음성은 조금씩 그리움에 젖어가고 있었다. “아빠 혹시 나 지켜보면서 알고 있었어? 나는 최근에 깨달았어. 내가 아직도 어린아이일 뿐이 란걸. 아빠하고 헤어졌던 그 뒤로 나는 전혀 자라지 않았어. 아빠의 슬픔을 등지기 위해서, 아빠의 기억을 잊지 하지 않기 위해서 열 살 그 때로부터 줄곧 나는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어. 아빠라는 틀 속에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열 살의 강태일이 그대로 봉인 돼 버렸던 거야.” 강태일의 목소리가 점차 목까지 차오르는 슬픔에 떨린다.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린다. “아빠는 지금 내 옆에 없는데. 내가 나이가 먹으며 백발이 되더라도 절대 돌아오지 않는데. 바보같이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 “그래서 나 이제 아빠의 그리움 속에서 벗어나 멋진 어른이 될 거야. 모든 걸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진 어른. 그런 어른이 될 거야.” “…….” “기대해도 좋아. 이제는 자신 있거든. 왜냐하면 열쇠를 찾았으니까.” 그리고서 강태일은 내 손목을 잡았다. 내 손목을 두르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잔뜩 실려 있다. 강태일은 줄곧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동자가 햇살의 금빛에 드리워져 황갈색으로 빛났다. 이내 가볍게 웃음 짓는 녀석의 눈가에서 투명한 무언가 반짝거렸다. 그리고 잠시 다물어있던 태일이의 분홍빛 입술이 열리며 그 반짝임이 묻은 음성이 흘러나온다. “이 사람이 풀려날 수 있도록 해줬어.” 그리고 강태일은 잡았던 나의 손을 스르르 다시 놓았다. 서서히 힘이 풀리는 녀석의 손에서 떨어져나온 내 손목 뒤로 씩씩하지만 슬픔이 깃든 목소리가 울린다. “봉인해제.” 그는 고개를 돌리고서 얼굴을 푹 숙인 채 잠시 말문을 닫았다. 침묵으로 우는 것일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르른 하늘이 투명한 물빛에 일그러진다. 눈을 질끈 감았다. 또르르 살결위로 굴러 떨어지는 눈물방울의 발걸음이 들린다. 그 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슴으로 주문을 걸어본다. 부디 고독했던 슬픔이란 감옥 속에서 풀려나기를. ‘봉인해제’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다시 우리의 일상 속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우리는 걸어왔던 길은 반대로 밟았다. 그리고 도로의 모퉁이에 녹이 슨 버스 푯말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내내 강태일은 아무 말도 없었고, 오면서 계속 잡고 있던 내 손을 잡지 않았다. 나 역시 그러할 수 없었다. 그저 나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녀석의 옆에 서있을 뿐이다. 얼마 후 터미널로 갈 지역 내의 파란 버스가 왔다. 버스는 우리 앞에 끼익 멈춰 세워지고 이내 반기듯 승강문이 활짝 열렸다. 강태일은 먼저 올라타라고 나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먼저 버스에 올라탔고, 잇따라 강태일이 올라탔다. “먼저 가서 앉아 있어.” 버스비를 지불하기 위해 지갑을 꺼내며 말하는 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맨 뒷좌석에 올라앉자마자 버스는 곧바로 출발했다. 그런데 강태일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깜짝 놀라며 뒤 돌아 버스의 창 너머를 보았다. 버스를 타지 않은 강태일이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 보였다. 녀석의 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그 때 핸드폰이 울부짖듯 울렸다. 발신은 [까칠이♡]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집어삼키며 핸드폰을 받았다.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핸드폰 너머로 잠시 아무 말 없던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멀어져가는 그의 목소리였다. [나 일주일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 그리고 그 끝에 마음을 정리했어.] […….] [김순이는 틀렸어. 김순이는 내 운명의 상대가 아니었고, 내게서 ‘사랑’도 아니었어.] […….] [모두들 나를 포기하려고 했을 때, 김순이는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았어. 그 모습을 보고 위태로웠던 나는 김순이에게 의지하고 싶었고, 또한 헤매고 있던 암흑 속에서 해답을 찾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라. 그리고 나는 결국 해답을 찾았지. 또한 그 해답을 찾은 순간 깨달았어.] 잠시 그는 뜸을 들였다. 이내 그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마저 말했다. [너는 내 여자는 될 수 없다는 걸.] […….] [미안해, 연인은 무리인 것 같아. 우리……] […….] [여기서 끝내자.] 녀석의 목소리 끝이 갈라진다. 목이 메어 오던 것인지 잠시 그는 아무 말 없었다.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안간힘으로 눈물을 참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눈물을 억지로 집어삼키는 소리를. 끅끅 흘러나오는 울음소리에 입을 틀어막았다. 마지막을 고하는 강태일의 음성이 천천히 가슴에 파고든다. [잘 가, 김순이.] 툭- 전화는 끊겼다. 뚜뚜-뚜-마지막을 알리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운다. 이내 나는 크게 울음을 터트리며 꺽꺽 울었다.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지금 내게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녀석은 거짓말 자체를 못하는 순수한 아이였다. 꿈을 가진 녀석의 목소리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말은 헤어지자고 말하고 있지만 충분히 진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별을 고하는 녀석의 목소리에는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 애처롭게 말하는 또 다른 목소리가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강태일이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슬픈 거짓말이었다. 상처주기를 무서워하는 겁쟁이 김순이를 대신 자청하여. 그리고 바보에 나쁜 김순이는 끝내 버스에서 내리지 못하고 그렇게 그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게 내 선택이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어느덧 해가 기울고 석양위로 어둑어둑한 밤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뜨거웠던 한 낮의 열기는 어두운 밤이 삼킨 듯 공기가 선선해졌다. 그러나 눈물에 젖어선지 몸에 한기가 옅게 서렸다. 오늘의 차가운 밤은 수묵처럼 계속 흐려진다. 버스를 타면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내내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소낙비처럼 거칠게 쏟아지던 눈물줄기가 지금은 이슬비처럼 옅어졌지만 말이다. 눈물 한 방울. 슬픈 한 걸음. 눈물 두 방울. 슬픈 두 걸음. 뚝뚝 떨어지는 눈물과 맞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이 희뿌연 안개가 드리워진 것처럼 멍했다. 어느새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고, 하운이의 집과 내 집이 위치한 2동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그러다 아무 생각 없이 옮기던 나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세워졌다. 그것은 아파트 현관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하운이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운이는 뿌연 담배연기를 깊게 토해내며 무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냈다. 하지만 하운이의 얼굴을 보자 또 다시 마음속엔 폭풍이 휘몰아쳤다. 이내 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콧물을 들이키며 훌쩍 거렸다. 그리고 끅끅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나 태일이랑 헤어졌어.” “…….” “너 때문은 아니야. 이건…… 내 선택이었어. 그래서 녀석을 붙잡지 않았어.” “…….” “태일이는 옆에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던 거야. 그래서 불안했던 거야.” “…….” “결국 바보 같은 김순이는 강태일을 울리고 말았어.” “…….” “태일이는 멋진 남자였어.” 자꾸만 눈물에 흐릿해지는 시야에 하운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눈물을 쓱쓱 닦아내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별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하운이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휙 버리며 그제야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질질 짜면서 찾아오지 말랬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번에는 자신있다 하였는데, 또 녀석에게 울며 찾아오고 말았다. 그는 짧게 한 숨을 쉬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팔을 벌리며 내게 말했다. “이리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조르르 녀석에게로 뛰어가 커다란 품에 안겼다. 그리고 엉엉 울며 마지막 눈물을 쏟아냈다. 하운이는 특별히 등을 토닥거려주지도, 위로의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쓰러지지 않도록 힘주어 나를 꽉 안아줄 뿐이다. 하지만 내 허리를 꽉 붙들고 있는 녀석의 단단한 팔은 항상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이렇게 내가 하운이에게로 되돌아온 건 비단 강태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다시 왜 돌아왔는지는 조금 더 고민해 보아야 할 일.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찬찬히 생각해보려 한다.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가슴에 쌓이지 않게 눈물을 보내고, 강태일을 보내려 한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지금껏 가장 열렬했던 내 다섯 번 째 사랑, Bye Bye. 댓글 4개 이 글을...(0) †승or란† 꺄악 그럼 하운이랑 김순이랑?ㅋㅋ 그것도 잘어울리네~아...태일이도좋았는데...ㅠㅠ 그치만 개인적으로 하운이쪽이 더끌리는..ㅋㅋㅋ 09.02.17 04:46 답글 고양아멍해봐 나도나도 ㅋㅋㅋㅋㅋㅋ 09.03.20 05:39 답글 앗싸리(あっさ... 태일이도 아깝긴하지만,, 하운이가 더 좋은,,, ㅋㅋㅋㅋ 09.05.03 18:27 답글 움냐하히 꼬선생 수고햇어 09.06.28 12:48 답글 이전 1 다음 텍스티콘 사용 0 / 600bytes 개인정보 유출, 저작권 침해, 허위사실 유포 등의 내용은 임의 삭제되거나 관련법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텍스티콘 사용 0 / 600bytes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윗 글 : [상큼한♥] ♡허니서클(Honeysuckle) [31~41]完2008.10.22 아랫글 : [상큼한♥] ♡허니서클(Honeysuckle) [11~20]2008.10.22 서비스 약관/정책권리침해신고카페 신고이용약관카페 고객센터검색비공개 요청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Corp. All rights reserved. 메일 | 블로그 | 뉴스 | 게임 유머나라 cafe.daum.net/humornara 통신(공개) | 회원수 1,469,814 카페정보가입 2 방문 501 새글 23 카페지기마담 개설일2000.04.24 프로필 내 정보 노을뱅이 수정 쪽지 0통 메일 12통 내 글 반응 내가 쓴 글 작성중이던 글이 있습니다. 카페 초대 회원 보기 채팅하기 소모임 바로가기 -------------- [소모임 만들기] 카페 ON (미사용중) 카페 탈퇴 인기좋아-완결소설 완결된 소설은 여기에 다 있다~!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상큼한♥] ♡허니서클(Honeysuckle) [31~41]完 글쓴이: 상큼한♥ 조회수 : 3401 08.10.22 13:52 http://cafe.daum.net/humornara/2cMP/1483 ========================================================= 소설제목: 허니서클(Honeysuckle) 글쓴이: 상큼한♥ 메일: nahkm2da@hanmail.net 팬카페: 상꼼한 보물공간s(http://cafe.daum.net/sangshya) 팸카페: 세상의 미녀들, M녀팸(http://cafe.daum.net/MfaM) ========================================================= -출처: 유머나라(http://cafe.daum.net/humornara) ♡허니서클 -허브 꽃말: 귀여움 앙증맞음, 소녀같은 사랑 Chapter. 31 이별 후(後) 탈탈- 마지막 남은 빨래를 빨래건조대에 널고서 손등으로 이마를 훑으며 방긋 웃음 지었다. 이를 끝으로 오랜만에 한 집안일이 깔끔하게 마무리 된 것이다.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서서히 열을 내뿜기 시작하는 황금빛 아침 햇살을 보았다.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기대하는 아침 햇살은 꿈을 꾸듯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이 난다. 나도 언제까지나 풀이 죽어 있을 수만은 없다. 하루빨리 정신을 차리고 빛나는 저 햇살을 한가득 품을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한다. 주먹을 불끈 쥐고서 어깨를 쫙 피며 가슴으로 크게 ‘파이팅’을 외쳤다. 오늘 이른 아침 일찍 일어나 집안을 구석구석 청소하고, 밀린 빨래들을 모조리 하였다. 그간 마음이 착잡하여 집안일에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다. 청소와 빨래를 끝내니 내 기분마저 깨끗이 청소된 듯 상쾌해지는 느낌이다. 강태일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그를 알아가기 까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이별 후, 이제 나는 그 많은 일들을 소중한 추억으로 등진 채 앞으로 전진하려한다. 강태일과의 만남은 내 인생에서 나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주었던 계기였다. 소중한 감정을 가르쳐 준 그에게 나 순이는 정말로 감사한다. 그러므로 더 이상 울지 않을 것이다. 강태일 또한 분명 그러하길 바랄 것이다. 김순이, 더 이상 울지 말자. 입 꼬리를 길게 올리며 씩씩한 웃음을 짓고선 빨래바구니를 들고서 베란다에서 나왔다. 그런데 베란다에 나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이맛살이 확 찌푸려졌다. 어느새 거실 곳곳에 옷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부터 고생하여 청소를 하였더니 고새 어질러 놓은 김도혁. 나는 녀석의 방으로 쿵쿵 발걸음을 크게 소리 내어 옮겼다. 그리고 방문을 확- 열어 재끼며 꽥 소리 질렀다. “야! 김도혁!” 깔끔한 디자인의 하복을 입고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김도혁은 나의 커다란 목소리에 순간 흠칫 놀랐다. 나는 씩씩 콧김을 내뿜으며 재빨리 다가가 손으로 녀석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녀석은 아픔을 내질렀다. “아, 아!” “너 내가 옷 아무데나 벗어놓지 말랬지!”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 것 좀 놓고.” 나는 그대로 녀석의 귀때기를 잡은 채 거실로 끌고 왔다. 그리고 널브러진 옷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엄하게 지시했다. “다 주워서 빨래바구니에 제대로 넣어.” 김도혁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선 새빨개진 귀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노려보다, 내가 입술을 깨물며 눈을 부릅뜨자 곧바로 엎드려 자신의 옷들을 주었다. 똑바로 빨래바구니에 집어넣는 것 까지 확인한 나는 그제야 잔뜩 구겨진 얼굴을 폈다. “앞으로 한 번만 더 그래봐.” “알았어, 알았다고. 거참, 좋게 말로 할 것이지.” “네가 말로 하면 듣는 놈이냐!” 쯧쯧, 눈을 가늘게 뜨며 혀를 찼고 김도혁은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보며 투덜거리다 가방을 챙기러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요즘 유행하는 것인지 쓸데없이 큰 자신의 가방을 챙기고 나온 김도혁은 여름 보충학습을 하기 위해 곧바로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 순간 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도혁이의 옷깃을 잡았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 있잖아.” “뭐?” “그러니까……” 쉽게 말을 내뱉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는 나의 모습에 김도혁의 얼굴이 옆으로 갸우뚱 기울어져 졌다. 잠시 입을 꾹 다물고서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는 김도혁의 시선을 마주하다 마른 침을 삼키며 힘주어 물었다. “태일이 잘 지내고 있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응? 아, 아니야. 너 늦겠다. 빨리 가라.” 녀석을 등을 떠밀며 현관으로 보내려할 때 도혁이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혹시 누나 강태일이랑 헤어졌냐?” “…….” “그런 거야?” “응.” 그의 물음에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깊이 묻었다. 좋다고 방방 뛸 줄 알았던 김도혁은 의외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예상외의 반응이라 슬쩍 고개를 들어 도혁이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알 수 없는 눈길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아무 말 없이 무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던 김도혁은 몸을 휙 돌리며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 간다.” “응, 잘 다녀와.” 쿵- 현관문이 닫치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깊게 한 숨을 뱉었다. 애써 위로하고, 힘을 내려 해보지만 솔직히 제일 걱정이 되는 건 강태일이었다. 사귀는 내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소중히 여기고 아끼려는 녀석의 풋풋한 사랑이. 그 사랑의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우고 있을까. 울지 않고 잘 지내고 있을까.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까. 여러 가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믿고 싶다. 아니, 믿는다. 분명 힘들어도 꿋꿋이 잘 지내고 있으리라는 걸. 강태일은 아버지를 잃은 이후에도 무너지지 않고 혼자 힘으로 잘 버텨왔다. 그 만큼 녀석은 금방 부서질 듯 약하면서도 끝내 부서지지 않는 강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니까, 그런 아이니까. 그가 담겨있는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방긋 웃음 지었다. 그리고 나는 풀어야 할 의문 한 가지가 있었다. 최하운. 그는 과연 내게 어떤 존재인가. 예전처럼 단순히 친구라고만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특별한 존재라지만 그는 그 선을 마구 넘나든다. 솔직히 이번 일도 최하운의 영향이 컸던 건 사실이다. 그에게서 멀어지자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전혀 의심하고 있지 않았던 강태일과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그렇다면…… 혹시 사랑? 에이, 이건 아니다. 최하운은 내가 믿고 따르는 특별한 사랑의 기준에 맞지 않았다. 녀석에게서 나는 두근거린 적도 설레어본 적도 없다. 첫 만남부터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라도 된 듯 무척 편안했으니까. 그렇다면 무엇일까? 이 의문을 풀어내기 위해서 일단 최하운과 부딪혀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막무가내 김순이의 스타일이었다. 곧 생각을 마친 나는 현관으로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지금 시각은 아침 9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분명 최하운은 아직도 한 밤중일 것이라는 생각아래, 나는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최하운은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내가 머릿속에 그렸던 그 광경은 보이지 않았다. 침대는 단정하게 이불이 정돈돼 있었다. 분명 늦잠을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이 확실히 빗나간 것이다. 혹시 집에 들어오지 않은 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녀석의 큰 침대를 바라보고 있을 때, “뭐야.” 바로 뒤에서 최하운의 낮지만 듣기 좋은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최하운은 방금 씻고 온 탓인지 뽀얀 얼굴에 입술은 붉은 기가 돌고 있었다.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머리칼을 수건으로 탈탈 털며 녀석은 무뚝뚝한 음성을 뱉었다. “이 아침에 뭐 하러 왔냐.” “흐음, 해가 서쪽에서 떴나? 네가 이 시간에 일어나다니 말도 안 돼.” “뭐, 그래서 불만이야?” “아니. 너도 드디어 아침형 인간의 바른 사나이가 되려나 보구나!” 상긋방긋 웃으며 녀석의 넓은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자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답했다. “이거 아니라서 미안하군. 그저 잠이 안 왔을 뿐이야.” “잠이 안와?” “어, 요새 불면증인가. 잠이 안와.” 정말인 것인지 최하운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는 수건을 목에 두르고서 양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눈을 비볐다. 나는 발꿈치를 들어 올리며 눈 주위를 문지르고 있는 녀석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 하며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잠을 통 못 잤던 탓인지 눈이 약간 충혈 돼있었다. “아! 진짜 눈이 빨……” 갑자기 말이 꿀꺽 삼켜졌다. 순간 녀석의 얼굴이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의식됐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녀석에게서 풍겨 나오는 맑은 비누향이 후각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향기가 가슴까지 묘하게 만들었다. 어, 뭐지? 기분이 이상해진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을 일인데, 갑자기 신경 쓰이는 것일까. 입을 벌린 채 아무 말 않고 굳어있는 나의 모습에 최하운의 젖은 머리칼이 붙어있는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녀석의 눈동자에 나의 낯선 모습이 가득 맺힌다. “야, 너 왜 그래.” 그의 물음에 나는 재빨리 얼굴을 멀리 떼어내며 고개를 휙 돌렸다. 불쑥 찾아온 낯선 감정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그에게 나는 애써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 너 밥 안 먹었지? 같이 밥 먹자~ 나 아침에 청소하고 빨래하느라 아직 못 먹었거든.”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다소 늦은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우리는 식탁에 마주앉았다. 나는 밥을 깨지락깨지락 먹으며 묵묵히 아무 말 없이 식사에 임하는 녀석을 살펴보았다. 지금 보니 여자들이 최하운에게 목메는 이유도 알 듯 하다. 그의 얼굴은 다소 중성적이었다. 남성적인 면이 조금 더 강했지만, 요목조목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이기에 여성적인 부드러운 면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속속히 발견 되는 여러 가지 다양한 매력에 많은 여자들이 따르는 것 같다. 또한 생각해 보니 잘 웃지 않는 그였지만 웃는 모습이 참 예쁜 듯싶다. 다소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가 웃을 때 반달로 휘어지면 선하게 변한다. 그리하여 그의 눈웃음은 약간 신비로운 느낌이 풍겼다. 최하운은 그저 단순히 잘생겼다기보다는 그만이 풍기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고, 매력이 있었다. 새삼 애들이 나보고 왜 눈이 삐었다는 지 알 것 같다. 자세히 요목조목 따지며 보니 꽤나 설레게 하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젓가락이 식탁을 퉁 치는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하운이를 보았다. 하운이는 미간을 찡그리며 퉁명스레 말했다. “너 왜 계속 꼬나봐.” “꼬, 꼬나본 게 아니라 쳐다본 거거든!” “그니까 밥이나 쳐 먹지 왜 내 얼굴만 보고 있냐고.”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항상 밥 앞에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나인데 말이다. 그러게 말이야, 왜 내가 밥은 안 먹고 네 얼굴을 보고 있던 거지? 갑작스레 창피하기도 하여 짜증이 났다. “머, 먹으려던 참이다!” 숟가락으로 얼마 줄어들지 않았던 하얀 쌀밥을 듬뿍 퍼 입속에 넣었다. 우물우물 대충 씹으며 밥을 계속 입안에 가득 퍼붓듯 넣었다. 어느새 볼은 터질 것처럼 빵빵해졌다. 결국 밥을 급히 먹어대던 나는 목이 메어 푸- 밥알을 튀기며 켁켁거렸다. 갑작스레 튄 밥알을 얼굴에서 떼어내며 최하운을 얼굴을 찡그렸다. “아씨, 더럽게.” 그리고는 재빨리 투명한 물 잔에 물을 가득 따라 내게 내밀었다. 나는 후닥닥 받아들고서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목구멍에 가득 메어있던 밥알이 물결에 쑥- 씻겨 내려간다. 아, 죽다 살아났다. 한 숨을 깊게 내뱉고서 찔끔 흘러나온 눈물방울을 손가락으로 찍어냈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는 최하운에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미, 미안.” “너 뭘 그렇게 정신팔고 있어.” “…….” “혹시 아직도 그 녀석 신경 쓰여서 그런 거냐.” “어?” 그의 물음에 나는 당황하며 녀석의 바라보았다. 최하운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나를 깊은 잿빛 눈동자로 응시했다. 초점을 잡으려 하지만 눈빛이 자꾸만 흔들거렸다. 다물어 있던 녀석의 두 입술이 다시 열렸다. 그 입술사이로 딱딱한 음성이 튀어 나온다. “후회하는 거 아니냐고.” 후회?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왜 그런 말을 묻는 거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하운이를 바라보았다. 하운이는 그런 나를 응시하다 이내 시선을 돌리며 자리에 일어섰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식탁 한 쪽에 두었던 담배 갑을 들고 부엌을 나갔다. 사라진 녀석의 자리를 바라보며 나는 뒤늦게 고개를 저었다. 후회……. 그건 아니다. 그건 절대로 아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어느새 무료한 시간이 흐르고 오후가 되었다. 여름의 따가운 햇살은 더욱 뜨겁게 익어갔다. 그리하여 집안의 온도는 더욱 높아졌다. 나는 지금 아직도 최하운의 집에 머무르는 중이다. 최하운은 3시간 전 쯤 ‘안 가냐’고 한 번만 툭 물어봤을 뿐, 그 후 별다른 말없이 나를 내보내지는 않았다. 방학이라 특별히 할 일도 없었고, 오전에 갑자기 녀석에게 느껴졌던 다소 불편한 그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전에 집안일을 너무나도 열심히 하여 피곤해서 이상했던 탓인지 그 후 또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강태일과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이 새로 남자를 소개시켜준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다지 남자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조금 지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대로 다른 남자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설령 새로 만났다 하더라도 깊은 사이까지 빠지지 않을 것 같다. 다시 돌아갈 것만 같다. 지금까지 어딘가에 나의 진정한 운명이 있을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으나, 문득 갑자기 의심스러워 진다. 쿠션을 끌어안고 소파에 벌러덩 누우며 오락게임을 하고 있는 하운이에게 무심코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아, 그냥 너한테 시집이나 갈까.” “그러든지.” 어, 어라?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는 누웠던 몸을 다시 벌떡 일으켜 세우며 커다래진 눈으로 최하운을 보았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보통 이럴 때는 욕지거리를 내뱉거나 말없이 양미간을 찡그리며 노려보던 녀석이었다. 허나 곧 왜 이런 대답을 했는지 알았다. 최하운은 지금 온 신경이 오락게임에 몰려있었다. 그리하여 아마 게임에 집중하느라 대충 장단을 맞춰주었던 듯싶다. 그런데도 얼굴의 열기는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굴을 감싸 쥐며 최하운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심장의 속도가 빨라지며 더욱더 얼굴이 뜨거워진다. 뭐, 뭐야. 이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어보지만 전혀 진정 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 너무 일을 열심히 했나. 미, 미친 거다. “아싸, 이겼다.” 게임 한 판을 끝마치고서 고개를 돌려 나를 본 최하운은 빨개진 나의 얼굴에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너 뭐냐.” “뭐, 뭐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도저히 시선을 마주할 수 없던 나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얼굴을 휙 돌렸다. 그러자 최하운은 게임기를 놓고서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내 양 볼을 꾹 누르며 고개를 돌려세웠다. 그리하여 녀석의 시선과 마주하게 되었다. 볼 살에 눌려 입술이 금붕어처럼 됐다. 최하운은 이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빤히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다 이내 무언가 갑자기 떠올랐는지 녀석의 동공이 커다래지는 가 싶더니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그는 내 볼을 잡고 있던 손을 휙 떼어내며 허둥지둥 다시 게임기 앞으로 갔다. “한판 더.” 녀석은 재빨리 다시 새 게임을 시작했다. 그는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갑자기 집 안의 공기가 후끈거리며 분위기가 묘해진다. 온 몸에 열이 오르며 더워졌다. 그래, 더워서 그런 것 일 것이다. 어제 뉴스를 보아하니 오늘 온도가 엄청 높다고 했다. 최하운이나 나나 더위를 잘 타니깐. 그렇게 생각을 끝마치자 갑자기 쿵쿵 거리던 마음이 편해졌다. 소파에서 내려와 최하운의 옆에 다가갔다. 녀석은 나를 보지 않은 채 게임에 열중했다. 그러나 열중한 것 치고는 계속해서 실수를 연발하고 하고 있었다. 흐음, 이 녀석도 이상하단 말이야. 나는 녀석의 허벅지에 베게 삼아 머리를 올리고서 벌러덩 누웠다. 그리고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녀석의 볼을 쿡 찌르며 말했다. “운아, 에어컨 좀 사라.” “미쳤냐, 돈이 어디 있어.” “혹시 너 따라다니는 아줌마들 없어? 넌 아줌마들한테도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아줌마들 돈 많……” 아얏! 최하운이 주먹으로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며 녀석을 휙 노려보았다. “생각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나중에 너한테 배울 애들이 참 불쌍하다.” “그냥 해본 말이다, 뭐!” 볼을 부풀리며 뾰로통한 얼굴을 지었다. 최하운은 그런 나를 흘겨보다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에 나도 덩달아 헤벌쭉 웃었다. 그러자 녀석이 손으로 얼굴을 푹 눌렀다. “멍청하게 웃지 마.” 고운 말이라곤 하지 않은 최하운이지만, 그래도 녀석의 말을 들으면 웃음이 나온다. 입가에 웃음을 물고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청각이 트이며 밖에서 맴맴,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도시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는 신기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사이로 머리칼을 흔들며 지나가는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한 여름의 소리에 갑자기 나른해지더니 졸음이 쏟아졌다.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을 한 후 조금씩 잠에 빠져들었다. 내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녀석의 부드러운 손길이 행복한 꿈으로 인도해줄 것 같은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흐릿해지는 의식 사이로 순간 뭐, 이렇게 평생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Chapter. 32 끝나지 않은 인연 딩동- 한 밤중에 울리는 갑작스런 초인종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책에서 시선을 뗐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벽에 걸어진 동그란 원형의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덧 자정이 지나고 있었다. 이 시간에 누구지? 혹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겠다던 김도혁이 다시 돌아온 건가? 이따금 초인종 소리가 한 번 더 울렸고, 나는 자리에 벌떡 일어서 재빨리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손을 쭉 뻗어 문을 벌컥 열었다. “너 왜 다시……” 도혁이 일 줄 알았던 내 예상과는 다르게 현관문이 열리며 보이는 사람은 놀랍게도 신유라였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버렸다. 솔직히 신유라를 볼 면목이 없었다. 강태일이 행복했으면 하는 이 아이의 간절한 바람을 나는 이루어주지 못하고 놓아버렸으니까. 어쩌면 이 늦은 밤 나를 찾아온 이유도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서 인지도 모른다. “저 계속 서있게 할 거에요?” “어? 아, 들어와.” 신유라의 말에 나는 당황하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슬쩍 신유라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를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볼 줄 알았던 신유라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보자 부들부들 겁먹고 있던 마음이 풀어지며 멍해졌다. 전에 보았던 그녀의 웃음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웃음이었다. 유라의 웃음은 예쁘긴 하였지만 다소 억지로 웃고 있는 느낌이 있었고, 무게가 느껴졌었다. 그런데 방금 내게 지었던 웃음은 근심 없는 해맑은 웃음이었다. 한마디로 진짜 웃음이었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뭐, 뭐 마실래?” “아니요. 괜찮아요.” 신유라는 싱긋 웃음 짓고선 집안을 둘러보며 소파에 천천히 엉덩이를 붙였다. 나는 서서 안절부절 못하다 따라 불편한 자세로 신유라 앞에 앉았다. 그리고 힐끔힐끔 그녀의 눈치를 봤다. “풉.” 그 때 갑자기 신유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입을 가리고서 한 참 동안 웃던 신유라는 찔끔 나온 눈물방울을 손등으로 찍어내며 내게 말했다. “뭐 죄지은 거 있어요?” “으, 응?” “아, 하긴 있긴 하죠.” 그녀의 말에 나는 움찔거렸다. 그러한 나의 모습을 보고 신유라는 픽 웃더니 다리 위에 두 손을 놓으며 나를 응시하였다. 항상 다소 힘이 없었던 그녀의 얼굴에 활기가 넘쳐나가고 있었다.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무엇이라도 당차게 이겨낼 수 있다는 듯 자신감이 흘렀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렇게 그녀를 변하게 할 수 있는 계기라면……. 그 순간 강태일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커다래진 동공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곧 신유라의 입술이 열렸다. “얼마 전에 태일이를 봤어요. 친구의 부탁으로 늦은 밤에 연습실에 찾아갔었죠. 그런데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연습실에 태일이가 혼자 있었어요. 신나는 댄스 음악을 틀어 놓고서 울고 있었어요. 어린 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있었어요.” 그녀의 말에 가슴이 쿵- 울렸다. 그 울림이 번지며 쓰라림으로 남겨진다. 괴로운 얼굴을 지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아이가 잘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것은 그저 나를 위한 변명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쓰라려 오는 가슴을 움켜쥐며 숨을 참고 있을 때, 신유라의 차분한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그 모습에 놀란 나머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만 두 눈이 마주쳐버렸어요. 화들짝 놀라며 그 어느 때처럼 도망가려 하는데 태일이가 내게 말했어요. 눈물에 떨리고 있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 “이겨내는 중이야.” 이겨내는 중이야.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쿡쿡 아려오던 가슴을 맴돈다. 나는 참고 있던 눈물 한 방울을 뚝 떨어트리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 신유라를 바라보았다. 신유라는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꽃잎 같은 예쁜 분홍빛 입술이 계속해 움직인다. “이겨내는 중이라고 주문을 거는 듯 몇 번이곤 반복하며 말했어요. 그리고는 저를 향해 처음으로 웃어줬어요. 정말 모순되게도 눈물을 떨어트리며 방긋 짓는 웃음이 괴로워 보이기보단 편안해 보였어요. 그리고 무척 예뻤죠.” “…….” “그 아이는 도망가지 않고 현실을 직시한 거예요. 그렇게 몸으로 부딪히며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내고 있었죠.” “…….”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정말 바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부딪히기 보단 무서워서 항상 도망갔으니까요. 아, 이제 더 이상 도망가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저 고백했어요. 지금까지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아직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다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되돌아가서 너와 다시 새로이 시작하고 싶다는 것을.” “…….” “지금껏 오랫동안 감춰두었던 나의 고백에 태일이는 이렇게 말했어요. 되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데요. 설령 그러할 수 있다 해도 되돌아가고 싶진 않데요. 그것은……” 신유라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뻗어 흐르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지금에 언니가 있기 때문에.” 그 말에 눈물줄기가 거세게 쏟아졌다. 나는 신유라의 여리고 작지만 강한 손을 부여잡으며 펑펑 울었다. 그리고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로 그녀를 힘겹게 바라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조금은 밉지 않아?” “음, 당연히 밉죠. 밉지만 무척 사랑스러워요.” 그리고는 신유라는 일어서 내게 다가와 나를 안아주었다. 나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는 부드러운 손길 사이로 따뜻한 음성이 스며들어온다. “태일이나 저나 언니를 만나게 된 건 아마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큰 축복일 거예요.” “나, 나는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야. 남들에게 상처도 잘 주고. 결국 주……” “진짜 나쁜 사람은 자신이 상처준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울지도 않아요. 상처 주었다는 것 자체도 모르죠.” “…….” “언니는 좋은 사람이에요.” “…….” “내가 만나온 그 어느 사람보다.” 그 말에 줄곧 불안했던 마음이 물방울처럼 터지며 사라졌다. 요즘 들어 계속 들추어졌던 오래전 옛날의 괴로움마저도 용서받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는 유라의 옷깃을 꽉 부여잡으며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울기만 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대학 친구들과 술자리를 갖은 후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 낮의 열기가 가라앉으며 달빛이 뿜어내는 서늘함에 밤공기는 기분 좋게 시원했다. 그런데 취기 때문인지 머릿속이 몽롱했다.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때문에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서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며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그런데 아파트 현관 앞에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이 보였다. 교복을 보아하니 도혁이네 교복이었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가까이 다가가니 역시 한 사람은 김도혁이었다. 그럼 그 옆에는? 뒤 돌아 있기에 그 아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도혁이 친구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 아이의 얼굴이 돌려졌다. 그런데 그 사람은 놀랍게도 강태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놀란 나머지 가방을 툭 손에서 떨어트려 버렸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이 못마땅한지 미간을 찌푸리며 강태일은 말했다. “뭐, 귀신이라도 봤어?” “아, 아니. 그, 그게 아니라…….” “뭐야, 너 술 먹었냐?” 코를 킁킁 거리며 술 냄새를 맡던 강태일은 미간을 더욱 힘주어 찡그렸다. 녀석의 얼굴을 보니 어느새 취기가 싹 사라지며 머릿속이 또렷해졌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녀석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생각도 못했다. 주위에서 숱하게 헤어지고, 타인으로 멀어지던 연인들을 보며 우리의 인연도 끝이라고만 생각했다. 갑자기 너무나 기뻐서 눈물이 툭툭 쏟아졌다.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 대견한 마음이 한데 어우러지며 눈물샘을 자극 한다. “갑자기 너 왜 울어? 오랜만에 보니 반갑냐?” 나의 눈물에 당황하는 강태일에게 나는 와락 안겼다. 그리고 눈물콧물 쭉쭉 뽑아내며 엉엉 울었다. 안아주지도, 떼어내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있던 강태일이 내게 버럭 소리쳤다. “야, 교복에 콧물 묻어!” “잠깐, 강태일. 보자보자 하니까 너 왜 계속 우리 누나한테 ‘너’라 하고 ‘야’라 하냐! 누나가 유치원 막 들어갔을 때 너는 똥오줌 못 가리고 기저귀에 싸고 있었어!” “내 맘이다. 억울하면 너도 그렇게 불러라?” “부, 불렀으면 진작 불렀지! 누나! 이거 엄연히 차별이야. 왜 애는 되고 나는 안 되는데?” 불만스러움을 가득 담은 얼굴로 김도혁은 나를 보았고, 강태일은 가증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의 웃음에 김도혁은 펄쩍 뛰며 노발대발했다. 그들의 시끄러운 말다툼에 어느새 눈물은 쏙 들어갔다. 눈을 깜박이며 녀석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강태일의 옆에 놓인 커다란 짐 가방이 보였다. 나의 시선이 그 것에 머무른 것을 알아 챈 강태일은 재빨리 몸으로 가방을 가렸고, 김도혁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 고자질 하 듯 말했다. “이 녀석 집 나왔데!” “뭐? 지, 집을 나와?” 깜짝 놀란 얼굴로 강태일을 바라보았다. 강태일은 붉어진 얼굴로 욕을 내뱉으며 김도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김도혁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강태일의 짐 가방을 휙 빼앗아 들며 내게 말했다. “당분간 우리 집에서……” “됐……” “살게 하게.” 망치로 머리를 거세게 얹어 맞은 듯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강태일은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고, 김도혁은 방긋방긋 웃음 지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자세히 앉아 이야기를 듣자 하니, 강태일은 자신의 엄마와 크게 한 바탕 싸웠다 한다. 그의 엄마가 소속사에 거액의 돈을 쥐어주며, 강태일을 빼내려 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강태일은 자신의 꿈을 인정해 줄 때 까지 들어오지 않겠다며 짐을 싸들고 나온 것이란다. 여기서 보면 녀석은 역시 아직 어린 애에 불과했다. 뭐,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지만 말이다. 처음엔 녀석을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지만, 답답한 그 공간속에서 얼마 동안은 나와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부딪히다가는 자칫하면 마음의 벽이 더욱 높아지며, 일이 더욱 꼬이고 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디 서로 떨어지며 느껴지는 그 빈자리 속에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찾았으면 좋겠다. “어이, 가출 청소년.” 베란다에 나와 어두운 밤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에게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내밀었다. 강태일은 ‘땡큐’라고 말하며 내가 내민 커피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홀짝 들이키며 다시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그런데 이렇게 한 집에서 보니 기분이 묘했다. 뭐, 이런 동생을 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 때 강태일의 음성이 어두운 밤의 공기를 울리며 들려왔다. “알고 있었지? 거짓말이라는 거.” “응? 아, 응.”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녀석을 바라보았다. 강태일은 잠시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싶다가 피식 웃음 지었다. “아, 역시 거짓말은 적성에 안 맞나봐.” “…….” “그러면 솔직하게 말할게. 그 때 한 말들 알다시피 다 진심 아니었어. 나 아직 너 못 잊었고, 지금 이 순간도 조금만 방심하면 자제력을 잃을 만큼 너를 사랑하고 있어. 줄 곧 어느 날부터 너는 나를 보면 울 것 같은 얼굴이었어.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어. 처음에는 놓치기 싫어서 모른 척 했어. 하지만 그 얼굴을 보는 게 더 힘들었고, 더 이상 널 괴롭게 하고 싶진 않았어. 김순이는 상처 주는 것을 무척 두려워 한다는 것을 알아. 차라리 상처를 받으면 잘 이겨내지 않을 까 해서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어.” 그리고는 태일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컵을 힘주어 쥐고 있는 그의 손이 눈에 가득 보였다. 나는 녀석의 옷깃을 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또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김순이는 울보라서. 엄청난 울보라서. “미안해. 놓지 말라던 네 손을 놓아버려서.” “…….” “정말 미안해.” 고개를 숙이며 말하고 있을 때, 콩- 머리 위로 주먹이 가볍게 내리쳤다. 순간 깜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강태일이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엄연히 손을 놓은 건 네가 아니라 나니까.” “…….” “내 선택이었고 후회는 없어. 그러니 미안해하지도 말고, 걱정하지도 마.” “…….” “사랑을 잃은 것이지 인생을 잃은 게 아니잖아. 지금 난 이겨내고 있고, 더 이겨낼 수 있어.” “…….” “그리고 이 못난이 때문에 더 이상 주춤거리고 싶지도 않으니까. 알겠어?” 그의 말에 나는 눈물을 들이키며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그러자 강태일은 장난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 생각해보니 진짜 열 받네. 이런 꼬마돼지 따위가 뭐가 예쁘다고.” “뭐, 내가 어때서! 키 작고 몸무게 조금 나간 것 빼고 이 정도면 괜찮은 여자지!” 벌게진 얼굴로 흥분하며 말하자 강태일은 갑자기 소리 내어 웃었다. 난 그 웃음에 샐쭉한 표정을 짓다, 이내 따라 웃었다. 그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뭐, 앞으로 재미있는 볼거리도 생겼으니.” “볼거리?” “그런데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안가면 다 뒤집어엎을지도 몰라.” 그의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태일은 묘한 얼굴로 나를 가만히 보다, 허리를 숙이더니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난 못됐으니까.” 그리고는 내 볼을 쭉 잡아당기더니 웃으며 나를 스쳐 지나갔다. 간지러운 귀를 손으로 문지르며 얼굴을 붉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보니 밤하늘이 무척 예뻤다. 밤하늘에는 힘껏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싶은 듯 자신의 빛을 내뿜고 있는 별들이 가득했다. 오늘이 있으면 내일이 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주춤거리지 않고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내일을 이으며 움직인다. 그 끊임없는 나날들 속에서 우리의 인연 또한 끝나지 않았다. 더욱 단단해진 인연의 끈으로 우리는 서로를 지탱하게 될 것이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심부름 내기에 져버린 나는 지금 각자의 취향의 아이스크림을 내 돈으로 사서 집으로 어슬렁어슬렁 돌아가는 중이다. 아무리 조그맣다지만 이래봬도 엄연히 연장자인데 왜 자꾸 녀석들에게 휘둘리게 되는 것일까. 매일 강태일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 것 같던 김도혁은 강태일과 손발을 맞춰 나를 못살게 군다. 강태일이라는 아군을 얻은 김도혁은 힘을 얻어 기세등등해졌다.(강태일 앞에서는 한 없이 약해지던 나였다.) 그리하여 이 늑대 두 마리 때문에 요새 들어 나 순이는 무척 피곤해졌다. 하지만 이 집에서 내가 가장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 아무리 힘들다 해도 위엄을 절대 잃어서는 안 된다. 암, 그렇고말고.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고서 쭈쭈바를 빨며 폴짝폴짝 뛰어가고 있을 때,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고급스러운 외제차가 나를 따라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차 문이 열리고 반갑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순간 못 알아 볼 뻔했지만 그 특유의 웃음을 보니 기억이 났다. 그 반갑지 않은 얼굴은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 “어머, 누군가 했는데 역시 김순이였구나? 너는 어쩜 아직도 변하게 없니. 그 나이에 아직도 초딩스러워 보일 수 있다니 참 대단하구나.” 웃는 얼굴로 잔뜩 비꼬며 말하는 그녀는 배은덕. 그녀는 중학교 동창생으로 나를 숙명의 라이벌 관계로 여기던 녀석이었다. 물론 나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인가? 배은덕이 좋아했던 옆 남학교의 어느 한 남자 애가 나한테 고백을 했었다. 하지만 내 스타일과는 거리가 전혀 멀었기에 나는 그 남자애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그 날부터 배은덕은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자신을 찬 남자애를 내가 찼다는 것에 대하여 크게 자존심을 상한 듯싶었다. 그 후 나를 뒤따라 다니며 내게 항상 대결구조를 청했지만, 나는 구지 상대하고 싶지 않아 줄곧 무시했었다. 가끔씩 열 받게 할 때 한두 번 상대했지만 말이다. 그 때 내가 모두 이겼다.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무심히 대꾸했다. “어, 그래. 오랜만이다.” “얼마나 너를 만나고 싶었는지 몰라. 우리 자주 연락 좀 하자, 얘.” 내 어깨를 툭 치며 심상치 않은 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는 지금 분명 ‘나를 어떻게 골려 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돈 많은 남자를 잡은 것인지, 온 몸이 값비싼 명품으로 치장 돼있었다. 그리고 눈과 코를 성형했던 것인지 더욱 몰라보게 예뻐져 있었다. 정말 용 됐다는 표현은 이런 아이들한테 써야하는 듯싶다. 그런데 그에 비해 나는 머리끈이 없어 대충 노란 고무줄로 묶은 머리에, 후줄근한 트레이닝 복 차림이었다. 이런, 제기랄. 그 때 배은덕의 손짓에 차에서 키가 무척 큰 어느 한 남자가 내렸다. 배은덕은 그 남자에게 팔짱을 끼더니 싱긋 웃으며 고급스런 양복을 입고 있는 남자를 소개했다. “내 남자친구 토마스야.” 토마스? 쳇. 꼬마기관차 토마스와 친구들이 생각나는 군. 토마스의 얼굴을 보아하니 혼혈계 계통인 듯싶었다. 정말 아쉽게도 흠잡을 때 없이 키도 크고 훈남인 사람이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꾸벅이며 토마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쇼.” “네, 안녕하세요. 체리 남자친구 토마스입니다.” 서툴게 한국말로 토마스는 말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 커다란 손을 잡았다. 그러자 배은덕은 노골적으로 잡고 있던 손을 툭 잘라냈다. 저, 계집애가. 배은덕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토마스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토마스는 귀엽다는 듯 배은덕을 바라보며 볼에 키스했다. 배은덕 몸을 배배 꼬며 부끄러워했다. 참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그나저나 체리는 예명인 것일까. 체리는 무슨 배은망덕 주제에.(배은망덕은 중학교 때 배은덕의 별명) “그나저나 너 남자친구는 있니? 하긴 그 꼬라지로는 남자가 꼬이진 않겠구나.” “무슨 소리! 나도 있거든! 네 토마스보다도 훨씬 멋진 놈!” “어머, 그래? 그것 참 궁금하구나. 그렇다면 우리 나중에 함께 커플끼리 식사라도 하자.” “뭐?” “왜? 뭔가 켕기는 거라도?” 내가 순간 놀라며 되묻자 배은덕은 기분 나쁜 웃음 지으며 물었다. 나는 애써 입 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럴 리가. 그래, 함께 식사 한 번 하자.” “기대되는데. 아참, 명함하나 줘.” “아직 대학 졸업도 안했는데 뭔 명함.” “어머, 그래? 그럼 내거 줄 테니 나중에 문자하나 보내줘. 그럼 내가 토마스랑 함께 고급 레스토랑 예약해서 연락해줄 게” “그, 그래.” “그럼 나는 바빠서 이만.” 배은덕은 자신의 명함 한 장을 내게 건네주고서, 토마스와 함께 다시 차에 탔다. 그리고는 내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더니, 비웃는 웃음을 지으며 지나쳐 갔다. 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배은덕이 준 명함을 바라보았다. 명함 안에는 모 쇼핑몰 사장 배체리라고 써져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하자마자 쇼핑몰을 차렸다는 소리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쇼핑몰이 무척 잘 되었나 보다. 아, 그런데 꼭 이러한 동창생들이 하나쯤 있단 말이야. 어떻게든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그나저나 홧김에 거짓말을 해버렸다. 그렇다고 이대로 모른 척 뒤꽁무니를 뺄 수도 없었다. 주위에 몇 안 되는 남자들을 떠올려 보았다. 제일 먼저 전 남자친구인 강태일이 떠올랐으나 그에게 부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부탁하면 나는 죽일 년이지. 어쩔 수 없다. 내게 히든카드는 역시 단 하나 뿐이었다. 어차피 운서방을 한 경험도 있으니 분명 하운이는 잘해내리라 생각한다. 빠지지 않는 외모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엘리트이니까. 위급한 상황에는 역시 나의 럭키 최하운 밖에 없다. 그 생각을 끝마친 나는 곧바로 최하운을 향해 뛰어갔다. 최하운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열쇠를 가지고 오지 않았던 나는 초인종을 여러 차례 마구 눌렀다. 곧이어 문이 벌컥 열리며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하운이가 나왔다. 자다 일어난 것인지 하운이의 상체는 아무것도 걸쳐있지 않았다. 단단한 팔 근육과 보기 좋게 자리 잡은 복근을 보니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매일 게을리 하지 않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탓에 우리 하운이는 몸매 또한 죽여줬다. 자신감 급상승! 최하운은 헤실헤실 웃는 나를 보며 짜증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너 초인종 한 번만 눌……” “자기!” 눈을 반짝이며 소리치는 나의 말에 하운이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이내 하운이는 두 귀를 의심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뭐라고?” “역시 우리 운자기 밖에 없어.” “너 더위 먹었냐?”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하운이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최하운은 내게서 몸을 뒤로 빼며 얼굴을 더욱 찡그렸다. 그 때 까지 난 배은덕의 토마스에게 뒤치지 않은 최하운이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 그 날 파란만장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지 않았다. Chapter. 33 심장의 고동 이틀 동안 졸졸졸 최하운을 뒤따라 다녔다. 가짜 애인 노릇을 해달라는 나의 부탁을 녀석이 싫다고 완고히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나의 눈물어린 호소에 약한 최하운은 평소 같으면 30분 정도에 넘어왔었다. 그런데 무슨 이변이 일어난 것인지 몰라도 이번에는 눈 하나 꿈쩍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해다 바치고, 자리에 드러눕기까지 하여 이틀이란 시간에 최하운의 마음을 겨우 돌릴 수 있었다. 어찌하였든 우리는 약속 날짜가 되기 전 근 며칠간 완벽한 커플 재연을 위하여 혹독한 훈련(?)을 거쳤다. 그리고 드디어 결판을 짓게 될 D-DAY가 되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며 불끈 주먹을 쥐었다. 요 며칠 간 내 눈물겨운 노력만큼 배은망덕의 코를 기필코 납작하게 만들어 주리라. 다시 한 번 마음 속 깊이 되새기고서, 비장한 얼굴로 클러치 백을 들고서 방에서 나왔다. 도혁이의 방문을 열며 슬쩍 들여다보니, 박수를 치며 감탄하는 도혁이와 낯선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낯선 한 남자는 다름 아닌 매일 보고 또 보아왔던 내 친구 최하운이었다. 순간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그 때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멍하니 서있는 나를 발견한 김도혁은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어때? 짱이지?” 도혁이의 말에 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조심스레 방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거울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최하운이 내가 옆에 서자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말끔한 검은색의 슈트를 차려입은 최하운을 향해 나는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 올렸다. 나의 칭찬에 짐짓 쑥스러운 듯 최하운은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그 모습에 나는 픽 웃었다. 하운이는 자신의 모습이 다소 어색한 듯 자꾸만 거울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슈트를 입은 최하운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래서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것 일까. 왠지 모르게 지금 이 순간 그는 더욱 어른스러워 보였고, 남자다워 보였다. 뭐, 18살 처음 최하운을 만나게 되었을 때 당시도 그는 보통 고등학생과 달리 어른스러웠지만 말이다. 큰 키와 건장한 체격을 가진 최하운은 슈트가 마치 주인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 잘 어울렸다. 괜히 이상하게 내가 다 설렌다. 이거 위험하다. 가슴속에 위험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어. 그 때 거울에서 시선을 떼며 내게로 고개를 돌린 최하운은 잠시 나를 빤히 응시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짙은 눈동자에 순간 온 몸에 긴장이 들어간다. 난 살짝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왜?” “아니, 이만 가자.” 최하운은 무표정으로 맥 빠지는 싱거운 대답을 남기고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먼저 방에서 나갔다. 나는 작게 한 숨을 뱉으며 덥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땀이 나는 이마를 훑었다. 그 때 내 옆에 바짝 다가온 김도혁이 눈을 활모양으로 만들고서 입 꼬리를 길게 위로 올리며 웃음 지었다. 그의 웃음에 나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자 김도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나는 다 알아.” “뭐, 뭘.” “방금 형한테 반했지?” 녀석의 말에 순간 거세게 망치로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멍해졌다. 김도혁은 그런 내게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이내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정신을 차리고서 두 팔을 크게 휘저었다. 그리고 발끈하며 소리치듯 말했다. “무, 무슨 소리야! 조금 아주 조금 순간 멋있다 느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야. 절대로!” 그렇게 흥분하며 소리치고선 나는 휙 돌아 방에서 빠져나왔다. 내 뒤로 뭐가 웃긴 건지 까르륵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김도혁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친하게 지내는 이웃집 아저씨께 빌린 차로 약속장소인 한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배은망덕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뱉으며 고개를 돌려 하운이를 바라보았다. 하운이는 피곤한 듯 입을 벌리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다소 긴장한 나와 달리 최하운은 아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하긴 이러한 일로 긴장할리 없는 녀석이지만 말이다. 살짝 웃음 지으며 마지막 점검을 위해 하운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 우리의 호칭은?” “자, 자기.” 내 물음에 힘겹게 대답한 하운이는 한숨을 작게 내뱉었다. 최하운이 ‘자기’라는 호칭을 부르기 위해 얼마나 고생한지 모른다. 이러한 단어를 혐오하는 하운이는 ‘자기’를 말할 때마다 온 몸에 닭살이 돋아 애를 먹었다. 아직도 이러한 호칭은 익숙하지도 않으며 싫은지 말할 때 마다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뭐, 하기 싫어 죽겠는데도 나름 열심히 노력하는 녀석의 모습이 참 사랑스러웠다. 잠깐, 사랑스러워? 갑자기 나의 눈이 커다래지자 하운이는 고개를 비뚤며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의 시선에 나는 애써 웃으며 다음 질문으로 바로 넘어갔다. 이상하다. 확실히 나 요새 녀석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무슨 감정? 혼란스러운 감정 틈 사이로 최하운과 난 외우며 연습했던 질문을 몇 가지 주고 받았다.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때는?” “2달 전?” “고백은 누가?” “내가.” “첫 키스 장소는?” “집.” “좋았어, 가자.” 이상한 감정을 가슴에서 털어내며 먼저 문을 열고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최하운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길고 커다란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 최하운을 바라보았다. 그는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말했다. 살짝 볼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제대로 하자며.” “아.” “…….” “응!” 활짝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하운이에게 내 작은 손을 내밀었다. 하운이는 잠시 내 작은 손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잡더니 이내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살짝 웃음 지으며 말했다. “가자, 못난이 일일 애인.” 레스토랑에 들어서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창가 쪽에서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배은덕과 그녀의 애인 토마스가 보였다. 나는 최하운을 끌고 천천히 그들의 앞에 섰다. 우리가 다가오자 배은덕은 활짝 웃으며 토마스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나를 향해 묘한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하운이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순이 중학교 동창생 배체리라고 합니다.” 하운이는 그녀가 내민 손을 멀뚱히 바라보다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최하운입니다. 배은덕씨.” 또박또박 배은덕이라는 이름에 힘주어 말하는 최하운. 순간 배은덕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쳐지나갔다. 배은덕을 배체리라고 알고 있는 토마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배은덕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고, 배은덕은 민망해진 손을 빠르게 치우며 몹시 당황한 듯 특유의 웃음소리로 이를 넘겼다. “아, 그리고 여기는 제 남자친구 토마스입니다.” “안녕하세요. 토마스입니다.” “예, 안녕하세요.” “아, 그럼 이제 우리 이만 자리에 앉을까요?” 나는 보았다. 순간 배은덕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리는 것을. 첫 순간부터 기분좋게 그녀를 한 방 먹였다. 그녀의 면상 앞에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욕구가 마구마구 피어올랐지만 애써 꾹 집어삼키며 살짝 웃음 지었다. 토마스가 의자를 빼며 배은덕을 먼저 앉게 하는 신사의 행동을 보이자.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최하운은 냉큼 자신도 따라했다. 그의 어색한 행동에 나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그가 빼내준 의자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였다. 어쨌든 잘 하고 있다, 최하운! 주문을 시키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며 식사를 시작하는 내내 배은덕만이 시끄럽게 조잘대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나의 좋지 않은 지난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배은덕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벌떡 자리에 일어서 시원하게 욕을 한바가지 퍼부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중학교 체육 시간 뜀틀을 하다 작은 키에 뜀틀을 넘지 못하고 얼굴을 박아 코피를 쏟은 이야기까지 꺼내는 것은 분명 최하운에게서 나를 떨어뜨리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최하운은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으며 무시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이마에 주름을 만든 채 묵묵히 맛없는 식사를 했다. 그녀의 실체를 모르는 토마스만이 그녀의 말에 맞장구 쳐주고 웃었다. 오늘 따라 무척 식사가 길게 느껴졌다. 역시 양식은 나와 맞지 않은 것 같다. 어서 먹고 한시라도 빨리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에 음식을 마구 입속에 집어넣었다. “아, 그런데 두 사람이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고 하던데 언제부터 사귀게 되신 거예요?” 그녀의 갑작스런 물음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배은덕을 바라보았다. 최하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인가? 배은덕과 연락이 두절 된지 오래전이라 이에 대해서 모를 것이다. 아마 배은망덕한 그녀는 사전에 나에 대해서 조사한 듯싶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는 굳은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고, 미리 연습한 최하운은 이에 대해 간단히 대답했다. “2달 전이요.” “아아, 2달 전이요?” “네.” “이상하다. 듣기로는 2달 전쯤이면 교생으로 갔던 학교의 고등학생과 사귀고 있지 않았던가?” 그녀의 말에 나와 최하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강태일에 대해서 까지 알아낸 건가? 그렇다면 지금 배은덕은 최하운이 가짜 애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 전부터 커플 행세를 하는 우리에게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던 것일지도. 그러한 우리가 얼마나 웃겨 보일까? 기가 막힌다. 그리고 갑자기 자존심이 확 상했다. “어머, 혹시 순이 양다리 걸친 거였어? 아, 이 말 하면 안 되나.” 그녀는 보이지 않게 조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입을 가리는 척 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화가 치밀어 오른 내가 벌떡 일어서려는 찰나 최하운이 포크로 그녀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소리 내어 팍 꽂았다. 그의 행동에 순간 배은덕과 토마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테이블 밑 최하운의 다른 한 손은 가만히 있으라는 듯 나의 손을 잡았다. 최하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배은덕을 노려보며 말했다. “거 참, 시끄럽네.” “예?” “어서 헛소리 들었는지 몰라도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당신이 신경 쓸 바 아니지 않나? 잘 사귀고 있는 우리들 방해할 더러운 궁리는 머릿속에서 좀 치웠으면 하는데. 기분 더러우니까.” “뭐, 뭐라고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 “그만 닥치고 드시라고.” 그리고 최하운은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리며 웃음 지었다. 최하운의 말에 배은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 때 옆에서 한국어에 서툰 토마스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다, 닥치고? 닥치고 먹는 게 뭐죠?” “토마스!” 자기 분에 이기지 못한 배은덕이 가만히 있으라는 듯 토마스를 소리쳐 불렀다. 최하운은 배은덕의 스테이크를 꽂았던 포크를 들어 올리며 토마스 앞에 내밀었다. 토마스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바라보다 최하운이 내민 스테이크를 조심스레 받아먹었다. 하운이는 계속해서 배은덕의 스테이크를 가져다 토마스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그러자 어느새 토마스의 입은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빵빵해졌다. 최하운은 빙긋 웃음 지으며 토마스에게 말했다. “이렇게 조용히 쳐드리시라는 겁니다.” 모욕을 당한 배은덕은 최하운을 씩씩 거리며 노려보았고, 최하운은 여유로운 얼굴로 몸을 뒤로 뺐다. 배은덕은 애써 화를 억누르며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분에 떨리는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우리 식사 끝나고 술이나 한 잔 할까요? 이렇게 헤어지기는 무척 섭섭하죠.” “뭐, 그리 원하신다면.” 최하운이 내 어깨에 긴 팔을 두르며 순순히 응했다. 바로 거절할 줄 알았던 최하운이 무슨 생각으로 이를 승낙한 것일까? 눈을 동그랗게 뜨며 최하운을 바라보다 배은덕을 바라보았다. 배은덕의 쭉 찢어진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나는 한 시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최하운이 응해버려 할 수 없이 근처의 한 술집에 왔다. 가시방석을 앉은 듯 지금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미 다 드러난 것 같은 이 마당에 최하운은 아무렇지 않은 듯 했다. 이럴 때 보면 매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즐기는 그의 사고방식이 조금 부럽기도 하다. 바로 자리를 옮기기 전 잠시 화장실에 갔을 때 배은덕이 뒤따라 왔었다. 그녀는 내게 가증스럽다는 얼굴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애쓰고 있다고. 어디 끝까지 한 번 잘해보라고.’ 분명 배은덕은 나를 망신시키기 위한 또 다른 궁리를 했었을 것이다. 아마 그녀는 나와 최하운이 사귀고 있지 않음을 어떻게는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게 만드려고 갖은 술수를 쓸지도. 지금 들이키는 이 쓰디쓴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 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쓴 술을 홀짝이고 있을 때, 배은덕이 취기가 오른 얼굴로 웃으며 제안을 한 가지 했다. “우리 그냥 먹기 심심한데 술내기나 할까요? “술내기?” 내가 순간 놀라며 되묻자 배은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유치하게 무슨 술내기야.” “어머, 술내기가 어때서. 재미있잖아.” “야, 내기가 무슨 재미가 있냐?” “김순이 이상하다. 왜 피하는 거지? 혹 질까봐 자신 없는 건가? 아니면 돈이 없어서?” 그녀는 일부러 내 승부욕을 자극시키기 위해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툭툭 내뱉었다. 알고 있지만 역시 화가 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얄밉게 웃고 있는 배은덕을 바라보다 흘깃 최하운을 보았다. 최하운이 얼굴을 굳히며 무어라고 말하려는 순간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하자, 하자고! 무슨 내기인데!” “오, 좋아. 내가 생각 해둔 게 있어. 오늘 이 만남의 테마로.” 그녀는 알 수 없는 얼굴을 지으며 자리에 일어서더니 이 술집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무어라고 말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불길한 느낌이 온 몸을 흘렀다. 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최하운은 발로 내 발을 툭 치며 노려보았다. 미간이 잔뜩 찡그려진 그의 모습에 나는 두 손을 모으며 호소했다. 울먹거리는 나의 모습에 최하운은 나를 흘겨보더니 한 숨을 깊게 쉬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때 술집 주인과 무언가의 이야기를 끝낸 배은덕이 또각또각 힐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자, 일어나.” “왜, 왜?” “왜긴, 내기 해야지.” 그녀는 억지로 나와 하운이를 끌고서 술집의 앞 중앙에 위치해 있는 낮은 무대로 데려갔다. 술집안의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호기심 어린 얼굴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몇몇의 여자는 인상을 쓰고 있는 최하운에게 관심을 보였다. 순간 못 보게 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콧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술집의 주인이 마이크를 들고서 우리 옆에서더니 술집 안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자, 여러분! 주목해주세요! 여기 멋진 두 커플이 내기를 한답니다. 어느 커플이 더욱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커플이냐는 주제를 가지고 내기를 할 것인데 어떤가요?” 급 사회자로 탈바꿈한 술집 주인의 말에 술집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좋다며 열렬한 호응을 보내왔다. 고개를 돌려 배은덕을 바라보았다. 배은덕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듯 비웃음을 보였다. 역시 그러할 줄 알았다. 공개적으로 우리가 서로 커플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여 내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순간 욱해서 이를 쉽게 승낙해버리고 말다니.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바닥에 시선을 놓고 있을 때 최하운이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나 지는 거 싫다.” “…….” “그러니까 잘하라고, 멍청아.” 입술을 삐죽 내밀며 녀석을 흘겨보았다. 눈을 내리깔며 나를 보던 최하운은 갑자기 살짝 웃더니 아무도 몰래 내 뒤통수 살짝 툭 쳤다. 나는 녀석이 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뚱한 얼굴을 짓다 피식 웃었다. 그래, 이미 시작된 것은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이 정신 바짝 차리고 이 상황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배은덕이 괘씸히 준비한 이 이벤트를 어디 한번 즐겨볼까. 그렇게 배은덕이 마련한 내기가 시작되었다. 진행 중인 커플게임은 흔히 볼 수 있는 참으로 유치한 게임들이었다. 첫 번째 게임은 역시나 빠질 수 없는 남자들의 체력게임. 이 게임에서 우리는 간단히 승리를 거머쥐었다.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하였던 최하운이었고, 토마스는 보기보다 훨씬 약골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게임은 얼마나 서로를 잘 알고 있느냐의 퀴즈 게임이었다. 여기서도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들을 이길 수 있었다. 사귀지는 않았으나 오랫동안 함께해 온 우리는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커플로서의 질문은 미리 사전에 준비하였기 때문에 쉽게 답할 수 있었다. 이 게임에서 한국어가 서투른 토마스는 자꾸만 맞춤법을 틀리고 엉성하게 답하여 술집 안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정말 시시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어찌하였든 우리가 이번 내기는 이긴 것이 다름없었다. “자, 마지막 빅게임 하나가 있습니다. 배체리씨와 토마스씨 커플이 역전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의 선택으로 승패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뭐? 나와 최하운은 동시에 얼굴이 구겨졌다. 거의 다 이긴 판이 다름없는데 역전할 수 있는 기회라니. 역시 저 콧수염의 술집 주인은 배체리의 편인 것이 틀림없다. 순간 갑자기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회의감이 들었다. 그렇게 한탄하며 한 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술집 주인의 말이 들려왔다. “바로 연인들의 대표적인 애정표현! 키스입니다!” 키스라는 말에 술집 안의 열기가 갑자기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람들은 함성소리를 크게 내지르며 박수를 쳤다. 최하운과 나는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키, 키스라니.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어떠한 것이라도 결국 내 부탁을 들어주던 녀석이라지만 이것만은 녀석도 싫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더 이상 이 웃기지도 않은 내기 때문에 그에게 폐를 끼칠 수 없었다. 옷깃을 꾹 잡으며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최하운은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녀석에게 그만하자고 말하려는 순간 최하운의 낮고도 작은 음성이 먼저 앞섰다. “여기 술값 비싸.” “어, 어? 그렇지.” “우리가 지면 저 것들 막 시킬 거야.” “아마도.” “나 돈 없다. 너도 돈 없지?” 그의 말에 마주하지 못하고 다른 쪽으로 돌리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하운이에게로 옮겼다. 최하운은 손을 주머니에 푹 찔러 넣으며 비뚤어진 자세로 나를 잠시 바라보다 갑자기 내게 얼굴을 가까이 내밀며 말했다. “그게 뭐 대수냐.” “…….” “이기면 되는 거지.” 그렇다면 키스 하자는 말 인가? 흔들림 없이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에 놀란 듯 눈이 커다래지는 내가 맺힌다. 그리고 그 속의 나는 이내 얼굴이 토마토처럼 발갛게 물들어진다. 갑자기 잔뜩 긴장하는 나의 모습에 최하운은 피식 웃었다. 이, 이 녀석은 지금 웃음이 나오는 것인가? 그냥 뽀뽀도 아니고 키스란 말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이 녀석과 키스하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다. 꿈에서도 나온 적이 없던 일이다. 그리고 이 상황은 충분히 배은덕이 생각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왜 난 전혀 생각지 못한 걸까. 그만큼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일지도. 쿵쾅쿵쾅 정신없이 뛰는 심장에 머릿속이 멍해진다. “어떤 커플의 키스가 맘에 들었는지 여러분이 심사해주시면 됩니다! 부드럽고 로맨틱한 키스! 아아, 제가 다 부끄러운데요. 자, 커플들 준비하시고 이제 멋지게 시작해주시죠!” 이 웃기는 이벤트의 사회자인 술집주인의 들뜬 목소리가 술집 안을 가득 메운다. 이내 그 소리는 귓가에서 멀어지더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내 눈 앞에 나를 응시하고 있는 최하운이 만이 보인다. 최하운이 내 어깨 위에 천천히 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비틀고 내게 다가왔다. 순간 온 몸이 굳어 눈을 감아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최하운은 바로 코앞에서 얼굴을 멈추더니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왜냐하면 엄청나게 차이나는 키 때문에 자세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서 얼굴을 떼어내며 나를 잠시 바라보던 최하운은 갑자기 나를 안아 들어올렸다. 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내 얼굴이 녀석의 얼굴보다 높아졌다. 그리하여 내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야 했다. 이 녀석 혹 일부러 내가 먼저 다가오게 한 것인가? 녀석이 무척 짓궂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배체리와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벌써 뜨겁게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으며 녀석을 향해 천천히 입술을 옮겼다. 지금 방향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 생각을 끝마친 순간 바로 내 입술위로 촉촉하고 말랑한 입술이 조심스레 닿았다. 순간 흠칫 놀랐다.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며 떼어내려는 찰나 내 등을 두르고 있는 그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가며 입술이 깊게 부딪혀 왔다. 그리고 놀라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마시멜로 같이 말랑한 혀가 조심스레 파고들었다. 처음해보는 키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놀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때 등에 최하운이 손가락으로 글자를 썼다. 이 상황에도 알아먹을 수 있게 또박또박 등에 쓰는 녀석의 메시지는 이렇게 말했다. ‘잘하고 있어’ 긴장했던 몸에 힘이 풀어지며 웃음이 나왔다. 그 때 갑자기 녀석이 장난스럽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순간 움찔한 나는 이에 질 수 없어 조금 더 세게 녀석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등 뒤에 그가 다시 글씨를 썼다. ‘아파’ 그리고는 그는 숨 막힐 정도로 더욱 입술을 깊게 묻어왔다. 나는 낯설어 거부하려던 그의 키스를 보다 편히 받아드릴 수 있었다. 녀석의 키스는 엄청난 흡입력이 있었다. 부드럽고도 약간은 격하게 이끌어 나가는 녀석의 키스에 점차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마치 첫 키스 처럼. 오랫동안 키스를 나눈 것 같다. 천천히 녀석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감았던 눈을 천천히 스르르 떴다. 눈을 뜬 순간 시야로 최하운이 들어왔다. 도저히 얼굴을 바라볼 수 없던 나는 곧바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온 몸이 활활 타오르듯 뜨거워졌다. 마치 귓가에서 뛰고 있는 듯 크게 들려오는 심장의 고동 소리에 귀가 멀 것 만 같았다. 툭툭 심장이 가슴을 두드린다. 갈수록 더욱 세차게 뛰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가슴 밖으로 튀어 나온 심장은 최하운에게 이렇게 소리칠 것이다. 지금 나 미칠 것 같다고 Chapter. 34 사랑? 사랑! 그 날 이후 내 마음에 알 수 없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누나!” 내 어깨를 흔들며 크게 소리쳐 부르는 도혁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도혁이는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이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한 녀석의 시선에 나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새침한 얼굴로 감싸 쥐는 바람에 흐트러졌던 머리를 정돈했다. “하운이 형이 잠깐 내려오래.” 하운이가? 흠칫 놀라며 도혁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조심스레 물었다. “왜?” “몰라. 가 봐.” “어, 없다고 그래.” “이미 있다고 그랬어.” “음, 그러면…… 보니까 어느새 나가고 없었다고 해!” 나의 말에 도혁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녀석에게 무언가를 들킨 것만 같아 얼굴이 나도 모르게 화악 달아올랐다. 의아한 얼굴로 나를 잠시 바라보던 도혁이는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입 꼬리 살짝 올라갔다. 녀석의 웃음에 흠칫 놀라며 바짝 몸을 세웠다. 나의 예민한 반응에 도혁이 눈이 더욱 가늘어지며 수상하다는 빛이 반짝인다. 이내 무언가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녀석의 두 입술이 천천히 열린다. 침을 꼴깍 삼키며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편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쭈, 이제 거짓말 까지.” 하운이의 목소리였다. 나는 움찔 놀라며 재빨리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최하운은 비뚤게 선채 팔짱을 끼고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쿵쾅쿵쾅. 으아, 또 이런다. 그 날 뒤로 하운이를 보면 이상하게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마치 불꽃이 터지듯 뜨겁고 격렬해진다. 어느 누구보다도 제일 좋은 친구였고, 제일 편한 친구였던 최하운이 이제는 다소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나는 요새 최하운을 자꾸만 피하게 되었다. 살짝 손끝만 스쳐지나가도 온 몸이 뜨거워진다. 도저히 이 이상한 몸으로 아무렇지 않게 녀석의 옆에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요새 녀석에게 거리를 두고 있다. 최하운 또한 내가 자신을 노골적으로 피하고 있음을 당연 느꼈고, 녀석은 그러한 나를 잡으려 했다. 그리고 나는 숨고, 또 도망을 간다. 이렇게 우리는 요새 정체를 알 수 없는 숨바꼭질 중이다. 우리 둘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번갈아 바라보던 도혁이는 나가보라는 하운이의 눈짓에 걸음을 돌렸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방실방실 웃으며 하운이의 옆에 선 도혁이는 갑자기 나를 향해 오른쪽 눈을 찡긋했다. 녀석의 윙크에 몸이 움찔거렸고, 도혁이는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며 방에서 나갔다. 도혁이가 나가자마자 하운이는 쿵- 문을 닫고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내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곧은 시선에 온 몸이 묶인 듯 했다. 도저히 그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던 나는 노골적으로 또 고개를 휙 돌리고 말았다. 가시방석을 앉은 듯 몹시 지금 이 순간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리하여 나는 초점을 잡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불안하게 굴렸다. 그렇게 한 참 동안 안절부절 못하고 쩔쩔매다 아무 말 없는 하운이가 갑자기 궁금하여 슬쩍 하운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하운이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깊은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또다시 재빨리 시선을 피하게 위해 눈동자를 돌리려 할 때 하운이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너 나한테 불만 있냐?” “어?” “요새 너 왜 자꾸 기분 나쁘게 나 피하는데.” “…….” “결국 네 부탁 들어주고, 내기 이겨서 술값까지 안냈겠다. 뭐가 불만이야?” 불만……. 불만이 아니다. 그 날 우리는 압도적인 표로 마지막 시합인 ‘키스’에서 당당히 이겼고 술값을 안 내게 되었다. 또한 배은덕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었고, 그녀에게서 잘 못 알았던 거 같다며 사과까지 받게 되었다. 모든 게 다 하운이 덕분에 이루어낼 수 있던 일이었다. 그런 내가 그에게 고마우면 고마웠지 불만을 가질리 없다. 다만 그 후로 자꾸만 그 날의 상황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며 나를 괴롭혀 왔다. 불쑥불쑥 느닷없이 찾아오질 않나, 녀석의 얼굴을 볼 때면 자꾸만 눈이 입술로 가지를 않나. 입술을 박박 문지르며 씻고 씻었지만 그 날 닿았던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의 흔적이 깊이 묻어 있는 듯 아직도 입술 위에 맴돌고 있다. 뜨겁게. 붉어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이며 뒤늦게 답했다. “아니야, 그런 거” “진짜?” “어.” “진짜로?” “그렇다니까.” “그럼 날 피하는 이유가 뭔데.” 갑자기 내 턱이 위로 들어 올려졌다.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최하운이 내게 허리를 깊이 숙인 채 가까이 있었다. 최하운은 조금 짜증이 난다는 듯 미간을 찡그린 채 나를 보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눈높이가 그의 입술에 머물러 있었다.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의 입술은 입술선이 곱고, 입술 색이 불그스름한 게 꽃잎같이 참 예쁘다. 나도 모르게 손이 천천히 뻗어졌고, 곧 나의 손가락은 그의 입술에 닿아있었다. 뒤늦게 정신이 든 순간이었다. 최하운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그의 입술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감추듯 손을 허리 뒤로 숨겼다. 나도 모르게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마, 만지고 싶어? 내가 이렇게 불순한 아이였나. 머릿속이 갑자기 뒤죽박죽 섞인다. 아니다. 그건 아닐 것이다. 내가 불순한 아이였더라면 그와 함께한 오랜 시간동안 가만히 있었을 리 없었다. 또한 지금까지 녀석에게서 이러한 감정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이 한가지다. “너 때문이야!” 갑자기 삿대질을 하며 버럭 소리 지르는 내 모습에 최하운은 깜짝 놀라다 이내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너 때문이라고! 네가 키스를 엄청 잘 했기 때문이야!” “뭐?” “너 연애 한 번도 안 해본 거 다 뻥이지? 그렇지? 안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잘할 수 있어!” “…….” “네가 너무 잘해서 그런 거야. 그래서 계속 생각나는 거야. 그래서 자꾸만 생각이나 날 괴롭히는 거라고!” 그렇게 나는 한 참 동안 혼자 소리치듯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씩씩 거리며 녀석을 노려보던 나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나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최하운은 팔짱을 끼고서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 때 녀석의 무감한 음성이 들려왔다. “뭐냐.” “…….” “요새 너 고프냐? 뭣하면 한 번 더 해줘?” 그의 말에 녀석에게로 시선을 휙 돌렸다. 뭐? 한 번 더해줘?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그 날 키스 이후, 너무나 부끄러워 미칠 것만 같은 나와 다르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했다. 조금은 쑥스러워 하거나, 어색해할 법도 한데 최하운은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단순한 뽀뽀와 같다고 생각하는 지 별다른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명색이 나도 여자인데 말이다. 우리는 친구이기 전에 이성인데 말이다. 그만큼 내가 여자로 안 보이는 것일까?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왠지 모르게 짜증이 잔뜩 났다.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최하운에게 크게 소리쳤다. “나가! 당분간 나 볼 생각 하지 마!” “야.” “나가라고! 나쁜 놈아!” 억지로 그의 등을 떠밀며 방에서 내보낸 후, 문을 잠가버렸다. 녀석이 나와의 ‘키스’에 대해서 너무 무감하다는 사실에 갑자기 심술이 나고, 화가 난다. 무엇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거린다. 머리 아픈 수학문제를 100문제 푼 듯 말이다. 문에 기대선 채 한 숨을 푹 내쉬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뭐, 뭔 것 같아?” 그 날의 일과 더불어 하운이에 대한 이상한 감정들을 털어 넣고서 은경이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은경이는 턱을 쓸며 나의 고민에 대하여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은경이의 해답을 목마르게 기다렸다. 잠시 후, 생각을 끝마친 것인지 은경이는 테이블을 툭 치며 내게 바짝 나가왔다. 잠시 숨을 멈추며 은경이를 응시했다. 흔들리는 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듯 투명한 눈동자로 나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던 은경이는 곧이어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어? 아,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래.” 방긋 웃으며 나를 향해 숙였던 몸을 다시 뒤로 뺐다. 그리고는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내게 이름 모를 웃음을 지으며 쉐이크를 홀짝인다. 너무 심각하게 고민했던 탓일까. 왠지 맥 빠지게 하는 대답이었다. 어쩌면 가장 바라던 답일지도 모른데 말이다. 그런데 듣고 나자 가슴이 허허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리고 왜 ‘부정’을 느끼는 것이지? 제일 상담을 잘하고, 연애에 박식한 은경이의 말이니 틀림없는 해답일 텐데 말이다. 그 허한 가슴 사이로 은경이의 목소리가 차가운 바람처럼 불어왔다. “솔직히 최하운 그 놈 얼굴이 여자 잡아먹을 얼굴이잖아. 아무리 친구라고 하지만 너도 명색이 여자인데 그런 놈이랑 키스까지 하고서 그런 감정 안 느끼면 넌 여자이길 포기해야지.” “아, 그런가.” “그래, 단순한 거야. 잠시 흔들리는 것뿐이고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자연스레 사라질 거야.” 은경이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다.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기 위해 앞에 놓인 주스를 들이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때 갑자기 은경이의 목소리가 불쑥 날카롭게 들여왔다. “최하운 소개시켜줘.” 마시고 있던 주스를 푸- 뿜어냈다. 은경이는 손으로 턱을 괜 채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나는 입술 주위에 잔뜩 묻은 주스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두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뭐라고?” “나 최하운 소개시켜 주라고.” “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내게 은경이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 “저번부터 보지만 진짜 내 스타일이야. 내가 좀 싸가지 없고, 섹시하고, 뭔가 알 수 없는 놈을 좋아하잖아.” “아, 그런데 어쩌지? 하운이는 이런 거 싫어하는데. 미안해, 아무래도 못……” “변명인가?” “뭐?” “변명 아니냐고. 소개시켜주기 싫어서.” 은경이가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 나는 당황한 얼굴로 손을 공중에 휘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지도 남자인데 여자를 싫어할 리 없잖아? 혹 무언가의 트라우마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친구인 네가 도와줘야지. 그리고 나는 자신이 있어. 내가 누구냐? 연애 박사 박은경이야. 분명 녀석은 내게 넘어 와. 그러니까 너는 다리만 만들어주면 돼.” 은경이가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 하운이가 평생 여자를 안 만나게 할 수 도 없는 일이고, 또한 은경이라면 하운이가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른다. 은경이는 남자에게 인기도 많고 아주 매력적인 친구이니까.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은경이에게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 알았어.” “오케이. 내일 이 곳 12시로 잡어.” “응.” “나 이만 다른 약속 있어서 먼저 일어서야겠다. 계산은 내가 하고 갈게. 고맙네, 친구~” 은경이는 부랴부랴 핸드백을 들고서 내 어깨를 툭 치며 자리를 떠났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자기 닥친 이 상황 앞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잠시 동안 멍하니 있던 나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은경이에게 약속한 이상 일단은 하운이에게 말이라도 해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하운이는 단 숨에 거절할 테지만 말이다. 혹 그러면 은경이게 어찌할 수 없다고 잘 말해야지. 그 순간 갑갑한 마음이 조금 트인다. 폴더를 열며 하운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흐르는 신호음에 갑자기 긴장이 된다. 잔뜩 몸에 힘을 주며 녀석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곧 이내 달칵- 핸드폰 너머로 하운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의 목소리는 조금 들떠있었다. [뭐냐, 너 당분간 보지 말자고 하지 않았나.] [아, 그랬지. 그 때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미안해. 있잖아.] [어.] [혹시 소개팅 할 생각 없어?] […….] [내 친구인데 오래전부터 너를 마음에 들어 했거든. 그래서 너 만나보고 싶다고 하네.] […….] [싫지?] 잠시 핸드폰 너머의 하운이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듣자마자 버럭 소리를 지르며 싫다고 성질을 냈었을 것이다. 의아한 얼굴로 녀석의 답을 기다리는데, 곧 하운이의 낮은 목소리가 느리게 들려왔다. [좋아. 알았어.] […….] [시간은 나중에 말해줘. 일이 있어서 먼저 끊을게.] 그리고 전화는 툭 끊겼다. 뚜뚜- 끊어진 신호음이 시끄럽게 울린다. 뭐, 뭐지? 당연히 싫다고 거절할 줄 알았던 하운이가 승낙을 했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졌다. 예상치도 못한 반응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알았다고 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한 일이었다. 갑자기 마음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이제 여자를 만나 볼 생각이 있는 것인가? 수많은 물음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어찌하였든 결론은 내일 두 사람이 소개팅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인데. 아, 그런데…… 뭘까. 가슴이 먹먹해진다. 왠지 모르게 무척 이 상황이 싫어진다. 그리고 내가 바보같이 느껴진다. 은경이는 좋은 친구이다.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게 생겼다. 거기다가 성격도 쾌활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 그리하여 남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상당히 많다. 여자인 내가 봐도 은경이는 좋은 여자이니까. 하운이에게 손색이 없을 만큼. 그렇지만…… “싫어.” 갑자기 투명한 눈물방울이 툭툭 쏟아져 나왔다. 그 눈물사이로 가슴 속 깊이 묻어있던 진실 된 마음이 흘러나온다. 지금까지 내가 줄곧 몰라왔고, 외면하던 마음. 그 마음의 투명한 눈물. 눈물을 훔치며 곧바로 은경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신호음이 가고 곧이어 시원스러운 은경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곧이어 천천히 벌려지는 입술사이로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은경아, 미안해.] [뭐가?] [최하운 소개 못 시켜줘.] [왜?] [그건……] […….] [내가 싫으니까.] [……] [내가 좋아하니까.] 나의 대답을 들은 은경이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미안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사랑인가?] [응, 사랑이야. 정말 미안해.] 울먹거리며 힘겹게 말했다. 정말 웃기지도 않을 것이다. 고민을 털어 놓고서, 그녀에게 아무 것도 아니란 답을 들었다. 그리고 소개팅을 시켜준다는 약속까지 했다. 불과 몇 십분 전의 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다짜고짜 전화해서 내가 싫어서, 좋아해서 소개팅 못시켜준다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려는 찰나 호탕한 웃음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멍한 얼굴로 눈을 끔벅이고 있을 때 은경이의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보, 알고 있었어. 네가 그 자식을 사랑을 한다는 걸.] [뭐?] [내가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 이유는 네가 혼자서 깨닫길 바랐기 때문이야. 그런데 이렇게 일찍 알아챌 줄이야. 어지간히도 내게 소개시켜주기 싫었던 모양이지?] [누구도……] […….] [누구도 싫어, 이젠.] 최하운에 대한 사랑을 인정한 이상 이제 누구에게도 녀석을 빼앗기기 싫다. 아니, 이것은 오래전부터 나도 모르게 품고 있던 내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나는 그랬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최하운이 평생 내 옆에 있는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고, 안도했다. 그리하여 헤어지고 나면 나는 녀석에게와 울었고, 위로를 받았다. 항상 내가 돌아가는 자리는 최하운의 옆이었으니까. 그게 내 제자리였다. 만약 녀석이 내게서 조금이라던 떠날 준비를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면 나는 아마 그 때 필사적으로 녀석을 붙잡았을 것이다. 내가 필요하니까. 내가…… 누구보다도 녀석을 좋아하니까. [예뻤어. 그 놈 이야기를 할 때마다 수줍어지던 네 얼굴이, 행복해하는 네 얼굴이, 그러면서 두려워하는 네 얼굴이.] […….] [네가 행복할 수 있는 자리는 최하운 옆인 것 같아. 그 행복을 놓치지 마.] [고마워, 은경아. 정말로 고마워.] 줄곧 부정했던 마음을 이제야 깨닫고 인정했다. 그러자 요새 들어 줄곧 초조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편해졌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으로 행복한 웃음을 수줍게 짓고 있는 내가 보인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버스를 타지 않고 걸었다. 답은 찾았으나 이리저리 어질러진 많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이다. 어쩌다 최하운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최하운을 좋아하게 된 것이지? 너무 늦게 깨닫게 된 사랑이었다. 그리하여 그 순간이 정확히 언제이고 좋아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하건데 어쩌면 나는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최하운에게 마음을 주었을지 모른다. 최하운과의 만남의 시작. 그 순간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였고, 행복의 시작이었으니까.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는데 한 사람의 뒷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최하운이었다. 마치 같은 곳을 걷고 있는 듯 이렇게 한 길에서 만났다. 기분 좋은 웃음이 얼굴위로 피어오른다. 천천히 녀석이 걷고 있는 뒤를 밟았다. 생각해보면 지금껏 나는 그보다 먼저 앞서 걸어왔던 듯싶다. 항상 따라와 줬으니까. 그 길이 어느 길이든 최하운은 항상 따라 와줬으니까. 이제는 내가 따라갈 차례이다. 낮과 밤의 경계선에 아슬아슬 걸려 있는 지금. 아름다운 오렌지 빛 노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가슴이 벅차도록 아름다운 노을은 점차 어둠에 먹히며 사라질 것이다. 순간 노을빛에 물드는 녀석이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어쩌면 내가 지금껏 깊숙한 곳에서 ‘사랑’을 숨겨두고 마음을 부정한 이유. 친구로 남으려 했던 이유. 그 이유는 아마 최하운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18살. 그 순간도 이렇게 아름다운 노을이 진 날이었다. 노을빛에 물드는 녀석이 그대로 어둠에 묻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최하운에게 사귀자고 했고,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줄곧 불안해했었다. 숱하게 헤어지고 멀어지던 주변의 연인들을 보며 그렇게 우리도 언젠가는 끝날까봐. 그에게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아 친구로 돌아가자고 했던 그 이유는 그저 핑계. 오랫동안 내 마음을 속이고 있던 속임수. ‘연인’ 보다는 ‘친구’가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겁쟁이의 마음. 어떻게든 옆에 있고만 싶었던 눈물 된 마음. 점차 걸음을 빨리하다 녀석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는 뒤에서 힘껏 그를 안았다. 옮기던 그의 발걸음이 멈춰지고, 흠칫 놀라던 그는 이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김순이?” “어떻게 알았어.” “짜리몽땅한 키에 납작한 가슴. 너밖에 더 있냐.” “쳇.” “그나저나 너 뭐하는 짓이냐.” 하운이는 자신을 두르고 있던 내 팔을 떼어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나는 더욱 팔에 힘을 가득 실었다. 나의 힘에 순간 하운이의 몸이 움찔거렸고, 이내 그는 내 손을 꽉 잡았다. “소개팅 취소됐어.” “그래? 알았어. 그런데 이만 놓지.” “싫어.” “뭐야, 너 이상해. 오늘 뭐 잘못 먹었냐?” 응, 이상하지. 이제 어찌할 수 없어. 그것은 말이지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그리고 이제 도망치지 않을 거니까. 쌓이고 쌓였던 무언가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 감당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 지금 줄곧 쌓아왔던 최하운에 대한 애정에 가슴이 터질 것 같다. 하지만 애써 억누른다. 김순이는 겁쟁이니까. 눈물이 새어 나왔다. 나는 녀석의 등에 얼굴을 푹 묻으며 말했다. “우리 잠시만 이러고 있자.” 그리고 소리 없는 고백을 한다. 강하게 힘주고 있는 이 두 팔로, 녀석의 등에 뜨겁게 토해내는 이 숨결로, 숨겨있던 진실의 투명한 이 눈물로. 잃어버릴까봐 너무나 두려워 친구로 남으려 했던 만큼 너를 사랑했다.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일부러 가슴 깊이 숨겨놓고 줄곧 나를 속이고 속아왔던 만큼 너를 사랑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Chapter. 35 상처는, 기억은 모두 숨 쉬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7년 전. 그 때 저는 키, 손, 발 모두 더욱 조그맣고, 세상을 보는 시야도 조그맣던 다섯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만개한 연분홍빛 벚꽃이 온기를 품고 보드랍게 불어오는 바람에 이끌려 춤추던 아름다운 봄이었지요. 어느 날 집 마당 커다란 벚꽃 나무 아래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공중 위를 나풀거리며 우수수 떨어지던 벚꽃 아래의 괴물은 무척 이질적으로 보였었지요. 너무 놀란 나머지 온 몸이 굳어 우두커니 서 있는데, 괴물이 저에게 천천히 손을 내밀었습니다. 저에게 내민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괴물의 손은 무척 크고 기다랬지요. 마치 아빠의 손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이내 흉측하게 일그러진 괴물의 얼굴이 크게 보이자 다섯 살의 어린 순이는 엉엉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 때 뒤에서 종종 빠르게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이내 내 앞에 나타난 엄마는 겁에 질려 우는 저를 안아 들어 올렸어요. 그리고는 끅끅 소리 내어 흐느끼는 저의 등을 토닥이며 난처하다는 듯 웃습니다. 한참 동안 엄마 품에 안겨 울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울음이 사그라지자 그렁그렁 눈물을 단 채 슬쩍 괴물을 바라보았습니다. 괴물은 눈이 마주친 저에게 슬픈 웃음을 짓더니 제게서 한 발자국 물러갑니다. 그리고는 따라오라는 듯 제게 손짓 했지요. 엄마가 나를 안은 채 괴물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합니다. 저는 화들짝 놀라며 엄마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엄마는 투명하게 반짝이는 눈을 반달로 휘며 입을 열었어요. “괜찮아.” “…….” “무섭지 않아.” 나지막이 말하는 목소리에 엄마의 옷깃을 꼭 붙들었고, 그렇게 괴물의 뒤를 따랐습니다. 이내 괴물과 함께 도착한 곳은 집안의 주방이었지요. 괴물은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분주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요리를 하는 듯 보이는 괴물의 뒷모습은 이상하게도 무척 아빠와 닮아있었어요. 매일 의자에 앉아 발을 흔들며 요리하는 아빠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순이였습니다. 하나하나의 빠르고도 안정된 동작이 정말 아빠의 요리하는 모습과 흡사했어요. 괴물인 것을 몰랐다면 아마 저는 ‘아빠’ 라고 부르며 뛰어가 다리를 붙들고 말았을 거예요. 익숙한 듯 빠르게 무언가를 만들어 낸 괴물은 접시에 무언가를 예쁘게 담아 제 앞으로 가져왔습니다. 그 것은 다섯 살 순이가 제일 좋아했던 감자고로케였지요. 의심쩍은 눈으로 괴물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괴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를 빤히 바라보았어요. 고개를 돌려 엄마를 바라보았지요.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어서 먹으로 눈짓합니다. 머뭇거리다 마침 배가 고프기도 하여 앙- 한입 베어 물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지요. 그 순간 입안에 번져가는 것은, 가슴에 번져 가는 것은 아빠의 맛이었습니다. 아빠가 해준 감자고로케. 순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빠의 감자고로케, 그 맛이었습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괴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 괴물이 제게 조심스레 팔을 벌렸습니다. 그 모습에 순간 흠칫 놀랐고, 엄마는 또 다시 깊은 목소리로 ‘괜찮아’라고 말합니다. 이내 순이의 작은 몸은 괴물의 품속에 천천히 안겼습니다. 그 순간 저의 몸에 가득 감싸오는 것은 익숙한 아빠의 향기였습니다. 순이가 항상 행복하게 잠들었던 아빠의 품인 것입니다. 동그랗게 눈을 뜨며 괴물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아, 아빠?” “…….” “아빠야?” 놀란 얼굴로 물었고, 괴물이 된 아빠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습니다. 저는 믿기지 않아 아빠의 얼굴을 한 참 동안 들여다보았습니다.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 위로 아빠의 인자한 얼굴이 겹쳐집니다. 아빠, 아빠였습니다. 순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빠였습니다. 괴물이 된 아빠였습니다. “아빠야, 순이야 아빠야.” “아빠, 얼굴이 이상해.” “그렇지?” “누가 아빠 얼굴 이렇게 만들었어? 누가 이렇게 아프게 만들었어?” “음, 못된 마녀가 아빠에게 저주를 걸었어.” “진짜?” “응.” 아빠가 슬프게 웃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고, 저는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뻗어 아빠의 얼굴을 만졌습니다. 아빠는 움찔하는가 싶더니, 이내 눈을 감으며 가만히 있었습니다. 아빠의 살은 쭈글쭈글해지고 색깔도 이상해져 있었습니다. 울음이 목구멍위로 치솟아 올랐고, 저는 울먹거리며 웅얼거리듯 말했어요. “나쁜 마녀, 못된 마녀.” “…….” “아빠, 걱정하지 마. 순이가 저주 꼭 풀어줄게. 꼭 잘생긴 아빠의 얼굴로 다시 만들어줄 게. 알았지?” 아빠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가만히 웃음을 짓습니다. 그렇게 억지웃음을 짓던 아빠는 자꾸만 흐려지는 눈동자에, 이내 순이를 강하게 끌어안습니다. 아빠는 숨이 막힐 정도로 저를 꽉 끌어안았고, 저는 엄마랑 아빠가 항상 제게 해주었던 듯 작은 손으로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습니다. 아빠의 등 뒤로 엄마가 보입니다. 엄마는 갓 깨어난 한 살배기 동생을 안은 채 펑펑 울고 있었습니다. 잇따라 저보다 작은 어린 동생도 크게 울음을 터트렸고, 아빠도 숨죽인 채 웁니다. 순이도 가족들의 눈물에 동화되어 따라 울기 시작했습니다. 투명한 눈물방울이 동글동글 맺히며 툭툭 쏟아져 내립니다. 만화 속 어느 주인공 보다 항상 강하고 멋졌던 아빠가 두려운 듯 부들부들 몸을 떨며 웁니다. 그 모습에 작은 순이의 가슴이 찌릿찌릿 쓰리게 아파옵니다. “아빠, 아빠는 여전히 순이에게 최고인 아빠야.” “…….”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아빠야.” “…….” “저주에 걸렸어도 괜찮아. 이젠 무섭지 않아. 아빠는 아빠니까.” 저주를 꼭 풀어주겠다는 여린 마음의 투명한 약속. 그 약속을 저는 훗날 뒤로 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뒤로 한 채 아빠의 저주를 미워하고, 부끄러워하고 숨기려 했습니다. 그래서 아빠를 잃었던 것일까요? 저주가 아빠의 얼굴처럼 심장을 녹여버렸던 것일까요? 그랬던…… 것일까요?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그로부터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세상에 눈이 트이고, 가슴 속의 순수한 마음의 구슬이 작아졌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요리사였던 아빠는 사고로 얼굴에 큰 화상을 입게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본래의 얼굴은 정말 허망하도록 뜨거운 물에 순식간 녹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몇 차례의 수술로 얼굴에 살이 붙었고 어느 정도 자리 잡게 되었으나, 여전히 흉측할 뿐이었습니다.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빠는 힘이 든 듯 자꾸 야위어 갔습니다. 각박한 세상의 따가운 시선에 몸이 지치고, 마음이 지치며 그렇게 작아져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느새 8살이 되었고,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즐겁게 놀고, 즐거워야 할 학교는 제게 병원만큼이나 곤욕이었습니다. 아이들의 따돌림과 아이들의 놀림에 매일 머리가 지끈거렸고, 가슴이 따끔거렸습니다. “너 순이 아빠 봤어? 완전 괴물이야.” “나도 봤어.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아휴, 끔찍해.” “순이 아빠는 괴물이래요~ 괴물이래요~ 흉측한 괴물이래요~” 아이들이 놀리며 까르륵 웃습니다. 그 웃는 얼굴들이 더욱 괴물 같아 보였지요. 항상 참고, 참았습니다. 오늘도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참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놀림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아이들의 이어지는 더한 놀림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자리에 벌떡 일어서며 버럭 소리쳤습니다. “괴물이라고 하지 마!” “괴물을 괴물이라 그러지!” “그래! 쟤도 언젠가 괴물이 될지 몰라. 괴물이 되기 전에 없애자!” “와아, 없애자! 괴물을 물리치자!” 아이들이 장난감 칼로 툭툭 몸을 쑤시고, 지우개를 던지며 저를 괴롭혀 왔습니다. 너무 화가 난 저는 그 중 한 아이를 잡아 바닥으로 밀쳤습니다. 등 뒤로 아픈 아이들의 발길질이 쏟아졌고, 저는 넘어진 아이를 조르며 말했습니다. “아니야! 괴물 아니야! 아니라고 말해!” “그게 괴물이지, 뭐가 아니야!” “아니라고!” 쌓여왔던 분노가 터지며 저는 바닥에 넘어진 아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찰싹- 찰싹- 회초리가 살결에 부딪히는 마찰음이 소름끼치게 방안을 가득 메웁니다. 종아리가 매운 고추를 먹은 듯 빨갛게 뜨거워집니다. 이를 악 물며 엄마의 회초리질을 힘겹게 받아냈습니다. 엄마는 화가 난 얼굴로 저를 따갑게 쏘아보며 높아진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니? 그렇게 싸움질 하라고 가르쳤어?” “…….” “잘 못 했어, 안 했어?” “…….” “말 안 해?” “애, 애들이 놀린단 말이야. 괴물 딸이라고 안 놀아 준단 말이야.” 쉴 새 없이 살결을 부딪쳐 오던 회초리가 우뚝 멈춰섭니다. 종아리도 아프고, 가슴도 아픕니다. 온 몸이 구석구석 아파옵니다. 세상에는 불치병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제 마음의 병을 고칠 약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툭툭 눈물을 쏟아내며 눈물 어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빠를 괴물이라 욕한단 말이야. 흉측하고, 무섭다고 놀린단 말이야. 아닌데… 아빠는 괴물이 아닌데. 아닌데…….” 잠시 아무 말 없던 엄마는 울음을 삼키며 다시 더욱 세게 회초리를 들고서 소리치듯 말했습니다. “그래도 참아야지! 친구를 그렇게 때리면 못 써!” “여보, 그만해.” “놔요.” “그만해, 다 내 잘 못이야. 다 내 잘 못이라고.” 어느새 다가온 아빠가 엄마의 손에서 회초리를 빼내며 말했습니다. 엄마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바닥을 응시하다 이내 자리에 벌떡 일어서며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그런 엄마의 모습에 씁쓸한 듯 웃던 아빠는 붉게 달아오른 저의 종아리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말합니다. “많이 아프지?” “…….” “아빠가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다.” 아빠는 항상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슬픈 날에도, 기분 좋은 날에도 이상하게 미안하다고만 말합니다. 그런 아빠가 너무 가엽고 슬퍼서 눈물이 납니다. 저는 아빠를 꽉 끌어안았습니다. 아직 제게 너무나 큰 아빠이지만 왠지 한 없이 작아 보였습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비눗방울처럼 말입니다. 아빠가 그 누구보다도 힘이 든다는 것 잘 압니다. 제가 이러면 아빠가 더욱 힘이 들 테지요? 외로워도, 무서워도 조금만 더 참아야겠지요. 이제는 순이가 강해져야겠어요. “애들이 아빠 놀려서 화났어.” “…….” “이제 안 싸울게. 화나도 참아볼게. 그러니까 아빠도 힘내.” “……” “아빠도 힘내. 순이도 힘낼게.” 그렇게 아빠와 저는 한 참 동안 서로를 꽉 안은 채 울었습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그 후 9살이 되던 해 저희 가족은 한적한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곳에서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설레었고, 기뻤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고무줄도 하고 줄넘기도 하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었습니다. 서울에서의 외로웠던 날들이 한 순간에 씻기는 듯 했습니다. 이 즐거움과 행복이 계속 지속되길 바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끝마치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가던 중 친구들이 갑자기 무언가를 보고서 웅성거립니다. “아, 흉측해!” “뭐, 뭐야? 얼굴이 왜 저래? 징그러워.” “어? 이쪽으로 오는데?”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저희들을 향해 빠르게 걸어오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빠가 가까이 올수록 아이들의 웅성거림은 더욱 시끄러워 졌습니다. 심장이 쿵쿵 불안하게 뜁니다. 머리가 뒤죽박죽 섞입니다. 무언가 급한 듯 빠르게 내 앞에 다가온 아빠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 손목을 붙들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가시 같은 시선이 가득 들어왔습니다. “순…….” “누, 누구세요.” “…….” “누구신데 이러세요.” 잡고 있던 아빠의 손을 뿌리치며 뒤로 물러섰습니다. 아빠는 커다래진 눈으로 잠시 동안 저를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그 시선을 회피했습니다.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아빠는 이내 어색하게 웃음 짓고선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아, 잘 못 착각했네. 애야, 미안하다.” 그리고 아빠는 쓸쓸히 뒤로 뒤돌아서며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 뒷모습이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아빠’라고 소리쳐 부를 수 없었습니다. 머릿속이 더욱 뒤죽박죽 섞입니다. 아이들이 멀어져가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제게 놀란 얼굴로 말했습니다. “아, 별꼴이다.” “순이야, 괜찮아? 무서웠지?” “아, 진짜 가까이서 보니 더욱 무섭게 생겼어. 으~ 꿈에 나올까봐 무섭다.” “또 오기 전에 빨리 가자.” 아이들이 저의 손을 꼭 붙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빠가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무거운 추를 달아놓은 듯 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이대로 땅 속으로 푹 꺼졌으면 싶었습니다,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를 바라보던 아빠의 슬픈 눈동자가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습니다. 아빠가 제게 급히 달려왔던 이유는 집에 돌아가서야 알았습니다. 엄마가 과로로 쓰러졌던 것입니다. 모아두었던 돈은 아빠의 수술비로 모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빠가 일자리를 잃게 되자 집안 사정은 더욱 안 좋아졌습니다. 그에 따라 아빠 대신 엄마가 더욱 많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잠든 엄마의 창백한 얼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고왔던 엄마의 얼굴이 어느새 십년은 흐른 듯 늙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 참 동안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순간 흠칫 놀란 저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습니다. 이내 아빠가 저의 옆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슬쩍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아빠는 물수건으로 엄마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주고 있었습니다. 엄마를 바라보는 아빠의 얼굴이 무척 심난 하고도 가슴 아파 보였습니다. 아빠에게 아까의 일에 대하여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이 쉽사리 떼어지지 않았습니다. 혹 나에게 몹시 실망했을 까봐 무서웠습니다. 안절부절 못하고 힐끔힐끔 눈치보고 있을 때, 아빠의 입술이 열렸습니다. 그 열린 입술 사이로 낮고도 무거운 음성이 새어나옵니다. “순이야, 오늘 미안하다.” “…….” “정신없는 바람에 아빠가 어리석은 짓 할 뻔 했네.” “…….” “정말 미안하구나.” 아빠는 엄마에게 계속해서 시선을 고정 시킨 채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미안해야하는 것은 아빠가 아니라 나인데……. 아빠는 또 제게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그런 약한 모습이 조금은 밉고, 가슴 아팠던 나는 아무 말 없이 방에서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저의 방으로와 문을 닦고서 펑펑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으며 무릎 사이에 얼굴을 깊이 묻었습니다.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들의 모습, 부모님들과 함께 손을 꼭 잡고 나들이 가는 아이들의 모습. 그 모습들이 제게는 아련한 꿈처럼 느껴집니다. 잡을 수 없고, 잡히지도 않아 서글픕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참기에는 제 가슴의 그릇이 너무 작았던 탓일까요. 모든 게 너무 힘이 듭니다.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정말 버거웠습니다. 그래서 우는 것 밖에 하지 못합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그로부터 일주일 뒤. 그 날도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매일 즐겁기만 했던 친구들과의 놀이가 요즘은 하나도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저와 아빠에게 거리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니, 제가 일방적으로 피한 것이지만 말이에요. 그 날 일에 대하여 하루빨리 사과를 해야 하는 데 계속 가슴만 앓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태어나 사과를 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처음 알았어요. 한 숨을 푹푹 쉬며 타박타박 걸음을 옮겼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인 채 그렇게 한 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발밑에 무언가 걸리는 가 싶더니 그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열려있던 가방 사이로 아빠가 다섯 살 생일 날 선물해 주었던 목각 인형이 툭 튀오나옵니다. 멀찌감치 떨어진 목각 인형을 줍기 위해 아픈 것도 잊고 벌떡 일어섰습니다. 떨어진 목각 인형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순간 자동차 하나가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산산조각이 난 목각 인형이 눈에 가득 들어옵니다. 재빨리 달려가 부서진 목각 인형을 어루만졌습니다. “어떡해. 어떡해. 아빠가 만들어 준 건데.” 눈물이 툭툭 쏟아져 나왔습니다. 부서진 목각 인형 위로 투명한 눈물방울이 빗방울처럼 떨어집니다. 한 방울 두 방울. 그렇게 젖어 갑니다. 저의 눈물에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목각 인형은 젖어 갑니다. 부서진 목각인형을 가방에 담고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빠의 얼굴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하는 걱정이 가득합니다. 가방을 마루 위에 내려놓고서, 주방에 계시는 것 같은 엄마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 호들갑스럽게 뛰어 들어오며 소리칩니다. “순이 엄마야, 순이 엄마야!” 이웃집 아주머니께서 급하신 듯 엄마를 애타게 부르셨고, 이내 주방에 계시던 엄마가 의아한 얼굴을 내밉니다. “네? 무슨 일이세요?” “시방 큰일 났데이!” “예?” “자네 서방이 차에 치어 지금 병원에 실려 갔다. 퍼뜩 가봐라~” 그 순간 심장이 멈춰집니다. 엄마는 믿기지 않은 듯 아주머니를 바라보다,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모든 게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 갑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병원으로 급히 옮겨지던 중 아빠의 숨이 끊어졌다 합니다.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 그렇게 영원히 떠지지 않을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조금만 더 길게 붙잡고 있지, 숨이 넘어 가려하더라도 엄마와 나 도혁이를 위해서 악착같이 붙잡고 있지. 아빠는 마지막 모습을 남기시지도 않고서, 서글픈 영정사진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한 순간이었고, 믿기지 않아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눈물을 터트린 순간 그대로 영원히 울 것만 같아 두려워서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침묵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을 때, 엄마에게 호들갑스레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한 분이 보였습니다. 학교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의 아주머니였습니다. 두 손을 꼭 붙들고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아주머니의 말이 비수처럼 파고듭니다. “멍하니 순이가 친구들이랑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더라. 그러다 갑자기 한 아가 뒤돌아보자 급하게 뒤돌아서 도망치듯 달려가다 차에 치이고 말았다 아이가.” 심장이 쿵- 시리게 울립니다. 그 날의 아빠의 슬픈 눈동자가 시야를 가득 메웁니다. 나…… 때문에. 다름 아닌 나 때문에. 쓰러지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모두들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커다래진 동공을 엄마에게로 스르르 옮기며 입을 천천히 열었습니다. “엄마, 나 때문이야.” “…….” “내가 아빠 죽게 만든 거야. 얼마 전에 나 친구들 앞에서 아빠 모른 척 했어.” “…….” “아빠보고 누구냐고, 누구신데 아는 척 하냐고 그랬어.” “…….” “나 때문이야. 내가 아빠 이렇게 만든 거야. 나 때문에…….” 벌벌 떨며 중얼거리는 나의 어깨를 엄마가 꽉 붙들었습니다. 엄하고도 슬픈 얼굴로 엄마가 제게 말했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 “누구의 책임도 없다. 사고는 사고일 뿐이다.” “…….” “그러니 허튼 생각 하지 마라. 너 때문이라고 자책해선 안 된다. 그러면 너만 다친다.” 끅끅 울음을 쏟아내는 저를 엄마가 꽉 끌어안았습니다. 엄마의 품에 안긴 채 참고 있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영원히 멈춰지지 않을 눈물이여. 그 투명하게 흐려지는 눈물 사이로 아빠의 얼굴이 보입니다. 다신 볼 수 없는 아빠의 얼굴이 보입니다. 그 누가 흉측하고, 무섭다고 놀려도 내게는 다정하게만 느껴지던 아빠의 얼굴. 엄마 품에서 빠져 나와 아빠의 영정 사진 앞에 다가갔습니다. 아빠의 영정사진은 사고가 일어나기 전의 건강한 얼굴이었습니다. 약속 했는데, 다시 이 건강한 얼굴로 내가 되돌려 준다고 약속했는데. 부질없는 약속이더라도, 헛된 약속이라 하더라도 지켜야만 했는데. “아, 아빠.” “…….” “아빠,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내가 잘 못 했어. 그러니까 가지마. 가지마.” “…….” “친구들 앞에서 우리 아빠라고,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아빠라고 소개하고 싶었어. 하고 싶었어. 하고 싶었는데 내가 너무 약했어. 내가 너무 바보 같았어. 하지만 이제는 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 “아빠, 가지마. 이렇게 가지마. 제발 가지마. 아아, 제발. 제발, 돌아와.” 부르고 부르지만 아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깊은 잠의 고요만 흘렀습니다. 아빠의 사진을 작은 가슴 속에 끌어안은 채 눈물지으며 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아빠입니다.” “…….” “세상에서 순이가 가장 사랑하는 아빠입니다.” 모두가 내 탓이 아니라고, 내 잘 못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저의 마음의 상처는 더욱 깊어졌고, 무거워졌습니다. ‘만약’ 이라는 비수가 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가슴속에 늘어났습니다. 그 비수에 찢긴 가슴에는 철철 눈물 맛이 나는 피가 흐릅니다. 만약 내가 그 날 그러하지만 않았다면, 그 후 미안하다는 말 아빠에게 용기 내어 한마디만 했다면. 모든 것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빠가 여전히 살아 있지 않았을 까. 그랬다면 그러하지 않았을까. ‘만약에…….’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그로부터 10년이 흘렀습니다. 세월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흘러만 갑니다. 저는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엄마의 가르침 아래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혼자 생활을 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대인관계도 원만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병이 하나 있습니다. 그 것은 ‘상처’라는 두려움의 공포. 혹 내가 준 ‘상처’ 때문에 누군가 또 아빠처럼 사라져 버릴까 무서웠습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아이들을 표정을 살폈고, 혹 기분 상해하면 내가 잘 못 한 일이 아니다 해도 무조건 사과를 하였습니다. 차라리 내가 ‘상처’를 받는 게 나았습니다. ‘상처’를 주는 것은 너무나도 무서웠습니다. 아이들은 그런 나를 바보같이 착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러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나를 보호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가식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여전히 나를 지키기는 데 급급합니다. 그 때처럼,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수수 쏟아지는 연분홍빛 벚꽃이 바람결을 따라 흩날립니다. 이렇게 벚꽃은 지고서도 또다시 찾아오는데, 왜 아빠는 찾아오지 않을까요. 그리하여 봄이 되고, 벚꽃이 흩날릴 때면 그 때의 아빠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그래, 네 잘 못이야.” 나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 후에 그가 꺼낸 말이었습니다. 그는 무감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볼 때면 항상 안타깝거나, 동정하는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한 눈빛이 더욱 저를 옭아매왔었습니다. 흔들림 없는 짙은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한 참 동안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 “어.” “…….” “네가 더욱 절망감을 안겨드렸을 거야. 말은 하지 않았지만 죽고 싶을 만큼 무척 힘들었을 거야.” 그 말에 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더욱 가벼워졌습니다. 햇빛에 그의 교복 와이셔츠가 더욱 하얗게 보입니다. 그는 하얀색을 닮았습니다. “그리고 너는 지금도 계속 잘 못 하고 있어.” “…….” “나아갈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아. 그 때의 멈춰진 기억 속에서 너를 지키는 데만 노력하고 있어.” “…….” “그렇게 매일 울고, 매일 아파하면 너의 잘못이 씻어지리라고 생각하냐? 그렇다고 생각해? 그게 아빠에게 용서를 빌고, 아빠의 슬픈 마음을 덜어내는 일이라 생각해?” 그의 서슬 퍼런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여전히 나는 자라지 않은 그 날의 꼬마였습니다. “그럼 뭘 것 같아?” “…….” “뒤늦게 아빠에게 잘 못을 빌고, 하늘에 계신 아빠를 기쁘게 하는 일이 뭘 것 같아?”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었습니다. 그의 새카만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낍니다. 그리고 굳어있던 나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나를 담아내는 그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굳게 다물고 있던 메마른 입술을 천천히 열었습니다. 입술 사이로 내뱉어져 나오는 음성은 촉촉했습니다. “사는 것.” “…….” “열심히 사는 것.” 답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아빠의 죽음을 내 책임으로 떠안고서 울고, 아파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저 두려워서 나를 그 안에 가둬놓았을 뿐이었습니다. 바보 같은 짓일 뿐이었습니다. 여전히 숨 쉬고 있는 상처와, 이 기억을 자라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가 천천히 긴 손을 뻗으며 얼굴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주었습니다. 그 순간 가슴 속에 있던 응어리가 떼어진 듯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집니다. 그의 손이 스친 부분이 이상하게도 뜨거워집니다.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릴 때, 그의 낮은 목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 살아야 돼.” “…….” “죄송한 만큼, 그 날의 잘못 만큼, 아빠의 슬픔만큼 넌 열심히 살아야 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그 동안의 어리석었던 마음에 대한 사죄였습니다. 툭툭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나를 향해 그가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얼굴을 가까이 했습니다. 그리고 아빠만큼이나 크고 긴 손으로 저의 눈가를 어루만졌습니다. “네가 우는 건 싫지만.” “…….” “운다는 건 아빠를 그리워하는 시리고도 따뜻한 마음이겠지.” “…….” “우는 건 조금만.” “…….” “웃는 건 넘칠 만큼.” 무표정으로 저를 줄곧 응시하던 그가 살짝 웃음 짓습니다. 그의 웃음에 저도 따라 눈물지으며 웃었습니다. 자주 웃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가끔식 살짝 웃어줄 때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흩날리는 벚꽃아래서 저를 흔들림 없이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팔을 벌리며 그를 꽉 안았습니다. 아빠와는 다른 향기였지만, 아빠만큼이나 맑고도 기분 좋은 향기가 후각을 툭툭 두드립니다. 스르르 눈을 감았습니다. 마치 풍선이 된 듯 몸이 무척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 소리가 마치 아름다운 멜로디 같습니다. 그 사이로 그 보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하지만.” “…….” “아빠의 죽음은 꼭 너 때문만이 아니야.” “…….” “그게 하늘의 뜻이었던 거야.” “…….” “하늘의 뜻은 애석하게도 우리가 바꿀 수 없어.” 그 때의 봄 날, 멈춰진 기억도 죽어있던 마음도 만물의 소생과 함께 살아났습니다. 상처는, 기억은 모두 숨 쉬고 있습니다. 여전히 서글픈 호흡으로 숨 쉬고 있습니다. 이들이 숨 쉬는 한 저는 가끔 슬퍼지기도, 그리워지기도, 눈물짓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변함없이 아빠라는 존재가 제 가슴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오늘도 그리움 속에서 하늘을 향해 투명한 웃음을 짓습니다. Chapter. 36 Love Mode “뭐니, 이거.”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백지였던 노트 위에 ‘최하운’의 이름이 가득 차 있던 것이다. 아, 정말로 중증이다. 내 마음을 알아차린 그 이후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그에 대한 애정이 커져가고 있다. 두려울 만큼. 뜨거운 한숨을 짧게 내뱉으며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순간 움찔했다. 왜냐하면 거울로 비친 내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거울 속의 김순이는 복숭아 빛으로 볼을 발그레 물들인 채 수줍게 웃고 있었다. 그러한 나의 모습이 낯설게 보이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하긴 김순이가 최하운을 짝사랑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나조차 몰랐는데 말이다. 당사자인 최하운은 아마 꿈에도 생각 못하겠지? 픽 웃음을 터트리며 거울 속 김순이게 소리쳤다. “김순이, 못된 최하운이가 그리도 좋으냐!”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선 나의 모습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수줍고, 투명하고, 따뜻하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었다. “그래, 좋다. 좋아서 미치겠다. 그래서 무섭다.” 혼자 주고받거니 하며 중얼거리다 손에서 펜을 내려놓으며 살짝 숙이고 있던 몸을 반듯하게 일어 세웠다. 정말 어찌하면 좋을까? 이대로 끙끙 가슴앓이만 하고 있을 순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항상 지금껏 그러해왔듯 내 막무가내 성격대로 들이 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남자 저 남자 그 것도 바로 옆에서 울며불며 다 만날 땐 언제고 이제와 너를 좋아한다고 한다면 누가 믿어 줄 텐가. 나조차 그리하여 믿지 못해 강태일과 헤어진 후 알면서도 줄곧 부정했는데 말이다. 장담하건데 분명 최하운은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최하운이 ‘지금까지 깨닫지 못 했어. 늦게 서야 알아 미안해’ 이러한 말들에 감동이라도 받을 위인이었다면 벌써 고백하고도 남았다. 그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항상 그러했지만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항상 나를 흔들림 없이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지나치리만큼 투명했고 솔직하다. 하지만 거짓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미지(未知)처럼 그의 눈동자만큼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내게 해왔던 그의 행동을 보아오면 분명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게 ‘사랑’인 것인가가 문제이다. 더군다나 최하운의 사랑의 형태는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랑이었다면 지금까지 옆에서 줄곧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과 연애하는 나를 지켜볼 리 없을 테지만. 그렇다면 정말로 내게 이성으로서 ‘사랑’은 없는 것일까. 만약 정말로 그 것이 ‘우정’이라면 나는 더욱 무서워 질 것이다. ‘사랑’이라는 마음을 고백한 순간부터 최하운과 나의 사이에서 ‘우정’이 존속될 수 없으니까. 그렇게 모든 걸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지금껏 항상 내가 두려워했던 일. “휴우.” 깊은 한 숨이 입술 사이로 새어져 나온다. 지금으로썬 어떻게 해야 할 지 도통 알 수 없으니 제자리걸음만 할뿐이다. 나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한 편으론 이대로 멈췄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어찌됐건 최하운의 옆에 있을 수 없는 것만큼은 죽도록 피하고 싶으니까. 이러한 위기봉착에 우울해하고 있을 때 ‘딩동’ 초인종 소리가 울려왔다. 나는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한 숨을 연속으로 푹푹 내뱉으며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나 못지않게 성질 급한 듯 연속으로 여러 번 누르는 초인종 소리에 우렁차게 소리쳤다. “네, 나갑니다! 나가요!” 현관문을 열자 보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태일이었다. 나는 잠시 동안 눈을 깜박이며 멍하니 달라진 태일이를 바라보았다. 심경에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몰라도 녀석의 길었던 머리가 짧게 잘려져 있었다. 그런데 무척 잘 어울렸다. 머리를 짧게 자르니 더욱 남자다워 보였고, 얼굴의 아름다운 골격이 잘 드러났다. 정말 태일이 이 녀석은 무엇을 먹고 사는지 몰라도 나날이 갈수록 멋있어 지는 느낌이다. 앞으로 지켜볼 미래가 아주 알차다. 아, 아직까지 조금은 긴장되고 설렌단 말이야. 에이, 정말 주책없는 김순이! 피식 혼자 웃으며 뒤늦게 반가운 얼굴로 태일이를 맞이했다. “우와, 이게 누구신가! 태일이, 안녕!” 싱글벙글 웃으며 크게 소리치자, 태일이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귀를 만지작거렸다. “오늘도 밤에 세숫대야에 밥 먹었냐. 그 우렁찬 목소리는 변함없군.” “세숫대야가 아니라 양푼이거든!” “세상 살다 그리 큰 양푼은 처음 봤다. 하긴 돼지 기준에는 작을 지도.” 빈정대는 그의 말에 나는 볼을 부풀리며 녀석을 흘겨보았고, 그러한 내 모습에 강태일은 피식 웃으며 주먹으로 빵빵해진 내 볼을 툭 가볍게 쳤다. 볼에 뿌-하고 바람이 빠지자 강태일은 가볍게 웃으며 하얀 운동화를 벗고서 집안으로 들어왔다. “짐은?” “아, 도혁이 방에 있어.” “짐 늦게 가지러 와서 미안하다.” “아니야, 아무튼 정말 잘 됐다. 나 진짜 기뻐.” 헤벌쭉 웃으며 말하자 강태일은 작게 웃음 지었다. 그의 웃는 모습이 이제 정말 자연스러워졌다. 초기에는 무척 부자연스러웠다. 잘 웃지 않기도 했지만, 웃을 때 억지로 웃는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요즘 들어 많이 행복해졌다는 것이겠지? 나까지 행복해지는 기분이다. 얼마 전에 그의 어머니가 직접 태일이를 찾으러 집에 방문했다. 강태일이 가출한 지 2주일만의 일이었다. 갑작스런 등장에 우리는 무척이나 놀랐었다. 그 당시 강태일 역시 믿기지 않은 듯 멍한 얼굴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찾아오자마자 걱정했다는 얼굴도 무엇도 아닌 무표정으로 강태일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이만 집으로 돌아가자.’ 단 이 한마디였다. 남들이 보기에 진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만큼 건조했다. 하지만 강태일은 그 말을 듣고서 꽤 놀란 듯싶었고, 부끄러운 듯 얼굴도 붉어졌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어머니를 알았기에, 지금 어머니가 진심인 것임을 느낀 것이다. 그게 바로 엄마와 아들, 가족이라는 것이겠지. 서로 표현을 잘 못하는 서투른 모자지만 두 사람은 말 하지 않아도 서로를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곧 도혁이의 방에서 강태일이 미리 꾸려놓았던 짐을 가져왔다. 현관 앞에 잠시 짐을 내려놓고서 강태일은 나를 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 고 있는 듯. 조금은 부담스러운 그의 시선에 손을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있잖아, 나 할 말 있는데…….” “말해.” “그게……” “나 하운이를 좋아하고 있어.” 내뱉듯 말하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두 귀를 열고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기다리는데 싱겁게도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감았던 눈을 한 쪽씩 천천히 뜨며 슬쩍 태일이를 바라보았다. 태일이는 눈이 마주치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 알았냐.” 그의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태일이를 바라보았다. 진작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태일이는 살짝 웃음 지으며 멍 때리는 나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툭 쳤다. “아무튼 멍청해.” “너 알고 있었어?” “너만 몰랐을 걸.” “응?” “네가 그 누구보다도 최하운을 소중히 생각하고 아낀다는 게 보였어. 처음에는 그저 친한 친구여서 그러려니 했는데, 제일 가까운 옆에서 지켜보니 알겠더라. 알고 나니 진짜 짜증나는 거야. 이 여자, 지금 나랑 뭐하자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 처음에는 역시 내게 거짓이었나 하는 생각에 엄청 화가 났어. 그래서 오기로라도 더 붙잡으려 했지. 하지만 그 걸 ‘거짓’이라고 치부하기엔 빌어먹게도 너는 너무 솔직했어. 네 얼굴, 네 행동은 나를 속이고 있지 않았지. 그저 진짜로 모르고 있고,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니 허탈하기도 하고.” 강태일은 지금까지 말해주지 않았던 그 때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괴롭다기보다는 소중한 추억을 생각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한 나의 모습에 강태일은 혀를 차며 말했다. “아무튼 제일 아는 척 할 땐 언제고 지 마음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니.” “미안해.” “됐다. 이 세상에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 지금이라도 깨닫다니 기특하다.” 강태일은 손을 들어 마치 어린아이에게 ‘잘했어요.’ 칭찬해주는 듯 내 머리를 흩트려주었다. 그리고서 내게 싱긋 웃어 보였다. 그의 웃음에 쑥스러워하다 따라 헤벌쭉 웃었다. 나는 정말로 강태일과 만나게 된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태일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줄곧 나는 내 마음도 모르고 이를 되풀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명색이 전 남자친구인데 다른 놈이랑 잘 되는 꼴이 썩 좋지는 않지만.” “응?” “네가 너무 멍청해서 하나만 알려 주지.”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이내 강태일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몸을 숙였다. 그리고는 내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온기를 실은 그의 속삭임이 간지럽게 흘러 들어온다. “있냐. 최하운 그 놈……” “…….” “지갑에 네 사진 갖고 다닌다.” “뭐?” 처음 안 사실에 깜짝 놀라며 커다래진 눈으로 강태일을 바라보았다. 그러한 낯간지러운 짓을 절대 할 리 없는 최하운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내 사진을 말이다. 강태일은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 것인지 피식피식 웃으며 혼잣말 하듯 말했다. “아무튼 그 놈이 제일 유치해.”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어제는 너무 늦은 밤이었던 터라 강태일이 말해준 사실을 바로 확인해 보지 못했다. 요새 이상하게도 야심한 시각에 최하운 집에 찾아가기 껄끄러워졌기 때문이다.(엉큼한 순이) 그리하여 나는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대로 파자마 차림으로 최하운 집에 다짜고짜 찾아갔다. 밤새 설레고 궁금해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정말일까? 라는 물음이 끊임없이 머리를 퉁퉁 맴돌았었다. 이제 확인해야 할 때이다. 부은 눈을 비비며 열쇠로 문을 열었다. 이 이른 시각에 최하운이 깨어 날리는 절대로 없으니까. 문을 열고서 조심스레 집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이른 아침의 집안은 무척 고요했다. 확인 사실을 하기 위해 발소리를 죽이며 곧바로 최하운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운이는 하얀 침대 위에서 널따란 등판을 보인 채 어린 아이처럼 새근새근 잠이 들어있었다. 그의 얼굴 앞에 조심스레 손을 흔들었다. 그가 깊이 잠에 빠져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옆 탁상에 올려 진 그의 지갑을 조심스레 들었다. 왠지 긴장이 된다. 심호흡을 내뱉으며 지갑을 천천히 열었다. 그런데 보자마자 튀어 나오는 생각은, 엥?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봐도 내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내 사진이 아닌 전지현님의 사진이 있었다. 강태일이 나를 농락한 것인가. 이를 바드득 갈며 욕지거리를 작게 내뱉었다. 뭐, 누구를 탓 하리오. 최하운이 절대 그러할 리 없는 놈이란 걸 알면서도 곧이곧대로 좋아서 믿는 내가 잘 못이지. 한 숨을 깊게 내쉬며 아름다운 전지현님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최하운 취향이 전지현님같은 스타일인가. 왠지 그 생각에 더욱 맥빠지는 기분이다. 전지현님이라 하면 나와는 정반대의 매력들을 소지하고 있는 분이 아닌가. 큰 키와 잘빠진 몸매. 정말 내 몸뚱이를 갖다 비교해보는 것 자체가 송구스럽다. 우울한 얼굴로 지갑을 다시 덮으려는 찰나, 나는 우뚝 그대로 정지했다. 전지현님의 사진을 빤히 들여다 보다 천천히 손을 들어 전지현님의 사진을 빼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뒤로 내 사진이 보였다. 그 사진은 18살의 김순이었다. 뭐야, 정말이었네? 확인을 사실하자 터지듯 얼굴이 화끈화끈 뜨겁게 달아올랐다. 보물찾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그가 꼭꼭 숨겨놓았던 무언가를 본 것만 같아 기분이 묘하다. 쿵쿵 거세게 방망이질 하는 심장을 안고서, 전지현님의 사진을 도로 끼워놓으며 지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잠든 최하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의 자는 모습은 언제나 봐도 사랑스럽다는 기분이 든다. 특히나 눈을 감았을 때 보는 그의 곧게 뻗은 긴 속눈썹은 정말 돈 주고 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정말 그의 자는 얼굴은 천사가 따로 없었다. 뭐, 매서운 눈매의 눈을 뜨고 험하고 거칠기 그지없는 입만 열면 못돼지지만 말이다. 그 생각에 풋- 웃음이 나왔다. 바닥에 털썩 앉으며 침대에 턱을 걸치고서 빤히 최하운을 바라보았다. 붉은 기가 감도는 녀석의 입술이 유난히 앵두처럼 예뻐 보인다. 아, 뽀뽀해주고 싶다. 엉큼한 생각이 마구마구 피어오르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털어내려고 하지만 그러할수록 뽀뽀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거세졌다. ‘뽀뽀하고 싶소.’ 꿀꺽- 그의 고운 얼굴 앞에 손을 힘껏 흔들었다. 깊게 잠이 든 것인지 미동이 없었다. 그래, 몰래 한 번만 쪽하고 도망가면 되는 것이다. 한 번 잠들면 업어가도 모르는 최하운이니깐. 그의 얼굴 앞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서 눈을 꼭 감고서 뽀뽀하기 위해 입술을 쭉 내밀었다. 거의 닿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정말 하늘이 무심하게도 낮은 저음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 뭐하냐.” 화들짝 놀라며 꼭 감고 있던 눈을 뜨니 바로 눈앞에서 최하운의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재빨리 몸을 뒤로 빼며 빨개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제길, 들켰다. 뽀뽀 한 번 하는 게 그리 나쁜 짓인가요, 네? 최하운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반쯤만 이불을 걸진 채 나를 가늘어진 눈으로 응시했다. 나는 그러한 그의 시선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 그게 거기기 그니까 네가 계속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숨도 잘 쉬지 않는 것 같아서 혹 죽은 것은 아닌가 싶어 인공호흡이라도 할까 해서…….” 목소리가 점점 모기소리마냥 작아졌다. 개도 안 믿을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차라리 이 입주둥이를 꿰매는 것이 낫다. 한 참 자책하다 슬쩍 아무런 말이 없는 최하운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최하운이 살짝 얼굴을 옆으로 기울이고서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아니, 믿어주는 건가. 하긴 하운이의 본판은 누구보다도 순수하니까.(순수랑 뭔 상관?) 그나저나 내가 철저히 감정을 숨기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계속해서 들키고 있는데 최하운은 정녕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이 정도이면 아무리 둔감한 녀석이라도 알아 챌 텐데 말이다. 정말 둔한 것인지,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것인지. 하긴 연애라곤 해본 적이 없는 녀석이 좋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리 만무하지만 말이다. 한 숨을 내뱉으며 바닥에서 일어설 때, 갑자기 최하운이 나의 손목을 붙잡고 자신에게로 잡아 당겼다. 그리하여 나는 녀석의 품에 안기듯 다가서게 되었다. 쿵쿵쿵- 심장 소리가 점점 볼륨을 올린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하운이를 바라보자, 녀석은 특유의 얄미운 얼굴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럼 못했던 거 마저 해볼까?” “뭐?”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긴속눈썹을 보이며 나를 내려다보던 최하운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이거 어쩌지? 밀어내야 하는 건가? 하지만 하고 싶은데? 여러 생각들이 뒤죽박죽 머릿속을 어지럽혀 왔다. 점점 녀석의 입술이 나의 입술위로 포개지려 했고,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뭐, 손해 볼 건 없고 좋으니까. 그런데 촉촉한 입술의 감촉 대신 이마위로 탁- 따가운 손길이 느껴졌다. 눈을 번쩍 뜨며 바라보니 최하운이 살짝 얼굴을 찡그린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너 요새 욕구불만이냐.” “뭐, 뭐?” “강태일이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남자를 그리워 하냐.” 그 말에 나는 말문을 잃었다. 최하운 해도 해도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정말 할 말이 없어졌다. “밝히는 여자 매력 없다.” 최하운은 피식 웃으며 나를 휙 떼어놓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옆에 걸어져 있던 티셔츠를 입었다. 그러한 최하운을 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둔한 것에도 화가나긴 하지만 키스하려는 척 나를 놀렸다는 것에 왠지 더욱 화가났다. 저 넓은 등짝에 손자국을 크게 짙게 만들어주고 싶을 만큼 부글부글 엻이 끓어오른다. 그렇게 한 참 저주를 퍼부으며 뚱해 있을 때, 최하운이 불쑥 나를 불렀다. “야.” “뭐!” “할 일도 없는 데 오늘 어디 놀러 갈까?” 그의 말에 나는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최하운이 먼저 놀러가자고 한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매일 내가 조르면 어쩔 수 없이 따라가 주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런 그가 먼저 나보고 놀러가자고 제안을 하다니 감격일 따름이었다. 어느새 토라져 있던 마음에서 벅찬 환희가 분수처럼 샘솟았다. 무조건 나는 OK!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나의 모습에 최하운은 피식 웃었다. “어디 가고 싶은데 없어?” “나, 나?” “그럼 너지 누구냐.” “아아, 음……” 잠시 골똘히 생각했다. 내가 연인들과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 허나 지금까지 누구와 한 번도 가지는 못한……. 생각났다. “동물원!”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말하는 나를 보고 최하운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이내 피식거렸다. 그리고는 다가와 내 머리를 툭툭 장난스럽게 치며 말했다. “역시 생긴거나 생각하는 거나 땅꼬마스럽군.” “아무튼 가는 거지? 그런 거지?” “그렇다니까.” “야호!” 와, 그렇다면 이거 데이트 인가? 데이트란 생각에 기분이 붕붕 떴다. 마치 발이 날개를 달아놓은 듯 가벼워진다. 나는 최하운의 침대에 올라가 펄쩍펄쩍 뛰었다. 마음을 깨닫고서 처음 함께 놀러가는 것이라 그런지 더욱 설레어 왔다. 어찌하였든 오늘 최하운에게 오늘의 데이트로 여자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굳게 다짐을 하고서 침대에서 폴짝 뛰어 내리며 의미심장한 얼굴로 녀석을 보았다. 그리고 입 꼬리를 길게 끌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조금 이따가 보자구! 나는 준비하러 가겠어!”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원숭이한테 작업 걸일 있냐. 뭘 그리 치장해.” 예쁜 원피스를 입고서 화장대 앞에 앉아 오랜만에 화장을 하는 내게 최하운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바보. 지금 내가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이러는 건데. 아무튼 세계최고, 우주최고 둔탱이 최하운이다. 투덜거리는 최하운의 말을 한 귀로 흘러 들으며 예쁘게 보이기 위해 열심히 화장을 했다. 화장을 끝마치고서 마지막으로 입술 위에 핑크빛 립글로스를 바르고 있을 때, 뒤편에서 하운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나 좋아하냐.” 그의 나지막한 말에 몸이 움찔거렸다. 역시 알아 챈 것이었던 걸까. 하지만 갑작스레 대놓고 물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나는 더듬거리며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허둥댔다. “저, 저…….” “진짜로 좋아하는 건가?” “그, 그니까…….” “그럼 내 마음은 어떨 것 같아?” 순간 쿵- 가슴이 울렸다. 간절히 알고 싶은 너의 마음. 립글로스를 내려놓고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 게 뭐니. 최하운의 손에는 만화책 하나가 들려 있었다. 요새 감수성이 풍부해진 내가 어제 빌려온 순정만화책이었다. 그는 그 만화책을 보며 대사를 읊었던 것이다. 그럼 나 혼자 생쇼?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야, 이 딴 걸 왜 읽냐. 아, 닭살 돋아.” 무심한 얼굴로 툭 책상위로 만화책을 던지며 최하운이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를 보던 최하운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친다. 왜냐하면 달아오른 얼굴이 가라앉지 않았으니까. 최하운은 이상하다는 듯 얼굴을 살짝 기울이며 나를 보았다. 하아, 진짜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이거 정말 마치 리허설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방금같이 이대로 있다간 그저 녀석과 그대로 쫑나고 말겠다. 아무래도 만만의 준비를 해야겠다. 나를 빤히 들여다보던 최하운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내게 말했다. “그 뭐냐. 볼터치? 너 볼터치를 너무 진하게 했다. 엄청 빨간데.” “멍청이.” “뭐?” 나의 말에 발끈하며 최하운이 눈을 매섭게 떴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이거 자연산이거든!” 그렇게 나는 소리치고서 씩씩거리며 녀석을 노려보다, 가방을 들고서 먼저 나왔다. 아무래도 앞으로 나의 사랑이 순탄할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든다. Chapter. 37 내가 지켜줄 게 높다란 하늘이 어느새 우중충 흐려졌다. 집에 나설 때 까지만 해도 햇볕 쨍쨍 화창한 날씨였는데, 갑작스레 폭우라도 한바탕 쏟아지려는 것인지 먹구름이 몰려오며 날씨가 을씨년스러워졌다. 게다가 더하여 주말이라 차가 막히는 것인지 버스 또한 더럽게 오지 않았다. 한마디로 최악인 상황이었다. 힐끔 하운이를 곁눈질하였다. 갑작스런 이 상황에 가기가 썩 내키지 않은 지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아무 말 없이 살짝 아랫입술을 내민 채 발로 바닥을 툭툭 치고 있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내가 너무 좋아했던 터라 먼저 내게 가지 말자고 말하지 못하는 싶었다. 나 역시 언제 또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라 쉽게 그만 돌아가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가도 되겠지 만은 이상하게도 왠지 가기 힘들어질지도 모른다는 이유 없는 느낌이 들었다. 작게 한 숨을 토하며 고개를 들어 잿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이리저리 흩날린다. 이 불어오는 바람에 먹구름이 몽땅 휩쓸려가고, 숨어 있던 태양이 눈부신 햇살을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내는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동물원에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하운이는 비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비오는 날일 때면 그는 몹시 우울해 보였다. 거기다 폭우가 쏟아지며 천둥번개가 치는 날 일 때면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던 고개를 내리고 천천히 시선을 돌려 하운이를 바라보았다. 곧 나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내리깔고 있던 그의 시선이 느리게 나를 향하여 옮겨왔다. 바람에 그의 칠흑같이 까만 머리칼이 찰랑이며 흔들린다. 하지만 바로 그 밑의 그의 눈은 언제나 그렇듯 흔들림이 없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면 항상 기분이 묘해진다. 뭐랄까. 곧은 그의 시선을 볼 때면 내게 항상 변함이 없을 것 같아서, 항상 내 곁에 나무처럼 있어 줄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해진다. 그 생각에 살포시 미소 짓는데, 그 순간 그의 동공이 커다래지는가 싶더니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쿵- 가슴이 울리며 사고의 회로가 마비되듯 정지된다. 귀가 먼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빵빵-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던 도심 속 차들의 소리도, 휘이- 세차게 불던 바람의 소리도, 줄곧 콩닥콩닥 뛰던 심장의 소리도……. 그 때 벨소리가 크게 울리며 멈추었던 의식의 흐름을 깨웠다. 하운이는 쓰윽 시선을 내게서 돌리며 가방에서 시끄럽게 우는 핸드폰을 꺼내들어 받았다. “어.” 순간 들었던 이상한 기분에 얼굴을 갸웃거리며 머리를 만지작거리는데, 최하운의 핸드폰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무표정한 얼굴로 통화를 하고 있는 하운이를 바라보았다. 본래 나 외의 여자 친구는 없을뿐더러, 설령 내가 모르는 친구들이 있다 해도 그의 성격상 전화통화까지 주고받을리가 없었다. 별말 없이 ‘어, 어.’라고만 말하던 하운이는 이내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핸드폰을 도로 가방에 집어넣는 그에게 슬쩍 다가서며 물었다. “누구?” “서린이.”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나 모르는 사이에 여자가 생긴 건가. 울컥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에 치밀었다. 나는 버럭 소리치듯 그에게 물었다. “서린이가 누구야!” 갑작스레 내가 소리 지르자 하운이는 움찔했다. 그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씩씩거리는 내게 말했다. “동생인데.” 그 순간 망치로 거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내 이상하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바라보는 하운이의 얼굴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는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더듬거렸다. “부, 부반장?” “그래.” “아, 맞아. 부반장 이름이 서린이었지. 아, 이제 연락하고 지내는가 보구나.”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렸다. 억지웃음으로 얼굴근육에 경련이 일어났다. 분명 밉상이게 보일 것이다.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데, 내 모습을 뚫어져라 보던 하운이는 갑자기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담배 갑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물며 말했다. “여자인 줄 알았냐.” “응? 아, 아니 뭐.” “그런데 뭘 그리 흥분하냐.” “아, 그니까 명색이 절친인데 나 몰래 여자 만나면 섭섭하니까.”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질투’ 때문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멋쩍어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하운이의 깊고도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걱정마라. 그 누구도 안 만날 거니깐.” “…….” “사랑 따윈 안 할 거야.” 그 말에 고개를 돌려 하운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아득한 먼 곳을 바라보는 듯 했다. 입술 사이로 희뿌연 담배 연기가 한 숨처럼 쏟아진다. 지독한 연기는 바람의 끝자락에 매달려 저 먼 곳으로 날아간다. 묵묵히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의 모습이 차가워 보이기도 하고, 서글퍼 보이기도 하다. 한 참 동안 서로 아무 말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 누군가 소란스럽게 불쑥 다가왔다. “어, 이게 누구야?” 남자 두 명이었다. 그 중 더벅머리에 수염을 기른 한 남자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하운이에게 아는 척을 했다. 그리 반가운 얼굴은 아닌지 하운이의 얼굴이 심통했다. 하운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성의 없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어, 그러네.” 그러한 하운이의 모습에 순간 남자의 얼굴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조소를 띄우며 하운이의 옆에 있던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능글맞게 나를 향해 웃음 지으며 빈정거렸다. 왠지 기분 나쁜 사람이다. “뭐냐. 이 조그만 애는 애인이냐, 조카냐. 아니면 원조교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남자 둘은 낄낄 거렸다. 순간 욱 하는 마음이 일었다. 뭐라고 한 마디 해주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가만히 있으라는 듯 최하운이 내 손을 잡았다. 하운이는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더니, 이내 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애는 나이 먹을 만큼 먹은 김순이다. 내 친구야.” ‘친구’라는 말에 남자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에도 ‘친구’라고 소개하는 그의 모습에 속상해진다. 친구인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냥 거짓이라도 애인이라고 소개해주길 바랐다. 하운이는 그들을 향해 턱짓을 하며 내게 말했다. “쟤는 애기 둘은 낳았을 것 같은 아저씨 같겠지만 그래 봬도 아직 젊은 최현호다.” “어머, 그래요? 반가워요. 나는 하운이 삼촌이나 되는 줄 알았지 뭐예요.” 그를 향해 빈정거리며 몇 마디 해주고서 허리를 휘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우리들의 모습에 최현호라는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곧 그는 애써 분을 참으며 억지웃음을 우리를 향해 지어 보였다. “그래, 요새는 잘 살고 있냐?” “그럭저럭.” “나 많이 걱정했다. 네가 지금쯤 정신병원에라도 있으면 어쩌나 했어.” 그의 말에 최하운의 얼굴이 무섭도록 차갑게 굳어졌다. 놀란 얼굴로 하운이를 보는 내 모습을 포착한 최현호는 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 친구는 모르려나?” “네?” “너 입 다물어.” 최하운이 무섭게 쏘아보며 경고를 주었고, 그는 더욱 구미가 당기는 듯 껄껄거리며 순대같이 두꺼운 입술을 계속해 움직였다. “하운이랑 제가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었죠. 그런데 그 때가 아마 12살 때였지?” “다물라 했다.” “저 녀석 엄마가 이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목매달고 자살했어요.” 뭐? 처음 안 사실에 깜짝 놀랐다. 한 번도 하운이의 엄마를 본 적이 없고,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먼 곳에서 계시는 줄로만 알았다. 저번에 이혼 후, 자신은 엄마 쪽에 남게 되었고, 최하운의 동생인 부반장 서린이가 아빠 쪽에 남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에게서 들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감춰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가슴이 불안하게 쿵쾅거린다. “하긴 모든 걸 버리고 사랑했던 남편이 첫사랑에 눈이 멀어 버리고 갔으니 죽을 맛이기도 했겠죠.” “…….” “그런데 말이죠. 한 5일 동안 집에 아무도 안 보이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한 저희 엄마가 찾아갔죠. 들어가자마자 고약한 냄새가 나더래요. 그게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였죠. 코를 막고서 방안을 들여다보니 불쌍한 이놈이 엄마가 죽었는데도 신고하지 않고 반쯤 정신 나간 얼굴로 시체를 꼭 껴안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는 신고를 하고 경찰에서 수사를 나왔는데도, 잔뜩 경계를 세우며 시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거예요. 미친개처럼 발광하기에 할 수 없이 마취를 해서 겨우 떼어놓을 수 있었죠.” “…….” “저희 엄마가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소름이 끼친 다네요. 어쨌든 그 후 외삼촌이랑 같이 살게 되었는데 애가 얼마나 음침하던지. 뭐, 눈앞에서 자기 엄마가 눈 뒤집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제정신으로 살긴 힘들겠지.” 처음 안 충격적인 사실에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집어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운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싸늘히 굳어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한 하운이를 보고 ‘그 때 생각하니 또 미치겠냐.’ 하며 최현호라는 남자는 낄낄거렸다. 울컥 가슴 속 깊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발로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소리 질렀다. “야, 이 개새끼야!” “뭐?” “이 제정신 나간 놈아! 이게 낄낄 웃으며 할 이야기냐! 어? 네가 더 미친놈이다! 네 일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안 되는 거라고!” 계속해서 연이어 그에게 발길질을 했고, 이내 그가 내 손목을 휙 낚아 채잡아갔다. “이 계집애가!” 녀석이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내게 내리치려 할 때, 옆에 혼이 나간 듯 멍하니 서있던 최하운이 재빨리 녀석의 손목을 잡았다. 세게 휘어잡는 최하운의 손길에 녀석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하운이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마른 입술을 뗐다. “지금 내 상태가 어떤 것 같아?” “이거 안 놔!” “지금 나 아주 빡 돌았거든.” “이 자식이 한 판 해보자는 거냐!” “네가 잘 알다시피 내가 제정신이 아니잖아? 그래서 잘못하며 나 너 죽일지도 모르는데.” 그 말에 불현 겁먹은 듯 최현호는 움찔했다. 최하운은 그런 그의 모습에 차갑게 웃었다. “그럼 기회를 주지. 하나.”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 “둘.” “지랄하지 마, 개새끼야!” “셋.” 셋이 떨어지자마자 그 녀석은 느슨해진 하운이의 손을 뿌리치며 헐레벌떡 도망쳤다. 끝까지 입만 살아서는 말이다. 멀어져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비소를 머금었다. “너는 예쁜 옷을 입거나 화장을 하면 뭐하냐.” 그의 말에 슬쩍 시선을 돌려 하운이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하운이는 손을 뻗어 내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그의 손길에 잔뜩 긴장이 됐다.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시선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머리를 정돈해주던 그의 손이 이내 떨어져 나가려 할 때 나는 재빨리 그의 손을 잡았다. 순간 그의 눈이 동그래진다. 살짝 얼굴을 숙이고서 얼굴을 붉히며 나는 말했다. “괜찮아. 너한테만 잘 보이면 돼…….” “너 오기 전에 낮술 했어?” “이 놈이 진짜!” 발끈하며 소리치자, 갑자기 그가 눈을 반달로 예쁘게 휘며 소리 내어 웃었다. 저렇게 해맑게 웃을 때면 할 말이 없어진다. 조금 더 그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건드릴 수가 없었다. 한 참 소리 내어 웃던 그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 버스 왔다!” 동물원으로 갈 초록색 버스가 뒤늦게야 오고 있었다. 이내 우리 앞에 버스가 멈춰 세워졌고, 하운이가 내 손을 끌며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나는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나의 행동에 그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급 변경!” “뭘?” “동물원 말고 다른 데 가고 싶어졌어.” 그가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입을 다물고서 그를 마주하던 나는 방긋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 어머니 만나러 가자.” 나의 말에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놀란 얼굴로 나를 보던 하운이는 이내 조금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나 그 날 후로 한 번도 찾아간 적 없어.” “왜?” “…….” “혼자 떠나간 엄마가 너무나 밉고 원망스러워서?” 나의 말에 하운이는 피식 슬프게 웃으며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커간다는 것은 단순히 키가 크고, 몸이 커진다는 것은 아닐 거야.” “…….” “그에 걸맞게 마음도 커져가야 해. 용서를 할 수 있는 마음, 이해를 할 수 있는 마음.” “…….” “만나보고 싶지 않아?” 나의 물음에 하운이는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잠시 입을 꾹 다물며 그를 응시했다. 멈췄던 버스가 출발하고, 하운이는 뒤늦게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는 잡은 우리 두 손에 힘을 꽉 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한 그의 모습에 살포시 미소 지었다. “혼자가 아니잖아.” “…….” “함께 만나러 가자.” 나의 말에 하운이는 전보다는 조금 크게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고속버스를 타고 경기도 양평에 있는 한 묘지공원에 왔다. 그리고 우리는 다신 깨어날 수 없는 불멸의 수면을 취하고 있는 많은 이들의 묘 중에서, 고통스러운 현실에 무너져 가장 가슴 아프게 잠이 든 하운이의 어머니 묘 앞에 서있다. 부슬부슬 비가 쏟아져 내린다. 마치 살아있는 눈으로 울지 못하고 있는 하운이를 대신하여 하늘이 울어주듯 말이다. 그렇게 쏟아지는 빗방울에 우리의 가슴이 젖어가고, 슬픔이 젖어간다. 하운이는 어머니의 묘 앞에서 거의 한 시간 째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한 참 동안 바라보기만 하였다. 오랜 시간 동안에 못 보아왔던 것을 한꺼번에 바라보려는 듯 그렇게 하염없이 시린 눈으로. 울지도 못하고 있는 하운이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져 왔다. 이내 차가운 빗방울 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툭툭 쏟아져 내렸다. 조금은 그의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죽기 전 한 번 더 혼자 남을 하운이를 생각해주시지. 그리고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하운이를 위해 이 악물고 살아주시지. 눈물로 마음은 전했다. ‘그래서는 안 되었습니다. 저렇게 멋지고 사랑스런 하운이를 혼자 남겨두시게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후, 하늘에서 보셨습니까? 하루하루를 눈물로 살았을, 외로움으로 살았을 당신의 아들을 보셨습니까? 그래서 혹은 후회하셨습니까? 미안함의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흘리셨다면, 하루하루를 빠짐없이 울어야 하실 것입니다. 함께 울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나약하셨습니다. 인간이란 나약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당신은 그 균형을 깨트리셨습니다. 버림받은 후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 지는 어느 누구도 모를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겨내야 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당신만을 바라봤을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서라도. 당신의 피와 살로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킨 ‘엄마’이기에……. 그 것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리입니다. 당신은 최하운의 엄마입니다.’ 털썩- 쓰러지듯 하운이가 주저앉았다. 그는 결국 슬픔을 못 이기고 부들부들 떨며 시린 울음을 쏟아냈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주었다. 안아주기에 작은 몸이지만, 넓은 이 마음으로 안아주었다. 부서지지 않게 꽉 끌어안으며 눈물을 쏟아낼 때, 하운이가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때 신고할 수 없었던 것은……” “…….” “진짜 혼자 남겨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너무 무서워서……” “…….” “할 수가 없었어.” “…….” “나 처음에 서린이와 함께 아빠에게 보내지려 했지만, 내 스스로 엄마에게 가겠다고 했어. 그 것은 엄마가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그래서 내가 지켜주어야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나날이 말라가는 엄마를 보면서 불안했어.” “…….” “하지만 살아주길 바랬어.” “…….” “꼭 살아주길 바랬어.” 더욱 빗줄기가 굵어지며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하늘에서 이를 보고 우는 하운이 어머니의 눈물이 더한 것일 것이다. 오랫동안 줄곧 서로를 피하고 혼자 울었던 두 모자는 오늘 이렇게 함께 울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할 수 없었지만, 하늘의 배려로 ‘비’라는 매개자를 통해 눈물로써 함께 한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한 참 동안 퍼부었던 빗줄기는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점점 짙은 회색의 먹구름이 흩어져 갔고, 그 사이로 환한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그 햇살에 투명한 물기를 먹은 하운이는 반짝거렸다.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하운이는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서 내게서 고개를 휙 돌리며 머쓱해 했다. 아무래도 내 앞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조금은 부끄러웠나 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등에 펄쩍 뛰어 올라탔다.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하운이는 당혹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뭐, 뭐야.” “나 다리 아파.” “…….” “응?” “자세 똑바로 해.” 그의 말에 나는 활짝 웃으며 안정적으로 하운이의 목에 팔을 두르고서 업혔다. 업히자마자 하운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를 맞아서 그런지 그의 몸이 무척 차가웠다. 체온으로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주고 싶어 더욱 그의 몸에 더욱 밀착했다. 최하운은 겉으로는 강해 보이고, 남자다워 보이지만 누구보다도 연약하다. 그랬기에 항상 내가 불안했었는지 모른다. 그가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느낌. 그와 함께한 시간이 짧다고는 할 수 없다. 오랜 시간 끝에 드디어 최하운의 속사정을 알게 되었다. 항상 혼자라고 생각했던 그는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이나 믿는 것에 서툴렀다. 그랬기에 항상 자신과 나의 사이에 선을 그으며, 그 선을 유지하려 노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선이 조금 허물어진 지금 나는 그의 영역 안에 들어가려 한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 같은 그의 마음을 이제는 내가 지켜줄 것이다. 혼자서는 벅찼을 그의 슬픔과 고통 이제 내가 반은 가져갈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를 지켜주겠다는 이 다짐으로, 그에게 고백하려 한다. 친구로서 ‘우정’이 아닌 한 여자로서 ‘사랑’으로 죽을 때 까지 너의 옆에서 함께 하고 싶다는 고백. 설령 그가 거절할지 모른다 해도 내 마음을 더 이상 숨기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비겁한 짓일 뿐이었다. 그가 내게서 멀어지려 한다면 내가 그의 곁에 다가가면 된다. 혹 그 것이 싫다고 화를 내면 조금은 떨어져 멀리서 바라보면 된다. 거짓으로 둘러진 ‘사랑’이 아닌 진실 된 ‘사랑’으로. 마음의 다짐을 끝낸 나는 비장한 얼굴로 ‘파이팅’을 외치며 목소리에 힘을 실어 열었다. “하운아.” “나 학교 자퇴했어.” “어, 어?” 갑작스런 하운이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멋지게 고백하려던 순간 갑자기 끼어들다니. 아무튼 세계최고, 우주최고 눈치 없는 둔탱이 최하운이다. 그 생각에 피식 웃음 짓고 있을 때, 깊이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나 유학가기로 했거든.” 쿵- 그 말에 순간 심장이 멎었다. 지켜준다고 나를 걸고 약속한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였다. Chapter. 38 잡을 수 없는 바람처럼 잠시 동안 긴 침묵이 흘렀다. 너무나 갑작스러웠던 지라 머릿속이 그대로 정지한 채 시간을 물고 늘어졌다. 하운이는 그런 내게 생각할 틈을 주려는 듯 열었던 말문을 잠시 접으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타박타박 낮게 울리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그대로 점점 작아지며 소멸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나를 금방이라도 떠나버릴 것 같아 가슴이 욱신거린다. 차오르는 슬픔이 안개처럼 뿌옇게 피어오르며 시야를 흐리게 한다. 일단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입술을 떼는데, 목구멍에 마개를 꽉 막아 놓은 듯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뻥- 터질 듯 막혀온다. 한 숨을 깊게 내뱉은 후,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잠깐 내려줘.” 나의 말에 하운이는 기다렸다는 듯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다리를 구부리며 안전하게 내릴 수 있도록 몸을 깊숙이 낮추었다. 나는 그의 널따란 등에 내리고서 재빨리 걸음을 옮겨 그와 마주섰다. 그가 채 몸을 일으켜 세우기도 전이었다. 하운이는 차분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 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허리를 곧게 피며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를 마주하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목이 메어 목소리가 깊이 잠겨 있었다. “갑자기 왜…….” “갑자기는 아니야. 오래 전부터 준비했어.” “그렇다면 왜 굳이 유학 가겠다는 거야? 너 학교도 제일 잘나가는 명문대이잖아. 꼭 가야 할…….” “나 좀 더 공부하고 싶은 게 있어. 사실 나 유치하게도 오기로 간 거뿐이야. 법 같은 거 전혀 흥미 없어.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깊이 공부해볼까 해.”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그가 말한다. 마치 외우고 또 외워서 대답하듯 딱딱한 목소리로 막힘없이 술술. 그는 이렇게 내게서 떠날 준비를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보 같은 난 지금껏 그가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임을 오만함으로 믿고 있었다. 평생 이대로 함께할 것이라는 확실한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 최하운도 최하운 나름의 꿈이 있고, 삶이 있는데 언제나 내 곁에만 있을 수 는 없을 것이다. 또한 사랑 따위는 하지 않겠다던 그의 닫힌 마음을 열어줄 인연의 상대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때면 나는 그의 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다. 나는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을 막아야 할 이유가 없다. 만약 항상 그에게 고집 부렸던 것처럼 가지 말라고 붙잡는다면 정말 난 이기적이다. 하지만 알고 있음에도 그를 보내기 싫다. 18살 그와 만난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의 길목엔 항상 그가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아래층으로 하운이가 이사 오면서 부터는 가족보다, 친구보다, 사귀었던 남자친구 보다, 즉 그 어느 누구보다 나는 제일 가까운 곳에서 그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그것을 당연하듯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호기심에, 착각에 다른 길에 들어서고 되돌아와도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뒤늦게야 내가 정착해야 할 자리가 그 자리임을 깨달았다. 죽어도 그와 떨어져 있는 것만큼은 싫다. 이 세상의 내 행복이 된 그를 잃고 싶지 않다. 그래, 난 내 생각 밖에 못하는 이기적이고 못된 애이다. 그래서 최하운을 어떻게 서든 붙잡아야겠다. “최하운.” 나지막한 나의 부름에 하운이는 살짝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올렸다. 그의 눈과 마주치자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오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코가 찡해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홍수처럼 터져 나올 것만 같다. 나는 끓어오르는 슬픔을 애써 삼키며 그에게 말했다. “내가……” “…….”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 거야?” 나의 물음에 그는 잠시 나를 주시했다. 나를 깊이 들여다보는 그의 까만 눈동자는 수수께끼처럼 도통 알 수 없는 눈이었다. 주먹을 동그랗게 꽉 말아 쥐며 굳게 닫혀 있는 그의 입술을 응시했다. 심장이 일정하지 못하게 쿵쿵 거린다. 불안함이 온몸에 전율한다. 한참 후, 그의 입술이 슬로우 모션으로 느리게 열렸다. “아니.” 그의 말에 쿵- 가슴이 시리게 파동을 일으키며 울렸다. 조바심이 난 나는 그의 옷깃을 붙들었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떨리는 음성을 쏟아냈다. “내가 매달리며 울어도?” “…….” “가지 못하게 단식이라도 벌인다 해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의 옷깃을 붙들고 있던 손에 힘이 빠져나가며 툭 떨어졌다. 그와 함께 눈가에 그렁그렁 고여 있던 눈물이 슬픔을 등지고서 살결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쓰디쓴 눈물을 삼키다, 주먹을 불끈 쥐며 그에게 애원했다. “가지마.” “…….” “하운아 가지마. 응? 제발 가지마라. 내가 이제 진짜 잘해줄게. 투정도 안 부리고, 놀리지도 않고 진짜 잘 해줄게. 널 위해서 뭐든지 해줄게. 그러니까 가지마. 제발 가지마. 나는 너 없으면……” 치솟는 슬픔에 말꼬리가 눈물로 흐려졌다. 펑펑 소낙비처럼 줄기차게 눈물방울이 쏟아졌다. 하운이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나를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뚝뚝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나의 눈물에 그의 손이 금세 젖는다. 나는 그 젖은 손을 꽉 잡았다. 하운이가 부드럽고도 낮은 음성으로 내게 달래듯 말했다. “울지 마.” “…….” “나 때문에 우는 눈물은 너무 아깝다.” “…….” “갑작스러운 일이라 황당하고 섭섭하다는 것 잘 알아. 하지만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가끔씩 한국 올 거고 2,3년 정도만 있다 올 거야. 떨어져 있다 해도 변하지 않아.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아. 나는 변함없이 최하운이고, 너는 김순이야.” 잠시 그가 말을 멈추었다. 잡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가 작은 목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흐느낌을 멈추고서 들어보려고 귀를 활짝 열어보지만, 겨우 끝말만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최하운이야.” 헤어진 시간 속에 서로에 대한 마음이 변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운 것이 아니다. 나는 변함이 없을 거기에 무섭지 않다. 그가 설령 변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저 단지 나는 텅 빈 그의 자리가 무서울 뿐이다. ‘그리움’이 무서울 뿐이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말이 이토록 가슴 아픈 말일 줄 몰랐다. 그 아픔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무서웠던 나는 그대로 그의 손을 놓고서 뒤돌아 달렸다. 그는 나를 소리쳐 부르지도 않았고, 따라오지도 않았다. 짐작하건데 그저 우두커니 서서 멀어져가는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정말로 갑작스럽게 덮쳐 온 이 시련 앞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도망치고 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얼음같이 차가웠던 검푸른 새벽녘이 지나가고, 따갑도록 눈부신 아침햇살과 함께 동이 텄다. 그리고 그제야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멈출 줄 몰랐던 눈물이 멈추었다. 펑펑 울고 나면 괜찮아 질까 했지만 왠지 물에 젖은 솜이불마냥 더욱 무거워진 듯싶다. 아픈 두 눈을 만지니 탱탱 불어버린 오뎅 마냥 눈물에 눈이 탱탱 부어있었다. 그래서 눈조차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힘겹게 눈을 몇 차례 깜박이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에는 휴지가 한 가득 쌓여 있었다. 수건을 가지고 울 걸 그랬나 보다. 이 상황에도 갑자기 휴지 값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알뜰살뜰 나였다. 짧게 한 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며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거울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정말 무어라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초라하기 그지없었으며 추했다. 아주 처참한 몰골이었다. 창피하여 고개를 휙 돌리는 데 책꽂이 구석에 꽂혀져 있는 순정만화책이 눈에 들어왔다. 정신이 없어 반납한다는 걸 깜박하고 있었다. 맙소사, 연체료가 붙었겠다. 오늘 꼭 반납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만화책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데 순간 불쑥 무언가 생각이 났다. [너 나 좋아하냐.] 하운이가 만화책을 보며 대사를 읊었던 것을 나는 진짜 묻는 것으로 착각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한 대사가 있었나? 생각해보니 그러한 대사가 없었던 듯싶다. 곧바로 몸을 돌려 책꽂이에서 만화책을 빼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꼼꼼히 처음부터 읽어가기 시작했다.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연속해 넘어가고 마지막 페이지 넘기는 순간 짧은 신음이 토해져 나왔다. 역시나 그러한 대사는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나 내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하고 있던 것일까? 피식- 씁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모른 척 하고 싶을 만큼 부담스러웠나 보다. 하긴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친구’란 관계를 깨트리지 않기 위해선 그 방법이 녀석에겐 최선이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다면 갑자기 유학 간다는 것도 혹 나 때문인 것일까. 욱신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것이 사실이라면 아무렇지 않은 척 녀석을 보내는 것이 옳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를 위한 배려이고, 위태로워진 관계를 계속해 유지해 갈 수 있는 비상출구이니까. “그래, 정리하자.” 슬픈 다짐을 하고서 손에 들린 만화책을 책에 꽂았다. 그리고 애써 씩씩하게 웃음 지으며 웅크리고 있어 찌뿌듯했던 몸을 주물렀다. 그 때 갑자기 배 속에서 꼬르륵- 신호가 울렸다. 역시 슬퍼도, 아파도 인간이기에 배고픈 건 어찌할 수 없다. 뭐, 생리현상에 철두철미한 내가 어제 하루 종일 내내 밥도 안 먹고 운 것 자체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텅 빈 배를 채우기 위해 방에서 나왔다. 배우를 채우면 이 허허한 가슴도 조금은 채워지려나. 부엌으로가 내 전용 양푼에 하얀 쌀밥을 한 가득 푸고서, 남은 반찬을 이것저것 넣었다. 그리고서 엄마가 시골에서 직접 재배해 만들어주신 빛깔 좋은 고추장을 두 숟가락 듬뿍 퍼 넣었다. 마지막으로 비빔밥에서 빠질 수 없는 고소한 참기름을 적당히 넣고서 골고루 잘 섞일 수 있도록 비볐다. 먹기 좋게 잘 비벼진 비빔밥을 들고서 거실에 나왔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틀고 소파에 앉아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멍하니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퍼먹고 있을 때, 도혁이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온 김도혁은 나를 보고서 흠칫 놀랐다. 이내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이구, 청승이다.” 나는 도혁이의 퉁명스러운 말을 한 귀로 흘러들으며 먹는 데 열중했다. 화를 낼 기력도 없었으나, 걱정해준다는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우는 와중에 기억하건데 그래도 누나라고 걱정이 된 것인지 몇 차례 계속 내 방문을 두드리며 찾아와주었다. “하운이 형 유학 가는 거 땜에 그러냐?” “…….” “그러니까 내가 잡으라고 할 때 진작 잡을 것이지.” 그 말에 찌릿 녀석을 노려보았다. 김도혁은 그러한 나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퉁퉁 부은 눈으로 노려보지 마라. 꿈에 나올까 무섭다.” 그렇게 빈정거리며 녀석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더 나올 눈물이 있는 것인지 찔끔 눈물이 흘러나왔다. 후회. 그래, 나 역시 조금은 후회가 된다. 하루라도 좀 더 빨리 내 마음을 알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하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미 시간은 흘렀다. 우리의 시간은 비디오처럼 되감기해서 되돌릴 수 없다. 지금 이 순간도 흐르고, 흐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후회’란 것이 있는 것일 것이다. 잠시 훌쩍이던 나는 고개를 흔들며 숟가락으로 비빔밥을 한가득 퍼 입 속에 넣었다. 터질 것처럼 빵빵하게 넣고서 우물우물 씹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맛이 없는지 모르겠다. 드라마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울면서 먹는 비빔밥 맛이 이렇게 썼었을까. 꿀꺽- 삼키고서 또 한가득 입안에 비빔밥을 쑤셔 넣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덜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몸이 굳었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숟가락을 툭 떨어트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최하운이었다. 석고상이 된 것처럼 몸이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굳은 얼굴로 잠시 나를 바라보던 하운이의 입술이 곧이어 열렸다. “김순이.” 그의 입술사이로 내 이름이 흘러나온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재빨리 방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문을 쾅 닫으며 열리지 않도록 잠갔다. 그리고서 굳게 잠근 문에 기대서며 거칠어진 숨을 입술사이로 빠르게 토했다. 잠시 동안은 최하운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얼굴만 보아도 무너져버려 마음정리가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서 이해하고, 이겨내어 마지막에 녀석을 멋지게 보내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엉망이 된 이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떠나는 최하운에게 무거운 짐밖에 되지 않을 그 모습을.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으며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 때 등과 문 뒤로 하운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유라고 알아?”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조금은 당황스러웠던 지라 나는 그의 질문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운이는 3초간 말을 멈추었다, 다시 계속해 이어 말했다. “그 녀석은 말이야. 엄마가 돌아가시고 후에 외삼촌이랑 살게 됐어. 외삼촌은 당시 유명한 작곡가이셨는데, 음악에 대하여 이것저것 열심히 가르쳐주셨어. 그리고 외삼촌은 곧잘 배우는 녀석을 보고 무척 기뻐하셨지. 그런데 당시 모든 걸 부정하려 했던 아이는 무척 음악에 대하여 흥미가 있고, 관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싫은 척 했어. 그러면서 몰래몰래 공부하고, 서툴게 음악도 만들어냈지. 지금 생각하건데 외삼촌은 아마 다 알고 계셨을 거야. 어쨌든 아이는 괜한 마음에 진로를 그와 전혀 다른 쪽으로 정했지. 그리고 외삼촌을 무척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매일 반항하며 괴롭게 했어. 그렇게 정반대의 비뚤어진 마음으로 대했는데, 18살이 되던 해 외삼촌이 췌장암으로 돌아가셨어.”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의 이야기였다. 지금껏 모르고 있던 그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고 있다. 나는 기억하기 위해, 잊지 않기 위해 두 귀를 활짝 열고서 그의 목소리를 마음속에 녹음했다. “그 후 아이는 혼자 살게 되었는데, 외삼촌이 돌아가시면서 어떤 한 분께 나를 부탁했나봐. 그 분은 유명한 가수들을 무수히 배출해 내는 한 기획사의 사장이었는데, 내가 취미로 만들어낸 곡을 보고 사겠다고 했어. 처음에는 싫다고 거절했는데, 어차피 앞으로 혼자서 살아가야 할 거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뒤늦게 승낙했지. 단 이름을 숨기고 예명으로만 활동한다는 조건 하에서. 끝까지 나는 어린 애처럼 아닌 척 심술을 부렸던 거야.” “…….” “그런데 그 예명을 이제 버릴까해.” “…….”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진심으로써 노래를 만들어낼까 해. 최하운의 노래를.” 툭-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키다 애써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재수 없는 놈.” “…….” “아무튼 넌 재수 없는 놈이라니까.” “알아.” 피식 웃는 얼굴이 눈앞에 그려진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쨌건 그가 진실 된 꿈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었다. ‘꿈’이라는 건 행복의 씨앗이니까. 그 씨앗이 싹이 트고 무럭무럭 멋지게 자랐으면 좋겠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열매를 가득 맺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가 누구보다도 행복하길 간절히 빈다. 눈물어린 웃음을 지으며 하운이에게 한 마디 했다. “노래 좋더라.” 사이에 문을 두고서 우리는 서로 기댄 채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답답한 마음에 밤 산책을 하기 위해서 나왔다. 시원한 밤공기를 쐬니 그래도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하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별 하나 없는 칠흑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의 내 마음처럼 깜깜하다. 짧게 한 숨을 뱉으며 고개를 내렸다.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데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서 주머니를 털어보았다. 꼬깃꼬깃 구겨진 천 원짜리 세 장이 있었다. 그 삼천 원을 꼭 쥐고서 나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소주 한 병과 새우깡 하나를 집고서 카운터로 향했다.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20대 초반의 아르바이트생이 리더기를 들고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디서나 그러하듯 나를 미성년자로 의심하는 듯싶었다. 당당해 보이기 위해 허리를 꼿꼿이 피며 카운터 위에 소주와 새우깡을 올려두었다. 그러자 아르바이트생은 콧방귀를 끼며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신분증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 “저기, 제가 지갑을 집에 두고 왔는…….” 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르바이트생은 자신의 쪽으로 물건을 끌어당겼다. 아르바이트생의 행동에 안 그래도 심신이 안 좋았던 나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러한 나를 보고 아르바이트생은 빈정거리며 말했다. “참 배짱도 좋네. 저런 얼굴로 술을 사려하다니.” “이봐요. 저런 얼굴이라뇨? 동안인 게 죄에요? 저 이래봬도 22살이에요! 곧 대학 졸업할 나이라고요!” 내가 언성을 높이며 말하자 아르바이트생은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애야, 그걸 믿으라고 하는 말이니?” “애야? 이 사람이 진짜!” 카운터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눈을 부릅뜨는데, 바로 옆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꼬선생님?”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리니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나를 보고 있는 주한비가 보였다. 갑작스런 녀석의 등장에 내가 당황하자, 녀석은 눈을 반달로 만들며 레몬향이 풍기는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어둑한 밤하늘 아래에,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한비는 새우깡을 우적우적 씹으며 곧바로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우리는 경치 좋은 한강둔치에 앉아 이렇게 술판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 망할 아르바이트생은 내가 성인임을 한비가 확인시켜주자 곧바로 의심 없이 냉큼 계산을 해주었다. 한 잔 벌컥. 쓰디 쓴 술이 식도를 뜨겁게 타고 내려간다. 캬- 소리를 내지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한비는 냉큼 새우깡 하나를 내 입에 넣어주었다. 나는 헤벌쭉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다시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는 녀석의 행동을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너 알고 있었냐?” “네?” “하운이가 포유라는 작곡가라는 걸.” “아, 당연히 알았죠.” 하긴, 고기를 먹으러 집으로 온 날 하운이를 보자마자 굳어지던 녀석의 행동이 수상쩍어 보이긴 했다. 그렇다면 태일이도 처음부터 하운이를 알고 있었던 것이겠지? 생각해보면 의문점이 상당히 많았다. 유명한 여자 가수가 집을 찾아온 것이나, 갈비 등 아첨으로 보이는 선물이 종종 하운이에게 왔던 것. 또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저번에 그 악보는 곡을 쓰고 있었던 것이었을 것이다. 며칠 동안 여행을 간다며 사라졌던 건 아마 밤샘 작업을 하기 위해서였을 거고. 그리고 지금 떠오르는 건데 하운이가 창고라며 잠가두었던 한 방은 아마 작은 작업실일 것 같다. “하운이형 싫어하는 사람이 엄청 많았죠. 나이도 어린 주제에 참 건방졌으니 말이에요. 그러면서도 노래 받으려는 이유가 그만큼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죠.” “…….” “제가 작년에 한 번 featuring으로 녹음했던 적이 있는데 엄청 깐깐했죠. 정말 울뻔 했다니까요.”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왠지 그 모습이 상상이 갔다. 나의 웃음에 함께 따라 웃던 한비는 갑자기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녀석의 시선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장담하는데요.” “…….” “하운이 형 꼬선생 좋아해요.” 녀석의 느닷없는 말에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한비는 기억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생각하는 듯 싶더니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잘 생긴 얼굴인데 매일 얼굴이 굳어있거나 무섭게 찌푸려져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저 사람은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인가 했었죠.” “…….” “그런 사람이 어느 날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데 웃고 있더라고요. 그 순간 어찌나 기분이 묘하던지. 그냥 단순히 ‘웃는다.’라는 것이 아니라 그 웃음에서 진심이 드러나 있다고 할까요? 그래서 지금 통화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 최하운이란 사람에게서 소중한 사람이구나, 사랑스러운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멍한 얼굴로 한비를 바라보았다. 한비는 살짝 웃음 지으며 내게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어요.” “…….” “바로 꼬선생이에요.” 한비의 말을 들으니 조금은 휑했던 가슴이 따뜻해진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직접 말해주지 않는 이상 사실이 아닌 가정일 뿐이니까. 설령 그 것이 사실이다 하더라도 하운이가 직접 내게 제대로 표현해 주지 않은 것은 사랑을 하고 싶지 않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은 표현해주지 않는 이상 성립될 수 없다. 혼자만의 사랑일 뿐이다. 바람이 휭 불어온다. 바람을 잡으려고 허공에 손을 뻗어 보지만 역시나 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이 바람처럼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는 너를 보낼 수밖에 없다. 잡히지 않은 바람이 시리게 가슴에 불어온다. Chapter. 39 가슴이 부르는 노래 샤워를 하고 나오니 거실에 앉아있는 하운이가 보였다. 이 밤에 갑자기 웬일인 것일까? 두 눈을 끔벅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고 있던 그의 얼굴에 순간 괴로운 빛이 지나갔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순간 무척이나 놀랐다.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최하운이 한 숨을 내뱉으며 무심코 고개를 돌렸고, 그 바람에 우두커니 서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하운이는 나를 보고는 흠칫 놀라다 이내 벌떡 자리에 일어서더니 뚜벅뚜벅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다짜고짜 내게 내밀었다. 그것은 케이크 상자였고, 아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구마 케이크 일 것이다. 나는 내심 좋았지만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이런 거주면 얼씨구나 좋아할 줄 알아? 내가 무슨 사탕 물려주면 웃는 어린 애도 아니고.” “너 말은 그렇게 하면서 헤벌쭉 웃지 마라.” “내가 언제 웃었다고 그래! 그리고 이 밤에 주는 건 뭐냐! 나 돼지 되라고?” “거참, 말 많네. 먹기 싫으면 말던가.” 곧바로 그의 손에 들린 케이크가 쓰레기통으로 향하려 하자, 나는 기겁하며 냉큼 그의 손에 있는 케이크를 휙 가져갔다. 그러한 나의 모습에 최하운은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에 나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녀석을 흘겨보며 툴툴댔다. “웃지 마. 정드니까.” 케이크를 가슴에 품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그가 떠나기 전의 마지막 밤이었다. 바닥을 내려다보다 힐끔 녀석을 바라보며 입술을 뗐다. 애써 쾌활하게 말해보지만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그게 설령 한정된 기간이라 해도 이별은 누구에게나 싫은 법이니까. “내일이지? 떠나는 거.” “응.” “몇 시에 가는지는 말하지 마. 나 안 갈 거니까.” “말하고 싶은데.” “뭐?” 내가 발끈하며 노려보자 하운이는 살짝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막 영화처럼 붙잡으려고 뛰어오는 거 아냐?” 그의 말에 얼굴이 화악- 붉게 달아올랐다. 그저 장난으로 내뱉었던 말이었던지 나의 말에 최하운은 조금 놀란 듯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정말로?’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나는 감정을 숨길 수 없어 탈이다. 이미 들통 났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더듬거리며 녀석을 향해 소리쳤다. “미, 미쳤냐! 내가 그런 유치한 짓 하게!” “그런 유치한 짓 장면보고 울던 애는 누구였더라.” 순간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정말로 붙잡을지도. 떠나는 모습 보면 마음이 약해져서 가지 말라고 또 다시 붙잡을지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러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언제 가는 것인지 듣지 않을 것이고, 공항에 배웅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정말로 내일이구나. 내일이면 그가 먼 곳으로 떠나게 된다. 그 생각에 기분이 침울해졌다. 그 때 최하운이 내게 무언가를 하나 더 내밀었다. 그것은 CD였다. 나는 그가 내민 CD를 조심스레 받아들며 물었다. “뭐야?” “노래야.” “노래?” “응. 나 내일 가고 나서 들어.” 그가 준 CD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CD 위에는 For you라고 적혀 있었다. For you라고 적혀진 글씨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물었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거야?” “응.” “아니면 안 들으려고 했는데, 세상에서 하나뿐인 거라니 들어야겠네.”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그를 향해 싱긋 웃었다. 끝까지 억지웃음으로라도 버텨보려고 했는데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눈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의 품에 재빨리 안겼다. 녀석의 좋은 향기가 슬프게 온 몸을 감싸왔다. 내게서 익숙한 이 향기도 이제는 멀어져 가겠지. 그리워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움을 이겨내는 방법 같은 거 나는 모른다. 그의 옷깃을 꽉 붙들며 나는 툭툭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잘 가.”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드디어 D-DAY. 그가 미국으로 떠나는 수요일이 되었다. 손목에 차진 시계를 바라보니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미 떠났을지도 모르고, 이제 막 떠나려고 할지도 모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당연 그가 탔을 비행기는 보이지 않지만, 갑자기 하늘이 보고 싶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시리도록 새파랬다. 부디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다른 나라의 땅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작은 바람을 하늘을 향해 읊으며 고개를 천천히 내렸다. 그가 자신이 떠나고 나서 들으라 했던 CD를 가방에서 뺐다. 그리고 CD플레이어에 넣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려던 손이 순간 멈칫했다. 듣자마자 또 청승맞게 울지도 모르기에, 청심환을 먹듯 사탕을 입안에 넣으며 절대 울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런 후,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손가락으로 재생버튼을 꾹 눌렀다. 그리고서 노래를 들으며 멈추었던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하운이의 노래이자, 세상에 하나 뿐인 단 하나의 노래였다. 단 한사람을 위한 노래 For you 너를 위한 노래 For you 말 할 수 없었던 나의 진심을, 겁쟁이의 뒤늦은 고백을 이 선율로 이 노래로 너에게 전해. 나의 이 노래가 네 가슴에 파고들면, 눈물이 많은 너는 울겠지 그리고 나는 그 눈물을 이 노래로 닦아줄 수밖에 없어 미안해 한 걸음 두 걸음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옮기던 나는 한 모퉁이를 돈다. 눈이 멀었고, 귀가 멀었고, 가슴이 멀었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지 빛을 읽은 채 내 심장을 저주해 그 때 네가 내게 왔어 온기를 실어 내 이름을 불러. 신의 구원처럼 나에게 웃어.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가, 나를 향해 웃어주는 그 미소가 어느새 내 삶의 이유가 됐고, 내 전부가 됐어 길을 건너기 위해 빨간불인 신호등 앞에 걸음을 멈춰 세웠다. 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건 바보 같다고 말하지만 For you 나는 그 바보라서 다행이고, 그 바보라서 행복해 For you 겁쟁이는 사랑을 하지 못해. 가진 게 없어 가지지 못해 그래서 이렇게 떠나가 지금 나를 위해 흘리는 너의 이 눈물이 어쩌면 훗날 행복이 될지도 모른다고 너를 보내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고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는 중앙을 향하다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내 유일한 진실인 이 노래로 너에게 전해.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을. 숨겨두었던 나의 사랑을. 바보같은 겁쟁이의 사랑 고백을. 나는 너를 사랑해 l Love you 잊지 마 오늘도 나는 너를 위해 살아간다는 걸 For you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뛴다. 치솟아오르는 눈물에 시야가 눈물로 흐릿해져 간다. 손에 들린 CD플레이어를 꽉 쥐었다. 그 때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깜짝 놀라며 재빨리 걸음을 옮기려는데 한 승용차가 나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순간 온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끼익-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아, 따가워라.” 아스팔트에 긁힌 팔꿈치를 호- 불었다. 다행스럽게도 가벼운 타박상이었다. 발목이 살짝 접질렸긴 하였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어쨌건 내가 다친 것보다도 하운이가 준 노래 CD를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가방 속에 CD를 꼭 넣어두고서 응급실 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응급실 안에는 고통스러운 신음으로 가득했다. 그 때 피로 범벅이 된 한 사람이 실려 왔다. 그 모습을 보고 흠칫 놀라며 놀란 가슴을 움켜쥐었다. 정말 이 정도로만 다친 것에 대하여 감사할 따름이다. 안도의 한 숨을 작게 내쉬며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돈이 한 푼도 없던 나는 도혁이에게 숨겨두었던 비상금과 의료보험증을 가지고 오라고 하기 위해 전화를 했다. 나를 여기까지 모시고 온 아저씨는 급한 일 때문에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자며 명함만 한 장 준채 사라졌다. 어찌됐건 내가 잘 못한 일이었으니까. 뚜르르- 긴 신호음이 한 참 동안 가고, 곧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굴구기며 핸드폰 폴더를 툭 닫았다. 이 녀석이 또 내가 뭐라도 시킬까봐 받지 않은 것인가. 핸드폰을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다 지나가는 간호사 언니 한 명을 붙잡았다. “저기요, 간호사 언니.” “네?” “대신 전화 좀 해주세요. 지금 김순이라는 사람이 크게 다쳐서 팔 부러지고, 다리 부러지고 피투성이가 됐다고.” 나의 부탁에 간호사 언니는 당혹스러워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부탁해요. 안 그러면 그 녀석 오지 않을 거예요. 네?” 내가 3분 이라는 시간 동안 간곡히 부탁하자, 간호사 언니는 마지못해 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도혁이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하는 간호사 언니를 보며 나는 방긋 웃음 지었다. 어디 한 번 누나의 소중함을 알아보라고. 급 피곤했던 나는 쩍 하품을 하며 다친 곳이 닿지 않게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누웠다. 스르르 잠결이 몰려온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목소리였더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목소리였다. 스르르 눈을 뜨니 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나도 모르게 살짝 잠이 들어 버렸던 듯싶다. 하품을 크게 하며 찔끔 흘러나온 눈물방울을 손가락으로 찍어내는데, 다시 한 번 크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순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내 그 사람을 확인한 나의 눈은 커다래졌다. 나를 부르는 그 사람은 놀랍게도 다름 아닌 최하운이었다. 그는 뛰어 온 듯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를 부르지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애타게 주위를 둘러보던 하운이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 시끄러웠던 응급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하운이는 거친 숨을 토하며 나를 보았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투명함이 그의 눈가에서 툭 떨어졌다. 그 와 함께 들고 있던 그의 짐 가방이 손에서 떨어졌다. 눈을 질끈 감으며 두 손을 모은다. 그의 바싹 마른 입술이 움직인다. 입술은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라는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재빨리 그의 앞에 섰다. 하운이의 긴 속눈썹이 투명한 눈물로 잔뜩 젖어 있었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보며 물었다. “너…… 네가 여기 웬일이야?” 나의 말에 그의 눈이 스르르 떠졌다. 투명하게 흔들리는 그의 눈이 시야에 가득 맺히는 순간, 하운이는 나를 자신의 커다란 품속에 끌어 안았다. 그의 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몹시 겁을 먹은 아이처럼 말이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깊이 묻으며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등에 올렸다. 그 때 하운이의 깊은 음성이 들려왔다. “너 진짜 죽고 싶냐?” “…….” “나보다 먼저 죽으면 그게 천국이든 지옥이든 쫓아가서……” “…….” “괴롭혀 줄 거다.” 그리고는 품에서 나를 놓더니 고개를 돌린 채 자신의 지갑을 내게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지갑을 받고서 그를 향해 입을 열려는 순간 하운이는 곧바로 떨어진 짐을 들고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나는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 아까 그 간호사에게 지갑을 건네주며 말했다. “일단 이거로 계산하세요. 나중에 찾으러 올게요!” 당황하던 간호사 언니가 나를 부르기도 전, 나는 재빨리 그를 쫓기 위해서 걸음을 옮겼다. 접질렸던 발목이 쓰라리게 아파왔지만, 지금 이 아픔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를 악물며 쫓았다. 병원 밖을 나오니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하운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재빨리 그의 뒤를 쫓으며 그의 이름을 크게 소리쳐 불렀다. 하지만 그는 들은 척 만 척 계속해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나는 젖먹던 힘을 다해 그를 향해 뛰어갔다. 짧은 다리로 열심히 뛴 덕분에 곧 그와 간격을 좁힐 수 있었다. “하운아!” “……” “좀 같이 가자!” “…….” “야!” “아씨, 쪽팔리게!”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추어 세우더니 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귀까지 토마토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의 모습에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하운이는 얼굴을 찌푸린 채 내게서 살짝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비행기에 탑승하려는 데 갑자기 전화가 왔어. 김도혁한테서 전화 왔는데 네가 사고로 크게 다쳤데.” “…….” “그 순간부터 기억이 없을 정도로 달려왔어.” 하늘같으신 누나의 전화를 안 받는 김도혁에게 누나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 위해 만들었던 덫에 하운이가 당할 줄이야. 나 역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풋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운이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져왔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따. 울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리는데, 하운이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나의 손목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가득 실린다.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 “이제는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 “내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해.”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최하운은 나를 흔들림 없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계속해 움직인다. “사랑.” “…….” “그래, 어디 한 번 해보게.” “…….” “죽지 않을 만큼만 미치도록.” 그의 말에 툭-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며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계속해서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자 하운이는 피식 웃으며 큰 손으로 나의 머리를 흩트려 주었다. 그리고 그 손은 나의 눈을 향해 내려왔다. 눈물에 범벅이 된 눈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볼에 그어진 눈물의 선을 타고 내려오고 이내 입술에 머물렀다. 내 입술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떨어져나가며 곧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눈을 질끈 감는 순간 그의 달콤한 입술이 나의 입술 위로 깊게 부딪혀 왔다. Chapter. 40 For you -최하운 번외 아빠와 엄마의 사랑의 결실로 나와 서린이가 태어났다는 이야기. 엄마는 마치 나에게 각인시키는 듯 항상 말했었고, 어느 날 부턴가 나는 그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빠는 그저 형식적인 ‘부부’였을뿐 내면적인 관계에서 끈끈한 애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단 한번도 싸움을 하지 아니하고 살아온 이들에게 사람들은 소위 금실 좋은 부부들을 일컫는 ‘잉꼬부부’라 칭하였지만 ‘아들’이라는 제일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본 나는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은밀히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엄마는 아빠 앞에서 항상 작아졌으며, 늘상 귀한 보물을 숨기고 있는 것 처럼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아빠는 항상 다른 곳을 바라보는 듯 했고, 아빠로서 해야할 일은 모두 하였지만 항상 나는 빈껍데기와 함께하는 기분이었다. “아빠.” 나의 나지막한 부름에 아빠는 신문에 두었던 시선을 슬쩍 떼어내며 나를 흘깃 보았다. 나와 닮은 얼굴이 나를 향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말했다. 판박이처럼 아빠를 무척이나 닮았다고 말이다. 당연히 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들이기에 그러할테지만, 나는 아빠에게서 그 보다 더욱 중요한 부자로서의 교감을 할 수 없었다. 잠시동안 아빠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나는 마른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평평한 음성이 일정하게 흘러나왔다. 늘상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아빠는 엄마 얼마만큼 사랑해?” 나의 물음에 순간 아빠의 얼굴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얼굴에 거짓웃음이 드리워졌다. 기다랗고 커다란 손을 들어 나의 머리를 쓸며 아빠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만큼 땅만큼.” 너무나 상투적인 표현. 깊은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지 않아도 될 건성적인 답변이었다. “정말?” “그래.” 그렇다고 말하고 있지만 전혀 내게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답하는 얼굴의 아빠는 차가울 정도로 무감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엌에서 이를 엿듣고 있던 엄마는 아빠의 대답에 너무나 쓸쓸하고도 괴로운 얼굴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다. 엄마의 일방적인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지독하리만큼 지독했다. 나는 항상 무진공 상태의 우주 속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분명 ‘가족’이 있고 ‘가정’ 있음에도 혼자인듯한……. 서로와 서로를 끈끈하게 잇지 못한 채 우리 가족은 항상 다른 방향으로, 다른 모양으로 혼자서 따로따로 행동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이러한 위태로운 관계속에서 나는 늘 조바심이 났다. 어떻게든 지키기고 싶었다. 그리하여 먹구름으로 뒤덮여진 흐릿한 이 날 속에서 좋은 아들이 되기 위해, 작은 웃음이라도 만들 수 있는 기쁨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걷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던 어두운 잿빛 하늘에는 별안간 소름끼치도록 웅장한 벼락이 쳤고, 그 벼락은 모든 걸 박살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학교에 돌아와 학원을 가기전 엄마가 만들어주신 간식을 먹고 있을 때, 이웃집의 아주머니 한 분이 소란스럽게 불쑥 찾아왔다. 무슨 말을 그리 하고 싶은 것인지 무척 입이 간질간질해 보였다. 호들갑을 떨던 아주머니께서 차오르는 숨을 다듬으며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나의 눈치를 봤다. 그 모습에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고, 이내 엄마는 무언가를 눈치채고서 내게 말했다. “하운아, 학원 늦겠다. 어서가렴.” “네.” 아직 학원 가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반쯤 먹었던 토스트를 내려놓으며 식탁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메고서 일어섰다. 현관으로 향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데 아주머니께서 웃으시며 내게 말하셨다. 왠지 보기 거북한 웃음이었다. “하운이는 어쩜 현호와 다르게 저리 의젓하고 성숙한지. 어린 것이 너무나 어른스럽단 말이야.” “감사합니다.” 칭찬으로 포장된 말이었지만, 그 속의 알맹이는 비아냥이었다. 나는 형식적으로 대꾸하고서 빠르게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운동화를 신고서 나가려던 나는 불쑥 뇌리에 스치는 불길한 직감에 문을 열었다 닫는 척만 했다. 아주 잠시 정적이 흘렀고, 이내 부엌에서 아주머니의 흥분되 커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남편이 말이야, 어제 우연이 길을 가는데 하운이 아빠를 봤데. 근데 그 것이 글쎄 어떤 예쁜 여자랑 같이 있었는데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거야.” “에이, 아닐거에요. 오해하시지 마세요. 회사 직장동료나 친구이겠죠.” “우리 남편도 그리 생각하려 했는데 무척이나 다정해보였데.” “현호어머니, 아니에요. 제가 그이 잘 알아요. 너무 과장해서 생각해주시지 말아주세요.” “그래도 모를 일이야. 혹시 모르니 한 번 뒤를 캐봐.” 슬쩍 사이로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엄마는 애써 웃고 있었지만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그 전율에 나의 몸 역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지키고 싶어 고독속에서 발버둥쳤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허망하게 무너져 가기 시작한다. 다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잔혹하리 만치. “절대 못해! 이혼만은 죽어도 안 돼! 여보, 제발! 우리 애들을 봐서라도 이러면 안 돼. 응?” “…….” “여보, 제발 가지마. 내가 당신 죽을만큼 사랑하는 거 알잖아. 내가 지금껏 누구를 위해서 살아왔는데. 이러면 안 돼. 여보, 이러면 안 돼.” 짐을 들고 나가려는 아빠의 발목을 붙잡으며 엄마가 울부짖었다. 엄마의 고왔던 얼굴이 일그러진 채 온통 눈물에 젖어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차가운 눈동자로 엄마를 잠시 내려다 보던 아빠는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엄마를 조심스러우면서도 힘있게 떼어냈다. 그리고는 구겨진 검은 바지를 툭툭 털며 무감한 목소리로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엄마에게 말했다. “아이는 내가 키웠으면 해.” “여보!” “위자료는 충분히 줄게.” “그, 그게 아니잖아!” “법정에서 보자.” 머뭇거림도 없이 아빠는 그렇게 할말만 하고 매정하게 집을 나갔다. 사랑하는 이에 눈이 멀고, 귀가 멀어 그렇게 조금의 죄의식도 없이 말이다. 자신이 줄곧 바라보았던 단 한 사람 에게로, 자신을 줄곧 바라보았던 엄마를 두고서 그렇게 떠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거침없이 걸어가는 아빠의 모습은 너무나 눈물나도록 얄밉고, 못되게 보였다. 모든 걸 버리고서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아빠에게 남았다는 가련한 한 여자. 곁에 있어주길 만을 바랬고, 사랑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모든 것에 욕심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존재이다. 엄마 또한 그러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알면서 아빠에게 1분 1초 숨쉬는 시간내내 사랑을 갈구 했다. 그렇게 단 한번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무정한 한 남자때문에 가슴이 타들어가고 찢겼다. 그리고 그렇게 버림 받았다. 양육권은 자신의 권력을 빌려 이긴 아빠에게로 넘어갔다. 아빠는 어린 여동생을 안고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 손은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를 잡은 손이다. 그 손을 잡는 다는 것이 무척 역겹게 느껴졌다. 고개를 망연자실한 채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엄마에게로 돌렸다. 그 모습은 금방이라도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듯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흔들림없는 눈동자로 아빠를 쏘아보았다. 나에게 향했던 아빠의 손이 조금씩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또박또박 뚜렷한 음성으로 아빠의 가슴에 못질을 하듯 말했다. “저는 엄마 곁에 남을 거에요.” 엄마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 가련한 여자는 나를 낳아준 엄마였고, 내가 사랑하는 엄마였기 때문이다. 처참하게 몰락해가는 엄마의 모습을 막아내고 싶었다. 아들로서 나는 그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다짐 역시 엄마의 괴로움에 휩쓸려 잔혹하게 몰락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엄마는 날이 갈수록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처럼 비쩍 말라갔다. 혼을 놓은 듯 흐리멍덩한 눈, 웅덩이처럼 움푹 패인 볼, 가뭄이 난 땅을 보듯 바싹 마르고 갈라진 입술. 그리고 죽은 사람처럼 핏기없는 창백한 얼굴. 엄마는 마치 깊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같았다. 아니 환자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결핍된 악성 상사병. 그 병은 정말 끔찍했다. 엄마의 생명까지 전염되어 심장을 조른다. 이제 더이상 치료법도 없는 몹쓸 병. 그렇게 엄마는 죽어갔다. “어서 자.” “엄마.” “꿈도 꾸지 말고 깊이 푹 자렴.” 나를 침대에 눕히고서 엄마는 어렸을 때 줄곧 불러주었던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다 컸는데 무슨 자장가이냐며 성을 내자, 엄마는 웃기만 했다.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하지만 깊이 자고 일어나면 아무도 없는 깜깜한 어둠뿐 일 것 같아서 십사리 잘 수 없었다. 그런 내게 엄마는 가슴을 툭툭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슬며시 잠이 쏟아져 왔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자장가. 나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서 눈물을 머금은 채 조금씩 잠이 들었다. 그 자장가는 떠나는 길의 엄마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우르르 쾅쾅- 천둥이 치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니 무수하게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왔다. 평소 천둥번개를 무서워하던 나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내 가슴에 내리꽂고 있었다. 추를 달아놓은 듯 무거운 발을 천천히 움직이며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엄마의 방앞에 다가갔다. 수전증 걸린 듯 손이 몹시 떨렸다. 나는 그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커다란 창으로 번개의 섬뜩한 섬광이 방안을 가득 비추었다. 그리고 목을 매단 채 대롱대롱 매달려 죽어 있는 엄마의 소름끼치는 모습이 시야에 덮쳐 왔다. 다시 감전이되 듯 방안이 깜깜해졌고, 호흡이 가빠오며 후들후들 다리가 떨렸다. 이내 지진같은 흔들림에 몸을 지탱할수 없던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불렀다. “어, 엄마.” “…….” “엄마!” 피가 나도록 엄마를 부르짖던 나의 외침은 외톨이의 외침이었다. 그렇게 버림받은 현실을 극복할 수 없던 엄마는 나를 두고서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 지키고자 했던 내 마지막 가족이 사라지면서 나는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된 것이다. 그 것이 너무나 무서워 나는 식어버린 심장으로 딱딱히 굳어가는 엄마를 꼭 껴안았다. 나의 이 체온으로라도 녹게해주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되살리고 싶었다. 그 것이 헛된 사실이란 것을 알면서도. 또한 되살릴 수 있다 해도 또 다시 죽음을 선택할 지독한 숙명인 것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자신이 애타게 그리워했던 진실한 사랑을 찾아가기 위해 자신이 책임지고 지켜야할 모든 걸 무너뜨리고서 가는게 사랑인가? 또한 사랑하는 이에게서 버림받은 상처를 이기지 못해 자신만을 바라보는 아이를 두고서 죽음을 선택한 것이 사랑인가? 사랑이 무엇이길래? 그깟게 무엇이길래? 그 끝은 모두 파멸뿐인데 말이다. 만약 그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죽어도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을 고귀하고도 따뜻한 형태를 떠올리지만, 내게는 그저 텅 빈 어둠뿐이었다. 의미없는 삶이다.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엄마와 같은 미련한 짓을 그대로 따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내 남은 명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대충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디 내 남은 명이 길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나는 내 가슴 속 깊이 문신을 하듯 새겼다. 사랑따위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그 후, 외삼촌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외삼촌은 독신이었는데 유명한 작곡가이셨고 쾌활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외삼촌과의 생활은 그 당시 생각보다 내게 큰 활력을 주었고 상당히 즐거웠다. 지금에서와 ‘즐거웠다’라고 인정하지만 그 당시 나는 줄곧 부정했었다. 어느 날 외삼촌은 운전을 하다 어떠한 한 광경을 보고 차를 멈추었다. 외삼촌의 시선을 따라 도착한 곳에는 새까맣게 타버린 집 앞에서 어떤 한 여자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괴상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내 평소에 호기심이 강했던 외삼촌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음악만 듣고 있는 내 쪽의 문을 열며 말했다. “내려.” “싫어요.” “강제로 끄집어내기 전에 내려라.” 외삼촌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고, 진짜로 한다면 하는 사람이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따라 내렸다. 외삼촌은 내 머리를 마구 헝클이고선 그 여자아이에게 천천히 다가섰고, 나는 멀찌감치 서서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정말 외삼촌은 못말리는 괴짜였다. 여자아이의 그림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던 외삼촌은 아이가 무엇을 하고 있는 뻔히 알면서도 어이 없는 질문을 던졌다. “뭐하고 있니?” “그림을 그려요.” “그림? 예쁜 풍경들도 많은 데 왜 다 타버려 잿더미가 된 이 터를 그리는 것이지?” 그제야 줄곧 그림을 완성시키는 데 몰두하던 여자아이가 외삼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커다란 눈을 가진 여자아이는 살짝 미소지으며 답했다. “여기가 제 친구 집인데요.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힘이 되주고 싶어요. 모든게 다 타버렸지만, 추억만은 타지 않았고 또한 또 다시 집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고 싶어요.” 여자아이의 말에 외삼촌은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손으로 턱을 쓸었다. 나는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아저씨, 우리들의 눈은 말이에요. 마음에 따라 달라 보인데요.” “…….” “힘들고 괴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고, 이겨내려는 다짐과 희망을 가지고 바라보면 아름답게 보인데요. 제 친구도 그러한 눈을 가졌으면 해서요.” “누가 그러한 말을 해주셨니?” 외삼촌의 물음에 순간 아이의 얼굴 위로 슬픔이 스쳤다. 이내 여자아이는 그 슬픔의 그림자를 지우고서 방긋 웃으며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아빠께서 그러하셨어요.” “좋은 아버지를 두셨구나.” 외삼촌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여자아이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외삼촌이 뒤에 있던 나를 슬쩍 바라보며 아이에게 물었다. “우리 예쁜 학생은 중학생이니?” “저요? 네, 지금 1학년이에요.” “오, 우리 하운이랑 같은 학년이구나!” 외삼촌이 나를 가리켰고, 이내 여자아이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렸다. 그러자 외삼촌은 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마지못해 걸음을 옮겨 옆에 외삼촌의 옆에 섰다. 여자아이는 흔들림 없는 커다랗고 까만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 시선이 낯설고 거북했던 나는 시선을 피했다. 그 때 여자아이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 들었다. “거짓으로라도 웃고, 웃다 보면 진짜 웃게 될 수 도 있고.” “…….” “힘들고 괴롭더라도 나는 행복하다, 즐겁다 생각하면 진짜 행복이 찾아올거라고 생각해.” 그 말에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여자아이는 가만히 웃고 있었다. 눈은 반달모양으로 휘어져 있었고, 분홍빛 꽃잎같은 두 볼에는 보조개가 띠어있었다. 처음으로 웃는 게 예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지금 그 과정을 거치는 중이거든.” “…….” “혹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우리 둘다 진짜 웃고, 진짜 행복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아이는 또다시 그리면 된다며 자신이 그렸던 그림을 내게 주었다. 그 그림 속에는 따뜻하고 행복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행복한 집이 그려져 있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 절박한 환경을 아이는 새하얀 도화지 속에 희망을 그려넣었다. 한 참 동안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 있을 때 아이는 빨리 집에 가야겠다며 외삼촌과 내게 급히 인사를 하고서 사라졌다. 마치 한 줌의 바람처럼 말이다. 그저 웃어 넘기려했지만 계속해서 머릿 속에 사라지지 않았다. 또한 그림을 바라보고 바라볼 수록 왠지 눈물이 났다. 변함 없이 내 안에 갇혀 심술을 부렸지만 그래도 조금은 세상을 달리 보게 되었다. 어차피 산다면 조금은 열심히 살아보자는 생각. 그리고 나는 어느 날 부터 그 아이를 동경하기 시작했고, 다시 한 번 만났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품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어느덧 나는 18살이 되어 있었고, 그 날은 벚꽃이 만개하고 햇살이 눈부신 봄이었다. 같은 반이자 같은 짝이었던 한 친구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에 대한 답례로 억지로 떠밀려 소개팅이라는 것을 처음 나가게 되었다. 대충 인사만 하고 나오자는 생각으로 나는 약속 장소인 [만남]이라는 카페로 향했다. 딸랑- 문을 열자 앙증맞은 종소리가 울렸고 나는 카페에 들어섰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며 소개팅 상대인 여자애가 앉아 있다는 창가에서 오른쪽 끝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곳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투명한 유리창으로 비춰오는 햇살에 드리워진 여자애는 다름아닌 매일 기억 속으로 나를 끌여들었던 지난 날의 그 여자아이였다. 한 동안 우두커니 서서 그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 아이는 그 때와 변함없는 얼굴이었다. 마치 자라지 않은 것처럼 그 날 그대로였다. 그 때 턱을 괴고서 창밖을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여자애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몸을 움직이기도 전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 어떻게든 해야하는 데 몸이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나를 한 참 동안 바라보던 여자애는 갑자기 나를 향해 방긋 웃었다. 그리고는 자리에 일어서며 내 앞에 다가왔다. 나를 향하는 그녀의 똘망똘망한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네가 최하운이야?” “어? 아, 어.” “우와, 주변에서 소문은 들었지만 이렇게 잘 생겼을 줄 몰랐어.” 그 아이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이럴 때는 뭐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지? 대화에 특히나 여자와의 대화에 무척이나 서툴었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러한 나의 모습에 그 아이는 싱긋 미소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나는 김순이야!” 그 아이의 이름은 김순이. 그 때 미처 물어보지 못했던 이름. 그 이름을 곱씹으며 나는 내 앞에 놓인 그 아이의 손을 바라보았다. 어린 아이처럼 무척이나 작은 손이었다.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조심스레 잡았다. 그러자 그 아이는 그 위로 나머지 한 손을 올리며 크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김순이라는 다시 만난 그 아이는 나를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듯 싶었다. 하긴 기억이라고 하기 조차 무안할 정도로 아주 짧은 만남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게 그 만남은 아주 강렬했고, 가슴속에 깊히 박힌 그 날 부터 나는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갖가지 단어들이 머릿속에 두둥실 떠올랐다. 내게는 무척 낯부끄럽게 다가오는 단어들. 인연?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운명?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 어떠한 단어를 이에 대해 갖다 붙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확실히 드는 생각은 다시 바람처럼 스치는 것만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 그 아이에게 무엇을 특별히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강한 이끌림이었다. 그 것이 나는 사랑의 시작임을 알지 못했기에, 억지로라도 인연의 끈을 묶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김순이. 지금 내 등에 업힌 이 사람은 오랫동안 감정을 억누르며 친구로 지내왔고, 지금부터는 내게 하나뿐인 연인이 된 여자. 지켜주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체구가 작은 여자이고, 아이의 눈처럼 맑고 까만 눈동자가 매력적인 여자이고, 같이 덩달아 웃게 될 정도로 웃는 모습이 예쁜 여자이다. 내 등에 업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던 순이는 불현듯 무엇이 생각이 났는지 내 등은 손바닥으로 쳤다. “운, 너 아까 내가 죽는 줄 알고 울었지?”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에이, 난 다 봤는 걸. 뚝하고 눈물 흘렸잖아~” “이, 멍청아! 안 울었거든! 내가 미쳤냐! 너따위 때문에 울게!” “오호, 나 따위 주제에 최하운을 울리게 하다니. 이거 영광인 걸!” 말해봤자 먹혀들 것 같지 않아 그저 꾹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사실인 것이 아닌 것은 될 수 없으니까.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김순이는 꼬투리를 잡은 것이 마냥 좋은 지 까르르 웃으며 나를 놀려댔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불과 몇 시간 전 나는 그녀를 떠나려 했었다. 지금껏 내 가슴 속에 눌러 붙었던 두려움 속에서 도망치려 했다.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된 후로 나는 줄곧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그래서 일부러 모른 척 했었다. 그러한 내 모습에 김순이는 가끔씩 슬픈 표정이 되곤 했다. 누군가 바보같다고 비웃을 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의 옆에 있는 것으로, 혼자 사랑하고 지켜주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처음에는 사랑한다는 사실 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만 커가는 마음 속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만의 사랑으로 끝내려 했다. 가끔은 제어되지 않은 감정에 미칠 것 같았지만 혼자만의 사랑이 안전한 것 이라고 생각했기에 내 자신을 억누르고 억눌렀다. 그러다 생각지 못한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되자 혼란스러웠다. 지난 날의 상처로 인해 생긴 두려움이 나를 자꾸 끌어내렸다. 자신이 없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내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었다. 두려웠다. 혹여나 마음이 변하여 김순이도 언젠가 아빠처럼 모질게 나를 떠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사랑을 할 수 없었다. 이 겁쟁이의 마음으로 도저히 그녀와 사랑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떠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떠나면 순간적이었을 지도 모르는 그녀의 감정이 가라앉을 것이고, 그 것이 어쩌면 훗날 그녀를 위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그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뼈저리 느끼게 되었다. 김순이가 사고났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모든 것이 마비되듯 멈추었다. 나는 살 수 없다. 김순이 없이는 내가 살지 못한다. 줄곧 그녀를 위해서 살았던 나였다. 그런 내가 그 녀석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마 세상을 보는 눈, 듣는 귀 모두를 잃어버린 채 병신처럼 살 것이다. 뻔했다. “이런 거 질문하면은 네가 엄청 부끄러워 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럼 하지마.” “그래도 듣고 싶어서 그래.” “…….” “나는 말이야. 너를 언제부터 좋아한 것인지 확실치 않아. 하지만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가슴 속 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감정이라고 생각해.” “…….” “하운이는 언제부터 나 좋아했어?” 김순이는 내게 물음을 던지고서 대답을 기다리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분다. 별빛을 머금은 바람이 우리의 머리칼을, 우리의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 나는 다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뗐다. “너보다 오래전부터……” “…….” “한참 오래전부터……” “…….”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순간부터 좋아했어.” “정말?” “그래.” “그럼 내가 너보다 그 만큼 더욱 사랑해줄게.” “인마, 느끼한 소리 작작해.” “에이, 그러면서 부끄워러 얼굴 빨개지기는.” “더워서 그런 거야! 네가 얼마나 무거운 줄 알아? 살 좀 빼라고!” 나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툴다. 그래서 곧잘 숨기는 것도 잘한다. 그런 내가 마음을 튼 지금부터는 나조차 감당하기 힘들정도로 변하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그 것이 두려웠고,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 부딪혀 보기로 했다. 사랑. 그 까짓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김순이와는 왠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와 아빠의 비틀어진 사랑이 아닌 아름다운 사랑을 이 녀석과는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든다. 너무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미친 듯이 사랑해보리라 마음 먹었다. 이 녀석과 함께. 마냥 신난 아이처럼 시끄럽게 떠들던 김순이는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있었으니 피곤할 만도 하겠다. 새근새근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자는 얼굴을 보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때에 말한 진짜 웃음이, 진짜 행복이 지금 함께 이루어진 것 같다. 손을 뻗어 흘러내린 긴 머리칼을 치워주며 아기처럼 보드라운 볼을 조심스레 만졌다. 김순이는 좋은 꿈을 꾸는 듯 히죽 웃는다. 내가 앞으로 지켜나가야 할 내 여자가 된 김순이에게 나는 낙인시키는 듯 이마에, 코에, 입술에 차례차례 입맞춤 해주었다.그리고 그녀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잘자라.” 지금 내뱉어지는 나의 이 호흡 하나하나는 너를 위해 이루어져 있다. 나는 어제도 너를 위하여 살았고, 오늘도 너를 위해서 살아간다. 그리고 내일 역시 너를 위해서 살아갈 것이다. 나의 삶의 이유가 된 너를 위해서. 지금 이 순간도 For you. - For you The end Chapter. 41 플러스+(完) 안녕하세요, 여러분! 자칭 귀염둥이 순이입니다! 어렵게 최하운과 사랑을 시작하게 되었고, 벌써 그로부터 3년이 조금 지났네요. 하운이와 저는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고, 또한 여전히 아무 탈 없이 예쁜 사랑을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다만 요즘 들어 하운이의 일이 부쩍 많아져 자주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말이에요. 오늘도 작업때문에 한 동안 만날 수 없어, 일주일 만에 하운이의 얼굴을 보러 가는 길입니다. 몇 번씩 짧게 통화를 하긴 하였지만, 정말 보고 싶어 눈에 가시가 돋는 줄 알았어요. 또한 주변에 S라인의 미녀가수들이 많은데, 허구헌날 임자가 있는 몸인 것을 알면서도 하운이에게 꼬리를 치는게 아니겠어요? 그 것 때문에 저는 몹시 골머리를 앓고 있어요. 잘난 녀석을 남자친구로 둔 덕분에 이러한 고생도 감수해야하는 순이입니다. 하운이의 잘 보이는 팔목이나 손등 쪽에 [김순이꺼]라고 문신이라도 새겨야 할까요. 아참, 문신해서 생각난건데 침이라면 무서워서 벌벌 떨던 제가 얼마 전 팔뚝에 작게 문신을 하였습니다. 하운이의 똑같은 모양으로 말이에요. 그 때 당시 묘하게 생긴 모양이여서 무엇인지 알지 못했는데 그 문신은 바로 [For you] 라는 글자를 뜻하는 문자였어요. 항상 건강한 모습으로 서로를 위하여 평생 함께 하자는 의미로 무서움을 참고서 문신을 하였습니다. 어찌하였든 꼬리치는 여우들을 생각하니 하운이를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벌써 마음은 그에게 가있지만 말이에요. “운자기!” 녹음실에 도착하자 마자 저는 울먹거리며 녀석을 향해 뛰어가 안겼습니다. 정말 일주일이 일년같게 느껴졌던 나날이었습니다. 하운이는 울먹거리며 보고싶었다고 웅얼거리는 저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큰 손으로 머리를 흩트려줍니다. 그런데 하운이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저는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어요. “힘들어?” “좀.” 하운이는 살짝 눈을 감으며 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습니다. 저는 그러한 녀석이 안쓰러워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지요. 한 참동안 아무 말 없이 제 어깨에 기대어 있던 하운이는 불현듯 무엇인 생각났는지 벌떡 몸을 일으켜세우며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한 저는 둥그렇게 눈을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지요. “모레 너희 어머니 생신이지?” “기억하고 있었네!” “그 걸 잊어버릴 턱이 있냐.” 그 말에 저는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운이와 사귀고 나서 첫번째로 맞았던 엄마의 생일 때, 아무것도 몰랐던 하운이는 엄마의 생일을 넘겨버렸고, 그에 대해 몹시 서운했던 엄마는 하운이에게 심술을 부렸지요. 그리하여 하운이는 한 동안 엄마에게서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 후로 아침잠이 많은 녀석이 엄마의 생일 날이라면 벌떡 자다가도 일어났지요. 무엇을 선물해드려야 할지 입술을 살짝 내밀며 심각하게 고민하는 하운이의 모습이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보입니다. 그리하여 엉큼한 순이는 좌우로 눈동자를 굴리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였고, 하운이를 향해 입술을 쭉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최하운은 몸을 뒤로 빼고서 살짝 눈썹을 꿈틀거리며 제게 말합니다. “뭐, 밥달라고?” 그 말에 설렘으로 가득찼던 저의 얼굴이 단 한순간에 식어버립니다. 아무튼 무드라고는 전혀 없는 녀석이었습니다. 녀석을 흘겨보다 볼을 부풀리며 뾰로통해진 얼굴을 휙 돌리자, 하운이는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습니다. “일로와.” 그 말에 단순한 저 순이는 새침한 얼굴을 지으며 냉큼 그의 앞에 다가갔지요. 하운이가 큰 손으로 저의 얼굴을 감쌌고, 저는 두 눈을 꼭 감았습니다. 하운이의 얼굴이 가까이 오는 것이 느껴졌고, 이내 젤리처럼 말랑말랑한 입술이 닿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화들짝 놀라며 입술을 떼어냈지요. 재빨리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혀를 끌끌 차며 저희들을 노려보고 있는 두 사람이 보입니다. 그들은 19살이 되는 해에 컴백하여 요새 한 창 절정으로 잘나가고 있는 아이돌그룹의 대표주자 강태일과 주한비 였습니다. “나참, 공공장소에서는 좀 삼가합시다!” “뭐야, 저거는 또 왜 왔어.” 그들은 각자 못마땅한 듯 한마디 씩 툭툭 내뱉었습니다. 그런데 주한비의 말은 그렇다쳐도, 여전히 까칠한 강태일의 말이 심히 두 귀에 거슬립니다. 이내 다혈질인 저 순이는 발끈하며 강태일에게 소리쳤지요. “뭐, 저거?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보자기로 보이냐. 너 나한테 한번 죽어볼래!” “그럴 자신 있으면 해보시지. 그리고 때 지난 말장난은 집어치워.” “너, 너 내가 못할 줄 알아!” 저의 말에 강태일은 콧방귀를 뀝니다. 그 모습에 성이 난 저는 씩씩거리며 태일이를 노려보았지요. 그 때 강태일의 옆에 있던 주한비가 얄밉게 웃으며 제게 말했습니다. “누님, 누님이 태일이 주먹으로 한대만 쳐도 누님은 태일이 팬들한테 사지가 찢겨버릴 것 같은데요?” 순간 흠칫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강태일과 주한비는 서로 마주보며 소리내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계속해 놀립니다. 입술이 오리주둥이가 될만큼 점점 튀어나오고 있을 때 하운이가 낮은 음성으로 그들을 향해 말합니다. “너희들 아직 고생을 덜했나 보구나.” 그 말에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 옆에 있던 최하운을 바라보았고, 최하운은 그들을 향해 섬뜩한 웃음을 짓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주한비는 비굴모드로 돌아서며 달려와 하운이의 어깨를 주무릅니다. 자존심이 강한 강태일은 고개를 휙 돌리고 있었지만, 동요하는 것이 뻔히 눈에 보였습니다. 그 모습에 저는 픽 웃음을 터트렸지요. “아이, 형님도!” “누가 네 형님이야.” “형님, 서린이를 봐서라도 제발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저 이번에 녹음하면서 살이 3kg나 쪽 빠졌다구요! 네?” 아참, 한비는 하운이의 동생이자 추억 속의 교생시절 부반장이었던 서린이와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그의 짝사랑이 드디어 1년 전 서린이의 마음에 골인을 하였지요. 정말 한비를 보면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렇게 두 사람은 팬들 몰래 사랑을 키워 나가는 중입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기쁘고 대견스럽니다. 앞으로도 예쁜 사랑을 무럭무럭 우리 하이커플과 함께 키워나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아옹다옹하는 세 사람을 보며 웃고 있을 때, 갑자기 번뜩 한 아이디어가 뇌리속에 스칩니다. “아!” 갑자기 내가 소리지르자 세 사람은 동시에 동그랗게 눈을 만들며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눈을 몇 차례 끔벅이다 방긋 미소지으며 하운이를 향해 말했습니다. “엄마 선물 못 정했지?” “어? 어.” “화장품을 사드려봤자 먼지만 쌓게 하고, 예쁜 옷을 사드려봤자 장롱속에 처박아 두었고, 귀한 보약을 지어드려 봤자 소들한테 먹이고.” 내 말에 하운이는 동조하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끄덕입니다. 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습니다. “엄마의 행복은 농사가 잘 되는 거야. 그런데 요새 매일 일손이 부족하다고 그러더라고.” “그러니까……” “생일 날 가서 열심히 일을 도와드리면 되지! 우리끼리로는 역부족이니까 몇몇의 일꾼들을 더 데려가고!” 나의 제안에 하운이는 좋다는 듯 손바닥을 치며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곧 반짝이는 우리 두 사람의 눈이 슬금슬금 피하고 있는 강태일과 주한비를 향했고,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재빨리 도망치려 합니다. 하지만 한 발 앞선 우리들의 손에 그들은 꼼짝없이 붙잡혀 버렸지요. 사악한 나의 웃음소리가 녹음실 안을 가득 메웠습니다. 싱긋.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드디어 엄마의 생일 날이 되었고, 이른 아침 우리는 일찍 함께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여전히 폼생폼사인 나의 동생 꽃도혁, 선물용(?)으로 따라나선 강태일과 주한비, 엄마에게 인사드리고 싶다는 내 미래의 아가씨 서린이. 그리고 저와 하운이 이렇게 여섯사람이 엄마가 계시는 전라도로 향하는 중입니다. 엄마의 생일을 축복하듯 아침 햇살이 찬란했고, 오늘 하루 날씨가 화창할 듯 하늘이 무척 푸르고 맑았습니다. 아직도 피곤이 가시지 않은 것인지 제 어깨에 기댄 채 깊이 잠이 든 하운이를 보며 저는 살포시 미소지으며 그의 손을 꽉 잡았습니다. 4시간 정도를 걸쳐 드디어 엄마가 지내고 계시는 시골에 도착하게 되었고, 엄마는 맨발로 뛰어나오며 우리들을 반가히 맞이해주었습니다. 특히나 강태일을 무척이나 반겼지요. 엄마는 투박한 손으로 강태일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습니다. “아이고야, 실제로 보니 더욱 예쁘고만!” 요새 추책맞게 아이돌 사랑에 빠지신 엄마가 강태일을 보며 계속해 탄성을 내질렀고, 그러한 엄마의 행동에 강태일은 다소 부담스러운 듯 몸이 석고상마냥 굳어져 있습니다. “김순이 저년 돼지만도 못한 면상으로 이런 놈을 어찌 꼬셨을꼬.” 그 말에 저는 찌릿 엄마를 노려보았습니다. 귀한 딸을 돼지만도 못한 면상으로 표현한 것도 그랬지만 강태일과 교제했던 사실을 꺼내다니! 물론은 우리에게서 소중하고 좋은 추억이었지만 대놓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엔 다소 꺼려지는 화제였지요. 예전의 일을 상기시키자 강태일은 조금 불편한 기색이었고, 최하운 또한 썩 좋지 않은 얼굴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보게 된 강태일의 모습에 취한 엄마는 그러한 내 시선을 단박에 무시하며 계속해서 강태일을 주물럭(?)거렸습니다. 그 모습에 저는 픽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지요. 정말로 못말리는 우리 엄마는 이 세상에서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최고중의 최고입니다. “내가 도혁이 저 시키같은 사내놈 말고 둘째 딸을 낳았으면 사위삼았을 텐디.” “엄마, 그 말의 뉘앙스는 뭐야?” “철 없는 네 놈 한탄이다! 그나저나 네 머리색깔이 그게 뭐여!” 엄마의 시선이 도혁이를 향했고, 그 틈에 강태일은 재빨리 빠져나와 참고 있던 한 숨을 내쉬었습니다. 저는 위로 삼아 태일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고, 이내 저의 손목은 저를 가자미눈으로 노려보는 하운이에게 붙잡힙니다. 어찌하였든 그렇게 반기는 것은 단 5분이었고, 엄마는 재빨리 우리 앞에 몸빼바지를 집어던지며 말했습니다. “시방 바쁘니께 어여 갈아입어.” 자신들의 앞에 놓여진 화려한 색감과 모양의 몸빼바지를 보고서 그들의 얼굴은 일제히 굳어집니다. 옷에 관대한 그이지만 몸빠바지는 죽어도 입을 수 없겠다는 최하운과 명색히 아이돌로써 이러한 옷을 절대 입을 수 없다는 강태일과 주한비. 특히나 패션에 죽고 사는 김도혁은 모양빠지게 절대 입을 수 없다고 펄쩍펄쩍 뛰었지요. 그들이 입지 않고 그렇게 못마땅한 얼굴을 짓고 있자, 엄마는 단 한번에 눈빛으로 그들을 제압합니다. 엄마의 불꽃튀는 강렬한 시선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울며겨자먹기로 옷을 갈아 입기 위해 방안으로 들어갑니다. 잠시 후, 나오지 않으려 하는 그들을 엄마가 우렁찬 목소리로 불러댔고 하는 수없이 그들은 한 명씩 어기적어기적 방에서 나왔습니다. 몸빼바지에 후줄근한 티를 입은 그들의 모습은 과연 대박이었습니다. 이내 서린이와 저는 서로 붙잡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지요. “푸하하! 우리는 잘나가는 아이돌 몸빼남이에요!” “언니, 어떡해요. 특히나 하운이 오빠는 짧아서 거의 칠부가 됐어요.” 배를 잡고 웃는 우리들의 모습에 녀석들은 얼굴을 잔뜩 찡그립니다. 특히나 김도혁은 자신의 치욕이라며 금방 실신할 지경이었지요. 어찌하였든 강태일과 주한비의 모습을 인터넷에 올리면 이 들 없이 죽고 못 산다는 소녀팬들에게서 무척 폭발적인 반응을 얻을 것 같습니다. 쉬이 웃음을 그치지 못하고 배아파 하고 있을 때, 엄마가 내 뒷통수를 퍽 치며 말합니다. “이 년아, 그만 쳐웃어! 아그들 무안하게!” “엄마, 그러면서 피식피식 웃고 있는 건 뭔데.” “입이 경련이 일어나서 그려!” 그 말에 저는 또 한번 자지러지며 웃었습니다. 이 상황이 무척 불만족 스러운 듯 인상을 쓰고 있던 녀석들도 웃기 시작했지요. 어찌하였든 몸빼를 입어도 멋진 녀석들은 내 소중한 인연들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 바탕 크게 웃음잔치를 치르고서 일을 하기 위하여 들판으로 향했습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새참 먹고 하세요!” 뒤늦은 오후 서린이와 함께 직접 준비한 새참을 가지고 왔습니다. 각자 열심히 논에서 일을 하던 녀석들은 배가 무척 고팠던 것인지 환호성을 내질렀습니다. 그리고는 재빨리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논 속에서 빠져나왔지요. 오늘은 절대 쉬라고 하였기에 녀석들을 옆에서 코치하던 엄마와 주변에 계시던 어르신들도 재빨리 불러 보았습니다. 우리가 정성스레 준비한 새참 음식들을 펼쳐놓았고, 모두 군소리 없이 맛있게 먹어주었지요. “갸가 순이 남자친구인겨?” 어렸을 적 나를 예뻐해주시고 매일 사탕을 주시던 할아버지께서 하운이를 가리키며 물었고, 저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음식을 먹던 하운이는 고개를 꾸벅이며 할아버지께 간단히 인사를 드렸지요.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들이킵니다. 그리고 탄성을 내지르며 저에게 말하셨습니다. “이제 벌써 순이도 시집갈 나이가 됐구만.” “에이, 시집은 무슨. 아직은 일러요.” 수줍어 하며 내가 말하자 엄마는 웃음을 띠우며 큰 소리로 말합니다. “후딱 결혼식 끝내버렸으면 좋겄다.” 엄마가 은근히 속마음을 내비췄고, 일제히 시선은 하운이에게로 향합니다. 하운이는 묵묵히 음식을 먹으며 그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분 아무 동요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도 할 수 있다면 일찍 결혼을 치루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오래전부터 생겼던 마음이었지요. 더군다나 교생시절 내게 많은 도움을 주셨던 추선생님과 백선생님 남몰래 교제를 하여 올해 결혼한 모습을 본 후로는 그 마음이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정말 웨딩드레스를 입은 백선생님을 보고 무척 부러웠지요. 조금 이른 감은 있긴 하지만 빨리 최하운을 내 남자로 확실히 도장 찍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 창 전성기를 맞이 하고 있는 하운이의 마음은 어떠한 지 모르니 쉽게 ‘우리 결혼하자’라고 말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너무 조급한 것일까요. 어찌하였든 저는 기다려 보렵니다. 노처녀가 되기 전에는 할 수 있겠지요. 작게 한 숨을 내 쉬며 김치를 찢어 먹고 있을 때, 갑자기 엄마가 하운이에게 말했습니다. “운서방, 아는 딱 둘만 낳아서 잘 기르면 돼.” 엄마의 말에 하운이는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낳는데 까지 낳을건데요.” 하운이의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갑작스런 정적에 하운이가 의아한 얼굴로 우리들을 훑어보았고, 이내 서로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한 마음이 되어 웃음을 크게 터트렸지요. 영문을 모르는 하운이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힙니다. 깔깔깔 소리내어 웃던 엄마가 하운이의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합니다. “그려, 우리 운서방이 허리힘 하나 끝내주게 생겼지.” 그 말에 저는 매운고추를 먹은 듯 얼굴이 화끈화끈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이내 사태를 파악한 하운이의 얼굴도 덩달아 붉어집니다. 탐스럽게 잘 익은 사과 두 개를 보며 어르신들은 갖은 짖굳은 말들을 내뱉었지요. 그렇게 유쾌하고도 즐거운 시간은 흘러갔고, 어느새 날이 저물게 되었습니다. 그 어느 때 보다 혼자 시골에 쓸쓸히 계신 엄마를 즐겁게 해드린 보람찬 생일 날이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엄마가 100번째 생일까지 오래토록 건강하게 사시길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서울에 올라오자 마자 하운이는 곧바로 촬영 때문에 모 방송국으로 향했습니다. 하운이는 이렇게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포유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다 얼굴과 나이를 공개하면서 사람들은 최하운에게 뜨거운 관심을 보냈었습니다. 그 이후, 뛰어난 실력, 잘빠진 얼굴과 몸매를 가진 최하운의 명성은 국내에서 자자해졌고, 연예인 못지 않게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지요. 또한 몇 만명 정도의 개인 팬카페까지 소지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최하운이 오늘 처음으로 한 생방송 토크쇼에 출연을 합니다. 얼굴팔린다고 자신에게 들어오는 출연제의들을 모조리 거절하였는데, 이 토크쇼 프로그램의 담당인 홍PD님의 끈질긴 근성때문에 최하운은 백기를 들었지요.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어찌하였든 은근히 방송에 나가기를 바랬던 저는 그저 기쁠 따름이에요. 그리고 저는 곧 시작하는 방송을 녹화하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습니다. 최하운 인생의 최초 방송출연! 말 하는 게 서툰 녀석이 부디 방송 말아먹지 말고 무사히 끝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요새 연기자로서 개인 활동을 하고 있는 신유라의 화장품 CF가 끝나자 생방송 토크쇼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저는 곧바로 빨간색 녹화버튼을 누르고서 친구 은경이와 함께 사온 과자를 우적우적 씹으며 텔레비전 모니터에 시선을 박았지요. 곧 MC들의 재미난 오프닝이 끝나고 짧막한 소개와 함께 최하운이 등장하였습니다. 방송에 나가기 전 김도혁이 꾸며주어서 그런 것인지 화면으로 보이는 최하운의 모습은 오늘따라 더욱 멋있었습니다. 정말 누구 남자 아니랄까봐 이리 잘난 것인지. 괜스레 흐뭇해지는 순이입니다. 캬- 탄성을 내지르는 은경이의 머리를 툭 때리며 저는 반짝반짝이는 눈으로 토크쇼를 시청하기 위해 볼륨을 더욱 높였습니다. 다행히도 20분 째 하운이는 MC들의 질문 공격을 잘 받아내고 있습니다. 표정히 다소 시큰둥한 것만 빼면요. 어쨌든 긴장할 법도 한데 하운이는 자연스럽게 방송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지만 가끔씩 웃기는 말도 내뱉어주고요. 아무튼 자랑스럽다, 나의 럭키 최하운! ‘음악’에 관해서 계속 말하다 ‘화제’가 갑작스레 사랑으로 넘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내 이야기도 나오게 됐지요. 이거 왠지 전국에 공식적으로 최하운과 커플임을 알리는 것 같아 쑥스럽습니다. 발그레해진 얼굴로 두 귀를 활짤 여는데, 갑자기 남자 MC가 하운에게 불쑥 묻습니다. [그 분과 결혼하실 생각이에요?] MC의 물음에 하운이는 잠시 입을 다물며 생각에 빠집니다. 이거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됩니다. 침을 꼴깍 삼키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 갑자기 최하운이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립니다. 하운이는 한 참 동안 카메라를 빤히 응시하였고, MC들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찰나 하운이의 입술이 먼저 열립니다. [야, 결혼할래?] 쿵쿵쿵. 심장이 팔딱팔딱 속력을 내며 뛰기 시작합니다. 그 것은 나를 향한 말이었습니다. 줄곧 카메라를 응시했던 것도 나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뭐, 나랑 무조건 해야되지만.] 그리고는 최하운은 피식 웃습니다. 옆에서 이를 보고 있던 은경이가 호들갑을 떨며 멍한 얼굴로 화면을 보고 있는 내 어깨를 툭툭 칩니다. “야야, 저게 프로포즈냐? 아무튼 최하운 저 놈은!” 그러면서 은경이는 나를 붙잡고 낄낄 웃습니다. MC들 역시 재미있다는 웃음을 터트립니다. 얼굴이 환끈화끈 매운고추를 먹은 듯 달아오릅니다. 나의 목소리가 그에게 들릴 수 있다면 당장 ‘오케이’라고 소리치고 싶었었어요. [에이,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결혼까지 생각지 않을지도 모르고.] 남자MC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짖굳은 말을 내뱉었습니다. 순간 하운이의 얼굴이 굳어집니다. 저, 양반이 큰일날 소리를! 알지도 못하는 내 마음을 멋대로 말하다니! 텔레비전 속의 MC가 얄밉던 나는 손으로 화면을 툭툭쳤습니다. 그 때 하운이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김순이 너 지금 보고 있지.] “…….” [너 빨리 일로 뛰어와.] 뭐? 저는 깜짝 놀란 얼굴로 텔레비전 속 하운이를 바라보았습니다. MC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그 주변에 있던 방청객들 또한 웅성거립니다. 하운이는 여전히 화면을 뚫어버릴 기세로 카메라를, 나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뭐야? 저 자식~ 방송 물 먹일일 있나.” 은경이가 경악하며 말했고, 잠시 동안 멍하니 하운이를 바라보던 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는 재빨리 방으로 뛰어가 대충 옷을 주워입고서 가방을 챙기고 빠르게 나왔지요. 곧장 현관으로 향하려는 제게 은경이가 놀란 얼굴로 물었습니다. “너 진짜 가게?” “우리 운자기가 오라는 데 갈 수 밖에.” 헤벌쭉 웃으며 말하자 은경이는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제게 쿠션을 집어 던졌습니다. “솔로의 가슴에 불좀 작작 질러라. 꼴보기 싫으니까 빨리 꺼져! 가!” “갔다 올게!” 은경이를 향해 방긋 웃어주고선 현관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습니다. 뛸 수 있도록 운동화를 신고서, 곧장 집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달려갑니다. * * * * * ♡허니서클(Honeysuckle) 다행히도 집에서 방송국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는 거리였습니다. 뛰어서 가는 건 무리인 것 같아 택시를 탔고, 다행히 차가 밀리지 않은 덕분에 빨리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부로 외부인이 방송국에 침입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방송국 앞에 서서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그래도 어디 한 번 해보자는 생각에 저는 애써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서 당당한 모습으로 방송국에 침입했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를 마치 기다린 듯 어떤 한 여자분이 반갑게 맞이해주며 저를 촬영장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친절한 여자분을 따라 토크쇼 촬영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 스튜디오로 슬그머니 들어가게 되었지요. 제가 들어서자 마자 일제히 모든 시선이 저를 향합니다. 갑작스런 스포트라이트에 순간 당황한 저는 몸이 경직됐지요. 그 때 저번 하운이를 보러가다 만났던 홍PD님이 씩 웃으며 주먹쥔 속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립니다. 그 순간 방송국 스튜디오 안이 푸른빛으로 조금 어두워지며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흐릅니다. 그 피아노 선율에 따라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한 쪽에 있던 검정색 피아노 앞에 피아노를 치고 있는 하운이가 눈에 들어옵니다. 힐끗 나를 본 하운이는 이내 피아노에 붙어 있던 마이크에 입술을 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기 시작합니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너를 꿈꿔 너와 나 아이들 행복한 가족의 우리를 꿈꿔 이제 너와 함께 이 꿈을 이룰 때가 됐어 나와 함께 하나가 되어 그 길을 걸어가지 않을래 I promise you 약속해 죽는 날 까지 너와 함께 하기로 I swear 맹세해 지금껏 그러해 왔듯 너 하나만을 사랑하기로 I love you 사랑해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네게 외칠 말이야 네게 전하는 내 진심된 고백, 간절한 마음. 들리니, 보이니. 나 너에게 가슴으로 말해 Will you marry me 나와 결혼해 줄래 - Will You Marry Me <최하운 작사. 작곡> 노래가 끝이 나고 잠시 스튜디오 안에는 정적이 흘렀습니다. 모두들 한 마음으로, 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저는 가슴이 벅차오른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입을 여는 순간 눈물이 먼저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뜨거워지는 눈시울로 하운이를 바라보는데, 하운이가 천천히 일어서며 저를 향해 말합니다. “대충 때되면 날 잡아서 결혼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프러포즈는 평생가는 거라고 신경써서 하라더라.”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냅니다. 그것은 자두색의 작은 케이스였고, 곧 그 케이스의 뚜껑이 열리며 조명에 반짝이는 예쁜 반지가 제 눈에 보입니다. “이 정도면 됐냐?” 녀석이 나를 살짝 웃음짓습니다. 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힘껏 끄덕였고 이내 그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요. 점차 걸음에는 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저는 폴짝 뛰어오르며 녀석에게 안겼습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듣을수 있도록 큰 소리로 소리쳐 답했습니다. “무조건 오케이!” 어렸을 때 부터 저는 특별한 사랑을 꿈꿔 왔었고, 저는 지금 그 사랑을 이루었습니다. 최하운과 사랑을 깨닫고 이루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저와 하운이에게는 서로를 더욱 아끼고 소중히 생각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저 순이의 사랑을 지켜보시고 응원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앞으로도 그와 함께할 남은 시간 평생 사랑하고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언제나 저희를 기억해주시고,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Honeysuckle The End -♡ 《08.05.24 - 08.10.20 연재》 끝 미흡한 소설임에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